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속
인간은 누구나 최초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기억을 헤집어 올라가면 나오는 가장 어릴 때의 기억. 기뻤던 추억, 슬픈 감정, 부끄러운 기억, 때로는 장면이 아닌 향기, 감촉, 감정 등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사카타 긴토키의 최초의 기억은 하늘이었다.
밤하늘이 오기 전 찬란했던 해가 지평선에 머무는 그 찰나의 시간. 어두워져 가는 주위와 달리 눈이 시릴 정도의 붉은빛을 눈에 담고 나면 언제나 그랬듯이 추위와 공허함이 찾아왔다. 까악 까악. 하고 울던 소리가 사라지고 주위가 더욱 고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웅크리면 주위에 널린 검붉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과 자신의 눈동자 색이 비슷하다는 걸 언제 알게 되었더라. 눈을 감아버리면 폐 속까지 추위가 스며들어왔다. 사람이 썩어가는 냄새, 그리고 피 냄새가 섞인, 사람들이 오면 하나같이 더럽다고 말하는 냄새에는 이미 익숙해졌다. 이 속에서 살아가려면 익숙해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했으니까. 주린 배를 끌어안고 주위의 물체들 사이에 몸을 숨겼다.
… 내일은 뭐라도 먹었으면 좋겠다.
흐릿해가는 의식 속 긴토키는 눈을 떴다. 작은 몸은 모습을 숨기기엔 적합했지만 구름을 닮은 자신의 머리칼은 밤이 아닌 이상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몸을 추스른 긴토키는 구름이 껴 흐린 하늘을 눈에 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어른의 반밖에 오지 않는 어리다고 불릴만한 나이의 아이가 지니고 있는것은 이가 빠진 낡아빠진 검 한 자루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자신의 키보다 커 하루종일 품에 안고 다녀야 했지만, 이곳에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수단은 하나밖에 없었다.
시체먹는 악귀.
어느새 자신을 보며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시체 속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거니 틀린 말은 아니지. 마주친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인상을 쓰거나, 놀랐다는 표정을 하거나, 어떤 사람들은 괜찮냐고 물으면서 먹을 걸 챙겨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먹을 걸 내밀던 손이 자신의 위로 쓰러졌을 때, 무거운 체중을 뒤로하고 느껴지는 축축한 감각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두려움과 혐오감은 찰나의 감정이었다. 이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살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긴토키는 그 속에서 하룻밤을 보냈었다. 지금은 그 사람의 얼굴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거로도 벅차고 기분 나쁘다는 듯이 쳐다보는 시선은 날이 갈수록 익숙해졌다. 마찬가지로 검을 휘두르는 행동도, 사람을 베는 감각도 익숙해져 갔다. 어른이란 건 단순하고 만만한 존재였다. 자신들에게 익숙치 않은 존재는 두려워하고, 멀리하며, 깔보는 그런 인간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남자는 달랐다.
”시체를 먹는 악귀가 나온다는 말을 듣고 와 봤는데, 그게 당신이었나요?“
부드럽게 울리는 저음의 목소리와 함께 큰 손이 긴토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곁에 오는 걸 눈치채지 못한 긴토키는 먹고 있던 주먹밥을 손에 들고 멀뚱히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세상엔 이렇게 귀여운 악귀도 있었군요.“
긴토키는 악귀라는 말에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거리를 두었다. 혼자가 아니었는지 옆에는 자신 또래의 아이가 서 있었다. 긴토키는 경계하는 태세를 취하고는 자신의 키보다 큰 검을 한 손으로 뽑아 들었다. 가볍지는 않은 무게일 텐데도 내색하지 않고 노려보는 모습에 남자는 그저 미소 지었다.
“그것도 시체에서 훔친 건가요? 어린아이 혼자서 시체의 짐을 뒤져가며 자기를 지켜왔던 겁니까?”
남자의 옆에 서 있는 아이는 멀뚱히 긴토키를 마주 보았다. 놀라는 기색도,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는 노란색의 눈동자가 오히려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전쟁터에 아이를 데려온 남자도, 시체들에게 시선도 주지 않는 아이도, 어느 쪽이든 긴토키에게 달가운 존재는 아니었다.
“정말 대단하군요. 하지만, 이제 그런 검은 필요 없습니다.”
미소를 거두지 않는 남자에 긴토키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두려워하며 자신만을 지키기 위해 휘두르는 검은 이제 버리십시오.”
허리춤에 찬 검으로 향하는 손에 긴토키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지금까지 자신이 봐 온 인간들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금방이라도 휘두를 듯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몸을 지키기 위해선 먼저 덤벼들어야 했다. 남자를 주시하던 긴토키의 생각과는 달리 검은 뽑히지 않고 자신에게로 던져졌다. 검집째로 던져지는 검을 얼떨결에 받은 긴토키는 검의 무게에 휘청거리다 중심을 잡았다,
“제 검을 드리지요. 그걸 제대로 쓰는 법을 알고 싶다면 절 따라오세요.”
자신의 검을 던져주고는 그대로 뒤돌아 등을 보이는 남자에 긴토키는 멀뚱히 남자의 등을 쳐다봤다. 곁에 서 있던 아이는 남자가 뒤돌자 긴토키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남자의 손을 잡았다.
“…….”
걸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긴토키는 남자와 아이의 눈을 차례로 떠올렸다. 따뜻함이 담긴 허전해 보이는 눈과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마치 하늘에 떠 있는 쓸쓸한 달 같은 눈. 경멸이나 혐오가 느껴지지 않는 눈으로 자신을 본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긴토키의 시선은 남자가 주고 간 검에 머물렀다.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수단인 이 검을 필요 없다고 단정하는 남자에게 순수한 의문이 들었다. 저 남자는 이 검을, 자신을 지키는 수단이 아닌 다른 용도로 쓰는 걸까. 어째서 이렇게 간단하게 자신에게 넘겨줘 버리는 걸까.
처음엔 호기심이었다.
호기심과 약간의 기대. 입술을 깨문 긴토키는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씩 걸을수록 두 사람은 가까워졌고 어느새 긴토키의 품에는 남자가 건네준 검이 들려있었다. 자신이 쓰던, 피 묻고 낡아버린 검은 바닥에 떨어졌지만, 긴토키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시체들을 넘어가다 보니 자신의 앞에는 여전히 상냥한 웃음을 짓는 남자와 뒤돌아 자신을 마주 보는 아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긴토키의 시선은 아이와 남자가 맞잡은 손으로 향했고 건네지는 손에 자신도 조심스레 그 손을 잡았다.
“제 이름은 요시다 쇼요랍니다. 당신의 이름은요?”
“시체먹는 악귀.”
“그건 이름이 아닙니다. 단지 호칭일 뿐이니까요. 이름은 그 사람을 나타내는 의미 깊은 거랍니다.”
긴토키는 말없이 눈을 깜빡거렸다. 사람들은 전부 ‘시체 먹는 악귀’라고만 부를 뿐 그 누구도 이름을 궁금해 한 적은 없었다. 그제야 긴토키는 자신의 이름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스스로도 그 이름을 잊고 지냈던 만큼 그 이름을 불러준 사람은 더 이상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
“… 사카타 긴토키.”
“좋은 이름이네요, 긴토키.”
나직이 불리는 그 울림에 긴토키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자신을 향한 눈이 상냥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타인의 체온은 따뜻하다는 걸 깨달은 긴토키는 말없이 쇼요의 등에 몸을 기대었다. 넓은 등에 기대어있는 악귀는 그저 어린 소년이었다.
"… 너는?"
짧은 물음에 검은 머리칼이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가슴께에서 흔들리는 목걸이에는 노을을 닮은 붉은색의 부적이 달려있었다.
"츠키네 시즈카."
무미건조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간단한 대답 뒤로 시즈카는 다시 입을 열 생각이 없는 건지 묵묵히 긴토키를 응시했다. 긴토키는 시즈카와 쇼요가 맞잡은 손으로 시선을 향하고는 다시 쇼요의 등에 몸을 기대었다. 사람을 빤히 보는 저 눈동자를 마주 보고 있음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첫 만남은 타인이었다.
전쟁터를 벗어난 첫날. 쇼요는 집으로 오자마자 저녁을 준비했다. 멀리서 보기만 하던 집 안으로 들어가려니 기분이 이상했지만 낯설어하는 걸 눈치 챘는지 음식을 내오는 쇼요에 오랜만에 배가 부르다는 걸 느꼈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쇼요에게 이끌린 긴토키는 그대로 씻겨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잠시 반항도 해봤지만, 괴물인지 웃는 얼굴로 저지하는 쇼요에 금방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많이 춥진 않나요? 옷은 이걸로 갈아입어 주세요."
"저기,"
입고 있던 옷은 세탁하더라도 다시 못 입을 정도라는 건 긴토키도 알고 있었다. 옷가지를 건네는 쇼요에 긴토키는 멀뚱히 바라보더니 어딘가 어색한 태도로 우물쭈물했다. 망설이는 태도에 쇼요는 웃음을 머금곤 차분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시즈카의 옷이지만 품은 얼추 맞을 거예요. 장이 열리는 날에 긴토키의 옷을 사러 가요."
"…."
이건, 자신의 것이 아닌데. 쇼요가 생각한 바는 긴토키와 달랐지만 그걸 쇼요가 알 리가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긴토키는 결국 옷을 집어 들곤 입기 시작했다. 깨끗한 옷에서는 따뜻한 냄새가 났다.
"잠은 여기서 자면 된답니다."
이불을 펴주고는 자리를 떠나는 쇼요에 긴토키는 아무 말 없이 습관처럼 몸을 웅크렸다. 푹신한 이불도 부드러운 옷도 익숙치 않아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결국, 몸을 일으킨 긴토키는 조심스레 문을 열어 마루 한켠에 자리를 잡았다. 들어오는 달빛에 습관처럼 하늘을 올려다보자 흐리고 어두운 하늘이 아닌 달이 뜬 밤하늘이 보였다. 한참이나 앉아있던 긴토키는 자신이 전쟁터를 떠났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식했다.
. . .
두 사람과 같이 생활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을 무렵, 긴토키는 시즈카를 거북하다고 느꼈다. 그래, 거북하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았다.
"…."
긴토키는 잠시 마루 앞에서 멈춰 섰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마루 끝자락에선 인형 같은 아이가 앉아있었다. 인형을 앉혀놓았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자세의 아이는 긴토키가 올 거라고 예상이라도 한 듯 긴토키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고 긴토키는 자신을 마주 보는 시선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늘 같은 무표정인데도 어째선지 눈을 마주하는 건 거북했다. 사람을 빤히 보는 노란색 눈동자가 끝없이 깊어 보여 마치 속을 들여다보는 거 같았다.
"…쇼요가 불러."
따지자면 쇼요와 비슷하려나.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대화는 길지 않았고 시즈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긴토키를 지나쳐 걸어갔다. 묵묵히 걸어가는 시즈카의 뒷모습을 유심히 보던 긴토키는 이내 작게 한숨을 쉬고는 시즈카가 앉아있던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 자리에서는 뭐가 보이려나하는 마음에 발걸음을 향했지만 차마 그 자리에는 앉을 수 없어 결국 몇 걸음 떨어진 옆에 자리를 잡은 거였다.
풍경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특이점이라고는 유난히 큰 벚나무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고, 날이 풀렸음에도 조금은 쌀쌀해 보였다. 긴토키 자신도 딱히 풍경 보는 걸 싫어하지는 않았다. 멍하니 하늘을 응시하는 건 익숙했고 이곳에 와서는 조금 색다른 풍경에 보는 재미가 늘었을 뿐이었다. 자신은 그렇다고 치지만 자신보다 한참을 이곳에 머물렀던 시즈카는 대체 뭘 보려고 이곳에 앉아있는 건지.
"긴토키."
흠칫. 생각에 잠겨있던 터라 몸이 반응하듯이 튀어 올랐다. 달칵거리는 검에 손을 올린 긴토키는 이내 목소리의 주인을 깨닫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인기척도 없는 건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시즈카에 긴토키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몸을 움츠리곤 서둘러 일어났다.
"공부하러 가자."
아. 긴토키는 긴장했던 사실이 무색하게 노골적으로 귀찮은 티를 냈다. 세 명에서 생활을 시작한 뒤 긴토키가 가장 흥미를 느끼지 않은 건 바로 공부였다.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공부를 좋아하지 않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거였지만. 자신이 갈 때까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을 시즈카를 알기에 긴토키는 결국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긴토키는 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는 듯 했지만, 쇼요의 앞에서는 꼼짝할 수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봤지만 금방 잡혔고 무시무시한 꿀밤을 맞는 건 싫었으니까. 쇼요는 이야기를 흘려들어도 괜찮은 건지 제자리에 앉아있는 걸로 더 이상 나무라지 않았다. 얌전히 수업을 듣는 시즈카를 구경하거나 마루에서 날아다니는 나비를 구경하고 있다 보면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긴토키. 제 말 듣고 있나요?"
"어?"
턱을 괴던 손을 내려놓은 긴토키는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딴짓하던 게 들켰나 싶어 금세 표정을 갈무리했지만, 쇼요는 나직이 웃음을 지었다. 긴토키는 그 웃음이 더 무서웠다. 말없이 건네는 바구니를 안아 들고 멀뚱히 보자 쇼요는 시즈카에게 작은 주머니를 건넸다.
"이게 뭐야?"
"바구니예요."
바구니란 건 긴토키도 알고 있었다. 질문의 의도를 알면서도 엉뚱한 답을 내놓는 쇼요에 긴토키는 한숨이 나왔다. 사실 진짜 모르고 답하는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긴토키는 답을 재촉했다.
"나도 알고 있어. 이거 가지고 뭐 하라는 거야?"
"역시 이야기를 안 듣고 있었군요? 심부름입니다. 저녁거리를 부탁할게요. 종이에 써놨으니까 시즈카한테 물어보고 필요한 만큼 사 오면 됩니다."
"쇼요는 같이 안 가?"
"예. 단둘이 다녀오는 거예요. 늦으면 저녁은 없으니 해가 지기 전까지 다녀와야 합니다."
긴토키는 품에 들린 바구니와 시즈카를 번갈아 보더니 쇼요를 올려다봤다. 장에는 몇 번 가서 위치는 알고 있었지만 쇼요 없이 가는 건 처음이었다. 정확히는 쇼요 없이 시즈카와 단둘이 움직이는 게 처음이었다. 껄끄럽다는 생각보다는 걱정이 먼저 들었기 때문에 긴토키는 쇼요에게 눈빛을 보내봤지만, 쇼요는 언제나처럼 웃는 얼굴로 일갈했다.
대련 시간과 함께 이후의 자유시간까지 뺏긴 긴토키는 내쫓기다시피 밀려나고 결국엔 시즈카와 함께 바구니만 남은 상황에 한숨을 내쉬었다. 나보고 어쩌라는 건지. 해가 지기까진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 시즈카의 발걸음으로 어림잡아도 넉넉하겠다는 생각에 긴토키는 머뭇거리다 발걸음을 떼었다.
"가자."
등 뒤로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에 내심 안도하며 걷길 잠시 긴토키는 시즈카의 발걸음에 맞춰 조금 속도를 늦추었다. 길가에는 추위가 가셔 녹색의 풀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곧 봄이구나. 짧은 감상과 함께 나른한 느낌에 긴토키는 하품을 했다. 쌀쌀하던 날씨가 거짓말같이 따뜻해져 가만히 있으면 절로 졸음이 몰려오는 오후였다.
장이 열리는 날이어서 그런지 걸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한 둘씩 많아졌다.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오고 순식간에 늘어난 사람들 사이에서 긴토키는 요령 좋게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짐들도 많고 사람들도 많은 이곳에서 부딪히기라도 하면 길 잃어버리기 십상이었다.
긴토키는 시즈카가 잘 따라오나 싶어 중간중간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바구니와 검을 들고서도 유유자적 움직이는 긴토키와 달리 시즈카는 속도가 느려 뒤처졌다. 용케 빠져나오긴 하지만 보였다 사라졌다 하는 시즈카에 보는 자신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뭐 사야 하는지도 안 물어봤네. 목덜미를 긁적인 긴토키는 잠시 멈춰서 시즈카를 기다렸다 손을 잡고는 사람들 사이를 헤쳐 나갔다.
"사람들 더럽게 많네…. 주머니 잃어버린 건 아니지?"
사람이 그나마 적은 골목까지 와서야 긴토키는 빨리하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무 말 없이 끌려오다시피 한 시즈카였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긴토키는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손 좀 잡았다고 화난 건 아니겠지. 손을 놓아주자 돈이 들어 있는 주머니를 확인한 시즈카는 쇼요가 넣어준 종이를 펼쳤다.
"뭐가 많네."
"배추랑 파, 달걀, 딸기-…."
목록을 읊은 시즈카는 다시 종이를 접어 품속에 넣었다. 종류가 많긴 하지만 한두 가게에서 다 살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래서 길을 외워두라고 한 건가. 장에 갈 때마다 이것저것 다 설명해주던 쇼요에 긴토키는 속은 듯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했다.
"빨리 사고 가자."
쪼그려 앉아있던 긴토키는 몸을 일으켰고 바닥에 둔 바구니를 들려고 하는 시즈카에 저지하듯이 바구니를 뺏어 들었다. 아, 이런. 바구니까지 들면 느려질 게 뻔해 말리려던 게 어쩌다 보니 어색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찾아온 정적에 실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어 무어라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아,미ㅇ-"
"-아냐!"
변명거리를 찾던 긴토키는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다급해서 튀어나온 말에 긴토키 본인이 더 놀란 듯 시즈카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었다.
"그, 무겁잖아. 내가 들게."
"… 별로 안 무겁-"
"아 좀..! 그러다 길 잃어버리면 찾는 게 더 귀찮아!"
자신은 분명 걱정이 들어서 한 행동인데 입에서 나오는 말은 날카롭게 들려 괜히 쑥스러웠다. 이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단둘이 오는 게 아니었다는 생각에 긴토키는 속으로 쇼요를 원망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자기 잘못이 아닌 게 분명한데도 사과부터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겨우 사과에 큰소리를 낸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빨리 자리를 바꾸는 게 낫다는 생각에 긴토키는 검을 고쳐 쥐었다.
"… 바구니는 내가 들 테니까 잘 따라와."
작은 한숨과 함께 긴토키는 손을 내밀었다. 시즈카는 잠시 멀뚱히 바라보다 조심스레 손을 잡았고 긴토키는 휙 고개를 돌리곤 인파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순순히 손을 잡는 시즈카에 긴토키는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조금 놀란 눈치였다. 쇼요하고는 멀쩡하게 잡고 있었고 무엇보다 이렇게라도 하는 게 마음이 편했으니 될 대로 되라는 생각이었지만 싫어하지는 않더라도 달가워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의사 표현이라도 해주면 이렇게 답답하진 않을 텐데.
긴토키의 속마음을 시즈카가 알리는 없었고 그렇게 종이에 적힌 목록을 사는 동안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있었다. 시즈카가 바구니를 들려고 하는 기색이 보이면 긴토키는 괜히 잡은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그러면 뜻을 알아들은 건지 더 이상 반응하지 않았고, 그런 상황에서도 품에 들린 검을 달라고는 하지 않았기에 긴토키의 마음은 훨씬 편했다.
"긴토키, 이제 다 샀는데… 저기에서 잠깐 확인해도 될까?"
시즈카는 나무 그늘 아래를 가리켰다. 바구니에 담겼다고 해도 오래 들고 있기에는 힘든 무게였고 긴토키의 팔이 아파올 테니 빠트린 게 있는지 확인하자는 명목으로 잠시 쉬자는 소리였다. 긴토키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나무 그늘로 향했고 짐을 내려놓고 나서야 팔이 저려온다는 걸 깨달았다. 바람이 부는 그늘 아래는 적당히 시원했고 잡은 손을 먼저 놓은 쪽은 긴토키였다. 힘을 주지 않았던 건지 손에 힘을 풀자 스륵 풀리는 손가락에 긴토키는 바구니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확인 안 해?"
말과는 달리 긴토키가 앉자 주머니를 건네는 시즈카에 긴토키는 말없이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분명 돈이 담긴 주머니로 기억하고 있었고 열어보자 안에는 약간의 잔돈이 남아있었다. 자신보고 계산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긴토키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였는지는 다 기억 못 하는데."
"아냐, 계산은 제대로 했어. 남은 돈은 긴토키가 가져."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시즈카에 긴토키는 잠시 어이가 없었다. 계산을 제대로 했으면 확인하자고는 왜 한 거고 남은 돈은 왜 내가 가지래?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긴토키의 표정에 덩달아 시즈카도 고개를 갸웃했다. 서로 주변에 물음표가 떠다니길 잠시 시즈카가 긴토키의 옆에 앉더니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쇼요 선생님이 여기에 적힌 거 다 사고 남은 돈은 알아서 가지랬잖아. 먹을 걸 사거나 저금하거나 하라고… 긴토키 앞에서 말했는데…."
거기까지 들은 긴토키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 좀 들을걸. 안 들었다고 솔직하게 말하기엔 시즈카가 말꼬리를 흐리는 걸 보니 이미 눈치챈 듯했다.
"아…. 그럼 공평하게 나누든가 해야지. 내가 다 가지면 너는 뭐 하려고?"
"나는 쓸 데가 없으니까."
"뭐 가지고 싶은 거라든가 아님 좋아하는 거 없어?"
아무 말없이 살래살래 고개만 젓는 시즈카에 긴토키는 또다시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저렇게 단호하게까지 말할 정돈가 싶었지만, 긴토키는 물어보면서도 내심 예상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것도 없어. 하고 싶은 것도 없어. 긴토키가 보기에 시즈카는 지켜보고 있으면 무료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내가 못 들었다는 걸 알았을 때 아무 말 없이 자기 혼자 다 가져도 되는 거였다. 당장은 가지고 싶은 게 없다고 해도 모아놓으면 언젠가는 쓸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긴토키는 말없이 손안의 주머니를 꽉 쥐었다. 저렇게 단호하게 말하는 걸 보면 욕심이 없는 걸 넘어서 관심이 없는 수준이었다.
"……"
한편 시즈카는 힐끔 긴토키를 보더니, 목에 걸린 부적을 살짝 건드렸다. 어떤 점이 마음에 안 들길래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 긴토키는 항상 시즈카를 보면 이상한 표정을 짓곤 했다.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시즈카는 긴토키가 그런 표정을 짓는 이유를 가늠할 수 없었다. 말을 안 하면 모르는 게 당연했고 긴토키가 스스로 말해주기 전까지 굳이 물어볼 생각도 없었다. 자신한테는 필요가 없는 거여서 준다는 데에 굳이 이유가 필요한 걸까.
잠시 아무 말이 없던 긴토키는 몸을 기울였다가 벌떡 일으켰다. 생각을 정리한 듯 평소와 같은 표정이었고 손에 들린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이 돈 내 마음대로 쓴다?"
시즈카는 긴토키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긴토키는 바구니를 들고는 남은 손을 시즈카에게 내밀었다. 나른한 눈에는 아까전과 달리 약간의 기대가 담겨있었다. 손을 마주잡고 일어나는 시즈카에 긴토키는 고갯짓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시간도 남았으니까 당고 먹으러가자."
자연스레 이끄는 긴토키에 시즈카는 말없이 긴토키의 뒤를 따랐다. 인파 속을 헤쳐 항상 들리던 당고집으로 가는 긴토키의 발걸음이 가벼워보였다. 시즈카는 긴토키의 기분이 괜찮아진 거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당고집은 입구에서 멀지 않았고 쇼요와 장을 보러오면 하나씩 사 먹곤 돌아가곤 했다. 계산과 주문을 마치고 의자에 걸터앉은 긴토키는 시즈카에게 앉으라는 듯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하품을 하며 따분한 기색을 보이는 긴토키와 달리 시즈카는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눈으로 좆았다. 혹시 사람들 구경하는 게 재밌는 건가? 어차피 사는 거 더 거기서 거길 텐데.
"오, 맛있겠다. 자."
주문한 당고가 그릇에 가지런히 담겨 나왔고 긴토키는 양손에 하나씩 들고는 하나를 시즈카에게 건넸다. 동글동글한 떡에 달달한 맛이 일품인 당고는 긴토키가 먹어본 간식 중에 가장 좋아하는 편에 속했고, 먹고 있는 긴토키의 표정이 들떠있어 누가봐도 당고를 좋아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시즈카도 그 점을 알고있었고 잠시 머뭇거리자 긴토키는 빨리 받으라는 듯 재촉했다. 시즈카가 받아들자 긴토키는 기분 좋아보이는 표정으로 자기몫의 당고를 먹기 시작했고 시즈카는 가만히 손에 들린 당고를 쳐다봤다.
"뭐야, 안 먹을 거야? 맛있는데."
한쪽볼이 빵빵해진 채로 우물거리던 긴토키는 먹고 싶은 마음이 없어 보이는 시즈카에게 물었다. 쇼요랑 왔을 때는 멀쩡하게 먹었는데. 사실은 싫어하는 건데 자신이 준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긴토키는 조심스레 시즈카의 분위기를 살폈다. 말을 안 하니 알 방법이 없었고 자신은 맛있다고 느끼니 시즈카가 싫어할 거라는 생각은 미처 못 했었다.
"긴토키는 맛있어?"
멀뚱히 보더니 대뜸 질문을 해오는 시즈카에 긴토키는 입에 있던 당고를 꿀꺽 넘겼다.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어 긴토키는 그저 솔직하게 대답했다.
"맛있지. 넌 맛없어? 단 거 싫어해?"
"… 아니, 맛있어."
"…?"
시즈카는 대답하고는 당고 한 알을 입에 넣었다. 입안에 퍼지는 달달한맛과 쫀득한 식감. 맛있다는 건 이런 거구나. 시즈카는 곱씹듯이 한참이나 우물거렸고 긴토키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보다 당고한테로 관심을 돌렸다. 쇼요것도 사가면 저녁 먹기 전에 먹었다고 혼내려나.
짧은 고민 후 긴토키는 남은 당고를 다 먹어치우기로 결정했다. 시즈카가 이거했다 저거했다 일일히 말하지도 않을 거고. 자신이 3개째를 먹을 때 여전히 하나를 들고있는 시즈카를 힐끔 본 긴토키는 하나를 더 내밀었지만 시즈카는 고개를 저었다.
늘 적게 먹는 건 알고 있었으니 새삼 놀랍지도 않았다. 다 먹은 꼬치들이 그릇에 쌓여가고 시즈카가 건넨 손수건으로 대충 입을 닦은 긴토키는 바구니를 손에 들었고 그대로 가려다 멈추고는 시즈카한테 손을 내밀었다. 돌아가는 길에서도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긴토키는 시즈카의 발걸음에 맞춰 속도를 늦추었고 시즈카는 묵묵히 긴토키를 따라 걸었다. 긴토키가 힘을 풀면 바로 놓칠 듯 잡은 손이였지만 맞잡은 손은 한참동안 떨어지지 않았고 그림자의 길이가 조금 늘어졌을 무렵, 두 사람은 처음으로 심부름을 다녀왔다.
. . .
"…피곤해. "
보름달이 뜬 밤, 긴토키는 마루에 앉아 중얼거렸다. 장에 다녀온 지 며칠이 지났을 무렵에도 두 사람의 관계는 여전했다. 시즈카는 언제나처럼 말수가 적었고 긴토키는 그런 시즈카를 신경쓰면서도 거북해하는 일상이 이어졌다. 다만 시즈카는 가끔 긴토키가 밥이나 간식을 먹을 때 멀뚱하게 보고는 대뜸 맛있어? 라고 묻곤 했다. 맛있다. 딱히, 그냥 먹는 거다. 맛없지만 쇼요가 먹으라고 해서 먹는 거다. 긴토키는 그때마다 꼬박꼬박 답을 해주었고 시즈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알다가 모를 미묘한 표정으로 식사를 계속했다. 쇼요는 그런 시즈카를 보면서도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했고 결국 긴토키 혼자 꺼림직한 기분으로 식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짧은 대화를 나누는 게 전부였고 긴토키는 여전히 시즈카가 거북했다.
유난히 달빛이 많이 드는 이 마루는 긴토키의 지정석이었고 부드러운 옷과 푹신한 이불이 어느 정도 익숙해진 지금도 오랜 시간 머무는 곳이었다. 앉아있으면 벌레의 풀벌레 소리나 바람 부는 소리,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잠들기 전 이곳에 앉아있는 게 하루의 마지막 일과였다. 평소 같았으면 들어가서 잠들면 되는 건데. 요새따라 이상한 행동을 하는 시즈카에 머리가 아파왔다. 시즈카가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자신이 시즈카에게 이렇게 신경을 쓴다는 사실 자체가 달갑지 않았다.
힐끔, 긴토키는 자신이 앉아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방을 보더니 이내 못마땅한 표정으로 한참으로 방을 응시했다. 시즈카의 방은 긴토키의 옆방이였고, 자신이 이렇게 신경쓰는 지금에도 시즈카는 속 편히 자고 있겠지. 괜히 심퉁이 난 긴토키는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마루에 벌렁 드러누웠다. 별이 쏟아질 듯한 밤하늘은 이전에 보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시선이 가는곳마다 별이 담겨있었고 별을 따라가다 보면 유난히 큰 달이 떠있었다. 동그랗게 뜬 달은 밤하늘 한쪽에서 유유히 떠다니는 듯 했고 손을 가까이하면 한 아름 잡힐 거 같았다. 애초에 달이 잡히는 일은 없지만서도.
빙글 몸을 돌려 웅크려누운 긴토키는 멍하니 귀를 귀울였다. 한번 떠오른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나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에도 느꼈지만 시즈카의 눈은 달을 닮았었다. 이름도 츠키네 시즈카(月音 静)잖아. 쇼요가 시즈카의 이름을 지어줬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긴토키는 꽤나 그 이름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조용한 달. 쇼요에게 너무 보이는 대로 지은 거 아니냐고 했더니 쇼요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쇼요한테는 그렇게 조용하진 않을 텐데. 언제나 무표정이나 무미건조한 표정만 짓는 시즈카였지만 지난 한달동안 긴토키는 시즈카가 웃는 얼굴을 딱 두번 봤었었다. 한번은 쇼요와 요리를 할 때였고 한번은 공부를 할 때였다. 금세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서 착각이었나 싶었지만 그런 웃음은 처음 봐서 잊을 수도 없을 거 같았다. 실제로 긴토키는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 웃음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인형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던 그 녀석이 처음으로 사람이구나라고 생각되었으니까.
"…...?"
긴토키는 바닥에 기대있던 고개를 들어올렸다. 방금 무슨 소리지? 안고 있던 검집에 손을 올린 긴토키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풀벌레 소리 사이로 분명히 다른 소리를 들었었다. 뒷목이 오싹한 느낌에 저절로 숨이 들이켜졌고 침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젠장, 괜히 쇼요 때문에. 쇼요가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난 긴토키는 심장 뛰는 소리에 몸 전체가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아니겠지. 아닐 거야. 이야기에 나왔던 게 실제로 있을 리가 없는걸. 긴토키는 그렇게 속으로 되뇌이면서 손잡이를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ㅇ-.."
…! 이번에는 부정할 수도 없이 확실히 들린 소리에 긴토키의 몸이 들썩였다. 해치울 수 있을까. 차라리 도망갈까? 쇼요한테 가면 귀신쯤은 쉽게 물리쳐줄 수 있을 거였다. 쇼요의 방에 찾아가 귀신이 있다고 말하는 자신을 상상한 긴토키는 이내 고개를 붕 붕 저었다. 절대로 쇼요한테는 말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한 긴토키는 뒤로 발걸음을 한발자국 떼었다.
소리는 불규칙적으로 들렸고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려던 긴토키는 무언가를 눈치 채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제자리에 멈춰선 긴토키는 한 번 더 들리는 소리에 확신하고는 인상을 구겼다. 소리가 자신의 옆방에서 들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시즈카의 방안에서.
"……."
모른 척 도망치기에는 이미 눈치를 챈 상태여서 긴토키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시즈카가 귀신을 물리칠 수 있을까? 긴토키가 내린 결론은 ‘아니‘ 였다. 벌레도 무서워 굳어버리는 시즈카가 귀신을 물리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긴토키는 고뇌에 휩싸였다. 자신은 그대로 방을 지나쳐 이불속에 들어가면 되는 일이었다. 신경은 쓰이더라도 잠은 잘 수 있을 테고 내일 아침에 멀쩡하게 일어날 수 있겠지. 그럼 시즈카는?
……. 젠장할. 숨을 들이킨 긴토키는 결국 시즈카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장지문에 자신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문 앞에 쪼그려 앉은 긴토키는 조심히 문에 손을 대었다. 시즈카가 멀쩡한지만 보고오자. 금방 도망가면 되니까. 한쪽 손으로 검을 쥔 긴토키는 그대로 문을 조금씩 였었고 스르륵 하는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방안으로 불빛이 새어 들어갔다.
"…?"
문 사이로 보이는 방안에서는 문쪽에 가깝게 시즈카가 누워있었다. 이불이 깔려져있고 등을 돌린채로 가지런히 누워있는 시즈카는 곤히 잠들어 있는걸로 보였다. 자는 건가? 모습은 멀쩡한 거 같은데 이상한 느낌이 드는 듯 해 긴토키는 문을 조심스럽게 더 열었다. 깨지 않게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함부로 방안에 들어가면 싫어할 수도 있었다. 고민하던 긴토키는 얼굴만 보고오자고 생각하면서 결심을 굳혔다. 방안으로 발을 디디려는 순간 손을 올리고있던 문이 스르르 열렸다.
"!!"
순간 큰소리를 낼 뻔한 긴토키는 검을 뽑아들면서 옆으로 돌았지만 뽑으려던 검은 부드럽게 감싸오는 손길에 막혔다. 큰 형체에 고개를 들자 보이는 것은 부드럽게 웃고있는 쇼요였다. 손가락을 입가에 대고 웃는 쇼요에 뜻을 이해한 긴토키는 검을 쥔 손에 힘을 풀었다. 인기척도 못 느꼈는데. 언제부터 옆에 있었던 건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긴장을 푼 긴토키의 머리 위로 손을 올린 쇼요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는 시즈카의 옆에 무릎 꿇어 앉았다.
긴토키는 문앞에서 가만히 두 사람을 지켜봤고 쇼요는 이불을 살짝 걷고는 시즈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걸 본 긴토키는 그제서야 시즈카의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있다는 걸 깨달았다. 얼굴에는 식은땀이 맺혀있었고 어깨는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긴토키가 들었던 소리는 시즈카가 내는 소리였고 잠들어 있는 와중에도 소리를 죽이려는 듯 숨만 연신 들이켰다. 쇼요는 시즈카의 손을 잡은 채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었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시즈카가 숨을 쉬는 게 편해진 듯하자 쇼요는 이불을 정리해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쇼요와 긴토키는 서로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고 쇼요는 왔을 때처럼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 아픈 거야?"
정적을 깬 사람은 긴토키였고 쇼요는 빙그레 웃고는 몸을 돌렸다.
"오늘은 달이 밝네요. 저랑 잠시 밤 산책 안 할래요, 긴토키?"
달빛이 말없이 두 사람을 비췄고 긴토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를 옮기려는 건지 쇼요는 뒤돌아 걸었고 자신의 방에 도착하자 긴토키가 올 줄 알았다는 듯이 자리를 내어주었다. 긴토키는 등 뒤로 맨 검을 내려놓았고 여유롭게 보이는 쇼요와 달리 방앞에서부터 지금까지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어서 대답해달라는 듯이 재촉하는 긴토키의 눈빛에 쇼요는 아이러니하게도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몽을 꾸는 거 같아요."
"그럼 아프거나 병인 건 아니지?"
덤덤히 말하는 쇼요에 긴토키는 내심 안도했다. 허약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가 병이 아니여서 다행이었다. 악몽이 좋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목숨을 잃을 정도는 아니였으니까. 하지만 가벼워보이지 않는 쇼요의 표정에 긴토키는 마냥 안심할 순 없었다. 쇼요의 행동은 익숙해보였고 적어도 자신을 만나기 전에도 악몽을 꾸고 있었단 뜻이었다.
“병은 아니에요. 하지만 시즈카한테는 병보다 더 큰 문제일지도요.”
“그 이야기...내가 들어도 되는거야?”
긴토키는 자신도 모르게 약간 몸을 물렸다. 시즈카는 보통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었다. 그렇기 때문에 몰랐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호기심이 피어올랐지만 동시에 불안감도 들었다. 가끔 시즈카가 허공을 바라보는 이유도, 특유의 버릇도, 그리고 목에 걸고있는 목걸이도 그렇고 긴토키가 궁금한 것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건 당사자나 쇼요와의 이야기들일 테고 자신이 알려달라고 할 권한은 없었다. 지금 듣는 이야기는 분명 시즈카와 관련된 이야기일 테고 시즈카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야기를 들을 경우 시즈카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 쉽게 예측할 수 없었다.
“시즈카라면 알려줘도 상관없다고 말할걸요?”
속마음을 들여다본건지 후후 웃는 쇼요에도 긴토키는 웃을 수 없었다. 쇼요가 그렇게 말한다면 분명 괜찮겠지만 약간의 찜찜함에 인상을 찌푸리던 긴토키는 순간 무표정하게 괜찮다고 말하는 시즈카가 상상되었다, 너무 쉽게 상상되어서 오히려 지금 고민하는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쇼요는 웃으면서 긴토키 앞에 찻잔을 내주었다. 자신이 올 거란 걸 알고 있었는지 금방 따른 듯 김이 나오고 있었다.
“솔직한 아이에요. 시즈카는.”
이어진 쇼요의 말에 긴토키는 숙였던 고개를 돌려 쇼요를 마주봤다,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의사표현이 확실하죠.”
거짓말. 긴토키는 순간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쇼요가 들려준 말이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는 시즈카는 의사표현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어느 쪽이든 괜찮다. 없어도 괜찮다. ’괜찮다’ 가 입버릇일까 싶을 정도로 욕심이 없고 원하는 것도 없는 정확히는 무관심한 쪽에 가깝다는 게 긴토키가 생각하는 시즈카였다.
“긴토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네요. 그럴 만도 해요.”
“그 녀석은 다 괜찮다고 하잖아.”
“네, 맞아요. 진짜로 괜찮으니까요.”
쇼요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어느 쪽도 싫지 않으니 고르지를 못하는 거예요. 긴토키는 조약돌이랑 조약돌중에 무엇을 고를 건가요?”
“그런 거 고를 필요가 없잖아. 둘 다 어차피 같은-”
“예. 둘 다 같은 조약돌이죠. 다만 모양이나 생김새는 다를 거예요. 어느 쪽이 좀 더 작을 수도 있고 어느 쪽이 좀 더 딱딱할 수 있죠.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똑같은 조약돌이잖아요? 그런 거예요. 시즈카는.”
누구한테는 무엇보다 소중한 물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남이 보기에는 굴러다니는 잡동사니로 보일 수도 있다. 긴토키는 쇼요의 말을 이해했지만 머리 한구석에서 여전히 의문이 들었다. 쇼요가 예로 든 것은 조약돌이었지만 실제 물건들은 조약돌이 아니었다. 먹고, 입고,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을 조약돌이랑 비교하는 거 자체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래도….”
“하지만 시즈카는 어느 쪽이든 결국 선택하잖아요? 시즈카한테도 양보할 수 없는건 있어요. 하지만 그것 말고는 어느 쪽이든 괜찮은 거랍니다.”
양보할 수 없다는 게 뭔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긴토키는 애써 호기심을 눌러담았다. 시즈카가 어째서 무신경한 태도를 보이는지, 어째서 자신이 시즈카를 볼 때마다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는 해소가 되었다. 시즈카는 자신과는 달랐다. 자신과는 반대의 타입에 절로 거부감이 들었던 건가 했지만 그 이유에서만은 아닌 거 같아 긴토키의 기분은 더욱 미묘해졌다.
“그리고, 시즈카는 귀신을 볼 줄 안답니다.”
“……어?”
생각에 잠겨있던 긴토키는 얼빠진 소리로 되물었다. 상큼하다 생각될 정도로 가벼운 말에 순간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했다. 머릿속에서는 쇼요가 들려준 이야기와 아까 전 마루에서의 오싹했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그, 그건 분명 쇼요가 지어낸 이야기...!”
“전 지어냈다고는 한 적 없어요.”
긴토키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에 안색이 새파래졌다. 그럼 시즈카가 자신을 볼때마다 뚫어져라 보는 이유가... 달빛의 눈동자에 비치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절로 소름이 돋았다. 장에서 지나가던 사람들을 구경하던 시즈카가 보고 있었던 게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긴토키는 머리를 싸매었다. 이런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았는데. 괜히 신경 쓰일게 분명한데 시즈카의 탓을 할 수도 없어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먼저 겁을 준 사람이 누군데. 긴토키는 애갈 곳 없는 설움을 쇼요를 향해 드러냈다. 분명 겁 먹었다는 걸 알고 말해준 이야기일 테지만 이런 타이밍에 해줄 필요는 없었다,
“시즈카가 우리와는 다른 태도를 지닌 것도 어쩌면 그 이유 탓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시즈카는 우리와 다르지 않아요.”
‘시즈카 또한 사람이니까요.’ 그건 자신도 알고 있었다. 시즈카의 웃는 얼굴을 처음 본 순간 저 애도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으니까. 이 선생님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이곳에 온 첫날부터 느꼈지만 여전히 속을 모를 사람이었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시즈카를 보면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시즈카가 짓는 웃음은 쇼요와 닮아있었고 풍기는 분위기 또한 비슷했다.
“저는 시즈카와 긴토키가 사이좋게 지냈으면 해요, 두 사람은 제가 보기에 꽤나 닮은 점이 많으니까요.”
긴토키는 쇼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시즈카와 다르다는 생각을 방금 한 참인데 시즈카와 닮았다고 말해오는 쇼요에게 대체 어떤점이 닮은 거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자신은 시즈카처럼 똑똑하지도 않았고 스스로가 생각해도 말을 잘 듣는 모범생은 아니었다. 무심한 표정과 달리 검을 쥔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지금도 쇼요는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꿰뚫어보고 있을 터였다. 시즈카처럼 표정을 드러내지 않아도 쇼요의 눈을 속일 수는 없겠지,
“놀리거나 그러진 않아. 오히려 사이좋게 지내라고 해도,,, 나를 반길 이유가 없잖아.”
어린애도 아니고 유치한 따돌림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불편하지 않은 사이만 유지하는 게 긴토키로서는 편했고 사이좋게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무엇보다 시즈카는 자신을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두 사람이 지내던 공간에 멋대로 들어온 존재와 같았고 새삼 모르는 타인과 자신의 것을 나누고 그것에 대해 아무런 저항도 안 하는 시즈카가 별난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쇼요의 말을 듣고 나서야 확신했다. 시즈카에게 자신은 조약돌 같은 존재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듯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긴토키 혼자만의 생각일지도 몰라요.”
“알고있어.”
긴토키는 괜히 어색한 기분에 제 구불한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안다고 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다가가는 건 익숙치 않았고 그런건 쇼요한테나 가능한 일이지 자신에게는 불가능했다. 자체를 고쳐앉은 긴토키는 품안의 검을 그러쥐었다.
“시즈카가 살던 곳은 여기가 아니에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줄까요. 시즈카와 여행을 시작한 건 당신과 만나기 1년 전쯤이겠네요. 아직 쌀쌀한 날씨였으니까요.”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시즈카를 만난 날이 비가 내리던 날이라는 것과 시즈카가 마을을 떠나게 된 계기가 자신 때문이었다는 걸 들려주는 동안 긴토키는 아무 말 없이 이야기를 들었다, 시즈카가 목에 걸고 있는 귀걸이는 자신에게 있어 검과 같은 의미였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본 쇼요는 빙그레 웃음지었다.
“지금 말해준 이야기는 저만 알고있는 이야기랍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시즈카한테 물어보면 들을 수 있을 거예요.”
물어볼 리가 없잖아. 긴토키는 못마땅하게 턱을 괴었다. 살고있던 마을을 떠나 쇼요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는 것만으로 마을에서 시즈카를 대하는 태도가 좋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과거를 괜히 물어봐서 상기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쇼요의 이야기를 듣자 절로 의구심이 들었다. 쇼요는 자신보다 시즈카와 짧지 않은 시간을 보냈고 두 사람은 자신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시즈카와 잘 지내고 있었을 터였다.
“그럼 쇼요는….”
시즈카 때문에 나를 데려온 거야? 입은 열었지만 무언가에 막힌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분명 자신이 알고있는 요시다 쇼요라는 사람은 그런 어른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에도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두 사람을 비추던 달은 어느새 구름 뒤로 숨어버렸고 긴토키 앞에 놓여진 찻잔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식은 차는 쓴맛이 났고 자신은 이 맛이 익숙치 않았다. 차를 들이키는 긴토키에 쇼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는 자신 앞에 놓인 찻잔을 바라봤다. 남은 차를 다 들이키자 쇼요는 긴토키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는 쓰다듬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네요. 늦게 자면 수업시간에 또 졸 거예요?”
또 그 무시무시한 딱밤을 맞는 건 사양이었다. 절로 떠오르는 아픔에 긴토키는 시선을 피했고 쇼요는 여전히 긴토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복슬하게 엉킨 머리카락이였기에 헝클인다고 해도 별로 티가 나지 않았다.
“귀신이 무서우면 언제든 불러요. 알겠죠, 긴토키?”
“아 진짜!! 무섭다고 한 적은 없거든!”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긴토키는 머리를 쓰다듬는 손을 툭 쳐냈다. 싱글싱글 웃는 얼굴이 분명히 알고 놀리는 게 틀림없었다. 조용할 때는 언제고 금세 바락거리는 긴토키는 쇼요가 보기에는 아직 어린 아이었다. 어지간히 창피한지 씩씩거리며 일어난 긴토키는 검을 집어들고는 저벅저벅 방문을 향해 걸어갔다. ‘...잘 자, 쇼요.’ 조금은 요란하게 닫힌 문이었지만 문 뒤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방안에 홀로 남은 쇼요는 미소지었다.
. . .
탁-! 탕! 탕-!!
햇살이 들어오는 넓은 대련장에서는 죽도와 죽도가 부딫히는 타격음이 울려퍼졌다. 어떨 땐 빠르게, 어떨 땐 묵직하게 울리는 소리에 맞춰 발걸음도 바삐 움직였고 이내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가슴께에 아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칫….”
쿵. 하고 무너지는 몸에 절로 거친 숨이 쉬어졌고 무덤덤해 보이지만 분함이 담겨있는 긴토키의 표정과 달리 시즈카의 표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쭉 뻗은 죽도의 끝은 긴토키를 향해있었고 자세를 고친 시즈카는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 번 더 해.”
고통은 크지 않았고 금세 몸을 일으킨 긴토키는 죽도를 고쳐쥐곤 시즈카를 향했다. 시즈카는 아무런 말없이 준비자세를 취했고 숨을 들이킨 긴토키는 시즈카에게로 달려들었다. 시선은 상대방을 향해 고정된 듯 떨어질 줄을 몰랐고 죽도가 휘둘러질 때마다 발걸음도 같이 움직이며 대련장 바닥이 마찰되는 소리가 울렸다. 달려들면 달려들수록 멀어지는 기분에 긴토키는 이를 악물고는 기합을 내질렀다. 닿을만 하면 피해버리고 먹혔다 싶으면 막아버리는 움직임에 서서히 조급함이 드러났다.
“후우…, 왜 안 달려들어?”
발걸음을 멈추자 같이 멈춰버리는 시즈카에 긴토키는 차분히 시즈카를 노려봤다. 시즈카는 자신이 먼저 달려드는 법이 없었고 열심히 뒤쫒아가다 한발자국만 더 내밀면 된다 싶으면 항상 자신을 앞질러가 있었다. 그 미묘한 차이가 긴토키로서는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다. 흔들리던 검은 머리칼이 가라앉고 달빛 눈동자가 흔들림없이 긴토키를 마주봤다,
허약하게 생각되는 외모와 달리 긴토키는 시즈카를 이긴 횟수가 많지 않았다. 오히려 시즈카가 이긴 횟수가 월등하게 많았고 어른한테서도 이겨온 긴토키는 처음 대련을 한 날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었다. 시즈카를 걱정했던 자신을 비웃듯이 대련은 순식간에 끝이 났고 바닥에 앉아있던 사람은 시즈카가 아닌 긴토키였다. 고개를 들자 보이는 흔들림없는 달빛 눈동자는 그때도 지금도 여전했다.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이 움직였고 대련장을 울리는 경쾌한 소리가 빨라졌고 또 한 번 둔탁한 타격음이 울렸다. 바닥에 앉아있는 쪽은 이번에도 긴토키였다.
“저런, 오늘도 아까웠네요. 긴토키.”
거친 호흡을 몰아쉬는 두사람을 끝까지 지켜본 쇼요는 대련장을 지나와 긴토키에게 물통을 내밀었다. 반응을 기다리는 듯이 말이 없던 시즈카는 물통을 받아드는 긴토키에 자세를 바로잡았다. 긴토키가 원하는 이상 얼마든지 상대해주는 시즈카였기에 쇼요가 개입하면 대련은 여기까지. 라는 일종의 신호였다.
‘시즈카도 수고했어요. 가서 좀 쉬어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쇼요에 시즈카는 얌전히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쇼요에게 자신이 들고있던 죽도를 건네주었다. 한쪽 벽으로 가 보호구를 벗은 시즈카는 쇼요가 미리 준비한 듯 놓여져있는 물병에 담긴 물을 마시고는 자리에 앉아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여유롭게 서 있는 쇼요는 전혀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 표정이었다. 자세도 표정도 무엇하나 가벼워 보이지만 달려들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두 사람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눈앞에 미소를 짓고 있는 자는 어린 두 사람이 아는 한 가장 괴물 같은 사람이자 가장 존경스러운 선생님이었으니까.
대련장에 울리는 긴토키의 기합 소리와 주고받는 합들을 시즈카는 하나도 놓치지 않을 듯이 두 눈에 담았다.
시간이 흐르고, 긴토키는 전신이 욱신거려 마치 몸이 비명을 지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온몸을 가득 장식한 거즈와 붕대는 욱신거리는 고통이 꿈이 아니라는 걸 나타내주는 듯했다. 젠장…. 불만스레 중얼거리는 긴토키와 달리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시즈카는 옆에서 익숙하게 긴토키의 팔에 붕대를 감겨주었다.
“긴토키 팔이 그래서야…. 오늘 저녁은 시즈카와 둘이 만들어야겠네요.”
“아니, 이거 완전히 쇼요가 만든 상처니까? 왜 내 잘못이라는 듯이 말하는 건데?!”
가득한 붕대와 거즈들 중에 시즈카가 만든 상처는 하나도 없었다. ‘누가 보면 나 혼자 넘어진 줄 알겠네!’ 발끈해 소리치는 긴토키에도 쇼요는 개의치않고 웃음지었다. 혹여나 아플까 조심조심 붕대를 감아주는 시즈카에 함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긴토키는 화를 가라앉히곤 얌전히 팔을 내어주었다. 어느새 저물어가는 해에 주위는 붉은빛으로 물들어갔다. 매일 잠들기 전 보았던 풍경이지만 쇼요만 만날 그 날부터 추위와 고독함이 찾아온 적은 없었다. 항상 옆에는 까마귀들이 아닌 쇼요와 시즈카가 있었으니까.
“…쇼요, 어떻게하면 너처럼 강해질 수 있어? 나는 너랑 만나기 전까지 어른에게도 진 적이 없었어.”
자신은 시즈카를 이긴 횟수가 적었다. 하지만 적다는 것이지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의 스승에겐 단 한 번의 승리도 가져가본 적이 없었다. 늘 지고 상처를 입는 쪽은 자신이었고 쇼요에게 한 번의 타격도 먹인 적이 없었으니까.
"너는 어른이라는 만만한 녀석이 아니야. 거인이다."
"그건 다릅니다, 긴토키. 전 한신이 좋아요."
"선생님, 이야기를 하면 좀 들어요."
지금 자×언트가 좋은지 타×거즈가 좋은지 묻는게 아니잖아요.
"… 긴토키는 거인이 좋아?"
"넌 또 왜 그러는 건데!!"
결국 목소리를 높인 긴토키는 다시 저려오는 팔에 이마를 짚었다. 누가 제자 아니랄까 봐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하는점도 똑 닮아있었다. 왜 그런 것만 닮은 건지. 절로 아파오는 머리에 긴토키는 언성을 높인 걸 후회하며 시즈카를 뚱하니 보다 쇼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 같은 괴물은 본 적이 없다고 하는 거야!!"
긴토키가 말하는 거인은 쇼요뿐만이 아니었다. 시즈카도 어른이 아닐 뿐이지 자신에게 있어서는 쇼요와 마찬가지로 알다가 모를 존재였으니까. 첫 만남 때 이런 인간이구나 하고 진작에 신경을 꺼버릴 수 있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이유에는 대련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지금은 대련뿐만이 아닌 거 같았지만 긴토키 스스로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너는 이 녀석과 만나기 전에 뭘 했지? 너는 대체 누구야?"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두 쌍의 눈동자에 담긴 감정들은 호기심뿐만이 아니었다.
"시체 먹는 악귀, 그리고 괴물로 불렸던 당신들이라면 알고 있을 거예요."
시체 먹는 악귀. 저주받은 괴물. 그저 작고 어린 이 아이들에게 붙은 명칭들은 너무나 가혹했지만. 명칭보다 더 가혹한 건 아이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였다.
"괴물도, 괴물의 아이도 마찬가지랍니다."
"괴물이란, 사람이 아닌 것. 피로 물든 업(業)에서 밖에 태어나지 않아요. 괴물의 검으로는 괴물을 벨 수 없어요. “
홀로 전쟁터에서 살아온 나날들은 당연히 가혹했을 터였다. 시체들의 품을 뒤져 하루하루를 이어가던 아이를 만난 날, 피로 물들어 날이 상해버린 검을 꺼내 들고 경계하던 눈빛을 쇼요는 잊지 않았다. 자신보다 큰 어른들에게 도움을 받은 게 아닌 이겨왔다는 사실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손에 쥔 검을 놓을 수 없다면, 언젠가 그 검으로 제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주기를 바랬다. 지고있는 해를 닮은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자신을 향해있었다.
"그러니까, 긴토키도 시즈카도 제 흉내를 내서 강해지려는 것은 이제 그만두세요. “
마치 아기새가 어미새의 행동을 따라하듯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아이를 향해 쇼요는 손을 내밀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새까만 어둠속에서 홀로 백지 같던 아이는 곁에 있는 사람들의 색으로 자신을 물들였다. 그 모든 색들이 섞이다보면 언젠가는 자신의 색으로 물들어간다는 사실을 쇼요는 알고있었다. 설령 새까만 검은색이 되더라도 그 색을 자신을 나타내는 색으로 바꾸어버리길, 쇼요는 밤하늘을 닮은 아이를 마주보았다.
"나도 내 검을 당신들에게 알려주려는 생각은 없어요. 당신들은 당신들의 검으로,"
괴물이 아닌
"사람의 검으로 나보다 더 강해져야만 해요."
괴물이 내미는 손을 붙잡은 작은 괴물들은 그저 쓸쓸하고 외로울 뿐이었다. 꺼져가는 죽음들 사이에서, 꺼져버린 죽음들 곁에서 살아가던 괴물들이 이곳에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 아이들이 언젠간 자신의 말을 이해할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쇼요는 아이들의 눈을 마주보고 웃었다. 애정이 담긴, 언제나처럼 따뜻하고 허전해 보이는 눈이었다.
“기대하고 있어요.”
완연한 봄이었다. 밤임에도 환하게 떠오른 달에 긴토키는 여전히 잠들지 않은채 마루에 앉아있었다. 쇼요의 말을 잠시나마 고민해봤지만 정확한 의미는 알지 못 했다. 시즈카라면 이해했을지 모르지만 차마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쇼요가 의미모를 말을 한 건 하루이틀 일이 아니었기에 긴토키는 이내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듯 품속의 검을 그러쥐었다.
’자신만의 검‘ 이란 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쇼요를 이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해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닐 터였다. 가진다고 해도 쇼요를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였고.
“좀 제대로 알려달라고요-….”
하아, 답답한 심정에 한숨을 쉰 긴토키는 마루에 드리운 달빛을 바라보다 저절로 시즈카가 있는 방으로 시선을 옮겼다. 분명 꿈자리가 사나웠을 텐데 다음날 보이는 시즈카의 모습은 평소와 같아 어젯밤의 일이 거짓말 같았다. 하루이틀 꾼다는 소리가 아니란 거겠지. 유심히 쳐다봤는데도 아무런 말도 안 하는 거 보면 자신이 매일 마루에 앉아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
오늘도, 악몽 꾸고 있겠지. 문 너머에 있을 시즈카를 인지하고 나니 괜히 시선을 떼기가 힘들었다. 자신과는 상관이 없었다, 분명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자, 자기 전에 그냥 보기만 하는 거야.’
이대로 방에 들어가 눕는다고 해도 옆방인 이상 신경 쓰일 게 분명했다. 긴토키는 속으로 여러 가지 변명을 늘어놓으며 조심히 시즈카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고있으면 조용히 얼굴만 보고 나오는 거고, 악몽을 꾸고 있다면 쇼요를 부르고 자신의 방안으로 돌아가면 되는 거였다.
스윽, 조심스레 열리는 방문에 긴토키는 저번처럼 문틈으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며칠 전과 같은 자세로 누워있는 형체는 뒤척이지도, 소리도 내지 않았다. 조금 더 문을 열자 들어오는 달빛에 형체가 드러났다, 잠시 숨을 들이쉬고 시즈카의 방안으로 발을 들인 긴토키는 자신의 검을 바닥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아, ]’
살며시 이마에 손을 가져다대자 느껴지는 물기에 긴토키는 시즈카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고 확신했다. 이전과 달리 앓는 소리도 내지 않고 색색 거친 숨만 내쉬고 있는 시즈카에 긴토키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쇼요를-‘ 쇼요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테고 이전처럼 편안하게 만드는 것도 가능할 것이었다. 긴토키는 그리 생각하며 쇼요를 부르려고 일어나다 시즈카의 모습을 보고는 멈추었다.
낮에는 그리 덤덤해 보이던 얼굴이 지금은 한없이 불안해보였다. 식은땀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도, 떨리고 있는 어깨도, 모두 자신이 처음보는 시즈카의 모습에 긴토키는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일었다.
뭐가, 무엇이 다른 거지? 시즈카가 땀을 흘리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여전히 작은 체구도, 가늘은 몸도 평소에 봐오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너무나 불안해보여 긴토키는 시즈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알게 된 사실에 긴토키는 숨을 들이켰다.
눈이었다.
항상 괜찮다고 말하는 그 눈동자를, 긴토키는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 만난 날에 본 하늘에 뜬 달과 같은, 쇼요와 닮은 그 눈동자를. 고작 눈을 감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눈앞의 아이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불안해보였다.
분명, 시즈카는 쇼요가 없으면 금방 죽어버리겠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긴토키는 옆에 놓인 쇼요의, 그리고 자신의 검을 꽉 쥐었다. 속에서 무언가가 막힌듯 울렁거리는 느낌이 몸 안을 맴돌았다. 방안으로 비춰져오는 달빛은 자신과 시즈카를 비추었다. 멈췄던 몸은 힘이 풀린 듯 제자리로 돌아왔고, 누워있는 시즈카의 옆에 앉아있는 긴토키는 여전히 괴로워 보이는 시즈카를 아무 말 없이 응시했다.
쇼요는 시즈카한테는 악몽이 병보다 더 큰 문제라고 말했었다. 몸이 아프면 약을 먹거나 치료를 하면 되지만 정신이 아프면 스스로가 바뀌는 수밖에 없었다. 꿈의 내용이 어떻든 좋은 내용은 아닐 테고 그런 꿈을 스스로가 원해서 꿀 리가 없었다. 스스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이었고 자신의 잘못은 더더욱 아니란 건 긴토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듯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자신은 쇼요가 아니었으니 시즈카를 편하게 만들어 줄 능력같은 건 없었다. 지금 시즈카의 목에 걸린 목걸이도, 쇼요가 시즈카에게 준 것이다.
시즈카에게는 쇼요가 필요했다.
긴토키는 그 사실을 떠올리고는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알 수 없는 불만감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 무턱대고 떠오른 단순하고 원시적인 감정에 혼란스러운 건 오히려 긴토키 쪽이었다. 왜 그런 감정이 든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긴토키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긴토키는 그제서야 자신이 시즈카와 쇼요를 닮았다고 생각한 이유를 깨달았다. 머리색도, 체형도, 성격도, 성별도, 무엇하나 달랐지만 시즈카와 쇼요는 닮은 눈을 하고 있었다. 언젠가 사라져버릴 듯이 허전하고 공허한 눈이, 너무나도 닮은 느낌을 주었었다.
하지만 쇼요와 시즈카는 다른 사람이었다. 강하고, 어른인 쇼요와 달리 시즈카는 남들과의 기준이 달랐다. 항상 괜찮다고 말하는 주제에, 남의 신경이나 쓰면서 안절부절못하고, 정작 그러는 자신은 이런 모습을 남한테 알리지도 않고 혼자서 끌어 안고 있었다.
떨리고 있는 손에 긴토키는 충동적으로 손을 뻗었다.
쇼요의 뒤에 있어 잘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한손으론 머리를 쓰다듬고, 한손으로는 손을 마주잡고 있었었다. 큰 기대를 가진 건 아니었다. 그저 쇼요의 손을 잡았을 때처럼 약간의 호기심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손을 잡았다고는 할 수 없는, 그저 손을 맞대는 행위와 다름이 없었다. 그마저도 손이 아닌 손가락이었지만 잡고 있었다는 것으로도 긴토키한테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붕대를 감아줄 때처럼 긴토키는 그 자세에서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고 시즈카에게로만 시선을 고정했다.
"……."
거칠었던 숨소리는 조금씩 멎어갔고 떨리던 손과 어깨는 눈에 띄게 떨림이 잦아들었다. 시간이 흐르고 나자 시즈카는 쇼요가 그랬던 것처럼 이내 고른 숨을 뱉기 시작했다. 긴토키는 그 과정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끝까지 보고있었다. 놀라움과 쑥스러움, 그리고 안도감 등이 섞인 감정에도 긴토키의 시선은 마주잡은 손가락을 향해 있었다.
자신의 손가락을 잡고는 편한 얼굴로 잠을 자는 시즈카에 긴토키는 형용못할 감정을 느꼈다. 눈을 감고 있어 보이지 않을 눈동자 대신 밤하늘에 뜬 달이 자신을 지켜보는 듯했다
"… 짜증나."
나직한 중얼거림과 함께 긴토키는 한참이나 시즈카의 옆에 앉아있었다.
. . .
“하암-”
신사옆에 위치한 커다란 나무는 긴토키가 좋아하는 장소였다. 정확히는 적당히 높은 위치에 적당히 시원한, 수업을 땡땡이치고 낮잠을 즐기기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날도 좋은데 낮잠이나 잘까 하는 생각에 자세를 고쳐잡은 긴토키는 눈을 감았다.
정확히는 눈을 감으려고 했다. 자신이 누워있는 가지의 위에서 불쑥 고개를 내미는 시즈카를 보기 전까지는.
"…!!!"
놀라 차마 튀어나오지 못한 소리없는 비명을 지른 긴토키는 쿵쾅쿵쾅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올때마다 인기척 좀 내라고 했더니. 놀랬더니 오히려 침착해져 무어라 설교할 생각조차 둘지 않았다.
"뭐, 뭔데. 갑자기 왜."
자신은 뭐가 그렇게 태연한 건지, 인기척도 없이 불쑥 나타난 시즈카는 이내 긴토키가 누워있는 가지에 사뿐히 착지했다. 자신이 나무 타는 걸 유심히 보더니 이렇게 금세 따라할 줄 몰랐던 긴토키는 후회와 기쁨이 공존하는 복잡한 심정이었다.
"산에 가자."
"또?"
'귀찮게….' 긴토키는 실망감과 귀찮음이 드러나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봄이 왔다고 생각된지 한 달이 지나, 신사에도 마당에도 벚꽃이 한가득이었다. 산들도 제각각 분홍빛과 초록빛들로 물들었고 쇼요는 요새 수업이란 명목으로 두 사람을 이끌고 산에 올랐다.
갈 때마다 나물이라든가, 생선이라든가 이것저것 저녁으로 쓰일만한 재료들을 용하게 구해오는 쇼요였고 가끔씩은 두사람에게 사냥이나 덫을 놓는 방법도 일러주곤 했지만, 역시 긴토키는 등산보다는 나무 위에서의 한가한 낮잠을 좋아했다. 이곳은 주위에 어디를 둘러봐도 산이 위치했고, 똑같은 산의 풍경에 질린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정작 긴토키가 등산을 피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하아… 안 간다고 하면?"
"선생님이 직접 찾아오실 거야."
직접 찾아온다는 소리는 꿀밤을 먹인다는 소리였다. 흠칫 돋는 소름에 긴토키는 밍기적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있는 곳은 어떻게 귀신같이 알고 찾아오는 건지…. 힐끗, 시즈카를 돌아본 긴토키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진짜 귀신이 알려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갑니다, 가."
훌쩍, 가지위에서 뛰어내린 긴토키는 이어 바닥에 착지하는 시즈카한테 손을 내밀었다. 내미는 손을 붙잡고는 자신을 뒤따라오는 시즈카에 긴토키는 뒷목을 긁적였다.
"오늘은 봄나물을 캐도록 할까요?"
익숙한 바구니를 각각 하나씩 짊어든 채 쇼요는 두 사람에게 작은 호미를 나눠주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긴토키는 벌써부터 귀찮음이 몰려왔다.
"지금쯤이면 달래가 제철이겠네요. 시즈카, 먹어볼래요?"
언제 뽑은 건지 손에 들려있는 나물에 쇼요는 물통에 담아온 물로 헹구고는 시즈카에게 내밀었다. 순순히 쇼요가 주는 걸 받아먹은 시즈카는 우물우물 아무런 표정변화 없이 씹다 꿀꺽 삼켰다.
"나쁘지 않죠? 긴토키는요?"
"…? 괜찮은 거 맞아?"
분명 쇼요가 준거면 먹을 만한 맛이 아니었을 텐데. 순순히 받아먹는 시즈카에 긴토키는 긴가민가하면서 쇼요가 건넨 나물을 입에 넣었다. 씹자마자 올라오는 매운맛에 긴토키는 바로 뱉고는 쇼요를 노려봤다. 나쁘지 않기는 개뿔이.
"난 나물은 별로야."
"하지만 건강에 좋다고요? 길가에서 흔히 보는 민들레도 알고보면 먹을 수 있는 식물이에요. 잎은 식용으로 쓰이고, 씨앗은 긴토키의 머리카락 같아서 후 불면 바람에 잘 날아가죠. 뿌리는 약재로도 쓰여요. 이거처럼 주위를 둘러보면 생각보다 쓸모가 많은 게 식물이랍니다."
"중간에 그거 무슨 뜻인데!!"
' 뭔가 이상한 게 끼여있었잖아?! ' 특유의 웃는 얼굴로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쇼요에 긴토키는 결국 바락 소리를 질렀다. 가뜩이나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긴토키였지만 주위의 두사람은 스트레이트였기에 긴토키의 고충을 전혀 알아주지 않았다.
"그럼 무슨 일이 생기면 저를 부르세요. 바구니를 가장 많이 채운 사람이 이기는 겁니다?"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어주고는 풀숲으로 향하는 쇼요에 긴토키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 도발에 넘어갈 나이는 이미 지났었다. 누가 모범생 아니랄까봐 주위를 둘러보며 무언가를 찾는듯해 보이는 시즈카를 보며 긴토키는 걱정담긴 한숨을 쉬었다.
"이리와."
짧은 부름과 함께 손을 내밀자 손을 잡는 이 단순한 동작들을 꽤 많이 반복한건지 두 사람한테는 저번과 같은 어색함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는 별로 없어. 그러다 길 잃어버리기 전에 강가로 가자."
긴토키가 등산을 하기 싫어하는 결정적 이유는 시즈카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시즈카는 길을 약간 헤매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문제는….
"그거 못 먹는 거야, 냅둬!"
… 아무거나 다 먹는 식성을 가진 탓에 이상한 걸 주워오기 일쑤였다. 많이 먹는 것도 아니면서 가리는 건 없기 때문에 먹어도 되는 건가, 하고 맛보다가 죽기 십상이었다. 이래서 산에 오기 싫었는데…. 자연스레 양쪽을 다 신경 써야하는 긴토키는 피곤한 게 당연했다.
시즈카의 손을 이끌어 강가로 가는 중에도 시즈카는 이것저것을 물어봤고 그때마다 긴토키는 귀찮아하면서도 성실하게 답해주었다. 쇼요가 준 책에서는 식물뿐만이 아닌 다양한 나라의 동식물들이 나와 있었는지 시즈카는 나름대로의 공부가 되었다. 하지만 책을 읽지 않는 긴토키는 그 사실을 몰랐다.
개울가는 두 사람이 있던 곳에서 멀지 않았다. 나무줄기를 넘고,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작은 물줄기들을 넘다 보면 꽤 폭이 넓은 강이 나왔었다. 도착하자마자 강가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나무위로 올라간 긴토키는 손을 시야위로 올리고 미간을 좁혔다.
여기라면 꽤 멀리까지 보이고 누가 부른다고 해도 금방 갈 수 있겠지. 어느새 자신을 따라 옆에 앉아있는 시즈카에 긴토키는 흠칫하며 가지위에서 뛰어내렸다.
"난 낮잠이나 잘 거야. 넌 여기 주변에서만 돌아다녀."
'뭐 주워도 먹어보지 말고 가져와.' 짧은 충고와 함께 긴토키는 가보라는 듯이 손을 휘적였다. 평소라면 고개를 끄덕이곤 금방 사라지던 인영과 달리 잠시 눈을 감았다 떠도 여전히 제자리에 있는 시즈카에 긴토키는 당황했다.
잠시동안 개울가로 시선을 향한 시즈카는 무슨 생각인지 숲속이 아닌 강쪽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바구니를 큰 돌 위에 냅두고 강물을 바라보던 시즈카는 이내 강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몸을 일으키고는 기모노의 소매와 밑단을 접어올리기 시작했다.
"…? 잠깐, 너 지금- 야!! "
멀뚱히 지켜보는 긴토키에도 상관이 없는지 기모노를 무릎까지 접어올린 시즈카는 그대로 신발을 벗고는 첨벙첨벙 강물에 들어갔다. 놀라 뛰어오는 긴토키에도 시즈카는 멀뚱히 눈만 깜빡였다.
"왜 그래, 긴토키?"
"왜 그래, 가 아니잖아! 갑자기 물에는 왜 들어가는 건데?!"
깊지는 않으니 빠진다거나 하지는 않을테였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행동이었고 의도를 짐작 할 수조차 없었다. 건너편으로 가려고한다면 옆에 돌다리가 있었고 굳이 물속을 건너갈 이유는 없었다.
"저기,…."
"…?"
"긴토키는, 물고기 잡을 수 있어?"
뜬금없는 질문에 긴토키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반짝이는 강물에는 물방울이 튀어올랐고 개울가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깊은 곳에는 작은 형체가 돌아다니는 게 눈으로 보였다. 그래서,지금 물고기 잡으려고 하는 거야? 갑자기? 잡을 수 있냐는 질문은 잡아달라는 뜻인가? 물음표를 잔뜩 띄우는 긴토키와 달리 물어본 시즈카는 잠시 머뭇거리고는 목에 걸린 부적을 만지작거렸다.
"잡을 수야 있다만…."
지금은 작살이라든가 도구가 없으니 맨손으로 잡는 수밖에 없었다. 쇼요는 맨손으로도 잡아내던데…. 쇼요의 기준은 어딘가 이상했기에 그게 정상의 범위에 들어가는 일인지가 확실치 않았다.
"…지금 배고파?"
수업 끝나고 점심 먹었었는데, 그때 본 시즈카는 평소와 같은 정량을 먹었었다. 정량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이 보기에는 조금 모자란 양이였고 혹시나 성장기가 일찍 온 건가…? 하는 의문을 지울 수 가 없었다. 배가 고파 그런다면 이해는 할 수 있겠지만 이런 곳에 사는 물고기들은 대부분 크기가 작아 맛이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설레설레 고개를 젓는 시즈카에 긴토키는 끄응, 앓는 소리를 내었다. 곤란해하는 표정을 읽은건지 시즈카의 눈동자가 잠시 바닥을 향했다.
"아,미-"
"하지 마!"
반사적으로 저지한 긴토키는 그제서야 눈치챘다. 시즈카는 지금 '자신'에게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아 잠시 다른 방향으로 말이 튀어나갔다. 지금까지 어떤 것이든 척척 해냈던 시즈카가 부탁을 하는것도 신기했지만, 그 대상이 쇼요가 아닌 자신이라는 사실이 무엇보다 믿기지 않았다. 처음으로 시즈카가 자신에게 무얼 원했다는 생각에 묘한 감정이 일었다. 왠지 부끄러워져 말을 고르고 있으니 또 시선을 마주보는 시즈카에 긴토키는 다급히 손을 휘저었다.
“어, 어떻게든 잡아줄 테니까 일단 나와 봐!”
강물이 차갑지는 않았지만 괜히 물속에 있어 좋을 게 없었다. 걸어나오는 시즈카한테 검과 바구니를 맡긴 긴토키는 그대로 소매와 밑단을 접어올리고는 강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막상 들어오니 잡을 수 있을까 걱정이 들기 시작했지만 이미 들어온 이상 무를 수도 없다는 사실에 긴토키는 스스로가 제 묘를 판 듯한 착각이 일었다.
시즈카는 긴토키가 신경 쓰이는지 바구니와 검을 가져다 놓으면서도 긴토키를 계속 주시했다. 강물은 바닥이 보일만큼 맑았지만 움직이는 물고기를 잡는 일은 그거랑 별개였다. 쇼요가 언제 자신을 데려와 물고기를 잡긴 했었지만 그때 시즈카는 혼자 나물을 캐고있었다. 시즈카가 길치라는 걸 알게 된 날이기도 하지만, 아마 그 뒤로 쇼요는 시즈카를 강가로 데려오지 않은 거겠지.
‘…부담돼….’
악의가 있는 건 아니겠지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이 신경쓰였다. 평소에도 시선을 신경쓰긴 했지만 시즈카가 먼저 부탁한 만큼 기대감과 부담감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보고만 있으면 심심하지 않아? 뭐라도 이야기나 해보지그래.’
시즈카는 고개를 끄덕이길 잠시 목에 건 부적을 만지작거렸다. 부담감에 아무 말이나 뱉은 거였는데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즈카의 모습에 긴토키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기 시작했다. 진짜 해주려는 건가?
“…책에 나온 이야긴데, 세상에 있는 강들은 바다랑 연결되어 있어서 강을 따라가다 보면 언젠간 바다가 나온대. 엄청 넓고 깊으면서 굉장히 아름다운 곳이래. 강처럼 다양한 물고기들이 살고, 물고기뿐만이 아니라 산호, 미역, 다양한 해산물도 많은 곳이래.”
긴토키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바다라는 걸 알고는 있었다. 장에 가면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와 강에서 잡은 물고기는 차이가 나 쉽게 구별 할 수 있었다. 바다와 관련된 요괴 같은 괴담들도 쇼요에게서 들은 기억이 났다. 하지만 굳이 바다를 찾아갈 정도로 궁금한 건 아니어서 별로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들은바로는 웬만한 어른들은 적어도 바다를 한번쯤 보는 모양이었다. 그만큼 이 땅이 바다와 가깝다는 소리겠지.
“바다, 본 적 없어?”
“응, 그림은 봤는데 실제로 본 적은 없어.”
자신이 살았던, 지금은 떠나버린 마을도, 쇼요와 긴토키와 지내고 있는 이 마을도 바다와는 거리가 먼 산골이었다. 고향을 떠나 마을에 정착하기 전 쇼요와 여행하면서 배운 것은 전부 시즈카에게 있어서 새로운 것이었다. 불을 피우는 방법도, 덫을 치는 방법도, 검술도, 지식도, 웃는 방법도, 이름도 그 어느것도 처음 배우는 새로운 것이어서 정신없이 쇼요를 배우고 따라했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긴토키를 만났던 날도 기억에 담겨있었다. 긴토키랑 먹은 당고도, 한밤중에 자신의 손을 잡아주고 있는 긴토키의 모습도, 시즈카는 어느 것이든 쉬이 잊는 법이 없었다.
쇼요가 준 책에서는 자신들이 보기 편하도록 다양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바다의 모습도, 바다에 사는 생물들의 간단한 삽화도 첨부되어 있었다. 그중에 시즈카의 관심을 사로잡은 건 돌고래라는 생물이었다. 지능이 높고 무리생활을 하는 돌고래는 인간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지닌 동시에 흉포함을 지닌 생물이라고 쓰여있었다. 그리고 책을 쓴 사람은 돌고래에 대해서 짧은 한 줄만을 남겨놓았다.
‘그건 거대한 돌고래였다.’
그 짧은 한 줄에 시즈카는 저자가 본 관경을 직접 봐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앞에 있는 강을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바다가 나올 것이었다. 그곳에 돌고래는 존재하지 않겠지만, 그런 생물들이 사는 바다란 곳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 싶었다.
“…보러 가고 싶어?”
시즈카는 고개를 저었다. 단지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고 그저, 언젠가 보러간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긴토키는 시즈카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신경한 시즈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낸 만큼 바다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을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걸 쇼요한테 말하지 않고 자신에게 말한 이유는 어차피 소망일 뿐이어서, 이뤄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이야기를 꺼냈다는 사실에 긴토키의 기분은 다시 가라앉았다,
“보러 가자.”
나직한 말에 시즈카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긴토키는 햇살 아래에서 시즈카의 눈을 마주보고 말했다, 강에 비친 햇살에 강바닥의 돌들이 여러 빛으로 빛났다. 순간 빛을 받은 붉은빛의 눈동자가 태양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내일이든 모레든, 언제든 보러가자. 쇼요랑도 같이.”
당장 가지 못한다면 어른이 된 다음 가면 되는 일이었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를 기약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긴토키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다. 전쟁터를 전전하던 자신이 지금 따뜻한 봄날을 만끽하는 생활을 보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까마귀들만이 맴돌던 그 지옥 속에서 손을 내밀어준 두 사람이 곁에 있어주는 현재가 언제까지나 이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긴토키는 자신을 믿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자신이 아닌 쇼요랑 시즈카를 믿고서 말하는 거였기에 확신 할 수 있었다. 언제까지나 이런 일상이 이어진다면 긴토키는 그걸로 충분했다.
시즈카는 그런 긴토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쇼요와 닮은 다정하고 흔들림없는 눈동자는 언제나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의 등을 바라보다보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슬프기다엔 벅차고 가볍다기엔 묵직한 감정이었다. 쇼요를 볼 때마다 느끼는 감정과는 달랐다. 그저, 그저 가슴께가 아려오는 기분에 고개를 들면 긴토키는 항상 손을 내밀어주었다.
쇼요에게 물어봤지만 쇼요는 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웃음을 짓는 법도 기쁘다는 감정도 쇼요가 알려주었는데 쇼요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 표정이 자신을 내려다보던 긴토키의 표정과 너무나 닮아있어 시즈카는 깨달았다. 역시, 긴토키는 쇼요를 닮아있었다.
“…응, 그러자.”
고개를 든 시즈카는 환하게 웃고있었다.
늘 쇼요에게만 보여주던 웃음은 긴토키를 향해있었다. 웃음을 마주한 긴토키는 가슴께가 저려왔다. 봄을 닮은 환한 웃음은 쇼요를 똑 닮아 눈에는 애정을 가득 담고있었다. 긴토키는 분명 속으로 이 웃음을 다시보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마주 본 웃음을 봄을 닮아 금방이라도 져버릴 듯했다.
“…시-”
“-긴토키, 시즈카. 거기있나요?”
수풀 너머에서 들려오는 쇼요의 부름에 긴토키의 목소리는 묻혀버렸다. 첨벙, 발걸음에 바닥에 있는 물고기들이 모두 긴토키를 피해 흩어졌고 긴토키는 물고기가 숨어버린 강바닥을 보고 멍하니 탄식했다. 아직 물고기를 잡지 못했는데 자신들을 부르는 쇼요에 긴토키는 난색을 드러냈고 시즈카는 서둘러 긴토키의 검과 바구니를 들고왔다.
“긴토키, 가자.”
“저기…”
“-괜찮아.”
물고기를 잡지 않아도 괜찮다는 의미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저하는 긴토키에 시즈카는 그저 괜찮다고 말하면서 긴토키에게 손을 내밀었다. 대체 뭐가 괜찮다는 걸까. 의미를 모르겠으면서도 긴토키는 아무 말 없이 시즈카의 손을 잡았다. 그래. 괜찮을 거야. 시즈카를 믿지 않는 건 아니었다. 억지로 자신을 다스리면서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지만 알 수 없는 찝찝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은 보름이었다. 잎을 내밀던 벚나무는 어느새 분홍빛 꽃잎에 휩싸여 부서지듯 흩어지고 있었고 긴토키는 그런 벚나무를 보다 떨어지는 벚꽃잎을 하나 잡았다. 벚꽃은 찰나의 아름다움과 같았다. 영원히 피어있을 듯이 흩날리고는 비가 오면 금세 져버리니까.
낮잠을 자지 못해 나른한 몸에 긴토키는 하품을 하며 시즈카의 방으로 향했다. 사실 긴토키는 시즈카에게 말하지 않고 이전 한 달 간, 매일같이 손을 잡고 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걸 반복했다. 이쯤 되니 잠들기 전 시즈카의 방으로 향하는 게 하루일과가 된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리가 나지않도록 조심스레 걸어간 긴토키는 방 앞에 앉아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문 사이로 보이는 이불은 늘 같은 위치에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날은 평소와 달랐다. 유난히 싸늘한 듯한 방안에 긴토키는 의문을 품었고 문 사이로 보이는 바닥에는 시즈카의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에 긴토키는 소리를 죽이는 것도 잊고 문을 열어젖혔다. 밝은 달빛이 방안에 드리웠고 긴토키의 그림자가 비쳐진 방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시즈카…?”
긴토키는 발끝에서부터 자신을 타고오는 불안감에 뒷목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자신은 밤이 되면 늘 마루에 앉아있었다. 시즈카의 인기척도 쇼요의 인기척도 못 느꼈을 뿐더러 어떠한 소리도 못 들었었다. 시즈카는 언제 이 방을 나간 거지? 아니, 애초에 방에 들어가긴 했었나? 주위에서 들리는 소리가 거짓말 같이 조용해져 자신의 심장소리만이 들렸다,
긴토키는 당장 몸을 돌려 뛰쳐나갔다.
쇼요를 부를 새도 없이 몸이 먼저 반응했다. 쇼요를 부른다고 해도 시즈카를 찾을 수 있을까. 단순히 화장실에 가거나 산책을 나갔다 치기에는 무언가 이상했다. 이불만 없어졌을 뿐인데 아무것도 없는 방안이 마치 누구도 지내지 않는 방처럼 느껴졌다. 그 방안에서 시즈카의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욕실, 대련장을 지나 긴토키는 대문을 빠져나왔다. 시즈카는 어디로 갔지? 자신이 시즈카라면 어디로 갈까?
“…….”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은 시즈카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다. 시즈카의 취향도, 시즈카가 좋아하는 것도, 시즈카가 포기 할 수 없는 것도. 몇 달이 되는 시간동안 함께 지냈음에도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긴토키는 무턱대고 산길을 달렸다. 숨은 차오르고 달빛도 가려진 숲속에는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을 정도로 보이는 게 고작이었다. 뛰는 와중에도 머릿속은 엉망이었다.
시즈카는 왜 떠난 거지? 진짜로 떠날 생각이었나? 찾을 수 있을까? 찾는다고 해도 다시 돌아올까?
어째선지 낮에 본 시즈카의 웃음이 떠올랐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구나. 시즈카의 웃음을 봤을 때 느낀 위화감의 정체는 이것이었다. 시즈카의 눈이 쇼요를 닮아 있었다고 생각한 이유는 언젠가 사라져버릴 듯 허전하고 공허했기 때문이다. 사실은 믿고 싶지 않았다. 그 눈이 거짓이길 바랐는데. 긴토키는 터질 듯 뛰는 심장에 이를 악물었다. 부족한 공기에 목과 폐가 아려져왔다,
그럼에도 발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나뭇가지와 바위를 타고 넘을 때마다 긴토키의 눈빛은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 길이 맞을까? 자신이 틀린 건 아닐까? 시즈카는 자신이 어디에 있든 귀신같이 찾아왔었다. 쇼요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자신은 쇼요와 시즈카가 사라진다고 하면 찾아낼 자신이 없었다.
내가 뭘 할 수 있지?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에 긴토키는 숨을 들이쉬었다, 자신은 쇼요가 아니었다. 자신은 시즈카에게 있어 쇼요와 같은 의미를 지닐 수 없었다. 시즈카가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쇼요라는 건 처음부터 눈치챘었다. 시즈카가 기다리는 건 쇼요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긴토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얼마나 뛰었는지 시간 감각이 엉망이었다. 어느새 숲의 끝자락까지 온 건지 달빛에 주위가 환해졌다. 옆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고 강의 끝자락에는 긴토키가 찾아다니던 익숙한 뒷모습이 서있었다, 다리는 떨리고 찢어질 듯한 폐에도 긴토키의 시선은 오직 검은 머리칼에 고정되어 있었다.
“시즈카!!!”
쿨럭,컥, 마른 목에 절로 기침이 튀어나왔고 그 부름을 들은 건지 뒤로 돌은 시즈카의 표정은 첫 만남에 봤던 얼굴과 다르지 않았다. 어둠속에서 잘 보이는 노란 눈동자. 하늘에 뜬 달과 다름없었다. 긴토키가 시즈카를 향해 뛰어가는 순간에도 시즈카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시즈카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긴토키는 시즈카의 손을 붙잡고는 눈을 마주보았다.
“어디로 가는 거야?”
“…….”
마주본 긴토키의 눈에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담겨있었다. 배신감, 안도감, 의문, 죄책감…. 마치 긴토키의 머릿속처럼 섞여 엉망인 감정들이 들여다보였고 그 혼란스러운 붉은눈에는 자신이 비쳐지고 있었다, 아무 말이 없는 시즈카에 긴토키는 진정되는 호흡대신 빨리지는 고동을 느낄 수 있었다. 울화가 치밀었다.
“이 한밤중에, 맨몸으로 어딜 가는 거냐고!”
울컥하며 뱉어낸 목소리는 불안정하게 떨리고 있었다. 시즈카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음식도, 물도, 그 어떤 물품도 없이 입고 있는 옷과 목에 걸린 귀걸이가 전부였다. 자신이 시즈카를 찾지 못했더라면 시즈카는 그대로 떠났을 것이었다. 이런 꼴로 떠나서? 그대로 떠났더라면? 시즈카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에 긴토키는 이를 악물었다.
“가서, 돌아올 생각은 있었어?”
차라리 잠깐의 산책이었다, 라고 말해줬으면 좋았을거였다. 산책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먼 거리지만, 험한 길을 넘어야했지만, 그럼에도 안심할 수 있었다. 그려러니 하고 넘어갈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대답이 없는 시즈카에 긴토키는 확신했다. 시즈카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오해라거나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즉각 부정하는 답을 들려주는 사람이었다. 침묵을 택했다는건 일종의 긍정의 표현이었다. 정말로. 정말로 떠나려고 했던거구나.
“내가 있어서 그래? 내가 싫어?”
긴토키는 시즈카와 쇼요 둘만의 공간에 자신이 침입했다고 생각했다. 쇼요는 긴토키에게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지만 옆에 있던 시즈카는 긴토키가 왔을 때 아무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아니야.”
“그럼 왜 떠나려고 하는 건데! 쇼요랑 나한테 아무 말도 없이 떠나서...!!”
즉각 돌아오는 부정에 긴토키의 속은 타들어갔다, 배신감과 분노보다 더 큰 감정에 긴토키 스스로도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시즈카가 떠날 거라는 생각을 해본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시즈카가 떠날 이유가 없었으니까. 불안감을 애써 숨긴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떠나는 건 자신이 했으면 몰라도 시즈카가 떠나야 할 이유도 없었다.
” 긴토키한테는 쇼요선생님이 있잖아. “
시즈카는 나긋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했다. 긴토키와는 상반되는 그 음색이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감정에 휩쓸려 혼란스러워하는 긴토키와 달리 시즈카는 차분한 상태였다. 자신에게는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었기에 긴토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시즈카는 긴토키와 쇼요가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자신이 없는 편이 두 사람을 위하는 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누구한테도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나란히 선 두 사람의 등을 보며 시즈카는 항상 안도했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기쁜 일이었다,
괴물과 괴물이 만나 사람이 되기를 바란 자신의 스승처럼 시즈카 또한 두 사람이 서로를 만나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고 서로 의지하는 그런 환경이 되기를 바랐다, 그 시기가 조금 더 빨라진 것 뿐이였고 영원한 이별을 바란 건 아니었다. 다시 만난다는 그런 기약 없는 약속을 할만큼 시즈카는 사람들의 애정에 대해 박식한 편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이 행복하길 바랄 뿐이었다,
그 상황에 자신이 있고없고는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그럼 너한테는? 또 괜찮다고 할 거야? 괜찮은 게 어디있어!!”
괜찮은 건 없었다. 긴토키가 보기에 이상한 행동들도 시즈카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아니었다, 긴토키는 그런 시즈카를 이해했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거였다. 자신의 것을 빼앗기고도 괜찮다고 말하는 건 정상이 아니었다. 자신의 것은 쉽게 나누어주면서 상대방이 주는 것은 받지 않았다. 그래놓고 괜찮다고 말하는 시즈카가 긴토키는 늘 싫었다,
“원래 너거였잖아! 쇼요도, 이 옷도, 이 음식도, 모든 게 전부 너거였는데…!!!”
“긴토키.”
떨리는 목소리로 악을 쓰듯이 외치던 긴토키는 시즈카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음에도 시즈카는 긴토키가 울고있는 거 같은 착각이 들었다. 마주본 눈동자는 평소와 같았다.
“왜 긴토키가 슬퍼하는 거야?”
그 달 같은 눈동자가 뇌리에 박혀버린 그날부터 긴토키는 시즈카를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긴토키는 울고싶은 심정이었다, 답답하고 답답해서 미칠 거 같은데 시즈카는 그런 자신을 언제나 바보로 만들었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말하는 그 무덤덤한 눈동자를 보면 위화감이 들었다.
“왜 긴토키가 가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긴토키가 있을 장소는 여기고, 긴토키의 곁에는 늘 쇼요선생님이 있잖아.”
긴토키는 스스로를 시즈카에게 비쳐 봤을지도 몰랐다. 마을 사람들에게 배척받는 것도, 늘 죽음을 옆에 두고 지낸 것도, 홀로 떠나는 것도 전부 자신과 닮았기에 그런 시즈카의 옆에 쇼요가 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다, 여긴 자신의 자리가 아니었고 그렇게 생각하는 긴토키였기에 자신과 똑같이 떠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던 시즈카가 더욱 눈에 밟혔다.
“괜찮아.”
시즈카를 볼 때마다 느낀 위화감은 시즈카가 아닌 긴토키 스스로에게 느낀 거였다, 그냥 무시하면 되는 건데. 평소처럼 모른 척 하면 되는 건데. 생각해보면 늘 자신은 시즈카를 신경 쓰고 있었다, 금방 사라질 듯한 분위기에 초조해하면서.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면서도 살피고 불안해하고, 시즈카의 행동 하나하나를 신경 쓰는 자신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헤어짐은 익숙했고 원래의 자신이라면 미련 없이 보내줬을 터였다. 전쟁터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일은 일상처럼 일어났고 긴토키는 그런 일을 수 없이 겪었었다.
“괜찮으니까 포기하려고 하지마.”
따뜻한 집도, 따스한 온기도, 음식도, 애정도 무엇 하나 전쟁터에서의 삶을 지내온 긴토키는 포기하다시피 한 것이었다. 그런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은 쇼요가 처음이었고 포기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준 사람은 시즈카가 처음이었다, 엉망으로 일그러졌던 얼굴은 천천히 평정심을 되찾았다. 포기하지 말라는 말은 평소에 긴토키가 시즈카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욕심도, 원하는 것도 없는 시즈카를 빼앗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에서 살아온 긴토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남한테서 듣는다고 기쁠 리 없었다. 자신이 들어야 할 말을 상대방한테 해주는 시즈카에 긴토키는 절로 힘이 빠졌다. 떠난 주제에 강을 따라가는 시즈카도, 그런 시즈카를 따라온 자신도 바보같이 느껴졌다.
“…뭐야, 그게…. 진짜 모르겠다고 너….”
“….”
긴토키는 엉망인 얼굴을 소매로 문지르고는 시즈카를 마주봤다. 다시 마주한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고 무언가를 각오한 듯했다.
“나랑 약속해. 너가 어딜가든 상관 안 할 거야. 이거 하나는 기억해.”
두 사람은 기약 없는 약속을 믿지 않았다. 그렇기에 상대방을 믿고 하는 약속이었다.
“너가 돌아올 곳은 쇼요랑 내가 있는 여기야! 돌아왔을 때는 ‘다녀왔습니다’ 한마디로 충분하니까 어딜 가든 여기가 집이란 걸 잊지 마.”
집이란 건 긴토키에게 있어 두 사람이었다. 전쟁터에서 지내던 자신에게 처음으로 생긴 자리에는 시즈카와 쇼요가 있는 게 당연한 거였다. 시즈카가 자신과 쇼요에게 돌아올 마음이 있다면 자신은 언제까지나 시즈카를 기다릴 것이었다. 송하촌숙이 집이고 쇼요가 스승이라면 자신 또한 시즈카의 포기 할 수 없는 존재가 되면 되는 일이었다, 가족이든 친구든, 동문이든 어느쪽이든 좋았다. 자신에게 있어서 이미 시즈카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으니까,
“떠날 거야?”
긴토키는 잡고 있던 시즈카의 손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놓은 손을 거두지는 않았다, 시즈카는 손을 잡을때는 늘 힘을 주지 않았다. 항상 상대방이 힘을 풀면 놓을 수 있도록 잡는 방식은 시즈카가 살아오는 방식과 같았다, 떠나는 자신을 붙잡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자신이 스스로 손을 붙잡는 경우는 쇼요와 긴토키가 처음이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긴토키 곁에는 자신이 있는게 좋을 거라고 판단한 시즈카는 긴토키의 손을 잡았다.
떠난 이유는 쇼요의 곁에 더 이상 자신이 없어도 되겠다는 이유 때문이었지만 돌아가는 이유는 긴토키의 곁에 자신이 있어야겠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시즈카한테 긴토키가 필요한 건지, 긴토키에게 시즈카가 필요한 건지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쪽도 서로 같은 마음이었다,
“가자, 시즈카.”
두 사람은 왔던 길을 반대로 돌아갔다. 산을 넘고 개울을 건너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두사람은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올때보다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두 사람은 송하촌숙에 도착했고 그 앞에서 기다리고 서 있는 건 쇼요였다. 쇼요를 발견하고 안색이 파래진 긴토키에 쇼요는 평소와 같은 웃음을 띄우고는 두 사람의 앞에 섰다.
“잘 다녀왔나요? 이 악동들.”
특대의 꿀밤에 긴토키의 단말마와 함께 두 아이는 머리만 남겨두고 바닥에 박힌 모양새가 되었다. 머리에 난 혹과 함께 아픈지 끙끙거리던 긴토키는 무어라 변명을 하려 입을 뻐금거리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시즈카는 아픈 기색도 없이 멍하니 눈만 깜빡거렸다,
“뭐야, 왜 그래.”
“아니...꿀밤 처음 맞아봤어.”
‘아…맞다. 얘는 모범생이었지.’ 어안이 벙벙한지 머리에 혹이 난 상태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시즈카에 긴토키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시즈카는 고개위로 보이는 쇼요와 쇼요에 뒤에 있는 송하촌숙이라는 간판을 바라보았다. 쇼요는 여전히 이런 괴력을 지닌 사람이라고는 예상되지 않는 사람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바닥에 꽃힌 긴토키와 달리 시즈카는 요령 좋게 빠져나왔다. 긴토키를 마저 도와주며 끙끙거리자 쇼요는 등을 돌려 서당 안으로 발을 들였다,
“쇼요.”
눈앞에 있는 송하촌숙(松下村塾)은 두 아이의 집이었다. 그리고 눈앞의 남자는 괴물의 아이를 데려와 사람이 되는법을 가르치는 괴물이었다,
“어째서 우릴 주워온 거야?”
주워온 건지, 주워진 건지는 쇼요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서당을 열 거예요.”
“지금은 저희들밖에 없지만 언젠가 당신들 같은 동료들이, 많은 사제들이 생겼으면 좋겠네요.”
하지만 두 아이가 보는 눈앞의 남자는 스승이자 가족이자 어디까지나 괴물 같은 사람이었다, 소나무 아래서 만들어진 서당은 세 사람의 약속이었다. 저마다의 무사도를 가슴에 품고, 저마다의 무사가 되는 그들을, 한 사람이라도 많이 지켜보는 게 제가 짊어진 무사도일지도요. 손을 맞잡은 두 아이를 보며 쇼요는 미소지었다.
“어서와요. 송하촌숙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