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기사와 오딜
*백조의 호수 모티브, 영원한 7일의 도시와 비슷한 루프 시스템의 판타지 세계관입니다. 봉건제도를 어느정도 빌리고 있으나 같은 시대상도 아니고 사람들의 인식도 다릅니다.
*작중 묘사되는 리로이의 외형은 영원한 7일의 도시의 리로이 캐릭터 스킨인 ‘백기사’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다만 옷은 약간 다릅니다.
푸른 하늘이 점점 밀려가는 것을 보았다. 내가 바다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낮의 푸르른 바다와 햇살, 짭짤하고 청량한 바람을 느끼고 싶었건만. 그래도 온 것이 아깝다, 싶어서 붉게 물든 하늘이라도 보고 있었다. 아마 이 강렬한 하늘은 오래가지 못하겠지, 그렇다면 밤이 될 때까지 보고 가자. 왜, 석양이라는 것도 꽤 볼만한 풍경이지 않은가. 낮보다 밝진 않지만, 그는 그만의 색채로 주위의 만물을 황금으로 만들다가, 붉게 집어삼킨다. 석양이 지는 바다를 보러 온 사람들은 많았다. 연인이나, 가족, 홀딱 젖어서 옷을 갈아입으러 가는 친구들. 멀리 있어 보이지 않지만, 그들은 아마도 미소를 지은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밤이 되기 전까지만이라도, 모두가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품고 바다를 바라보았으면 한다. 왜냐하면, 나의 아름다운 시간을 깨고 싶지 않으니까. 결국,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로 했다. 모두 내던지고, 순수한 마음으로 바다를 즐기자. 사랑하는 사람도, 목숨을 내던진 일도, 나 자신이라는 사람도, 잠시 잊고. 그렇게 인생의 여백을 즐기고 있는데, 본능 반 의식 반으로 눈을 휘둥그레 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돌고래다!”
그건 거대한 돌고래였다. 아니, 작은 고래인가? 마법사인 나조차도 모르는 커다란 돌고래라, 그 기이한 모습에 무(無)의 공간은 깨지고 말았다. 그 사람에게 말해야겠다. 아주 큰 돌고래를 봤어요, 오딜.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돌아가야지. 나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빠른 발걸음마다 나는 모래 소리가 사각이며 나를 붙잡는다. 아니, 그건 내 마음의 망설임이다. 모래는 나를 유혹할 수 없어, 그저 마음 편하고 싶은 내 게으름이지. 바다를 돌아보면, 아직도 석양은 붉고 아름다웠다. 아, 오딜의 마법처럼 태양은 주황으로 빛났다. 그건 내가 계속 가슴에 품고 있던 그녀의 색깔이다. 그래서 나는 미소를 지었다. 정말 어이없는 일이라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지만, 내 꼴은 석양에 놓인 ‘백’기사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검은색 백조 오딜은 밤을 불러오고, 세상을 주황으로 만들며 밤의 안식으로 인도할 것이다. 내가 낮이라면, 나는 오딜에게 물들 운명이겠지.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내가 오딜을 밝히는 일 또한 세상의 이치가 되니까. 나는 누군가를 밝게 비추길 언제나 갈망해왔다. 그녀는 나에게 응해주었고, 그런 오딜이 나와 함께하는 것이 ‘이치’이길 바란다. 절대적이고, 영원한 법칙이기를.
“리로이, 언제 와요?”
“곧 가요. 코코아 먹고 밝은 곳 조용히 산책하기는 했어요?”
“했어요. 가는 김에 시장에서 작은 게를 사 왔어요. 튀긴 음식은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으니까, 괜히 너무 오래 걸리는 일 없이 와줘요. 물론 오다가 곤경에 처한 사람을 꼭 도와야겠다면⋯ 말리진 않겠어요. 대신, 늦을 때는 꼭 통신 마법을 써 주세요.”
“알겠습니다. 샤워 크림소스는 안 떨어졌죠?”
“잠시만요⋯.”
나무 바닥에 울리는 구두 굽 소리. 그녀는 아마도 주방 선반으로 갔겠지. 그나저나, 삐걱거리는 나무가 있었는데⋯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주방 싱크대⋯ 거기였지. 나는 등 뒤의 노란 망토를 꽉 쥐었다가 놓길 반복했다. 두껍고 빳빳한 천이 다소 까끌까끌했지만, 그건 문제 될 일이 아니었다. 무의식 속에는 그녀가 달그락거리며 병을 찾는 영상이 떠오른다. 길을 걷고 있는데, 나는 걷지 않는 것 같았다. 어느새 오딜과 함께 샤워 크림소스를 찾고 있어서 그런 걸까. 참, 나무 바닥, 삐걱거리다 못해 튀어나온 나무 바닥들도 조심하라고 해야지.
“아, 애매하게 남았는데⋯⋯ 알죠?”
“네, 들렀다 가겠습니다. 그리고 나무 바닥 중에서 튀어나오려고 하는 게 있었는데⋯ 식탁 옆에, 오딜이 맨날 앉는 의자 근처에 있었어요. 어쨌든⋯ 다치지 말라고요. 잘 보고 다녀요.”
“고마워요. 근데, 샤워 크림소스는 왜 물은 거예요?”
“그야, 없으면 안 되잖아요. 당신은.”
기쁜 건지, 부끄러운 건지 모를 짧은 웃음이 들렸다. 어쩌면⋯ 내가 또 그녀에게 놀릴 거리를 제공한 것일까. 하지만 오딜의 대답은 의외였다.
“백기사님은 항상 그런 식이죠. 뭐든 간에, ‘리로이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은, 없어요?”
이런 질문에는 도저히 대답할 수가 없다. 어째서 오딜은 나 자신의 마음에 솔직하라고 속삭이는 거지? 그냥, 나한테 의지하고, 내 돌봄을 즐기면서 기대면 그만인 것인데. 오딜은 사실 나랑 같은 족속인 걸까? 남을 비추길 갈망하고, 구하고, 대의에 몸을 맡기길 원하는 별종 말이다. 나는 물론 그것이 별종 같은 이름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보통은 사리사욕을 챙기니까. 그래서 여태껏 ‘좋은 놈’, 좋은 별종’, ‘자기 챙길 줄 모른다’같은 시선을 받으면서 살아왔다. 그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나를 부러워하면서도 불쌍히 여겼다. 오딜은 특이한 사람으로, 나를 ‘이상하고 좋으며 이용하기 쉬운’ 부류에 넣지 않았다. 다만 그저 바라봐 줄 뿐이다. 그리고 나도 그녀를 바라보길 원했다. 나의 이상론(다들 고리타분하다며 듣길 거부한다.)을 늘어놓아도 같이 이야기해 주었다. 거기 동조하고, 그녀 자신을 바꾸어갔다.
“알겠어요. 생각나면 꼭 말해주세요.”
“미안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질문을 왜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응, 몰라도 돼요. 알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고, 주고 싶을 뿐이에요.”
“네?”
“잠시만요, 끊어야겠다. 집에서 봐요.”
“⋯ 네.”
주고 싶을 뿐이라. 그녀가 주는 것을 받아도 될까. 응석받이가 되면 어떡하지. 그래서, 도움되는 사람이 아니게 되면? 오딜을 비출 수 없으면? 나는 오딜을 비춤으로써 내 존재를 실감한다. 물론, 내 사회생활과 오딜 이전의 삶 따윈 전부 버렸다는 말은 아니다. 그녀가 해준 공감, 그녀가 나에게 ‘오딜’을 알려주면서 보낸 시간, 그렇게 당신에게 물든 나는⋯ 그녀의 절대적인 낮이고 싶다. 독점하고 싶다는 말이 아니다. 사랑에 목마른 오딜을 내가 가두면, 그녀의 미래를 망치는 꼴이 된다. 난⋯ 현명하지 못한 사람은 아니다. 다만, 독보적인 존재가 되면 좋겠다. 다른 사람이 그녀를 비추는 것은 사절이다. 딱 들어맞는 낮과 밤처럼 함께하길 바란다. 왜냐하면 오딜은 나의 밤이기 때문에. 어둠이 아니라, 백야에 갇힌 사람에게 찾아온 밤과 휴식이다. 적어도 난, 이해받을 수 있다.
“백기사님!”
“네?”
“저기⋯ 빗자루가 삐져서 저 멀리 날아가 버렸는데, 그⋯⋯ 나무 위에 갔어요. 그 아이는 내가 달래 주어야만 내려오는데, 혹시 저를 위로 올려 주실 수 있으실까요? 죄송해요, 부탁합니다!”
“걱정하지 말고, 여기 올라와서⋯ 그래, 다음부터는 빗자루를 혹사하면 안 돼요, 루카. 기본적으로 빗자루는 루카의 말에 충성하겠지만, 한 번에 많은 마력을 받고 에너지로 쏟아내면 부서진다고요.”
맑은 목소리에 생각이 또 한 번 깨졌다. 이 아이는 루카라고 하는데, 마법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오늘도 빗자루를 위협하는 마력을 보여준 거겠지. 내가 보기엔 좀 더 커다란 빗자루를 구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오늘은 어쩐 일인지 루카가 빗자루를 빨리 달래서 나무 밖으로 날아갔다. 오딜에게 연락하려고 했더니⋯ 별일이다. 이제 속 편히 활짝 웃는 루카에게 나도 미소를 건넸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아늑한 나무 위구나. 노을이 거의 다 져 간다. 이제 빨리 걸어가 볼까! 오딜이 나를 째려볼지도 모른다. 봐, 터무니없지만, 그녀가 나무와 나를 질투하듯 강풍이 불어온⋯ 아니, 정말로 검은 비둘기 스무 마리가 내 품으로 뛰어들어오고 있다. 그들은 합쳐지고, 합쳐져서, 결국에 내가 목도한 것은 역시나 부리가 주홍빛인 흑조였다. 나무가 부러질까 노심초사하는 나를 보고, 그녀는 눈을 매끈한 오닉스 원석 구슬처럼 번뜩였다. 그리곤, 넓은 물갈퀴 발 한 쪽을 내 허벅지 위에 턱 올려놓는다. 내가 옴짝달싹 못 하면서도 빨리 떼라고 온 힘을 다해 눈에 불을 켜면, 그 흑조는 목을 구부렁거리며 ‘왜 그러는데?’라는 표정이다. 새까만 눈이 정말 얄밉다⋯. 어쨌든, 물갈퀴는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끝끝내 ‘여기 이 흑조가 날!!’이 목구멍 코앞까지 차오르자 겨우 사람 손으로 변했다. 오딜은 내 정장 바지 가운데 주름을 오른손 중지와 약지로 스쳤다. 그리곤 가볍게 뗀다.
“백기사면 하얀 와이셔츠에 하얀 바지여야 하지 않아요? 검은 정장바지는 흔하지 않은데.”
“이명과 옷을 일치시킬 필욘 없잖아요. 그리고 맨날 보던 흰 와이셔츠에 검은 정장바지면서, 뭘⋯⋯.”
“그래요, 그래. 오늘은 특별히 내가 다려준 와이셔츠죠. 응. 그걸 입고 아늑한 나무랑 바람을 피우겠다?”
“나무랑 어떻게 바람을 피워요?”
“⋯⋯ 흥!”
그러곤 내 품에 기댄다. 이래선 행동과 말이 전혀 다르지 않은가⋯⋯ 그래도, 나는 오딜을 안아줬다. 우리는 나무로 짠 포댓자루 안에 잡힌 것처럼 엉덩이를 아래로 하고 있었다. 등은 큰 나뭇가지에 기대고, 다리는 앞의 다른 나뭇가지에 걸쳤다. 내가 그녀를 내려다보자, 갑자기 씩 웃으며 ‘자기가 다려준’ 와이셔츠에 볼을 비벼 댔다. 나는 그냥 옆으로 높여 묶은 곱슬한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이렇게 말했다.
“후⋯ 다음부터는 한눈팔지 않고 다니겠습니다.”
“⋯⋯ 응, 그럼 내려 줘요. 빨리 가서 게 튀기게.”
“네.”
물론 날 수 있는 그녀를 안아 올린 다음, 밑으로 가볍게 착지했다. 그러자 오딜은 앞서서 집으로 향한다. 우리는 곧잘 이렇게 걸었다. 뒤에서 바라보며 엄호하는 느낌이 나는 익숙하고, 그녀도 그럴 것이다. 아니, 아마도 내가 나란히 걷기를 바라는지도 모르지만⋯ 그래, 정확히는 내가 이래야만 안심이 되는 탓이다. 오딜은 존경받는 마법사이지만, 그 명성만큼 어둠도 있는 법이다. 시기 질투, 뭣도 모르고 집적거리는 귀족 혹은 자본가. 그들에게는 검이 통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녀에게 법률을 가르쳐주고 잘 대응할 수 있도록 도와줄 뿐이다. 나도 ‘기사’이기 때문에 군 재판에서의 피고인을 맡는 경우가 많지만, 일반 재판의 경우도 변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변호사 자격이란 것은 다소 범용적이니까. 그리고 오딜의 일을 보면서 일반 민ㆍ형사 사건에 관해 공부할 수도 있다는 것은, 내가 주군에게 영지 안에서 거주지를 잠깐 옮기는 것을 허락받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는 내가 군에서의 재판만 맡고 자신은 변호해주지 않을까 노심초사했기 때문이다. 기왕에 변호사 자격을 가진 사설 기사를 들인다면 그런 이득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뭐, 그 작자의 진짜 속셈이란 더 속물적일 것이다. 내가 오딜이랑 알아서 다른 여자 마법사들과 안면을 트면, 내가 젊고 예쁜 결혼 감을 소개해줄 거라는 생각이라도 하나 본데, 어림없다. 어린 마법사들이 그 추악한 늙은이 밑에서 더러운 눈빛을 받을 것을 생각하면 치가 떨리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으로, 나는 오딜과 내 병사들 부대가 가까이 있는 이 숲과, 집이 좋다.
“자, 이제 얌전히 앉아 있어요.”
“제가 뭔가 도울 건 없고요?”
“응원이면 돼요.”
오딜의 저 눈웃음은⋯ 뻔하다. 바로 몸을 일으켜 볼에 입을 맞추자, 만족한 듯 자기도 내 볼에 입을 맞추곤 살랑살랑 주방으로 들어갔다.
“오딜, 나무 바닥은 조심하고 있죠?”
“네, 나도 꽤 강한 마법사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어련히도 알아서 잘하겠지만,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은 나무 바닥 여기저기를 손봤다. 일하고 나서 먹는 게 튀김은 여전히 맛있었다. 이 근처 바다에서는 이렇게 통째로 씹어먹기 좋은 작은 게가 잘 잡힌다. 오딜은 시장에 갈 때마다 게만큼은 가장 신선한 것으로 골라서 오는 모양이다. 내가 마구 집어먹고 있으면, 그녀는 심사숙고해서 고른 게인데도 얼마 먹지 않는다. 그냥 내가 먹는 것을 쳐다보다 내가 똑같이 보면 생긋 웃을 뿐이다. 아니, 그전부터 웃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도 그녀를 향해 웃는다.
설거지를 마친 다음 오딜이 좋아하는 요크셔 골드를 집어 들었다. 이 홍차는 내 기준에 물에 타기보단 우유에 넣어 마시는 것이 좋다. 진해서 피할지도 모르지만, 그 나름의 깊이와 달콤함이 느껴지는 향이다. 찻주전자와 찻잔을 들고 가면, 벽 전체 크기의 창을 가만히 보는 오딜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는 정원을 보고 있는 걸까? 찻주전자와 찻잔을 내려놓고 마주 앉았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처음 만난 날에도 이렇게 둘이 앉아 있었다.
“정원에 뭐 있어요?”
“아니, 그냥⋯ 눈이 가서 본 거예요. 잠시.”
“그래요? 일단 마셔요. 요크셔 골드 좋아하잖아요.”
“고마워요.”
그날은 소나기가 아프게 쏟아졌었다. 인근 영민의 신고로 찾아간 숲에서는 그 할머니의 말대로 주황색 번개가 번쩍였다. 나는 그 근원을 찾으려 번개에 다가가다 어떤 얇은 비명을 들으며, 아마도 그 벼락에 맞아 쓰러졌다. 눈을 떴을 때에는 어떤 침대에 뉘어진 상태로, 갈아입을 옷과 요크셔 골드로 만든 밀크티가 머리맡에 있었다. 오딜은 내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상처는 마법으로 최대한 치료하겠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프지 않았던 이유는 오딜의 진통제 마법 때문이었겠지. 어쨌든, 그 나무 오두막에서 치료를 받으며 나는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딜이 ‘보석 따개비 고래’를 쫓는 마법사 중 하나였다는 것이 첫째로 놀랄 점이었다. 나는 오딜이 전투를 한다기보다는 마법 공연으로 돈을 버는 쪽이라 생각했으니까. 두 번째로 놀란 것은, 신으로 숭배되는 그 고래의 등에 달린 따개비에 관한 최근 연구였다. 고래 신을 앞세워 기득권을 유지하는 이들의 ‘고래 찬양’과는 달리, 특히 그 따개비는 어떤 조건이 부합하면 세상을 7년 주기로 무한 반복시킨다고 한다. 그러니까, 7년 이후의 미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마법사들은 비밀 결사를 만들어 고래를 죽이기로 했다. 오딜은 내게도 손을 내밀었다. 주군이 그런 것을 허락해 줄까? 하지만⋯ 기회였다. 재판에 서서 변호사 역할을 하거나 영민의 부탁을 들어주고, 주군을 위해 싸우는 삶도 좋지만 나와 세상을 걸 싸움은 아니었으니.
“세상을 바꾸는 자가, 주인이 될 것이다.”
“⋯ 리로이?”
“아니요, 그⋯ 여러 생각이 나서. 날 비밀결사에 들일 때 한 말, 기억해요?”
“어쩐지 불러도 멍하게 식은 밀크티나 쳐다보더니. 그래도 날 앞에 두고 딴 사람 생각한 건 아니니까, 그래요. 기억하죠. 그리고⋯ 뭐랬더라? 세상을 가질 의항은 없지만 그런 싸움에 자신을 바치고는 싶다고 했던가.”
“네. 그랬죠.”
“준비됐어요?”
오딜은 아주 오랜만에, 분명하게 말했다. 반딧불이가 내는 빛 같은 눈은 항상 일렁이기만 했는데, 이번에는 나를 단단히 붙잡는다.
“뭐를요?”
“비밀결사의 최종 활동이 곧 시작된다고요.”
“아, 당연하죠. 오늘 낮 재판에 뒤에 바다에 갔어요. 잠시 다 잊고 왔죠. 아, 거기서 엄청나게 큰 돌고래를 봤어요. 그래서⋯ 당신에게 말해주려고 했는데 이제 말하네요.”
“다 못 잊은 것 같은데.”
“그래요, 오딜은 잊지 못했습니다.”
오딜은 대뜸 내 뒤로 와서 꼭 껴안았다. 그녀는 이것을 ‘포상’이라 할 것이다. 히아신스 향⋯ 오딜은 게를 튀기기 전까지 줄곧 서재에 있었나 보다. 서재에 커다란 히아신스 화분을 열대 나무들과 함께 두었으니까, 나도 거기 있으면 꽃향기가 베서 떨어지질 않는다.
“상이에요, 리로이.”
“네.”
“소감이 왜 이렇게 짧아요?!”
“그냥 이렇게 있고 싶어서⋯.”
“그래요? 그럼 이렇게 있을게요.”
애교로 달콤한 목소리를 들으며, 가슴을 감싼 손을 덮어 잡았다. 사실 나는 준비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작 나 자신은 예전에 내려놓았을 수도 있다. 내가 고민해야 할 것은 다른 것일까? 나는, 오딜의 죽음을 상상할 수 없으니까. 아니, 상상하고 가는 사람은 없지만,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며 내 머릿속을 휘젓는다. 당신은 언제나 나를 생각하라고 속삭인다. 알아,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거지. 그런 당신을 사랑해요. 그래서 말도 안 되는 망상들을 머릿속에 가득 채우고, 바다에 가서도 그 얼굴을 버리지 못했어. 다른 어떤 일들은 때때로 고민하고, 망설이지만 망설일 수도 없는 단 하나의 가치가 있으니까. 나 같은 인간은 상상도 못할 그런 거. 오딜이 계속 조잘조잘거린다. 나는 그 얘기 하나하나에 대답해주면서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점점 목소리는 흐려져 간다.
“⋯⋯그래서, 오늘은 일찍 자기 싫다고요. 심야 공연이라도 보러 갈래요? 내가 잘 아는 마법사가 있는데-”
“오딜.”
오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짧은소리에도 꿀을 발라서 얘기한다. 끝끝내 내가 아무 얘기도 않자 그녀는 나를 더 감쌌다. 그래도 하려던 말은 않고 그냥 일어서서 마주 보고, 급하게 품에 안았다. 등을 밀어 넣듯이 집어넣었다. 오딜은 처음에 나를 받아 주면서, ‘상이 더 받고 싶군요?’같은 소리를 또 조잘거렸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그녀는 가기 전까지 많이 안아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결국 숨이 막혀서 등을 긁었다. 그 손톱 끝에서 내가 존재하는 것을 느낄 것만 같다. 그래서 등을 마구 때려도 가만히 있었다. 끝끝내 우는 당신의 어깨를 붙잡고 사과했다. 받아주는 얼굴은 다정하지만, 추위에 살이 에이듯이 매정하다. 적어도 지금은, 가슴에서 그 비슷한 고통을 느낀다.
“괜찮아요. 공연 보러 갈래요? 우리 여태껏 고래 때문에 준비하느라 바빴는데. 오늘만, 응?”
“그럼 오늘은 푹 자요. 피곤하면서. 종일 연구했잖아요. 그러면서 또 도와주지도 못하게 하고.”
“⋯⋯ 난 괜찮은데⋯ 정말로⋯⋯.”
“괜찮긴.”
씻은 후, 침대로 가서 누웠다. 옆 방에서 씻는 물소리와 울음소리가 들린다.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흐른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있었는데, 씻고 나온 오딜은 내 옆에 꼭 붙어 앉았는데도 이 눈물 자국은 본 척도 않고 끝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정확히, 그녀는 내 눈을 본 적이 없다. 법률상담을 할 때면 눈을 쳐다보는 습관이 있는데, 오딜은 그러면 나를 똑바로 보며 웃곤 했다. 그런데 오늘 상담에서는 더 크고 신 나게 떠들면서도 은근슬쩍 넘기며 다른 곳을 본다. 아, 벌써 새벽 2시다. 오딜을 위해서도 쉬어야겠지.
“오딜, 이제 자야 해요. 얘기는 내일 해요.”
그녀는 아무 말이 없다. 고장 난 인형처럼 가만히, 내 눈을 쳐다본다. 말을 해도 반응이 없길래 나도 가만히 쳐다봤다. 오딜의 눈은 커다랗게 텅 비어있다. 평소에는 반딧불이 꼬리에서 볼 수 있는, 빛나는 색의 물이라면, 지금은 연녹색의 어떤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단정한 단발머리 같은 옆머리, 그리고 지금은 풀었기 때문에 어깨에서 이리저리 넘실거리는 주황색 곱슬머리. 밤과 태양을 가진 나의 일몰이다. 어서 처친 눈으로 웃어줬으면 좋겠다. 당신은 속눈썹이 정말 예뻐, 알잖아. 아무 표정도 짓지 않으니까 얼마나 차분하고 귀여운 토끼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몰라. 가슴이 매여올 정도로 차분해⋯⋯.
“내 이름 알아요?”
“네? 네. 오딜이죠.”
“그거 아니야⋯⋯⋯.”
오딜은 갑자기 눈물을 뚝, 뚝, 흘린다.
“그러면?”
“니아.”
“그렇군요. 마법사의 이명인가요? 백기사처럼.”
“개명했어요.”
“고마워요. 알려줘서.”
“기억해요⋯⋯. 집에서는 이 이름으로 부르라고요.”
“네.”
니아⋯⋯ 는 나를 붙잡고 애원했다. 자신의 마지막을 남기는 사람처럼 힘든 표정을 하고서. 마지막이 아니게 하면 될 텐데,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일절 하지 않는 듯하다. 어쩐지 그녀는 이기적이라고 하면서도 이타적이다. 나랑 같은 족속이지! 그 점이 비참하다.
“니아, 우리 꼭 살아서 돌아와요.”
“그럴 수 있어요?”
“네.”
어떻게 확신하느냐는 눈으로 쳐다본다. 어쩐지 이 모습은 그녀답지 않다. 시도하지도 않고서 죽을 준비부터 하는 것은 이상하다. 니아는 나보다 더한 별종인 걸까? 답답한 마음이지만, 일단은 자야 하니까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렇게 행복한데, 어째서 우리의 미래를 꿈꾸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다만, 사랑한다는 말이 듣고 싶은 듯 품에 파고들어 끝없이 말한다. 그러면 나도 똑같이 사랑한다고 해줬다. 평소에도 사랑한다고 똑바로 말하지 않으면 절대로 놓아주지 않으니까, 입이 닳도록 사랑 고백하는 데 익숙해졌다. 나에겐 그저 사랑둥이다. 어리광부리듯 사랑한다며 매달리는 말에 매번 웃으며 똑같이 응한다. 니아는 심술 난 말투로 대답을 종용하지만, 자기가 긁은 등을 쓰다듬었다. 그거 안 아팠어요. 게다가, 내가 미안할 일이잖아요. 그러자 니아의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나도, 같이⋯ 있고 싶어요. 그래, 그렇겠지, 니아도 나랑 같이 살아남고 싶었던 거야. 기뻤다. 손과 같이 떨리는 등을 토닥이다가 점점 천천히⋯ 쓸어내린다.
“사랑해요.”
“응⋯⋯ 리로이, 나도 사랑해요⋯⋯.”
갑자기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이젠 잠이 확 오나 보네, 자기 편하도록 부드럽게 안고, 이불을 쭉 덮었다. 포근한 세상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니아, 사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거예요. 특히 고래는 더더욱 그렇죠. 미래에 대한 기대에 부풀라는 말이 아니라, 반드시 될 거라고, 확실하고 강하게 마음을 먹어야 해요. 사실, 죽으러 간다고 생각하면 그냥 죽지, 싶으니까.”
“응⋯⋯⋯.”
“알겠죠? 죽어버릴 생각, 하지도 마세요. 우리의 미래를 포기하지 말자고요.”
눈은 반쯤 뜨고 있더니, 그것마저 감겼다. 내 배에 계속 얼굴을 비비던 것도 슬슬 느려져 이젠 그냥 끌어안기만 한다.
“⋯ 니아랑 계속 함께하는 미래를 만들고 싶어요. 그 누구보다도.”
니아는 대답이 없다.
“난⋯ 니아에 대한 나쁜 소문을 진짜라고 오해했는데도, 그래도 좋았어요. 당신이라는 사람이. 내 성격 알잖아요? 분명히 치를 떨었어야 했는데⋯⋯ 오히려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느꼈죠. 그러니까 잘 될 거예요.”
그래도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정말 자는 모양이다. 혼자서 울어야 했던 등을 끌어안으며 계속 쓸어낸다. 이제는 그렇게 만들지 말아야지, 굉장히 익숙한 다짐을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니아가 좋아하는 브로콜리 수프를 만들까? 올리브 오일에 재워서 부드러운 닭가슴살구이도⋯⋯. 요리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니라 잘하진 못하는데, 그래도 이젠 니아 덕에 많이 배워서 잘할 수 있다. 적어도 그녀는 맛있게 먹어주니까. 또 기뻐해 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아침 일찍 사서⋯ 장은 같이 보자고 할까? 파스타, 방울토마토, 브로콜리, 바질 페스토, 그리고 그냥 올리브도. 니아는 꼬치에 끼워서 구운 올리브 열매를 좋아한다. 아침을 먹으면, 나도 일하고⋯⋯ 주군이 보자고 했는데 정말 보기 싫다. 애초에 나는 그 인간이랑 맞지 않는다. 장남이라면 맞겠는데, 둘째에게 물려주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은 굴뚝같지만, 일개 기사 계급 마법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칼에 마력이나 보내는 거지. 아마 본인 같지 않아서 장남을 싫어하는 듯 하지만, 장남에게 넘기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길 바란다⋯⋯.
“니아.”
“으응⋯⋯. 오딜은 흑조니까, 좀 더 잘래요.”
“그건 또 흑조로 변신해서 내 허벅지를 쓰다듬고 나서야 말씀하시죠. 일단 일어나요. 좋아하는 브로콜리 스프, 올리브 오일에 재운 닭가슴살 구이, 바질 페스토 파스타랑 올리브 꼬치구이를 해줄 테니 같이 장 보러 가요.”
“흥, 싫었어요? 싫으면 일찍 오던가, 바람둥이!”
돌풍과 함께 검은 새들이 날아들더니 또 흑조가 나타났다. 아, 저 검은색 눈⋯⋯. 어쨌든 흑조는 부리를 쫙쫙 벌려, ‘앉아! 허벅지 쓰다듬게!’하며 꽥꽥 소리 질렀다. 나는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는 그녀를 들어 올려서 욕조에 휙 집어 던졌다. 오⋯ 꽤 빨리 발을 젓는 걸 보니 오랜만에 수영해서 신 났나 보네. 그런 그녀를 보고 한바탕 웃은 다음, 단정히 방을 치웠다. 니아는 쿵쿵거리며 내 앞에 와선 얼굴을 쭉 들이밀었다. 아, 다 씻었군.
“하, 가련한 오딜을 매정히 던져 버리다니! 당신 사실은 물에 젖은 내 모습이 보고 싶었던 거죠? 백기사라면서 새까맣게 엉큼하긴!”
“검은색 옷만 입었는데 비칠 것도 없잖아요. 그리고, 신나서 수영한 흑조가 누구였죠?”
“흑⋯⋯ 왜 한 마디도 안 져주는 거예요?”
“희롱한 벌을 달게 받으시죠. 거기서 떨어졌으면 어쩔 뻔했어요?”
“아, 미안해요. 하지만 나무보다는 거기가 중심 잡기 편했을 뿐이라고요⋯⋯.”
“어쨌든, 씻고 오겠습니다. 깃털은 다 치웠죠?”
아, 검은 깃털 천지다. 하⋯⋯. 샤워 후 김이 풀풀 나오는 욕실을 보고 뒤를 돌아보니, 아름답게 윙크하는 니아가 보인다.
“내 자취를 느껴보라고 조금만 남겼어요. 사랑스럽죠?”
“하아⋯⋯.”
저 애교가 통하는 내가 싫어. 결국은 같이 치웠다. 나 참⋯⋯. 그래, 욕조에 집어 던진 내 잘못이지. 참자. 그때 푸드덕거리더니 깃털이 사방팔방으로 날렸나 보다. 설마, 탈모는 아닐 거고. 그래도 털갈이 때인지는 물어봐야지. 이건 정도가 심하다. 그리고 오랜만에 니아랑 장을 봤다. 또 게가 사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자꾸 갑각류만 먹는 것도 좋진 않다. 본인은 별로 먹지도 않으면서⋯⋯.
“초콜릿 살까요?”
“아뇨.”
“초콜릿 좋아하잖아요. 오늘은 별로예요?”
“그냥, 그⋯ 생선 볼래요?”
“아뇨. 오늘은 닭이나 소고기 위주로 사두려고요.”
“그래요⋯⋯. 난 소고기도 좋아요.”
“네. 그럼 그것도 사요.”
할 게 많아서, 니아는 파스타를, 나는 오븐에 닭 가슴살과 올리브 등등을 넣었다. 거의 새벽부터 움직인 탓에 피곤해 보였지만, 좋아하는 음식인지 잘 먹는 니아를 보니 기분이 좋다. 계속 쳐다보니까 내가 그렇게 좋냐며 씩 웃는다. 나 참⋯⋯.
“네.”
“다, 당연하게 대답하네요⋯ 그⋯⋯.”
“그럼 맞는 걸 대답 안 할 순 없잖아요. 빠, 빨리 먹어요. 식으니까.”
“뭐야, 부끄러워요? 응?”
“먼저 부끄러웠으면서.”
니아는 내 말이 어떻든 기세등등하게 웃었다. 내 대답에 갑자기 얼굴을 붉힌 사람이 누군데, 어쨌든 정말로 놀리기 좋아한다. 놀리지 말라니까⋯⋯. 내가 크고 야성적인 이미지가 아니니까 듬직하지 못해서, 귀엽다는 의미로 놀리는 걸까? 그건 싫은데, 내가 의지할 수 없는 사람인 건. 니아에게 대뜸 내가 듬직하지 못해서 남동생 보듯이 하는지 물어보니, 니아는 놀라며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그냥 나처럼 단단한 사람을 놀리면 기분이 좋은 거라고⋯⋯ 무슨 소리야, 정말. 알 수 없다. 가만 보면 그녀는 도발에 가까운 놀림을 즐기는데, 예를 들면 갑자기 키스하듯 다가왔다가 홀연히 떠나버리는 것이다. 이때, 내가 오히려 다가가면 계속 도망간다. 내가 다가오는 것을 즐기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그렇지만 여태까지의 행동으로 보아 니아는 내가 적극적인 것을 즐긴다. 그런 행동들로 내 사랑을 확신하는 듯하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수 있을까? 너무 나른하다. 이상하네, 음⋯⋯. 심한 몸살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니아도 걱정하기 시작했다. 숨쉬기도 힘들고⋯⋯ 왜⋯⋯⋯ 지⋯⋯⋯.
“리로이, 내가 치울 테니까 일단 쉬어요.”
“네. 일단, 연락하죠. 잠시만⋯⋯.”
부단장 루카스에게 통신 마법으로 내가 오늘 너무 아프니 나갈 수 없다고 했고, 옮기면 안 되니까 주군에게도 직접 부엉이 발목에 편지를 묶어 보냈다. 주군은 마력이 없어서 내 통신 마법을 받을 수 없으니. 그러자 루카스와 주군은 알겠다고 했다. 아, 잘라버릴 거라는 소리는 안 하는군. 하긴, 저번에도 거의 다 쓰러져가면서 갔을 때 나한테 옮기지 말라며 성수를 뿌려 댔으니 알만도 하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몰라도, 건강에 좋다는 약초를 편지에 끼워서 보내줬다. 참고로 낫기 전에는 오딜의 집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말란다. 아, 좋습니다. 주군. 오랜만에 의견이 통했네요. 처음으로 선물이라는 것도 받고. 어쨌든 니아는 서재까지 와 졸졸 따라다니며 걱정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는 나도 알 수 없지만, 니아는 치료도 할 줄 아는 마법사라 다행이다. 지금은, 거의 울면서 마법 진을 피는 중이다. 그녀가 나를 치료해 주겠지. 나른하다. 너무 힘들어서 자고 싶다. 그래도 꽤 건장한 기사인데⋯⋯. 다른 곳에도 이 병이 전파되면 정말 큰일 나겠다.
“리로이, 일어나요.”
“네?”
“미래를⋯ 만들고 싶다면서요.”
“무슨 소리예요, 바로 전투에 나가야 하나요?”
“아니, 설명은 나중에 해줄게요. 치료가 생각보다 오래 걸렸어요. 3시가 되면 검을 들고 현관문 앞에 나가주세요. 미안해요, 지금은 2시 55분이네요. 아니, 벌써⋯⋯!”
“무슨 일인데요⋯⋯?”
“앞에!”
검기와 스태프의 마법이 쨍하는 소리를 내며 큰 돌풍을 일으킨다. 맨 앞의 마법사는 마시려고 끓여둔 물을 날카로운 얼음 검으로 만들어 내게 대적했다. 하지만 급하게 만든 검으로 이길 순 없다. 그리고 검술로도. 한낮의 해처럼 찬란한 검기가 얼음을 녹이며 베었다. 그리고 동시에 영민을 보호하기 위해 임시 공간을 만들었다. 새하얀 바닷가에 떨어진 그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모래도 하얗고, 바닷물도 투명하며, 희끄무레한 하늘에 여러 개의 태양이 뜬 것처럼 보인다. 보통 온통 하얀 공간에 떨어지면 움츠러들기 마련이다. 백야의 바다에 주저앉은 그들이 겨우 쓰는 파이어 볼은, 안타깝지만 고개를 까딱하면 그냥 피할 수 있다. 심지어 단발인 내 머리 한 올조차 태우지 못한 채로.
“저, 저, 저 여자가⋯⋯!”
“우리 영민을 위협하는 것은 나와 내 주군에 대한 도발로 알겠다. 목적을 바른대로 대지 못할까.”
“당신도 우리 소속 맞잖아!! 몰라? 아직 기억을 못 하나? 어, 어서 여기서 내보내 줘!! 으, 으악!!”
내가 눈앞의 상황을 인식했을 땐 이미 태양풍 같은 것이 날아와 그 남자를 쓸어버린 뒤였다. 그 남자는 마력 부스러기가 되어 없어졌고, 뒤의 마법사 두 명은 기절했다. 그들의 어두침침한 로브를 보아, 마법사에게 시체도 혈흔도 남지 않는 것을 이용해 자객을 보낸 것이로군. 그것도 3명이나⋯. 물론 강한 마법사들이었지만, 주군의 영지에 들어와 하필 나한테 걸린 것이 잘못이다. 주군은 겁이 많아서 치안유지에 무척이나 힘을 들였고, 그래서 영지 어디서든 나 혹은 내 병사에게 달려드는 일은 자살행위다. 영지 전체에 강력한 결계가 있으니까. 가볍게 검을 휘둘러 전부 마나 부스러기로 만들고, 우리는 공간에서 나왔다. 정말 이질적인, 너무나도 평화로운 집으로.
“고마워요.”
“당연한 일인걸요. 그 사람들, 우리 둘을 노리고 있던데요. 무슨 일 있었나요?”
니아가 주저앉으며 시폰 치마가 날렸다. 떨어지는 꽃잎처럼 그 모습이 덧없었다. 앉아서 머리를 붙잡고 우는 모습이 검은 꽃잎에 암술만 덩그러니 남은 것 같았다. 발레리나 혹은 발레와 마법을 접합해 공연하는 마법사들은 원래 말랐지만, 그녀는 지금 유독 앙상해서,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곧장 달려가 상태를 봐야 할 정도였다.
“⋯⋯.”
“또 자객이 쳐들어오면 우리 영민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보고할 겁니다. 안심하고 말해요.”
“이 나무바닥, 기억 안 나요? ”
“이거, 내가 고친 건데⋯⋯.”
“고치면서, 몰랐어요? 하긴, 강박적으로 나무 바닥을 조심하면서도 결국 떠올리지는 않았죠. 그럴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해요. 아까 그 마법사의 마나 조각을 줄게요. 부디, 날 용서하지 마세요.”
마나 조각은 그 마법사의 얼음 마법처럼 푸르게 빛나다 내게 흡수되었다. 머리가 왕왕 울린다. 온몸이 심장이 된 것처럼 뛰고, 나는 주저앉았다. 그런 일은 없었어!! 너무 매스껍다. 마나 부스러기. 그 옆에, 니아. 당장 화장실에 기어가 토했다. 입을 씻고 눈을 씻어도 그 정경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법사는 시체가 없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잡을 수 없었, 지. 당신은 모두 허공으로 빠져나갔고, 나,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아⋯⋯ 아악⋯⋯⋯. 그것도 몰라? 멍청하게 일이나 가려고 했잖아. 내가 고친 나무 바닥들은 모두 시공간 오류로 생긴⋯⋯ 이전 루프의 흔적인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나무 바닥을 전부 수리했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니아는 집에서 마법 수련을 할 일이 없는데 무슨, 무슨 나무 바닥이 튀어나오고 부서질 일이 있냐고! 누가 밟거나 공격하지 않으면 절대로 그럴 수 없는데. 그럴 수 없는데⋯⋯⋯. 화장실 문으로 걸어온 니아가 보였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고통스럽게 나를 본다.
“니아⋯⋯⋯.”
“같이 살아남자고 했죠. 그래서 파스타에 독을 탄 다음, 이 영지에서 가장 강한 사람을 가진 거예요.”
아⋯⋯⋯. 어째서, 어째서 나는 그때 아무것도⋯⋯. 그래도, 지금 니아는 살아있어. 살아있다고⋯⋯.
“리로이, 당신은 왜 내 곁에 없었어요? 왜 계속 나를 두고 떠났어요⋯⋯? 고래를 죽이러 갈 때, 계속⋯⋯ 죽어서⋯ 내가 고래 등의 따개비를 작동시켰어요. 당신이 없는 건 의미가 없잖아! 어, 그러니까, 어쩔 수 없었어. ⋯⋯ 그래, 당신도 날 용서하지 않겠죠. 자, 그 사람들처럼 왜 루프 했냐고 따질 거예요?”
머리를 붙잡고 소리쳤다. 이건, 이건 현실이 아니야, 우리는 루프를 저지하러 가는 건데, 그럴 리가 없잖아. 니아가 장난을 치는 거지! 하지만⋯ 직전 루프에서 니아가 죽은 것은 확실한데⋯⋯. 루프의 잔재가 쌓인 뒤 그들은 알게 된 거겠지, 범인이 내부에 있는 걸⋯⋯. 그래서, 오딜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 나를 쓴 거야. 영지로 쳐들어올 것을 알고. 그랬다는 건 이미 니아가 한 번 이상은⋯⋯.
“리로이, 당신이 아무리 날 말려도 난⋯ 당신이 또 죽으면⋯⋯ 루프할 거예요. 앞뒤 꽉 막혀선 자기 목숨, 자기감정, 그 아무것도 소중한 줄 모르는 당신이지만, 난 절대로 포기 안 해요.”
머리를 놓고 하염없이 바라봤다.
“절대로.”
“니아⋯⋯⋯.”
“나보고 포기하지 말라면서요. 난 이번엔, 너무 힘들고 무서워서 아무것도 하기 싫었단 말이예요. 근데, 같이 미래를 만들자며, 같이!”
일단, 그녀가 정말로 존재하는지 알고 싶다. 그래서 껴안고, 떨었다. 니아는 내 허리에 손을 얹고 겨우 내가 안는 힘을 견디는 것 같다. 그런 건 이제⋯⋯ 모르겠다. 너무 혼란스럽다. 하지만 무서워서 약간씩 힘을 뺐다. 또 숨 막힐까 봐. 그러다 죽으면 어떡하지? 나는⋯⋯.
“날 이용해요.”
“네?”
“이용해요. 뭐가 들어와도, 당신을 지킬게요. 니아와 살아남기 위해서.”
안긴 상태로, 니아는 말이 없었다. 나는 계속 말했다. 그럴 거면 미리 말해주지 그랬냐고. 미리 말해서 이용하면 될 걸, 왜 아무것도 모르고 혼자 힘들게 만들었냐고. 니아는 아무 말도 않았지만, 그 이유는 내가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기억을 거부하고 있었으니 그녀는 말할 수 없었다. 꼭 그게 아니라 해도, 본인이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도 고통스럽고, 내가 힘들어할 테니까 그걸 계속 고민하다 결국 말도 못한 채 파스타에 독을 탄 거겠지. 그렇지만, 니아는 루프를 뒤튼 것이다. 3시에 니아는 죽지 않았어. 이걸로, 우리는 ‘미래’에 한 발짝 나아간 것이다.
우리는 집에서 그들이 또 자객을 보내기만을 기다렸다. 루프에 영향을 주지 않겠다고 말할 심산이었다. 그때까지는 힘들어도 평소처럼 지냈다. 울지 말고, 그냥 게 튀김이나 먹으면서. 일도 하고, 사람도 만났다. 하지만 니아의 경우 영지 밖 공연은 자제토록 하고, 나는 내 권한으로 니아에게 병사를 붙여줬다. 그래서 서로가 집으로 돌아오면 그때가 되어서야 안심하는 하루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이 안았다. 그리고 어쩌면 다시 들을 수 없을, 사랑하고, 좋아한다는 말도 많이 하고. 그렇게 잠들고 깨어난 아침은, 항상 같은 고민으로 시작했다. 니아는 범죄자일까? 아니면 나를 살린 구원자일까? 세계를 위해서 나 같은 인간은 죽어버려도 되고, 그들의 세계를 위해 니아는 제거해도 괜찮은 건가? 그들 역시 이기적인 게 아닌가? 그들은 나름 정의롭다고 으스대고 있지만, 지금 루프에서 어떻게 행동할지 모르는 니아를 이렇게 죽이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그리고 그들도, 소중한 사람이 죽거나 자신이 죽을 것 같을 때, 루프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하지만, 희생은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욕심으로 이렇게 된 것이 맞다고 하면 맞겠지. 그렇지만 동의할 수 없다. 그들의 방식은⋯ 희생을 숭고하게 여기지 않는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당연한 일. 나는 병사들에게 ‘비밀 결사’가 반동분자를 죽였다는 소문을 심심찮게 듣는다. 또는, 정찰 중인 병사가 마나 부스러기가 날아가는 것을 봤다며 겁에 질린 얼굴로 달려오기도 한다. 이번 루프는 이상한 일이 많이 벌어졌다. 비밀 결사는 드디어 파가 갈라지고, 이러쿵저러쿵 다투다가 결국 죽이러 오지도 못한 채 다른 파에서 우리에게 원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이론도 터무니없었다. 우리는 적당히 들어주며 생명을 보장받기로만 했다.
“리로이, 이리 와봐요. 드디어 끝났어요.”
“네?”
“고래가 오는 날짜, 지금은 파가 갈라져서 전부 예측 시기가 다르잖아요? 내가 계산하기에는⋯ 이 시기예요. 맞아, 7일 후. 그리고, 고래는 운명적인 어떤 하루에 드물게 찾아오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뭐, 일단 확실해요.”
“저번에 도와 달라던, ‘고통스러운 악마의 숫자 무리’가 다 그걸 위한 거였군요.”
“아아, 좀 봐줘요. 그래도 결과는 냈다고요. 리로이 지분도 당연히 있고. 내가 후하게 줄게요.”
“병사 지분도 있습니다.”
“알겠어요, 알겠어. 그럼 그쪽에 지원금을 줄게요. 크게!”
“네. 그래서, 7일 후에 저번에 왔던 파란 로브한테 같이 가자고 할까요?”
니아는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못한 듯,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반짝하고 떠오른 생각이 있는 듯 나에게 다가왔다. 내 양쪽 뺨을 붙잡고, 코를 맞대며 천천히. 또 장난이군⋯ 도대체 왜 이런 방식을 이용하는 건지 나로선 알 수 없다. 도대체가⋯⋯.
“우리끼리 가요.”
니아의 눈이 절실함으로 빛났다. 뒷말은 모르지만, 그냥 이번만이라도 싸우고 싶지 않은 거겠지. 설마 죽더라도, 우리 같이 있는 결말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네?”
“고래도 불쌍하잖아요, 모르는 인간들이 다짜고짜 자길 죽인다는데. 가서 얘기라도 하고 오면 안 돼요? 솔직히, 고래를 반드시 죽여야만 하는 이유도 없잖아. 그건 만에 하나를 위한 무식한 방법이었지, 진짜의 해결방안이라는 증명은 없었죠.”
“다시 말해, 말로 하는 담판이군요. 하지만 우리 영지가 아니면 난 그때처럼 싸울 순 없어요. 공간을 만들어 도망치는 것도 안 되고.”
“고래를 우리 집 앞바다에 부르면? 고래에게도 마력이 있어요. 그렇다면 통신마법으로 소통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내가 고래를 불러볼게요.”
“그럼 마력을 지원하겠습니다.”
새벽에 바다로 갔다. 어둠이 깔린 바다는 내가 불러낸 공간, 백야의 바다와 정반대였다. 니아는 다정하게 고래를 불렀다. 그냥, 당신과 대화하고 싶으니 만나자고 하면서. 고래는 군말 없이 우리 앞으로 와, 빛나는 보석 따개비를 보이며 물을 뿜어 댔다. 찬란한 따개비는 마치 수정처럼 무지갯 빛을 반사했다. 이걸 가공하면 다이아몬드가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마치, 어둠 속에서 자기 혼자 세상의 빛을 다 거머쥔 것 같다. 그래서 자기는 따개비를 캐러 간다는 이상한 말을 하는 마법사들도 있었군. 정말, 전설이 생길 정도의 아름다움이다. 어쨌든, 니아에게 고래는 무슨 일이야, 그렇게 말했다. 아무런 적의도 없는 목소리. 그래서 신기했지만, 긴장하며 손을 꽉 붙잡았다. 그래서 우리의 마력은 더 단단히 연결되어 원활히 움직였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전, 니아라고 해요.”
“난 이름이 없었어. 필요 없으니까. 자세한 이유는 묻지 마. 뭐, 내 나름대로 너희 종족이 나를 보고 뭐라고 하는 것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두긴 했어. 그래서 나는 오케아노스라고 해.”
고대인들은 고래를 바다의 신이라 생각하고 숭배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며 대화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도 신기하다. 고래는 정말로 무서운 것이 아닌 걸까? 겁에 질려 있으면서도, 우리는 편안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건 오케아노스가 우리를 배려해줬기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좋아하는 음식으로는 게를 꼽았고, 우리는 게 튀김이라는 것을 해먹는다고 했다. 오케아노스는 우리와 좋아하는 음식이 같았다. 사람들이 ‘제사’라는 것을 지내면서 게를 던져준 적이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맛있었다고 한다. 니아는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나갔고, 오케아노스가 나에게 질문을 하는 일도 있었다. 우리는 주고받으며 웃고, 오케아노스는 물을 뿜었다.
“오케아노스, 루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
“자업자득이지. 네가 시작했잖아. 나는 영원히 함께이고 싶다는 소원을 들어주었을 뿐이야. 너희는 항상 그걸 간절하게 바라니까, 내 방식으로 영생을 준 거지.”
“이제 그러지 않아도 돼요. 영생을 주느라, 따개비가 힘들어하진 않던가요?
“따개비? 아, 등에 붙어있는 이걸 따개비라고 부르는군. 이건 그냥, 돌기야. 다른 고래들과는 다르지. 감히 따개비 같은 것들이 내 등에 와서 살 수 있을 것 같아? 어림없지!”
오케아노스는 물을 뿜었다. 일종의 감정표현인데, 좋고 싫음에 따라 물이 그리는 각도가 다르다. 이건⋯ 허세? 꽤 화려했다. 덕분에 우린 아까보다 더 쫄딱 젖은 상태로 이야기해야만 했다.
“그렇군요. 오케아노스는 정말 재밌네요. 귀엽고.”
“너도 앙큼한 게 귀여워. 근데 나, 좀 답답하거든? 바다로 와서 말하면 안 돼? 숨은 쉬게 해줄게.”
그 말이 끝나자마자, 푸른 보석의 안에 들어온 것만 같은 황홀한 바다였다. 원래 잠수해도 이렇게 빛나지 않는데. 오케아노스의 마력 때문인 걸까? 우리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위를 보고 있으면, 오케아노스의 목소리는 더욱더 선명히 들렸다. 이런 건 인간 중에선 너희가 거의 처음이야. 전에도 있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나진 않고. 그냥 처음이라고 해줄게. 좋지? 그러자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정말로⋯ 그 고래와 교감하고 있다.
“근데 너희, 내가 그렇게 무섭니?”
“무서웠는데, 지금은 좋아요. 리로이도 그렇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죽일 생각이었으면 ‘대화’하자고는 안 했겠지. 요즘엔 좀 유감이었어. 난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죽이려 드는 이유를 몰랐거든.”
“그건, 다들 돌기를 무서워했으니까요. 결국 니아가 알아서 작동시킨 것이 되었지만, 오케아노스의 그 돌기가 루프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전설 때문에 다들 무모한 생각을 하고 만 겁니다. 그게 정말로 해결책인지 아닌지 따져보지도 않고, 공포에 눈이 멀어서요. 그래서, 우리는 그냥 대화하러 왔어요. 그냥 당신을 알고 싶어서요. 인사하고 말하며 알아가는 것이 당연하니까, 당연하게 다가가려고.”
내가 말했다. 오케아노스는 잠시 생각했다. 왜인지 모르지만, 웃은 것 같다. 일단 마력은 우리에게 호전적이니 안심해도 될 것 같다. 하지만 긴장해서 니아의 손을 꼭 잡고 말았다. 그러자 니아는 내 손을 맞잡아줬다. 그래, 잘할 수 있어. 살아서 돌아가자고 약속했으니까.
“좋아. 루프를 끝낸다는 것은 못 해. 하지만 그때처럼 돌기에 올라타서 반대 소원을 빌면 될 거야. 내일을 만들어서, 전해. 내가 대화를 원한다고. 나는 그냥 특이한 수상생물일 뿐이야. 너희가 바다에 술 뿌리는 걸 싫어하는, 오케아노스라고.”
오케아노스는 우리를 띄워서 보석 같은 돌기 위에 올려줬다. 눈을 떴을 때, 내 몸은 모래사장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오케아노스의 마력으로 남겨진 메시지에는 ‘기대하고 있을게.’라고 되어있었다. 우리는 ‘내일’을 축하하며, 햇살이 비추는 바다에서 춤을 추었다.
평화를 안고, 미래를 지켜나갈 것이다. 당신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