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激情

익숙한 획으로 이루어져 있는 단어가 있다. 어렵지 않게 써내리고 읊을 수 있는 그 형태와 울림에 대해 구태여 생각하지 않으려 하다가도, 감정이 불거지고 마음이 격해질 때에는 정확한 심상의 이름을 끌어오기보다는 그 단어를 갖다 붙여 자주 뭉뚱그리고는 했다. 고작 두 글자, 고작 네 음절의 어렵지 않은 단어. 포괄적이고 불분명하여 회피하기 아주 좋은 단어.

그 단어가 나타낼 수 있는 것이 많듯이,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문장 또한 여럿이었다. 제법 자주 제법 다양한 방식으로 곱씹게 되는 그 단어가 마냥 달갑지만은 않아서, 나는 그럴 때마다 새삼스러운 감상이 들고는 했다.

 

격정激情.

그래. 이름 그대로 그것은 마치, 내 모든 것을 쥐고 격하게 뒤흔들 커다란 휩쓸림이었다.

만일 내가 너르고 깊게 뿌리를 내린 고목이라 한다면, 그것은 지형을 뒤틀고 나의 몸체를 쓰러트릴 정도로 요란한 지진과 같았다. 내가 하늘 위의 유유자적한 구름이라 한다면, 그것은 내 형태를 변형시키고 종내에는 먼지처럼 흩뜨려버릴 강풍이었다. 나의 이름이 붙은 그릇에 담긴 것이 작고 깊은 바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제 마음대로 바다를 휘젓고 다니며 큰 파도를 일으킬 단 한 마리의, 거대한 돌고래였다.

아니, 어쩌면 일렁이고 첨벙이는 파도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아예 그릇 속 모든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하여 나는 언젠가 그것이, 그 마음이, 이름 그대로의 격정이. 결국 작고 깊은 바다가 되어 나 자신이 되어, 세상 모든 흔들림이 되어 나의 모든 것을 뒤엎어버리게 될 것만 같았다.

어느 날은 그것이 기껍기도 하고 어느 날은 두렵기도 했다. 그리고 그 단어를, 그 감정을 일으키는 주체를 떠올리는 날은 언제나, 밤이 깊어와도 잠들 수 없었다.

00_

 

“정말이지, 어쩌면 이렇게나 천사 같을까. 사랑스럽기도 하지. 그래, 착하다, 우리 아가.”

“토키시로는 시키면 뭐든 다 잘하더라구요. 애가 그 나이답지 않게 얌전하기도 하고……. 가끔 보면 평범한 어린아이가 아닌 것 같지 뭐예요.”

“치에루 쨩이 못하는 게 없긴 하죠? 애가 참 똘똘해서, 초등학교 입학도 남들보다 이르게 시킬 거라나 뭐라나. 뭐 영재, 천재, 이런 거 아닐까 싶어요. 우리 아들도 딱 저 아이 반만 닮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토키시로 치에루는 태어나서부터 언제 어디서나 칭찬받는 아이였다. 아직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핏덩이일 때는 갓난아이가 어찌나 이리 얌전한지, 어쩌면 이렇게나 손을 안 타는지 주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잘 울지도 보채지도 않는 갓난아기의 모습에 어리숙한 부모는 제 아이가 얌전한 천사 같다며 그저 좋아할 뿐이었다.

조금 자라서 걸음마를 떼고 유치원에 들어갈 때가 되어서도, 갓난쟁이일 때부터 보였던 얌전한 모습은 여전했다. 다른 아이들은 말도 제대로 듣지 않고 사고를 치고 다니기 일쑤였으나, 치에루는 언제나 얌전하고 착하다는 칭찬을 들었다. 오히려 나이대에 맞는 모습을 보이는 건 다른 아이들이었음에도, 어른들은 몰랐다. 눈치채지 못했다. 사고 하나 치지 않는 그 얌전한 모습이 어떤 마음에서 기인했는지를.

손 안 가게, 착하고 얌전히. 웃는 얼굴로. 반항하거나 싫어하는 내색은 보이지 말고. 그리고 누가 무언가를 시킨다면 좋은 결과물을 낼 것. 이러한 것들에서 칭찬과 애정이 나온다는 것을 그 조그만 아이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덧셈뺄셈보다 그것을 먼저 본능으로 배웠다. 그래서 언제나 얌전히 있었고, 발달놀이나 문자, 셈 같은 가르침을 받으면 여타 아이들보다 배 이상 집중해 문제를 해결하려 들었다. 어린 나이에도 영특하긴 영특하여 그런 건지, 그도 아니면 집념이라 해도 좋을 그 노력으로 영특해보일 때까지 시도를 거듭했을 뿐인지. 치에루는 언제나 원하는 대로 칭찬을 받았다. 적어도 그 조그만 아이가 시도하는 노력은 언제나 그녀를 배신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 아이는, 치에루는 노력하는 것을 좋아했다. 칭찬과 관심을 받으면 기쁨을 느꼈다. 자신이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무언가를 해내면 부모님이, 선생님이, 주변 어른들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 주었다. 또한 치에루는 얌전히 있는 것 역시 좋아했다. 조용히 사고치지 않고 눈치를 잘 보고 있으면 의젓하고 기특하다고 칭찬을 받았으니까.

치에루는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남들이 좋아해 주는대로 해내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에 와서 그녀에게 노력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그 대답을 예측할 수 없겠으나, 적어도 어린 날의 토키시로 치에루의 대답은 알 수 있었다. 분명히 언제나 칭찬 받기 위해, 애정어린 손길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사랑받으려면 힘들다는 내색은 불필요했다. 치남들 몰래 노력하고, 사람들 시선 사이에서 얌전히 있던 치에루의 그 모든 태도는 점점 습관이 되고 당연한 것이 되어갔다.

 

그녀의 성취와 태도를 보아 조기교육을 시켜도 문제가 없을 거라 여겨졌는지, 치에루는 남들보다 일찍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봄이 채 시작되기 전 추운 날에 태어난 그 아이에게 있어서 연령으로 따지자면 남들보다 한두 살 더, 학년으로 따지자면 남들보다 한 학년 더 빠른 입학이었다.

어린 나이의 한두 살 차이는 제법 큰 법인데도 모자란 구석은 단 한 번도 내보인 적 없었다. 오히려 종종 천재라는 말을 듣고는 했다. 그녀의 노력하는 모습은 알지 못 하고, 결과만을 보고 논하는 사람들이 흔히 그런 가벼운 칭찬을 건네고는 했다. 치에루는 어릴 때만 해도 천재라는 말을 듣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부모님이나 뭇 어른들이 기특하고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많은 애정을 쏟아 주었기 때문이다.

눈치를 보고 얌전하게 있는 것이 몸에 밴 치에루는 숱하게 들어온 칭찬에도 스스로가 진짜 천재라는 자만에 빠진 적이 없지만, 그 모든 말과 상황, 시선을 즐긴 것만은 확실했다.

 

또래들에게선 이따금 소소한 시기나 작은 따돌림 같은 것이 따라붙고는 했으나, 그런 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온갖 칭찬을 다 듣고 있으니, 어머니가 품에 안아 주시고 아버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니, 선생님께서 기특해하시니 전부 괜찮았다. 분명 어릴 적, 어느 날까지만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 없었다. 그러니까 그때 느꼈던 모든 생각들이, 만족감이 근간부터 무너져내릴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해보지 않았다. 마치 영원할 거라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 어떤 하늘도 평생을 푸르를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은 단 하나의 이름, 단 하나의 존재.

 

“키즈쿠 잇사.”

 

그것에 의해. 어디선가, 무엇인가가 부서지고 재구축 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01_

 

봄은 매해 어김없이 찾아온다. 하지만 치에루는 다른 해보다 조금 더 따뜻했던 봄을 기억한다. 그녀가 남들보다 일찍 초등학교 5학년생이 되었던 해였다.

 

지난 해 6학년 교실에서 생활했던 아이들의 졸업식이 있던 3월이 지나고, 4월이 찾아오자 산뜻한 봄바람에 있는 듯 없는 듯 꽃내음이 섞여들었다. 푸르고 깊은 물에 하얗고 불투명한 잉크를 몇 방울 떨어트린 듯 불규칙하게 흐르는 구름 아래로, 만발한 벚꽃잎이 눈처럼 몇날며칠이고 휘날렸다. 집 앞 가로변에도 등굣길 철로변이나 하천가에도, 학교 운동장과 교정 뒤편에도 온통 벚꽃이 피었다. 옅은 분홍색과 백색이 가득했다.

치에루는 벚꽃이 만개하고 새학기가 시작되는 이 시기만 다가오면 항상 긴장됨과 동시에 마음이 들뜨곤 했다.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된다는 긴장감과 새로운 사람들에게 받을 애정을 기대하는 두근거림. 제 모습과 꼭 빼닮은 색의 꽃잎이 휘날리는 풍경. 매해 반복되는 것들이지만 또 매번 새로운 설렘을 안겨 주었다.

솔직히 말해 치에루는 친한 친구를 만드는 방법 같은 것은 몰랐다. 하지만 반 전체와 적당히 어울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고, 또래 친구라는 존재를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도 했다. 그녀를 예뻐해 주는 것은 언제나 어른들이었다. 지금까지 만났던 모든 선생님들이 그녀를 예뻐하고 아껴 주었다. 치에루는 그게 참 좋았다. 단단한 칭찬과 애정은 어른들만이 줄 수 있는 거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오늘 만날 새로운 선생님도 나를 예뻐해 주실 수 있게 최선을 다하자. 속으로 되새긴 다짐과 열린 복도 창문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이 교실로 향하는 다리를 통통 튀게 만들었다.

 

들뜬 나머지 너무 이르게 도착해버린 교실에는 아직 저 혼자뿐인 듯하여, 치에루는 눈을 깜빡이다가 적당한 자리에 가방을 걸고 앉았다. 창가의 맨 앞자리였다. 운동장을 향한 창문이 바로 옆이고, 선생님 책상이 바로 코앞인 그 자리. 홀로 있는 교실. 치에루는 나른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기분이 좋았다. 잠깐의 고요함이었다.

 

“안녕?”

 

그래, 아주 잠깐의 고요함. 다정하고 귀여운 음색이 그것을 깼다. 치에루는 감았던 눈을 뜨고,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른쪽 사선, 자신이 앉은 책상과 꼭 붙어있는 짝꿍 책상 바로 앞에 한 아이가 서있었다. 살짝 곱슬거리는 옅은 황갈색 머리칼과 따뜻하고 다정하게 휘는 금색 눈동자. 부드러운 강아지 같은 인상을 가진 남자아이였다.

 

“……안녕.”

 

눈을 깜빡거리던 치에루가 뒤늦게 마주 인사했다. 어색하고 쭈뼛거리는 태도에도 남자아이는 돌아온 인사에 눈을 곱게 접으며 활짝 웃었다.

 

“같이 앉을 친구 있니? 혹시 없다면 옆자리에 앉아도 될까?”

“어? 아니. ……아니야, 응. 없어. 앉아도…… 괜찮아.”

 

횡설수설,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자 남자아이는 책상 옆 걸쇠에 가방을 걸고 의자를 꺼내 앉았다.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나지 않게 살짝 들어서 꺼내는 모습은 명백한 배려였으나, 치에루는 몰래 고개를 저었다. 굳이 저에게 그런 배려를 해 줄 리가 없지 않은가. 모든 사람이 제게 친절하게 굴지는 않는다는 것쯤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상대에게 실례가 될 수도 있는 생각이었지만 결국 그게 치에루의 생각이었다. 남을 폄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또래의 배려가 그만큼 그녀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아무튼, 별 특이할 것도 없는 행동에 굳이 의미를 부여하지는 말자며 치에루가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스스로가 낯설어하고, 뻘쭘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손끝을 꼼지락거렸다.

이 아이는 왜 먼저 다가온 걸까? 나는 왜 옆에 앉아도 괜찮다고 했지? 분명 상처받지 않게 둘러대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속으로 후회 아닌 후회를 곱씹다가 남자아이와 눈이 마주쳤고, 시선이 마주하자마자 그 아이는 베시시 웃었다. 순하게 웃는 얼굴을 보자 치에루는 괜히 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혼자 긴장하고 낯설어했던 게 바보짓이었던 것만 같았다.

 

“저기, 나는 후타바야. 키즈쿠 후타바. 음, 그러니까…… 성을 쌓다(築く) 할 때의 키즈쿠랑, 숫자 2를 써서, 떡잎 할 때의 그 후타바로 키즈쿠 후타바(築 二葉).”

“응? ……아, 그러니까…… 토키시로 치에루야. 따오기(桃花鳥)…… 그러니까 복숭아, 꽃, 새를 써서 토키랑, 성(城)을 쌓다 할 때의 시로로 토키시로. 그리고…… 백 개, 천 개 할 때의 천(千)이랑 영어의 영(英), 유리의 유(瑠)로 치에루. ……토키시로 치에루(桃花鳥城 千英瑠).”

 

보통 이렇게까지 풀어 써가며 이름을 대나? 하지만 혼자서 이름만 딱 대고 말 수는 없기에 치에루는 남자아이, 후타바를 따라해 제 이름을 댔다. 의아하고 낯설고 성가신 인사라고 생각하면서도 쑥쓰러움이 더 커서 고개를 푹 숙였다. 괜히 어깨가 쭈뼛 솟았다. 옆에서 이름이 예쁘다고 말해 주는 목소리에 치에루는 눈동자마저 데굴데굴 굴렸다. 잘했다거나 착하다는 말도 아니고, 어른들이 해 주는 칭찬도 아닌데 이상하게 기분이 들떴다. 그 낯선 감각이 순수한 기쁨인 것도 몰라 치에루는 미소짓기보단 입을 앙 다물었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잘 부탁해, 치에루.”

 

후타바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정확히 치에루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내밀었다. 치에루 역시 곧 어색하게 따라 웃으며 손을 맞잡았지만, 이 아이도 분명 다른 친구들에게로 가버릴 것을 알았다. 아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이 틀린 적은 없었다.

분명 그때까지는 없었다.

 

“치이, 좋은 아침!”

“아……. 후 쨩, 안녕.”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이 생각대로만 흘러갈 리가 있겠는가. 곧 멀어지게 될 사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우습게도 치에루와 후타바는 아주 빠른 속도로 친해져갔다. 슬슬 반팔을 입게 될 때쯤에는 서로 애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키즈쿠 후타바는 아주 다정하고 부드러운 아이라서, 그 앞에서 치에루는 다른 때보다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떠들었다.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보다 후타바의 다정함이 더 기꺼웠다. 후타바가 손을 잡고 이끌어 주면 의심도 어색함도 없이 그를 따라 나서고, 아주 가끔은 그녀 스스로 방향을 제시해 보기도 했다. 치에루가 스스로의 의견을 먼저 피력하는 일은 거의 없어서, 가끔씩 나설 때마다 후타바는 기쁘다는 듯 웃었던 것 같다. 치에루는 후타바의 만개한 미소를 볼 때면 그를 두고 안 좋은 생각만 하던 학기 초의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었다.

숙제를 해 오지 않았을 때만 말을 걸고, 조별 활동이 있으면 필요에 의해 손을 내밀고. 그런 가볍고 별 거 아닌 관계가 아니었다. 초등학교 5학년의 나이로 올라오기까지 토키시로 치에루가 단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것. 후타바는 친구라는 이름의 유일한 존재였다. 비관적인 스스로가 우스울 정도로 빠르게 후타바가 좋아졌고, 그의 존재가 치에루에게는 기쁜 오산이었다.

 

그래서 치에루는 후타바를 만난 그 해가 지금까지 중 가장 행복하고 완벽한 한 해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어른들에게 칭찬을 받고, 거기에 예년까지는 없었던 소중한 친구까지 생겼다. 지금까지 거쳐왔던 그 어떤 환경보다 그 순간이 치에루는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이 따뜻하고 온전한 환경이, 그 들뜬 기분이 망가질 거라는 생각은 차마 하지도 못 했다. 올 한 해는 내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봄일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안일한 생각이었다.

 

“야, 후타바.”

“앗, 형!”

 

모기가 기승을 부리는 늦여름이었나.

소중한 친구가 형이라고 부르는 존재를 보았다. 너무나도 귀엽고 따뜻한 친구와는, 닮은 구석이 조금도 없어보이는 그. 하지만 장난스레 제 동생을 나무라는 목소리에 깔려있는 다정함이 선연했던, 소중한 친구와 핏줄이 맞기는 맞구나 생각하게 되었던 그 사람.

 

“아, 맞아. 치이, 전에 말했던 우리 형이야. 키즈쿠 잇사! 헤헤. 오늘은 집에 바로 들어가봐야 해서 데리러 온 것 같아.”

“……아. 네 친구?”

“응, 내 친구. 치이……가 아니지. 치에루라고 해, 형.”

“아. 그, 그러니까…… 토키시로 치에루입니다. 그, 후 쨩…… 후타바 군에게는 늘상 신세를 지고 있어요.”

 

긴장해서 허리를 과하게 숙였다 들자 무슨 어린애 인사가 이러냐며 픽 웃던 그, 조금 어른 같았던 얼굴.

하얗게 물결치는 치에루의 머리칼과는 달리 흑단 같이 새까맣고 차분하게 내려앉은 머리카락. 봄날 햇살을 빼다박은 후타바의 금빛 눈동자와는 달리…… 한여름 화마처럼 짙은 적색 눈동자. 초등학교 6학년생 주제에 벌써 어른 같은 얼굴로 웃던 그 사람. 키즈쿠 잇사.

 

“……그래.”

 

그를 알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치에루의 완벽한 세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02_

 

물론 처음에야 별 생각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학년으로 올라오긴 했어도 치에루는 여전히 초등학생이었고, 제 친구의 형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몰랐으니까.

잇사를 처음 봤을 때 치에루는 그저, 형제인 것치고 후타바와는 별로 닮지 않았다거나, 굉장히 예쁘게 생겼다거나 하는 감상 밖에는 들지 않았다. 친구의 형이니까 잘 지내야지 하는 생각도 있었고, 그와 동시에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자주 엮이지도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니까 요는, 키즈쿠 잇사라는 존재가 제 삶에 별 영향을 끼칠 것 같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크나큰 착각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잇사를 처음 만나고 계절이 고작 한두 번 바뀌었을 때쯤이었다.

 

키즈쿠 잇사는 치에루처럼 천재로 오인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의심할 여지 없는 진짜 천재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노력 없이도 뭐든 능숙하게 해왔다고 후타바는 말했다.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그림이면 그림에 음악이면 음악. 요리나 게임, 간단한 놀이 같은 사소한 것까지 모두 다. 못하는 것도, 굳이 노력을 쏟아야만 이뤄낼 수 있는 어려운 것도 없는 사람. 모든 걸 해낼 줄 알며, 그것이 아주 당연한 일인 사람. 또 그것을 조금도 특별할 것 없는 일인 양 여기는 사람. 그게 바로 키즈쿠 잇사였다.

그런 잇사를 알게 된 치에루가 가장 처음 보인 반응은 그를 향한 순수한 동경이었다. 후타바에게서 느낀 우정처럼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치에루는 또래 중에서 자신보다, 자신만큼 뛰어난 사람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노력 하나 하지 않고도 모든 면에서 자신을 압도해버리는 잇사를 동경했다.

처음으로 만난 천재였고, 처음으로 대단하다 생각한 사람이었다. 멋있다고도 생각했고, 또 그를 닮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그 발자취를 따라가 언젠가는 그를 뛰어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치에루는 잇사를 향한 호감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친오빠도 아닌 사람을 오빠, 오빠하고 부르며 졸졸 따라다니곤 했다. 제자로 삼아달라느니 어린 마음에 엉뚱한 말을 쏟아내기도 했다.

자신을 졸졸 따라오는 치에루에게 잇사는 때로 인상을 쓰며 귀찮다고 일축하고는 했으나, 진심으로 그녀를 밀어내거나 성가셔 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은근히 챙겨 주기도 하고,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손을 내밀어 주었다. 치에루는 그의 알게 모르게 다정한 그 모습이 참 좋았다. 그래서 지금까지보다 더 노력했다. 노력을 거듭하며 따라가다 보면 정말로 그를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같은 곳에 설 수 있을 거라는 그 믿음이 무너지기까지는 2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동경의 꼬리를 물고 나타난 감정은 질투와 열등감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어린아이의 마음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동경을 밀어내고, 반절 빈 자리를 빼앗은 그 감정들은,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부정적이고 음습한 마음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지독했다.

치에루가 쉬지도 않고 아등바등 노력해서, 물밑에서 미친 듯이 발길질 해 겨우 거머쥐는 것들을 그는, 잇사는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하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손에 넣었다. 치에루가 아무리 보폭을 크게 잡아 숨을 헐떡이며 달려가도, 설렁설렁 걷기만 하는 잇사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무엇을 해도 그에게는 당할 수 없었다. 그를 이길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정말 단 하나도 없었다.

안 된다. 부족하다. 가능성이 없다. ……불가능하다.

온갖 부정적인 수식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려왔다. 그것들이 발목을 붙잡고 물 밑으로 끌어당기는 것처럼, 치에루는 무겁게 가라앉는 기분에 점점 잠식되어갔다. 성실한 그녀는 처음으로 무언가를 탓하기 시작했다. 고작 두세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나이차 탓을 해보기도 하고, 신체적인 요건을 탓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전부 부질 없는 짓이었다. 의미 없는 짓이었음을 알았다.

 

두 사람의 격차는 ‘타고 난 재능의 차이’ 라는 단순하고 지독한 말만으로도 다 설명할 수 있었다.

 

진짜 천재는 키즈쿠 잇사 같은 사람이고, 토키시로 치에루는 그저 만들어진 수재일 뿐이다. 아무리 노력을 감추고 천재 행세를 해도, 진짜 천재의 범주에는 들어갈 수 없다. 그 지독한 무력감이 아직 어린 치에루를 덮쳤다. 그 사실이 그녀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평소라면 능숙하게 어떻게든 웃고 있어도, 잇사를 마주치기만 하면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다. 동경과 열등감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에, 바로 얼마 전까지처럼 오빠라고 불러대며 졸졸 쫓아다닐 수도, 친한 척을 할 수도 없게 되었다. 어쩌다 잇사를 마주치게 되면 고개를 돌리고 최대한 그를 피해다녔다. 어쩔 수 없이 함께 있어야 하는 순간에는 그를 ‘키즈쿠 선배’ 라고 부르며 거리를 뒀다.

가슴 한 구석에는 그러지 말라고 간절하게도 외쳐대는 어떤 마음이 있었지만, 치에루는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스스로 등을 돌렸다. 그와 거리를 두면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눈앞에 있지만 않으면 질투 같은 건 어떻게든 억누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피하고 외면해도 정리되지 않은 채 울렁거리는, 무겁고 독한 무언가도 있었다.

 

단순하고 순수한 동경에도, 음습한 질투나 서러운 열등감에도 해당되지 않는 동떨어진 감정이었다.

동경하고 있으면서도 너무나 밉게 느껴지는, 따라잡고 싶으면서도 불편하고 거리를 두고 싶은 그 사람. 그 사람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고 싶다거나. 단순히 친구의 형, 동생의 친구 같은 관계 말고. 그렇다고 친구나 남매도 말고. 어딘가 낯설고, 유일하고 특별한 이름으로 정의하는 게 가장 어울릴 것 같은 이상한 울림. 스스로가 그를 소중하게 여기고 싶은 만큼, 그 역시 나를 소중하게 여겨 주었으면 하는, 날 것의 감정…….

어린 날의 치에루는 그 감정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이름조차도 알지 못했다. 그저 낯설었고, 그래서 두려웠다. 그를 향한 복잡한 마음에서 떨어져 나온 부수적인 산물로만 취급하고 싶었다.

혼자 생각에 잠기는 깊은 밤이 되어도 이 낯선 감정에 대한 생각만은 하지 않으려 애썼다. 의식 너머로 밀어넣었다. 그것의 이름을 알게 된다면 자신의 근간이 또 한 번 무너지다 못 해, 끝도 보이지 않는 깊은 무저갱 아래로 추락하게 될 것만 같은, 그런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래서 치에루는 아직 자라는 중이었던 이 감정을 작은 상자에 담고, 그보다 더 큰 상자에 담고, 또 담는 것을 반복하여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 묻어두었다.

상자들이 모두 터져나가지 않는 이상 이 불편한 마음은 마음속 땅에 스며들지 못 할 것이다. 그래, 상자속에 틀어박힌 채 그대로 삭아 흔적도 영향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면 좋겠다. 그래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앞으로는 더 철저하게 그 사람을 외면해야겠다고, 치에루는 생각했다.

너무 깊은 곳에 묻어둔 그 감정이 부피를 더해 가 모든 것을 비집고 터져나올 거라곤 생각도 하지 않았다.

 

03_

 

시간이 흘러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치에루는 여전했다. 여전히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노력가였고, 여전히 천재의 반열에 들지 못한 채 수재의 연장선상만을 홀로 걷고 있었다. 여전히 소심하다 생각될 수 있을 정도로 얌전했고, 투기 어린 시선이나 대인 관계도 여전했다. 여전히 후타바 외에는 친구가 없다는 점도. 키즈쿠 잇사라는 사람을 여전히 피하려 애를 쓰고 있다는 것도. 키가 조금 크고 교복이 달라졌다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지금까지와 똑같았다.

아니, 어쩌면 조금쯤은 있는지도 모르겠다. 피한다고 피해도 언제부터인가 잇사와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거나 하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의 빈도가 잦아졌다.

오며가며 복도에서 마주치는 횟수가 늘었고, 웬만하면 잘 가지 않는 교정 뒤편에서 마주치는 일도 생겼다. 언제는 후타바가 바빠 홀로 점심시간을 보내려 올라간 옥상에서 그를 만나기도 했고, 또 언제는 하굣길을 둘이서 함께하기도 했다. 치에루는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그 모든 것에 쉽사리 휩쓸려갔다.

제 정체 모를 감정을 죽이기 위해 그를 일방적으로 피하고 있던 치에루였다. 하지만 사실은, 그를 불편하게 여기는 것만큼, 그를 피하고 있는 스스로 역시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언제나 그랬다. 그래서 어째서인지 늘어나고 있는 접촉의 기회를 모두 피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피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고작 한두 뼘 거리를 두고 노을 진 하천가를 나란히 거닐고 있노라면, 그 상황이 기껍고 설레게 느껴질 때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날들 역시 마냥 계속되진 않았다. 상자를 묻어둔 마음 언저리의 위화감을 느끼며 치에루는 아무것도 아닌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잇사 옆에 서있는 것이 지금까지보다 배는 더 불편해졌다.

그래서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잇사를 졸졸 따라다니는 추종자들, 특히 그에게 지대하고 특별한 호감을 품고 있는 여학생들을 먼 곳에서 보고 있자니, 그건 또 그것대로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분명 잇사를 피하고 싶어했으면서, 그 사람들을 다 밀어내고 혼자만이 그 뒤를 따라야 할 것 같은 기분마저도 들었다. 대체 무엇이 불만인 건지, 치에루는 알 수 없었다. 스스로의 감정임에도 그랬다.

 

그 날은 유독 더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혀, 치에루는 후타바를 먼저 돌려보내고 하늘이 짙붉어질 때까지 교실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창가 맨 뒷자리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옅고 탁한 물빛에 레몬 같은 노란색이 섞여 번져갈 때쯤엔 취주악부의 악기 소리가 잦아들었고, 레몬색이 탁한 꿀색으로 변해 하늘이 점점 짙어져갈 무렵엔 운동장에서 들리던 기합 소리도 사라져갔다. 불길처럼 붉은 주홍빛이 하늘을 뒤덮고, 구름 색이 어두워지고 나서야 치에루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교실을 나섰다.

그 날 따라 왠지 걷고 싶은 기분이 들어, 치에루는 정문으로 향하지 않고 학교 뒤편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무도 없어 조용한 교정, 붉은 하늘과는 달리 차가운 색의 그림자 아래 그녀의 발소리만이 울려퍼졌다.

몸을 붉게 물들이다 못 해 가지에서 힘없이 떨어진 단풍과 닮은 색의 하늘. 운동장에서 날아든 고운 모래 알갱이들. 신발자국이 남은 건물 외벽. 제 키보다 높이 솟아 길게 이어진 철조망과, 구석에 있는 소각장에서 바람을 타고 퍼지는 다 식은 재 냄새. 고개를 숙인 시야에서 앞뒤로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하는 제 신발코.

그런 것들을 무심하게 느끼며 옮기던 걸음을 멈추었다. 불과 서너 발자국 떨어진 곳에, 그녀의 것보다 훨씬 큰 한 쌍의 구둣발이 있었다. 천천히 시선을 들어올리자 보이는 것은 아주 익숙한 얼굴이었다.

 

“……키즈쿠 선배.”

 

치에루는 눈앞에 있는 사람을 입에 담았다.

키즈쿠 잇사. 그녀를 언제나 고민의 구렁텅이에 밀어넣던 사람이 눈앞에 서있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바라보기만 하면서. 언뜻 무거운 듯한 시선. 선홍색으로 물든 하늘보다 훨씬 붉고 진한 색의 눈동자. 넘어져 무릎에서 흘린 피 같은, 진득한 유화 물감 같은, 값비싼 루비 같은 그 눈으로…….

 

치에루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눈앞에 서있는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으나, 그럼에도 치에루는 그가 제게 설명을 요구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대체 무엇을, 어떤 설명을. 그야…… 햇병아리처럼 웃어대며 그를 졸졸 쫓아다녔던 이유를. 그러다가도 호칭을 바꿔가면서까지 거리를 두기 시작한 이유를. 어느 순간부터는, 불편하다는 기색을 차마 숨기지도 못 했던 이유를. 눈조차 마주치려 하지 않았던 이유를. 그를 피하고 외면하려 드는 이유를. 모든 이유들을. 실제로 잇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치에루가 느끼기엔 그러한 것들을 묻는 것처럼 느껴졌다. 치에루가 보기에 그는 추궁하고 있었다. 그 무어라고도 답을 내어 줄 수 없는 물음만을 내비치고 있었다.

 

밭은 숨을 내뱉던 치에루는 몸이 굳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방금까지 토해내던 밭은 숨마저 고르기가 힘들어 숨을 멈추었다. 눈꺼풀이 뻑뻑해 눈도 깜빡일 수 없었고, 가방 끈을 세게 쥔 채 곱은 손가락을 펼 수도 없었다. 그녀는 찾아냈다. 추궁밖에 없는 것 같았던 그 눈동자에서, 다른 것을 찾아낸 것이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친구를 닮은, 그러나 전혀 다른 형질의. 잇사의 시선 기저에 깔려있는 것은 무형의 다정함이었다. 어떤 따스함 같은 것이기도 했다.

치에루는 사실, 알고 있었다. 키즈쿠 잇사는 선이 철저한 사람이라는 것을. 흡사 하인에 가까운 추종자와 팬을 잔뜩 달고 다니면서도 모두가 그 뒤를 좇게만 할 뿐, 곁을 내어 준 적은 없다는 것을. 그의 영역 안에 들여놓은 적 없다는 것을. 인간적인 면모와 타인에 대한 연민 같은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나, 제 선 안의 사람과 밖의 사람에 대한 구분이 철저하다는 것을.

……그리고 토키시로 치에루는 그 영역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닫자 치에루는 속이 울렁거렸다. 이제 무언가를 알 것 같으면서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것 같은 모순적인 감각에 휩싸였다. 마치 외면하고 싶은 기이한 현상이었다.

동시에 그를 보며 느꼈던 모든 감정들이 휘몰아쳤다. 동경, 시기와 질투, 열등감, 죄책감, 불편함, 아주 조금의 기꺼움.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가장 커다란 감정. 그 모든 것이 큰 해일처럼 그녀를 향해 들이닥쳤다. 어리고 작은 치에루는 그저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발밑이 울렁거렸다.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너…….”

잇사가 드물게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비 같은 시선이 너무 선명해 치에루는 고개를 숙이고 주먹을 꽉 쥐었다. 입을 꾹 다물었다. 우는 소리는 낼 수 없다.

사실 저 사람 앞에서는 눈물 한 방울도 흘리고 싶지 않았다.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다는 경쟁심 같은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불안감이 더 컸다. 그래서 적어도 우는 소리라도 터지지 않도록, 눈물을 빨리 그칠 수 있도록 치에루는 어금니에 힘을 주고 눈을 크게 떴다. 주먹 쥔 손바닥을 찔러오는 손톱의 통증과,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감각에 신경을 집중했다. 눈을 깜빡일 수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정말 겉잡을 수 없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치에루.”

 

하지만 그 모든 노력은 순식간에 허사가 되었다.

단 한 마디. 할 말을 찾지 못해 그저 이름을 부를 뿐인 세 음절의 짧은 한 마디. 그러나 다른 무엇도 아니고, 그녀의 이름을 정확하게 부른 그 한 마디.

그 찰나의 울림이 기폭제라도 된 양, 결국 치에루는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그녀 자신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제 안에 거칠게 몰아치는 다양한 감정들에 휩쓸리기만 했다. 울음을 토해내는 것만으로도 버거웠고, 생각할 겨를이랄 것도 없었다. 작은 한숨소리와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 규칙적으로 제 등을 토닥여 주는 잇사의 무심한 손길에 치에루의 내면은 더욱 거칠게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지형을 뒤틀고 고목의 뿌리를 뽑아 쓰러트릴 정도로 요란한 지진 같은 동경이. 그 어떤 짙고 여유로운 구름이라 한들 먼지처럼 흩뜨려 버릴 거센 강풍 같은 열등감이.

또 작고 깊고 고요했던 바다를 파도치게 하는, 그 파도가 하늘 끝에 닿을 것만 같은. 그런 거센 파도와도 같은…… 이름조차 알아내지 못한, 그 무엇보다 크고 거센, 지독하게 낯설면서도 이유 모르게 귀중한 그 감정이.

그 모든 것이 치에루를 건드리고 덮쳐왔다. 등을 토닥이는 손길과 정확하게 엇박으로 물결치며 그녀를 휩쓸었다. 그 격한 감정들을, 무엇 하나 억누를 수 없어 치에루는 그치지 않고 계속 울었다. 등을 토닥이는 잇사의 손길과,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은 제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부자연스럽게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눈동자에. 그 속에 두텁게 깔린 다정함에, 치에루는 크게 울었다.

 

04_

 

세상 모든 것이 생각대로만 흘러갈 리가 있겠는가. 이름 난 예언가의 말이 틀릴 때도 있고, 과학으로 예측한 현상이 빗나갈 때도 있는 법이다. 하물며 일개 학생에 불과한 이가 단순한 감으로 예상한 것이 항상 맞기만 할 리는 없는 일이다. 무엇이든 전부 다 예상한 대로만 흘러가라는 법은 없었다. 그것은 토키시로 치에루에게도, 키즈쿠 잇사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민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키즈쿠 선배.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감사, 했습니다.”

“……딱히. 또 있어도 상관 없는데.”

 

치에루가 잇사 앞에서 요란하게 눈물을 터트렸던 날. 비록 눈물을 그친 후 잠긴 목소리로 인사를 내뱉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난 치에루가 있었지만, 그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보기만 하다가 천천히 같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 잇사가 있었지만. 그래도 그 날 이후로는 무언가 달라질 거라 여겼다. 잇사는 물론이고, 치에루마저도 그랬다. 그만큼이나 커다란 사건이었다. 치에루는 분명 이제 자신이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 드물게도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정작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기특하긴 커녕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었다. 여전히 잇사가 불편했다. 정확히는 그를 보면 느껴지는 자신의 감정들이 불편했다. 그를 피하고 싶으면서도 함께 있고 싶은 이유를, 그와 함께하고 싶은 것들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해결책을 강구해 봐야, 그럴싸한 해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지금까지보다 더 철저히, 잇사를 피해다녔다.

 

“아! 있네, 있어. ……흠, 흠. 거기 학생, 잠깐 시간 괜찮을까요?”

 

그 날도 그랬다. 잇사를 피하고 있었다. 그를 완전히 피해서, 차라리 아주 먼 곳으로 가 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도 했었다. 혼자 있고 싶은 기분도 들어, 아주 간만에 홀로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사거리 위에 붕 떠있는 육교를 걷고 있자니, 맞은 편에서 걸어오던 사람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치에루는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 경계심을 가득 담은 눈초리로 그를 주시하며 슬금슬금 발을 뒤로 물렸다. 눈앞에 서있는 남자는 아차, 하고 짧게 중얼거리더니,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뒤로 물러나던 치에루의 발걸음이 멈추자, 남자는 안주머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내 그녀에게 명함을 한 장 내밀었다. 치에루는 머뭇거리다 양손을 뻗어 명함을 가져왔다.

 

“츠키노…… 예능 프로덕션.”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경음부 소속인 잇사의 영향인지, 혹은 그녀 스스로의 기호인지. 치에루는 의외로 노래라는 ‘취미’에 제법 많은 관심을 두었다. 여러 노래들을 찾아 듣고, 마음에 드는 가수가 있다면 앨범도 모아보고, 나아가서는 스스로 작사작곡을 해 노래를 불러보고 하는 등.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을 소소한 취미치고는 꽤나 열정을 쏟았었다. 이래저래 명성을 알리고 있는 소속사의 이름 하나 들어보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양손으로 공손이 받아든 명함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치에루는, 고개를 들어 눈앞에 서있는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사람 좋게 웃는 얼굴이었으나, 인간적인 호의와 더불어 당연하게도 장삿속 역시 가늠해 볼 수 있었다. 말끔하고 안정된 인상의 남자.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나를 왜?

 

“왜 저에게 이런 걸…….”

“그야 학생에게 흥미가 있으니까요. 아, 이건 좀 오해하기 좋은 말투려나. 학생의 ‘재능’에 흥미가 있다는 거예요. 오며가며 보고 들은 게 있어서, 불쾌하다면 미안하지만 이래저래 알아본 것도 있고요. 그래서 말인데…… 아, 참. 우선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아……. 그, 토키시로입니다.”

“……좋아요, 토키시로 양. 말씀드리고 싶은 바는 간단하고 명료해요. 혹시 토키시로 양이 관심이 있다면…… 우리 프로덕션에 한 번 와보지 않겠어요?”

 

눈앞의 남자가 과하지 않게 미소지었다. 치에루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까지 그녀가 노력하여 잘하게 된 것은 수도 없이 많았다. 양손가락과 양발가락을 다 써도 꼽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은 없었다. 엄지 하나 곱아드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저 수험생이 되면 막연히 평범한 4년제 대학에 지원해 센터 시험을 치고, 이도저도 아닌 대학생활을 보내다가 특별할 것 없는 제미에서 흔해빠진 졸업논문을 쓰고, 사무직이든 영업직이든 아주 평범한 회사에 취직하게 될 거라고만 생각했다. 남들처럼 흘러가는대로 살아가게 될 거라고…….

그야 물론, 노래는 좋아했다. 듣는 것도 좋아했고 부르는 것도 좋아해서, 어쩔 때는 등 떠밀리듯 학교 축제의 무대에 선 적도 있었다. 아버지의 해묵은 통기타와,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치던 피아노를 가지고 이따금은, 작곡이나 작사에 도전해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취미일 뿐이었다. 언제까지고 취미에서 그칠 거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받을 거라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제안을 받으니 이유 모르게 심장이 무겁게 두근거렸다. 하지만 무엇보다, 무엇보다 더.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눈앞에 서서 웃는 남자의 모습은 지워지고, 싫으나 좋으나 항상 생각하고 사는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흑단 같은 머리칼 사이로 저를 내려다보는 붉은 눈동자가 있었다.

잇사. 키즈쿠 잇사.

언제나 그 사람을 좇기만 했다. 언젠가 나란히 서고 싶다고 생각했다. 앞지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를 바라보며 웃을 수 있게 되고 싶었고, 그럴 수 있을 때가 찾아온다면 그 역시 저를 보고 웃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존재가 불편했다. 피하고 싶었다. 그를 볼 때마다 울렁거리는 심장과 알 수 없는 감각이 불쾌하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나는, 그러니까.

그러니까………….

 

“관심, 있어요. ……제 연락처를 드리면 될까요?”

 

그래, 먼 곳으로 가자.

내가 그 옆에 붙어있어도, 거리를 벌려 다른 사람이 그 옆에 있는 모습을 봐도 불편하다면…… 그렇다면 차라리 멀리 가버리자. 그 사람과 떨어져서 아주 멀리멀리 가버리자. 다시는 뒤를 좇으며 힘들어 할 일 없게. 그 옆에 다른 사람이 있는 모습을 보고 불쾌감을 느낄 일도 없게. 나도 그 사람을 볼 수 없고, 그 사람도 나를 볼 수 없도록. 언젠가는 그런 사람도 있었지, 하고 넘길 수 있게끔. 다른 곳으로…….

 

치에루는 그 갑작스러웠던 제의를 받아들였다.

내밀어진 그 손을 잡은 이후로 그녀는 상당히 바빠졌다. 아직 학생이기도 하고 연예계에 발을 들인 것이 처음이기도 하니 우선 연습생 신분으로 들어가긴 했으나, 데뷔 일자가 생각보다 빠르게 정해졌다. 노래와 작사작곡 실력이 이미 준프로급인 탓도 있었고, 무엇보다 치에루 본인이 빠른 데뷔를 원한다며 의욕을 내비친 탓이 제일 컸다.

무턱대고 정한 진로에 쏟아붓는 노력이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연습실 바닥에 드러누워 허무함이나 자괴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치에루는 생각보다 즐거워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도피처 삼아 급하게 정한 이 길이, 어쩌면 정말 자신의 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들뜨기도 했다.

한창 치에루가 바쁘게 살던 와중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몇 번인가 바뀌었다. 잇사가 먼저 졸업을 하고, 직후 벚꽃 피는 하늘 아래 치에루는 데뷔를 했다. 그리고 또 계절이 한 바퀴 돌고 그녀 역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학에는 진학하지 않고 연예계 활동에 전념하기로 하니 활동도 늘어나고 매스컴에 노출되는 일도 점점 잦아져갔다. 팬 수가 늘어나는 것을 실감할 때마다 치에루는 의외의 즐거움과 기쁨을 느꼈다.

 

그러나 해가 저물고 생각보다 충만한 낮이 지나 밤이 오면 여전한 상념에 휩싸이기도 했다.

잇사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로, 두 사람은 단 한 번도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후타바와는 여전히 연락이 오가곤 했으나, 잇사와는 형식적인 메일 한 통 오가는 일이 없었다.

울렁거리는 마음은 여전히 지독했지만, 이걸로 됐다고 치에루는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렇게 멀어져서 소식도 주고받지 않고, 각자의 길을 걷다보면 끝이 없어보이는 이 감각들도 언젠간 사그라들겠지. 그녀는 마치 구명줄을 잡듯이 반쪽짜리 충만함에 매달렸다.

 

남들보다 이르게 고등학교 3학년이 된 16세의 나이에 데뷔를 하고 4년의 시간이 지났다.

치에루도 스무 살 성인이 되고 어느 정도의 경력과 제법 단단한 팬층이 붙었다. 연예계 활동은 고된 일도 많았으나, 전념하면 전념할수록 생각보다 즐거움을 느낄 일도 많았다. 제게 돌아오는 미소와 애정이 아주 많았다. 매일매일이 만족스러웠다. 학생 때보다 잇사를 생각하는 시간도 조금쯤 줄어들어, 앞으로도 이렇게만 나아간다면 다 좋아질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 분명히 그랬었는데…….’

 

기숙사 맨션 입구에 나와 서있는 치에루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저 아는 사람이 오는 것을 기다릴 뿐인데도, 아침이 되자 몇 주 전부터 지속되어오던 긴장이 급격히 심화되어, 무장을 하듯 화장까지 하고 나온 상태였다. 데뷔 무대에 섰을 때보다 더 불안한 것 같았다.

그러니까, 두어 달쯤 되었을까. 최근에 없던 긴장상태를 불러 일으킨 일이 있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치에루는 상당히 바빴다. 불어난 인기와 데뷔 4년차를 기념하여 첫 투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존에 냈던 곡들을 다시 연습하고, 일정과 동선을 논의하고, 어떻게 하면 더 좋은 팬서비스를 해 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신곡을 만들기 위해 골몰하고, 실제로 투어를 다니고. 바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런 자신을 배려해 ‘어떤 소식’을 뒤늦게 전한 사랑스러운 친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바즈록(VAZZROCK) 프로젝트? 와, 레이지 상도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시는 건가요?”

“뭐, 그렇게 됐어. ……근데 왜 네가 더 신난 얼굴이야?”

“그야 기대되잖아요, 새로운 아이돌 프로젝트! 사실 다른 선배도 제의를 받았다고 들었는 걸요. 그 분은 참여 여부는 아직 정하지 않으신 것 같지만……. 두 분이 얼마나 멋진 분들인지 알고 있으니까요, 저는. 분명 근사하고 성공적인 프로젝트가 될 거예요. 저도 팬 할게요!”

“그래, 그래. 알았으니까 일단 진정해. 헤어 세팅 망가진다.”

 

이번에 소속사에서 새로 진행하게 된 프로젝트가 있다는 얘기는 꽤 오래 전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그야 치에루, 그녀가 소속된 회사의 일이기도 하니 모를 수가 없었다. 제법 친해진 선배 아티스트들도 제의를 받아서 아주 근사한 프로젝트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정말 별 무거운 생각 없이, 정말 근사한 프로젝트가 되겠다는 생각만 했었다.

하지만 얼마 전 친구에게 받은 연락은, 그녀의 머릿속을 온통 뒤죽박죽 흐뜨려놓기엔 충분했다. 치에루는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발신인란에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소꿉친구, 키즈쿠 후타바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근사한 프로젝트가 될 거라고 생각했고, 참여하게 된 아티스트들을 모두 응원해 줘야지 하는 살짝 건방진 생각도 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게 되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아티스트 명단에 ‘키즈쿠 후타바’, 그리고 ‘키즈쿠 잇사’라는 아주 익숙하고, 또 익숙한 이름들이 올라와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키즈쿠 잇사. 그래, 그 사람.

잇사를 생각하니 속이 울렁거려 치에루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며칠 전이었나. 후타바와 새로이 연락을 주고받을 때, 그가 충격적인 말을 했었지. ‘그동안 형이 네 소식을 많이 물었다’ 라고…….

잇사가, 그 키즈쿠 잇사가 저에 대한 얘기를 물었다니.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지난 몇 년간 계속? 정말이지 너무 믿기지 않아서 그 말을 듣고 아끼던 머그컵을 깨트렸었다. 저도 모르게 통화를 끊어버릴 뻔 하기도 했다.

키즈쿠 잇사가 토키시로 치에루에 대한 것을 물었다.

치에루는 솔직히, 그가 저 같은 건 잊고 잘만 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가 밤마다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잠을 설치는 것과 달리, 어쩌면 이름마저도 까먹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데 잊기는커녕 지속적으로 제 소식을 물었다니. 심지어, 앞으로는 자주, 마주치게 될 거라니. 오늘이 되어서까지 믿기지가 않았다. 치에루는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려 심호흡을 했다.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려다가 화장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먹을 꽉 쥐었다.

 

“치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치에루는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삿짐을 싣고 있는 트럭 옆에 서서, 저를 향해 손을 흔드는 해맑은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 그녀의 소꿉친구, 키즈쿠 후타바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오랜만이야, 치이! 직접 얼굴 보는 게 대체 얼마만이지? 그동안 잘 지냈어?”

“응, 그러게. 오랜만이네……. 후타바야말로 그동안 잘, 지냈어?”

“어라, 이젠 후 쨩이라고 불러 주지 않는 거야?”

“그야 다 컸으니까…….”

 

난 딱히 괜찮은데. 후타바가 여전히 사랑스러운 얼굴로 베시시 웃었다. 그런 그를 올려다보며 마주 웃던 치에루가 손끝을 움찔거렸다. 후타바의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익숙하고, 여유로운 듯한.

 

“……안녕하세요. 키즈쿠 선, 배.”

 

코앞까지 다가온 잇사를 향해 치에루가 먼저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동시에 잇사의 붉은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치에루는 숨을 들이마시다가, 그 시선을 피했다. 죄책감 같은 감정이 목구멍에 진득하게 달라붙는 것 같았다.

그래, 후타바에게 제 소식을 물어댔다 할 때부터 알고는 있었다. 저 사람은, 키즈쿠 잇사는 토키시로 치에루를 잊은 적이 없다는 걸. 아주 잠깐 마주친 시선에서도 치에루는 그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도대체 왜, 어째서, 라는 궁금증의 해답은 알아낼 수 없었다.

치에루의 시선이 한 곳에 머무르지 못 하고 이리저리 바쁘게 옮겨다니니, 잇사는 그것을 보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 소리를 들은 치에루가 쭈뼛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잇사는 여전히 여유로우면서도, 동시에 생경하게도 무언가 각오 같은 것을 다진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 오랜만이네.

뭐, 이제부터 제법 자주 보고 살 테니까. 부-디, 잘 부탁해?”

 

선배.

잇사가 웃었다. 동시에 치에루는 직감했다. 지금의 이 울렁거림은 결코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속에 묻어놓은 그 상자가 삭기는커녕, 안에 쑤셔넣어놨던 그 감정과, 잇사를 볼 때마다 느꼈던 다른 감정들이 몸집을 더 비대하게 부풀려 찾아왔을 뿐이라고. 그 탓에 앞으로, 많이 힘들어질 것이 분명하다고.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저를 괴롭혀왔던 그 이름 모를 감정이…… 결국 저를 먹어치우게 될 수도 있을 거라고.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무언가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예감까지…….

복잡한 머릿속에 심장이, 어떤 이름의 격정이 거세게 날뛰기 시작했다.

 

05_

 

여느 때와 같이 작곡에 몰두하고 있던 치에루는 찌뿌둥한 몸을 풀어주기 위해 기지개를 켰다. 짧은 곡소리를 내며 상체를 이리저리 틀다가 휴대폰을 두드려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세 시 17분. 또 자정을 훌쩍 넘겨버렸다. 다행인 것은 제가 제대로 잠자리에 들었나 감시하기 위해 매니저가 보낸 연막 라인을 확인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건 그렇고 지금까지 몰두를 했는데도 풀리는 게 없었다. 치에루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지우개 자국이 낭자한, 구겨진 오선보와 몽당연필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그러고는 러그 위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슬리퍼를 찾아 대충 발을 끼우고, 베란다와 거실을 갈라놓는 통유리창을 열었다. 두툼한 홈웨어 원피스와 해진 가디건이 겨울 바람에 흔들렸다. 순식간에 머리카락과 발끝이 차가워지기 시작했으나 치에루는 창문을 닫기는커녕, 느릿느릿 발을 때 베란다로 나갔다.

스물둘의 끝을 향해 깊어져가는 겨울은 피곤에 절어 있었다.

 

베란다에는 먼지가 잘 닦인 초콜릿색 철제 의자가 하나 놓여있었다. 봄이나 가을이 되면 종종 앉아서 햇살을 쬐고는 하던 의자였다. 치에루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뒤돌아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두꺼운 옷 너머로도 한기가 올라와 어깨를 잘게 떨다가, 곧 난간에 뺨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분명 아무도 시킨 적 없지만 치에루는 근 사흘간 잠도 자지 않고 불철주야로 일을 해댔다. 그로 인해 온몸이 피곤에 전 상태인데도, 며칠째 10분 이상 감겨본 적 없는 눈꺼풀이 아주 무거운데도 이상하게 그녀는 잠들 수 없었다. 깨어있은지 70시간은 지났음이 분명한데도. 원래부터 잠드는 걸 어려워하는 타입이긴 했지만, 이렇게 며칠동안 잠을 못 자고 있을 때는 정말 괴로웠다. 치에루는 양손 중지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만 사흘째다. 늘상 구겨져 자던 거실 소파에서도, 일주일에 하루이틀 쓸까말까 한 침실의 널따란 침대에서도 잠들지 못했다. 찬 바림이 쌩쌩 불고 온갖 소음이 다 들리는 베란다는 말할 것도 없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다시 들어올리고 한숨을 내쉬자, 연기 같은 입김이 바람에 흩어졌다. 순식간에 하얀 입김이 사라지고 텅 비어버린 검푸른 공간을 치에루는 멍하니 바라봤다.

그녀는 정말이지, 늘상 초조했다. 쉬는 날이면 불안감에 어쩔 줄 몰라했다. 쉬라고 명령을 해도 몰래 무언가를 하곤 했으며, 하다 못 해 온 집안을 뒤엎어 대청소라도 하려고 했다. 어릴 적부터 무언가에 쫓기며 살아가는 듯한 감각에는 익숙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 정도가 심해도 너무 심했다.

그 순간이 언제더라. 언제부터였더라. 그건…… 그래, 분명히.

 

‘키즈쿠 선배가 프로덕션에 들어왔을 때부터…….’

 

언제나 그녀를 괴롭게 만드는 사람.

그 사람과 떨어진 후로 치에루가, 단 한 번도 그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 하면 그건 분명 거짓이 될 것이다.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하는 빈도가 줄어든 것만은 확실했다.

바쁘게 일을 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반짝이는 즐거움과 생경한 일들을 겪다 보면 지난 시간의 것들은 조금씩 밀려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치에루는 일을 할 때만큼은,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만큼은 잇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를 떠올리는 것은 혼자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그래. 고작해야 늦은 밤 혼자 있을 때, 문득 손끝을 타고 오르는 상념이나 잠자리를 괴롭게 하는 꿈의 형태로 찾아오고는 했던 것 같은, 그런.

하지만 그 사람이, 잇사가 프로덕션에 들어온 이후로, 치에루는 마치 중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을 매일 느꼈다. 열등감. 동경. 시기와 질투. 불편함 죄책감. 묻어둔 마음. 온갖 감정이 손에 손을 잡고 저를 둘러싸 괴롭히던 그 시절처럼. 같은 곳에 있음을 자각하니, 고작 하룻밤 상념의 형태로만 찾아왔던 그에 대한 생각은 이제, 불규칙한 바람처럼 시도때도 없이 불어닥쳐 치에루를 못살게 굴었다.

그 탓에 결국 또 다시 하루하루가 초조하고 불안해졌다. 그 초조함에 치에루는 뭐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듯 굴었다. 주변 사람들이 걱정해도 그녀는 무언가 하려고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사장과 매니저는 분명 그녀에게 당분간 신곡 발표나 스케줄에 집착하지 말고 휴식기를 가질 것을 제안했다. 쉬지 않고 곡을 내오고 활동을 지속해온 그녀에 대한 배려이자 걱정이었다. 하지만 치에루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런 호의조차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초조하고, 불안하고 불편하고, 온갖 격한 감정들이…….

 

검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치에루는 갑작스레 신경질적으로 거실로 돌아가 통유리창을 닫았다. 그리고 팔을 쓸었다. 고작 몇 분 창을 열어놓았을 뿐인데, 틀어놓은 난방이 무색하게 찬바람이 온 집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어두컴컴한 부엌으로 눈을 돌리자, 텅 빈 세간과는 달리 내부가 꽉 들어찬 찬장이 눈에 들어왔다. 온갖 향신료와 파우더, 리큐어 같은 것을 모아놓은 찬장이었다.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장 내부의 한 구석이 비어있었다. 분명 시나몬 파우더 병이 놓여있던 자리인데. 아, 그렇지. 자정 전쯤에 키즈쿠 선배가 찾아와서 빌려갔던가. 아니, 아닌데. 그러고보니 며칠동안 핫 초콜릿에 시나몬 파우더를 넣어 먹지 못했던 것 같은데…….

치에루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부여잡으며, 잇새로 흘러나오려 하는 신음을 억눌렀다. 못 해도 일주일은 넘은 일이 고작 몇 시간 전의 일인 것처럼 머릿속이 뒤죽박죽한 상태였다. 늘 이랬다. 키즈쿠 잇사에 대한 생각만 했다 하면 꼭 이랬다.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는 발에 걸리는 잡지들과 구겨진 오선보들을 아무렇게나 걷어찼다. 신경질적이고 서투른 발길질에 신고 있던 슬리퍼가 날아가 러그 위를 뒹굴었다.

 

아무래도 이젠 정말 쉬어야 할 것 같았다. 잠들지 못해도 시체처럼 누워있기라도 해야지.

머리를 묶고 있던 늘어난 머리끈도 작곡할 때만 쓰는 안경도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집어던진 치에루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두터운 담요가 구겨져 있는, 매일 불편하게 잠을 청하던 1인용 소파. 사용하지 않은 지 며칠은 지나 시트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푹신하고 질 좋은 침대.

치에루는 오랜만에 침대를 선택했다.

 

……그 날, 치에루는 꿈을 꿨다. 언제나 그녀를 괴롭히던 사람이 나오는 꿈이었다.

그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치에루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 따위는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그가 있는 곳으로 건너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이 모든 것이 꿈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싫었다. 깨어서도 잠에 들어서도 저를 괴롭히는 온갖 것들이 원망스러워, 치에루는 울고 싶어졌다.

깜빡임조차 적은 저, 결 좋은 머리칼과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선명한, 붉은 눈동자. 언제나 흔들림 없는 눈을, 저 혼자서만.

 

“……맞아, 늘 혼자서만.”

 

억울하고 서러워 치에루는 울고 싶었다. 하지만 눈을 찡그려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잇사가 보고 있었다. 꿈속의 치에루는 눈물 대신 제 감정을 토해냈다.

 

“늘 혼자서만, 선배 혼자서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죠. 나는…… 나는, 선배를 볼 때마다 너무 힘이 드는데. 머리가 아프고 숨 쉬는 것도 괴로운데, 포근한 침대가 있어도 제대로 된 휴식 한 자락 취할 수 없는데……!

늘 나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혼자 저 앞까지 걸어가고, 늘 등만 보여주고. 걸음을 늦춰 주지도, 뒤를 돌아봐 주지도 않잖아. 내가 아무리 미친 듯이 달려가도 따라잡을 수가 없다는 게, 나는 너무, 결국 당신이랑 나란히 걷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 같아서…….

나, 난 항상 힘들단 말이에요. 선배는 알고 있잖아요, 응? 내가 노력하는 걸 전부 다 알고 있잖아. 그러면, 한 번쯤은. 적어도 한 번쯤은, …………해 줘도 괜찮잖아, 키즈쿠 잇사!

…………바닥만 보고 걷는 건 나, 이제 너무…… 지긋지긋하단 말이야.”

 

지리멸렬한 말을 토해내면서도, 꿈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진심이면서도, 잇사에게는 다 알고 있지 않으냐며 윽박을 지르고 있으면서도. 치에루는 여전히, 스스로가 그에게 바라고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마치 그 해답이 있는 곳만 안개가 낀 것처럼, 가까이 다가가면 사라져 버리는 사막의 신기루처럼…… 불분명하고 뿌옇기만 했다.

언젠가는 잡을 수 있을 것 같다가도, 또 언젠가는 멀어지고. 당장 지금은 코 앞에 있는 것 같은데, 정작 어떻게 잡아채야 할지 모르겠는 그 단어가. 그 감정과 욕구가.

아, 분명 한 발짝만 더 내딛는다면 알 수 있을 텐데. 이번에야말로 정말 알아차릴 수 있을 텐데. 천 근의 추가 달린 것처럼 발이 무거워도, 딱 한 걸음만 더 나아간다면…….

 

……하지만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분명 안간 힘을 다 써도 발을 들 수 없었다.

대신 치에루는 양손을 들어올려 제 얼굴을 감쌌다. 꿈속인데도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저 멀리 서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실제가 아닌 잇사의 형체에게조차 조금의 눈물도 추한 모습 한 조각도 보여 주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세상이 어두워졌다.

 

“………….”

 

아프도록 세게 감았던 눈을 떴을 때, 치에루는 더이상 꿈속의 장소가 아닌 널따란 기숙사 침대 위에 있었다. 두세 명이 누워 자도 모자람 없을 것 같은 커다란 침대인데, 팔다리를 대 자로 뻗기는커녕 한쪽 구석에 몸을 말고 잠들어있던 제 모습이 너무 우스웠다. 그냥 소파에서 잘 걸 그랬다 생각하며 치에루가 피곤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잠이 부족해서인지, 뒤숭숭한 꿈자리 탓인지. 평소보다 배는 더 어지러운 아침이었다.

06_

 

겨울이 깊어지고 달력이 바뀌었다.

한 해의 막을 알리는 홍백가합전도, 새로운 해의 시작을 알리듯 아침댓바람부터 몰아친 수많은 연하장도. 후타바와 타카아키가 챙겨 준 새해 음식이나, 하츠모데와 신면 교통체증에 관한 뉴스들도. 해가 바뀌는 것을 체감하게 해 주는 것들이 지난 일이 된 지는 열흘이 더 넘은 상태였다.

그러나 여전히 한겨울이라,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여전히 추위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아침부터는 웬일로 눈까지 펑펑 내리고 있었다. 눈은 후둑후둑 내리치는 비와는 달라서, 아무리 많이 쏟아져도 소음 하나 내지 않았다. 그래놓고는 저 혼자 조용한 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주변의 이런저런 소리마저 야금야금 잡아먹고는 했다. 그 덕에 아주 고요한 날이었다.

구름에 가려진 해가 이미 하늘 꼭대기에 올라가 있을 때 잠에 들어, 눈발이 약해질 때쯤 깨어난 치에루가 세안을 마치고 나오자 눈이 그쳐 있었다. 멍하니 창밖을 보던 치에루가 걸친 것 하나 없이 베란다로 나가보니, 맨션 부지부터 눈에 보이는 모든 건물과 길에 새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인 것을 볼 수 있었다.

 

치에루는 목이 다 늘어난 잠옷에서, 올 겨울 새로 산 포근한 홈웨어 원피스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 위에 두껍고 촘촘한 겨울 가디건을 걸치고, 베이지색 어그부츠에 발을 꿰어넣으며 방을 나섰다. 쌓여있는 눈을 보고 새삼스레 들뜰 나이도 성정도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매끄럽고 눈부신 눈밭에 얼룩과 자취를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맨션 정문으로 나오자 눈 앞이 모두 새하얬다. 근 한두 시간 동안 오고간 사람도 없는지 정말 발자국 하나 없었다. 치에루는 답지 않게 들뜬 얼굴로 첫 발을 내딛었다. 뽀드득 소리와 함께 배이지색 부츠가 눈밭에 폭 파묻혔다. 신발 안으로 눈이 조금씩 들어와 발목이 시렸지만 치에루는 한 발씩 천천히 나아갔다. 어차피 멀리 나가지도 못 하니 맨션 부지 내를 한 바퀴 도는 것에 그칠 산책이었지만, 그래도 방안에 처박혀 있는 것보다야 나은 기분이 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들뜬 기분도 잠시였다. 뒷걸음질로 나아가며 제가 남긴 발자국을 감상하던 치에루는, 등을 돌리고 고개를 들어 우중충한 하늘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정면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희뿌옇고 무거워 보이는 구름이 잔뜩 깔린 하늘. 햇빛 하나 통과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이른 저녁 무렵이 되자 구름 위로 노을이 들어찬 듯 사위가 묘하게 붉은 빛을 띄며 어두워져갔다.

여전히 고개를 들어올린 채 입김을 토해내며 치에루는 천천히 나아갔다. 제 발소리와 숨소리 외에는 별 다른 소음 하나 들리지 않았다. 건물을 나와 걷던 치에루는 어느 샌가 맨션 뒤편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 흐린 날씨 탓에 뚜렷한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곳은 맨션 앞쪽보다 어두웠다. 그리고 붉었다.

치에루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제 숨소리도 발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는 것만 같았다. 점점 느려지던 발걸음이 완전히 멈추었다.

 

얼마동안이나 가만히 서있었을까. 냄새가 나고 소리가 들렸다. 겨울의 찬 냄새. 눈 오는 날의 젖은 냄새, 고요함. 완벽할 것 같았던 정적을 깨는, 규칙적인 발소리…….

 

“키즈쿠 선배.”

 

그래.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마치 여름 같은, 지독하게 두터운 불꽃 같은 무언가가 눈꺼풀 너머로 일렁거렸다. 그래서 치에루는 눈을 떴다. 그 사람이 서있었다. 언제나 그녀를 괴롭게 만들던, 그 사람. 무의식적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시선이 맞았다. 치에루는 치맛자락을 세게 쥐었다. 심장이 쿵쿵 요란하게 울려댔다. 완벽할 것 같았던 고요함은 깨졌다.

붉고 어두운 사위, 서로를 응시하는 눈동자에서 치에루는, 고등학생 때의 어느 날을 떠올렸다. 방과 후. 수업이 끝나고도 한참이 지난 그 때. 사람이 별로 없어 조용했던 학교 부지, 교정 뒤편. 선명하게 깔린 붉은 노을과, 그곳에 서서 아무 말 없이 저를 응시하던 눈앞의 사람을. 키즈쿠 잇사를.

 

“저, ……죄송하지만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아. 이대로는 안 된다.

며칠 전 꿈자리 때문인지, 평소보다 심한 울렁거림에 치에루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그대로 걸었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야 한다. 당신이 없는, 오직 나만의. 아니, 온갖 상념이 들어찬…….

짧지 않은 그 거리가 마치 영원처럼 느껴져, 치에루는 발걸음을 옮기는 데에만 온 힘을 다 했다. 며칠 전 그 꿈과는 달리, 힘겨우나마 발이 떨어지기는 했다. 짧으면서도 긴 것 같은 거리를 걸어 막 잇사를 지나쳤을 때쯤이었다.

 

“……늘 도망치지.”

 

평소보다 고저 없는 목소리가 들려, 치에루는 결국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잇사 역시 몸을 돌려 그를 지나친 치에루를 보고 있었다.

어두워지고 무거워진 그림자 때문에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선 사람의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조차 사실 치에루는 알지 못했다. 다만, 다만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 무슨 이름을 가진 감정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을 토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뱉어내지 않는다면 당장 가슴이 터져버릴지도 몰랐다.

 

“그러면 달리 뭘 어떡해야 하나요?”

 

그래도 한 마디로 억누르려 했다. 뭘 어떡해야 하냐고, 그 한 마디만 하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고 대답을 기다리기만 하면 충분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순간, 부지 내의 모든 가로등이 일제히 불을 밝혔다. 그래서 치에루는 잇사의 얼굴을, 그 붉은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도망친다고 책망할 줄 알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저를 한심하게 여기지도 않고, 그렇다고 도발하고 있는 것도 아닌.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눈빛. 그건 마치…… 꿈에서 본 것과 닮아 있었다. 치에루의 낯이 일그러졌다.

 

“그럼 제가 뭘 달리, 어떡해야 해요? 도망치는 것 말고 대체 무슨 선택지가 있다고. 어릴 때처럼 막, 멍청하게 웃으면서 쫓아다닐까요? 그러면 뭐가 달라지나요?

아니잖아요. 어차피 늘 똑같잖아요. 변하는 게 하나도 없잖아. 나는, 난 어떻게 해도 선배를 볼 때마다 그냥…… 너무 힘든데. 선배가 생각날 때마다 힘들고 괴로워서 울고 싶은 걸요. 늘 그랬잖아요, 늘. 선배가 나를 괴롭혔잖아. 맞아, 오직 선배만이 나를 계속 힘들게 했잖아요. 선배만이…….

분명 누구도 날 흔들지 못했는데. 당신이, 당신만이 나를 괴롭히고, 내 뜻대로 되지도 않고. 내가 아무리 쫓아가고 노력해도 나를, 나를…… 단 한 번도 뒤돌아봐 준 적 없으면서. 그런데 왜.

내가 뭘, 원하는지 다 알고 있으면서, 대체 왜 선배는………….”

 

추하다. 화를 내는 건지, 대체 뭘 하자는 건지.

지리멸렬하고 앞뒤 없는 제 말들에 치에루는 불쾌한 감정을 느꼈다. 자괴감을 느끼고, 수치심과 패배감을, 또는 미약한 원망을. 잇사에게 보낸 적 있는 온갖 감정들을. 그리고 그 사이에 섞여든 무언가를 느끼며 꿈에서처럼,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흘리고 싶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 그 날로 충분했다. 더 이상 제 밑바닥도 감정도 보여 주지 않을 거고, 이대로 천천히 모든 걸 끊어내서…….

 

“그러는 넌. 정작 너는 네가 뭘 원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고 있나?”

 

담담한, 것 같으면서도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 한 목소리. 짧은 반문이었다.

치에루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잇사의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차라리 이 시점에서 저를 비웃고, 지리멸렬한 화풀이를 하는 제게 질리길 바랐다. 그래서 엮일 일이 없게 되길 바랐다. 그가 성정이 못된 사람이 아닌 걸 알면서도 그런 이상한 것을 바랐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과 같은 말을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반문하던 잇사의 목소리, 시선. 기저에 깔린 상냥함과 애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 튀어나온 그 물음은, 그 목소리는, 안개를 몰아내는 태양빛 같았다.

그 빛이, 죽어라 달려도, 아무리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던 해답을…….

 

“……아니, 됐다. 이 얘기는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다시…….”

“바보 취급하지 마세요.”

 

대답하지 않고 멍하니 서있던 치에루 때문인지, 잇사는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는 말을 꺼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치에루가 그를 붙잡았다.

바보 취급하지 말라니. 염치없는 말이었지만, 아주 뻔뻔한 말이었지만. 정말 말 그대로 지금까지의 제가 바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을 돌리려다 말고 멈춰 선 잇사를 향해 치에루가 발을 뗐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를 한달음에 달려갔다. 바로 코 앞에 있는 사람의 옷자락을 세게 붙잡았다.

선배. 있잖아요, 선배. 사실 나는…… 나는 늘.

 

“정말 너무 싫었어요. 선배가 너무 싫었어.

내가 그렇게 존경하고 동경하고, 좋아한다고, 한결 같이 뒤를 따랐는데도 단 한 번도 이길 수가 없어서. 선배를 앞지르기는커녕, 그 옆에 나란히 설 수조차 없어서. 뒷모습만 계속 바라보고 있어야 해서. 그게 너무 싫었어요. 나는, 원래 나는 뭐든 다 잘했는데. 그 누구보다 잘했는데. 내가…… 앞서나가 뒤돌아보는 입장이 되지 못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그런데 선배만은 겨우 좇아가는 게 고작이어서.

그래서 선배만 보면 계속 화가 났어요. 너무 싫었어요. 선배가 내 모든 걸 잡아먹고 뒤엎어 버리는 것 같아서, 나는…… 정말로 싫었어요. 질투가 나고 열등감 같은 추한 감정이 내 발끝부터 씹어먹게 만드는 게 너무 끔찍했는걸요. 나를 그렇게 만드는 존재가, 선배가 너무 미웠다고요.

…… 그런데, 그러면서도 내가 선배를……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커서. 정말, 정말 너무 많이 좋아해서, 그것 때문에 나 자신도 싫었어. 그러면 안 됐는데, 누구 하나 좋게 대해 줄 수가 없었어요. 선배한테도, 나한테도. 솔직하게 좋아한다고 말해 줄 수가 없었어요.”

“…….”

“하지만 나는, 선배가 좋은 걸요. 아주 많이 좋아하는 걸요.

내가 선배를, 정말 많이 좋아한다는 걸. 아주 오래 전부터 계속 좋아해왔다는 걸, 나는 분명히………….”

 

제대로 정리되지 못 한 지리멸렬한 말만 내뱉던 치에루가 말끝을 어물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 말로 내뱉으니 드디어, 제대로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 바보 같지만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 긴 시간 동안 키즈쿠 잇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왔는지. 그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 주고 싶었는지.

치에루는 이제야 겨우 알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을 깨닫자마자, 절대 울지 않을 거라 다짐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노을 진 교정 뒤편에서 마주친 그 날처럼, 그가 이름을 불러 주기 전처럼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흘렸다. 아,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치에루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제 감정을 토해내고 비로소 알게 되었지만, 그 추한 모습과 날것의 감정을 알게 된 잇사가, 저를 미워하게 될 상황에 대한 대비는 하나도 해놓지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숨소리조차 억지로 억눌러 지나치게 고요한 정적 속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한숨소리가 공기 중에 흩어졌다. 잇사는 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손은 코 앞에서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후배의 등이 아닌, 눈가를 향했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치에루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놀라서 고개를 든 치에루는 정말이지 닦아 준 보람이 없게도 계속해서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건드리지 않는 이상 소리도 내지 못하고 펑펑 쏟아대기만 하는 것은 옛날과 달라지지 않았다.

 

“……부터, 내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전혀 모르겠지, 너는.”

“네……?”

 

나직하게 떨어진 잇사의 말에 치에루가 멍청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눈가에 닿은 손에 정신이 팔려,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탓이었다. 치에루가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무식하게 벅벅 닦아대자, 잇사가 그 손을 잡아 감쌌다. 막 문지르지 말라고 혼내는 눈빛을 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애쓰는 게 뭔지 겪어본 적 없어. 노력도 잘 모르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도 성미에 영 맞지 않고. 나는 내가 제일 중요하니까.”

“그건…… 그야.”

“그런 나를 골몰하게 만들고, 그렇게 오랫동안 시간 들이게 만들고서는 말이야. 그런데, 뭐? 뒤돌아봐 주지 않는다고? 참나, 괘씸하기 짝이 없어서…….”

 

잇사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치에루는 모든 사고회로가 멈춘 것처럼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채, 굳은 얼굴로 그저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눈물만을 끊임없이 쏟아댔다. 잇사의 비어있는 손이 제 머리를 누르고 헝클 듯이 쓰다듬자, 그제야 치에루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뜻을 알아챈 치에루가 마구잡이로 움직이는 잇사의 손을 잡아챘다.

 

“그럼 왜 먼저 말해 주지 않았어요?”

 

왜 나를 좋아한다고 먼저 말해 주지 않은 거예요?

숫제 억울하게도 들리는 그 질문에 잇사는,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눈 내리는 날. 모든 것이 소리를 죽이는 날에도 작게 내리누른 그 목소리는 아주 선명하게 들렸다.

그 대답마저도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아 치에루는 울상을 지었다. 아주 서러운 듯한 얼굴이었다. 서러움에 열등감, 동경, 원망, 죄책감, 질 나쁜 감정들. 그리고 지금까지 이름을 몰라 불러 주지 못 했던 가장 비대한 감정. 언젠가는 상자속에 감추고 땅에 묻어 사라지길 바랐던 그 감정. 치에루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그녀의 낯을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 눈에 깔려 있는 것은 아주 커다란 기쁨이었다. 익숙한 이름을 가진 드문 감정이었다. 치에루는 자 머리를 가볍게 누르듯 끌어당기는 손길을 따라 잇사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 울렁이고 흔들리는 많은 현상들.

지형을 뒤틀고 고목의 뿌리를 뽑아 쓰러트릴 정도로 요란한 지진 같은 동경과 호감이, 고마움이. 그 어떤 짙고 여유로운 구름이라 한들 먼지처럼 흩뜨려 버릴 거센 강풍 같은 열등감도, 질투와 죄악감도.

또, 작고 깊고 고요했던 바다를 파도치게 하는, 그 파도가 하늘 끝에 닿을 것만 같은. 그런 거센 파도와도 같은…… 나는 당신을 좋아해요. 오늘에서야 이름을 알게 된, 그 무엇보다도 크고 거센, 지독하게 낯설게 느껴지며 떨리고 기꺼운 이 감정까지.

모든 것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 무엇 하나 벅차지 않은 것이 없어 치에루는 웃었다. 여전히 잇사의 품에 고개를 파묻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활짝 웃었다.

 

치에루를 감싸온 것들도, 잇사의 품에 들어찬 것들도.

그 자리에 존재하는 온갖 감정들이, 울렁이는 그 모든 것들이 다 격정이었다.

06_

 

"정말 잇사는 못 하는 게 없네. 기특해라."

"저런 애들을 두고 천재라고 하는 거겠죠. 가끔은 소름이 돋기도 한다니까요."

 

키즈쿠 잇사는 못 하는 게 없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그랬다.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그림이면 그림에 음악이면 음악. 요리나 게임, 간단한 놀이 같은 사소한 것까지……. 헤매는 일 없이 무엇이든 곧잘 해내니, 천재라는 수식어가 마치 그를 위해 준비된 단어 같았다.

핏덩이 때부터 비범했는지는 모를 노릇이지만, 말문을 트고 걸음마를 떼고 할 때쯤부터는 이미 그가 남들과는 사뭇 다른 아이라는 것을 주변 사람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무엇이든 남들보다 성취가 빨랐고, 그 과정 역시 남들보다 더 능숙했다. 굳이 여러 번 시도해보지 않아도, 무슨 일이 되었든 모든 걸 거의 처음부터 잘해내었다.

그런 잇사는 당연히 노력이라는 것을 잘 몰랐다. 노력 같은 거 하지 않아도 무엇이든 할 수 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해내지 못한 것을, 아득바득 노력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적은 있었다. 자신의 성취도, 주위의 찬사와 칭찬도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잇사는 그러한 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칭찬 한마디 애정 한 자락에 목 매어 본 적도 없었다.

노력과 더불어 무관심이라는 것도, 실패라는 것도 잘 몰랐다. 웬만한 것들이 모두 당연하게 주어지는 환경에서 키즈쿠 잇사는 자라났다. 그가 자라오며 가져 본 모든 것이 그의 토대가 되었다.

 

잇사는 자존감과 자신감이 넘치는 성격으로 자라났다. 애정 한 자락 얻으려 발버둥치지도 않았고, 칭찬을 받으면 마다하지 않고 당연하다 여기며 웃을 뿐이었다. 제 생각과 하는 일이 틀렸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스스로가 최고이자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남을 사랑할 줄 모르는 아이가 된 것은 아니었다.

키즈쿠 후타바. 그런 이름의 동생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잇사가 그를 괴롭히거나 부려먹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나름대로 그를 아끼고 형으로서 사랑하고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 기저에는 애정과 다정함이 깔려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그저 기본적으로 조금 무심하며 자신이 최고라 생각하고 있을 뿐이지, 사람의 감정을 느낄 줄 모르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오히려 잇사는 그 비상한 머리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온갖 곳에서 전해져오는 감각, 느껴지는 감정. 그 모든 것의 이름과 정의를. 그 감정이 향하는 대상을, 그 깊이를. 무엇 하나 빠짐없이, 모두 다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느끼는 감정은 매일 같이 거기서 거기라, 지루할 정도여서, 특수하고 희소한 본질을 가진 감정들을 느껴볼 새는 없었다. 분명히 그랬다. 분명 그랬었는데.

 

"토키시로 치에루."

 

단 하나. 그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이름이 찾아왔다.

07_

 

시간이 흘러 달력이 바뀌고 계절마저 변해도, 4월의 완연한 봄이 되어도 크게 달라지는 일은 없다. 겨우내 하고 다니던 머플러를 옷장에 집어넣었다거나, 이제 후타바의 얼어붙은 손끝을 잡아 주지 않아도 된다는 사소한 점들을 제외하고는 지난 계절들과 별다를 것 없는 날들이 될 것이었다.

 

올봄이 초등학생으로서 마지막으로 맞는 봄이라고는 하지만, 그렇다 해서 무언가 특별할 것이 있기야 하겠는가. 그냥 매해 찾아오는 익숙한 계절일 뿐이다.

연푸른 하늘에 솜먼지 같은 구름이 흘러가고, 온갖 곳에 만발한 벚나무에서는 벚꽃잎이 눈처럼 흩날렸다. 모두 옅은 색이었고, 온통 연홍색과 백색이었다. 지금까지와 다를 게 없다. 그래서 잇사는 새로운 기분 같은 건 올해도 느끼지 못했다. 여섯 번째 반복하는 새 학년 첫날 수업이 끝나고, 교문에서 후타바를 만날 때까지는 분명 그랬다.

 

"형, 형! 들어 봐, 나 오늘 친구 생겼다?"

"친구라면 매일 달고 다니잖아."

"말고, 다른 친구. 새 친구! 오늘 반 바뀌었잖아."

 

충성스런 강아지 같이 유순한 얼굴로 웃으며 후타바가 빠르게 조잘댔다.

평소에 같이 놀던 남자 친구들 말고, 또래보다 키가 조금 작은 여자아이였다더라. 얌전하고 말이 적은 편이지만, 선생님 말을 들어보니 공부도 미술도 음악도 다 잘한다더라. 웃는 얼굴이 굉장히 귀엽더라. 머리 색은 새하얗고 눈동자는 연분홍색인 것이, 그래. 저 벚꽃 같은 색이라더라. 도시락을 같이 먹는데 버섯을 싫어하는지 먹지 않고 다 골라내더라…….

사소하고 아무래도 좋을 얘기들이었다. 그럼에도 후타바는 아주 설레고 즐거운 이야기라도 하는 양, 온 얼굴에 웃음이 만발해 있었다. 사교적이고 사람 좋아하는 성격이긴 했지만, 고작 처음 만난 친구 이야기를 하며 이렇게나 신나한 적은 없었다. 싱글벙글한 동생을 가만히 보고만 있다가, 잇사는 문득 생각했다.

 

`혹시 첫 눈에 반하기라도 했나.`

 

상대가 귀여운 인상의 여자아이라니까 딱히 아주 없을 법 한 얘기도 아닌 것 같았다. 하긴, 슬슬 사춘기가 올 때도 됐으려니. 그런 생각을 하며 잇사는 슬슬 지겨워지는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팔불출 같아서 스스로도 좀 징그럽게 느껴지지만 제 동생 정도면, 뭐. 사람 좋지, 인상 서글서글하지. 그 애랑 잘 되지 못 할 것도 없겠다는 생각도 했다. 귀찮은 연애 상담 같은 건 해 줄 필요 없겠지, 따위의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자신과는 별 상관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매우 안일한 생각이었다.

 

"야, 후타바."

"앗, 형!"

 

모기가 기승을 부리는 늦여름이었나.

 

가족 외식을 나갈 참이니 친히 동생을 모시고 오라는 어머니의 말에 5학년 층 계단에 서있자니, 멀리서부터 그의 동생이 걸어오고 있었다. 옆에는 조그만 여자아이도 함께였다.

얌전하고 풀 죽어 보이면서도 어딘가 무기질적인 얼굴에, 좁고 무게감 없는 발걸음. 후타바와 손을 꼭 잡고 실내화 가방을 품에 안고 걸어오는.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 없는 존재라 여겼던 꼬마.

 

"아, 맞다. 치이, 전에 말했던 우리 형이야. 키즈쿠 잇사! 헤헤. 오늘은 집에 바로 들어가봐야 해서 데리러 온 것 같아."

"아, 친구?"

“응, 내 친구. 치이……가 아니지. 치에루라고 해, 형.”

“아. 그, 그러니까…… 토키시로 치에루입니다. 그, 후 쨩…… 후타바 군에게는 늘상 신세를 지고 있어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으니, 누군지 대충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말을 했다. 저쪽에서 인사를 하면 대충 그래, 잘 가라, 짧게 일축하고 동생을 데리고 돌아가려 했을 뿐이었는데.

 

제대로 마주 한 눈은 훨씬 기이했다. 마치 무언가를 억누르는 것 같은 이상한 눈동자.

제 검은 머리칼과는 달리 청천 아래 만개한 흰 벚꽃처럼 새하얀 머리카락. 짙고 붉은 제 눈동자와는 달리, 봄날 처음 피어난 최초의 어린 꽃 같은 연분홍색 눈동자. 아직 열 살이나 조금 넘은 주제에 어른인 척 차분한 척하는 눈을 하고 있던 그 애. 토키시로 치에루.

 

"……그래."

 

그 아이는 못 하는 것, 모르는 것 하나 없고 특별한 일도 없던 키즈쿠 잇사의 인생에, 처음으로 나타난 특이점이었다.

08_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에는 별 생각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동생의 교우관계에 간섭할 만큼 오지랖이 넓지도 않았고, 제 동생의 친구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몰랐으니까.

치에루를 처음 봤을 때 잇사는 그저, 후타바가 저런 취향이었나 라거나, 확실히 보기 드물게 예쁘게 생긴 얼굴이긴 했다거나 하는 감상 밖에는 들지 않았다. 동생의 친구라고는 해도 억지로 교우를 틀 마음도 없었고, 그렇다고 저쪽에서 먼저 다가올 것 같지도 않았으니. 자주 엮일 일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요는, 토키시로 치에루라는 존재가 제 삶에 별 영향을 끼칠 것 같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크나큰 착각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치에루를 처음 만나고 고작 1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치에루는 언제나 칭찬 받으며 자라왔다고 했다. 후타바는 그 애를 옆에서 보고 있으면, 제 작은 친구가 너무나 대단해 보인다고 했다. 천재라는 소리도 많이 듣는다 했고, 작은 일 하나하나까지 모두 노력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했다.

노력해서 겨우 성취를 얻어낼 수 있다면 그건 진짜 천재가 아니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그리 중요한 사안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애초에 그 애가 어떤 유형의 인간인지에 대해서도 별 관심 없었다. A부터 Z 중 어떤 타입에 해당하든, 서로가 서로에게 간섭하는 일은 없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잇사의 생각과 달리 그 조그만 꼬맹이는, 그에게서 무언가의 이끌림을 느꼈나보다. 자신을 좇는 커다란 눈동자에서 그가 처음 발견해낸 감정은 동경이었다.

자신만큼, 자신보다도 뛰어난 또래는 처음 본다는 듯한 그 눈. 생소한 호기심과 동경, 대단하다는 감상 따위를 담고 반짝이는 표정. 그를 좇고 좇아 결국 같은 선상에 서보이겠다는 경쟁심도 눈에 보였다. 숨길 생각도 없이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그 모든 감정들은 명백한 호감이었다. 친오빠도 아닌 그를 오빠, 오빠하고 부르며 졸졸 따라다니기도 하고, 제자로 사아달라느니 엉뚱한 소리를 해오기도 했다.

자신을 졸졸 따라오는 치에루에게 잇사는 때로 귀찮다고 말하고는 했으나, 그러면서도 절대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서툴어 실수하곤 할 때마다 혀를 차면서도 손을 내밀어 주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는 그냥, 그러고 싶었다. 마치 저 바보 같은 녀석이 진짜로 자신을 계속 좇아와 주었으면 한다는 양.

잇사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제 안의 감정과 무언가가 변해가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그래서 아닌 척 하면서도 치에루가 계속 제 뒤를 따라올 수 있게 유도했다.

하지만 그 귀여운 관계가 무너지기까지는 2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동경 다음에 보인 것은 질투와 열등감이었다. 그 부정적이고 음습한 감정을 보고서도 잇사는 그저 담담했다. 고개를 돌리지도 눈을 감지도 않았다. 담담하게 마주보았다.

그 애가 아무리 노력하고 노력해도 좁혀질 수 없는 격차라는 것을 잇사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제게 저런 감정을 품게 될지도 모른다고, 이미 예전부터 상정하고 있었다. 새삼스레 안타깝다거나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 리도 없었다.

그보다는, 사실 잇사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럼에도 치에루의 눈은 자신을 좇고 있었으니까.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시선의 기저에 깔린 것이 동경 같은 긍정적인 감정이든 시기와 질투, 열등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든. 정말로 아무래도 좋았다. 그야, 그야 토키시로 치에루가 그렇게 온갖 감정을 담아 바라보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었으니까. 오직 키즈쿠 잇사뿐이었으니까.

그래서 상관 없다 여겼다. 오롯이 저만을 향하는 특별한 것들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분명히 그 사실만으로도 기이한 만족감이 차오르는 때도 있었다.

 

하지만 곧 달라졌다. 모든 게 불만스러웠다.

 

좁혀질 수 없는 거리에, 사라지지 않는 `재능의 차이`에 어린 치에루는 절망했다. 지독한 무력감에 잠겨들었다. 그것을 알게 된 순간 잇사는 참을 수 없이 불편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 목구멍 안을 진득하게 채우던 만족감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불만 어린 감정만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잠식해오는 것을 느꼈다.

그랬다. 마치 그 애가 상처받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 것처럼.

치에루가 더 이상 제 이름을 부르지도 않고, 오빠라고 부르며 좇아다니지도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를 발견하기만 하면 눈치를 보면서도 자리를 피하고 싶어 머리를 굴려대는 그 모습이, 싫었다. 오로지 키즈쿠 잇사만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전했는데, 그 형태와 그것을 바라보며 느끼는 제 감정만이 바뀌었을 뿐이다.

더 이상 만족감은 없었다. 불만스러움과 씁쓸한 뒷맛뿐이었다. 잇사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 생각을 했다. 이 찝찝한 기분이 어떤 감정에서 기인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관심이나 적당한 다정함 따위에 그치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의 연장선상이면서도 아예 다른 냄새를 풍기는, 동떨어진 무거운 감정이었다.

그 애의 사고 대부분이 자신을 기준으로 돌아가는 것을 알고 느꼈던 기이한 만족감도, 더 이상 바보처럼 웃어 주지도 제 이름을 불러 주지도 않는 태도를 보고 있자면 느껴지는 불만과 불쾌함도. 그 애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기만 하면, 저도 모르게 계속 눈으로 좇게 되는 것도.

도망치는 그 애를 잡아다 데려오고 싶다거나. 단순히 동생의 친구, 친구의 형 같은 관계 말고. 그렇다고 친구나 남매도 말고. 그러니까, 아직은 어딘가 낯선, 유일한 이름으로 정의할 수밖에 없는 특수한 울림. 그 애가 저를 바라보는 것처럼, 스스로도 그 애를, 좀 더 소중하게 여기고 싶어지는, 기이하고 낯선 그 감정…….

어린 날의 잇사였음에도, 그 감정의 본질을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흔히들 어떤 이름으로 부르는지도 알 수 있었다. 낯설고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받아들이지 못 할 것도 아니었다.

혼자 생각에 잠기는 깊은 밤이 되면 이 낯선 감정에 대한 생각만 했다.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늘상 제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상념이 되었다. 이것의 이름을 알게 된 순간부터 잇사는 여러 생각을 했다. 가령, 그 애가 자신에게 품은 가장 커다란 감정도 이것임이 확실하다거나 하는 것을. 그것은 자만도 헛다리를 짚는 것도 아니었다. 흔들림 없는 확신이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치에루에 관한 일이니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잇사는 결국 이 얘기를 먼저 꺼내지 않기로 했다. 치에루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애는 분명 도망치고 말 것이다. 지금만 해도 그 애는 제 마음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 하면서 억누르려 애를 쓰고 있으니, 이름을 알려 줘봤자 세상에서 가장 두려움이 많은 겁쟁이처럼 외면하고 말 것이다. 차라리 그 애가 제 마음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잇사는 묘한 상념에 잠겼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노력과 긴 기다림의 시작이었다.

 

09_

 

어느덧 고등학생이 된 잇사에게는 변함없이 여전한 점이 있는가 하면, 이전에 비해 달라진 점들도 있었다. 선 밖의 사람들에게는 무심한 점이나 자신이 최우선이라 생각하는 점, 어느 정도 자라고 나서도 노력과는 여전히 무관하며 남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천재라는 점 등이 여전했다. 중학생 때 다짐했던 생애 첫 노력과 기다림도 여전히 이어지는 중이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주변 환경이었다. 고등학교에 들어와 시작한 경음부 활동은 날이 갈수록 인기와 주목을 모으고 있었다. CD를 내기도 하고, 학교 행사가 있으면 거의 고정으로 공연을 하기도 하고. 원래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던 잇사였지만, 밴드를 시작하고부터 더더욱 남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친구 보다는 거의 하인에 가까운 추종자와 팬들이 잇사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는 그것이 귀찮으면서도 기본적으로 남들이 저를 받들어 모시게 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기에, 굳이 쫓아내지 않고 대충 내버려두고 있었다.

하지만 달라진 점 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어떤 것이냐고 그에게 물어본다면, ……곧이곧대로 정직하게 대답해 줄 리는 없겠지만, 아무튼 그에 대한 답은 하나뿐일 것이었다. 자신을 피하고 외면하던 치에루와 함께 있는 시간이,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우연의 일치이기도 했고 누군가의 의도이기도 했다. 오며가며 복도에서 마주칠 때에는 피하지도 못 하게 먼저 말을 걸기도 했고, 교정 뒤편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괜히 정면에 서서 발걸음을 멈추기도 했다. 점심시간에 낮잠이라도 자려 올러간 옥상에 치에루가 올라올 때면 귀중한 단잠을 포기하기도 했고, 또 언제는 하굣길을 둘이 함께 하기도 했다.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그저 휩쓸려오는 치에루를 보는 재미도 있었다. 그 조그만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을 그리 해대는지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고작 한두 뼘 거리를 두고 노을 진 하천가를 나란히 걷다가, 윤슬을 바라보며 웃는 치에루의 얼굴을 봤을 때는 한동안 느끼지 못 했던 만족감이 명치까지 차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날들 역시 마냥 계속되진 않았다. 본인 의지와는 상관 없이 휩쓸리기만 하면서도 점점 순응해가던 치에루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지금까지보다 더 열심히 그를 피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잇사는 다시 하루하루를 불만과 함께 하게 되었다. 섵불리 행동했다가는 손에 쥐지도 못 하고 놓쳐버리는 얼간이가 될 테니, 차라리 그 답지 않아도 시간을 들여 확실하게 잡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기다림이었다. `이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안 될 리가 없다` 라는 생각도 어느 정도 했었다. 그야, 그야 치에루도 그를 좋아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저 꼬맹이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겁이 많은지, 끝도 모르고 계속해서 도망쳤다. 그게 짜증이 났다.

그래서 그 날, 잇사는 경음부 연습에도 가지 않고 옥상에 올라가 있었다. 문을 걸어잠그고 늘 차지하던 명당에 드러누워 색이 변해가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옅고 탁한 물빛에 레몬 같은 노란색이 섞여 번지고, 점점 짙어져가고. 불길처럼 붉은 주홍빛이 하늘을 완전히 뒤덮고 나서야 잇사는 신경질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식으로 상념에 잠기는 것도 답지 않은 것 같았다. 드디어 집에 갈 마음이 들었는지 빠른 속도로 옥상을 벗어났다.

 

이 시간에는 사람이 거의 없기야 하겠지만, 혹시 있을지 모를 조금의 소란스러움이라도 잇사는 피하고 싶어서, 뒷문으로 나갈 요량으로 학교 뒤편에 걸어들어갔다. 가방에 넣어 둔 휴대폰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지만 무시했다. 어디서 온 연락인지 안 봐도 뻔했으니, 그다지 받고 싶지 않았다.

잇사는 뒷머리를 대충 헝클다가 혀를 찼다. 시간대가 제법 운치 있는 배경을 자아내도 그런 게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검게 물든 철조망을 의미 없이 눈에 담다 고개를 앞으로 돌리니,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안 그래도 작은 키인데, 고개를 푹 숙이고 제 발끝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걸어오는 모습에 잇사는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키즈쿠 선배."

 

잇사를 발견한 그녀가 그를 입에 담았다.

토키시로 치에루. 언제나 그를 상념에 빠지게 하던 사람이 눈앞에 멈춰섰다. 이름이 아닌 거리감 느껴지는 호칭으로 저를 부르며. 곤란한 듯 한 눈을, 그 옅은 꽃분홍색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잇사는 그런 치에루를 말 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아니, 사실은 무언가를 불어보려고도 했다. 고민에 빠져 곤란해 하는 모습을 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많은 감정이 담겨 있는 그 눈을 보자, 전부 다 부질없게만 느껴져 관두기로 했다. 아무런 말도, 질문도 입에 담지 않았다.

온통 노을에 물들었는데도 그 연한 꽃분홍색 눈동자만은 여전했다. 갈팡질팡, 흔들리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그 애는, 치에루는 마치 잇사가 저를 책망하고 있다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으니 딱히 틀린 짐작도 아닐 텐데, 잇사는 그런 표정을 짓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네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지레 겁 먹고 피하려는 거냐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말 마저도 부담일 것 같았다.

 

그래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지도, 손을 내밀지도 않았다. 그러면 저쪽에서 먼저 입을 열든지, 그도 아니면 평소처럼 고개만 까딱이고 달아나든지 할 테니까.

 

"너……."

"……."

 

그가 했던 추측들이 모두 빗나갔다. 치에루의 큰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예고도 없고 예상도 하지 못 했던 일에 잇사는 드물게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분홍 꽃 같은 장미수정 같은 눈동자가 젖어든 모습은 지나치게 낯설었다.

토키시로 치에루는 키즈쿠 잇사 앞에서 단 한 번도 운 적이 없었다. 발을 헛디뎌 넘어지기만 해도 후타바 앞에서는 잘만 터지던 눈물이, 잇사 앞에서는 단 한 번도 터진 적 없었다. 우는 치에루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잇사는 여기서 또 무얼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저 애를 만나기 전까지 그에게 모르는 것이라곤 단 하나도 없었는데. 그런데 저 애만 연관되면 자꾸 예외가 생각났다. 잇사는 한숨을 억지로 삼켰다.

눈앞에 서있는 사람은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릴 뿐이었다. 울음소리를 억누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잇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치에루."

 

단, 한 마디였다. 고작 세 음절의 짧은 한마디였다. 그러나 그것이 기폭제라도 된 양 치에루는 크게 울음소리를 터트렸다.

치에루는 지금 당장이라도 그치고 싶다는 듯 손등으로 눈가를 거칠게 문지르고, 옷소매로 얼굴을 가리려 했다. 잇사는 모르는 척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서럽게 울어대는 모습을 보자 그는, 그녀를 알게 된 이후로 자주 느끼고는 했던 감정들에 말려들기 시작했다. 턱을 타고 떨어지는 눈물과 목구멍에서 터져나오는 통곡 소리에, 그가 눌러뒀던 감정들이 몸을 일으켜 거칠게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지형을 뒤틀고 고목의 뿌리를 뽑아 쓰러트릴 정도로 요란한 지진 같은 어떠한 애정이. 그 어떤 짙고 여유로운 구름이라 한들 먼지처럼 흩뜨려 버릴 거센 강풍 같은 동정심이.

또 작고 깊고 고요했던 바다를 파도치게 하는, 그 파도가 하늘 끝에 닿을 것만 같은. 그런 거센 파도와도 같은…… 단 하나뿐인 이름을 가진, 그 무엇보다도 크고 거센, 지독하게 낯설고 어이없을 정도로 소중한 그 감정이.

그 모든 것이 잇사를 쥐고 흔들었다. 히끅거리는 호흡과 정확하게 엇박으로 물결치며 그를 휩쓸었다. 그 격한 감정들을, 무엇 하나 무시할 수 없어 잇사는 비어있는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 멎을 줄 모르는 울음소리와, 밭은 호흡 탓에 들썩이는 어깨에. 그 속에 감춰둔 온갖 마음들에, 잇사는 오래도록 주먹을 쥐고 있었다.

 

10_

 

세상 모든 것이 생각대로만 흘러갈 리가 있겠는가. 이름 난 예언가의 말이 틀릴 때도 있고, 과학으로 예측한 현상이 빗나갈 때도 있는 법이다. 하물며 일개 학생에 불과한 이가 단순한 감으로 예상한 것이 항상 맞기만 할 리는 없는 일이다. 무엇이든 전부 다 예상한 대로만 흘러가라는 법은 없었다. 그것은 키즈쿠 잇사에게도, 토키시로 치에루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민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키즈쿠 선배.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감사, 했습니다.”

“……딱히. 또 있어도 상관 없는데.”

 

치에루가 잇사 앞에서 요란하게 눈물을 터트렸던 날. 비록 눈물을 그친 후 잠긴 목소리로 인사를 내뱉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난 치에루가 있었지만, 그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보기만 하다가 천천히 같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 잇사가 있었지만. 그래도 그 날 이후로는 무언가 달라질 거라 여겼다. 잇사는 물론이고, 치에루마저도 그랬다. 그만큼이나 커다란 사건이었다. 잇사는 이제부턴 정말로 뭔가 바뀔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낙관적인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낙관적인 게 아니라 안일한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치에루는 지금까지보다 더 철저하게 잇사를 피해다녔다.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여전히도 제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주로 이러한 문제 때문에, 고등학교 3학년생이 된 잇사는 잔뜩 피곤해져 있었다. 이것 외에는 그를 크게 괴롭힐 만한 문제도 없었다. 센터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잘만 다니던 경음부 활동을 그만 두질 않나, 딱히 뭔가 하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잇사의 동생인 후타바는 그런 제 형이 조금 걱정되기 시작했다.

 

"형, 진짜로 무슨 일 있어? 요즘 평소보다 훨씬 더 신경질적이잖아."

"……신경 꺼."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못 하고 교복을 입은 채로 침대에 반쯤 누워있자니, 후타바가 잔뜩 걱정된다는 얼굴로 잇사 주변을 기웃거렸다.

……다정한 낯에 팔자로 늘어진 눈썹을 보자니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잇사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눈앞에 서있는 동생의 모습은 지워지고, 항상 생각하는 녀석의 얼굴이 떠올랐다. 새하얀 벚꽃 같은 머리칼. 그 사이로 그를 올려다보던, 장미수정 같은 꽃분홍색 눈동자가 있었다.

치에루. 토키시로 치에루.

시선으로도 발길로도, 품을 벌리고 쭉 뻗어오는 손길로도. 언제나 그를 쫓아다녔던 녀석. 그 조그만 녀석. 옛날에는, 그런 모습이 언제까지고 변함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계속 그를 향해 다가오기만 할 것이라고, 손을 내밀어 올 것이라고. 오래 전 잇사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맞다, 형. 그거 알아? 치이, 연습생 준비하기로 했대."

"뭐?"

"왜, 뭐더라. 츠키노…… 무슨 프로덕션."

 

앞으로 많이 바빠질지도 모른대.

분위기를 전환하려 그의 동생이 무심코 던진 말에, 잇사는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치에루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또 도망치려 하는구나. 멀리 가려고 하는구나. 내 옆에 있는 것도, 몇 발자국 떨어져 바라보기만 하는 것도 불편하다고, 차라리 아예 가버리려 하는 것이구나. 나와 아주 떨어져서 멀리멀리 가려고. 더 이상 뒤를 좇기 싫다는 듯이. 나만이 아주 먼 곳에서 너를 볼 수 있고, 너는 아예 내가 손에 잡히지 않을 곳까지 가고 싶어 하는구나.

어이없는 한숨과 함께 많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잇사를 덮쳤다.

 

그 후로 잇사와 치에루가 교류하는 일은 아예 없어지듯 했다.

치에루는 한창 바쁘게 살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잇사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치에루는 데뷔를 했다. 대학에는 진학하지 않고 연예계 활동에 전념하기로 했다던가.

 

TV나 잡지속 치에루는 언제나 웃고 있었다. 즐겁다는 듯 웃고 있었다. 후타바는 치에루가 잘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했다. 웃으면서 그녀에게 안부 전화를 했다.

……치에루는 잇사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잇사는 밤이 되면 언제나 그랬듯이 상념에 휩싸였다. 온통 치에루에 대한 생각이었다.

화면 너머로 웃고 있는 치에루를 볼 때면 잇사는 머릿속이 복잡해져갔다. 눈앞에 있는 치에루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불 보듯 훤했는데, 화면 너머의 그녀는 모르겠다. 머릿속에서 무슨 궁리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잘 그려진 그림 같았다. 낯설었다.

잇사는 그게 싫었다. 정말로 싫었다…….

 

"바즈록(VAZZROCK) 프로젝트?"

 

츠키노 프로덕션과 이런저런 얘기가 오가던 중 들은 말이었다. 새로운 아이돌 유닛 프로젝트에 참가해 볼 의사는 없냐고.

언젠가 치에루가 먼저 캐스팅 된 어떤 엔터테인먼트에서 잇사에게도 계약의 제의가 온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처음 받아보는 캐스팅 제의도 아니었고, 잇사가 활동했던 경음부의 CD와 노래는 지금도 어디선가 알음알음 돌고 있는 중이었을 테지만.

잇사는 사실, 츠키노 프로덕션과 계약 얘기가 오가기 시작했을 때, 치에루를 생각했었다.

 

"……."

"형, 형."

"왜."

"형은 치이를 좋아하잖아?"

"……뭐?"

 

치에루를, 생각했었다.

몇 번째인가 반복된 회의를 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어김없이 그녀를 생각하고 있을 때에, 후타바가 돌연 그런 말을 꺼냈다. 왼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잇사는 갑작스럽고 생각보다 날카로운 그 말에 그만 삐끗해버렸다. 자세를 대충 갈무리하고, 황당하다는 눈으로 후타바를 쳐다보자 후타바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치이도 형 엄청 좋아하는 걸.

음, 그리고 나도 치이를 많이 좋아하고. 그래서 고민거리가 있어 보이면 힘이 되어 주고 싶어. ……나한테는 의지를 잘 안 해 주지만."

"그런 의미였냐고……."

"응?"

 

그럼 그렇지.

잇사는 침대에 반쯤 드러누웠다. 시선이 천장을 향하자 지나치게 밝은 형광등이 눈에 거슬렸다. 그는 왼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어떻게 된 게 주변이 다 이 모양인지. 어쩌면 하나 같이 이렇게나 눈치가 더럽게도 없는지. 잇사는 답답한 마음에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휴대폰을 톡톡 건드리던 후타바가 고개를 들어올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치이한테 먼저 연락이라도 해 달라는 말이야. 이제 곧 다시 자주 보게 될지도 모르는데…… 치이가 딱히 후배 아티스트로 누가 들어오는지 하나하나 파악하고 있지는 않을 거 아냐. 갑자기 형을 마주치면 분명 놀랄 걸.

……게다가 무슨 일만 있으면 나한테 치이 어쩌고 있냐고 물어봤잖아."

"……시끄러워."

"윽. 베개를 던지면 어떡해, 형."

 

손에 잡히는 베개를 던지자, 그것을 얼굴에 맞은 후타바가 볼멘소리를 냈다. 귀찮은 잔소리를 쏟아낼 것 같은 기세에 잇사는 후타바의 방을 벗어나 제 방으로 돌아갔다. 불도 켜지 않은 채 본인의 침대에 눕자니, 미묘하게 어둑한 천장이 보였다. 그러나 잇사는 그에 만족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조용하고 어두운 곳에 혼자 있자니, 어김없이 치에루의 얼굴이 떠올랐다. 분명 놀랄 걸, 하던 동생의 말을 곱씹었다. 화들짝 놀라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는 치에루를 상상하자니 피식 웃음이 새어나오고, 비어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주먹을 쥐어도 손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치에루는 저에 대한 소식을 알고 있을까.

잇사는, 적어도 잇사는 그녀를 잊어본 적이 없었다. 받지 않는 연락을 하는 것을 관두었을 때도 그랬다. 그래서 이따금 후타바에게 그녀에 대한 소식을 물었다. 밤이 되면 그 얼굴을 떠올리다가 늦은 시간에 잠이 들 때도 있었다. 아마 치에루도 저와 같을 것이라고 잇사는 생각했다.

이제 곧, 다시 만난다. 자주 만날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오랜만에 속이 울렁거렸다.

온갖 감정이 다시금 제 몸을 비집고 들어오는 기분에 잇사는 숨을 길게 토해냈다. 그리고 몇 년 전 그 날처럼 한 가지 다짐을 했다. 그 때는 마냥 기다리기만 했고, 그래봤자 그 겁쟁이는 눈을 뜰 생각을 못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 가만히 있어서는 될 것도 안 되고, 잇사는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다.

그러니까, 다시 부딪치게 된다면…….

 

데뷔와 프로젝트 참가가 확정나고, 몇 번의 미팅을 또 거쳤다. 그리고 잇사와 후타바는 프로덕션에서 마련한 기숙사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기숙사 맨션 바로 앞까지 도착해 이삿짐을 잔뜩 실은 화물차 앞에 서있자니, 건물 바로 앞에 아주 오랜만에 보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어쩐지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 학생 때보다 더 마른 몸. 웃는 얼굴로 후타바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를 발견하자마자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안녕하세요. 키즈쿠 선, 배."

 

여전하네. 어색하게 굴리는 눈동자와 여전히 딱딱한 호칭에 잇사는 그런 생각을 했다.

하긴, 변했을 리가 없지. 그동안 그가 치에루를 봐온 시간들은 허송세월이 아니었다. 그렇게나 오래도록 그녀를 바라보고 집중해 왔는데. 마음을 손바닥 뒤집듯 바꿀 수 있는 사람인지, 의지박약인지 아닌지 같은 것들을 모를 수가 없었다.

 

토키시로 치에루는 여전하다. 여전히 키즈쿠 잇사를.

 

“그래, 오랜만이네.

뭐, 이제부터 제법 자주 보고 살 테니까. 부-디, 잘 부탁해?”

 

잇사는 기꺼운 마음으로 웃었다.

치에루도 잇사도 똑같았다.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서로를 잊기는커녕, 오히려 열망 비슷한 감정을 키워오기만 했다. 그러니 이번에는 실패할 일 없게 제대로 할 것이다. 저쪽에서 거리를 벌리려 한다면 그보다 더 큰 보폭으로 다가가리라. 고민하고 번뇌하다가, 묵은 감정의 정체를 알고 먼저 터트려올 때까지, 끊임 없이 건드릴 것이다.

이번에는 확실하다. 실패할 리 없다. 호흡마저 가쁘게 하는 이 격정에서, 잇사는 치에루를 두 번 다시 도망치게 두지 않을 것이다.

잇사는 오랜만에 만족감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11_

 

두 시간이 넘도록 잠들지 못하고 있던 잇사는 침대에 누이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툭 소리도 내지 않고 떨어졌다. 이제는 슬슬 두통이 날 것 같아 잇사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헤집었다.

새벽 세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두꺼운 커튼을 꼼꼼하데 여며 닫아놓은 잇사의 방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아 사위가 칠흑 같이 어두웠다. 하지만 침대에서 완전히 내려온 그는 개의치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 커튼을 열어젖혔다. 세간이 적은 방 안에 그의 발에 채여가며 길을 막을 만한 사물은 없었다.

잇사는 아예 창문까지 열었다. 순식간에 서늘한 바람이 들어찼음에도 그는 개의치 않고 등을 돌렸다. 도쿄가 다 그렇듯이 별은 거의 보이지 않았으나, 하얗고 약한 달빛과 색색의 도심 빛들이 방에 조금씩 들어찼다. 눈을 몇 번 깜빡인 잇사는 방 문을 열고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까지 간 잇사는 사실은 하고 싶은 생각도 없던 하품을 내뱉고 물병과 투명한 컵을 손에 쥐었다. 컵에 물을 따라 한 잔을 비우고 나서야 잇사는 인상을 찌푸렸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 기분이 좋을 리가 있겠냐만은, 그 중에서도 특히 불쾌하고 복잡한 밤이 있게 마련이었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그는 분명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꽤 담담했다. 사실은 평소부터 초조함 따위와는 거리가 먼 성격이었다. 그에게 닥친 문제들은 대부분 그런 답답한 감정을 느끼기 이전에 해결되는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멀쩡한 손으로 컵에 물을 채워넣는 것처럼 간단히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딱 하나 복잡한 것이 있었다. 바닥에 쏟은 설탕을 한 알갱이도 남김없이 전부 다시 쓸어담는다거나, 모래밭에서 눈곱만한 노란 원석을 찾아내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게 꼬여있는 것.

 

손에 꽉 쥐고 있던 물컵을 내려놓은 잇사는 고개를 들어 인덕션 옆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시나몬 파우더가 반쯤 채워져 있는 유리병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생각나는 이름을 입밖으로 내뱉었다.

 

"토키시로 치에루……."

 

모든 복잡함과 답답함의 원인. 딱 하나의 근원.

그래. 그 녀석만은, 저 시나몬 파우더의 주인만은, 그 건방지고 안쓰러운 꼬맹이만큼은 잇사가 손 한 번 휘젓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다.

언제까지고 그를 동경하며 쫓아다닐 거라 생각했던 어린아이는 순식간에 부정적인 온갖 감정에 발목을 잡혀 그를 피해다니기 시작했으니까. 끝내는 아예 먼 곳까지 가버리려 하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츠키노 프로덕션에 막 들어와 치에루를 다시 만났을 때 잇사는, 자신이 그녀를 쫓아온 것만 같은 말도 안 되는 기분까지 들었었다. 딱히 그녀를 목적으로 두고 들어온 소속사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물론, 이번에야말로 제 뜻대로 되게 하겠다고 답지 않은 다짐 따위를 하기야 했지만…….

 

어째서인지 기분이 급격하게 나빠진 잇사는 와락 얼굴을 구겼다. 물을 마신 컵을 제대로 정리해두지도 않고, 신경질적인 발걸음으로 방에 돌아갔다.

아까 창문을 열어놓은 탓에 차가울 대로 차가워진 공기에 혀를 차며 창문을 닫았지만 그런다고 바로 기온이 올라갈 리가 없었다. 방 안은 여전히 추웠고, 히터가 돌아가고는 있지만 따뜻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제 탓인데도 잇사는 점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짜증난다는 등의 말을 입안으로 웅얼거리며 그는 침대에 올라가 머리 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이불마저 차가웠다. 시계 돌아가는 소리 대신 히터가 가동되는 소리가 들렸다.

 

됐다, 아무래도 상관 없고 아무것도 필요 없다. 그냥 자자. 오늘은 쉬는 날이니까 해가 중천을 넘어갈 때까지 그냥 자버리자. 멍청한 나오스케 녀석이 찾아와도 절대 반응하지 말고, 후타바가 찾아와도……. 문을 열어 주지 않으면 그냥 알아서 돌아가겠지.

잇사는 눈두덩이가 뻐근해질 정도로 세게 눈을 감았다.

 

……그 날, 잇사는 꿈을 꿨다. 언제나 그를 골몰하게 만들던 사람이 나오는 꿈이었다.

그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잇사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 따위는 없었지만, 그녀가 그에게로 건너올 리가 없었다. 잇사도 일부러 발을 떼지 않았다. 어쩌면 일부러였다. 어쩌면 심술이었다. 연분홍색 눈동자와 마주하자마자 꿈이란 것을 눈치챘음에도 그랬다.

남들보다 깜빡이는 횟수가 현저히 많은, 불안해하는 것 같은, 색이 옅은 저 분홍색 눈동자. 언제나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눈을, 저 혼자서만.

 

"……그래, 늘 혼자서만."

 

여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잇사는 아예 억울해졌다. 늘 그랬다. 저 애는 늘 혼자만이 고민하는 줄 알고 괴로워하는 줄 알았다.

일견 다정하고 누군가에게는 헌신적인 듯 보이다가도 그녀는, 결국 스스로가 제일 중요한 사람이었다. 이기적이라기보다는 그게 최선이었으니까. 쓸데없이 생각이 많아 항상 많은 일에 골머리를 앓고 있기 때문에, 정작 감정을 헤아리는 것은 자신만의 것으로도 벅차했다. 딱히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참으로 건방지고 안쓰럽고, 또.

잇사는 지금 여기서도, 꿈에서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는 스스로 명확하게 알고 있었으나, 여전히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그리고, 미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그는 제 발치를 내려다봤다. 아무런 구속도 없는 멀쩡한 발, 아무런 장애물도 없는 평탄한 땅이 있었다. 여기서 발을 떼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가 한 발짝 다가가면 그만큼 멀어지는 것이 토키시로 치에루였기에, 막상 그는 그 쉬운 것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랬는데.

 

`분명 그런데 왜, 오늘은 이상하게…….`

 

먼저 한 발 내딛으면 그녀도 한 발 다가와 줄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예감이 드는지. 혹시 꿈은 꿈이라고 제 어이없는 바람이 섞여들기라도 한 걸까.

잇사는 헛웃음을 토해내며 눈을 감았다.

 

"……아……."

 

가벼운 눈꺼풀을 들어올렸을 때, 잇사는 더이상 꿈속의 장소가 아닌 널따란 기숙사 침대 위에 있었다. 익숙한 천장과 익숙한 시트의 감촉이 보이고 느껴졌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기지개를 시원하게 켤 힘도 들어가지 않아, 그가 하는 것이라곤 겨우 몸을 일으키고 눈을 깜빡이는 게 다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불쾌감이나 짜증스러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분명 체질 탓에 불쾌하지 않은 아침 따위, 맞이해본 적 없는데도 그랬다. 왠지 낯선 아침이었다.

 

12_

 

겨울이 깊어지고 달력이 바뀌었다.

온 나라가 성대하게 난리를 치면서도 여전히 공휴일조차 되지 못한 연말 최대 이벤트인 크리스마스나, 한 해를 떠나보낼 준비를 하는 귀찮고 번거로운 대청소도. 또 다른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후타바와 바보들의 주접 같은 것들도, 마트에서 대충 사려고 했던 새해 음식들도. 아직 다 읽어보지 않은 연하장도. 해가 바뀌는 것을 체감하게 해 주는 것들이 이미 지난 일이 된 지는 열흘이 더 넘은 상태였다.

그러나 여전히 한겨울이라,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여전히 추위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아침부터는 웬일로 눈까지 펑펑 내리고 있었다. 눈은 후둑후둑 내리치는 비와는 달라서, 아무리 많이 쏟아져도 소음 하나 내지 않았다. 그래놓고는 저 혼자 조용한 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주변의 이런저런 소리마저 야금야금 잡아먹고는 했다. 그 덕에 아주 고요한 날이었다.

시끄러운 것과 소란스러운 것을 싫어하는 잇사이니 그 고요함이 마음에 들 법도 한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몹시 답답하게 느껴졌다. 제 방 초인종을 누른 사람이 아무도 없어 정오 느즈막히 일어난 이후로 잇사는, 내내 뚱한 얼굴이었다. 심드렁하게 창밖을 보던 그는 눈이 완전히 그치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잇사는 실내에서 입고 있던 홈웨어 위에 손에 잡히는 외투를 대충 걸치고, 아무런 신발이나 꿰어신고서 방을 나섰다. 발이 폭 잠길 정도로 쌓인 눈 같은 것에 천진하게 설렜던 기억 같은 건 남아있지 않으나, 새하얀 눈밭을 보자니 왠지 그것을 밟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맨션 건물의 정문까지 나온 그의 눈에 보인 것은 완전무결하고 깨끗한 눈밭이 아니었다. 정문에서 몇 걸음 앞으로, 그리고 부지 외곽을 따라 왼쪽으로 돌아가듯 그려진 작은 발자국이 좁은 간격으로 나있었다.

잇사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 옆에 제 발자국 몇 개를 나란히 찍었다. 그러고는 오른쪽으로 몸을 돌렸다. 뽀득뽀득, 눈이 밟히는 소리에는 별 흥미가 일지 않았다. 다만, 자신과는 반대편으로 갔을 발자국의 주인은 조금 신경 쓰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희뿌옇고 무거워 보이는 구름이 잔뜩 깔린 하늘. 햇빛 하나 통과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이른 저녁 무렵이 되자 구름 위로 노을이 들어찬 듯 사위가 묘하게 붉은 빛을 띄며 어두워져갔다.

여전히 고개를 들어올린 채 입김을 토해내며 치에루는 천천히 나아갔다. 제 발소리와 숨소리 외에는 별 다른 소음 하나 들리지 않았다. 건물을 나와 걷던 잇사는 어느 샌가 맨션 뒤편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 흐린 날씨 탓에 뚜렷한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곳은 맨션 앞쪽보다 어두웠다. 그리고 붉었다.

그리고 제 것이 아닌 불규칙적인 발소리가 귀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있었다.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조금 더 다가가 보았다.

 

그 풍경. 어둡고 붉은 하늘과 찬 공기. 그리고 눈을 감고 서있는 모습. 모든 것에 녹아드는 것 같은 그 모습…….

 

"키즈쿠 선배."

 

그래. 목소리가 들렸다. 그를 부르는 작은 목소리가. 봄을 닮은 듯 하면서도 겨울에 알맞게 녹아드는 작은 인영이 저를 부른 것이었다. 눈앞에 서있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그를 골몰하게 만들고, 답지 않은 행동을 하게 만들던, 그 사람이 말이다.

치에루가 그를 부르며 눈을 뜨자 비로소 서로의 시선이 맞았다. 잇사는 외투 주머니 속에 꽂아넣어놓은 손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어두운 그림자가 진 탓에 눈에 비친 옅은 반사광을 제외하고는 치에루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잇사는 역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대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머릿속으로는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으며, 가디건 자락을 꽉 쥔 그 손에는 힘이 얼마나 들어가있는지 등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온 사람이 없어 조용한 맨션 부지, 건물 뒤편. 구름에 막혀 보이지 않는 붉은 노을과, 그곳에 서서 아무 말 없이 저를 응시하고 있는 눈앞의 사람이. 토키시로 치에루가.

 

"저, ……죄송하지만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도망치려고 한다.

그의 앞에서 사라지려고 한다. 언제나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달아나려고 한다. 그를 외면하고서. 보지 못한 척하고서.

잇사는 고개를 숙인 채 저를 지나치기 위해 조급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머리카락에 가려진 그 아래 얼굴까지도 눈에 보이는 듯 했다. 다가오던 치에루가 그의 옆을 막 스쳐지났을 때쯤이었다.

 

"……늘 도망치지."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분한 어투가 그의 입밖으로 튀어나갔다. 왠지 말을 걸고 싶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이미 잇사는 자신을 지나쳐간 그녀를 향해 몸을 돌린 후였고, 치에루 역시 그를 돌아보았다.

다시금 마주한 두 낯이었으나 어두워지고 무거워진 그림자 때문에 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잇사는 치에루의 표정은 물론이고, 스스로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야 모를 리가 없었다. 잇사가 치에루에 대한 것을 모를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조용히 있었다. 충동적으로 말을 건네기는 했으나, 모든 것이 좋아지기 위해 먼저 발을 떼야 할 것은 그가 아니었다.

 

"그러면 달리 뭘 어떡해야 하나요?"

 

짧은 반박이 돌아왔다. 그럼 뭘 어떡해야 하냐고, 도망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느냐고 치에루는 묻고 있었다. 잇사는 대답 없이 눈을 깜빡였다. 그 순간, 부지 내의 모든 가로등이 일제히 불을 밝혔다.

연분홍빛 눈동자가 제대로 시야에 박히자, 확실해졌다. 방금 그것은 질문임과 동시에 온전한 질문이 아니었다. 충동적이었던 그의 말과 비슷하게, 울컥하는 마음에 돌아온 반박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다시 도망치든, 억지로 수습하든 할 것이다. 잇사는 그리 생각했다.

 

“그럼 제가 뭘 달리, 어떡해야 해요? 도망치는 것 말고 대체 무슨 선택지가 있다고. 어릴 때처럼 막, 멍청하게 웃으면서 쫓아다닐까요? 그러면 뭐가 달라지나요?

아니잖아요. 어차피 늘 똑같잖아요. 변하는 게 하나도 없잖아. 나는, 난 어떻게 해도 선배를 볼 때마다 그냥…… 너무 힘든데. 선배가 생각날 때마다 힘들고 괴로워서 울고 싶은 걸요. 늘 그랬잖아요, 늘. 선배가 나를 괴롭혔잖아. 맞아, 오직 선배만이 나를 계속 힘들게 했잖아요. 선배만이…….

분명 누구도 날 흔들지 못했는데. 당신이, 당신만이 나를 괴롭히고, 내 뜻대로 되지도 않고. 내가 아무리 쫓아가고 노력해도 나를, 나를…… 단 한 번도 뒤돌아봐 준 적 없으면서. 그런데 왜.

내가 뭘, 원하는지 다 알고 있으면서, 대체 왜 선배는………….”

 

잇사의 생각은 대체로 들어맞았지만, 가끔은 틀릴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건 대부분 치에루에 대한 것이었다.

고등학생 때와는 달리 꿋꿋하게 눈물을 참아내는 낯이 환한 가로등 빛에 그대로 시야에 들어찼다. 그 커다란 눈에 보이는 많은 것들. 자괴감, 수치심, 패배감, 그리고 미약한 원망과, ……가장 중요한 그 감정. 그가 계속 기다리고 있는 그 감정.

잇사의 눈 앞에서 치에루는 제 얼굴을 작은 손에 묻었다.

 

그녀가 외면하지도, 도망가지도 않았다.

잇사는 뒤늦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곧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러기 위해 힘을 썼다.

 

"그러는 넌. 정작 너는 네가 뭘 원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고 있나?"

 

담담한, 것 같으면서도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 한 목소리. 짧은 반문이었다.

잇사는 평소와 다름 없는 듯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는 낯 아래로 이를 꽉 물었다. 치에루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잇사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앙 다문 입에 힘을 뺄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바닥이 보이는 투명한 물 같던 그 눈동자가, 마치 종이를 깐 듯이 돌연 불투명해져서. 무언가가, 보여야 할 무언가가 보이지 않아서…….

……하지만, 대답이 없는 그 모습은 역시, 아직도.

 

"……아니, 됐다. 이 얘기는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다시……."

"바보 취급하지 마세요."

 

그래. 오늘도 글렀다. 그리 생각한 잇사가 고개를 돌리려 할 때였다.

그의 말을 끊어먹고 발걸음을 붙든 치에루는, 짧은 거리를 한달음에 달려와 좁혔다. 잇사의 코 앞에 서서, 그의 옷자락을 세게 붙들었다. 그리고 정면으로 그의 눈을 바라봤다. 잇사는 일순 숨을 멈추었다.

오늘은. 너는 오늘, 어쩌면.

 

“정말 너무 싫었어요. 선배가 너무 싫었어.

내가 그렇게 존경하고 동경하고, 좋아한다고, 한결 같이 뒤를 따랐는데도 단 한 번도 이길 수가 없어서. 선배를 앞지르기는커녕, 그 옆에 나란히 설 수조차 없어서. 뒷모습만 계속 바라보고 있어야 해서. 그게 너무 싫었어요. 나는, 원래 나는 뭐든 다 잘했는데. 그 누구보다 잘했는데. 내가…… 앞서나가 뒤돌아보는 입장이 되지 못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그런데 선배만은 겨우 좇아가는 게 고작이어서.

그래서 선배만 보면 계속 화가 났어요. 너무 싫었어요. 선배가 내 모든 걸 잡아먹고 뒤엎어 버리는 것 같아서, 나는…… 정말로 싫었어요. 질투가 나고 열등감 같은 추한 감정이 내 발끝부터 씹어먹게 만드는 게 너무 끔찍했는걸요. 나를 그렇게 만드는 존재가, 선배가 너무 미웠다고요.

…… 그런데, 그러면서도 내가 선배를……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커서. 정말, 정말 너무 많이 좋아해서, 그것 때문에 나 자신도 싫었어. 그러면 안 됐는데, 누구 하나 좋게 대해 줄 수가 없었어요. 선배한테도, 나한테도. 솔직하게 좋아한다고 말해 줄 수가 없었어요.”

 

……그래. 나는 알고 있지. 지금 네가 말로써 전해 주기 훨씬 전부터, 나는 전부 알고 있었어. 너에 대한 건 내가 모르는 게 없지. 당당하게 자신할 수 있을 만큼.

여름을 아주 지독하게 싫어한다는 것도. 천둥번개가 치는 날에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안전한 창문 너머로 내리치는 번개를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도. 나와 비슷하게 아침을 몹시도 힘들어한다는 것도. 시나몬과 초콜릿, 커피 같은 것을 좋아하다 못 해 거의 중독 수준으로 달고 사는 것도. 다른 때에는 펜이나 샤프를 잘만 쓰면서도 오선보에 음표를 그려넣을 때만 굳이 연필을 고집하는 것도.

네가 날 볼 때면 어떤 감정을 느끼고, 그리고 매 순간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그런 모든 것을.

 

그리고 결국 우리 둘 모두에게, 모든 것이 좋아지기 위해서는 내가, 노력하고 내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노력이라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내가 처음이자 유일하게 공을 들여야 했던 것이 바로 너라는 것도. 너의 그 형체 없고 불확실한 감정을 온전히 손에 넣기 위해서였다는 것도.

우습게도, 내가 그만큼이나 너를…….

 

“하지만 나는, 선배가 좋은 걸요. 아주 많이 좋아하는 걸요.

내가 선배를, 정말 많이 좋아한다는 걸. 아주 오래 전부터 계속 좋아해왔다는 걸, 나는 분명히………….”

 

…………키즈쿠 잇사는 전부 다 알 수 있었다고.

 

온갖 상념이 머릿속을 헤집고 간 잇사 앞에, 말을 애매하게 끝마친 치에루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느 누구 하나 제 얼굴을 볼 수 없는 그 시간의 하늘 아래, 잇사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뭐 하는 얼굴인지 차마 형용해 줄 수 없는, 정의하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기쁜 듯 하면서도 어이없는 것 같기도 하고, 놀라운 듯 하면서도 예상한 범위 내라는 듯 하기도 하고, 어쩌면…… 답지도 않게 못 믿겠다는 듯한 감정이 섞여있는 것도 같은, 그런 얼굴이었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손끝으로 많은 것을 움직이고 긴 시간을 기다려왔음에도, 믿기지 않는다는 우스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치에루의 어깨가 얕게 들썩이는 것이 눈에 보였다. 아, 결국 우는구나. 잇사는 그 순간 다시 현실감각을 되찾았다. 결국 이렇다. 무엇 하나 낯설 것 없는, 10년이 넘도록 변함 없는 그 어린아이가 눈앞에 서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준비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되었을 것이다.

 

필사적으로 울음소리를 억누르는 치에루 덕에 흐트러짐 없던 고요한 정적 속에서, 잇사의 한숨소리가 공기 중에 흩어졌다. 그리고 그는 손을 뻗었다. 그 손은 앞에서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후배의 등이 아닌, 눈가를 향했다. 엄지손가락으로 몇 번이고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이제는 두 사람 모두에게 그럴 자격과 명분이 있었다.

눈물을 닦아 주는 손길에 놀랐는지 고개를 훽 치켜든 치에루는, 닦아 준 것이 무색하게도 계속해서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둑을 무너트리기 전까지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펑펑 쏟아대기만 하는 꼬락서니가 아주 여전하다고, 잇사는 생각했다.

 

그래도 너는 모르겠지.

아주 오래 전부터, 네가 차마 눈치채지 못 했을 때부터.

 

"그 때부터, 내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전혀 모르겠지, 너는."

"네……?"

 

나직하게 떨어진 잇사의 말에 치에루가 멍청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저 눈물을 쏟아내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있었는지. 감히 제 말을 흘려듣고는 무식하게 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르는 후배의 손을, 잇사가 잡아 제 손으로 감쌌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애쓰는 게 뭔지 겪어본 적 없어. 노력도 잘 모르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도 성미에 영 맞지 않고. 나는 내가 제일 중요하니까.”

“그건…… 그야.”

“그런 나를 골몰하게 만들고, 그렇게 오랫동안 시간 들이게 만들고서는 말이야. 그런데, 뭐? 뒤돌아봐 주지 않는다고? 참나, 괘씸하기 짝이 없어서…….”

 

잇사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어이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해명까지 하게 된 꼴이 정말이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잇사가 가볍게 웃으며, 비어있는 손으로 치에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나를 피하고 경계하기 시작했던 그 날보다 훨씬 이전부터, 내가 무슨 생각을 해왓는지 너는 모르겠지. 지금 이런 상황을 만들기 위해, 네가 도망치지 않고 모든 것을 터트리고 토해내게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써왔는지도. 분명 기다리는 것도 누군가를 손수 인도해 주는 것도 내 취미는 아니었는데…….

 

잇사가 눈을 가늘게 뜨자 치에루는 무엇인가 깨달은 듯, 제 머리를 쓰다듬는 잇사의 손을 잡아챘다.

 

"그럼 왜 먼저 말해 주지 않았어요?"

 

왜 나를 좋아한다고 먼저 말해 주지 않은 거예요?

아예 억울하게도 들리는 그 질문에, 잇사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일견 비웃는 것 같은 웃음이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 자리에 있는 두 사람은 알았다.

 

"그랬다면 네가 받아들이지 못했을 테니까."

 

준비되지 않은 너라면.

그러면 분명 철저하게 도망가버렸을 테니까. 그렇게 되면 분명 더 힘들고 어려워졌을 테니까. 시간이 더 지난 후에는 우리 둘 다 짜증섞인 후회에 밤잠을 설치고 말았을 테니까. 길을 빙 돌아가다 못해 어느 한 쪽이, 정확히는 네가 완전히 지쳐버려 결국 모든 것을, 놓아버릴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그러면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될 테니까.

사실은, 사실. 잃을 것이 많은 건 오히려 내쪽이었을지도 모르니까…….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였다. 모든 것이 소리를 잡아먹는 날. 고요한 눈조차도 그 작은 소리는 훔쳐내지 못했다.

치에루가 울상을 지었고, 잇사는 눈가를 찡그리며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눌러 제 품 안에 끌어당기고는, 가늘게 뜬 눈을 깜빡였다.

아주 많은 것이 스쳐지나갔다. 가벼운 짜증스러움과 성가심, 동정, 질 나쁜 감정들. 호기심, 호감, 작은 미안함과 애정. 그리고 지금까지 그 이름을 차마 말로 할 수도 없었던 가장 비대한 감정.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그의 낯을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 눈에 깔려있는 것은 그 답지 않게 아주 단내가 나는 기쁨. 어쩐지 생소한 것도 같은 감정. 잇사는 치에루의 머리를 가볍게 누르고, 토닥였다.

 

아. 울렁이고 흔들리는 많은 현상들.

지형을 뒤틀고 고목의 뿌리를 뽑아 쓰러트릴 정도로 요란한 동정과 죄책감이. 그 어떤 짙고 여유로운 구름이라 한들 먼지처럼 흩뜨려 버릴 거센 강풍 같은 애정도, 아끼는 마음도.

또, 작고 깊고 고요했던 바다를 파도치게 하는, 그 파도가 하늘 끝에 닿을 것만 같은. 그런 거센 파도와도 같은…… 내가 너를, 꽤나 좋아하고 있다고. 오늘에서야 그 이름을 입에 담을 수 있게 된, 그 무엇보다도 크고 거센, 지독하게 낯설게 느껴지며 떨리고 기꺼운 이 감정까지.

모든 것이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그 무엇 하나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 없어 잇사는 웃었다. 여전히 두 팔 안에 들어찬 존재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잇사의 품에 들어찬 것들도, 치에루를 감싸온 것들도.

그 자리에 존재하는 온갖 감정들이, 울렁이는 그 모든것들이 다 격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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