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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질 (洞質)

낮은 뱃고동 소리가 초여름의 바다에 울려퍼졌다. 하얀 궤적을 푸른 바다에 그려가며 움직이는 그 커다란 유람선에, 연분홍색 머리를 한 반팔 티셔츠의 소년이 갑판 울타리에 기대어 턱을 괸 채 저 밖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느릿하게 바다를 훑는 그 소년의 눈에는 과연 무엇이 담기고 있었을지, 넘어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한때 가장 핫한 아이돌로 위세를 떨쳤으나 불명예스러운 일에 휘말려 현재는 소속사를 잃은 채 여기저기를 방황하는 3인조 아이돌 그룹 ’TRIGGER‘ 의 센터 쿠죠 텐. 유명한 아이돌이었던 만큼 다른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알아볼 수도 있었지만, 다들 자신만의 시간에 빠져 바다를 쳐다보는 사람 하나쯤은 가볍게 무시하던 참이었기에 텐은 자신만의 생각을 방해받지 않을 수 있었다.

 

...라고 생각하던 참에,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귀에 꽂혔다.

 

“어이, 텐. 한참 찾아다녔잖아. 래빗챗 답장 왜 안했어? 여기서 뭘 하는 거고.”

“핸드폰 무음이야. 그냥 바다 구경. 왜, 볼일 있어?

”그건 아니지만. 안 보이니까 허전하잖냐. 류와 매니저는 완전히 곯아 떨어졌고.“

 

언제부터 허전함을 느꼈다고... 텐은 인기척을 느껴 무의식적으로 말을 건 상대와 마주했던 시선을 다시 바다로 돌렸다. 제 동료이자 TRIGGER의 리더인 야오토메 가쿠였다. 지방 촬영에 굳이 유람선을 타고 가는 것은 이 사람의 아버지이자 몸담았던 야오토메 프로덕션의 사장, 야오토메 소스케의 배려였지. 그러나 오래라면 오래고 아니라면 아닐 4시간 정도의 항해에 잠을 자고 싶지는 않았을 뿐더러, 언제까지나 SNS와 래빗챗만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쌍둥이 동생인 리쿠 말고는 연락할 사람도 없는데다가 그 리쿠마저 오늘은 스케줄이 많아 빠른 답장이 어렵다고 말했었으므로, 달리 무료하여 바다로 고개를 돌린 것이 벌써 시간이 이리 된 것이었다.

 

”아.“

 

물보라가 일더니 이내 회색의 동그란 것들이 배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솟구쳐 올라 호를 그리며 일주했다. 그것은 거대한 돌고래였다. 사이가 좋은 듯 보이는 그 생명들, 하나의 돌고래 떼는 숨구멍으로 물을 뿜어내는 것을 마지막으로 다시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돌고래 떼를 보면 기분좋은 만남이 있다던데.“

”웃기지 마. 지어낸 얘기 아니야?“

 

이런 망할 꼬맹이가 뭔가 알려줘도 난리야, 라며 잔뜩 성질을 내는 가쿠를 무시하며 텐은 그의 말을 곱씹었다. 기분좋은 만남이라, 새로운 사람을 보게 되려나. 어차피 비즈니스와 이어진 관계일 뿐일 것을 무슨 기대를 한담. 지금의 트리거에 새 멤버를 넣는 것도 말이 안되는 것이고, 그러면 다른 멤버나 매니저인 아네사기 카오루처럼 제 일상에 크게 간섭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저 ’비즈니스 파트너‘ 에 불과했던 가쿠와 류마저 자신이 정을 위해 진실을 알던 일을 모른 체 할 정도로 친한 친구가 되었던 것과 같이, 그 사람마저 자신이 정한 그 선 안에 들어오지는 않을까 하고.

 

잠시 눈에 보인 그 돌고래들은 짧은 만남 끝에 마지막 물보라를 남기고 사라졌지만, 그 물보라는 쿠죠 텐의 마음에 아직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겠지.

 

그 ’기분좋은 만남‘은 생각보다 꽤나 일찍 찾아온 참이었다.

 

 

유메노 하나는 야오토메 프로덕션의 사장실에 정자세로 앉아 무릎에 주먹을 올린 채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자신이 속해 있는 소속사의 사장이 굳이 전화로 부른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 있었을 때였고, 그것마저 자신은 선임에게 소문만 들은 것이었지 직접 겪어 보게 된 것은 처음이었으므로. 솔로 댄서로 데뷔한 그녀는 그닥 유명한 지명세를 타고 있지 않을뿐더러 서서히 잊혀지고 있었고 활동만을 아주 조금 하고 있었기에 돈만을 중시하고 이득이 되지 않는 것은 가차없이 버리는 소문이 자자한 사장에게 잘리는 건 아닐까 이런저런 고민을 껴안은 채 불려온 참이었다.

 

그녀의 앞에는 문제의 사장 야오토메 소스케와 진한 분홍빛의 긴 머리칼을 가진 여성 한명이 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 사람은 사내에서 지나치면서 뵈었던 것 같은데. 그 둘이 풍기고 있는 위압적인 분위기와 접객용 상에 떡하니 놓여 있는 종이봉투는 갓 성인이 된 유메노의 불안을 증폭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저 안에는 말로만 듣던 해고 관련 서류가 들어있는 걸까. 그래도 열심히 활동해 왔는데. 어떤 스캔들도 없이, 잘 견뎌내 왔었는데.

 

”유메노 하나 씨.“

”아, 네!“

”TRIGGER의 서포트, 해 볼 생각 없어?“

 

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에 그때까지만 해도 엄청나게 뛰었던 심장이 갑자기 뚝 멈춘 느낌이었다. 해고 이야기가 아닌 건 둘째 치더라도, TRIGGER의 서포트라니. 개인적으로 트리거의 엄청난 팬이었긴 하였고 특히 쿠죠 텐을 좋아했지만 공과 사 구분이 완벽했던 그녀는 트리거의 ㅌ자도 공개적인 곳에서 꺼내지 않았다. 그랬던 그 그룹이 갑작스레 스캔에 휘말리지 않나, 언론이 꼭 찝어 트리거를 까내리기 시작하고 3인이 나올 무대에서 1명만이 등장해 솔로로 노래를 부른 것에 논란이 되어 방송에서도 사라진 것은 들어 봤던 소문이었다. 그 뒤에 그들이 얼굴을 비친 곳은 최강의 2인조 그룹 아이돌, 리바레의 백댄서 신세였으니.

 

”트리거는 야오토메 프로덕션에 더 이상 소속되지 않게 된 것 아니었어요?“

”맞다. 하지만 그 녀석들을 그저 이 맨 땅에 던져놓기엔 너무 불안해. 그러니 그것에 도움을 줄 사람이 한명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서였다. 만약 수락한다면 활동은 일절 중지할 예정이다.“

”그러고 보니, 유메노 씨에게는 전화 안 왔어? 사내의 연예인들에게 전화가 걸린 모양이야.“

 

전화? 그러고 보니 츠쿠모 프로덕션이라고 하는 곳에서 전화가 몇통 걸려온 적 있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협력하라는 얼토당토 않은 소리에 그런 짓 안한다며 잔뜩 화를 내고는 번호를 차단해 버렸는데, 곧장 하루 뒤에 애당치도 않은 헛소문 가득한 기사가 떠돌아다녔지. 다행히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어서 기사 자체는 묻혀 버렸지만, 요새 이것저것 흉흉한 일이 많았다. 그 전화 때문에 그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이었나.

 

”뭐, 그래서. 하겠나?“

“물론, 하겠습니다. 거절할 이유도 없어요.”

“심사숙고 끝에 고른 의미가 있어서 다행이야. 자! 여기 서명해 줘.”

 

문제의 그 종이봉투에서 꺼내져 내밀어진 것은 계약서였다. 트리거의 춤 연습 파트너가 되어 줄 것. 극비 비밀을 유지하며 속된 말로 스파이와 비슷한 행동을 하지 말 것. 그리고 월급에 대한 이야기 등. 활동을 할 때보다는 조금 덜한 금액이었지만, 자취를 하는 자신을 위해 가까운 곳에 자취방을 얻어다 준다는 조건이 괜찮다 싶었다. 정작 수락을 하는 이유는 자신이 트리거의 팬인 것에 더 가까웠지만. 펜을 건네받아 서명하고 종이를 다시 정갈하게 건네주며 유메노는 슬쩍 물어보았다.

 

“그럼 전 이제부터 야오토메 프로덕션 소속이 아니라 트리거의 개인적 고용인인가요?”

“따지자면 그렇겠지. 지금까지가 연예인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스태프로 일해주면 되겠어. 트리거의 개인적인 스태프로서. 이건 너를 지키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

“저를 지킨다고요?”

“알겠지만 츠쿠모가 대대적인 방해 공작을 벌이고 있어. 자신을 따르지 않으면 언론을 이용해 완전히 생매장을 해 버리지. 팬들은 그걸 곧이곧대로 믿고 금세 자신이 좋아했던 아이돌에게 시선을 돌려 버린다. 그러하여 트리거를 잃었다. 더 이상의 희생은 만들고 싶지 않군.”

 

희생이라. 돈을 중시하고 예전에는 언론을 조작하여 다른 아이돌을 짓밟았던 그 야오토메의 사장이 저런 말을 할 줄 알았던가. 사라진 그들의 부재가 적어도 한 사람을 바꾸었다는 그 사실에 유메노는 적잖게 놀랐다. 하기사 평소 떠난 뒤에는 신경도 쓰지 않을 TRIGGER에 자신을 붙인 것부터가 따지면 이상하게 여길 일이었긴 했지만.

 

“다시 소개할게. 나는 아네사기 카오루. TRIGGER의 매니저야. 오늘 트리거의 일정은 밤늦게에서야 끝나니까, 내일 점심 쯤에야 볼 수 있을 거고.”

“아, 네. 알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일단 프로덕션 건물 로비로 와줘. 이것저것 할 일이 많으니까.”

 

탁.

사장실 문을 닫고 나오는 동시에 유메노는 안도의 한숨을 크게 쉬었다. 따지자면 해고려나 싶지만, 아예 일을 잃는 것보다는 즐거운 직장으로 발령난 것이라고 생각하면 쉬울까. 비틀려진 둥근 테 안경을 차분히 고쳐 쓰고 곱슬거리지만 엉키지는 않은 갈색의 머리칼을 잠시 쓰다듬으며 차분히 감정을 진정시키고는 핸드폰을 켜 트리거 관련 기사를 찾아보았다.

 

츠나시 류노스케, 스캔 파문...

TRIGGER, 모든 논란 정리

 

보면 볼수록 심란해지는 기사들. 그러고 보니 SNS에서도 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었다. 트리거가 이런 사람들인지 몰랐다라는 말부터 관련 기사에 힘을 실어주는 증언들까지 가득한 트리거에 대한 악의적인 발언들이 다수였지만, 자신은 솔직하게 그 모든 일들이 잘 믿기지 않았다. 아니, 갑작스레 그런 논란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인지부터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일 투성이였다. 그 문제의 츠쿠모 프로덕션에게 잘못 보인 것인가. TV 속의 모습이 아닌, 카메라가 꺼졌을 때의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 것인가. 내일이 무서워지기도 하고, 일면으로는 기대감을 가지며 그녀는 발걸음을 옮겼다.

 

 

야오토메 프로덕션 로비, 간편하게 검은 후드티에 기모 레깅스를 입고 크로스 숄더 백을 맨 채 유메노는 한켠에서 노래를 듣고 있었다. 한쪽 귀에만 꽂은 하양색 이어폰에서는 문제가 되었던 그 예의 ’소원은 Shine on the sea’ 가 들리고 있었다. 시간을 들여 여기저기를 꾸며 치장하는 것보다는 춤에 관련된 만큼 꾸밈없이 솔직하게 준비해야 할 것 같아서 편하면서도 잘못 보이지는 않게 나름대로 고른 것이었는데 좋은 선택이었을까.

 

“여기야.”

 

차를 이끌고 도착해 손짓하는 아네사기를 발견하고 유메노는 바로 그녀를 뒤따라갔다. 스캔과 트리거에 관해 물어보고 싶은 것이 한가득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질문이 오히려 해가 되겠지. 그러하여 군말없이 이끄는 대로 차에 타 중간에 들르게 된 핸드폰 대리점에서 보안의 이유상으로 업무용 전화기 하나를 새로 개통하고서 도착한 곳은 오피스텔과 비슷한 집이었다. 문 앞의 인터폰에 몇글자의 비밀번호를 입력하며 아네사기는 말하였다.

 

“여긴 류의 집이야. 지금은 TRIGGER 세명이서 살고 있어. 자취방은 아마 근처에 잡아줄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츠나시 씨의 집, 인가요... 아, 친절한 배려 감사합니다.”

“편의 때문이니까 신경쓰지 마렴. 유메노 씨를 믿고 있으니까 이렇게 하는 거야.”

 

엘리베이터의 층수가 올라갈수록 유메노는 더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 승강기가 멈추고 몇발만 내딛어 문을 두 개만 통과하면 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 팬과 아이돌로서의 관계가 아닌 스태프, 크게 따지면 또 다른 매니저와 아이돌으로서의 연을 맺는다는 것. 비록 이제 첫발을 내딛는 스태프에 불과한 그녀는 떨리는 마음을 주체하기가 어려워 씨알도 먹히지 않을 심호흡을 애써 내뱉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며 느껴지는 그 잠시의 쿵, 하는 감각에 가슴이 내려앉아 버린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 능숙하게 인터폰을 누른 뒤 문을 여는 제 앞의 사람에 자신도 나중에 저렇게 될 수 있을까, 라는 나름의 존경심을 내비치며 유메노는 조용히 현관문 안으로 들어섰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쿠죠 텐은 읽던 책을 조용히 덮어 제 앞의 탁상에 올려다 두었다. 발소리가 매니저의 것만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도 있었다. 분명 어제 스케줄이 모두 끝나고 매니저가 흘리듯 말했던 댄스 파트너가 될 그 사람이겠지. 같이 거실에서 나름대로의 오프 일과를 보내고 있던 가쿠와 류가 고개를 돌렸고, 자신도 또한 그 사람을 확인하려 시선을 옮겼다. 그 끝에는 갓 성인이 되었다는 것 정도는 한번에 알 수 있는 소녀가 한명 있었다. 저보다 약간 작은 키와 가슴까지 내려오는 갈색의 펌, 예의를 애써 차리려 다소곳하게 겹친 손과 검고 동그란 안경. 그 속의 차마 저들과 마주치지 못하여 밑으로 향한 시선. 아마 꽤나 부끄러움을 타는 모양이었다.

 

“어제 말했듯 소개할게. 이쪽은 유메노 하나 씨. 유메노 씨라고 불러주면 된단다. 오늘부터 너희들의 춤 연습을 도와줄 서포터라고 생각하면 돼. 사장님이 고민 끝에 붙여주신 분인 거, 알고 있지?”

“...아,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흐응, 조금 더 나이 많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쿠죠 텐은 그리 생각하며 제 눈 앞의 소녀를 위아래로 몇 번 훑었다. 나름대로 허둥대는 모습, 핑글핑글 도는 눈. 사람을 대하는 데에 상당히 초보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만 같았다. 어차피 비즈니스인데 상관은 없겠지. 곁눈질로 가쿠와 류를 보니 둘은 각자 자신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이를 반기는 것 같았다.

 

“어라... 그런데 조금 더 늙은 사람이 올 줄 알았는데. ”

“가,가쿠! 그런 말은 실례야!”

“편히 말 놓아도 되려나. 몇 살이야?”

“네, 괜찮아요. 이제 19세 쯤이에요.”

“헤에, 텐이랑 동갑이네. 인사해, 텐.”

“너는... 아니다. 알고 계시겠죠. TRIGGER의 센터, 쿠죠 텐입니다.”

 

앉아있는 소파에서 일어나 고개숙여 인사하자, 가쿠와 류도 그제서야 엉거주춤 일어나 그녀에게 묵례했다. 이래서 두명은 믿음직하지 못해. 사람을 만났으면 먼저 인사를 해야 하는 것 아니련가. 고개를 들자 그녀는 꽤나 당황한 듯싶다가 이내 고개를 꾸벅꾸벅 숙여 인사하고 매니저의 안내에 따라 1인용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겉치레를 많이 하지 않고 심플한 검은색의 후드티와 춤추기에 적당한 레깅스를 입고 온 것부터가 일단은 준비 면에서는 가산점을 쳐 줄 수 있을까.

 

“그나저나 너희, 정말 유메노 씨를 모르는 거야?”

“기사를 좀 더 볼 것 그랬나, 요즘 눈을 떼고 있었더니...”

“유명하진 않아요. 그냥 연예계에서 조금 활동했을 정도고... 상도 탄 적 없고요.”

“잠깐, 유메노 하나라고? 들은 적 있어. 야오토메 소속사 밑에 있을 때-”

“유메노 하나. 어린 나이에 데뷔한 1인 댄서. 댄스 쪽에는 일가견이 큰 걸로 유명하지. 그 외에도 거짓 기사 외에는 인성논란 하나 없는 사람.”

 

그 짧은 새에 기억을 뒤져낸 텐은 이윽고 그녀를 기억해냈다. 그렇게 댄스를 잘 하는 사람인가 싶어 기억에 남은 연유도 있었겠지만은, 자신과 동갑이란 점이 그녀를 제 뇌리에 꽂히게 만들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처음 봤을 때 바로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평소 그녀가 가지고 있던 –머리를 묶고 있었던- 강력한 이미지와 지금 제 앞에 있는 안경 쓴 부끄럼쟁이 소녀간의 갭이 너무 크기 때문이었다. 류처럼 사무실에서 미는 이미지와 실제 이미지가 크게 다른 케이스이려나. 제 입에서 튀어나온 저에 대한 언급에 흠칫한 그 소녀는 아무말 없이 고개를 숙이다 이내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센터인 쿠죠 씨가 그리 말하시니, 조금 부끄럽네요.”

“뭐야,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었잖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는걸.”

“우리 사장님과 내가 얼마나 고민해서 고른 사람인데, 그런 소리를 하니!”

“뭐, 어찌되었던. 가장 중요한 댄스 실력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누구나 첫만남은 정중하게 악수로 대해야 한다, 그것이 프로듀서이던 스태프이던 절대로 그들을 막 대하지 않는 것. 그것이 프로의 각오라고 그는 계속 생각해왔었다. 밀어주는 사람이 있어 아이돌이 있기에 그들을 절대 홀대하지 말라고. 텐은 제 앞에 선 이 자가 그리 소중하게 생각하던 제 팬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TRIGGER를, 그리고 자신을 서포트해줄 사람으로서 분명 관계를 유지해나가야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하여, 그 관계를 위해 내민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작게 흔들며 소녀는 미소지었다.

 

 

넓은 연습실에 시끄럽게 마찰음이 울려퍼졌다.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며 유메노는 한쪽 벽면에 가득 도배된 거울로 비쳐진 자신을 쳐다보았다. 거울 속의 자신도 당연히 똑같이 저를 보았다. TRIGGER의 댄스 파트너로서 일하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되어가는 날이었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이 –다반수로 가쿠와 텐이 싸우고 류가 그걸 중재하는 일이었지만- 폭풍우처럼 자신을 쓸고 지나갔다. 유메노가 그 일주일동안 느낀 감정은, 이 사람들은 그리 인성 논란이 생길 만한 자들이 아님을 넘어 꽤나 좋은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들 하나하나에 대한 갖가지 생각을 펼치며 의자에 올려진 생수병을 따 목구멍으로 흘려보냈다. 그러고 보니 춤을 추지 않을 때에는 항상 갖가지 생각이 제 머리를 가득 채우곤 했다. 그러하여 잡생각을 모두 날려버릴 수 있는 춤을 좋아했고, 따라 자연스레 댄서로 데뷔하게 된 것도 있겠었지만은.

 

“안녕하세요.”

 

이제 자연스러울 수 있을 그저 연습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였지만, 생각에 빠져있던 유메노는 갑작스러운 자극에 깜짝 놀라 들고 있던 물병을 채 떨어뜨릴 뻔했다. 익숙한 말 소리와 익숙한 걸음소리를 따라 들어온 사람들은 연습복을 입은 트리거의 멤버들. 양 옆에 가쿠와 류를 두고 걸어오는 텐의 모습에, 일주일이 지났어도 아직 채 대하기 어려운건 똑같았던 그들이었다. 그 모습에 유메노는 작게 목례했다.

 

“유메노 씨, 신곡에 대한 이야기는 들으셨죠?”

“아, 네. 그렇지 않아도 안무에 대해서 고민중이에요.”

 

연례행사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JIMA, Black or White와 더불어 열리는 MOP: Music Of People에서 신곡을 불러 화려한 컴백을 꿈꾼다는 계획을 매니저인 아네사기 씨에게 들었던 것이 오전이었다. 상대 팀으로 겨루게 된 IDOLiSH7은 분명한 루키이자 강자였고 트리거가 몰락한 그 자리를 채워나가며 꽤나 잘 나가고 있는 아이돌이었지. 그렇다고 그들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당장 몰락 전까지 아주 친밀했던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었다는 이야기를 SNS로 자주 들어왔었다. 또한 그들의 노래는 사람에게 힘을 불어넣어 준다고, 아이돌리쉬 세븐의 팬이었던 제 친구가 귀가 아프게 자랑을 한 적이 있었지. 요츠바 타마키를 제일 좋아한다나 뭐라나... 어쨌건 그들과 겨룰 수 있으려면 모든 방면에서 완벽해야 할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들의 춤을 팬으로서 계속 주시해 오긴 했지만, 트리거를 다시 최고의 자리로 올려놓는 일은 안무 담당으로서 꽤나 중압감이 드는 일이었으므로.

 

“유메노. 신곡의 분위기에 따라 대강 안무를 짜 왔는데 확인해주지 않겠어?”

“...네? 시간이 별로 없었을 텐데, 어떻게...?”

“간단한 일이에요. 소속사를 나오기 전도 후에도 안무는 저희가 짜고 있으니까.”

 

그러면 왜 나를 여기에? 지금까지 자신의 안무는 자신이 짜왔던 유메노였지만 궁금증이 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의문을 말끔하게 해결해준 것은 이어 나오는 답이었다.

 

“안무를 저희가 짜곤 했지만 노래도 춤도 하는 저희들보다는 댄스만 했던 유메노 씨가 더 잘 알 것 같아서. 소속사에 있을 때에도 많은 분께 도움을 받았었고, 저희를 서포트해 주실 인력이 부족한 만큼 사장님도 분명한 아군 한 명 정도는 붙여주고 싶었겠죠.”

 

분명한 아군이라. 연습실 벽면 중앙에 세워진 의자 위 스피커를 향하던 손이 목소리를 듣고 멈춘 건 분명히 그 목소리를 듣고 난 다음이었다. 이 사람들은 나를 분명한 아군으로 생각하고 있구나, 아무리 이 사람들이 좋은 사람들이라고는 해도, 아직 자신은 그들과 분명한 선을 긋고 있었다. 그룹은 그룹, 스태프는 스태프라고. 내가 사사건건 그들의 사생활에 대해 묻고 이야기를 나눌 필요는 없다고... 그 선은 그들이 저에게 넘는 것을 막는 의미도 있었지만 –물론 아직까지 TRIGGER가 자신이 정한 선을 넘는 일은 없었다- 자신이 너무 그들에게 푹 빠지지는 않을까에 대한 걱정을 담아 넘으면 안된다고 저를 타이르며 그은 선이기도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을 누구보다 곁에서 지켜보는 자로서 어느새 이들에게 푹 빠져 버릴 것 같았으니까.

 

“뭐, 어쨌건. 레슨 지도자로서... 안무, 확인하겠습니다.”

 

‘DAYBREAK INTERLUDE’. ‘새벽의 막간‘이라는 이름을 가진 앞으로 한낮을 맞이할 기회가 되는 곡이자, 그들의 기준에는 꽤나 길었던 밤과 새벽의 끝을 낼 곡이었다. 안무를 보기 전까지는 오히려 너무 완벽한 것 같아 내가 고쳐줄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으나 이렇게 고치면 조금 나아 보이겠다는 부분이 다수 보이게 되어 그나마 안심하며 일을 시작하는 그녀였다.

 

“이쪽은 이렇게 손을 뻗고, 다리 사이의 간격을 늘리면 조금 나아 보이지 않을까요.”

 

텐은 나름 그녀의 전문력에 대해 놀랐다. 왜 셋이서 이런 구도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자세를 조금만 고쳐도 훨씬 안정적인 춤사위가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사장님의 안목이 틀리지는 않았구나, 라는 생각 속 그녀의 목소리가 끼어들어왔다.

 

“쿠죠 씨의 솔로 파트는...”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아요, 라며 유메노는 텐의 앞에서 아까 보았던 것에서 조금 고친 느낌의 댄스를 선보였다. 처음 보는 춤을 이리 빠르게 습득해내는 것도 모자라 거기에 변형까지 가해 더 안정적인 느낌을 내다니. 어릴 때부터 잘 교육받았던 그의 눈은 그녀가 그저 단순하고 평범하기 짝없는 댄서가 아님을 꿰뚫어냈다. 자신과 다른 춤의 유형이면서도 그 기초와 담겨있는 각오 자체는 장난으로 이곳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비즈니스 파트너. 텐은 가쿠와 류에게도 그런 말을 자주 꺼냈던 사람이었다. 개인의 사생활에 침범하지 마. 가족에 대해 물어보지도 마. 말겠어? 우린 그저 일을 함께하는 비즈니스 파트너일 뿐이니까. 내가 너희의 가정사정에 대해 물어보지 않는 것처럼 너희가 내 사정을 들을 필요는 없어, 라고. 남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날카로운 말을 서슴없이 내뱉음으로서 선을 긋는 것이 바로 쿠죠 텐이었고, 나름대로 정하였던 그 선을 넘어와도 어느새 모른체하기 시작한 것은 어느새부턴가 멤버들을 소중히 여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아이돌로서의 각오는 남겨둔 채 본인에 대한 벽은 무뎌지고 무뎌져 꽤나 유해진 상태였다. 그러하여 레슨이 끝나고 나서 그런 질문을 던져버린 것인지 모르겠지만.

 

“유메노 씨는, 언제부터 춤을 배우기 시작했던 건가요.”

“글쎄요,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한 것 같은데. 명확히 기억은 안나네요. 하도 오래되어서.”

 

정말 어릴 때부터 했던 것 같은데, 10년은 되었으려나. 손가락을 접어가며 세어가는 그녀를 보고 텐은 왜인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아이돌로서 키워진 자신과 같은 춤의 길을 걸어온 사람. 그것에 대해 반가움을 느껴 조금 더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니.

 

“그럼, 이쪽에 발을 들인 이유는 뭐죠?”

 

올 것이 왔구나. 유메노는 긴장한 나머지 침을 삼켰다. 텐이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를 틈타 가쿠가 심각한 표정으로 주의를 준 적이 있었다. 저 녀석은 TV에서 보이는 모습과 완전히 180도 다른 냉혈 고슴도치니까 조심해야 한다고. 섣불리 다가갔다간 오히려 상처를 입을 수 있다고. 발을 들인 이유라, 그냥 어릴 때부터 춤을 추고 싶었을 뿐이었다. 항상 춤을 추면 즐거웠으니까. 남을 웃게 하고 싶다는 이유는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냥 겸사겸사 돈을 벌기 위해 스카우트되어 무대에 섰을 뿐이었다.

 

“그냥, 춤추고 싶었어요. 어떻게 데뷔했고, 어떻게든 무대에 섰지만...”

 

쿠죠 텐이라는 자의 프로 의식은 이곳저곳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그에 비해 자신은 자신을 좋아해주는 팬들에게 갚으려는 생각도, 그들에게 항상 최고의 퀄리티를 제공하려는 생각과는 꽤나 먼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결과론적으로만 본다면 그와 자신은 같으면서도 달랐다. 겨우 그런 아주 작은 공통성을 가진 것밖에 되지 않으면서 동질감이 이는 것은 어째서일까.

 

“그저 춤을 추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이쪽의 길을 걷게 했어요. 제게 쿠죠 씨같은 각오가 있지는 않지만 그냥 즐거웠을 뿐이라서... 네, 그것뿐이에요. 지금 제가 새로이 먹은 각오는 그저 여러분들을 다시 최고로 끌어올리려고 할 뿐이니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최고가 된 다음에 당신은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어떻게라니.. 당연히 원하시는 한 계속 남아 있을 거예요. 계약 관계를 넘어 제가 여러분들을 도와주겠다고 생각했고 다짐했으니까.”

 

원하는 답이었을까요. 흐리듯 답을 끝낸 유메노에게 텐은 그저 고개를 끄덕여 넘겼을 뿐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가쿠는, 텐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자 약간 놀랐다. 저 망할 꼬맹이라면 분명 이것저것 캐물으며 여러 가지로 곤란하게 만드는 게 다반사였는데.

 

“궁금했을 뿐이니까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오늘 레슨, 수고하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

 

후우, 문이 닫히자마자 소녀는 턱 막혔던 숨을 내뱉었다. 나름대로 진실한 마음에서 꺼낸 대답이었는데, 그를 만족시킬 수 있었을지에 대한 의문감이 일었다. 표정을 구기지는 않았지만 속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저 자신이 그를 넘어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이었으면 하였으니. 사실 이에 빌어 TRIGGER의 3인 중에서 가장 대하기 어려운 것도 쿠죠 텐이었다. 순수한 바닷가의 청년인 츠나시 씨는 어떨 때에도 상냥했고 사장의 아들인 야오토메 씨 또한 자신이 이 분위기에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문제는 역시 텐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그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팬이었던 시절 그의 눈은 항상 사랑과 행복감으로 차 있었지만- 자신이 무슨 잘못이라도 한 양 한없이 작아지곤 하였다. 딱히 잘못한 것도 없었는데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그저 단순히 그 분위기에 압도되었던 걸지도 몰라. 유메노는 그리 생각하며 자신이 할 분량의 뒷정리를 마저 했다.

 

 

“어이, 텐. 너 말이야, 좀 이상하다.”

“뭐가?”

“아무리 봐도 이상해.”

 

대체 무슨 소리야, 라며 닫힌 차창에 괴고 있던 팔을 내려 고개롤 돌리며 매사 그랬듯 텐은 가쿠의 말을 날카롭게 되받아치자 어이없단 표정을 짓고 있던 가쿠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시작했다.

 

“갑자기 이상한 질문을 날리지 않나, 남에게 좀 더 관심이 있고 다정해진 느낌이고, 예전과는 정말 너무 다르잖아. 우리 때문에 그런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확실히 그렇긴 하지, 텐이 착해졌어, 라고 류가 맞장구쳤으나, 정작 그 말을 들은 텐은 이해할 수 없는 요소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내가 바뀌었다고? 대체 어디서. 왜?

 

“혹시 새로 온 댄스 트레이너 때문에 다른 이미지를 챙기려고 하나?”

“아니... 헛소리 하지 마. 정말로 내가 변했다고 생각해?”

“응, 충분히. 아까도 평소라면 그런 질문 자체를 하지 않았을 거야.”

 

텐의 입장에서는 그 두 명이 훨씬 이상해 보일 지경이었다. 이미 아이돌에서 내려와 자신들을 서포트해주는 그 사람이 제 사람들을 최고로 끌어올리려는 각오는 당연한 것이었고, 댄서의 길을 그만두고 일종의 은퇴를 한 사람에게 더 이상의 잔소리는 필요없지 않나 싶을 뿐이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아이돌이 아니었으니까. 그러하여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텐은 물었다.

 

“그게 뭐가 이상해서?”

 

허, 이거 봐라. 역시 이상하다니까. 가쿠는 쯧 혀를 차며 탄식했다. 가쿠의 입장에서 텐은 분명히 선을 그었던 사람인 데에다가, 저와 류와 쌓은 관계도 동료가 되면서 생긴 ’텐만 부정하는‘ 관계였을 것이므로 만난 지 겨우 일주일밖에 안되는 사람에게 그렇게 코치코치 캐묻는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설령 오히려 상대에게 캐물음을 받더라도 상관없는 일이라며 쳐냈을 그 쿠죠 텐이 자신이 이상하다는 사실부터 자각하지 못하다니. 적잖이 이상해진 모양이네, 라며 마침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린 류와 눈을 마주치고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갸웃댈 뿐이었다.

 

 

“아아, 원. 고생이 많다니까.”

 

점심이 끝나갈 무렵 커피숍에서 아네사기는 크게 한숨쉬었다. 아이스로 담긴 아메리카노가 툭 하고 테이블에 놓여졌다. 주의의 몇 없는 사람들은 다들 자신의 용무에만 집중하고 있어 차마 이 사람이 얼마나 크게 이야기한다고 해도 말을 엿듣거나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하여 시선에 부담받지 않고 유메노는 편히 입을 열 수 있었다.

 

“다들 열심히 해 주고 있으니까요. 벌써 뮤비도 찍고 있고.”

 

이게 모두 다들 열심히 해 준 덕분일 거예요. 유리컵에 담긴 아이스 카라멜 마끼아또를 두 손으로 감싸쥐며 유메노는 웃었다. MOP까지 한 달 남짓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촉박하다면 촉박하고 많이 남았다면 많다고 말할 수 있을 시간에, TRIGGER는 신곡의 뮤비를 마무리하러 자리하고 있는 커피숍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촬영장에 있었다. 매니저와 댄스 트레이너는 촬영 과정에서 꼭 상주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잠시 커피 한잔 할 겸 내려온 것이었다. 영양가가 없을지 모르는 각종 이런저런 대화 –그 중의 90%는 TRIGGER의 일정에 대한 이야기였지만-를 나누던 참이었다.

 

“MOP에서 우승하게 되면 그래도 TRIGGER는 다시 상승세를 타겠죠?”

“글쎄. 봐야 알겠지. 그 아이들이라면 정상에 올라갈 수 있으면서도, 연예계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하긴 그렇긴 해요. 요즘은 IDOLiSH7과 함께 짜고 우승을 하게 한다는 소리도 있고요.”

“설령 어떤 거짓 소문이 있다 해도... TRIGGER의 실력이 진짜라는 걸 보여줘야지.”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이며 유메노는 커피를 머금어 마셨다. 별로 좋지 않은 스캔에 휘말렸지만 한번 더 나아가 최고로 향할 것이라고, 향하게 할 것이라고 각오했던 그녀였기에 그들을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었다. 아주 조금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연예계에서 살면서 그녀가 느낀 것은 실력이 모든 것을 누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말에서 제일 어울리는 그룹이야말로 TRIGGER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느새 푹 빠져 있는 본인을 발견하고 조금 놀란 그녀였지만, 오히려 누구라도 푹 빠지게 만드는 것이 그들의 매력이라 수긍했다.

 

- 띠롱.

알림 소리에 핸드폰을 꺼내든 유메노의 눈에 발신인이 ’쿠죠 텐‘ 으로 되어 있는 래빗챗이 보였다. 촬영 끝났습니다, 라는 간결한 한마디가 알림창에 깔끔하게 들어와 있었다. 그걸 흘끗 본 아네사기가 옆에서 말을 얹었다.

 

“그동안 서로 많이 친해졌나 봐? 언제는 잘 지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더니.”

“그게, 왜일까...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는 느낌이더라고요.”

“뭐어, 원래는 내게 연락해야 하는 거 아닌지! 텐 녀석도 참.”

 

당장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쿠죠 씨를 보면 복잡한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대하기 어렵다며 두었던 거리는 텐의 훌륭한 언변으로 사라져 지금은 TRIGGER의 세 명 중 가장 친한 사람이 되어 버린 뒤였다. 막상 그렇다고 해도 예의상의 이유라며 유일하게 자신에게 말을 놓지 않고 있었지만은.

 

“여러모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안도하듯 낮은 목소리로 유메노는 말했다. 깨끗하게 비워져 얼음만 남은 유리컵이 달칵거렸다. 뭐가 다행이니, 라며 묻는 아네사기의 말에, 모든 것이라며 웃은 것은 다음이었다. 자신이 야오토메 사장님과 아네사기 씨에게 선택받은 것과 그걸 수락한 것, 그러하여 모든 사람들을 만나서 지금까지 걸어온 것. 비록 채 몇 주 되지 않은 시간이더라도 이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밝은 녹색의 눈이 안광을 받아 반짝였다. 그에 아네사기도 보답하듯 다정한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이쪽은 야오토메 씨, 이쪽은 츠나시 씨. 그리고 이 부분은 셋이서 같이. 그 다음은 텐 씨의 파트로.”

 

플레이어에서 이젠 익숙해진 간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에 맞추어 손을 뻗고 발을 굴러 합을 맞추는 것이 각자의 개성을 합하면서도 일체감이 흐르는 느낌이 났기에 다들 그때만큼은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했으리라. 하나가 된 것에 대한 짜릿한 전율에, 그들과 함께 같은 느낌을 맛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껴야 할 정도였음을 유메노는 알았다.

 

목표로 하는 것은 같으니까

 

어떠한 스캔들이 있고, 어떠한 불공정한 일이 있던지 이 세 명은 쓰러지지 않는다. 최고를 위해, 전설의 아이돌인 제로의 위치를 향하는 것은 그들의 목표이며 그들을 끌어올리는 건 매니저인 아네사기 씨와 저의 임무였으므로. 그러니 선택받은 데에 조금 더 자존감을 가지고 긍지를 가지자. 팬들은 TRIGGER의 복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TRIGGER는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미래를 위해 관철하고 싶어

 

연습실 한 켠에 걸린 달력은 하루 뒤가 MOP라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마지막 연습이자 새벽의 막간이 될 일은 바로 내일이었다. 우리는 그 무대에 대해 너무나 간절했다. 그것은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동안 상처입었을 팬들에게 다시금 믿어 달라는 호소를 위한 목적도 있기야 하겠지만, 설령 이기더라도 조작이라고 언론계가 수작을 버릴 것이 분명했지만 그들은 최고가 되겠다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노래하고, 어떤 강력한 자여도 이들의 행보를 멈출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함성이 울려퍼졌다.

 

 

“TRIGGER 여러분, 곧 들어가겠습니다.”

 

MOP 담당 스태프가 말을 끝내지마자 우렁찬 함성소리가 시끄러웠다. 바로 전의 무대가 끝난 모양이었겠지. 제복과 비슷한 형상을 띄고 있는 특유의 의상을 다듬는 것을 스태프를 도와 돕던 유메노가 아무생각 없이 텐의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허리로 내려가는 붉은 띠 모양 장식으로 손을 뻗었다. 단정하게 맞춰준 뒤 시선을 올렸을 때 둘이서 눈이 마주친 것은 바로 그 다음이었다.

 

반드시 이기고 오겠습니다.

 

그 가까운 거리라서 겨우 들을 수 있었을 만한 속삭이는 목소리로 텐은 말했다. 의지와 각오, 그리고 또한 어떤 감정이 담겨 있을지 유메노로서는 모를 핑크빛 눈이 침착하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몇 달 전 느꼈던 것과 같은 잘못한 듯한 감정을 더 이상 느끼지는 못하였다. 그것이 자신이 이 사람과 조금 더 가까워졌다는 증거일지, 혹은 텐의 시선이 달라진 건지는 본인도 헤아릴 겨를이 없었지만. 다녀오겠다는 뜻으로 잠깐 목례한 셋은 그대로 계단을 올라 스테이지에 섰다.

 

새벽은 그렇게 끝을 맞이하고 있었다.

 

노랫소리는 감동을 만들고, 어둠을 몰아내어 해를 가져온다. 절대로 가라앉지 않는다는 외침은 그들을 다시 수면 밖으로 끌어내었으며 울려퍼진 마음은 심장을 뛰게 하였다. 혼신의 힘을 담은 무대는 모두에게 만족을 주었고, 설령 이 승부의 결과를 가지고 ’서로 짰다‘ 라고 퍼뜨리려는 비열한 수작을 채 망설이게 하였을 것이었다. 이들은 언제나 당당했고, 잘못하지 않았으면서 상처입었고, 그럼에도 아직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That’s right: never die, 가라앉지 않아.

 

그 누가 이들을 가라앉게 만든다는 것인가. 그것이 어떤 강한 것이 되어 이들을 매장시키던 어떻게든 비집고 나와 계속 노래할 것이 TRIGGER였는데. 최고의 스테이지와 최고의 무대가 만나 몸짓, 가사, 목소리 하나하나가 전부 심장을 헤집는 기분이었다. 백스테이지에서 영상을 보고 울림만을 느끼고 있는 저도 이런 느낌인데, 관객석에 자리한 사람들은 대체 어떤 느낌과 생각을 하고 있을지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그녀는, 아니 백스테이지의 모두는 끝나가는 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TRIGGER의 DAYBREAK INTERLUDE였습니다!”

사람을 매혹시킨다는 무대는 어떤 것이냐고 누군가 물었던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무대로서 팬들에게 행복과 감동을 주는 것이라는 말을 어린 시절 들었을 때에는 그냥 말로만 그런 것이겠지라고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가기만 했었다. TRIGGER의 무대를 TV에서 접했을 때만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의 일을 맡으면서, 안무를 도우면서, 바로 옆에서 숨쉬고 있는 그들을 보고 있자면 그 전율과 감동은 실존한다고밖에 믿을 수 없었다.

 

그러하여 우리는 TRIGGER를 사랑하게 된 것이라고.

그러니 우리를 사랑하는 데에 긍지심을 가져 달라고.

 

“이번 Music Of People의 승자는, TRIGGER!”

 

새벽은 이제 완전히 끝났다고.

 

 

“이번의 승리는 원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중간점일 뿐이에요. 더더욱 노력해서 전설의 아이돌인 제로의 길까지... 아니, 제로를 넘어 몇 세기에 이름을 남기는 아이돌이 되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팬들을 웃게 하는 것들도.”

 

한밤의 시원한 바람이 더운 날씨를 조금 식혀 주었다. 달빛을 받아 하얀색 비슷하게 빛나는 머리칼의 소년이 옥상의 테라스 울타리에 앞을 기댄 채 말하며 작게 웃었다. 추억과 각오가 담긴 다정한 눈의 끝에는 검은 후드티를 입은 갈색 머리칼의 소녀가 있었다. 안경 렌즈 너머로 보이는 그 예쁜 녹안이 접혔다.

 

“이제 나아갈 시간이에요. 새로운 역사를 다시 한번 열어나가고, 세기에 이름을 적기 위해. 그리고 팬들에게 감동을 다시 선사해 주기 위해.”

 

산들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꽃은 말했다. 밤의 이야기는 항상 솔직함을 불러왔다. 그것이 새벽의 특색인지, 혹은 애초에 솔직한 이야기를 하려 이 시간에 만난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어찌했던 밤은 짧았고, 하늘은 서서히 붉어지고 있었다. 테라스 끝에 서 있는 두 명에 시선에 해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바로 다음이었다. 그것이 마치 돌아올 영광과 비슷하다고 둘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영광을 직접 마주할 사람과 그걸 돕는 사람. 이 둘 간에 몇 달 이후 일어날 일은 지금으로서는 누구도 모르고 있었지만은.

 

“앞으로도 계속, 계약관계를 유지하는 거죠?”

 

아무래도요. MOP에서 이겨도 지금의 TRIGGER에게는 아직 서포터가 필요하다고 아네사기 씨가 말하셨으니까요, 라고 유메노는 텐의 물음에 답했다. 아무리 이겼다고 해도 아직까지는 라이브 하우스를 방황하는 그룹은 똑같았으니까. 기회를 한번 잡아 최상으로 올라가고 나면 자신이 필요없어지는 걸까라는 생각이 이윽고 다가왔으나 굳이 입으로 꺼내고 싶지는 않아 목구멍으로 삼키기만 하였다. ‘그 다음에 계약관계가 아니어도 계속 있어주면 좋을 텐데’ 라는 텐의 중얼거림이 들리지 않은 것은 텐의 목소리가 너무 작았던 것도 있던 데에다, 서로 간의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저는 유메노 씨를 TRIGGER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어요. 다른 멤버도 아마 그럴 것이고. 아네사기 씨도 유메노 씨를 꽤나 신뢰하고 계신 것 같고. 이제는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에요. 저희가 최고가 되어도 유메노 씨가 필요없어지는 날은 없을 거예요.”

 

생각을 꿰뚫은 듯한 텐의 말에 유메노는 흠칫 놀랐다. 언제나 그의 말은 자신이 하던 생각에 정확히 꽂히고는 했다. 그저 자신이 하는 생각이 너무 많아 사소한 말에도 쿡쿡 찔리고는 한 것이 사실기도 하였으나, 그녀는 슬슬 텐이 초능력이 있으리라 짐작하고는 했다. 물론 텐의 입장에서는 그냥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솔직하게 말으로 나누는 것이었고, 사람 마음을 짐작하는 취미나 초능력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었지만.

 

“그렇게 말해주시면 감사해요.”

 

벽이 무너진 지는 꽤나 오래되었지만, 유메노는 퍽이나 현실적인 것이 문제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파파라치가 생겨 스캔이 뜨는 것을 걱정했고 지금의 행복을 쫓는 것보다는 먼 미래를 바라보고 그에 대한 걱정을 너무 많이 하는 것이 그녀의 문제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텐의 –어찌 보면 그저 사람을 안심시키기 위해 하는 빈 말일 수도 있었겠지만은- 그 말에 왜인지 모르게 너무나 안도할 수 있게 되었다. 잠시의 불안감에 아래를 내려다보던 눈은 다시금 시선이 움직여 텐을 바라보았고, 텐은 계속 떠오르는 해를 보고 있었다. 그 눈에 차오른 어떤 것인지 모를 감정이 그녀에게는 쫓아갈 빛 그 자체였다.

 

“여기 있었네, 일찍 일어났어?”

 

잔뜩 분위기에 빠져있는 둘을 뒤돌아보게 한 것은 류의 목소리였다. 가쿠와 류, 그리고 아네사기가 테라스로 올라오는 계단 쪽에서 모여 조용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보고 있었다, 라는 느낌에 유메노의 볼이 잔뜩 붉어졌다.

 

“대체 왜 보고 있었던 건데. 언제부터?”

“방해할 수는 없는 것만 같은 분위기잖아? 사실 바로 아까 왔어.”

 

무의식 중에 텐에게 고개를 돌리자 그가 제 검지를 입술에 대어 쉿 하는 제스터를 취했다. 밤 사이에 나누었던 이야기는 비밀로 해요, 라며 윙크하는 그 모습이 마치 세간이 극찬했던 ‘천사’ 와 똑같은 그 모습에 예쁘다고 생각하며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게 유메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확인한 텐이 팔을 내리며 이내 싱긋 웃었다.

 

“경치가 좋은데 다들 모여 사진이라도 찍지 않겠니? MOP 우승 기념! 사장님께 보낼 사진도 필요하고 말이야.”

 

라는 아네사기의 말에 따라 5명 모두 경치가 잘 보이는 테라스에 옹기종기 모였다. 뒤편에 키가 큰 류와 가쿠, 중앙에 아네사기와 유메노가 자리했고 그 중간에 텐이 끼었다. 삼각대에 세워둔 핸드폰이 플래시를 터뜨렸고, 이내 꽤나 절경의 사진을 찍어내었다. 도시를 뒤로 한 5명이, 하나같이 행복한 듯 웃고 있는 사진이 만들어졌다.

 

그 TRIGGER라는 그룹에 동질감을 느끼며, 특히 쿠죠 텐이라는 사람 간에 서로 동질감을 느끼며 유메노는 그들에게 녹아들었다. 설령 어떠한 더한 장애물이 오더라도 우리는 힘을 합쳐 꼭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 넘어가게 할 것이라 다짐하며 유메노는 아네사기에게서 받아낸 그 소중한 사진을 핸드폰 배경화면으로 설정했다. 힐끗 본 다른 멤버들의 배경화면도 전부 아까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밝은 해처럼, 밝은 아침이 그들에게 찾아왔다.

TRIGGER의 센터인 쿠죠 텐에게도,

그리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유메노 하나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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