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감쪽같은 속임수

이경은 그 날 쇼파에 앉아 있었다. 입을 마주해오며 입망울을 슬근 삼키듯 입 공간을 좁혀오는 그가 얄궂었다는 걸 말하는 것은 아니다. 슬슬 입가에 다가오던 입꼬리를 이경은 내치지 못했다.

“눈 감아, 태이경.”

눈꺼풀을 손가락 끝으로 다듬듯 만지작거리다 남자는 입술 끝을 슬금 매만져 더듬어갔다 쓸어내렸다. 차갑다기보다는 서늘한 감촉이 입술 끝에서 스며들다 입술 전안을 적셔 이경은 그의 손끝을 슬쩍 빨아들이고는 그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말을 읊조렸다.

이경은 말했다.

“나는 눈뜬 채로 키스 하고 싶으니까요.”

빙긋 입꼬리 끝이 슬깃 올라가며 가후는 살갑게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입술이 서로 마주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이경은 나직히 말을 이어갔다.

 

“눈을 감으면 연애하는 것 같을 테니 그렇습니다. 내 시선 앞 갈색 눈빛을 품고 몸을 기울인 당신도, 감아쥔 손등도, 기대어오는 어깨도 눈을 감으면 그저 감촉이지 않습니까. 앞이 보이지 않으니까 당신에게 몰입해 부유하는 느낌에 나는 열망할지도 몰라요. 당신을 잠시일지언정 열망하고 싶지 않습니다.”

 

숨소리가 새어나온다. 태이경은 왜 나와 입을 맞추려고 하나? 이경은 답하지 않았다. 눈을 까무룩 깜박인다. 심장 맥동은 나그네가 지샐 길을 머뭇대며 걸음을 밟는 듯 큰 폭으로 품에서 성큼 두근거렸댔다.

 

웃음소리가 긴 사색처럼 지나갔다. 별안간 이경은 남성의 입술에 손을 가로대며 손가락을 차츰 엄지부터 접어내며 입술에 스치우듯 눌러 흘러냈다. 남자가 손끝에 제 혀를 닿으며 입맞춰내는 음색이 귓가에 새벽처럼 아득하게 퍼졌다. 먼젓번 입을 뗀 키스를 드러내는 상징 같았다. 찬찬히, 느릿느릿, 남성은 굳은살이 박인 곳을 피해 입을 맞춰갔다.

 

“가형은 나를 잘 압니다.”

 

제 몸을 지킨다하여 검을 매일 아침 쥐느랴 엄지와 검지 사이 틈새가 건조히 메말라 버리다 못해 뿌리 끝이 모래알 같아진 곳을 웅덩이를 껑충뛰듯 넘어가고는 입 맞추는 남성을 유히 보며 이경은 말했다.

언제부터 알았냐고 묻는다. 채용공고에, 일 하는 척만 하고 남에게 정보를 물어다주는 제비같은 사람을 뽑을 수는 없는지라. 응, 마음에 찼지만, 입안 발음이 뭉개지는 것이 여간 선정적이다. 손에 들어오는 감촉에 이경은 손을 움찔했다. 멈춰선 채 손 틈새 사이로 벌어진 곳에 들어오는 눈동자가 유독 선연하다. 틈새 사이로 곧이어 들어오는 감촉이, 번뜩이다시피 차올랐다.

 

그는 시선을 가까이 둘 생각조차 안 한 채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따질 걸 따지며 채용자가 심려를 기울인 선택이었다고 말하는거지요, 이놈은. 먹고 살고 입에 풀칠하기에 바쁜 직장인이라 일을 빠릿빠릿하게 확실히 맺음 지어야지. 잘못 고용했다 소매끝에 붙은 실밥처럼 주인 눈에 비춰져서야 될련지요?”

“그런 사람이 제 부관하고 이럴 마음이 드십니까."

남자는 입속 가득히 웃음을 서린 채 웃는다. 이경은 그가 눈 덮인 항구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뱃고동 소리가 벅쩍함을 실었다 내리고 서린 옷자락이 소복히 외항지에 발깃을 디디는 날. 땅을 덮은 흰 천과 같은 눈을 발을 쫑긋거리며 밟는 날. 뽀드득거리는 음색이 귓가에 서리듯 내려 눈 내린 풍경을 눈거울속에 길이길이 담아내는 날. 고요는 잠재워진 소리를 예리하게 포착해내고 일깨웠다. 긴 하얀 천막처럼 배 전체를 감싸는 하얀 눈은 투명한 유리 구슬 속 움직이는 물처럼 희뿌연 고동에 솟아오르는 연기 속에 제 존재의 낱알들을 흩뿌리고는 했다. 고동이 활개한다. 존재성을 알린다. 고요함속에 짓든 뽀득거리는 음색. 습기가 가물거려 딛는 발걸음을 차차 시간을 두고 걷게 하는 느릿함. 주춤거림. 그는 틈새 속에서 살았고, 틈새 속에서 보고 듣고 말하였기에, 이 고요가 그처럼 부드럽고 감미로웠을지언정.

 

그의 말이 그녀가 빠진 상념을 파헤치듯 그녀 귓전에서 가느다랗게 울렸다. 그는 움직여 그녀에게 몸짓을 기울였다. 그는 다가들며 손잔등을 그녀에게로 모로 기울이고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어 웃었다. 흔들의자 앞에서 당겨진 손등은 톡톡 손끝이 퍼지며 그의 손등에 손을 눕히고 있었다. 의자는 바닥위에서 삐걱거리며 쥬크박스 속 흘려퍼지는 리듬에 전혀 맞지 않은 음색으로 흔들렸다. 가늘게 벌어진 바닥과 의자 발 사이의 틈새는 공명하며 삐그덕거렸다. 남성은 이경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태이경, 우리 같이 일하는 사이 아닐텐데. 이놈이 메일로 사직서 처리 통보했고 직인 도장 찍어 내어 손수 잘랐답니다."

정말, 얄미워서. 야살스러운 인간 같으니라고. 이경은 불만스럽다는 듯 그의 볼에 손등을 붙여내었다 얕게 밀쳤다. 볼에 눌린 자국이 홀쭉 들어갔다 이윽고 퍼졌다. 깡마른 그의 볼어귀에 진 빗장은 단단했던 모양이다. 미동 없이 여의치 않는다는 듯 웃는 그를 보고 이경은 저가 졌다 싶었다. 단단한 외피를 둘러 감촉을 녹진히 느끼지 못하는 곳을 피해가는 얒궃음과 언변으로 말하지 않고 교묘히 입끝으로 말하는 그다움이.

하여간 성미가 못되고 나쁘고 고약하고 괴팍한 인간.

“태이경은 왜 이놈과 입을 맞추려고 하지?“

 

그는 나직히 재차 말했다. 새들이 공명하며 입을 맞추듯 숨이 닿을 거리에서 쫑긋거리며. 고개를 낮추며 맥동이 내잠하는 곳에서 벙긋벙긋 웃음으로 흘겨보내기를 반복하면서. 뚫어지게 바라보며 시선을 기울인 그의 표정이 점차 까무룩히 희미해졌다.

 

“번거로운 관계가 질색인 태이경이기에 우리 안 사귈텐데, 그렇지요? 태이경도 못 걸고 이놈도 덩달아 태이경에게 못 건다면서.”

 

이경은 말했다.

“공모자니까.”

“공모자니까?”

그는 웃음을 흘기며 말을 따라하며 되물었다. 목에 개목걸이를 채우고 강아지인척 처신했던 인간이 저를 강아지 달래듯이 대우하는 것에 영 꺼려지는 심정이었다. 누굴 달래려 하십니까? 목끝까지 찬 말은 끄집어지지 않고 흐려져 마음속 기류로 남았다. 시시각각 사람을 놀리며 살살 긁는 사람이, 왜, 원망의 기색이 미비하게 곁들여진 채 이경은 말을 툴툴거렸다. 깃들인 시선을 까무룩 감고 이마에 손을 얹은 채 이경은 말했다.

 

더 댈까요? 가형, 숨소리가 나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그는 웃었다.

동어반복이야, 태이경. 같은 말 똑같이 되풀이한거지요. 대답에 말 안 해줄거냐는 거지요.

이경은 속마음으로 내잠한 곳에서 생각했다. 내참, 속을 들여다볼 말에 한마디 대답하나 없을 사람이 당신이면서요. 그는 이경을 물그러미 쳐다봤다. 이경이 핀 팔등이 면밀히 눈을 가리우는 것이 이경에게 내심 안도감을 주었다. 이경은 팔에 얼굴을 묻으며 연이어 말했다.

 

” 말할 필요가 있습니까. 일상에 우리는 되묻지 않아요. 우리는 우리 주변에 머물러 있는 가구의 색상, 지새운 결, 머물러온 시간, 명암을 하나하나 따지며 묻지는 않잖아요. “

 

싱긋 웃으며 팔등을 치우는 손길이 느릿느릿 느른하다. 이경은 제가 흙속에 머리를 파묻는 타조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하면 제가 보이지 않을 줄 알고 모래 구덩이에 머리를 쳐박고 나는 없어요, 하며 존재성을 거부하는 타조. 당장을 면구하기 위한 시간을 남겨두는 그들을 누가 어리석다 칭하는가. 애달파서 숨이차고, 그리움에 목이 메이고, 뜨거라 시선을 감내하며 속삭임을 갈망할지언정... 이경은 그가 감정에 저를 녹여내 말끝으로 감정을 말하고, 손끝으로 감정을 두들기며, 발끝으로 숨을 달음박질 할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꾹 참는 울음이 마음이 터져라 스며든다.

알았겠지. 사람 속을 제 방속을 보듯 속속들이 훤히 보는 인간인걸. 갈 곳을 잃은 시선이 가후의 눈에 들어왔다. 둥그렇게 진 눈망울이 그의 눈 속 시선에 들어왔다. 서린 녹안은 참으로, 투명하게도. 이 작은 등롱불에 말갛게 그림자가 진 형상을 담으며 떠올랐다. 이경의 양팔 틈새에 팔을 뻗어 태이경을 꼭 감싸 안았다. 목에 고개를 묻었다.

 

가후는 외창에 시선을 두런거리며 말했다. 밖에선 비가 내렸다. 그들이 있는 곳에 마음을 골똘히 두느랴 그들은 언제부턴가 서로에게 마음을 놓아두며 긴장을 풀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기예보에서 내린 호우경보가 말하듯 비가 하늘에 천공이 난 듯이 세차게 내렸다. 빗방울이 구름을 뚫고 지나가 망울망울 바닥에 떨어졌다. 투둑, 이파리 끝에 두툼이 담긴 물방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빗소리가 쏴아 쏟아지는 음색이 났다. 그녀는 웅크리며 그에게 눈짓을 두다 어깨에 팔을 둘렀다. 할 말이 없다는 듯이. 그는 말했다.

 

“이놈이 보기엔 그렇다는 거지요. 오늘 밖엔 비가 내리니까.”

태이경은 말을 둘러댔다.

 

“예, 날이 지난 여름처럼 뜨겁고 그을리듯이 열기가 솟아오르진 않습니다. 그런 이유겠지요.”

 

“우산 가져왔어, 태이경?”

 

“아니요.”

 

“태이경이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으니까.”

 

이경은 턱을 치켜올린 채 눈을 깜박거렸다. 둥그스름히 커졌던 눈동자가 점점이 가스랗게 음색을 쫒아 움직였다. 망울망울 흐뜨려져 있던 풍광이 그들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Viva, 성량이 좋고 울림이 긴 가수의 목소리가 속마음을 훤히 도드러지게 펼쳐낸 가사가 귓가에 감돌았다.

 

“예, 오디오에서 들리는 음악이 마음에 드니까.”

 

부득 기분이 밀려들었다. 감정을 참아 슬픈지 영 관계없는 말만 주고받으며 속닥이는 그들이 우스운지 속내에 들어서는 감정은 색색의 형체와 제각기 다른 단어로 말을 하고 있어 이경은 감정을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블라인드를 칠 시간이니까.”

 

남자는 지독히도 말속을 채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시계가 똑딱거리는 음성이 귓가에 감돌며 들렸다. 삐그덕거리는 흔들의자 뒤에 자리를 점유한 시계가 저녁 속 어스름함을 갈라 들어왔다. 머뭇댐 없이 또박 끊어지는 시계바늘. 바싹 고요 속에 귀를 기울여야 들릴 음성이 왜 지금에야 그들 귓가에 들려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품속에 고개를 묻고 숨을 또박거린다. 시계 바늘이 행로 속에서 구획진 곳을 향해 또박거리듯. 둘레를 돌고 돌아서며 구획을 획정 하듯이. 이경과 가후는 그들이 있는 공간 속 시간을 본능적으로 세기 시작했다. 이경은 마당에 선 종려나무를 보며 말했다.

 

“이곳 종려나무 가지를 관리하는 정원사는, 엄한 규율을 나무에게 적용하나봅니다. 가지치기가 될대로 된 채 뾰족한 사각형처럼 단조롭게 서 있습니다. 그런 이유겠지요.”

 

“그렇겠지요. 그래, 나무모양이 수학모형처럼 사각형이니까.”

 

“정말, 사람, 눈치는. 앞 박자보고 잘 맞춰보십쇼. 맞장구 쳐주면 제가 이유를 더 생각해야하지 않습니까. 못들은 셈 칠테니 가형이 더 이유 둘러대 보십쇼.”

 

이경은 볼을 쓸어내린다. 고개를 끄덕인 채로 갸륵히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어스름이 진 저녁을 모를새라 그를 쳐다보며 생각한다. 남자가 붙이는 이유는 어김없이 현실을 동어반복하는 어휘일텐데. 그는 나지막하게 웃었다.

 

“등롱불이 아득하고 고요해, 태이경.”

 

등을 짚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포슬히 자리잡아 둥글게 떠오른 등을 떠안으며 말하는 것이 남자답지 않게 영 상냥했다. 팔등에 끌어 안아지는 손길이 설설 등에 작은 무게감을 실은 채로 꿈결같이 물들였다. 귓볼을 손가락 마디 사이에 감싼 채 아득한 손길로 쓸어 내린다. 그 갸륵하되 위선적인 다정함으로. 못내 끝을 말해주지 않은 어휘로. 이경은 주저 없이 손을 뻗고는 귓가속을 감싸듯 간질이다가 귓가에 입을 맞추었다.

블라인드 쳤어요? 말만 들떠가지고, 사람이. 기울어진 흔들의자속에 남자가 몸을 묻어 흔들의자 본연의 흔들림은 된바람이 부는 파고처럼 흔들렸다. 말끔히 진 눈은 동그랗게 떠진 눈을 쫒아 눈꺼풀에 입을 맞추었다. 흔들의자에 몸을 들어선 남자가 과히 몸을 구겨넣었나보다. 작은 의자가 둘 몸집을 이기지 못해 옆으로 기울여져 이경을 그의 품속에 홀랑 내주었다. 바닥에 떨어진 채 품 위에서 짓듯 두런두런 시선을 마주했다.

 

“아이고, 삭신이야. 깔아진 까펫이 있기에 망정이지요. 비가 올 때마다 등허리가 쑤시고 고단한데 더해 햇볕 광명을 몇 시간 째 쬔 나귀처럼 끙끙대며 몸을 늘어뜨릴 뻔 했네요.”

 

이경은 빙긋 몸을 가슴께에서 기울인 채로 웃는다. 가후는 잠시 그가 본 그녀의 웃음에 눈짓을 멈칫했다. 가후는 이를테면 웃음이 머물렀던 첫 만남을 떠올렸다.

 

*

아주 드물게 무위지방에는 비가 쏟아졌다. 무위지방의 일기예보는 잘못된 일정을 공고하는 법이 없었다. 점등식에 쏟아지는 불잔등은 수가 수북히 많아 티가 나지 않는 반면 영세하고 작은 가게에 켜둔 몇몇개의 촛불은 촛불중 작은 촛불 하나만 꺼져도 눈에 들어오는 법이다. 무위의 기후가 그러했다. 비가 전반 내리지 않고 건조기후가 연이어지는 천문현상이 관측되었기에 어쩌다 내리는 소낙비는 관측자의 눈에 정밀하게 들어와 일기예보는 비교적 정확한 편이었다.

 

무위지방 삼대 얼간이가 비오는 날 우산이 없는 사람이라 했던가. 방송이 정확한 일기예보를 보도하는데다 마을 인구 대부분을 이루는 상인들은 물건을 거래하는 상인답게 변화에 민감해 예보를 장대히 권역 전체에 퍼뜨리고는 해서 누구나 무위지방에 내릴 비 소식을 알고 있었기에. 무위지방에는 얼간이를 위해 마련해둔 풍습이 있었다. 우산을 챙겨들지 못한 사람에게 비오는 날에 조심하라고, 무지개에 손을 베일 수 있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 그것이었다. 아름다운 일곱빛깔 원호가 펼쳐진 무지개를 보느랴 당장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현실을 못 보는 게 아니냐면서. 그 사람이 현실 바깥에 있다는 걸 에둘러 비판하는 논변이었다. 정신을 어디 빼놓고 살기에 비오는 날을 챙기지 못하냐는 뜻이었다.

 

그 날 일기예보가 엇나가 시청자들이 불평불만을 쏟아내고 우연이 머무른다면,

둥근 일곱 원호가 진 무지개가 핀 곳에 우연이 깃든다면

세계를 그가 쓸 구획대로 나눠 이용하는 남자에게 애매함이 내린다면

손에 짓들었던 말이 그의 손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자신이 하고싶은 말을 하기 시작한다면

 

일기예보가 빗나가 사람들 대다수가 우산을 챙겨들지 않은 날에 제가 쥔 우산을 흐뭇한 표정으로 내주며 태이경은 웃었다. 붉은 머리의 여성은 눈길을 그에게로 돌렸다. 가는 머리가 파마기를 품은 채 어깨선을 타고 구불거렸다. 표정 하나 감춰내질 못하는 사람이었다. 열망과 소망과 바람이 곧이곧대로 얼굴에 드러나 금세 쏟아질듯한 열망을 품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는 사람. 이경이 우산을 접고 내어 주는 그 틈새에 소낙비가 우수수 쏟아져 반쯤 젖은 머리칼이 목끝에서 흘러내렸다. 쫑긋 솟은 콧대와 단호하게 뾰족 올라선 입매는 제가 할 말을 잊고 산적이 없다는 듯이 시간의 흔적을 보여줬다. 기막힌 우연에 그는 속내로 그녀와의 만남이 처음일지언정 그녀를 오랜시간이 지나도 기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강연자님, 비오는 날에는 몸을 더욱 주의깊게 살피세요. 무지개에 손을 베이겠어요.”

 

현실의 틈새를 유회하며 서린 숨을 낼름거리는 남자가 들은 말은 참으로 이질적인 것이었다. 태생적으로 숨을 쉬는 법을 본능적으로 알고 살아가는 생물에게 숨쉬는 법을 차례로 알려주는 것과 같은 일. 손 차양을 하고 여성은 웅덩이가 진 바닥을 피해 착 안착해 섰다. 손을 내밀며 그를 갸스름히 내다보고는 태이경은 환하게 말했다. 붉은 색이 진 머리칼이 물빛을 받은 나루처럼 부드러운 윤이 진채로 빛났다.

 

“우산 안 받으세요?”

 

네게 처음 본 사람을 낯익은 사람처럼. 그는 내민 우산을 펴 들어 비에게서 제 몸을 감추었다. 이경은 뻔뻔하게도 쏙 우산대 아래에 들어섰다. 그녀가 손에 든 전공책이 물에 젖어 흐물흐물하고 말린데도 겉 책등이 둥글게 질 잔상이 남겨졌다. 이경은 쫑쫑 그에게로 물그러미 시선을 던졌다.

 

"이놈이 보기엔 네 책이 비에 젖어 다 못쓰게 되겠는데.”

"전공서라 필요없어요. 오늘 종강일이거든요. “

 

이경은 어깨에 스며든 물방울을 태연하게 툭툭 털어내었다. 이경은 모쪼록 어떠랴 하는 태도로 무심하게 목깃에 들어선 물방울을 쫒고 귓가에 머리칼을 가볍게 넘겼다. 이경은 소망에 찬 눈짓을 하며 흐물흐물해진 전공책 서명을 읊으며 그에게 말했다.

 

“이 책 쓰신 교수님, 알죠. 교수님이 강연자님 말씀을 자자하게 하셨어요. 이 교수님 과제를 하다가 한비자 세난편속 예의 논변에 대해 강연자님 논문을 읽게 되었는데요. 궁금한게 있어서 수소문 끝에 메일 주소 찾아 메일 드렸는데 제 메일 한 번도 답 안주셨더라고요. 바쁘실테지만 잠깐은 거절메일 주실 수 있을텐데. 하기야 제가 강연자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도 아니고요. 학회에 참여해 강연자님과 말을 나눠보기를 했나, 사람이 들어오는게 있어야 나서는게 있긴해요. 그런데요, 강연자님. 말 오늘 주고 받았고, 우산도 씌워드렸죠. 그러니 제 질문에 대한 답을 들려주세요.”

 

*

 

 

아주 뻔뻔한 우연에서, 그렇게.

물 밀듯이 들어오는 우연의 빗장을 내리고는 제멋대로, 그렇게.

태이경은 숨을 부추겼다.

 

 

*

 

"온 몸이 쑤셔서 어련 하시렵니까. “

"태이경, 비오는 날에는 몸을 더욱 주의 깊게 살펴. 무지개에 손이 베이겠어."

 

이경은 몸을 붙여 그의 목깨에서 시선을 올려선 채 말했다. 머리칼은 부득불 그의 귓전에 닿아 귓가를 간질였다. 이경은 숨을 흘리며 번듯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구불거리는 머리칼이 그의 손끝에서 흘러내렸다.

 

"우산을 건네주세요. 무지개 빛을 잡을 수 없도록요. 이 말이 받는 말이었던지요. 기억이 희미합니다.”

“이놈이 기억한다는거지요. 손이 베일 무지개를 잡을 수 없도록 손을 잡아주는거지. 그러고는 등을 살짝 밀어당기며 상념에서 깨어나도록 속삭이며 우산을 내어주는 거였지요. 우산 안 받아, 태이경?”

그는 말을 이어냈다.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는 거지요. 태이경이 무지개에 손이 베일테니까.”

 

남자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흐르듯 유려히 드러난 말에는 펼쳐질 다음만이 남아 있었다. 몸을 기대도록 둔 채 간지럼에 약한 옆구리를 끌어 안았다. 잇새에서 드러내듯 꽁꽁 동여멘 속은 조금, 희미한 틈새를 보여냈을텐데 이경은 그 날에 그녀가 한 말을 기억하지 못했다. 숨을 부추긴다. 금세 가슴께에 올라선 이경을 비겁한 술책인 옆구리 간지럽힘으로 뒤집으며 손목을 가볍게 잡아쥐고 만다.

둥근 눈매와 가늘고 속 모르도록 반달로 진 눈이 마주했다. 이경도 더 이상의 이유를 말하지 않고 가후도 더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틈새를 주지 않고 입꼬리 끝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뗀 후 입을 그녀 입에 맞추어왔다.

 

#

 

이경은 늘어진 몸께를 침상에서 일으켰다. 눈꺼풀울 명증히 뜨고 세계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꿈을 꾸지 않고 거뜬히 잠을 짓새운 날이었다.

 

잠을 깨우는 새벽속 울리는 알람벨을 무엇이라 정의내릴까. 두드리는 도열같은 것. 사그라뜨렸다 퍼뜨려졌다 하며 물수제비를 뜨며 건너가는 것. 점점이 줄지어진 곳에 퍼지듯 밝아오는 것. 태이경은, 새벽밤을 샌 몽롱한 정신으로 세계를 주시했다. 오르골 속 줄을 당기면 곡조가 쏟아지기 시작하는 것 처럼 기계 오르골 같이 작은 음조로 시작했다 점점이 커지는 선율이 방안 곳곳에 내려앉았다. 천장에 내드는 선율이었다가 그것은 침상에 굴러다녔다가 쇼파에 이내 제 몸을 펼치기 시작했다가 그녀 귓가에 고스란히 들어와 울렸다. 선율과 같은 가락은 흐르듯 퍼지며 그녀가 일어선 채 있는 세계를 채우기 시작했다. 피아노 건반이 동시다발적으로 쳐지고 귓가에 들어온 음운을 느른히 두들기는 느낌에 이경은 눈을 깜박거렸다.

 

건반음이 그들새에 퍼졌다. 보통 이경이 자리에서 깰 때 아침을 깨우는 음조는 단조롭다할 모닝콜이었다. 기계 장치를 켜 단음 신호들을 단순히 조합해 만드는 모닝콜. 잠을 깨우는 목적에만 특화된 음조였다. 지금 틀어진 음조는 쥬크박스에서 음이 감겨나오는 듯이 올이 풀리며 다양한 음조가 변주를 이루는 음색이었기에 울리는 음의 주인이 이경이 아님은 확연했다.

 

인간아, 알람 맞추었으면 알아서 일어나서 알람벨 끄십쇼.

입가에선 아침잠을 못내 이기지 못해 하품이 쏟아져내렸다. 손을 펴 부드럽게 펴진 입매를 두들겼다. 역시나. 느른한 하품이 밤중 긴 조으름을 쏟아내던지 꼬리가 긴 하품이 방안을 채웠다. 남자는 그저 좋은 모양이었다. 그는 긴 팔을 당겨 이경을 품 안에 끌어당겼다.

 

일어나라니까, 가형이 맞추시지 않았습니까. 일찍 떠나신다고요. 사직서 낸 김에 월급 두둑히 주고 착실하게 상여금 넣어, 쉴때는 쉰다고 보너스 들어와, 아플때는 건강챙기라고 돈 들어와, 명절 휴가금까지 챙겨주는 회사간다면서요.

이경은 조으름에 자꾸 이불속으로 숨어들어가는 제 몸을 겨우 일으키고는 가후를 두들겼다.

 

첫날부터 사직서 내실겁니까, 인간아! 좀!

 

나뭇대들이 얽혀 빠짐이 업는 굳은 잔가지 무리를 밀듯이 남자의 몸은 빽빽하니 움직여 들지 않았다. 탐색하는 듯한 눈은 빙긋빙긋 유릿잔에 비춰진 물거울처럼 속내를 모르게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가슴팍을 밀어내었거늘 더 품속에 그녀를 깨밀어 들어 안아 쥐어 팔다리가 꽁꽁 얽혀들었다. 몸을 일으킬 기색이 없다. 싱긋 올라간 입꼬리 위에 서슬 좋은 빛자락이 선연했다. 아침이었다, 태이경이 기상하는 시간보다도 한 시간 더 이른 시간이었다. 이경 몸이 적응한 리듬이 아니었다. 그녀는 몇시간 더 잠자도 되는 시간이지 않던가. 사직서도 냈고 재 취업 할 동안 마음껏 잠들 수 있고. 정작 잠이 깨어야 할 사람은 그가 봐뒀던 주군에게로 떠나야한다는 이유때문에 몸을 일으켜야 하는 가후였다.

 

가형이, 부산을 떨며 몸을 일으켜야 하는 걸 왜 내가 일어나 잠을 깨우고 있는 것이랍니까.

 

할 말이 서린 소리가 목청 끝에서 서서히 맴돌았다가는 이경은 목구멍에서 들어설락 말락한 말소리를 쏟아내고야 말았다. 고요히 진 채 가라앉은 음색은 남성의 음에 부드럽게 공명하다 차츰 불협화음을 내어 그의 귀에 잦아들었다. 책사님! 일어나십쇼, 좀! 음이 정해진 자리에서 이탈한 음색에 이경은 아차 싶어, 손으로 입을 막았다. 음도 바른 문장이 아니니 이탈하는거지요. 남자는 얕궃게도 빙긋이 웃었다. 이경은 팔등이 나뭇 줄기가 베베 꼬아진듯 꼬아진 채 곤히 눈을 반쯤 감은 남자를 물그러미 응시했다. 어휴, 고단하다 고단해. 베개로 두들기지도 못하도록 남성은 품에 이경을 감았다. 연한 갈빛으로 서린 눈빛이 그녀를 보고 빙긋이 웃었다.

 

어제 저녁 막 세탁해 내놓았던 터라 뽀송한 내음이 나는 시트향이 둘 새에 퍼졌다. 아침이 마른 내음이 그녀 콧등을 간질였다. 가후는 말했다. 지금 눈을 뜨기엔 기상시간이 이른 터라. 이놈을 잠 못자 말라죽게 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고서야, 이경아. 응? 기가막혀, 누가 듣자하니 제 탓인 줄 알겠습니다. 꼬아진 팔등을 꼰 실타래를 풀어 정돈하듯 차츰 그의 손틈을 용케도 찾아 풀어나갔다. 가형이, 손에 설설 힘이 들어간다. 맞춰놓지, 팔등에 설설 힘이 들어간다. 않았습니까, 어깨에 내심 팍 쥐어드는 힘이 들어갔다. 좀! 와르르 힘을 준 바람에 요가 말려들었다. 요가 물건을 싸안 듯 이경과 남자를 휘감았다. 갈 곳을 잃은 문화의 손은 한손만 펴진 채 침대 요위를 공연히 더듬었다. 그들이 침대보 중간에 걸쳐졌다. 침대 중간지에 남자가 데룩 밀려들었다.

 

침대 중간에 바다 대양 위에 뜬 외딴 섬처럼 얹어진 남자가 그녀를 주시했다. 남자는 숨겨진 꼬리라도 보일듯 연신 히죽거리는 웃음이었다. 어휴, 이놈 삭신이 쑤시네요. 빙긋이 자세를 뒤집어 이경을 보았다. 공연 마주잡아진 손등이 이경이 물들인 손자국 덕에 확연히 붉었다. 이경은 살몃 뒤집어진 자세에 입매에 제가 할 말을 점칫거렸다. 태이경 덕에 삭신이 쑤시고 몸이 고단하여 못 가겠다 이르려구요. 창틀 밖문을 열었더니만 날다람쥐가 이놈 얼굴에 쥔 잔흔을 남기는 바람에 난동을 수습하느랴 등허리가 쑤시네요. 산재처리로 오늘 결근해야지요. 달리 방도가 있겠습니까. 이경은 비죽 말을 쏟아냈다. 또라이 같은 아니, 엉뚱한 말 마십쇼. 팔등을 뻗어 이맛깃에 덩달아 눈을 가린 채 이경은 영 퉁명스럽게 말했다.

 

오늘 출근 일 아니죠. 사선으로 들어오는 시선에 이경은 볼우물속에 작은 느으름을 피며 슬몃 입매를 찌푸렸다. 아침 6시 기상. 그가 기차표를 끊고 떠나기 위해 맞춰놓았다는 시간. 영 느른하고 여유있게 군데도 중요한 일은 한시를 놓치지 않고 시계를 화통에 넣은 듯 놓힘이 없을게 분명한 남자였다.

웃음 서린 시선이 심장속을 뒤집어 세세히 갈라진 틈을 착지로 메우듯이 뾰족 갈라진 틈을 잇달고 만다. 부드럽게 감아 쥔 손등에 닿는 온기가 목끝에서 서서히 피어올랐다. 그는 점점이 귓볼뒤를 물듯 입맞추었다가 흐린 웃음을 흘리고 만다. 이경이 밀어내는 손 움직임이 보람이 없게도 그의 웃는 입선에 미끄러졌다. 갈라진 마른 온기사이로 숨을 면밀히 두들기며 스며드는 웃음이 흘렀다.

그는 그늘진 나뭇가에서 말하는 속삭임이 되었다가, 시인이 듣는 바닷속에 빠졌다 곡조로 들리는 음운이 되었다가, 풍진 나뭇귀가 듣는 식생이 가늘히 숨쉬는 소리가 되며 그녀 옆에 내잠했다.

품에 끌어 당겨진 태이경이 불만섞인 걸 대신 손동작으로 풀려는 듯이 가후의 이마 위에 짓든 점을 톡톡 두들겨본다.

가후는 말했다.

어휴, 고단한 바람에 이놈이 시간을 착각했는터라.

남자의 눈이 물그러미 시계속 시간을 쫒으며 갸웃거린다. 가는 손끝은 연한 유막을 손가락 끝에서 일렁이듯이 손끝을 지분거렸다. 소담히 파고드는 손길이 점점 가느다랗게 손등을 덮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일정을 확인하며 말했다.

“이놈이 여지없이 실수를 했네요. 만나는 날은 다음날이랍니다.”

전혀 미안한 기색을 보이지 않는 태도였다. 빙긋이 웃는 기색이 선연히 아침 외창에 비춰드는 햇빛처럼 그의 얼굴 낯빛에 비춰진 채였다. 작은 손짓을 구물거리며 손등을 덮고 안착한 채 남성은 그녀에게 설설 말하고 만다. 뻔뻔하게 그지없는 웃음을 흘리고는. 아닌 새벽에 들어와 외창에 나눠진 빛줄기가 그들 곳곳에 빛의 유화를 남겼다. 두터운 유화층이 섞여진 채 번져진 유화마냥 아침도 새벽도 아닌 시간은 흐느적거렸다. 걸죽하고 구겨뜨려진 시간은 일상에 무심코 파고들어 심사를 깨울 시간에 섞여들 수 없는 여유를 만드는 것이었다. 빛을 가득 내담아 자리에 무심코 선 구름처럼 담담히 그들의 시간은 멈춰졌다. 빙긋이 가로새겨진 눈꺼풀이 감기며 웃는 남성이 내보인 시선이 지나갔다. 겹쳐진 손끝은 스쳐지운 채 그녀 손끝을 툭툭 두들겼다. 이경이 흘깃 몸을 풀어 시선을 기울여 남성의 핸드폰을 봤건만 일정란이 비워져 있었다. 남성은 비워진 일정에 빙긋 남은 숨을 털어넣었다.

“아침 일찍 일어났고 이놈의 착각으로 오늘 시간이 내동그랗게 비었으니 이놈과 바람도 쐬고 하자는 거지요. “

뻔뻔하게 그지없는 웃음을 흘렸다. 착각? 일찍 일어날 핑계를 찾으셨던 것이겠지요. 방싯방싯 웃으며 얼굴을 이경께로 붙인 채 다가서는 남성이 얄미워 이경은 톡 남성 미간 새를 한치 두들겼다. 남성이 일어나지도 못할 시간에 알람을 맞춘 것은 그 날 그들이 갈 데이트를 위함이었던가. 옴짝이던 손바닥을 가볍게 두들긴 손깃은 그녀 손을 가득 삼킨 채 쥐어졌다. 이경은 말했다.

"어디 가시렵니까. “

덥썩 외등 아래에 놓여진 팜플렛을 펼치며 이경은 누워 발을 까닥거렸다. 펜을 손에 꼭 붙잡고 이경이 판단키에 좋은 적지를 지도위에 서슴 표기해갔다. 햇볕은 들어오고 낮은 기어이 가깝고. 그들새를 흐르는 새소리는 연신 작은 속삭임을 종알거렸다.

 

“진귀한 화초와 초목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공원은 오늘 주말이라 안 열고요.”

펜을 슥슥 긋는 손길이 점차 재빨라졌다.

 

"명물쇼핑몰, 전품목 30프로 세일. 수백의 가게들이 도열해 있으며 지하에는 진귀한 식자재들이 매대에서 당신을 기다린다." 쇼핑 좋아하십니까? 중얼거리듯 이경은 말했다. 이경은 잡은 펜대를 대형 건물들이 몰려든 곳이 묘사된 팜플렛에서 옮기고는 아쿠아리움에서 펜을 멈추었다.

 

“이곳은요? 아침 10시 개장. 열대어가 물결치듯 흐르고 바닷속에서 긴 날갯짓과 같은 지느러미를 펄럭이는 곳. 해양 열대어를 볼 수 있으며 이번 특별 전시에서는 특별 공수해 온 진귀한 거대 돌고래를 볼 수 있다. “

 

문장을 말 하는 길이에서 숨겨쥐려 했던 속내가 선연히 드러났다. 슬깃 팜플렛에 표기된 곳을 예처럼 넘기지 않는 이경의 태도가 그 속내를 보여줬다. 머뭇거리고 시간을 지체하고 말에 긴 틈새를 남겨놓는 태도가 이경이 바라는 것을 확증했다. 짧게 단층으로 끊으려는 문장은 사욕앞에서 길어지고 만다. 몸을 일으켜 그에게로 시선을 기울이느랴 이경의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댓잎마냥 작게 물결쳤다. 부풀려진 머리칼은 손끝에서 작은 둥글거림을 남기며 살랑거렸다. 그는 속내를 짐작하고 빙긋 웃으며 단박에 말하리라.

 

“아쿠아리움 가자. 이경아.”

 

파고 소리가 그들 새에 나직히 흘러들었다. 외부 소리가 흘려들었다. 어두운 밤에 비춰진 밤전등이 날이 어두울수록 더욱 휘황하게 밝히는 것마냥 보이듯 고요함은 그들이 있는 시간을 선연히 밝히고는 했다. 방파에 부딪히는 파고 소리가 귓가를 두들기는 날이었다.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불고 바닷바람은 서늘하다. 커다랗고 넓은 침대에서 채워지지 않은 공간을 남기고 서로만을 보던 두 사람은 일어났다. 여성의 키보다 약간은 큰 남성의 키가 잔영을 지운 채 방안을 걸어나갔다.

 

 

 

*

*

*

.....아쿠아리움은 고요했다. 이경과 가후는 아쿠아리움 통로를 걸어나갔다. 시선을 올려보니 아치형으로 된 유리 수조가 그들 눈가에 가만 들어왔다. 연한 물빛으로 색감이 장식된 티켓을 끊었다. 빙긋이 말을 얹었다. 날가시를 머릿 깃대처럼 가늘게 뻗은 물고기의 대가 점진적으로 내려갈수록 두터워진 모양을 했다. 이경은 눈짓을 두런거리며 그에게 말했다. 고요함을 거닐었다. 가고 싶었던 곳을 결코 함께 오는 걸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남자와 거닐고 있다는 기분이 생경했다. 초입을 알리듯 그들이 접근하는 통로에 몸집이 곳곳에 뻗대며 자란 산호가 나 있었다. 인공적인 산호였는데 스티로폼에 뿌린 마카가 잘 스며들지 않은 바람에 누가 보기에도 가짜 산호처럼 붕 떠 보였다. 금빛이 가득 져 있는 마카는 엉성히 반짝였다. 이경은 직원들이 꾸며온 산호 응집 지대를 그와 함께 지나왔다. 붉은색 산호, 초록색 산호, 연하늘빛 산호, 하얀빛 산호는 제 몸을 군집하며 지대를 이룬 걸 보며 해양을 말하는 곳에 들어왔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통로의 곳곳이 조용했다. 남들이 일하는 시간대인 평일 낮 시간대중 그들이 온 탓이었다. 길게 줄지은 채 사람들이 서 있어 발걸음이 부산하던 통로는 오늘따라 한적히 비워져 있었다. 드문드문 아쿠아리움을 채우는 사람들이 이경의 눈에 밟혔다.

 

*

그들이 보는 인공 바닷속은 푸르디 푸른 물로 채워진 채였다. 무른 석고덩어리 같았다. 끌채로 채지 않고 갈고 지새워지고 깎아지지 않아 덩어리감을 간직한 채로. 포말이 일지 않는 완전한 바다가 그토록 고독했다. 인공적인 생동장치에 기반한 채 만들어진 시설이었다. 바닷물과 같은 성분의 해수를 공수해 일정 염분을 유지하고 물고기들이 어우를 수 있는 적정 온도를 책정해 내어 조절한다. 파도가 모래자갈에 부숴짐이 없는 곳은 왜 말할 속까지 삼키듯 고요할까. 넋을 잃고 바다라 칭할 수조관을 바라보았다. 인공이라 할 바다를. 인공 수조는 말을 헤집을 속도 없고 흔들림도 없이 속을 훤히 내보일 뿐이었다. 시선이 가는대로 보이던 물고기는 물빛에 반쯤 제 몸을 드러내었다가 수조속을 장식한 물체들에 제 몸을 유유히 스쳐지나가며 움직였다. 이경과 가후는 찬찬히 수조관이 만든 스크린을 걷기 시작했다.

흰색과 주홍빛으로 몸 줄무늬를 장식한 동가리가 무리끼리 모여 바다속을 쏘다녔다. 수중속 그들은 제 생태를 간직한 채 물빛을 따라 흘렀다. 덩달아 해파리가 바닷속을 헤엄쳐나갔다. 잔잔히 스며든 조명빛을 받던 해파리는 바닷속을 활공했다. 가는 우막같은 해파리는 흰 속을 투명하게 비춰들며 제 몸을 꿈벅거렸다. 고정된 위치를 잃은 흰 달처럼 해파리는 물 속에서 물흐름을 타고 투명한 바다를 몸 끝에서 빛내었다. 바닷속에 비춰진 달 그림자는 바닷끝의 저 편을 비추었다가 서로 감겨 빛을 쏟아냈다가 제 몸을 밝혀들었다.

바다 수족관 안에 세워진 ㄷ자형 구조물은 위에 물고기의 쉼터가 될 수 있도록 자리가 꾸려졌다. 남자는 눈짓을 물수조에 흐르는 물고기에게 고정하며 유유히 수조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지나가는 틈새에 가오리가 긴 몸을 펴 위를 덮었다. 몸이 팔랑이는 가오리가 물깃에 제 몸을 넘실거리며 익히 알은 채를 하듯이 그들에게 다가섰다가 멀어지며 지나갔다. 물그러미 가오리를 바라보던 남자는 핸드폰을 꺼내 가오리를 찍었다. 넘실거리며 물깃에 접히는 가오리를 찍었다가 흔들리는 수초끝에 흐드러진 꼬릿깃을 담고 물수초에 가득한 열대어 무리들을 찰칵거렸다. 옴짝 풍광을 보는 이경의 눈초리 속에 바깥 풍광이 스며들었다. 녹빛이 진 눈빛. 귓가에 넘겨져 붉은색으로 흐드러지는 머릿빛. 붉게 망울진 채 새촘히 뽀족 나온 입매인 입망울이 투명한 유리관에 훤히 비춰들었다.

물고기들이 수조관 속을 방향도 없고 속도도 없이 흘러진 채 배회하는 걸 바라보았다. 남성은 그 새에 핸드폰 카메라 앱을 눌러 이경을 찍었다. 난데없이 그녀 귓가에 들어선 채 찰칵하는 음성에 이경은 그에게로 가 모로 선 채 잔소리를 쏟아냈다. 이경은 가오리가 다가오자 사진을 찍는 관광객을 보며 나직히 말했다.

 

" 저 분들처럼 가오리가 다가왔을때 예쁘게 각도를 잡고 찍어주시지 않고요.”

 

"이놈은 이 사진이 자연스럽게 보인다는 거지요. 자리에 멈춰서 물그러미 가오리들이 지나가는 걸 보는 표정이 평소 태이경같고. 특별하다면 어느 순간이든 찰나로 지나가지 영원할 수 없으니 특별하다는 거지.“

 

"찰나를 필름속에 잡아내려고 카메라가 있지요. 평소와 같은 모습을 찍으려면 뭐하러 사진을 찍으신답니까. 지금 보시면 될 걸.”

 

"이놈 다 알지요. 분위기에 흘려들다보면 잠시 사람이 처한 상황을 잊을 수도 있다는 걸 이놈은 잘 안답니다. 태이경과 이놈은, 우리는 내일부터 서로를 못 보니까요.”

 

잠시 둘새에 적막이 스며들었다. 그의 말 덕에 그들이 정해놓은 상황이 그들이 볼 세계 속으로 들어온 탓이었다. 남자는 때로 단박에 말을 뇌까리고는 했다. 남성은 마치 명백한 정의처럼, 본능적인 숨소리처럼 그들이 처한 상황을 명증히 드러내는 습관이 있었다. 느른히 진 눈매속에 남성은 속모를 무덤덤함이 뒤섞인 채로 그녀를 보았다. 너무도 섧게 진 현실에 점차 흐릿이 현실을 녹인 채 말을 다듬으려 이경은 시도했다. 이경은 마주해 시선을 맞추어 보았다. 태이경은 애써 심드렁한 듯 말하려고 노력했다. 물소리가 비춰드는 수조관에 몸짓을 기울인 채 바라보고 있는 이경이 담겼을 것이다. 이경의 평소와 같은 표정이 카메라 속에 담겼을 것이리라고. 그러리라고.

 

“맘대로 하십쇼. 가형 말대로 우리는 내일이 마지막이니까요.”

 

이경은 할 말을 다듬은 채로 담담히 말했다. 그런 관계였다. 한쪽이 떠나도 다른쪽은 언제든 시원스레 보내주어야 할. 서로가 마주하며 만난 감정의 잔정은 속속들이 지워버려야 할 그런 관계였다. 걸지 못하는 그들에게 사랑은 있을 수 없는 약조지 않던가. 이경은 이 사실을 확실시했다. 손가락을 가득 굽어쥔 채 걸지 못하며 그렇다고 스치우며 끝맺음을 맺지도 않는 관계였다. 공중에 얼기설기 얽혀져 있는 액자처럼 그들은 걸려져 있었다. 새삼스럽게. 가후는 손을 내밀었다. 이경은 내밀어진 손잔등을 감아쥔 채로 이 아쿠아리움을 거닐었다

.

열대어는 유영했다. 인공환경에 맞춰 만들어진 곳에서 색색의 빛을 내는 산호는 바닷속에서 들푸르게 지나오는 물고기들이 흐를 식생지를 만들어주었으리라. 물고기들은 꽃무처럼 붉은색이었다, 노란색이었다, 하늘색이었다, 이 빛들의 조합이 두개로 섞여들었다가 세개로 묶여졌다가 물방울을 지나 굴절해 만들어진 무지개처럼 온 색상을 담고는 했다. 검고 흰 얼룩이 진 물고기가 새록 그들이 있는 곳에 나풀거리는 지느러미를 펄럭였다. 이경은 묵묵히 이 잔경을 담았다.

계속 발걸음을 걸었다. 그들이 멈춰선 곳에 공중전화 박스로 만들어진 어항이 있었다. 박스 속에는 물고기들이 숨을 뻐끔거렸다. 물고기는 전화기 박스가 있는 곳에 제 몸을 뒤로 숨기고 제 몸을 앞으로 힐긋 드러내기도 하며 빛깔을 사륵 솟은 물빛무늬 속에서 솟아내었다.

줄을 진 채 보아야 했을 법한 유리창은 유독 한산했다. 유리천장에 들어온 빛이 갈라졌다. 물결이 나붓해 물고기는 유리 수조안에 제 몸을 내맡기며 몸을 흐느적거렸다. 길고 육중한 몸집을 진 물고기는 물흐름에 저를 맡긴 채 수조 위를 떠다녔다. 작은 물고기들은 빈 공간에 점점히 찍혀진 별처럼 제 몸을 나부낀 채 그곳에 있었다. 커다란 칸막이가 겹겹진 새를 나누고 그들이 있는 자리를 지껏 분배해줬다. 컴컴히 진 곳에 꺼진 잔등은 깜박거리며 나직한 소리를 일렁거렸다. 작은 물살에 흔들리는 빛이 그들 눈속에 들어왔다.

인공조명이 만든 짙푸른 색조가 화폭에 그려진 유화물감이 여럿 섞인 빛살처럼 그들 눈 속에 들어와 번뜩이며 차올랐다. 인공 유리창 위에 든 물조는 아름답고 감상을 잃을 만큼 수려해 그들이 표현할 말을 잃었다. 아득하게 켜진 불등이 비춘 수조관은 물거울속에 빛을 비춰든 채 몸을 반짝이며 그들에게 몸을 기울였다. 멀리 점점이 보이는 그들은 거대한 잠수정이었고, 고요한 바다를 수놓는 암막이었으며, 다가서니 그건 거대한 돌고래였다. 파도소리도 없고 갈매기가 끼룩거리며 바닷속을 기웃거리며 제 날선 본능을 뽐내며 돌아다니는 일 없이 거대한 돌고래는 수조관 속을 떠다녔다. 연한 갈빛으로 서린 눈빛이 그녀를 보고 빙긋이 웃었다.

고래는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몸을 뒤따랐다. 얼떨결에 붙어 손을 우로 뻗으니 돌고래는 우로 꼬리를 움직이며 거대한 몸을 움직였으며, 왼측면으로 휘젓는 손을 따라 돌고래는 그 몸을 졸졸 따라와 그들이 가는 곳에 그 둥근 얼굴빛을 비춰들기도 하였다. 사면을 따라 있어야할 돌고래는 사람구경에 신이 났던지 그들을 따라 긴 수조관을 헤엄쳐나갔다. 사람이 없고 한산한 수조관에 혼자 있기란 여간 심심한 모양이었다. 사진 찍자고 카메라를 들려다 이경은 그가 떠나고 외로워질 생각에 다시 이경은 킨 카메라 앱을 끄고 본 화면으로 돌려놓았다. 함께 그들을 따라오는 돌고래 무리가 꽤나 되었다. 이경은 가후에게 곁눈질을 힐끔 했다. 이 인간 옛전에 자신을 두고 충성스러운 개라더니만 같은 포유류를 몰고다니나, 별 날려도 가감없는 생각이 그녀의 생각속에 기울여 멈춰섰다.

무빙워크를 따라 가후와 이경이 돌고래를 구경하는지 돌고래가 그들을 구경하는지 모를 상황 역전이 연이어 일어났다. 가후는 빙긋이 웃더니만 일상속 수조관을 지나가는 돌고래 무리들을 찍는듯 사진을 찍는 손길이 빨랐다. 그녀는 꿈꾸듯이 말했다. 또 와요, 언제. 기약없는 약조에 꿈벅이며 말했다. 듣지 못하도록 아주 작은 소리로 꿈꾸듯 중얼거렸다. 돌고래를 이경도 같이 핸드폰 카메라 앨범속에 담아냈다. 사진을 이윽고 앨범에서 넘겨봤다. 사진을 찍다보니 저도 모르게 가후가 나오는 사진을 남모르게 한 장 찍었다. 그가 핸드폰을 든 손이 나온 사진 한장이었다만. 지우려고 삭제 버튼을 누르려다 그만두었다. 다음에 못 볼텐데. 그리워해도 보고싶데도 스치울일도 없을텐데. 이경은 손끝에서 주저하는 생각이 머무는 것에 결국은 굴복했다. 더 그리우면 삭제할 미래의 것으로 남기자고.

돌고래의 유영. 희미하게 밝혀진 불의 무리는 그들이 지날곳에 밤이 흐르는 곳에 뜬 작은 잔등처럼 떠다녔다. 푸르게 번뜩이며 입에 진 물방울을 깜박이는 돌고래가 신비롭고 이국의 존재처럼 느껴졌다. 달이 뜬 밤에, 별들이 저들을 보는 인간을 보는 심사가 이러할까. 이경은 손을 뻗어 그의 손을 감쌌다 풀고 손목에 손을 쥐었다가는 이 유영하는 수조관을 거닐었다.

짧은 코스에 들어선 사람들이 아쉬워하겠다는 심사를 반영한듯이 아쿠아리움 코스에는 자연물 코스가 연이어 있었다. 돌연 따로 만든 관에서 펭귄이 나와 단단히 얼은 얼음뒤에서 작은 몸집을 슬몃 드러내며 그들에게 인사를 하는가 하면 점차 걸음을 걸어나갈 수록 우리 너머에서 숲짐승들의 무리가 그들 곳곳을 채워갔다. 다람쥐가 팽그르르 나뭇잎 위를 돌다 쫑긋 바닥에 올곳 솟은 텃밭에 몸을 안착했다. 쫑긋 귀를 잔뜩 기울이고 주의를 진 그들은 느른한 꼬리를 바닥에서 살랑거렸다. 바다속에 사는 물고기들을 본 것이 반, 인접한 산들에 사는 동물들을 본 것이 반이었다. 그들이 걸으며 아쿠아리움의 끝에 점차 다가서고 있었다. 좋아하는 물고기가 뭐에요, 묻자면 다람쥐라고 하는 남자와. 물고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하는 말에 이놈은 이 아쿠아리움에서 똑똑히 보았네요, 하고 어깨를 으쓱하고는 능청스레 웃으며 넘어가는 말에 이경은 홀랑 깊은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오독오독 제 입가에 견과류를 올망 씹었다가 제 저장고인 불룩한 입에 담는 것이 마음에 든다면서. 쫑긋 선 귀와 몸을 바삐 움직이느랴 살랑이는 꼬리가 마음에 든다면서. 이경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자리를 따라가며 거닐다 마침내 종착지에 이르었다. 이경은 그에게 말했다.

 

"예, 포토티켓은 다람쥐로 하시게요? 나가면서 기념 티켓 끊어준다고 합니다. 거기에 원하는 동물 사진을 넣을 수 있다는 말을 팜플렛에서 보았습니다.”

“기존에 찍은 사진도 되나? 그건 이놈 나름대로 생각이 있는지라서요.”

“아마도 될 겁니다. 돌고래로 하시게요?”

“다람쥐로 “

 

이경은 제가 무슨 말을 하며 그와 이곳을 거닐고 있는지 잠시 정신이 멍해져 얼떨결한 채로 그곳에 있었다. 헛물을 킨 말을 했나. 다람쥐라고 첫번에 물었지 않던가. 황당한듯이 벙찐 표정이 이경의 얼굴에 떠올랐다 점짓 스며들었다. 이경은 남자의 의도 모를 말에 익숙하단듯 애써 나올 말을 정돈했다.

 

“저는 돌고래로 하렵니다.”

이경은 가후의 손이 나온 돌고래 사진을 직원에게 요구했다.

 

 

 

 

 

 

 

 

 

*

 

"이놈은 이 사진이 자연스럽게 보인다는 거지요. 자리에 멈춰서 물그러미 가오리들이 지나가는 걸 보는 표정이 평소 태이경 같고. 특별한 것은 어느 순간이든 이 순간 아니면 붙잡을 수 없는 찰나를 말한다 한답니다. 영원할 수 없으니 특별하다는 거지.“

 

"찰나를 필름속에 잡아내려고 카메라가 있지요. 평소와 같은 모습을 찍으려면 뭐하러 사진을 찍으신답니까. 지금 보시면 될 걸.”

 

"이놈 다 알지요. 분위기에 흘려 들다 보면 잠시 사람이 처한 상황을 잊을 수도 있다는 걸 이놈은 잘 안답니다. 태이경과 이놈은, 우리는 내일부터 서로를 못 보니까요.”

 

 

*

“특별한 사진이네요. “

포토 티켓을 뽑아주던 직원은 숨소리를 흘기면서 웃었다.

직원은 전자 자판을 두들기던 손짓을 멈추고 가후를 물그러미 응시하며 포토티켓을 내밀었다. 지긋하게 가오리를 응시하며 얼굴 표정을 맞춘듯 웃는 표정이 찍힌 태이경이 사진속에 있었다. 이경은 몸을 기울인 채 가후와 태오에게 넙죽 다가선 가오리와 누가 보더라도 똑같은 표정을 지은 채 사진 속에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웃어서요. 아예 똑같다. 여자친구분이 가오리와 얼굴표정을 일부러 똑같이 맞추신 건가요? 재치있는 분이시네요. 평소에도 이런 사진속 포즈를 취하시나봐요."

"아뇨. 평소와 같은 모습을 찍으려면 사진을 찍을 이유가 없지요. 매일 보는 사람인지라. 이 표정은 평소에 잘 짓지 않는답니다. 눈끝을 망울망울 접어 웃고 입새도 가만 빙긋이 올려 웃고는, 참 보통때는 불평불만인 채로 입을 쫑긋 내미는 일이 잦은지라서."

가후도 덩달아 빙긋이 마주 웃었다. 남자는 말을 이었다.

"귀엽지요. 가오리들이 망울망울 웃으며 지나가는 것에 얼굴표정을 똑같이 맞추고는. "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