
우리의 만남은 우연일지라도,
서로를 좋아하게 된 것은 운명이겠지.
본 글은 ‘아이들의 권 선생님’의 마지막화 시점으로부터 8~9년 뒤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등장하는 캐릭터의 서사는 본인의 개인적인 해석과 날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에 민감하신 분들은 아래의 글 열람을 지양해주세요.
그건 거대한 돌고래였다. 그러니까, 돌고래라고 하는 건 비유의 표현이지만 동시에 비유의 표현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동물원에서 본 돌고래는 갑갑해 보였다. 아니, ‘갑갑하겠다.’라고 생각했다. 어린 나에게는 넓은 우리 안에 있었지만, 돌고래에게 그 안은 좁기만 할 테니까. 그리고, 지금 상황이 나에게는 그랬다. 마치 좁은 우리 안에 갇힌 돌고래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한 적 있다. ‘저기에 갇힌 돌고래는 언제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라고. 기한이 정해지지 않은 상자에 담긴 그들은 언제가 되어야,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최근에는, 동물 보호라는 이름 아래 다시 자유를 되찾기 시작하는 것 같지만, 정말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 좁은 공간에서 살며 밤하늘의 별처럼 쏟아지는 낯선 시선을 받던 일상에서 벗어나, 푸른 하늘과 검푸른 바다로 돌아갈 수 있을까.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다시 그 좁은 공간을 그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바라던 것을 손에 얻게 되더라도, 다시 이전을 원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자 마음이 축축하게 젖는 것을 느꼈다. 마음을 가득 적신 그 감정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연민이나 안쓰러움이었을까. 어쩌면 분노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공감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돌고래를 닮아 있었다. 원하던 말을 들었으나, 그 말의 끝이 무서워서 밀어냈다. 계속 이 상태로 남는 것이 두려웠는데, 관계를 더 나아가려니 그것이 더 두려워졌다. 그래서 도망쳤다. 그건 진심이 아니었다. 나는 바다로 가고 싶어 하면서, 우리를 벗어나는 건 두려운 돌고래였다.
그들의 관계는 소꿉친구라고 칭하기는 조금 어려웠다. 그러나, 단순하게 아는 사이라고 하기는 어딘가 애매한 부분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소꿉친구라고 하기에 어린 시절부터, 오랜 시간 알고 지낸 것은 아니었고 얼굴만 아는 사이라고 하기에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시간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가 그곳으로 간 것은 특별할 것 없는 계기였다. 태어났을 무렵부터 앓아왔던 알레르기가 지겨워서 유독 공기가 맑고 깨끗하던, 자신의 할머니가 살고 있던 곳으로 간 것이다. 우연과 우연이 겹쳐 가게 된 곳에서, 그는 새로운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작은 운동장, 퀴퀴한 먼지 냄새가 스며든 것만 같은 복도, 몇 개의 책상만 놓인 교실, 전교생이 열 명도 되지 않는 학교. 이따금 삐걱거리는 소리가 울리는 나무 바닥. 낯설고 새로운 환경. 차가운 공기가 맴돌던 복도의 끝에 있던 작은 교실 하나. 그곳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눈동자. 그것이 시루와의 첫 만남이라고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육학년, 아직 어리기만 한 나이였다.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고,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바로 가까운 사이가 된 것은 아니었다. 시루를 포함하여 그곳에 있던 아이들은 외부인을 경계했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물론, 당시의 그도 외부인이었다. 그들이 친해진 것은, 땅으로 떨어진 벚꽃 위로 무더운 공기가 내려앉을 즈음이었다. 그가 전학 온 지, 반년만의 일이었다. 그렇게 겨울이 오고,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꽤 자주 학교에 놀러 갔고 함께 시간을 보냈다. 졸업했으나 변한 것은 없었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들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나이 차도 있었으나, 그들 사이에 있어서 그것은 두꺼운 벽만큼의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그가 주로 함께 놀았던 사람은 그나마 나이가 비슷하고 ―비슷하다고 했으나, 세 살 차이는 비슷하다는 말과 거리가 있었다. 그런 것들을 신경 쓰지 않고 놀 만큼 그들은 친해진 것이었다. 처음 그가 전학 왔을 때를 떠올리면, 놀라운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던 산이었다. 두 사람은 자주 장난치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고 운동장에서 공을 차며 놀았다. 노을이 운동장 위로 드리워지고 산의 유모가 찾으러 올 때까지. 그들은 시간 가는 것을 잊고 놀고는 했다. 어쩌다가 크게 사고 칠 때마다 시루에게 혼나는 것은 일상이 되어 있었다. 물론, 그가 산하고만 논 것은 아니었다. 책을 읽을 때는 관심사가 가장 잘 통하는 시루와 함께였다. 운동장 구석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 그의 곁에는 언제나 서리가 있었다. 담과 솜과는 자주 하교를 하며 놀아주고는 했었다. 이렇게 그는 조금씩, 그러나 착실하게 그곳의 사람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러나, 평온한 일상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조용하던 일상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이내 무너졌다.
그가 중학교 일학년이던 해의 겨울, 언젠가 다시 만나자는 기약 없는 약속을 했다. 다시 보자는 말을 끝으로 그들은 헤어져야 했다. 어린 나이에 한 약속이었으나, 그건 그 나름으로 그의 미련이 되어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있었다. 시간은 흘렀고, 그 약속은 점점 빛바래고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었다. 수많은 계절이 지나가고, 셀 수 없는 시간이 흘렀다. 대학교 삼학년의 종강을 맞이했으나, 그 약속은 그에게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었다. 나는, 아직 열세 살이었을 때에 멈춘 것 같아. 그는 자신의 오랜 친구들에게 종종 자조적으로 말했다. 제대로 된 사진 한 장도 없고, 연락처도 없으니 그런 약속은 말이 안 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조금의 기대를 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그때의 기억과 추억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그저 몸만 큰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
추운 겨울이었다.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바람이 불었고, 눈이 꽃잎처럼 흩날리는 날이었다. 이른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어느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추운 줄 알았다면, 도서관에서 조금 일찍 나오는 건데. 그런 생각을 툴툴거리면서 발걸음을 부지런히 옮기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공원 앞을 지나고 있을 무렵이었다. 조용한 공원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익숙한 이름, 매일 들었던 목소리―물론, 기억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으나 모르고 지나칠 정도로 변한 것은 아니었다.―, 저 멀리 보이는 눈에 익은 모습. 한참동안,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서 있던 그의 머릿속에 작은 이름이 일렁였다. 어쩌면, 어쩌면. 그런 생각의 일렁임의 끝에, 그는 천천히 그리움의 근원지로 가고 있었다. 거센 바람에 어지럽게 흩날리던 눈이 차츰 멎어갈 무렵, 단 한 걸음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그들은 다시 만났다. 팔 년만이었다.
처음은 단순히 친한 친구였다. 변한 것 없이 무뚝뚝했지만, 이따금 건네는 실없는 장난에는 웃음을 터트렸으니까. 그는 숨어 있는 자상함이 시루답다고 생각했다. 말로 하지 않아도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채고 도와줄 때는 그동안의 길었던 공백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좋았고, 또 편안했다. 그러는 동안, 편안함 속에 다른 감정이 함께 깃들기 시작한 것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실습을 나갔을 무렵에, 가장 많이 주고받은 것 역시 그와의 연락이었다. 평범한 척을 하고 있으나 자상함이 어린 문장이 좋아서, 힘든 점도 녹아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때, 마음에 꽃이 피는 것을 알았다면… . 그런 문장을 써보지만, 이내 지웠다.
흔들거리는 감정을 알게 된 것은 여름이었다. 무더운 여름 공기 속에 뒤섞여 그를 다른 의미로 바라보게 된 것을 깨달았다. 아, 나는 너를 좋아하는구나. 그것은 꽤 담백한 자각이었다. 드라마틱한 깨달음의 순간은 없었고, 영화의 장면 같은 모습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하게 굴러가는 일상 속 찰나였을 뿐이었다. 언제부터. 그 시작을 찾으려면 기억이 흐렸다. 정확한 것은,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었다. 그가 기억하기에 어린 시절에는, 그리고 다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에는 그저, 정말로 친한 사이 그뿐이었으니까.
먼저 고백할 용기 같은 것은 없었다. 커지는 감정에 비례하는 만큼 용기는 점점 작아졌다. 일 학기 종강이 다가왔을 무렵, 그의 용기는 이미 땅콩보다 작아져 있었다. 고작 학년 차이가 뭐라고. 그런 말을 자신에게 툭툭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비겁한 자신에게 보내는 합리화였다. 고백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자신의 미래가 보장된 것이 없다고 느꼈다. 졸업하면, 언제 합격할지 모르는 시험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마냥 기다려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어른을 동경하는 것이 아닐까. 그는 그런 생각을 했다. 같은 이십 대 초반이라고 하나, 그 역시 대학에 막 입학했을 무렵에는 고학년 선배들이 마냥 멋있어 보였으니까. 그러던 차였다. 그가 고백을 받은 것은.
다시 만난 것은 팔 년만이었다. 소중한 친구에게 받았다며 늘 들고 다니던 보라색 토끼 인형. 부적이라며 가방에 걸고 다니던 열쇠고리.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 생각에 빠지면 차가워 보이는 얼굴. 매일 듣던 밝은 목소리. 올곧은 눈동자. 그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눈이 많이 내리던, 고등학교 졸업을 하던 날이었다. 정말 우연처럼, 운명처럼 다시 만났다.
원래부터 친했으니까 스스럼없는 스킨십이 아무렇지 않았다.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고, 적당히 웃음이 많고, 그러면서도 자기 일에는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까지. 원래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모두에게 다정하고 친절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면 무서워 보이는 옆얼굴. 거짓말하면 시선을 피하는 것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상대의 눈을 바라보는 것까지. 전부 그다웠다. 물론, 키가 크고 이전보다 어른스러워졌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함께 섞여 들어온 다른 감정을 눈치챌 수 없었다.
일주일 중 칠일. 혹은 일주일 중 육일. 거의 매일 함께했다. 이십사 시간 중 절반 혹은 그 이상을 함께 공유했을 정도였다. 아직 서늘한 겨울 공기가 남아있을 무렵부터 그들의 일상에는 자연스럽게 서로가 있었다. 그런 장면조차 구년 전과 다를 것이 없어서 그는 오랜 시간의 공백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비가 실습을 나가느라 학교에 오지 않았을 무렵도, 함께였다. 오늘은 어떤 하루였다. 일기 마지막 줄에 적을 법한 말을 주고받으며 꾸준히 연락했다. 무엇으로 걱정에 잠겨있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가장 깊숙한 생각에서 피어나는 문장을 주고받는 것은, 그에게 부담이나 싫은 일로 여겨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대충 흘겨보고 넘겼을 문장도 이비가 보내는 것만큼은 그다지 싫지 않았다. 그의 연락을 기다리는 순간의 끝에 겨우 깨달았다. 나는 저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그 마음의 크기가 깊다는 것을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더는 이전처럼 친하기만 할 뿐인 사이로 대할 수 없다는 생각과 큰 변화를 이끌지 말고 지금처럼 행동하고 생각하자는 다짐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아예 모르는 척을 할까. 그 생각도 함께였다. 지금도 그 문장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종종 그를 괴롭혔다.
턱 끝까지 차오른 고백을 망설인 것은 선명하고 확실한 단 한 가지 때문이었다. 만약 그가 나를 밀어낸다면. 그런 가정을 하는 것만으로 입 안이 아팠다. 만나고 싶어도 연락조차 할 수 없었는데, 연락을 할 수 있음에도 만날 수 없다면. 그것은 분명한 관계의 재앙이 될 터였다. 그 때문에 고백하겠다고 다짐한 것도 이 생각 앞에서는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그것을 수십 번 반복하다 보니, 나중에는 다짐과 걱정이 뒤엉켜 망치질했다. 그것들은 그를 재촉하기에 충분했다.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단순한 동경을 착각한 것은 아닐까. 그동안 만났던 수많은 사람 중, 그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연상은 이비 뿐이었으니까. 어쩌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향한 동경일지도 모른다. 혹은 오랜만에 만나서 느끼는 반가움을 다른 것으로 잘못 깨달았거나. 자신의 감정에 수많은 질문을 던졌다. 섣부른 고백이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떠올렸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느낄 수 없던 것―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웃는 얼굴을 마주할 때 느껴지던 따뜻함,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느껴지는 자상함, 건네는 말에서 느껴지는 가을바람 같은 것―들을 느낄 때마다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이 감정은 동경이나 반가움 따위가 아님을. 그가 자신을 밀어내면 어떡하나 싶으면서 동시에 억지로 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였다. 덥고 무거운, 습한 여름 바람에 이끌려서 고백하게 된 것은.
나뭇잎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햇볕이 따가웠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은 더위를 식히는데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목을 타고 흐르는 것이 땀인지 긴장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시루는 자신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것들을 지워내려 했으나 쉽게 되지 않았다. 온갖 잡념이 작게 부서져 흩어진 것은 이비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였다.
“… 시루야. 괜찮아?”
혹시 어디 아파? 뒤따라오는 말에 그는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혹시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챈 걸까. 그런 생각이 일렁였으나, 오래 가지는 못했다. 더위에 녹아내리는 생각을 비집고 오랜 시간 입가에 맴돌던 문장이 툭 내던져졌다.
“누나야.”
“… 응.”
“좋아한다.”
“….”
침묵이 그 어떤 것보다 무거웠다.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그는 천천히 쌓아 올린 연심을 정리할 준비를 했다. 오래도록 참았다가 내뱉는 숨이 무거웠다. 거절의 말보다 무거운 것은 듣지 않은 말을 멋대로 상상하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체감상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굳게 닫힌 입이 천천히 열렸다. 얼마의 시간이 걸렸는지 알 수 없으나, 최소한 그에게는 억겁처럼 느껴졌다. 시루야. 살짝 떨리는 목소리가 다른 이도 아닌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응, 내 듣고 있다.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으나, 문장의 끝은 흔들렸다.
“시루야. 나는… 모르겠어.”
좋은지 싫은지를 선택하라고 하면 정말 좋아해. 하지만…. 단정하던 문장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울음 섞인 목소리를 가다듬던 이비가 다시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전보다 더 축축해진 소리였다. 시루야. 그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좋았다. 매일 들었던, 그리고 듣고 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좋아하게 된 목소리. 수년 전과 같은 색을 띠고 있었다. 느린 속도로 그를 주시하던 시선이 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어지는 목소리는 메말라 있었다.
“… 미안해.”
그 말에 시루가 할 수 있는 말은 안타깝게도 거의 없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한순간 눈앞이 빙글 도는 것 같았다. 이것도 여름 탓인가. 그런 의문이 피어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미간 사이를 좁혔다. 작게 훌쩍이는 소리를 뒤로하며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 역시 끝이 조금 갈라져 있었다. 그러나, 그걸 이비가 눈치채지 않았으면 했다. … 괘않타. 잠깐 마실 것 좀 사 올게.
어디 가지 말고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시루가 급히 멀어진 뒤였다. 이비는 꾹꾹 누르고 있던 숨을 토해냈다. 그 속에는 참고 있던 눈물도 함께 있었다. 소리 없이 제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서둘러 손으로 훔쳐냈다. 밀어낸 건 난데. 그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며 얼굴을 문지르던 그가 깊은숨을 내뱉었다. 손 틈으로 비치는 햇볕이 따가웠다.
그토록 듣고 싶은 말을 들었음에도 밀어낸 것은 온전한 자기 욕심이었다. 그는, 자신들이 ‘우리’가 아니게 될 때, 자신을 억눌러야 하는 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무서웠다. 끝내, 존재와 기억이 어린 모든 것들에 대한 부정을 행하는 시간이 온다면 제대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에게도, 자신에게도. 약한 감정은 어지럽게 흔들리고, 상대의 말 한마디에 파도친다. 작은 바람에도 아스러질 듯한 감정은 그를 잡아먹을 것이다. 최후에는, 그가 사랑해 마지않던 존재마저 잡아먹을 것이었다. 시작의 출발선에 서 있음에도 마지막을 생각하는 것은 어린 시절에 겪은 이별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더는 이별을 그리는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어느 순간, 우연이라는 운명에 기댈 수 없는 때가 온다면,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파멸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지금보다 더 나아간 관계를 원하면서도 그는, 지금에 머물기를 택한 것이다.
이비는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시루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자신은 역시 그를 좋아한다. 아플 정도로 크게 뛰는 고동 소리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좋아하기 때문에 더욱, 그가 자신의 곁에 없을 순간이 무서워진다. 두 번의 이별과 기약 없는 재회는 그리고 싶지 않다. 이비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좋아하기 때문에 밀어낸다. 이 선택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었고,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숙제였다. 생각을 갈무리하며, 그는 아주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지내고 싶어. 시루는 제 귓가에 울리던 목소리를 여러 번 되짚었다. 미안하다고 몇 번씩 말하던 모습이 눈앞에 선명했다. 강한 햇볕 아래에서 차곡히 쌓여가던 더위를 녹이고자 그가 물을 사 온 직후였다. 내가 거절하고 이런 말 하는 건 모순이겠지만. 그렇게 시작하던 문장은 눅눅한 여름을 닮아있었다.
“고백을 밀어낸 죄책감에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거 아니야. 그리고, 당장 마음 정리하라고 하지 않을 거야. ‘왜 고백했지. 좋아하지 말걸.’ 그렇게 생각해도 돼. 미련 가져도 돼. 나라도 그럴 테니까. 이기적일지 모르지만, 네가 앞으로 가질 후회나 미련만큼, 나는 우리가 지금보다 못한 사이가 되는 게 무서워.”
이제 겨우 다시 만났는데, 다시 멀어지는 건 싫어. 그러니까… 미안해. 그 목소리는 한여름의 장마였다. 한순간 우수수 쏟아진 말은, 물기를 가득 머금고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후회하거나 미련을 가져도 괜찮다고 말했다. 앞으로의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이기심 때문이니 언제든 끊어내도 괜찮다고 수없이 말했다. 그날, 헤어지기 직전까지 눈을 올곧게 바라보며 강조했다. “내가 싫어지면 그때는 언제든지 날 밀어내”라고. 그렇게 말하던 그는 어쩌면 시루가 고백했음을 후회하거나 그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친구’라고 정의된 관계를 이어나간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고백에 대한 것도, 이비를 좋아하게 된 것도. 그 이후로 그는, 그저 앞으로도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할 뿐이었다. 내일도 다시 연락하고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 그 사실만으로 그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싫어지거나 아주 조금이라도 남은 정이 사라진다면 밀어내도 괜찮다고 했다. 그러나 시루는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앞서 언급했듯이 그는 이렇게라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다행이라고 느끼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지금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며칠 전부터 자신을 괴롭히던 두통을 잊고자 시루는 의자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강한 두통이 어지러운 선을 그리는 탓에 다시 의자에 기대었다. 눈을 감고 있으면 조금 나아질까 싶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내, 어지럽게 울리는 핸드폰 진동에 다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단정한 핸드폰 화면 위에 떠오른 것은 광고 문자였다. 찰나의 순간, 무슨 기대를 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이 스치자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순식간에 차분해진 마음을 가다듬으며 그는 핸드폰의 진동을 무음으로 바꿨다. 느린 속도로 다시 눈을 감은 그는 다소 거친 동작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헛된 기대에서 온 허무함 탓인지,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피곤함이 몰려오고 있었다.
다시 이전처럼 지내자고 먼저 말을 건네준 것은 무척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에게 있었다. 이미 고백을 한 뒤였다. 그러니 상대는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부담으로 여길지도 몰랐다. 이전처럼 다정하게 대하더라도 아직 마음이 남아, 그것이 미련이 되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할 터였다. ―물론 이비는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했다. 허나 남은 마음이 미련이 되어 집착하는 것은 상대를 향한 예의가 아니었다.―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그의 마음은 불씨가 아직 꺼지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고백할 생각은 없었다. 미련은 더더욱 없었다. 그러나 상대가 이것을 알 리가 없었다. 설령 안다고 해도, 그의 행동이나 말 하나가 부담이 되지 않는다는 법은 없었다. 그래서 시루는 약 이 주째 먼저 연락할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몇 번인가 먼저 연락이 온 적이 있었으나 그때는 전부 가벼운 말들 뿐이었고 얼굴을 직접 마주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괜찮았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그들―여기서 ‘그들’이라고 칭하는 것은 단순히 그와 이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수 년 전, 그들이 다녔던 학교의 몇 안 되는 전교생을 전부 지칭하는 말이다.―은 오늘 자신들의 스승에게 찾아가기로 했다. 어색한 상황은 오지 말아야 할 텐데. 또다시 깊은 두통이 그를 덮치려 밀려오고 있었다.
카페 안은 꽤 조용했으나 이비는 자신의 눈앞에 놓인 어지러운 활자에 집중할 수 없었다. 독서실에 있으면 다른 생각이 들까 봐 일부러 작은 소음이라도 있을 공간으로 온 건데 전혀 소용없었다. 이따금 들리는 카페 알바생의 “어서 오세요.”라든가 “주문 도와 드리겠습니다.” 따위의 말들만 적막한 카페를 울릴 뿐이었다. 차라리 누가 시끄럽게 통화라도 해줘. 진짜 그러면 짜증 날 것 같지만. 하지만… 아, 지금이라도 약속을 취소할까. 그런 생각이 슬금슬금 피어올랐다. 일주일 정도 흐르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는 정확히 일주일 전, 이번 주의 스케줄을 묻던 친한 동생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오랜만에 언니도 볼 수 있겠네!”라고 말하던 맑은소리에 다른 고민은 눈 녹듯 사라졌고, 가볍게 만날 수 있으리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말과 선택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 후회한다고 달라질 것이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미련이 남아도 괜찮다고 했다. 마음을 일찍 정리해도 괜찮다는 말도 했다. 지금부터의 관계는 오로지 자신의 이기심 때문이니 귀찮아지면 언제든 밀어도 상관없다고 강조했다. 그 말에 대해 철회는 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좋다. 인간은 누구든지 이기적인 법이니까. 좋아하는 사람에게 받은 고백을 밀어내면서, 앞으로도 이렇게 지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큰 모순인지 잘 안다. 제멋대로에 모순투성이고 자신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 여겨도 어쩔 수 없다. 연인이 되고 헤어진 뒤의 일도 상상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에 맞먹을 정도로 고백을 찼다고 해서 다시 이전처럼 지내지 못하는 것도 싫었다. 그리고 그도 분명 알겠다고 했을 터인데.
이 주 째 연락이 오지 않는다. 그전까지는 매일 했는데. 불안함이 큰 파도를 만든다. 몇 번인가 문자를 주고받은 적은 있지만, 전부 자신이 먼저 보낸 것뿐이었다. 그동안 바빴던 것일 수 있고, 자신이었어도 먼저 연락하는 건 어려웠을 수 있다. 그렇게 여기고 크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무엇을 하고 있든지 시선이 핸드폰으로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차라리 먼저 연락할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근 며칠간 그랬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걸어볼까. 그 생각은 모래사장에 쓴 낙서처럼 속절없이 사라졌다.
‘아무리 그래도…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그러는 건… 잔인한가.’
어쩌면 천천히 거리를 두기 위해 연락이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눈치 없는 척,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연락하는 건 그만하자. 들었던 핸드폰을 가만히 내려두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불안함은 커다란 파도를 만들기 시작했다. 눈앞에 놓인 빼곡한 문장이 마치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대로가 좋다느니, 이 이상의 관계가 되는 것은 무섭다느니 나름 겉모습이 괜찮은 문장을 늘어놓았지만, 사실은 핑계였다. 그런 말을 하고 밀어내고, 물러섰다고 해서 다정한 미래를 상상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무서운 것도 사실이다. 흘러내린 머리칼을 대충 넘기고 깊은숨을 내뱉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불안함과 두려움 그리고 약간의 후회가 뒤섞였다. 앞에 놓인 커피를 조금 마셨다. 어지럽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 고동이 차분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솔직하게 고하면 시루가 왜 자신을 좋아하는지 알 수 없었다. 특별히 잘난 것은 없는 자신이, 왜 좋은 걸까. 그런 고민을 하며 노트 위에 아무렇게나 선을 그렸다. 북북. 그어지는 선을 따라가 보지만 고민이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와서 답지를 보여준다면 좋을 텐데. 이 고민의 답은, 끝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가슴 속 답답한 응어리를 뱉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럼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누군가 그렇게 묻는다면 솔직하게 괜찮다고 할 자신은 없었다. 그러나 괜찮지 않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맞는지도 알 수 없었다. 고백을 먼저 밀어낸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그는 천천히 자신에 대한 마음을 정리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어느 순간, 그에게 더 빠지게 되었을 때 전할 방법도 없어진다. 지금의 관계가 무너져도 괜찮다고 다짐하게 되는 순간이면 그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주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더 빨리 완전한 이별이 맞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더는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우연이나 운명과 같은 그 어떤 것에도 기댈 수 없는 이별. 그 생각을 한순간, 이비는 제 목에서 튀어 나가려던 말을 겨우 삼켜야 했다. 만약 입으로 내뱉었다면, 생각보다 더 큰 소리로 튀어나왔으리라.
‘아… 그건 싫은데.’
다시 만나기 위해 몇 년의 시간을 기다렸는데, 다시 보지 못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입 안이 썼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하란 말인가. 앞으로 나아가고 싶으나 그럴 용기는 없고, 그 이후의 미래가 두려워지는데. 모순덩어리의 감정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가 바란 것은 그저, 다시 만나게 해달라는 것뿐이었는데. 그 이후가 이렇게 힘들고 고민의 연속이었다면 차라리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제 앞으로 해야 하는 건가. 그때 왜 밀어냈을까. 작은 후회가 일렁인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흔들리면 어떻게 하지. 어둡고 축축한 생각이 끊이지 않고 생겨났다. 생각의 끝에서 그는 지금의 상황과 자신의 감정을 차분히 정리하기로 했다. 노트를 펼치고, 볼펜을 손에 쥐었다. 지금부터 천천히 돌아보자. 지금 내 감정이 어떤지. 만약 이대로 있는 것이 싫다면,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생각하자. 그렇게 천천히 노트 위에 작은 선이 하나씩 생겨났다. 지금, 그의 시간은 이 주 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조금만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되레 불쾌한 꿈만 꾸고 일어났다. 최대한 잊었다고 생각한 것들이 생생하게 감각으로 떠오른다. 벌써 십 년이 가까워지는 일인데. 지금은 손목의 상처도 사라졌고,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손을 뻗어도 놀라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다. 여전히 놀랄 때가 있으나, 이전처럼 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기억은 때때로 평온한 일상에 깊게 스며들어 그를 놀라게 할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깊게 들이마셨던 숨을 천천히 내뱉으며, 천천히 침대 밖으로 빠져나왔다. 습관처럼 손목을 매만지며 그의 눈은 바쁘게 약을 찾았다. 만약 약을 한 번 더 먹고 그래도 나아지지 않는다면 오늘 약속은 못 갈 것 같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약간의 질타는 듣겠지만, 그들도 딱히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터였다. 벌써 수년 전의 일로 종종 악몽을 꾸고 힘들어한다는 것은, 특별히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는 일이니까. 특히, 그의 스승이라면 더욱 이해해 줄 일이었다. 그날, 아직 어려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던 자신에게 손을 건넨 장본인이니까.
흰 알약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천천히 넘겼다. 상비약이면 별 탈 없이 나을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감기 기운이 오래 가고 있었다. 내일은 꼭 병원에 가야겠다고 다짐하며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일어날 때는 지긋지긋한 두통이 조금 사라진 뒤였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무거운 잠에 녹아갔다.
아…. 짧은 감탄사였으나 꽤 묵직한 짜증이 서려 있었다. 꽤 오랜만에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방해하는 사람도 없이 깊게 잠들려던 차였다. 평소에는 무음으로 해두는 핸드폰이 어째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정확한 것은, 그는 이제 막 잠들려던 차에 잠에서 깼고 그것이 꽤 불쾌하다는 것이었다. 두통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오히려, 이전보다 심해졌다면 훨씬 심해진 상태였다. 그래도 이전에는 일어나서 움직이는 거라도 할 수 있었지. 지금은 전혀 그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겨우겨우 팔을 뻗어 손가락으로 핸드폰을 더듬거리며 찾는 것 이외에 다른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손가락 끝에 닿은 핸드폰을 천천히 끌고 와 액정을 확인하던 그는 여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전화가 와봤자 오랜 친구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가 다시 잠들기 직전까지 메시지로 끊임없이 심심하다고 투덜거렸으니까. ―물론, 친구의 그런 모습이 익숙했던 시루는 그 메시지를 한참 보다가 답은 보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고 툴툴거리려는 항의 전화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액정에 뜬 이름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다소 느린 동작으로 전화를 받았다. … 어, 누나야.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발걸음을 서둘러 재촉하고 있으나 자신이 속은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얼마 만에 듣는 목소리였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따뜻한 소리가 아직까지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사실, 그는 그동안의 시간 동안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은 생각 이상으로 더 그 사람을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다.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그는 이비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몇 번을 되짚어보고 생각했다. 지금의 상황을 천천히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인지 생각했다. 이 상황을 빨리 끝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때 했던 결정과 대답이 정말 최선이었는지, 스스로 의문이 생겼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시간 동안 편했던 것은 아니다. 고백을 들었던 그 날은 물론이고, 며칠 간의 밤은 고민으로 지새느라 수면 부족에 시달렸을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을 만나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언을 구한 적도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그게 너의 결정이라면 최선이라고 해주었고, 또 다른 사람들은 너무 많은 것을 생각했던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고, 자신은 그 결정에 후회가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런 것마저 무더져 있었다. 정말 최선일까. 내 감정에 솔직했던 걸까. 그래서 상황을, 감정을 정리하기로 했다.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고백을 들었을 당시, 기뻤다. 그리고 다시금 깨달았다. 자신의 감정은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에 생겨난 그리움이나 반가움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눈앞에 있는 사람이 좋아졌으며, 그리고 그 감정은 텁텁한 여름 공기가 몰려올 무렵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너무 기뻐서 눈물이 쏟아질 뻔한 것을 겨우겨우 참아야 했다. 하지만, 좋았던 감정만큼 무서워진 것도 사실이다. 나는 진심인 감정이 혹시 상대는 착각에서 나온 것일까 봐. 먼저 용기를 내고 고백해 준 사람의 마음을 의심하다니. 지금 생각하면 참 못된 소리지만, 그때는 그랬다. 자신도 ‘너무 반가워서 착각한 건가.’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던 만큼. 상대의 감정도, 잠깐의 그리움에서 나온 것일까 두려웠다. 정확히는, 만약 그 마음이 사랑이 아닌 다른 무언가였을 때, 그것을 깨달은 상대가 자신을 떠날 것이 무서웠다. 계속 같이 있고 싶었으나, 그 마음의 유통기한이 언제까지인지 보이지 않아 두려웠다. 다시 만나기까지 팔 년이었다. 그동안 시간 동안 변하지 않았던 마음이 구 년 만에 바뀐 것이다. 편하고, 친했던 동생에서 좋아하는 사람으로. 오래되고 갑작스러운 것일수록 더 빨리 변하고 깨질 것 같아서 싫었다. 그래서 밀어냈다. 자신들이 더는 ‘우리’라고 하는 이름 아래서 지낼 수 없는 사이가 된다면. 그는 그것을 상상하는 것이 무서웠다. 싫었다. 그런 일은, 더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다음의 이별은, 어린 시절의 약속처럼 ‘까짓것 또’ 정도로 우연이나 운명에 기댈 수 없는 것이 될 테니까.
생각이 그즈음 다다른 이비는 자신의 모습이 돌고래 같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동물원 우리 안에 가둬진 동물들은, 원래 살았던 곳 혹은 당연히 살아야 했던 곳으로 가게 된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 하고. 길에서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보고 만지려 할 때마다 그의 할머니는 종종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했다. 야생에서 생활하는 애들은 절대 사람 손을 타면 안 된다고. 그들의 몸에 사람 냄새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금방 야생에서 낙오되고 만다고.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말의 의미를 어렴풋하게 깨달은 것은 조금 더 큰 뒤였다. 아마, 돌고래나 동물원의 동물도 똑같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고, 정해진 공간 안에서 정해진 생활을 하던 동물들이 바로 야생으로 돌아간다면 무사히 버틸 수 있을까. 어쩌면, 말로 하지 않지만 이내 원래 살던 곳을 그리며 눈을 감는 동물도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런 것과 별개로 동물원은 그리 달갑게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동물원이어도 그리움과는 별개로 넓고 탁 트인 자연이 훨씬 좋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모습이 돌고래 같다고 생각했다. 듣고 싶던 말―원래 살아가야 했던 자연―을 들었으나 그것이 무서워서 변하지 않는 관계―동물원―를 원하게 된 것이.
무엇보다 시루의 곁에 다른 사람이 있게 된다면. 자신을 바라보며 짓던 표정이나 목소리를 다른 이에게 건네게 되는 것이, 상상만 해도 싫었다. 지금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게 보일 것을 잘 안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앞으로도 계속 자신만 있었으면 했다.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은 상상도 잘 안 되고, 솔직하게 싫으니까. 상상만 해도 속에서 이는 불꽃은 쉽사리 잠들지 않았다. 이런 마음이 드는 것조차, 아직도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증거겠지. 그런 생각에 다다르자 이비는 제 얼굴을 감싸고 작은 신음을 쏟아냈다. 아아… 나는 정말 잔인한 사람이다. 먼저 밀어냈으면서, 심지어 뻔뻔하게 ‘지금처럼’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고 했는데. 속에서 일렁이던 감정이 눈물이 되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지금은 시루를 만나러 가고 싶었다. 만나면 사과하리라. 그런 식으로 말하고 밀어내서, 그러면서 곁에 있기를 바란 것을. 어쩌면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말하고 싶다. 지금이 아니라면 기회는 영영 달아나서, 평생 말하지 못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지금,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거짓 없이 털어놓고 싶다. 그 일이 있고서 계속, 너만을 생각했다고. 어떻게 말하는 것이 좋았을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했다고. 자신이 했던 말을 조각내어 분석하고 반성하고 곱씹는 동안, 그만큼의 시간이나 고뇌만큼 네가 더 좋아졌다고. 너를 밀어내고 멀어지려 한 것은 자신의 이기심이며 지금만큼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한 것도 오직 자기만 생각한 욕심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이러니하다는 것을 안다. 지금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서 밀어내고 거절했는데, ‘지금’을 깨서라도 이 이상의 사이가 되고 싶었다. 이것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리라. 만나기로 한 장소로 향하며 그는 멈추지 않고 되짚었다.
여름의 햇볕이 뜨거웠다. 저 멀리 보이는 도로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이 눈에 담겼다. 조금만 서 있어도 땀이 미끄럼을 타고 쏟아졌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더위는 그가 평소에 끔찍하게 싫어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걸 알기에 그날도 물을 산다고 자리를 비웠던 거겠지. 오랜 시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알고 있는 사소한 것들. 두터운 앎에서 나오는 당연하고 섬세한 배려. 그런 점이 좋았다. 어릴 때 일상처럼 앓았던 것들을 이제 괜찮은지. 오직 자신만 신경 쓰는 모습을 좋아했다. 걱정 끼치는 것은 지독하게 싫었으나, 이상하게도 상대가 시루라면 걱정 끼치고 싶었다. 눈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괜찮은지 묻고 걱정 어린 잔소리를 늘어놓는 모습이 좋았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싫어하는 것이 없었다. 온통 좋아하는 것투성이였다. 툴툴거리면서 챙겨주는 것이 좋았고,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일상에 녹아든 것이 좋았다. 싫어하는 모습이 없었고, 설령 있다고 해도 그런 모습조차 좋아하게 될 것만 같았다. 사랑을 깨달은 초여름 즈음부터 고백을 들었던 순간까지. 함께 보냈던 수많은 시간은 전부 그에게 있어 지키고 싶은 꿈 같은 기억이었다.
스쳐 가던 생각에 이비는 걸음을 멈췄다. 또였다. 다시 고백하자. 이번에는 숨김없이 진심만을 털어놓자. 그 다짐을 한 뒤로 계속이었다. 조금만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생기면, 그 끝은 언제나 시루에 관한 것이었다. 내가, 내가 너를 이렇게 좋아하고 있었구나. 지금은 오직 그런 생각뿐이었다.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그는 이비에게 있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 이상이 되고는 했다.
만나기로 한 곳은 공원이었다. 그들이 다시 만났던, 그리고 고백을 들었던 장소. 다시 만나고, 복잡하게 얽힌 감정을 풀어내지 못하던 날들의 시작. 이곳에서 다시 말하리라. 서둘러서 카페를 나서는 순간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반드시 여기서 고백하겠다고. 사실 장소 같은 것들은 아무래도 좋았으나, 이곳이 아니라면 조금 전까지 결심했던 것들이 다시 두려움 앞에서 멈춰설 것 같았다. 여기라면, 그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늘진 곳에 앉으며, 이비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시루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을 거야.
공원 안으로 들어서면서도 그는 이비가 왜 이곳으로 오라고 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확실히 이 공원은 그들에게 있어 수많은 순간이 얽힌 곳이었다. 다시 만난 곳에서 관계의 끝을 말하려는 건가. 다소 불안한 기분이 들었으나 애써 무시하려 애썼다. 여름의 더위 탓일까. 잊고 있다고 생각했던 두통이 조금씩 심해지고 있었다. 괜히 표정이 굳어 있으면, 하려던 이야기조차 하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그래서, 그는 천천히 숨을 고르는 행위를 여러 번 반복했다. 이비가 하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들어야 한다.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라도 너무 놀라지 말자. 그렇게 다짐하며 시루는 천천히 저 멀리 보이는 이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보이는 익숙한 모습에 이비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손을 흔들었다. 시루야! 반갑게 부르는 목소리의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도 평소의 덤덤한 표정으로 듣겠지만, 그 뒤는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걸 생각하니, 심장이 아플 정도로 크게 뛰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 귀, 입술에 심장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빠르지만 묵직하게 북소리를 내는 고동에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는 것을 반복했다. 그러나 크게 부풀기 시작한 빵처럼,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해야 하는데. 쿵, 쿵, 쿵쿵, 쿵쿵쿵, 쿵쿵쿵쿵….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하는 긴장과 기대의 박자를 멈출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애써 차분해지지 않기로 했다. 시야에 시루의 모습이 담기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기까지. 단 삼십 초 만에 일어난 결정이었다. 이비는 부디, 자신의 마음을 전달할 때까지 심장이 터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물론, 실제로 심장이 터질 일은 없겠지만. 바보 같은 것을 바랄 정도로 그는 정말로 긴장한 상태였다. 처음 대학에 들어서던 순간도 이렇게까지 떨리지 않았다.
“미안. 전화 받을 때, 자던 중 같았는데.”
“괘않타. 누나야 할 말 있다고 하지 않았나.”
“응. 그게 있잖아….”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시루는 가만히 듣고 있을 뿐이었고, 이비는 차분히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생각이라고 해봤자, 그 날 이후로 어떤 생각을 했고 오늘 전화하기까지 어떤 마음이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물론, 그 말속에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빼놓은 채였다. 그들의 이야기는 대체로 조용하게 흘러갔다. 이따금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대화 사이를 채워 넣을 때도 있었으나, 방해되는 정도는 아니었다.
시루는 이야기의 끝이 다가오면서 놀라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는 짐작도 못 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비가 두려움을 느꼈던 원인이, 그에게 있어서 고백의 이유였으니까. 만약 언제 또 기약 없는 이별을 하게 된다면, 그래서 이전과도 못한 사이가 된다면 차라리 그동안은 친구 이상이 되어도 되지 않을까. 무엇보다, 자신이 알고 있던 그리고 알게 된 이비는 멋진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내뱉었던 고백이 그에게 있어 무서운 생각을 불러일으킬 줄은 몰랐다. 게다가 그것이, 같은 이유였다는 것은 더욱. 깊은 생각의 늪에 빠져들어 가던 시루가 정신을 차린 것은 이비의 목소리가 울렸을 즈음이었다.
“시루야. 듣고 있어?”
“어… 듣고 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냐면….”
수초 간의 정적. 이비는 긴장으로 차올랐던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느린 동작으로 입을 열어 꾹꾹 담았던, 긴 시간 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심장은 여전히 커다란 소리를 내며 뛰고 있었다. 이번에도 내 이기심이라 여겨도 괜찮아. 맞아, 내 욕심 때문에 하는 말이야.
“좋아해. 이 말이 계속하고 싶었어. 정말 좋아해.”
놀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자신이 놀라면 이비는 미안해할지 모르니까. 어떤 말을 들어도 의연하게 반응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그 다짐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흩어지는 것 같았다. 줄곧 듣고 싶었던 말이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어느 순간부터 흐르고 있는 눈물 때문인가. 아무튼, 그는 무척 놀란 상태였다. 지난번, 이 공원에서 그는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는데, 지금은 울면서 좋아한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시루는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며, 입을 열었다. … 내도, 좋아한다.
무더운 공기가 뒤섞인 바람이 불었다. 팔월 이 일, 때는 완전한 한여름이었다. 이것은, 그들에게 일어났던 우연과 운명이 뒤섞인 장난 같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