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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계는 겨울로 물든다.

*밤의 수호자 루트의 스포일러가 존재하며, 세계관에 대한 개인 해석 및 개인적인 설정이 존재합니다.

*약간의 유혈 묘사 및 사망 소재를 주의해 주세요. 특히 추락사에 관한 언급(묘사 X)이 있습니다.

지독하게 푸른 하늘은 어느새인가 자취를 감추고, 남은 것은 기이한 붉은빛 풍광 하나.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 한눈에 풍경을 담을 수 있는 위치에 두 사람의 발이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언뜻 보면 상당히 위험해 보이는 난간에 걸터앉은 상황이었건만, 지극히 평화로운 얼굴은 그런 걱정의 기미는 보이지도 않고, 조각나기 시작한 공간을 바라보며 말없이 다리를 흔들 뿐이다.

지상으로부터 몇 미터나 떨어진 곳에 발을 디딜 것은 없다. 하지만 지상 역시 이내 그만한 폐허로 변해가겠지. 종말의 도시. 몇 번이고 부서지며 순환을 반복하는 도시의 운명은 마치 족쇄처럼 평화를 옭아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몇 번째의 평온을 추구했던가. 비산하는 공간의 파편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면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손을 뻗는다. 불가능을 자각하면서 몸을 던지는 것이 인간의 습성이라고 누군가 말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 와서 기억이라 하면 무엇이 진실인지도 모르겠지만.

어느덧 붕괴가 두 사람의 머리 위까지 도달했다. 몇 초 후면 모든 것이 사라지겠지. 음울한 배경 속에서도 희게 빛나는 지휘사가 미소를 보였다. 그의 신기사 역시 마주 미소지었다. 사라져버린 맑은 하늘빛을 언제까지건 품고 있을 자. 암흑의 시간에 맞서는 이. 그의 수호로 돌아가기 시작한 시계는 새벽을 향하던가.

 

“세츠.”

“아니, 셀리아. 아무 말도 하지 마.”

 

시계(視界)가 흔들리는 사이, 어렴풋한 감정의 교차가 공백을 채운다.

 

하지만, 새벽은 밝지 않는다.

얼어붙은 시계 속, 이곳은 아직, 영원의 밤이다.

 

 

 

 

 

***

 

 

 

 

 

째깍.

 

시계가 정각을 가리킬 무렵, 먼 곳에서 익숙한 스쿠터 소리가 들려왔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어우러져 제 기세를 무섭게 떨치고 있는 여름의 햇살. 그 아래 날씨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긴 옷차림의 사람, 중앙청의 두 번째 지휘사가 들고 있던 단말기를 집어넣으며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했다.

 

“거 참, 옷차림으로 한 방에 알아볼 수 있는 건 좋은데, 안 더워?”

“겨울에 그 옷으로 돌아다니던 사람한테 듣기는 좀 그런데.”

“난 튼튼한 신기사니까.”

“그래, 그래서 독감 같은 걸 걸려서 골골댔겠지.”

“아이고, 다시 아픈 기분인데.”

 

흰 스쿠터가 멈추고, 갈색 머리칼의 남자가 가볍게 뛰어내렸다. 날씨에 맞지 않는 옷차림의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 주위의 기묘한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 사람은 더운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세츠……. 그런데 네 헬멧은 어디다 뒀어?”

“없어도 돼, 내 운전 실력을 못 믿는 거야?”

“단속에 걸려도 난 모른다…….”

 

모처럼 평화로운 접경도시의 하루. 몇 주째 흑문의 소식도 없었고, 도시 내부의 소란도 없었다. 기묘할 정도의 안정이 지속되자, 중앙청은 분명 큰 사건의 전조라 생각해 며칠간 비상경계 태세에 돌입했지만, 그것도 2주를 넘기지 못했다. 의심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한 평화. 이따금 아주 작은 환력 파동이 발생하는 것을 제외하면 흑문 사태의 종식을 선언해도 될 정도로 아무 일이 없었다. 덕분에 중앙청은 처음으로 신기사들과 지휘사에게 제대로 된 휴가를 주게 되었다. 위기의 연속, 비일상을 일상으로 여기며 살아가던 이들에게 주어진 최초의 평범한 일상.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아래에서만 만끽할 수 있는 자유로움은 실로 달콤한 것이었다.

시가지 중앙 공원에서 만남을 가지는 이 신기사와 지휘사 역시 그런 혜택을 톡톡히 누리는 중이었다. 입사하자마자 7일간을 유해화에 중앙청의 분열 같은 거대한 일을 떠맡아야 했던 비운의 지휘사, 세실리아는 또다시 일이 터지기 전에 반드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기로 다짐한 것이다. 그 계획의 첫 번째가 바로 항구도시의 바다로 짧은 여행을 떠나는 일이었다. 7일의 폭풍 같던 나날을 함께해 준 제 신기사와 함께 말이다.

세실이 한숨을 내쉬며 세츠가 건넨 헬멧을 쓰고 스쿠터 뒷자리에 앉았다. 한 번도 이렇게 타 본 적 없을 텐데 꽤 익숙한 감각이었다. 또다시 데자뷰인가. 이제는 일상이 된 기시감에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이내 앞에 올라탄 세츠가 세실의 손을 잡았다.

 

“꽉 잡으라고.”

 

 

 

여름의 공기는 뜨겁지만, 바람은 언제 어디서라도 시원한 법이다. 탁 트인 도로를 스쿠터로 내달리며 주위를 둘러보자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늘 긴급 상황에 달려나가고, 공간 이동을 통해 감상할 겨를도 없이 도착하고, 마지막에는 헬리콥터로 위에서 떨어지느라 한 번도 실감하지 못했던 경치. 도로 옆에는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바닷물이 보석처럼 일렁인다. 낭만적이네. 세실이 세츠의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소중히 여기는 사람과 같은 시야를 공유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니까.

짧지는 않은 거리였으나, 감상을 곁들인다면 시간은 늘 왜곡된다. 금세 항구도시 초입에 다다르자 세츠가 스쿠터의 속력을 줄였다. 몇 번씩이나 왔던 도심을 지나치고, 가끔 보이는 익숙한 얼굴들과 인사까지 나누고 나면 바닷가가 눈에 들어온다. 좋은 날씨와 어우러져 별빛을 풀어놓은 듯 반짝이는 바다가 어떤 황홀경을 가져다주는 것만 같았다.

백사장을 몇 걸음 앞두고 스쿠터가 멈췄다. 헬멧을 벗어 세츠에게 건넨 세실이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겼다. 그래도 여름은 여름이다. 유독 더위를 안 타는 습성이긴 해도 배어 나오는 땀은 어쩔 수가 없었다. 바닷바람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물가인 탓인지 서늘하게 식은 공기가 기분 좋게 피부에 감겨들었다.

 

“날도 좋고, 웬일로 사람도 없고. 좋은데?”

“그러게, 운이 좋네 오늘은. 지금까지 쭉 운이 없었으니 보상이라고 생각할까.”

 

한가로운 발걸음이 백사장을 밟았다. 흰 구두만큼 하얀 모래가 밟히며 사각거리는 소리를 낸다. 입자가 고운지 푹신한 느낌이 발을 통해 전달되었다. 주위에는 사람도 없고, 위협도 없고, 급한 연락도 없다.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바다와 두 사람. 두 사람만의 바닷가. 반짝이는 별의 바다.

말없이 한참을 거닐던 이들은 결국 물가에 다다라서야 입을 열었다. 본래 너무 많은 것을 아는 사람들끼리는 더 할 말이 없다고 하지 않던가. 안 덥냐는 별 의미 없는 말만을 건네며 세실이 모래사장에 털썩 주저앉았다. 뒤따라 온 세츠 역시 대꾸 없이 그의 옆에 앉았다.

단순히 정신없는 일곱 날을 같이 지내온 것만으로 이렇게까지 편안할 수 있을까.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 속에 느껴지는 상대의 온기가 부드럽게 느껴졌다. 여름의 열기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 마치 오랜 시간을 알고 지낸 듯, 이 7일보다 훨씬 오랜 기간을 함께 싸워온 듯 익숙하기만 한 체온. 한참 동안 고요함 속에 묻혀 있던 세실이 문득 목소리를 내었다.

 

“세츠.”

“응?”

“바다 와 본 적 있어?”

 

이런 기본적인 것도 우리는 모르고 있었구나. 상당히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세실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긴, 자신에 대한 기억조차 남아 있지 않은 사람이 타인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리가 없나. 제 기억에 뚫린 거대한 공백을 바라보는 양 한없는 시선으로 바다를 본다. 단순한 물음에 깊게 배어나는 감정을 눈치챈 듯 세츠가 즉각 답을 하지 않았다. 다만 세실의 시선을 따라 먼 곳을 바라볼 뿐.

 

“있었지. 나는 접경도시의 모든 좋은 장소를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뭐야, 혼자만 알고 있으려고?”

“아야, 너 은근 세다는 걸 좀 깨달아 줄래?”

 

장난스레 세츠를 툭 치자 그가 과장된 행동으로 바닥에 쓰러졌다. 곧 뜨거웠는지 벌떡 일어나긴 했지만. 그러게 왜 그런 짓을 해. 금세 머리카락에 다닥다닥 달라붙은 모래를 털어주려 세실이 손을 뻗는 찰나였다.

 

“어, 셀리아. 저기 봐.”

“응?”

 

세츠의 시선이 먼 곳으로 향했다. 그 틈을 타 그의 머리를 헤집듯 털어낸 세실이 손에 묻은 모래를 뭉쳐 떼며 눈을 돌렸다.

먼바다 한 켠에 하얀 포말이 일었다. 작은 범위에서 시작된 물거품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범위를 넓혀갔다. 무엇일까. 잔잔하기만 했던 바다에 발생하는 정체 모를 변화는 경계의 대상이었다. 두 사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변화의 진원지를 노려보았다. 조금 전까지의 장난스러운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세츠는 어느 새인지 신기를 꺼내 들고 여차하면 대응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흑문은 어디서든 열릴 수 있었다. 설령 그것이 바다 한가운데라고 할지라도. 몇 주 동안이나 사건이 없었다고는 해도, 환력이 사라지지 않은 시점에서 위협은 언제 어디서라도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파문이 점점 거칠어지고, 이내 수면 위로 정체가 드러나기 직전. 팽팽한 긴장감이 해변에 감돌고, 마침내 모습을 보인 것은.

 

“저거…….”

 

그건, 거대한 돌고래였다. 혹시 몰라 끝까지 경계를 유지하던 두 사람이 서로를 동시에 마주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어떠한 환력도 느껴지지 않는, 말 그대로의 돌고래. 살아있는 생명체였다. 세츠가 신기를 어깨에 걸치며 고개를 저었다. 신경과민이야, 이거. 바다가 있으니 당연히 돌고래 같은 생명체일 가능성을 고려했어야 하는데, 흑문 몬스터부터 떠올리다니. 말 그대로 비일상이 일상이 되어 버린 셈이었다.

 

“돌고래가 나올 계절이던가?”

“글쎄, 나도 바다는 다녔어도 돌고래는 처음이거든.”

 

처음 모습을 보인 한 마리를 시작으로 수십 마리의 돌고래들이 물 위로 나타났다 다시 사라졌다. 가히 장관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에 세실이 넋을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열중했다. 어느덧 해가 져 가는 하늘에 바다가 붉게 물든다. 황홀한 빛으로 물드는 광활함 사이로 생명력이 드나들었다. 부재한 기억 사이로도 이런 광경은 처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떨어지는 노을 사이로 물결치는 돌고래의 형상, 그리고 그것을 같이 바라보는 누군가의 존재. 공기마저 부드럽게 느껴지는, 마치 꿈과 같은 평화.

 

“누군가랑 같이 온 것도 처음이고.”

 

서글서글한 미소를 짓는 따스한 색채의 사람. 찬 기운이 내려앉은 바람이 그를 스쳐 지나간다. 이 평화가 조금만 더 유지되면 좋을 텐데. 어떠한 걱정도 없이, 그저 이런 평온만이 이어지는 세계였다면 좋을 텐데.

그런 헛된 희망을 빌었다. 신이라는 존재가 정말 있다면, 이뤄주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들어주기를.

 

붉은 기운이 어리는 세츠의 옆모습에서 눈을 떼려는 찰나, 세실의 눈에 어떤 그림자가 들어왔다. 사람이었나? 아니, 사람일 리가 없었다. 이 바닷가에는 분명 두 사람밖에 없었고, 아무런 인기척 없이 이렇게 가까이 다가올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신기사라면 가능할지 몰라도, 저런 신기사는 이 도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하얀색을 감고, 안대 같은 걸 쓴 신기사는 없었다.

하지만 지휘사인 그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눈앞에 선 이 자는 분명히 환력을 지니고 있었다. 신기사가 맞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으나, 분명 안심해서는 안 되는 상대다.

 

“세츠!”

 

정체불명의 존재 주위의 공간이 일그러진다는 것을 알아채는 순간 세실이 세츠를 강하게 당겼다. 세츠 역시 바로 상황을 파악하고 잠시 풀었던 경계 태세로 돌아섰다. 공간을 일그러뜨리는 신기사라니, 들은 적도 없다. 언제 나타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우호적인 자는 아닌 듯했다.

 

“넌 누구지? 신기사인가?”

 

세실의 물음에도 그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주위의 왜곡이 한층 심해진 것으로 그가 말을 들었음을 인지할 뿐. 아무리 세츠가 이런저런 대응책이 많아도 아예 전력 파악이 되지 않는 상대와 맞붙는 것은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세실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세츠에게 눈짓했다. 자리를 피해야 한다. 당장의 교전은 위험하다.

하지만, 신호를 인지하고 무엇을 할 겨를도 없이 상대가 입을 열었다.

 

“마음에 들어?”

 

그 말을 끝으로, 손 쓸 틈도 없이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점멸.

시계의 반짝임.

 

 

 

 

 

***

 

 

 

 

 

째깍.

 

가을비는 무심하리만큼 오래 지속되고 있었다. 눅눅한 날씨에 모두가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앉아 있는 시가지의 카페. 그 속에서도 압도적으로 피로한 몰골인 사람을 찾자면, 단연 중앙청의 두 번째 지휘사라는 새하얀 사람일 것이다.

테이블에 턱을 괴고 꾸벅꾸벅 조는 꼴이 하루 이틀은 철야를 한 사람 같아 보였다. 하긴, 요 며칠 일이 많긴 했지. 지나가는 사람마다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를 한 번씩 바라보았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열리는 흑문에 대응하느라 아침에는 동방거리에 있다, 점심에는 구 시가지에 있다, 몇 시간 후에는 항구에 나타났다, 저녁 마감 직전에는 시가지 벤치에 뻗어있는 것이 목격될 지경이었으니까. 이를 바득바득 갈며 다 죽여버리겠다던 지휘사의 모습은 신기사보다도 무서웠다던가. 더러는 지휘사가 그의 장검을 휘두르는 것까지 보았다고 한다.

 

“어이구, 지휘사님. 정신 차리라고.”

 

세츠가 양손에 커피잔을 들고 오며 말했다. 하여튼 비만 오면 죽어 나가는 건 알다가도 모를 특성이다. 세실의 맞은편에 앉은 그가 정신을 차릴 생각이 없어 보이는 세실의 손을 톡톡 건드렸다.

 

“……언제 왔어?”

“맞혀보던가?”

“방금 왔네.”

“역시 내 지휘사는 똑똑해.”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도 알걸…….”

 

길게 기지개를 켠 세실이 세츠가 건넨 커피를 받아들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향에 다시 눈을 감자 졸음이 또다시 훅 몰려들었다. 이러다 또 졸겠네. 세실이 머리를 흔들고 한 모금을 홀짝였다. 카페인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몸이었지만 뭐 괜찮나. 따뜻한 게 들어가니 조금 정신이 드는 것도 같았다.

며칠 동안이나 강도 높은 업무를 처리하고 간신히 가지는 잠깐의 휴식이었다. 홍수라도 낼 것처럼 쏟아지는 비에 덩달아 흑문의 확장세도 소강상태였다. 몬스터도 날씨를 봐 가면서 들어오는 건지 원.

창가에 부딪히는 빗방울이 카페 안에 흐르는 음악과 어우러져 묘한 음률을 만들어 내었다. 음악 사이 빈 곳을 파고드는 듯 채우는 조그만 타격음들. 하늘은 검고, 공기는 물기가 스며있고, 아직 여름의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기온은 찝찝하게 피부에 달라붙었지만, 그 하나가 위안이 되는 것이 비가 오는 날이었다. 다만 세실의 몸은 자그마한 위안마저 거부하려는지 비만 왔다 하면 전면 파업을 내걸고 정신을 닫아버리는 것이었다. 아무 이유 없이 그저 비만 오면 빈사 상태에 돌입해 자는 것 외에는 하지 않으려 들고는 했다. 몇 번씩이고 검사를 받았는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만 나왔다. 단순히 비 오는 날씨에 유독 민감할 뿐이라는 진단만 나왔을 뿐.

비만 왔다 하면 모든 연락을 무시하고 자신의 방에 쓰러지듯 처박혀 있는 것이 세실의 일상이었다. 그런데도 급한 연락은 또 넘겨 버리지 못해 비척대면서도 나오는 책임감은 또 뭘까. 역설적인 면모를 품은, 만사가 귀찮아 밥이고 뭐고 깔끔하게 던져 버리는 이 지휘사를 케어하는 사람은 있어야지. 세츠가 굳이 그를 끌고 카페까지 나온 이유였다. 그래도 제 말은 듣는 게 다행이라고 세츠가 생각했다. 다만, 세츠가 모르는 사실이 있다면, 그는 정말로 세츠의 말만을 듣는다는 정도일까.

조금 정신이 든 듯 주위를 둘러본 세실이 의자에 늘어지듯 기대었다.

 

“비 참 지루하게 오네…….”

“좋지 않아? 적어도 소리는.”

“소리만.”

 

밤인지 낮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하늘은 음산한 빛깔이었다. 저런 하늘은 유독 기분이 나빠. 세실이 중얼거리며 다시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왜, 그런 얘기도 있잖아. 비가 오는 건 신이 울고 있기 때문이라던가.”

 

퍼지는 커피 향기 사이로 빗방울이 시야를 건드린다. 건물에 부딪힌 빗소리가 향을 어지럽힐 듯 다가온다. 의식 사이로 파고드는 빗물은 묻혀 있던 기억을 떠오르게 만든다. 이것과 같이, 아니, 이보다 더하게 쏟아지는 폭우 속에 서 있던 어느 날. 겪지 않았지만 분명히 겪었던 어떤 밤의 기억. 힘들기만 하던 비의 날 중 유일하게 그러지 않았던 단 하루.

 

“세츠.”

 

너만은 알지 못하는 시간의 기록. 세실이 창밖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세츠에게로 향했다. 흐린 날 속에서도 푸른 빛을 발하는 맑은 눈. 그 빛이 흐려지던 순간을 너는 아는지.

 

“딱 한 번, 비가 오는데도 이렇게 피곤하지 않았던 날이 있어.”

 

비는 지루하게도 온다. 사람들의 말소리, 발소리, 카페의 음악 소리에 목소리는 묻힌다. 조용히, 하지만 선명한 말. 음색에는 슬픈 기운이 어려 있다.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다가도 언뜻언뜻 멈춘다. 한숨이 곁들여지고,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친다.

세실은 그때의 세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뒀으면 알아서 끝나 돌아갔을 세계를, 왜 굳이 나서서 일을 만들었을까. 왜 하필 이 손을 잡았던 걸까. 곧 놓아 버릴 거면서. 마주 잡았던 손의 낮은 체온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하지 말아야 할 잔상들이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다. 이건 신의 변덕인가. 이번 회차에서는 전부 가진 채 고통받으라는 계시이기라도 할까. 붉은 달 아래 미소짓던 얼굴을 떠올리며 지금 제 눈앞에 있는, 가라앉은 표정을 마주한다. 이 말을 왜 너에게 하는 것일까.

어쩌면, 신의 눈물이라는 얘기에 괜한 복수심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그 신은 정말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비는 그것의 증거. 단 한 번, 비만 오면 피로함에 몸부림치는 사람이 멀쩡하게 서 있을 수 있던 순간. 자연스러운 기상 현상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것이, 정말로, 신의 가호와 같은 것이었기에.

 

“……그랬구나.”

 

그래, 이런 반응이 돌아올 줄 알고 말했는지도 몰랐다. 지금의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말하는 사람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마 이 남자밖에는 없을 것이다. 이 씁쓸한, 어딘가 애매한 미소를 보기 위해 말을 꺼냈나 보다. 어쩐지 패배한 기분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네 앞에서 나는 늘 패자였으니까. 나는 널 이길 수 없었으니까.

 

“어쩌면 우리는 말이야,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살아가고 있을지도.”

 

세츠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우리는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는 걸까. 비는 상념을 아래로 내리는 듯했다. 끝없이 피어오르는 생각의 연쇄에 세실이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졸음이 쏟아진다. 이대로면 또 속절없이 잠에 빠져들 상태였다.

 

“화장실 좀 갔다 올게.”

 

가벼운 끄덕임을 뒤로 하고 화장실로 향해 차가운 물을 틀었다. 아직 여름의 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모양인지 물은 약간 미적지근했다. 그래도 나름 만족하고, 안경을 벗고 간단하게 얼굴을 닦았다. 찬 것이 닿자 그래도 졸음이 조금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떨어지는 물을 훔치며 안경을 다시 쓰고 화장실 밖으로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눈부시도록 새하얀 사람이었다. 자신도 온통 하얗다는 평을 듣긴 하지만, 눈앞에 선 사람처럼 희지는 않았다. 흰 머리칼, 금색이 살짝 섞인 것을 제외하면 온전히 하얀 옷가지들, 그리고 눈을 가린 하얀 안대까지. 미미하게 느껴지는 환력에 세실은 그가 신기사라고 생각했다. 아니고서는 이런 느낌을 줄 리가 없지.

하지만, 그 환력은 어쩐지, 무서울 정도로 익숙한 기운이어서.

 

“어때?”

 

꿈결 같은 목소리가 흘렀다. 분명 눈앞에서 말하고 있지만, 음성은 아주 먼 곳에서 들리는 것처럼 아득하다. 귀에 들리는 것이 아니라 몸속에 울리는 듯 방향을 가늠할 수 없었다. 이 앞의 존재는 누구지? 신기사가 아니었나? 그렇다면 어째서 환력을? 그러나 의문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하얀 존재가 발을 내디뎠다. 동시에 공간이 일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시계가 비틀린다. 존재가 부정당하는 느낌은 강렬하다.

 

“네 바람이 이루어지는 기분은.”

 

마지막에 언뜻 드러난 그 눈은, 푸른빛이었던가.

 

 

 

 

 

***

 

 

 

 

 

째깍.

 

“셀리아!”

 

뒤에서 갑자기 팔을 감아 오는 세츠에 순간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는 겨울의 어느 날. 시가지에 건설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쇼핑센터에 모처럼의 휴가를 즐기러 나온 참이었다.

겨울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쇼핑센터는 오가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여기저기에 화려하게 장식된 조명과 흐르는 캐롤이 연말의 정취를 한껏 끌어올렸다. 일주일만 있으면 크리스마스였다. 물론, 세실에게 크리스마스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날은 바로 그 전날. 즉, 세츠의 생일이었다.

이번 외출은 크리스마스를 핑계로 세츠의 선물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 대놓고 말했지만 눈치를 챘는지 못 챘는지. 세츠는 휴가라는 사실만이 마냥 기쁜 모양이었다. 역시, 그 이전에 자신의 생일을 기억하고 있는지부터 물어야 했겠지. 모든 타인에게 관심이 있으면서 정작 그 자신에게만은 어떠한 관심도 두지 않는 사람이 저 신관이었으니.

 

“갑자기 튀어나오면 놀라잖아. 넘어질 뻔했다고.”

“괜찮아, 괜찮아. 내가 치료해 줄게.”

“저기요?”

 

한 차례 웃음이 지나가고, 세실이 세츠의 손을 잡아끌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외견만큼, 아니 바깥의 모습보다 훨씬 화려했다. 겉에 있던 가게들보다 많은 수의 가게들이 한창 대목을 맞아 각자의 자리에서 분주했다. 생각해보면 그 많은 날 속에서도 이런 시간은 없었다. 누구나가 보내는 일상. 평범하게 소중한 이와 보내는 하루를 제대로 보낸 적이 있는지 찾아보면 얼마 되지도 않아 포기를 외칠 정도로.

옷 가게에 들어가 서로에게 어울릴 법한 옷들을 꺼내 대 보기도 했고, 한가로이 거닐다 발견한 음료 매장에 들어가 각자 하나씩 컵을 들고나오기도 했다. 한참을 돌아다니다 지치면 각 층 중앙에 있는 벤치에 앉아 휴식을 즐겼다. 그렇게 몇 시간에 걸쳐 꽤 높은 건물을 반쯤 돌아다녔을 무렵이었다.

 

“반지?”

“응……. 그러니까 잠깐만 벗어볼래? 왼손.”

 

세츠가 말없이 장갑을 벗고 세실에게 손을 건넸다. 세실이 자연스레 손을 잡고 진열된 반지 중 하나를 집어 세츠의 약지에 끼웠다. 조금 작은가. 뭐라 반박을 하기도 전에 다른 반지를 집어 들어 다시 끼우고는 만족스럽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네 스타일은 아닌데, 사 주려고?”

“아니, 내가 왜?”

“그럼 이건 뭔데?”

“그냥 그러고 싶어서?”

 

세실이 한 번 웃고는 반지를 다시 빼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았다. 이런 곳에서 살 리가 없잖아. 하여튼 엉뚱한 곳에서 사람 파악을 못 하는 인간이었다. 일단 치수는 알았으니 됐다. 다시 장갑을 끼라고 하며 세실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섰다. 다음은 선물로 위장할 만한 것을 찾을 차례인데.

 

“셀리아, 이건 어때?”

“뭐가?”

 

고개를 돌리자 세츠의 손이 얼굴 옆으로 훅 들어왔다. 귓가에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귀걸이인 모양이었다. 달랑거리는 느낌이 있으니 꽤 긴 편인 것 같았고. 나름대로 심각한 얼굴을 하는 세츠를 바라보자니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아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했다. 한참을 들여다보다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여간 웃긴 게 아니었다.

 

“역시 잘 어울리네. 별이라 이건가.”

 

그가 대어 본 것은 일곱 개의 별이 달린 귀걸이였다.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듯 꺾인 모양이 인상적인 은색의 귀걸이. 다른 것을 눈으로 훑던 세츠가 역시 이게 낫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에게 동의를 구하는 건지.

 

“살 돈은 있고요?”

“허어, 날 뭘로 보고? 연말 보너스는 그래도 잘 나오는 편이거든?”

“내가 네 보너스를 사수했으니까 그렇겠지…….”

“그렇지! 고맙게 여기고 있어.”

 

세실이 고개를 저으며 세츠의 어깨를 두드렸다. 됐으니까 대충하고 가자는 신호였다.

 

그리고, 귀를 찢는 붕괴음과 함께 비명이 울렸다.

 

들고 있던 모든 것을 바닥에 내던지고 두 사람이 가게를 뛰쳐나갔다. 세츠는 어느새인가 신기를 빼 들고 있었다. 주위를 급하게 둘러보니 먼 곳에서 먼지가 일고 있었다. 먼지를 뚫고 수많은 사람이 공포에 질려 뛰쳐나왔다. 개중에는 작은 부상을 입은 사람부터 크게 다쳐 제대로 걸어 나오지도 못하는 이들 역시 있었다. 무언가 일이 벌어졌다. 평범한 연인이었던 사람들은 곧바로 중앙청의 지휘사와 신기사로 돌변해 달려나갔다.

 

“셀리아, 특이사항은?”

“찾고 있어, 잠시만!”

 

상황은 아비규환이었다. 위층의 천장이 아예 무너져 내려온 곳에 잔해가 널려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면 그 위의 천장 역시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금이 가 있었다. 쇼핑센터의 건설은 중앙청 신기사들이 관여한 것이다. 이렇게 쉽게 무너질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분명히 이상이 발생했을 터인데.

세실이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이 정도 규모라면 반드시 있을 것이다. 같은 층에는 없다. 바닥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세츠, 3시 방향 위!”

“하필……!”

 

분명한 흑문의 기운이 느껴졌다. 거리상으로는 바로 위층. 하필 정확히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세실이 위치를 알린 지 채 몇 초도 되지 않아 천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바로 떨어진다. 판단이 서자마자 세츠가 급히 몸을 틀며 신기를 바닥에 내리꽂았다. 동시에 위태롭던 천장이 다시 무너져 내렸고, 세츠의 신기에서 터져 나온 빛의 폭풍에 휘말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중앙청입니다! 당장 탈출하세요!”

 

곧바로 흑문 몬스터들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세츠의 가호 아래 잠시 숨을 돌렸던 사람들의 눈에 다시금 경악이 물들며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입구 쪽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의 괴성과 사람들의 비명이 한 데 엉키며 그야말로 생지옥을 만들어 내었다.

세실이 전술 단말기를 꺼내 급히 메시지를 보냈다. 길게 보낼 시간조차 없어 쇼핑센터 네 글자밖에 쓰지 못했지만, 이 정도면 어련히 알아듣겠지. 그 짧은 순간에 건물이 무너져 내리며 발생한 분진들이 시야를 가렸다. 순식간에 세츠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큰일이다, 아직 흑문의 규모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데 떨어져서는 안 된다. 세실이 침착하게 다시 빠른 속도로 고개를 돌렸다. 이런 상황이 한두 번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안개 속에서 방향을 가늠할 수 없을 때, 불길 속에서 찾을 수 없을 때도, 그 한 사람 만큼은 잘만 찾아내지 않았던가. 범람하는 어지러운 환력의 파도 속에서 익숙한 빛을 찾았다. 길을 이끄는 별과 같은 하나의 반짝임을. 스치는 따스함을.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다른 모양이었다. 아무리 찾아도 흔적을 볼 수가 없었다. 도대체 몬스터가 얼마나 많은 것인지 실타래처럼 엉킨 환력 가운데에서 세츠의 것을 확인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뿐이다. 세실이 냅다 자리를 박차고 달렸다. 어차피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도박이라도 해야 누군가를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이 세츠든, 구조가 필요한 다른 일반인이든. 지휘사란 원래 언제나 도박을 하는 존재이기에.

발에 채는 잔해들을 가볍게 뛰어넘으며, 시야를 방해하는 안개와 같은 먼지들을 가르며 달려나갔다. 여전히 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에 어디까지 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달릴 뿐이다. 있기를 바라면서. 그나 자신이나 서로가 필요한 것은 매한가지였으니까.

신이 기도를 들어준 것인지는 몰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츠의 환력이 눈에 들어왔다. 희미했던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무슨 짓을 얼마나 한 건지 환력도 벌써 아슬아슬하고, 희기만 하던 신관복은 언뜻언뜻 붉은 기운이 비쳤다. 저 답 없는 신관이 또 자기를 내던졌구나. 세실이 이를 악물었다. 그때, 세츠 역시 세실을 인지했는지 힐끔 눈을 돌렸다. 세실의 표정이 굳은 것을 보고 세츠가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뭘 걱정해, 쫄지 말라고.”

“웃기지 마. 그렇게 다친 주제에.”

 

그 이상의 말은 필요치 않았다. 세실이 곧바로 세츠에게 환력을 전달했고, 그가 한층 안정된 공격을 선보였다.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고 있었다. 1차로 건물 붕괴의 원인이 되었던 몬스터들은 처리가 끝났고, 흑문이 잠시 소강상태를 보일 때 남은 민간인들을 대피시키는 것이 다음 목표였다.

거동할 수 없는 부상자들을 먼저 층 바깥으로 옮기고, 뒤이어 남은 사람들까지 안전지대로 보낸 이후에 두 사람이 위층으로 올라갔다. 한두 군데가 무너진 것이 아니었기에 층 전체가 불안정한 감이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최대한 빠르게 흑문을 닫고 탈출한다. 말없이 같은 목표를 나눈 사람들이 바로 앞을 향했다.

예상대로 흑문 앞은 더 혼란스러웠다. 하필 중앙청의 지원도 아직 도착하지 못했는데 둘이서만 상대해야 한다니. 세츠는 공격에 특화된 신기사가 아니었기에 난감함이 있었다. 아무리 접경도시 최강의 2인조라고 해도 흑문을 저지할 수 있을지. 하지만 지휘사란 늘 도박을 일삼는 존재라고 하지 않았던가. 미약한 가능성을 붙들어 현실에 끌어내는 것이 중앙청이라는 집단이다.

어쨌든, 최대한 하는 수밖에. 눈을 마주친 흰 사람들이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동시에 땅을 박찼다. 세츠의 신기가 높이 올라가며 날개의 형상이 펼쳐졌고, 동시에 금빛 가호의 원이 주위에 나타났다. 3초, 모든 공격을 무시하고 흑문 바로 앞에 쇄도한 이들이 곧바로 맹공을 퍼부었다. 곧이어 가호가 풀리고, 상처가 하나둘씩 늘어감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흑문 몬스터는 끝없이 쏟아진다. 하나하나 상대하다가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세실이 그런 세츠의 뒤에서 검을 빼 들었다. 자신은 신기사가 아니니 직접적인 타격 따위는 줄 수 없었지만, 적어도 위협과 더불어 멀리 쳐내는 일은 가능하니까. 검을 쥐자마자 날아드는 작은 몬스터 세 마리를 쳐 날렸다. 몬스터들이 잠시 주춤하는 기색을 보였다. 신기사도 아닌 인간이 형형한 기운을 내고 있었으니 그럴지도 몰랐다.

한 사람은 흑문을 타격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에게 접근하는 나머지 몬스터들을 막았다. 두 사람의 완벽한 협공에 얼마 지나지 않아 흑문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세실이 뒤를 흘끔 보고 날아드는 다음 몬스터를 내리쳤다. 조금만 더 버티면 끝난다. 동시에 그 주위에 다시 한번 가호의 원이 떠올랐다. 마지막이라는 뜻일까. 세실이 미소지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발에 채는 자그마한 몬스터 넷을 걷어찼다. 뒤이어, 차인 몬스터가 발하던 환력이 일시에 사라졌다.

 

“후, 위험했다.”

“고생했어.”

 

흑문이 노이즈를 내며 사라졌다. 이제 뒤처리는 지원에게 맡길까. 세실이 검을 집어넣으며 세츠에게 손을 내밀었다. 두 손바닥이 맞닿으며 짝, 하는 맑은 소리가 울렸다. 상황은 정리됐다. 남은 몬스터의 잔해는 곧 사라질 것이고, 건물에서 무사히 나가기만 하면…….

그러나 일은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는 법이었다. 흑문이 사라진 곳에서 불길한 소리가 울리더니 이내 거대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세츠가 순식간에 세실을 잡아끌었다. 무너지겠다 싶더니 흑문 파괴의 충격파와 함께 건물 자체에 무리가 간 모양이다. 이대로면 정말 위험했다. 민간인들은 혹시 모를 붕괴에 대비해 건물의 코어 부분에 대피시켰지만, 그들은 아니었다. 무너지면 끝이다. 두 사람이 몇 번째인지 모를 달리기를 또 시작했다.

아슬아슬하게 발밑의 붕괴를 피하며 층의 코어 부분을 향했다. 몇 개의 잔해를 넘고, 떨어지는 잔해를 쳐내기도 하며 필사적으로 달렸다. 하지만, 신은 그들을 돕지 않았다. 코어 부분으로 넘어가는 곳조차 무너져 아예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세실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되면 꼼짝없이 붕괴에 휩쓸리는데. 다른 길을 찾아봐도 마땅한 대책이 없었다. 위로 올라갈 방법도 없다. 결국, 남은 것은.

 

“세츠, 다시 뒤로. 그리고 나 잡아줘.”

“……뛰어내리자고?”

“잘 아네.”

“나 참, 너도 답 없는 건 여전하네.”

 

말은 그리했으면서도 곧바로 뒤를 돌아 붕괴된 지점으로 향했다. 올라갈 수도 없고, 안전지대로 대피할 수도 없다면, 최선의 계책은, 아래로 내려가 더 무너지지 않는 층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이미 잔해에 의해 세 층을 떨어져 내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세츠가 세실의 허리를 강하게 감쌌다. 세실 역시 세츠의 어깨에 손을 감았다.

말로 지체할 시간도 없었다. 시선을 교환한 두 사람이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다. 잔해에서 퍼진 먼지들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가속이 붙음을 느끼자 세실이 인상을 썼다. 3층 정도의 높이라면, 곧 바닥에 닿는다. 아니나 다를까, 금세 흰 대리석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착지를 준비하고 다리를 굽혔다.

그리고, 바닥에 닿는 순간,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셀리아!”

“어……?”

 

분명 멈췄어야 했는데, 자신은 여전히 떨어지고 있었다. 무게를 지탱해야 하는 단단함은 부서져 제 옆으로 날아간다. 이러면 안 되는데. 사고가 상황을 따라가지 못해 마비된 듯했다. 모든 것이 마치 느리게 재생되는 화면처럼 흘러갔다. 경악에 물든 세츠의 표정이 멀어졌다.

당신은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째깍.

 

의식이 끊어졌다.

 

째깍.

 

아니, 끊어졌다고 생각했다.

 

 

…….

 

아득한 의식 사이로 정적이 귀를 내리눌렀다. 눈앞은 온전한 암흑이다. 아무래도 건물 반절이 완전히 무너진 모양이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잔해, 그리고 잔해뿐이다. 몸을 일으키려 하는 순간 강렬한 고통이 전신을 때린다.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살펴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고개를 들 수조차 없는 부상인가. 하긴 그 높이에서 떨어졌으면 그럴 만도 하지. 중앙청의 지원은 아직일까. 이런 곳에 있는 자신을 찾아낼 수 있을까. 아니라면, 이번에는 이런 식으로 끝나는 걸까. 아이러니하게도 헛웃음이 나왔다.

눈을 감는다. 겸허히 죽음을 받아들인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이것은 포기에 가까운 심정이었다. 아직 7일이 되지 않았어도, 지금 죽는다면 다시 시계가 돌아가겠지. 다음 시간선에서는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없을 텐데. 아쉽지만 인사를 건넬까. 멀어지는 의식을 느끼며 숨을 내쉬었다.

 

“벌써 포기하려고?”

 

먼 곳, 아니, 가까운 곳이던가? 위치를 가늠할 수 없는 곳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무슨 마법이라도 건 듯 흐려지던 의식이 한순간에 명료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부상이 일시에 낫기라도 한 것처럼 고통 역시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세실이 고개를 들자 그를 짓누르던 잔해마저 없어졌다. 당황스러움이 묻어나는 눈으로 무슨 일인지 파악하던 세실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한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

 

“너……는.”

“너도 참 답이 없다. 어떻게 이런 걸 지휘사로 썼나 몰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빛으로 둘러싸인 사람. 흰 안대를 쓰고 묘한 미소를 짓던 자. 그제야 되살아나는 기억이 있었다. 여름의 바닷가, 비 오는 날의 카페. 늘 마지막에 나타나 묘한 말을 하고 사라지던 사람. 이상했다. 이런 기억은 없었다. 수많은 윤회를 넘어오면서도 그런 평화로운 시간을 가진 적은 없었다. 단 한 번, 이 한 번밖에는 없었다. 크리스마스라는 핑계로 휴가를 받아낸 이 하루밖에는 없어야 했다. 하지만, 그 바닷가는? 그렇다면 그 카페의 대담은?

……이곳은, 어디지?

 

“이제야 눈치채 주시는 거야? 느리네, 느려.”

“여기……는.”

“응, 여기는?”

“……꿈, 인가?”

“그래, 그래서 네가 지휘사 역할을 맡은 거였지. 그 빌어먹을 직감.”

 

상대가 커다란 건물 잔해 위에 가볍게 뛰어올라 앉았다. 다리 위에 턱을 괴고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는 얼굴에는 미약한 슬픔이 새겨져 있었다. 안대 덕분에 눈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자신의 꿈이라 그런가.

 

“마음에 들었어? 지금까지 본 건 네 소망의 일부야. 근데 너도 참 대단하다. 무슨 소원이라는 게 이따위야.”

“……내 소원? 하지만, 내 소원은.”

“알아. 내가 여기 괜히 있는 줄 알아? 얼마나 강하던지 깨는 것도 힘들었다고.”

 

상대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주위의 풍경이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마치, 이제 꿈인 것을 눈치챘으니 역할극은 그만해도 될 것 같다는 듯이. 둘을 감싸고 있던 장소가 천천히 부서졌다. 파편들이 흩날리며 완전한 무(無)로 화했다. 흰빛만이 남은 곳. 위와 아래조차 구분할 수 없고, 무엇을 딛고 서 있는지도 알 수 없는 공간. 세실은 이것이 자신의 의식 세계임을 알았다.

 

“그래서, 왜 나타난 거지? 왜 나한테 그런 걸 보여준 거지? 이룰 수 없는 소원을 보면서 고통받으라고?”

“예민하게 굴지 마. 그건 내가 만들어낸 게 아니야.”

“조금 전에는 네가 보여줬다고 했잖아.”

“아니, 난 네가 본 게 네 소망이라고 알려줬을 뿐이야. 이 환상 같은 꿈을 만들어 낸 건, 너야. 내가 아니고.”

“……뭐?”

“너라고. 너, 지금 며칠째 누워있는지 모르지?”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7일이 지나면.”

“그게 문제인 거야. 7일이 지났는데도 너는 계속 잠들어 있는 상태거든.”

“하지만, 어째서?”

 

상대가 팔짱을 끼며 차갑게 웃었다. 그걸 모르냐는 듯이.

 

“……설마.”

 

세실이 아무것도 없는 것을 알면서도 뒤를 돌아보았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생생하던 손의 감촉, 지나치게 현실감 있던 모습. 원인이라 할 것은 하나뿐이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해주기를 바라는 듯, 세실이 천천히 입을 뗐다.

 

“……세츠.”

 

상대가 웃음을 거뒀다. 정답이라는 뜻이었다. 그가 순식간에 세실의 눈앞으로 다가갔다. 세실은 놀라지 않았다. 다만, 무언가를 느꼈다. 이 자는 도대체 어째서 자신을 도우려 하지? 가까이에서 보니 안대 역시 그리 두껍지 않았다. 그 아래에 가려진 눈이 보일 것도 같았는데.

 

“그래. 그 답 없는 인간이 일을 이렇게 만들었어. 하여튼 쌍으로 난리라니까.”

“무슨 일인데. 정확히 설명을 좀 해 봐.”

 

후. 상대가 한숨을 푹 내쉬고 세실의 주위를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온전히 네 소망의 실현이야. 나는 처음부터 그걸 간섭하려고 했는데, 어찌나 강하던지 마지막에 잠깐 모습을 드러내는 정도밖에 하지 못했고. 두 번째는 그나마 조금 수월해서 말을 걸었는데, 거기서 또 네가 문제를 일으켰지. 다행히 한 번 깨뜨렸더니 다음부터는 쉬워서, 마지막에 본 건 내가 개입한 결과야. 네가 잠들게 된 이유지. 너와 네 신기사는 쇼핑센터 붕괴 사고에 휘말렸고, 네 신기사는 그 특성으로 살아났지만 너 혼자 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게 거기까지의 이야기.”

“……그다음은?”

“문제는 그다음인데……. 너는 분명히 그즈음에 죽었어야 했어. 하나 문제가 있다면 7일을 채우지 못한 상태라 오류가 조금 크게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일까. 네 시계가 7일을 채우지 못하면 난감해지거든. 그런데, 그 사람이,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

“네 신기사라는 사람이, 자기 시계와 네 시계를 한 데에 묶어 버렸어. 최소한 죽지는 않게 하겠다면서. 너라면 며칠이 지난 후에, 방법을 찾아서 끝낼 수 있을 거라면서.”

“후…….”

“참, 너희 답 없다. 똑같은 것들끼리 잘도 만났어. 덕분에 너희 시계는 전부 묶여 버렸어. 하나는 움직이고, 하나는 멈춘 꼴이라니. 남이 부술 수도 없는 상태로. 이 꿈에는 너만 갇힌 게 아니야. 그 사람도 함께지.”

 

분명 꿈이었는데도 머리가 아파져 왔다. 이, 빌어먹을, 수호자가. 세실이 짓씹듯 내뱉었다. 이게 도대체 몇 번째인가. 도대체 몇 번째냐는 말이다. 왜, 대체 왜 그는 자기 자신을 안중에 두지 않는가.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어떠한 측은함이 뒤섞여 한숨으로밖에 나오지 않았다. 타인의 소망을 비쳐내는 것밖에 못 하는 사람. 신 대신 그의 과업을 대신하는, 누구보다도 신 같은 이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세실이 차오르는 분노의 말을 누르는 동안, 상대가 말을 이었다.

 

“네 시계는 그 사람의 시계와 얽힌 상태지. 그대로면 너도, 그 사람도,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거야.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상태로. 죽었어야 하는 너를 그 사람의 생명으로 잡아놓은 상태라 완전히 경계에 걸친 꼴이라고.”

“……밖 상황은?”

“네가 짐작하는 대로. 흑문에 어떻게든 저항을 하고는 있는데, 얼마 못 버텨. 네가 이대로 여기 남아 버리면 너희 둘은 멸망한 세계 속에서도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상태만을 유지할 뿐이야. 네가 빨리 그걸 깨서 다시 시간을 돌리는 수밖에 없어.”

 

잠시의 틈을 두고, 그가 덧붙였다.

 

“네 신기사에게 고맙다면 말이야.”

 

세실이 잠시 입을 닫았다. 고민, 혼란, 그 사이에서도 고마움과 원망이 치솟았다. 새로운 7일로 돌아간다면, 반드시 한 번은 원망을 퍼붓고 시작하리라. 결심은 필요치 않았다. 그가 저지른 짓을 듣는 순간 이미 내려진 결정이다.

세실이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면 되는데?”

 

상대는 웃었다.

“너처럼, 그 사람 역시 꿈에 갇혀 있어. 내가 보내줄 테니까, 그 속에서, 네 시계를 찾아. 그 사람의 시계 말고, 네 시계를.”

“……응.”

“그리고, 부숴.”

“그걸로 돼?”

“그걸로 돼.”

 

상대가 비로소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그제야, 세실은 상대가 누군지를 알 수 있었다. 언뜻 보이던 푸른 눈동자. 익숙하기만 한 목소리와 행동. 온통 하얀색으로 치장한 모습까지.

 

“그럼, 힘내라고.”

 

곧바로 눈앞이 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세실이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너는, 나지?”

 

그래, 내가 아니면 누가 내 꿈에 들어와서 이런 짓을 할 수 있을까. 아니, 들어온 게 아니겠지. 단순히 가이드의 역할로 분열했는지도 모른다.

상대, 또 하나의 세실리아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수고해, 지휘사.”

 

 

 

 

 

***

 

 

 

 

째깍.

 

지독하게 푸른 하늘은 어느새인가 자취를 감추고, 남은 것은 기이한 붉은빛 풍광 하나.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 한눈에 풍경을 담을 수 있는 위치에 두 사람의 발이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곧 종막을 맞을 세계를 마지막으로 지켜보는 자리. 막을 내리는 무대를 바라보는 가장 높은 좌석. 많은 것을 했으나 많은 것을 잃었기에 도달한 장소. 몇 번씩이고 스러지는 세상을 맥없이 지켜봐야 했던 마지막의 공간. 마치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도시인 양, 정적이 무겁게 내려앉아 공백을 채운다.

 

째깍.

 

주마등이기라도 한 듯 수많은 기억이 스친다. 노을이 떨어지던 바닷가에 기대어 앉은 두 사람. 빗방울이 부딪히는 카페 창가에 앉아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누던 두 사람. 기약 없는 약속을 새기려 헛된 희망을 맞춰보던 두 사람.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의 연속. 바랐지만 차마 바라지 못했던 것은 비수처럼 기억의 한 자락에 꽂힌다.

 

째깍.

 

우리는 몇 번째의 평온을 추구했던가. 사라져버린 맑은 하늘빛을 언제까지건 품고 있을 자. 암흑의 시간에 맞서는 이. 그의 수호로 돌아가기 시작한 시계는 분명 새벽을 향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 시계는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밤에 갇힌 것은 새벽을 향하지 못한다. 귓가에 그를 조롱하듯 시곗바늘 소리가 울린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이 소리만을 내었다.

 

아니, 사실,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 멈춘 것의 소리는 들릴 수가 없었다. 소리란 무언가가 움직여야만 나는 것. 그러니 얼어붙은 제 시계는 소리를 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또 하나의 자신이 두 개의 시계를 언급할 때, 이미 판단은 끝난 상태였다. 처음부터 들리던 초침의 소리. 그리고, 그것이 유일하게 들리지 않던 하나의 순간. 새하얀 공간에서 찾아볼 수 없던 규칙적인 음. 그 명확한 차이를 만드는 것은 단 하나였고.

 

“세츠.”

 

그것이, 그가 말한 ‘시계’의 정체였을 터다.

 

생명이란 곧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을 달리 말하는 단어다. 사람의 시계라는 것은 그가 가진 명을 뜻한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명을 다할 때까지 움직이며, 멈춘다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 어찌 보면 괴악한 은유였다. 굳이 이런 식으로 알려줄 필요도 없었을 텐데. 시험하고 싶었던 걸까. 자신이 자신을.

시계는 생명을 가리킨다. 움직이는 시계는 세츠의 것. 그렇기에 그와 함께 있을 때만 이 짜증나는 째깍거림이 들린 것이다. 그가 없던 흰색의 공간에서 들리지 않던 것도 이러한 이유겠지.

그렇다면, 멈춘 것. 얼어붙은 것. 자신이 찾아야 하는, 자신의 시계는.

 

“이제 됐어, 세츠.”

 

당연히 자신이었다.

 

세실이 미소를 지었다. 아련하게 물드는 잔광 아래 마지막을 고하는 웃음이다. 마치, 어떤 시간에서 제 신기사가 남긴 것처럼. 달빛 아래 깊이 남았던 흐린 잔상처럼.

손을 잡았다. 이번에 식어있는 체온은 제 쪽이었다. 겨울이 물든다. 멈춘 것에 서늘함이 스민다. 세츠가 무언가를 말하려다 그저 입을 닫았다. 말하지 않아도 의도를 아는 사이란 이런 것이다. 마치, 어떤 시간에서 그가 세츠의 의도를 알아챘던 것처럼. 그리고 끝내 막지 못했던 것처럼.

 

세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발짝 앞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백이었다. 도시의 균열은 어느새 그들이 선 곳까지 침범해왔다. 몇 초 후면 모든 것이 사라지겠지. 음울한 배경 속에서도 희게 빛나는 지휘사가 미소를 보였다. 그의 신기사 역시 기어코 마주 미소지었다.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하늘 끝에서 하얀 별이 빛난다. 시계(視界)가 흔들리는 사이, 어렴풋한 감정의 교차가 공백을 채운다.

 

“알면서 묻는 것도 그만할 때 되지 않았어?”

 

손을 놓았다. 한 걸음을 물러섰다. 마지막 시야에 담은 것은 아찔하도록 푸른 눈빛이다.

나아가라고 말하던 그 하늘빛.

 

“……셀리아.”

“아니, 세츠. 아무 말도 하지 마.”

 

별의 추락은 하늘에 긴 상흔을 남긴다.

흰빛이 흩뿌려지고, 얼어붙은 시계는 마지막 눈과 함께 부서진다.

 

“내일 봐, 신관님.”

 

 

 

 

 

***

 

 

 

 

 

파형이 직선을 그린다. 동시에 누군가가 눈을 떴다.

선연한 푸른빛.

그리고, 세계는 다시금 원점에 이른다.

 

 

 

 

 

***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도시에 울렸다.

 

시가지, 사람들로 북적이는 쇼핑센터의 한가운데. 천장이 열린 공간에 흰 눈송이가 떨어져 내린다.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가 화려한 조명 장식을 휘감은 채 하얀 눈을 맞는다. 크리스마스 이브. 모두가 고대하는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기대가 충만한 날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생일 축하해, 세츠.”

 

순백의 눈꽃이 떨어지는 하늘 아래,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다.

별빛이 수 놓인 반지가 각자의 손에서 반짝였다.

 

몇 번이고 돌아가는 시곗바늘 속에서, 그저 한순간의 영원을 약속하자.

 

 

 

그리고, 두 사람의 시계(視界)는 겨울로 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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