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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eginning and the end

*이 글에는 fate/grand order 1부 스토리 전반, 2부 관련 언급, 특히 종장에 대한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리츠카=여자 후지마루 리츠카, 후지마루=남자 후지마루 리츠카입니다.

 그 어느 날이었던가요? 닥터가 제 방에 그림책을 가지고 온 적이 있었습니다. 바닷속 생물들을 묘사한, 아주 멋진 그림책이었어요.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책이지만, 그때의 저에게는 닥터가 알려주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낯설어서, 정신없이 그 책을 읽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 딱 한 가지, 기억에 남았던 것이 있습니다. 그건…….

 

 

※ ※ ※

 

 

인리수복이 끝났다.

인류 최후의 마스터 세 사람의 사명도 드디어 끝을 맞이했다. 인리수복이 끝난 뒤의 칼데아는 유난히 고요했다. 종국특이점에서 귀환한 후 외부에서 보내온 사절단이 방문한 날 이후로 다른 외부의 사람들이 칼데아를 찾아온 일도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폭풍전야의 고요라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느끼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유리 꽃병이 전등의 빛을 반사했다. 이네스는 그것이 꼭 종국특이점에서 봤었던 빛 같다고 생각했다. 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그를 포함해서 서너 명뿐이었다.

사실 이네스는 약속한 시각에 비해 지나치게 일찍 온 참이었다. 그것은 몇몇 스태프나 칼데아의 소장 대행,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마찬가지였다.

이네스가 탁자 위에 놓인 꽃병을 말없이 만지작거리자, 다빈치가 말을 붙였다.

 

“심경이 복잡한 모양이네. 괜찮겠어? 그런 결정을 해도. 우리야 손해 볼 건 없다지만, 너는 연인과도 신뢰하는 파트너와도 헤어져야 하잖아?”

“각오하고 결정한 일이에요, 다빈치. 그리고 그런 이유로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이네스가 딱 잘라 대답했다. 그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이미 연인에게 자신의 결심을 알린 상태였다. 모든 것을 알린 건 아니지만.

다빈치가 씨익 웃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설마 네가 그런 제안을 할 줄은 몰랐어. 아니, 북미에 다녀온 뒤부터는 그런 낌새가 보이긴 했지만……. 널 처음 만났을 때의 나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주면, 틀림없이 헛소리라고 치부할 거야.”

 

이네스도 다빈치의 말을 듣고 살짝 웃었다.

 

“당신을 처음 만나던 시점의 저도 마찬가지예요. 당신과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됐다는 걸 알면, 틀림없이 꿈으로 치부하겠죠.”

 

인리수복이 상상도 하지 못한 방향으로 그들의 인생을 이끌었다. 잃은 것도, 얻은 것도 있다. 그러나 가장 큰 손실은, 한 사람의 귀중한 인명과 앞으로의 칼데아의 안위일 것이다.

슬슬 약속한 시각이 되면서 스태프들이 하나둘 이곳에 당도했다. 이네스는 마지막 사람까지 이곳으로 모인 것을 보고 문으로 다가갔다.

그는 문에 손을 대고 짧게 영창했다.

 

“impérĭto(명한다.).”

 

손에서 시작된 빛이 문으로 스며 들어가는 동시에, 문이 찰칵하고 잠기는 소리와 함께 주변에 결계가 생겼다. 이네스는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보석이 빛을 발하는 것을 보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다빈치가 스태프들을 한 번씩 둘러보며 입을 뗐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지. 이미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우리 칼데아는 이제 시계탑의 정쟁에 휘말리게 될 참이야. 뭐, 그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좌우지간 시계탑 열두 로드 중 하나가 레이시프트 실험을 하던 중 사고로 죽었고, 우수한 재원들은 모두 냉동 상태. 그런 와중에 아브니르 가문의 당주만이 유일하게 깨어났어. 칼데아는 대부분의 인력이 손실됐고, 그런 와중에 인리 수복이라는 대위업을 달성했지.”

 

이네스는 남몰래 꽉 주먹을 쥐었다.

 

“그런데 그 위업을 달성한 이들은, 사실 이전까지는 마술과는 관계도 없이 살았던 민간인이야. 아니, 이네스는 제외하지. 이네스가 껴 있는 게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지만 말이야.”

 

이 정도는 시계탑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사항이었다. 다빈치가 이네스에게 눈짓했다. 이네스는 다빈치의 말이 끝난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라서 저는, 한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해요. 저는… 칼데아의 상황이 지금보다 더 안정된 뒤, 지체하지 않고 이곳을 떠나 시계탑으로 가려고 합니다.”

 

즉, 다른 칼데아의 재원들을 대신해 정쟁에서 싸우겠다는 의미였다. 대부분의 스태프는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브니르의 당주인 당신이 아니무스피어가 관리를 맡고 있던 시설을 위해 나선다면, 의혹을 피할 수 없을 텐데요?”

 

마술사 출신인 한 스태프가 질문했다. 이네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하지만, 그걸 노리는 거예요. 저는 외삼촌의 조카니까.”

 

그 말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질문한 스태프는 대답을 들은 뒤 더는 말이 없었다.

 

“……좋아. 그렇다면, 이네스가 시계탑으로 떠나는 것에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 있나?”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다빈치가 회의를 파하려고 할 때, 다른 한쪽에서 조심스럽게 손이 올라왔다.

 

“응? 뭐니?”

“아, 저기. 이네스가 시계탑에 가는 것에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궁금한 게 하나 있어서요. 어째서 후지마루 리츠카, 두 사람을 부르지 않았죠?”

 

대답은 이네스에게서 나왔다.

 

“그 사람들은.”

 

그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놓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게 나아요. 제 직감이 그리 말하고, 호즈노미야도 확언했습니다.”

 

이해 가지 않는 말이었지만, 그 말을 하는 이네스의 얼굴이 너무 어두워 보여 그 스태프도 별다른 말을 붙이지 않고 그저 알겠다고만 대답했다. 이네스가 결계를 해제하고 문의 잠금을 푸는 것으로 그날의 회의는 마무리됐다.

 

 

※ ※ ※

 

 

소녀가 온기를 찾듯 그의 손을 그러쥐었다. 칼데아의 복도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눈보라가 치는 밖을 구경하던 소년이 시선을 그에게로 돌렸다.

 

“생각이 많은 모양이네, 마스터. 인리수복이란 엄청 멋진 일을 해낸 참이라고! 좀 더 웃어줬으면 해.”

 

쾌활한 얼굴로 미소를 지은 소년이 소녀에게 말했다. 소녀, 이네스는 그의 말에 마주 웃어주었다.

 

“샤를.”

 

이네스는 그 말을 하고도 한참을 침묵하더니, 일상적인 어조로 툭 말을 던졌다.

 

“이건 잘한 선택일까요?”

 

그렇게 말하는 이네스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샤를은 자신도 이네스의 손을 마주 잡은 뒤, 별다를 것 없다는 투로 대꾸했다.

 

“마스터가 한 선택이니, 그럴 거야.”

 

그 짧은 문장 안에 들어있는 신뢰에 이네스는 긴장이 풀렸다. 아, 따뜻하다. 손에서부터 전해져오는 따스함이 심장까지 전해져왔다.

그래, 괜찮을 거야. 당신이 함께 있어 준다면 거기에 더더욱 기쁠 거고.

이네스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어깨에 기댔다. 샤를은 예상하지 못한 행동에 화들짝 놀랐지만, 밀어내지는 않았다. 이네스가 스르륵 눈을 감았다. 어쩐지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지금쯤 샤를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상상이 가서 더 그런 걸지도 모른다.

자는 것처럼 스르륵 눈을 감은 이네스의 숨소리가 고르게 가라앉아 샤를마뉴는 무척이나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들은 아직 연인이 된 지 얼마 안 된 시기였고, 게다가 그는 서번트로서는 거의 신생아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그가 특이한 서번트인 탓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샤를은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네스가 평소에 표현이 적은 편인 것도 한몫을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호즈노미야의 도움으로 천리안의 힘을 조금 얻어 지켜보고 있던 이네스는 참지 못하고 웃고 말았다.

 

“푸흡…. 흐, 아하하!”

“……마스터.”

“샤를, 속일 생각은 아니었어요. 흐흑, 그냥 너무 웃겨서… 푸하하!”

 

이네스는 눈물이 찔끔 새어 나온 것을 닦다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샤를이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이네스는 그 후로도 한참을 더 웃다가 돌연 그의 어깨에 다시 기댔다.

이번에도 그는 잠깐 움찔했을 뿐 밀어내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고개를 다른 쪽으로 홱 돌려 버렸다. 이네스는 이번엔 장난기 어린 얼굴로 그의 팔을 두 팔로 감싸서 팔짱을 끼고, 귀 가까이에 얼굴을 댔다. 이번에도 그는 거부하지 않았다.

 

“샤를.”

 

유난히 다정한 목소리를 내며 이네스가 귓가에 속삭였다. 움찔, 그의 몸이 또 떨렸다.

사실 샤를마뉴가 고개를 돌린 이유는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그리고 처음에야 그랬지만, 문득 그는 그렇게 연인을 두고 자기가 먼저 고개를 돌리는 것은 멋지지 못한 일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물론 귓가에서 속삭이는 이네스 때문에 잠깐 굳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는 사랑하는 마스터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바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얼빠진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쪽.

 

“마……스터? 이게 무슨….”

 

이네스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샤를마뉴의 생각보다 더 그를 잘 파악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가 곧 고개를 돌리란 것도 예측할 수 있었다. 어쩌면 아까 가져다 쓴 천리안 때문에 감이 극도로 예민해진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건 어쨌거나 상관없었다.

이네스는 샤를이 고개를 돌리자마자 그의 볼에 입을 맞추고는, 다시 한번 달큰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의 기사님. 나의 서번트. 내 샤를.”

“마, 마스터. 잠깐만.”

“좋아해요.”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정경을 두고 퍽 낭만적으로 들리는 말이었다. 샤를의 귓가는 이미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네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좋아해요, 샤를.”

“조금만 떨어져 주면…….”

 

그러나 이네스는 오히려 그의 품 안에 파고들어서 얼굴을 그의 가슴팍에 부볐다. 손으로는 깍지를 껴서 도망치지 못하게 한 소녀는 나머지 한 손으로 그를 안고 그의 시야에 가득 들어오도록 웃었다.

그가 눈을 빠르게 끔뻑거렸다. 그를 품에 안은 채 이네스가 말했다.

 

“그러니까 여기가 아니더라도 내 곁에 있어 줘.”

 

그가 무너지듯이 눈을 감더니 이내 자신의 팔을 들어 이네스를 꽉 껴안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물론, 네 곁에 있을 거야. 나의 마스터.”

“저는 좀 더 직접적인 걸 원해요.”

“……응?”

 

그가 다른 이상한 생각을 할 틈이 없도록 이네스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저와 정식으로 계약해요.”

“응? 그렇구나. 계약 얘기구나. 난 네가 하는 거라면 뭐든지 좋아. ……방금 나 좀 멋있었어?”

“내 기사님은 언제나 멋지고 귀여워요. 든든하고.”

 

일부러 귀엽다는 말을 끼워 넣으며 이네스가 의뭉스럽게 미소 지었다. 예상대로 그의 귀는 다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 이런 것도 의외로 재밌구나. 이네스는 앞으로도 종종 이런 기습을 감행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금 품에 얼굴을 묻었다.

 

“칼데아의 소환식과 관련한 문제는 호즈노미야가 해결해주기로 했어요. 그의 실력은 확실하니 믿어도 좋겠죠. 그리고 당신의 거취 말인데, 그건 천천히 의논해 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녀가 해결해주기로 한 건가! 그럼 믿어도 좋겠지. 그래서 마스터, 식당에 가지 않을래? 오늘은 그 붉은 궁병이 작정한 모양인지, 엄청 맛있더라! 그런 맛이라니, 너무 멋져서 말도 안 나올 정도야!”

 

말을 돌리고 있네. 이네스는 오늘은 이 정도로 봐 주기로 했다. 사실 더 하고 싶었지만 그럼 정말로 어떤 표정을 할지 상상이 가질 않는다. 결국 그는 샤를이 이끄는 대로 식당에 도착했다.

식당은 이미 서번트들과 마스터로 붐비고 있었다. 붉은 궁병이 오늘 작정했다는 말은 틀린 게 아닌지,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그가 보였다. 자리를 찾아 앉은 그들은 주방에 음식을 주문하고 별 것 아닌 이야기들을 떠들기 시작했다. 샤를의 시야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그는 앞뒤 생각하지 않고 손을 들어 이제 막 식당에 들어선 이를 불렀다.

 

“어이, 아스톨포! 여기야! 여기!”

“야호! 임금님과 그 마스터잖아? 안녕! 식사하러 온 거야?”

“응. 곧 마스터가 칼데아를 떠나니까 말이지. 그 전에 맛있는 요리를 먹게 해주고 싶어서 말이야!”

 

이네스는 머리를 짚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기실 그가 칼데아를 떠나는 것을 알음알음 알려진 일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 동료인 두 마스터와 마슈에게는 알리지 않았고, 무엇보다 몇몇 서번트도 아직은 모르는 눈치였다. 그리고 아스톨포는 이네스가 떠난다는 사실을 여태껏 모르고 있던 몇몇 서번트 중 하나였다.

아스톨포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리고 두 마스터와 마슈의 눈도 커졌다. 직접 말하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었다. 이네스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로 말했다.

 

“네. 곧 칼데아를 떠나서, 그 전에 식당에 와 봤어요. 앉으세요, 아스톨포.”

“진짜야?! 언제 떠나는데? 나한테 알려주지! 아차! 이럴 게 아니라, 송별 파티라도 준비해야겠어!”

 

그것보단 저기 저 눈에 불을 켜고 다가오는 두 마스터와 마슈를 어떻게 하고 싶은데. 하지만 이네스는 꽤 현명한 이이기 때문에 그저 아스톨포에게 나온 식사를 다 먹고 생각해보자고 권유했을 뿐이었다.

 

“이네스, 떠나?”

“네. 아쉽게 되었어요. 하지만 칼데아 소속을 완전히 버리는 건 아니니 안심하세요.”

 

나는 오늘부터 저 뒤에 있는 걸 읽어내지 못하는 놈이다. 이네스는 그저 웃었다. 사실 세 사람도 화가 난 건 아니었다. 그냥 서운했을 뿐. 반응으로 봐선 이미 대부분 알고 있었던 거 같은데, 어째서 자신들에게만 알려주지 않았냐는 무언의 항의를 이네스는 모르는 척 했다.

지난 1년 간 이네스는 세 사람에게는 무척 약해진 상태였다. 가장 직접적으로 생사를 나누는 동료였고 친구였다. 아마 이네스 자신도 똑같은 상황이었다면 서운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아직까지 그를 잃은 아픔을 간직하고 있을 두 사람에게 이네스마저 떠난다고 알리고 싶지 않았다.

이네스는 닥터 로망을 기억한다. 그와 이네스는 후지마루 리츠카 둘과 마슈만큼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다. 로망이 이네스 안의 호즈노미야 세이카를 경계하고, 또 꺼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느끼는 상실의 크기는 저 세 사람보다 작을 것이 분명했다.

이네스는 오히려 경외의 감정을 더 크게 느낀 편이었다. 도망칠 수 있었다. 원하던 것을 손에 넣은 참에 바라던 대로 살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그의 10년과 그 마음가짐에 이네스 아브니르는 경의를 표했다. 당신의 동료로서 그 결단에 경의를 표하며 이네스는 시간신전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다음엔 어떻게 되었더라?

분명 다빈치가 설치해야 할 장치가 있다고 그들을 밖으로 떠밀었었지. 그 말에 무언가를 예감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 앞에 펼쳐질 것이 마슈라는 소녀에게 얼마나 눈부실 풍경인지, 인리수복을 해낸 마스터들에게 얼마나 가슴 벅찰 풍경인지.

눈보라가 치지 않는 푸른 하늘은 맑았다. 도리어 하늘과 아무도 밟지 않은 순백색의 눈이 시야 저 너머에서 합쳐져, 끝나지 않을 선을 잇는 것처럼 보였다. 마슈 키리에라이트는 그 풍경을 보고 칼데아로 돌아온 뒤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리츠카가 마슈의 어깨를 토닥였다.

끝나지 않을 하늘을 볼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 ※ ※

 

 

세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이야기가 끝나 돌아갈 무렵이었다. 마슈가 이네스를 불렀다.

 

“저, 이네스 씨. 잠깐 제게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세요?”

“네. 그럴게요. 무슨 일인가요, 마슈?”

“전해드리고 싶은 물건이 있어요.”

 

마슈 키리에라이트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네스는 순순히 마슈가 이끄는 대로 그의 방에 들어갔다. 저번에 봤을 때와는 다르게 무언가 늘어난 것이 많았다. 좋은 일이네. 이네스는 마슈의 침대 위에 앉았다. 한참 짐을 뒤적거리던 마슈는 찾던 것을 발견했는지 환한 얼굴로 그것을 들고 왔다. 어쩐지 익숙한 물건이었다.

 

“이걸 돌려드리고 싶었어요.”

 

그렇게 말하며 마슈가 내민 것은 다이어리였다. 사진첩처럼 꾸밀 수 있게 되어있는, 흔한 디자인의 다이어리. 그렇지만 이네스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 수밖에 없다. 저건 이네스가 마슈에게 준 것이었으니까.

과거의 어느 날이었다. 이네스 아브니르는 마슈 키리에라이트가 데미 서번트 실험을 위해 세상에 나온 자라는 것을 알았다. 마술사로서의 이성이 그에게 그것은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속삭였다. 사람으로서의 양심이 그것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 때의 이네스 아브니르는 겁쟁이였다. 이네스는 상반되는 그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어느 날 마슈 키리에라이트에게 다이어리를 하나 건넸다.

이네스는 가끔씩 마슈가 칼데아 밖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눈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누구도 밟지 않은 눈처럼 마슈 키리에라이트는 깨끗했다. 그건 뭔가 이상해. 어딘가에서 또다른 그가 속삭였다.

그래서 이네스 아브니르는 마슈에게 다이어리를 건네며, 추억이 될 만한 것이 있으면 사진을 찍어서 한 번 다이어리를 써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뜬금없는 제안일 것이 분명했지만, 마슈는 그 다이어리를 품에 안고 굳이 추억이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것이면 괜찮냐는 질문을 했다. 이네스는 그래도 된다고 했다.

그리고 이네스는 그 이후로 마슈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대외적으로 그는 재능있고 유능한 마술사여야 했다. 그리고 그 행동은 평소의 이네스 아브니르라면 저지르지 않을 일이었고, 유능한 마술사라면 오히려 마슈의 취급에 아무렇지도 않아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네스는 마슈에게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고, 최대한 피해 다녔다. 원래 그렇게 교류가 많은 사이도 아니었던 터라 그것은 매우 쉬웠다. 이네스가 예정대로 A팀의 마스터가 되었다면 얼굴을 마주해야 했겠지만, 올가마리와 관련된 일로 스스로 후보생 마스터로 물러났기에 그럴 일도 없었다.

그리고 인리가 사라지고, 마슈 키리에라이트는 데미 서번트로 각성해 예전에는 보지도 느끼지도 못한 것들을 알았으며, 이네스 아브니르는 칼데아의 셋밖에 없는 마스터가 됐다.

이네스가 건네준, 마슈 키리에라이트가 채웠던, 그 흔한 디자인의 다이어리는 두툼했다.

 

“이네스 씨가 제게 주신 거니까……. 저기, 저는 그때의 이네스 씨가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만, 그래도 그 다이어리를 받았을 때 무척 기뻤어요.”

 

그는 다이어리를 열었다. 자주 펼쳐본 것인지 어느 한 페이지가 저절로 펼쳐졌다. 인리수복을 하던 도중에 찍은 사진이었다.

리츠카는 장난스런 얼굴로 브이를, 후지마루는 손가락으로 총을 쏘는 자세를, 다빈치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정면을, 마슈는 어색한 표정으로 리츠카와 똑같이 브이를, 닥터는 당황한 얼굴로 허둥대는 모습을, 이네스는 그저 차분하게 웃고만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었다.

바로 그 페이지가 펼쳐지자 마슈는 당황한 듯 싶었다. 이네스는 천천히 다이어리를 덮었다.

 

“그렇군요. 다행이에요, 마슈. 용건은 이걸로 끝인가요?”

“아, 아뇨. 저기, 저… 잠깐만, 제 이야기를 들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크게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다. 이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착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네스 씨에게 건네받은 그 다이어리를 다 채웠을 때부터, 꼭 이렇게 얘기하고 싶었어요.”

 

 

※ ※ ※

 

 

마슈 키리에라이트는 무지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태어나 그렇게 자랐다. 하지만 데미 서번트 실험이 성공하고 닥터 로마니 아키만이 그의 주치의가 되면서, 그 무지함이 하나 둘씩 다른 것들로 채워져 나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바다에 흥미를 보이는 마슈에게 닥터 로망이 그림책과 영상 몇 가지를 가져왔다. 바다를 묘사한 그 영상과 그림책에 마슈 키리에라이트는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시선을 잡아끌었던 것이 있다.

그건 거대한 돌고래였다.

돌고래가 바닷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모습에서 어쩐지 마슈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돌고래는 그 무엇보다도 자유로워 보였다. 가슴이 술렁였다. 밖에는 저렇게 아름다운 곳도 있나요? 그 때의 마슈 키리에라이트가 물었고, 닥터가 답했다.

물론. 마슈도 언젠가 저런 걸 마음껏 볼 수 있을 거야.

그러나 마슈가 칼데아의 어엿한 일원이 되었을 때에도 그런 날은 멀어 보였다.

 

“오늘도, 눈보라는 그치지 않았네요.”

 

마슈의 어깨에 앉아있던 포우가 갑자기 시선을 어느 한쪽으로 돌리더니 잡을 틈새도 없이 어디론가 뛰어갔다.

 

“아, 포우 씨!”

“마슈 키리에라이트. 잠깐 제게 시간을 내줄 수 있겠나요?”

“…이네스…씨?”

 

손에 무언가를 들고 저편에서 차분한 분위기의 소녀가 걸어왔다. 마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네스는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다이어리에요.”

“네? 네. 감사합니다. 저, 이건…….”

“추억이 될 만한 것이 있으면 그 다이어리에 기록해 보는 것도 좋을 거예요. 마슈, 당신, 늘 창밖을 보고 있으니까.”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마슈 키리에라이트는 건네받은 다이어리를 품에 꼭 안았다. 그리고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저, 꼭 추억이 아니라도 되나요? 이를테면… 조, 좋아하는 것이라던가.”

“당신이 쓰는 다이어리이니 그래도 좋겠죠.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마슈.”

 

이네스가 떠난 그 자리에 마슈는 한참 동안 서 있었다.

 

 

※ ※ ※

 

 

“선배를 만나기 전에는, 그저 하늘의 풍경과도 같은 것을 기록해뒀을 뿐이지만, 선배를 만나고 난 뒤에는, 제 세상이 넓어지는 만큼, 다이어리도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저, 이네스 씨.”

 

마슈가 한번 심호흡을 했다.

 

“사실 저는 아직도 이 다이어리를 왜 이네스 씨가 제게 건네주셨는지 알지 못합니다. 분명 평생 정확하게 알 수 없겠죠. 그래도, 제 세상에서 처음 좋아하는 것들의 풍경을 기록하게 해주신 것은 이네스 씨였고……, 그러니까, 왠지 모르겠지만 이건 당신에게 돌려줘야 할 물건이라고 생각했어요. 처음 받았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네스는 손에 든 다이어리를 내려다봤다. 처음에는 단지 밋밋하게, 소원이나 바램 따위가 적혀 있을 뿐인 다이어리가, 처음으로 감상을 내놓고, 감정을 기록하고, 자신에 대해 고뇌하기 시작하는 그 과정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그것이 보수라고 생각했다. 인리수복을 해낸 것에 대한 보수. 이네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네. 마슈. 당신이 그렇게 느낀다면, 그걸로 충분한 거겠죠. 언제까지나.”

 

그는 마슈의 배웅을 받으며 칼데아의 복도를 걸었다. 문득 사촌오빠 이단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이단, 잘 지내려나. 아브니르 본가에 돌아가게 되면 먼저 사과해야지. 이네스의 마음이 부풀었다.

샤를이 보고 싶었다. 보수를 받은 기분이라고, 그 괴로웠던 시간과 자신을 죽일 것 같았던 고뇌가 이렇게 돌아왔다고 말하고 싶었다. 리처드는 인리수복을 한 뒤로 좌에 돌아갔으니, 이런 걸 말할 사람을 생각했을 때 당장 떠오르는 사람은 샤를이었다.

이네스는 샤를의 방문을 두드리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이네스가 본 것은 서로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아스톨포와 샤를마뉴였다.

 

“그, 러, 니, 까! 이네스는 좀 더 단정한 걸 좋아할 거라니까?! 임금님, 연인의 취향이 어떤지도 몰라? 이 바보!”

“바보는 네가 바보지! 마스터는 의외로 떠들썩한 걸 좋아한다고! 무엇보다 이 편이 좀 더 멋지잖아! 쿨&엘레강스! 이건 마스터가 감동해서 눈물을 흘릴 만큼 대단한 파티여야 한다고!”

 

보다 못한 이네스가 끼어들었다.

 

“그렇게까지는 필요 없어요.”

“으갸아아아악! 이네스, 언제부터 온 거야?!”

“아니, 그것보다 마스터, 어디까지 들었어?!”

“제가 눈물을 흘릴 만큼 대단한 파티여야 한다고…….”

 

샤를과 아스톨포가 동시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들켰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켰어!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임금님!”

“나도 몰라! 그, 그래! 마스터가 모른 척 해주면…. 아니, 이건 쿨하지 않……나?”

 

이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전의 들뜬 마음이 더 하이텐션인 두 사람에 의해 차분히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이네스는 두 사람 사이에 앉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송별파티가 이상한 방향이 되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차라리 저랑 의논해요.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일거고, 저는 굳이 깜짝파티가 아니라도 괜찮아요.”

“으윽, 으으윽. 들켜버렸어…….”

 

아스톨포는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대신 샤를에게 고개를 돌렸다.

 

“뭐,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마스터가 말한 방법밖에 없나.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뭐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되었으니, 팍팍 원하는 걸 말하라고, 마스터!”

 

의욕에 넘치는 눈동자가 이네스를 바라보았다. 이네스는 그가 일단 좀 진정하게 손을 붙들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네스가 자신의 희망사항을 얘기하면 얘기할수록 샤를마뉴의 눈동자가 허공을 방황하더니 급기야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귓가도 달아오른 채였다.

아하. 이네스는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눈치챘지만 모르는 척 하고 그에게 물었다. 아스톨포는 중간에 영체화로 사라져서 방을 나간 상태였다. 음, 요즘 내 성격에 조금 장난기가 많아진 거 같아.

 

“샤를, 어디 아파요? 제가 봐 드릴까요?”

“응? 아, 아니. 나는 완전 괜찮은데? 마스터의 기사님은 엄청 멀쩡합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물론 이네스가 거기서 멈췄으면 최근 장난기가 많이 늘었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네? 하지만 눈도 자꾸 이상한 데를 보고 있고, 무엇보다 아까부터 계속 몸을 한 군데에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잖아요. 역시 어디가 불편해요? 아니면 제 계획이 마음에 안 든다던가…?”

“아, 아니야! 그게 아니니까. 마스터의 계획은 무척이나 멋지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응…….”

 

그는 순한 양처럼 말했다. 시선은 여전히 딴 곳에 둔 채였다.

 

“소, 손 좀 놔주면 안 될까.”

 

이네스는 그러지 않고 더 가까이 다가가서 아예 그에게 안겼다. 이 사람을 이렇게 놀리는 게 제일 재밌다. 그가 웃음을 터트리며 샤를에게 안기자 그제야 이네스가 자신을 놀린 걸 알아챈 듯 이네스를 안은 손길에 힘이 들어갔다.

 

“당신 귀여워요.”

“마스터…. 장난기가 많아졌구나.”

 

이네스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얼굴에 띄고 물었다.

 

“싫은가요?”

“그럴 리가. 내 마스터는 최고로 멋진 마스터인걸.”

 

이네스는 그의 품에 안긴 채 마슈와 있었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원래 그의 방에 찾아온 목적도 그것이었다. 그는 하나도 흘리지 않고 일일이 추임새를 넣어주며 이야기를 들었다.

마슈에게 처음 다이어리를 건네주었던 일, 그 뒤로 마슈를 피해 다녔던 일, 인리수복을 하면서 마슈가 점점 채워나가 이제는 수많은 색채를 가지게 된 두툼한 다이어리를 다시 돌려받은 일까지.

이네스는 이 다이어리가 자신의 앞길을 지탱해 줄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적어도 인리를 수복했던 자신들의 행동은 이 다이어리 하나만큼의 가치가 있었노라고 말할 수 있는 증거. 앞으로 싸울 수많은 마술사에게는 별것이 아닐지 몰라도 직접 겪은 그에게만큼은 가장 가치 있는 물건 말이다.

그리고, 이네스는 그냥 이때 그와 계약하기로 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 분위기에 취한 걸까. 이네스가 그를 빤히 올려다보자 어리둥절한 얼굴로 샤를이 시선을 마주쳐왔다. 이네스가 더더욱 빤히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가 이젠 당황한 얼굴을 했다. 이네스는 더더더 빤히 그를 바라봤고, 샤를은 항복선언을 했다.

 

“마스터. 그, 무슨 일이야?”

“내 기사님, 지금 그냥 개별적으로 계약할까요?”

“지, 지금?”

“안 돼요?”

“……아니.”

 

이네스가 기댔던 몸을 똑바로 세우고 그를 바라봤다. 호즈노미야가 그의 안에서 속삭였다.

 

‘너, 이 녀석 정말로 좋아하는구나. 이건 좋은 변화일까? 정말이지, 예고 좀 하고 내 힘을 쓰던가 해, 이네스. 나는 너고 너는 나지만, 나라도 갑자기 네가 그렇게 말하는 건 예상 못 한다고.’

 

거짓말. 천리안을 가진 호즈노미야가 그걸 몰랐을 리가 없다. 이네스는 샤를에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하고 자신 안의 호즈노미야와 잠시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다.

 

‘놀리려고 하는 거면 그만둬. 애당초 너도 알고 있었잖아. 결국 네가 나라고 먼저 말한 건 너였어, 호즈노미야.’

‘그건 이런 뜻이 아니고, 나는 딱히 저 녀석을 그런 쪽 감정으로 좋아하진 않아. 이것만 봐도 너와 네가 같은 사람이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임을 알 수 있을 텐데.’

‘물론 넌 그렇겠지. 어쨌거나, 협력은 안 해줄 거야?’

‘그럴 리가, 해 드려야지. 아무래도 난 있을 몸을 잘못 고른 거 같아.’

 

불평하는 호즈노미야의 말을 한 귀로 흘려 넘기고, 이네스가 한쪽 손을 내밀었다. 영주가 있는 손이었다. 샤를이 에스코트하듯 정중하게 그의 손을 아래로 넣어 이네스의 손을 잡았다.

이네스가 계약의 언어를 읊기 시작했다.

 

“그대, 세이버 샤를마뉴. 그대는 이 계약을 받아들여, 나의 곁에 있어 주겠는가?”

“받아들이겠다. 나는 그대를 나의 주인으로 인정한다. 마스터, 이네스 아브니르!”

 

그리고 빛이 있었다. 이네스는 자신의 몸에서 마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계약이 체결되었음을 실감했다. 그것도 잠시, 눈이 감겨오기 시작했다.

 

‘아……. 이거, 계약의 여파구나. 호즈노미야의 힘도 끌어다가 썼으니까 이러는 건가.’

 

이네스의 몸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샤를은 무너지는 이네스의 몸을 받쳤다. 이네스는 비몽사몽한 얼굴로 그의 어깨를 잡고 한동안 끙끙대더니, 숨을 푹푹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마스터, 괜찮아? 뭔가 잘못된 거야?”

“으. 이거 의외로 나가는 마력이 많네요. 잠깐 예상치 못하게 마력이 많이 빠져나가서 그런 거예요. 이젠 괜찮아요.”

 

고개를 든 이네스의 안색이 괜찮아 보였기 때문에 샤를은 그 말이 맞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걱정을 좀 덜고 자신의 몸상태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확실히 마력이 흘러들어오는 출처가 칼데아를 끼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그때 뭔가를 고민하던 이네스가 그를 불렀다.

 

“샤를. 당신은 이제 저와 계약으로 묶였으니, 이제 바깥세상에 당신의 존재를 뭐라고 둘러댈지 생각해봐야 해요. 혹시 생각해둔 거 있어요?”

 

샤를은 눈을 끔뻑였다. 확실히. 그와 이네스는 곧 칼데아를 떠날 것이다. 그 전에 그에 대해서 뭐라고 둘러댈지 생각하는 것이 필요했다. 칼데아의 기록을 본 외부인들이 그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게 하는 작업도 필요했고.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그의 가짜 신분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 ※ ※

 

 

시간은 매정했다. 이네스가 칼데아를 떠나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자 리츠카와 후지마루가 안절부절못했다. 이네스는 큰 캐리어를 가지고 그를 데리러 올 헬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샤를은 영체화를 하고 그의 곁에 붙어 있었다. 아, 정말로 떠나는구나. 오늘은 무슨 조화인지 날씨가 좋았다. 이네스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거대한 설원을 보며 생각했다.

예전에는 저 눈보라가 감옥의 창살로 보이더니, 막상 떠날 때가 되자 그를 보호해주는 방어막으로 보였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도 했다. 이네스 아브니르가 처음 칼데아에 온 것은 그저 마주해야 할 일을 똑바로 마주 보지 못해 도망친 것이었고, 지금은 그것을 제대로 마주 보고 지금까지 그가 겪었던 그 어떠한 여정보다도 험난한 길을 가기 위해 칼데아를 떠나니까.

생각이 많아진 건 그 탓이다. 1년간 접촉하지 못했던 바깥의 세계는 과연 이네스 아브니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다빈치가 말하길, 저쪽 입장에서는 갑자기 눈을 떠봤더니 1년이 지나있는 상황이라고 했지. 그럼 1년 만에 예전과는 달라져서 돌아온 그에겐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그리고 이네스 아브니르는 그들에게 어떻게 말해줘야 할까? 내가 당신들을 대신해 미래를 되찾았으니 열심히 살라고? 대다수는 그 무게도 모를 텐데?

생각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관제실에서 다빈치가 방송했다.

 

―아, 아. 들리니? 이네스. 헬기가 근처에 거의 다 온 모양이야. 이제 라운지로 가야할 거 같아. 가기 전에 리츠카 짱이랑 후지마루 군과 인사나 나누고 가렴!

 

드디어. 이네스는 캐리어의 손잡이를 잡고 일어섰다. 캐리어가 드르륵 바닥에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그는 먼저 웃는 얼굴로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녀올게요. 리츠카, 후지마루. 당신들도 행운을 빌어줘요.”

 

리츠카가 먼저 그 손을 맞잡았다.

 

“꼭 돌아와야 해. 돌아오고 나면 바깥에서 본 것들을 알려줘. 그리고 기념품 사오는 것도 잊으면 안 된다?”

“리츠카. 너는 정말…….”

“뭐. 후지마루. 뭐.”

“됐어. 이네스, 잘 지내야 해. 다시 만나자. 꼭.”

“네. 꼭 다시 돌아올게요.”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눈 이네스는 그대로 돌아서서 라운지로 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네스가 고개를 돌리고 리츠카 쪽을 향해 외쳤다.

 

“리츠카의 기념품도 꼭 사서 올 테니까요!”

“그래!”

 

세계 최후의 마스터였던 동료들의 배웅을 받으며, 이네스 아브니르는 칼데아를 떠났다.

헬기는 이미 라운지에 내려와 있었다. 헬기에서 내리는 인원들 중 몇몇은 얼굴이 익숙했다. 이네스는 가지고 온 캐리어를 그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헬기에 올라탔다. 샤를도 영체화 상태로 그를 따라 헬기에 탔다. 다른 사람들은 샤를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이네스는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헬기는 곧 출발했다. 멀어지는 칼데아를 바라보는 이네스에게 시계탑에서 파견나온 마술사가 물었다.

 

“도대체 저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리고 이네스는 답했다.

 

“머지않아 알게 될 거예요.”

 

 

※ ※ ※

 

 

이네스는 바로 시계탑으로 가지 않고 아브니르 본가로 갔다. 오랜 비행에 지친 이네스는 뭉친 근육을 풀었다. 헬기가 영국에 도착하고 거기에서 프랑스로 온 거라 현재 그의 몸은 매우 피곤한 상태였다. 샤를도 이네스가 고용한 호위라는 명목으로 아브니르 본가에 입성했다.

이네스가 본가에 들어가자마자 마주친 것은 어째 전보다 더 폭삭 늙은 것같은 외삼촌의 얼굴이었다. 예전에는 저 얼굴이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무서울 때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외삼촌은 참 낡아보였다. 이네스는 하인에게 짐을 맡기고 외삼촌에게 다가갔다.

 

“마중 나오지 않으셔도 괜찮았는데.”

“오오. 네가 온다는 데 어떻게 나가보지 않을 수 있겠니. 힘들었겠구나. 이리 오렴.”

 

팔을 뻗은 외삼촌을 이네스가 아주 자연스럽게 피한 뒤 일부러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지금까지 기다리시느라 고생하셨을텐데, 들어가 주무세요. 거기 당신, 삼촌을 방으로 모셔줘요.”

“아니다. 난 괜찮아. 그것보단 자세히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이 사람은 여전히 쓸데없이 눈치만 빠르구나. 이네스는 차분하게 웃고는 그냥 하인에게 손짓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시계탑에서 저를 불렀어요. 곧 오라더군요. 그때 삼촌도 같이 가시죠. 가신다면 제 대리인으로 발언하실 수 있을 거예요.”

 

물론 그는 이네스가 시킨 하인에 의해서 그날 시계탑은 문턱에도 못 가고 쿨쿨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외삼촌은 그것을 기회라고 판단했는지 이번에는 별 말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마 그는 반강제적으로 언제나 말 잘 듣는 조카였던 이네스가 1년이 지난 지금에도 똑같으리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 1년은 당신에게만 없던 시간이지 나에겐 아닌데. 이네스는 샤를에게 방을 내주라고 사용인들에게 지시한 후, 방으로 올라갔다.

그는 칼데아에 있을 때 시간을 절대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이미 본가의 사용인들은 모두 이네스의 사람이라고 봐도 좋았고, 거대한 아브니르 가문 내에선 거의 절반 정도가 이네스의 편을 들 것이다. 이네스는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외삼촌과의 싸움을 준비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 생각 안 하고 쉬고 싶었다. 이네스는 오랜만에 돌아오는 방의 침대에 몸을 묻었다.

다음 날, 이네스는 늦잠을 잤다. 어쩔 수 없이 밥은 방에서 먹어야겠다. 이네스는 사용인을 불렀다. 그가 주방으로 가는 동안 이네스는 같은 층의 가까운 다른 방으로 넘어가 문을 두드렸다.

 

“샤를. 제 방에서 같이 식사할까요?”

“마스터랑? 그래. 마스터의 저택의 주방장의 실력은 어떨지, 그것 참 기대되는데! 분명 엄청 멋진 실력이겠지!”

 

그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온 이네스가 방의 소파에 앉아서 신기한 듯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는 샤를을 보고 슬며시 웃었다.

상상해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 연인과 같이 식사를 한다는 지금의 이 상황도 그렇고, 그가 자신의 방에 앉아있다는 것도 그렇고.

그런데도 잘 어울렸다. 이네스의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확실히 이 거대한 아브니르 저택에도 압도되지 않을 존재감을 풍겼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모든 게 시작됐지……. 이네스가 생각했다.

이 방의 전 주인에 의해 이네스가 아브니르의 후계자가 되었고, 이 방의 무게에 못 견뎌 칼데아로 도망쳤으며, 이 방의 주인이 된 덕에 이네스는 제대로 과거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방의 주인이기에 그 지긋지긋한 외삼촌과의 악연을 정말로 끊어낼 때가 왔다.

하인이 가져온 식사를 들며 이네스는 다시금 되새겼다.

사랑하는 사촌오빠. 사랑하는 샤를. 사랑하는 칼데아.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이네스가 이 자리에 섰음을. 이제는 그도 싸워야 할 때 임을.

끝은 어떻게 보면 새로운 시작이라고 했다. 이 방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이 방의 주인이 끝내야 하는 법이었고, 동시에 끝낸 자가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인리수복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던 것처럼.

이네스는 나아가기로 했다. 그는 샤를에게 시선을 보냈다.

당신이 함께 있으니 괜찮을 것이라고.

그도 그 시선을 알아챘는지 웃어주었다.

 

 

※ ※ ※

 

 

시간이 지나 이네스가 시계탑에 가야 할 날이었다. 이네스가 지시한 대로 하인은 어젯밤 훌륭하게 외삼촌의 혼을 쏙 빼놓은 다음, 그를 깊게 잠들게 했다. 나중에 보너스 줘야지. 이네스는 마술예장을 두르고 장신구를 하며 생각했다.

호신용 마술이 담긴 목걸이가 목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현대의 정장으로 갈아입은 샤를도 새벽부터 하인들이 달라붙었는지 빛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네스가 중앙 계단을 통해 내려오자 미리 도열해있던 사용인들이 고개를 숙였다.

부모님은 오늘도 안 나오셨군. 자기들 좋을 대로 사시니까 오늘도 붙어 계시겠지. 1층에 비치된 소파에서 시계탑의 차량을 기다리며 이네스가 생각했다. 예정했던 시각보다 일찍 나와서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진 것을 눈치챘는지 사용인 하나가 차를 내왔다. 차는 늘 먹던 맛이었다. 이 저택에서 차를 가장 잘 타는 사용인이 정성 들여서 끓인 그 맛.

하지만 그 차를 마시면서 이네스는 칼데아의 차를 생각했다. 가끔씩 온도가 안 맞고, 어떤 때는 지나치게 쓰고, 어떤 때는 지나치게 달던, 인간미가 느껴지는 차.

하인들은 가주가 갑자기 데려온 호위라는 남자에게 시선을 두었다가 금방 뗐다. 외모가 눈에 띄어서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그래도 무난하군.

집사가 이네스에게 다가오더니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당주님, 시계탑의 차량이 곧 도착한다고 합니다. 저택의 정문까지는 거리가 좀 있으니, 지금 출발하시는 게 어떠신가요?”

“그래요? 곧 나가죠. 샤를, 그대도 일어서요. 집사, 내가 꽤 오래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으니 다른 분들게 먼저 식사하라고 일러두세요.”

 

어차피 신경도 안 쓰겠지만. 이네스는 뒤에서 제법 경호원 티를 내는 샤를을 거느리고 저택의 문을 나서 정원으로 걸어갔다. 샤를이 염화로 이네스에게 말을 걸었다.

 

―마스터.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이 집의 정원은 무척이나 아름답네. 관리하는 사람의 애정과 정성이 느껴져! 그야말로 진심을 다해서 아낀다는 게 눈에 보일 정도야.

 

이네스 역시 염화로 그에게 답했다.

 

―정원사가 여길 워낙 아끼거든요. 시간은 많으니, 날씨가 좋을 때 같이 산책이라도 나와요.

―그건 좋은걸. 기대하고 있을게! 이야. 역시 마스터의 저택은 생각했던대로, 아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들어!

 

그가 정원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아 이네스는 기분이 조금 풀렸다. 입가에 머금은 미소를 뒤따라오는 다른 하인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정면만을 바라보고 걷던 이네스의 눈에 정문이 보였다. 시계탑의 차량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채였다.

 

“이런. 먼저 나와 계셨군요. 많이 기다리셨나요?”

 

차에서 내린 것은 법정과 소속의 동양인 마술사였다. 그 마술사가 샐쭉하게 웃으며 넓은 소매로 입가를 가렸다. 이네스는 무덤덤하게 답했다.

 

“그리 오래는 아니었습니다.”

“다행이군요. 아브니르 가의 당주를 기다리게 한다니, 저같은 마술사는 심장이 떨려서 못 견딜 일입니다.”

 

가볍게 농을 던지는 마술사의 말을 이네스도 미소지으며 받아넘겼다. 그가 차에 타고, 샤를도 타려는데 법정과의 마술사가 샤를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분은……?”

“제가 새로 고용한 호위 겸 보좌관입니다. 그의 신분은 아브니르 당주의 이름으로 보증하도록 하죠.”

“어머. 알겠습니다. 그럼 출발하도록 하죠.”

 

마지막으로 법정과의 마술사까지 탄 차 안에서는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마술사가 붙임성 좋게 이네스에게 말을 붙였다.

 

“그나저나 깜짝 놀랐습니다. 설마 아니무스피어의 천문대에 대해서 증언을 하시는 분이 아브니르의 가주이실 줄이야.”

“네. 저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아직, 실감이 나지 않네요.”

 

아무것도 모르는 체 이네스가 그 물음을 받아넘기자 그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이네스는 표정변화없이 무척이나 태연한 태도였다. 아무래도 시계탑에 도달하기 전에 뭔가를 캐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렇게 판단한 마술사는 아무런 말 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렇게 정적만이 차 안에 가득 찼다. 창 밖을 구경하며 가다 보니 어느새 공항이었다. 법정과의 마술사가 먼저 내렸다.

 

“공항엔 시계탑의 전용기가 준비되어 있답니다. 그리로 가주시길.”

 

그리고 또 다시 비행이었다. 요즘 하늘에 있는 일이 많아진 거 같네. 호화로운 내부를 자랑하는 시계탑의 전용기에 탑승하며 이네스가 생각했다. 영국에서 프랑스까지는 멀지 않다. 굳이 비행기인 것은 혹시 모를 도주에 대비한 것이리라.

그렇게 시계탑에 도착했을 때, 법정과의 마술사는 이곳이라며 장소를 안내해주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네스는 신경쓰지 않았다.

문이 열리기 전, 그는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문이 열리고 이네스가 안으로 들어서자 안에서 진행 중이던 논쟁이 뚝 멎었다. 그는 흔들리지 않고 방의 정중앙으로 나아갔다.

 

“이네스 아브니르. 우리가 당신을 부른 목적은 이미 알고 있겠지요? 긴 말은 않겠습니다. 인리계속보장기관 칼데아에 대해 말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네스가 씩 웃었다. 그의 싸움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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