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무가 자라는 토양
하시모토 유메는 세이린 고교에 치어리더 단원들과 함께 와 있었다. 좋아하는 후배들이 세이린 고교에 있었고, 농구를 하기에 인터하이 예선전을 구경하기로 했다. 유메는 잔뜩 기합이 들어간 얼굴로 모두와 인사를 나눴다.
“다들 안녕!”
“유메 선배!”
“어, 선배. 오셨네요?”
세이린 고교 2학년 학생들이 유메와 인사를 나누자, 두 학생이 유심히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타 학교 학생이거나 혹은 같은 학교 3학년 선배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오늘 경기 힘내! 모두들 응원하고 있을게!”
“고마워요, 선배.”
“아. 그러고 보니, 세이린 신입 부원이야?”
“네. 어이, 너희들. 인사 드려라. 우리 선배셔.”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쿠로코 테츠야입니다.”
“카가미 타이가다!”
“너 내가 선배라고 했냐, 안 했냐!”
휴가가 잔소리를 퍼붓자 카가미는 괜스레 뒷머리를 긁적였다. 유메는 개의치 않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신경 안 써도 돼. 안녕하세요, 하시모토 유메라고 해요! 토오 학원 3학년이고 지금은 치어리더단 단장을 맡고 있어요.”
“토오 학원이라면 아오미네 군이 있는 학교겠네요.”
“네, 맞아요. 쿠로코 군과 같이 농구부를 했었다고 들었는데 정말인가요?”
“네.”
“그렇구나!”
“그, 그러면 염탐하러 온 검까!”
카가미가 그렇게 묻자 유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 사츠키 쨩처럼 엄청난 정보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닌걸요. 치어리더일 뿐이고, 쥰페이와 이즈키 군, 리코 쨩을 응원하러 온 것 뿐이니까요! 우리 후배들 많이 도와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정중하게 부탁하는 유메 탓에 카가미도 할 말이 없는지 아까보다 더 머리를 긁고 있었다. 쿠로코는 유메를 유심히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 다른 부원들과도 인사를 나눈 유메가 관중석으로 갔다. 일행들과 함께 사라지는 그를 보며 2학년 부원들이 웃었다.
“선배는 참 변한 게 없는 사람이네.”
“정말 그래.”
유메가 관중석에 자리를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이린 고교와 슈토쿠 고교 간 인터하이 예선전이 시작되었다. 그는 열심히 세이린 고교를 응원했는데 어느 순간 입을 벌린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그 모습에 같이 있던 단원들이 이상하게 여겼는지 유메 눈길이 닿는 곳으로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눈에 들어온 건 새하얀 피부를 가진 슈토쿠 고교 슈팅가드였다. 녹색 머리카락을 지닌 그는 옆모습만 봐도 미인이었다. 유메는 하얀 손끝이 골대를 향하는 것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단원들은 유메 눈치를 살폈다. 분명 누가 봐도 저것은 엄청난 호감 표시였다. 시선을 다른 데서 떼지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며 손을 꼼지락거리는 게 누가 봐도 호감 가득한 행동이었다. 유메는 스스로 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누군가에게 끌렸던 적이 한 번도 없던 지라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저 시선을 잡아끄는 슈토쿠 슈팅가드 눈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을 뿐이었다.
“옆얼굴도 근사한데 정면은 얼마나 근사할까?”
“선배, 저 사람 마음에 들어요?”
“네?”
“선배가 그렇게 누구 쳐다보는 거 처음 봐요.”
후배가 봐도 그 정도면 정말 제가 슈팅가드에게 빠져있다는 뜻이었다. 유메는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헉, 하고 숨을 뱉다가 다시 세이린을 향해 응원전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뭔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단원들은 유메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경기가 끝나고 유메는 단원들을 먼저 보내고 세이린 고교 농구부원들을 보러 가려다 슈토쿠 슈팅가드와 쿠로코가 대화를 나누는 걸 목격했다. 혹시 테이코 농구부 출신인가 싶어진 유메가 멀찍이 서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대화를 마친 슈팅가드는 돌아가려 했는데, 유메와 눈이 마주치자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내 사라졌다. 눈 예쁘다. 유메는 그런 생각을 하며 멈춰 서서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있노라니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하시모토 선배.”
“앗?”
“무슨 일 있으신가요? 대답이 없으시기에.”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 그렇지. 쿠로코 군! 다들 어디 있어요? 같이 가요!”
쿠로코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유메 앞에서 걸었다. 모두 경기를 마치고 이온음료를 마시고 있을 때, 유메가 말했다.
“다들 고생했어요!”
“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고맙습니다, 선배!”
감사 인사를 받은 부원들은 제각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유메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얼굴이 잔뜩 달아오르고 입술을 짓물며 손을 계속 쥐었다 폈다 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휴가는 유메를 보고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응?”
“표정이 안 좋은데. 어디 아파요?”
“그, 그게 있잖아.”
“네.”
“저기, 오늘 슈토쿠에서 슈팅했던 그 초록색 머리카락에 피부도 하얗고 그러니까.”
“미도리마 신타로요?”
“앗, 그 슈팅가드 이름이 미도리마 신타로야?”
“네. 테이코 농구부 출신이에요. 쿠로코랑 같이 농구부 했었던 사이예요.”
“그렇구나. 미도리마 신타로, 미도리마 신타로.”
“선배?”
“저기 있잖아.”
“네.”
“아무래도 나, 미도리마 신타로 군에게 반한 것 같아.”
“잠시만, 뭐라고요?”
그 말을 들은 부원들은 음료를 마시다 말고 뱉어냈다. 특별하게 표정 변화가 없던 쿠로코조차 경악한 눈치였다. 아까 저와 신타로가 대화를 나눌 때 서 있던 게 그것 때문이었나?
“선배, 선배가 말하는 미도리마 신타로가 정말 이 녀석이에요?‘
휴가는 손을 덜덜 떨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잡지를 내밀었다. 그가 펼친 부분에는 미도리마 신타로가 얼마나 대단한 슈팅가드이며 차후 얼마나 발전할 것인지가 담겨 있었다. 유메는 잡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 미도리마 신타로 군. 아까 쿠로코 군하고 얘기 나눴던 그 사람!”
세상에. 모두 입을 틀어막았다. 특히 2학년 부원들은 전부 큰 충격에 빠진 모양이었다. 여태까지 유메와 교류하면서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았어도 그가 좋아하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생긴 것으로도 모자라 상대가 미도리마 신타로라니! 다들 입을 다물고 있자 쿠로코가 말했다.
“하시모토 선배.”
“네?”
“혹시라도 저희가 모르는 새에 미도리마 군에게 협박당한 부분이 있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 나 진짜로 반한 것 같은걸!”
진심이었다. 틀림없는 진심이었다. 다들 입을 벌리고 유메를 바라보았다. 잔뜩 상기된 얼굴로 소중하게 잡지를 끌어안은 유메는 휴가에게 그것을 돌려주고 말했다.
“나 미도리마 군하고 친해질 거야! 일단 얼굴이라도 보고 자기 소개해야지!”
“선배, 잠깐만요!”
휴가가 말릴 새도 없이 유메는 빠르게 슈토쿠 고교생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들은 이미 학교로 돌아가려 준비를 다 마친 상황이었다. 유메는 얼른 인사라도 할 생각으로 급히 들어가려 했다.
“앗!”
“선배!”
뒤이어 휴가가 다가왔지만 유메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철퍼덕 넘어진 게 부끄러워 한참을 그렇게 있었는데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 일어날 수 있겠나?”
처음 듣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킨 유메였다. 고개를 들어올리니 초록빛 머리카락이 보였다. 자신도 제법 키가 큰 편이지만 발돋움을 해야 겨우 눈을 마주할 수 있을 정도로 키가 큰 학생이었다. 슈팅가드. 슈토쿠 슈팅가드 미도리마 신타로가 제 앞에 있었다. 유메는 얼굴이 더욱 달아올랐고, 그 모습에 다른 슈토쿠 부원들이 이상하다는 듯 그와 미도리마를 번갈아 보았다.
“그, 저기. 미도리마 신타로 군이죠?”
“그렇다만.”
“저, 저는 하시모토 유메라고 하는데. 토오 3학년이에요! 그러니까, 에. 저기, 친하게 지내요!”
친해지자면서 얼굴은 왜 빨개지는 건지. 슈토쿠 부원들도 상황을 눈치 챘는지 미도리마를 제외하고 묘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특히 미도리마 옆에 있던 선수가 재미있는 걸 발견한 눈치로 말했다.
“신쨩. 연상인 분이 이렇게 귀여운 제안하셨으면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고?”
“조용히 하라는 거다, 타카오.”
긴장한 얼굴로 답을 기다리는 유메를 보며 휴가가 혀를 찼다. 완전히 직진이구만. 미도리마는 우뚝 서 있는 유메를 힐끔 보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좋을 대로 하라는 거다.”
“정말요?”
경직된 얼굴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커다란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마냥 유메는 신이 잔뜩 나 있었다. 그러다 문득 슈토쿠 부원들이 자신을 보고 있었음을 깨닫고 말했다.
“죄송해요!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폐 끼쳤어요. 나중에 제대로 인사드릴게요.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한 유메가 휴가와 함께 나가자, 타카오는 미도리마 어깨를 툭 치고 말했다.
“신쨩한테도 이런 일이 다 있네.”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냐는 거다.”
“다른 학교 사람하고 친해지는 건 좋은 일이잖아? 게다가 우리보다 선배인 사람들과 친해지는 거니까.”
“흥,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할 계획이니 신경 쓰지 말란 거다.”
미도리마는 그렇게 대꾸하곤 선배들과 함께 문 밖으로 나갔다. 타카오도 황급히 뒤따라갔다. 그러다 문득 그는 미도리마를 올려다 본 순간, 귓가가 붉어져 있는 걸 보았다.
“신쨩, 왜 귀가 빨개?”
“시끄럽다.”
“이런 거 처음이라 부끄러운 거지?”
미도리마는 아무 대꾸도 없었다. 대신 발걸음을 빠르게 해 타카오를 앞질렀다. 그는 타카오 말대로 이런 일이 처음이었다. 차가워 보이는데다 날렵한 인상 때문에 다가오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더욱이 연애 감정이나 그와 비슷한 호감을 보이는 사례는 찾기 힘들었다. 그런 와중에 유메는 너무나 적극적으로 미도리마에게 다가갔다. 연상이 주는 여유라기보다 처음이기에 겁 없이 덤벼든 것 같았다. 그러니까 미도리마 눈에 비친 유메는 영락없이 강아지였다, 호감을 표현하는 데 거침없는 그는 딱 강아지 자체였다. 그래서였는지 몰라도 미도리마는 유메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제대로 인사하겠다던 유메는 미도리마를 만난 지 일주일이 다 지나기도 전에 슈토쿠 고교를 방문했다. 그것도 농구부원 전부에게 돌아갈 도시락을 들고. 엄청난 양에 미야지가 입을 열었다.
“저기 말이야, 하시모토 씨라고 했지?”
“네, 맞아요.”
“이걸 다 직접 준비한 거야?”
“네!”
“이거 양이 상당히 많은데요, 하시모토 선배?”
“그렇지만 종류는 적으니까요!”
전혀 적지 않은데. 다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밥, 국, 생선조림과 같은 결들임 음식, 과일까지 가득 들어 있었다. 작은 수레를 끌고 오더니 그 위에 있던 게 다 도시락일줄 아무도 몰랐다. 주말에도 훈련하는지라 밖에서 아무거나 대강 먹을 생각이었던 부원들은 갑작스런 호사에 몸 둘 바 몰라 했다. 그들과 달리 유메는 흐뭇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맛있게 드세요!”
이렇게까지 준비했는데 마다하면 안 되겠지. 먼저 미도리마가 생선조림을 한 조각 잘라 입에 넣었다.
“너 인마, 선배들도 먼저 안 먹었는데!”
미야지 불호령이 떨어지려는데 미도리마는 작게 한 마디 뱉었다.
“맛있군.”
“진짜 입에 맞아요?”
미도리마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까다롭기 그지없는 그가 맛있다고 하니 부원들 모두 호기심이 돈 모양이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유메가 가진 음식 솜씨를 아낌없이 칭찬했다.
“우와, 진짜 맛있는데요? 하시모토 선배 요리 정말 잘 하시는구나.”
“앗, 엄마한테 배운 건데 엄마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걸요.”
“어머니께서 요리를 잘 하시나 봐.”
“초밥 가게를 하고 계세요. 저도 종종 돕고 있어요.”
“어디 쪽에서요?”
“토오 학원에서 바로 보이는 곳이에요.”
부원들과 유메가 대화를 주고받는 걸 들으며 먹던 미도리마가 입을 열었다.
“너는.”
“네?”
“너는 밥을 먹었냐는 거다. 이걸 만드느라 시간도 오래 걸렸을 텐데.”
“아, 조금씩 간 보는 것 때문에 먹었어요.”
“그건 식사라고 할 수 없지 않나.”
“전 치어리더니까 관리를 하지 않을 수 없는걸요. 조금이라도 살이 찌면 몸이 둔해져서 동작도 어색해 보이고.”
“그런 이유인건가.”
“네. 그러니까 전 신경 쓰지 말고 맛있게 드세요!”
미도리마가 누군가를 걱정하는 모습에 부원들이 의아하게 바라보는 줄도 모르고 유메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유메는 미도리마와 만난 이후로 자기 다이어리에 그 이름을 열심히 적기 시작했다. 일기장에도 어느새 그 이름만 있었다. 미도리마와 한 일, 보았던 것들만 적어가는 동안 유메는 점점 자신이 호감 이상을 느끼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았다. 왜 자꾸 머릿속에 미도리마 얼굴만 떠오르는 걸까. 그러고 보면 그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처음 만난 후부터 계속 인사도 나누고, 얘기도 가끔 길게 주고받긴 했지만 단 한 번도 미도리마가 웃는 모습을 본 적 없는 유메였다. 가지런한 얼굴에 웃음이 피어나면 얼마나 예쁘고 근사할까.
“미도리마 군이 웃는 거 보고 싶다.”
유메는 책상에 놓인 노트북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책상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열고는 전원을 켰다. 이윽고 인터넷을 틀더니 천천히 무어라고 검색하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웃을 수 있게 하는 방법’
그렇게 검색하니 아기를 웃게 하는 법이 나와 당황한 유메였다. 아기를 웃게 하는 법이라니. 아기가 막 울어대서 이런 연관검색어가 나오는 건가. 문득 그 생각에 미친 유메가 중얼거렸다.
“아기는 까꿍만 해도 웃는데 미도리마 군은 그런 걸로 안 웃겠지?”
혼자 심각하게 있으려니 누군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
“유메, 들어가도 돼?”
“응!”
유메 방으로 들어온 건 작은오빠 신페이였다. 그는 유메 옆에 앉아 있다가 유메가 검색한 것을 보고 물었다.
“유메.”
“응?”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응!”
“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니. 신페이는 저도 모르게 진지한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뜬 채 노트북 화면을 응시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어떤 사람이야?”
“잠깐만.”
유메는 그렇게 말하며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농구 잡지를 하나 꺼냈는데, 그건 휴가가 제게 보여준 것이었다. 미도리마가 있는 부분을 펼쳐 보이며 유메는 눈을 반짝였다.
“여기!”
신페이는 잡지를 집어들고 살폈다. 올해 입학한 테이코 중학교 농구부 출신이라는 말을 보자마자 물었다.
“올해 입학했으면 1학년이지?”
“응!”‘
“연하네?”
“그렇지?”
“그리고 테이코 중학교 출신이니까 오랫동안 지켜보지도 않았고?”
“응. 얘기하게 된 건 얼마 안 됐으니까!”
“흠, 그래.”
웃고는 있었지만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신페이를 보며 유메가 물었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유메가 좋아한다면 그걸로 족하지만 그래도 걱정되니까.”
“뭐가?”
“유메는 이런 게 처음이라 혹시라도 그런 유메를 이용할 수도 있는 거잖아?”
“이용할 게 없을 것 같은데. 난 농구선수도 아니고.”
“그건 아무도 모르는 거야.”
유메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를 이용할 게 없을 텐데 신페이가 너무 예민한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그는 제 오빠였고, 유메에게 해가 되는 말을 굳이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신 오빠.”
“응?”
“료 오빠한테도 이 이야기 하면 오빠가 화내겠지?”
“아하하. 형이라면 그렇겠지. 원체 유메링을 아끼는 사람이니까.”
유메링. 그것은 큰 오빠 료스케가 유메에게 붙여준 별명이었다. 미숙아로 태어난 막내동생을 무척 아낀 그였다. 어른들이 먼저 말하지 않아도 항상 유메를 끼고 돌 정도였으면 말 다 했다. 행여나 유메가 잘못을 저질러도 그러려니 하고 넘길 지경이었으니. 팔불출도 그런 팔불출이 없지. 신페이는 문득 유메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은 료스케 표정을 생각했다. 아마 그냥 넘어가지는 않겠지. 하긴 신페이 역시 흔히 말하는 시스터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이었으니 둘 다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상황은 아니리라.
“아니, 어떤 놈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쫓아다니면 어떻게 해?”
역시나. 집에 돌아와 이야기를 들은 료스케는 크게 놀란 얼굴로 물었다. 타박하는 게 아니란 걸 알았지만 미도리마를 마뜩찮게 생각하는 게 느껴져 시무룩해했다.
“그렇다고 형이 보러 갈 것도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휴가한테라든가 다른 사람 통해서 어떤 녀석인지는 파악하는 게 좋잖아.”
“쥰페이 후배가 아는 사람인걸.”
“후배? 후배 누구?”
“쿠로코 군. 미도리마 군하고 같은 농구부 했었어.”
“그러면 뭐.”
농구부 같이 했던 사람이 있고, 그러면 종종 만날 때마다 이야기는 듣겠지. 료스케도 수긍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여차하면 휴가 쪽에서 뭐라 해 주겠지. 그런 생각도 하는 눈치였다. 휴가는 유메에게 있어 오랜 소꿉친구였으니 믿을 만한 존재였고, 절대 료스케나 신페이에게 거짓말할 이가 아니기도 했다.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도 당분간은 참아.”
“행여나 그 녀석이 유메링을 울렸다간 가만두지 않겠어.”
“아하하. 형 또 불붙었네.”
료스케가 열을 올리는 걸 보면서 유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예쁨 받고 자라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지만 나도 곧 어른인데, 하는 생각에 입술을 불퉁하게 내민 줄도 몰랐더랬다.
유메가 미도리마 때문에 슈토쿠에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이마요시 쇼이치는 종종 유메가 멍하니 있는 때가 늘었음을 알았다.
“가스나야.”
“응?”
“그래서 다음 경기 치어리딩은 어떻게 할 거냐고.”
“아, 맞다. 그래서 이번에는 멤버들 들어갈 때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유메가 조금 나사 빠진 듯이 있자, 이마요시가 물었다.
“니.”
“응?”
“이거 생겼나?”
이마요시가 ‘이거’라고 하면서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유메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믄서 얼굴은 왜 빨개지는데?”
“그. 사귀는 건 아니니까.”
“어라.”
사귀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는 좋아하는 사람은 있다는 소리인가. 고등학교 1학년 때도 같은 반이었지만 유메는 연애편지에도 개의치 않고 자기 할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유메가 멍하니 있질 않나, 쓸데없는 곳에서 기합이 들어가 도시락을 싼다는 걸 알았지만 그게 그런 것 때문이었나. 이마요시는 흥미로운 걸 발견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그래서 누구고.”
“응?”
“좋아하는 사람이 별 시덥잖은 놈은 아닐 거 아이가.”
이야기해도 되나. 놀리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있던 유메가 겨우 입술을 달싹였다.
“이마요시 군.”
“와.”
“내가 좋아하는 사람 말이야, 미도리마 군이야.”
“미도리마.”
이마요시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문득 생각했다. 잠시만, 이 익숙한 성씨는. 그것도 미도리마(綠間)는 흔한 성씨가 아니었다. 그는 한 가지 결론을 낼 수밖에 없어 놀란 얼굴로 유메를 보았다. 그에게는 정말 드문 표정 변화였다.
“미도리마? 내가 아는 그 테이코 중학교 미도리마 신타로 말이가?”
“응.”
“와. 이게 무신 일이고.”
“몰라, 그냥 자기 전에도 계속 생각나고 그러는 걸 어떡해.”
“아이고야. 아주 뻑 갔네, 갔어.”
“어떻게 해야 미도리마 군한테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고백할라고?”
“응.”
참 추진력은 좋아. 이마요시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유메가 토오 치어리더에 들어간 이후로 엄청난 활력을 보여준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이마요시였다. 자기 일만큼은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절대 최고가 아니면 시도조차 안 하는 토오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런 유메가 이렇게나 열을 올린다면 정말 미도리마에게 애정을 갖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금마는.”
“응?”
“금마는 니한테 그런 생각 있고?”
“아니, 없는 것 같아. 그래도 열심히 다가가 볼 거야. 최선을 다 할 거야!”
시무룩한 목소리가 금방 의지 섞인 투로 바뀌는 걸 들으며 이마요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게 하시모토 유메다운 면이지. 그는 유메가 열의를 불태우며 다시 설명하는 모습에 다시 이야기를 경청했다.
미도리마는 열심히 훈련에 임하는 사람이었다. 이 날도 수업이 끝나자마자 연습하러 갔을 때, 처음으로 유메가 보이지 않았다. 하긴 타 학교 학생이, 그것도 3학년이 자주 오가는 건 이상한 일이긴 할 테지. 미도리마는 개의치 않고 연습에 돌입했다. 그 때 타카오가 주변을 살피며 안으로 들어왔다.
“어라. 오늘은 하시모토 씨 안 오셨네.”
“연습이나 하라는 거다.”
“설마 신짱이 하는 행동을 보고 더 안 오신다거나?”
“타카오.”
“알았어, 알았다고.”
타카오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자신 역시 연습에 가담했다. 이윽고 3학년 선배들까지 모이자 그들은 두 팀으로 나뉘어 모의 경기에 임했다. 미야지와 미도리마가 한 팀, 타카오와 키무라가 한 팀이었다. 오츠보는 심판을 보기로 했다. 가볍게 7점 내기로 결정한 그들은 금방 승부욕에 불탔다.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경기가 시작되었다.
유메는 치어리딩 동선 준비가 끝나기 무섭게 바로 슈토쿠로 향했다. 예상보다 준비가 늦어 허둥지둥 달려가니 이미 다들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 어떡해!”
짐을 챙기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그냥 돌아가고 싶어졌다. 괜히 왔나 하는 마음에 집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누군가 유메에게 말을 걸었다.
“하시모토?”
“윽!”
유메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미도리마 목소리였다. 유메는 난처한 얼굴을 하더니 이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도망치듯 사라져 버렸다.
“에, 저거 하시모토 선배 아냐?”
“정말이네. 그냥 가는데?”
“넌 대체 사람이 있으면 말을 걸어서 잡아두든지 해야 할 거 아냐!”
“말을 걸 새도 없이 인사하고 사라진 걸 제가.”
“너 감히 내 말에 토 다냐?”
미야지가 미도리마를 한 대 치려했지만 오츠보가 막아 그런 불성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미도리마는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든 무관심했다. 그저 유메가 사라진 자리에서 한참 동안 망연히 서 있을 뿐이었다.
“가까웠어!”
유메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제 방 침대 위에 있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외쳤다. 그 말마따나 무척 가까웠다. 하시모토, 하고 저를 부르는 달콤한 목소리도 너무나 가까운 곳에서 들리니 정말 유메 가슴은 소란스러웠다. 부끄러워진 나머지 도망치듯 자리를 떴긴 했지만, 먼저 자신을 불러줬다는 데 기쁜 나머지 유메는 즐거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은 미도리마 군이 먼저 나도 불러주고 날 쳐다봐줬고, 그래서 너무 좋아. 정말 정말 좋아!”
유메가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걸 들은 어머니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웃었다.
“벌써 유메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열병을 앓을 때가 됐구나.”
유메는 어머니가 이렇게 중얼거리는 줄도 모르고 기쁜 마음으로 침대에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오늘 있었던 일만으로도 왠지 미도리마가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 날 미도리마 군이.”
“그 이야기는 대체 몇 번째 하는 기가.”
“괜찮잖아. 하시모토가 저렇게 들떠하는 모습도 흔치 않고.”
“스사 니까지.”
“그러고 보니, 하시모토.”
“응?”
“미도리마가 마음에 들었으면 미도리마 도시락만 싸 가도 되는 거 아니야?”
“잘 보이려고 그랬는갑지.”
“에, 그래야 하는 거였어?”
놀란 눈으로 묻는 유메를 이마요시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럼 뭐 하러 싸 갔는데?”
“그야, 같이 고생하고 있는데 밥 잘 먹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
“허?”
역시나 하시모토 유메는 그런 것에 하등 관심도 없고, 무지한 이였다. 정말 단순히 호의로 하는지 아닌지 따질 것도 없이 지극히 단순한 사람이었다. 이마요시는 유메를 보고 생각했다.
“하이고.”
“응?”
“니는 우짤라고 다 퍼주나, 다.”
“그러면 안 돼?”
“아니야. 그냥 이마요시는 네가 걱정돼서 그런 걸 거야.”
“걱정?”
“무리하다 마음 다칠까봐 그런 거지. 그렇지, 이마요시?”
이마요시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유메도 완전한 어린아이는 아니었으니 크게 걱정할 것도 없겠지. 설령 실연 때문에 상처받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유메에게 도움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그는 그렇게 결론을 내고 말했다.
“그래서, 니 내일 모레 화학 쪽지 시험인 건 알제?”
“응?”
“하시모토, 이번에 또 못 보면 선생님한테 혼나는 거 아냐?”
“헉, 그러면 안 되는데!”
유메가 놀란 얼굴로 이야기하는 걸 보며 이마요시와 스사는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든 도와주긴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 때문에 유메는 슈토쿠로 가는 발길이 거의 끊기다시피 했다. 타카오는 유메가 또 보이지 않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토오 학원 근처를 염탐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변장이랍시고 선글라스를 착용하는 그를 보고 슈토쿠 농구부원들이 물었다.
“타카오. 그러고 어딜 가려고?”
“토오 학원에 잠입하러고요!”
“엉? 거길 왜 가.”
“유메 씨가 요새 잘 안 오잖아요. 물론 누구는 연습할 때 방해된다고 하겠지만 자주 얼굴 비추던 사람이 없으면 무슨 일 있나. 싶어지는 건 당연한 거고.”
“누가 방해된다고 하느냐는 거다.”
“찔렸어?”
미도리마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타카오는 분명 계획한 대로 움직일 게 뻔했다. 미도리마는 생각에 잠기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서 하라는 거다.”
“엣, 신짱은 안 따라가?”
“내가 뭐 하러 따라가느냐는 거다.”
“하지만 유메 씨가 여기 오는 건 다 신짱 때문이었고?”
미도리마는 고개를 내저었다. 뭐가 됐든 굳이 유메를 찾아가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자신이 유메를 두고 어떠한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가끔 제게 말을 걸 때마다 눈을 반짝이는 그가 다른 이들보다 돋보인다는 것쯤은 생각했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큰 울림이 될 거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가끔 유메가 저와 가까이 있으면 고개를 돌려 피하는 모습이 영 마뜩찮은 부분은 있었다. 스스로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유메에게 다가가는 건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타카오가 한 말 때문에 그는 꽤나 신경이 쓰이는 걸 막지는 못했다. 미도리마는 뭔가 결심했는지 휴대전화를 들고 메시지를 남겼다.
“에, 에?”
한편 3학년 친구들과 화학 공부를 하고 있던 유메는 휴대전화가 울리자 토끼눈을 뜨고 이마요시와 스사, 휴대전화 화면을 번갈아 보았다. 그 모습에 두 사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와?”
“저기, 있잖아. 그러니까.”
“응?”
“미도리마 군한테, 미도리마 군한테 메시지 왔는데 뭐라고 보내지?”
전혀 그런 일을 할 것 같지 않은 미도리마 쪽에서 먼저 메시지가 왔다는 말에 둘은 의아했지만, 유메는 이미 메시지를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는지 눈을 반짝이며 행복해했다. 토마토마냥 잔뜩 달아오른 얼굴을 하면서도 긴장됐는지 그는 몇 번 심호흡을 하더니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메시지를 남겼다.
‘화학 쪽지시험 준비 때문에 며칠 동안 못 갈 것 같아요. 그동안 열심히 연습해서 좋은 모습 보여주세요!’
문장을 몇 번이고 고쳐 쓴 결과 그럴싸하게 완성되어 유메는 만족한 얼굴로 회신을 보냈다. 미도리마 쪽에서 답이 오지는 않았지만 처음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았다는 데 의의를 두기로 한 유메였다.
미도리마는 회신을 확인하고 나서 희미하게 웃었다. 공부한다고 못 온다는데 불평할 것도 없지. 그리고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유메를 나쁘게 볼 특별한 이유도 없었다. 오래 본 사이는 아니지만 메시지에서 유메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자신에게 상냥히 대하고, 불쾌하지 않게 대하려 애쓰는 게 귀엽기도 했다. 다른 부원들이 희미하게 웃는 미도리마를 보고 경악했다. 제대로 웃는 모습을 일절 보여주지 않던 그가 웃자, 그들은 하나같이 유메와 미도리마 사이에 뭔가가 있다고 믿었다. 그렇지 않고야 저런 반응이 나올 리 없다고 단정 지은 그들은 공공연히 그들을 연인 즈음으로 여기기로 마음먹었다.
무사히 유메가 쪽지시험을 마치고 다시 슈토쿠로 도시락을 들고 온 날, 타카오가 잔뜩 신난 얼굴로 유메에게 말했다.
“시험 잘 보셨어요?”
“네!”
“다행이다. 정말 저희가 너무 먹어 대서 하시모토 씨가 안 오는 줄 알았다고요.”
“제일 많이 먹는 건 타카오 너잖아!”
부원들이 금세 실랑이를 벌이는 걸 들으며 유메는 웃었다. 토오 농구부와 달리 슈토쿠는 유대감이 더 상당한 것 같았다.
“항상 드는 생각이지만, 저는 슈토쿠 농구부 같은 치어리더단을 만들고 싶어요.”
한참 다투던 부원들은 유메가 하는 말에 그를 향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저는 아무래도 제가 직접 안무며 동선을 짜기도 하니까 뭔가 다들, 뭐라고 해야 하지. 제가 하는 거라면 무조건 다 따라주는 게 의무라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슈토쿠 농구부 부원들 여러분은 그런 것들을 안 느끼시는 것 같아서요. 오츠보 씨가 많이 노력하시는구나 싶고.”
진지하게 말하는 유메를 모두가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해맑기만 보이는 유메였지만 그 생각과 달리 무척이나 고민도 많이 하고 생각이 깊다는 걸 크게 느낀 그들이었다. 그 속에서 먼저 운을 뗀 건 미도리마였다.
“그냥 너답게 하라는 거다.”
“네?”
“너답게.”
유메는 미도리마가 한 말을 몇 번 곱씹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미도리마가 한 말 그대로 자신답게 뭔가 해 나가면 답이 나오겠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금세 기분이 풀린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슈토쿠 부원들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딱 하나를 제외하고.
“그러고 보니 신짱 번호는 잘 저장했어요?”
“앗, 그럼요!”
“무슨 말을 하고 싶냐는 거다, 타카오.”
“에? 별로? 그냥 유메 씨한테 신짱 번호 알려줬으니까 잘 저장했는지 묻는 정도고.”
“카즈나리 군이 가르쳐 줬어요, 미도리마 군 번호.”
언제부터 호칭이 ‘하시모토 씨’에서 ‘유메 씨’로 변한 것인지. 그리고 유메도 개의치 않은 데다 타카오를 ‘카즈나리 군’이라 부르고 있었다. 미도리마나 다른 부원들은 성씨로 부르고 있으면서 타카오는 어째서 이름을 부르고 있는지. 묘하게 신경이 쓰여 그들을 보고 있던 미도리마는 미야지가 한 대 쥐어박고야 미야지를 보았다.
“선배가 부르는데 대답 한 마디가 없냐!”
말은 그렇게 해도 미야지 역시 미도리마가 유메를 신경 쓰고 있어 그랬다는 걸 알았기에 그를 따라 타카오와 유메를 보았다. 타카오가 가진 친화력 탓인지, 유메가 가진 상냥함 탓인지 몰라도 그들은 무척이나 친근해 보였다. 그들을 바라보는 미도리마 표정이 썩 유쾌하지 않아 미야지는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유메가 슈토쿠 고교를 들락날락한 지 꽤 된 시점에 슈토쿠와 세이린이 인터하이에서 겨루게 되었다. 그래서 유메가 어느 고교 농구부를 응원할 것인가, 라는 게 슈토쿠 내에서 엄청난 화제였다. 그도 그럴 게 세이린에는 오랜 시간 함께 했던 후배이자 소꿉친구가 있었고, 슈토쿠에는 좋아하는 이가 있었으니. 유메는 인터하이 경기장에 도착하자 제일 먼저 세이린을 방문했다. 대기실로 향하던 미도리마가 그런 유메를 보고 조금 딱딱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 표정은 부원들 발소리가 들릴 때쯤 사라졌다. 자신을 특별한 감정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걸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그런 감정이 있다 하더라도 절대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이를 앞설 수는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는데 가슴 안에서 차오르는 혼란은 뭐란 말인가. 그걸 모른 체 유메는 세이린 부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 경기 힘내요!”
“고맙습니다.”
“아, 선배.”
“응?”
휴가가 유메를 부르자, 유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눈을 반짝이며 유메를 보고 있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그들을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오늘 이기면 정말 프라모델 사 줄 거죠?”
“그게 문제였어?”
“아니, 대체 뭘 상상하고 있는 거야. 그런 거 아니라고.”
“아, 맞아. 우리 그런 내기도 했었지! 응. 준페이가 이기면 프라모델 사 줄게!”
“오오, 의욕이 더 샘솟는다! 오늘 우리는 무조건 이긴다!”
“이미 틀려먹었잖아, 저 녀석.”
인터하이 상대를 결정하는 자리에서 결과가 나자마자 휴가와 유메는 내기를 했다. 휴가가 경기에서 이기면 프라모델을, 경기에서 지면 유메에게 운동복을 사 주기로 약속한 터였다. 내기를 다시 한 번 주지하고 유메는 세이린 대기실을 나섰다. 그리고 슈토쿠 대기실을 찾았다.
“오늘 경기 힘내세요!”
“고마워, 하시모토 씨.”
“열심히 할게요!”
미도리마 쪽은 말이 없었다. 오히려 말하기를 꺼려하는 것 같기도 했다. 유메는 혹여 제가 실수라도 했나 하는 생각에 덜컥 겁을 먹었다. 그렇지만 티내지 않으려 부러 입 안 살을 깨물며 웃었다.
“미도리마 군도 오늘 힘내세요!”
“아까 세이린도 응원하지 않았냐는 거다.”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응원하고 싶어지는걸요.”
미도리마는 더 특별하게 바라보는 상대이니 응원하고 싶다고 말하려던 유메는 이 말이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마구잡이로 말했다가 기분이 상해 보이는 미도리마를 건드리게 될까봐 그게 걱정된 모양이었다. 유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미도리마도 눈치 챈 모양인지 한숨을 쉬었다. 대체 이 기분은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타카오가 유메와 즐겁게 대화를 주고받고, 휴가와 유메가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다는 것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편하게 지내는 것을 보면서 제 친화력이 부족해서 유메를 잘 대하지 못한 게 문제인지, 아니면 유메가 자신을 향한 호감을 보이는 걸 알고 있어 대하기 꺼려하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유메를 어느 순간 자신이 제 마음 안에 조금씩 들여놓기 시작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답이 나왔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를 대해야 하는가. 미도리마는 철이 든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결국 타인이 주는 애정이나 연심에 익숙하지 않은 건 유메와 마찬가지였다. 엉킨 생각을 정리할 생각으로 미도리마가 입을 열었다.
“하시모토.”
“네?”
“아까 세이린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냐는 거다.”
“응?”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지. 하지만 유메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미도리마에게 순순히 대답했다.
“세이린 가서, 열심히 하라고 했어요. 그리고 준페이랑 내기한 거 다시 한 번 확인했고.”
“내기?”
“네! 준페이가 이기면 제가 프라모델을 사 주고, 아니면 준페이가 저한테 운동복을 사 주기로 했어요.”
내기야 무슨 비밀거리도 아니었으니 유메는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다. 별 대단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데 미도리마는 속으로 몇 번이고 안심했다. 그리고 여전히 어리둥절해 보이는 유메를 보곤 입을 열었다.
“우리도 내기 하나 하는 거 어떠냐는 거다.”
“내기? 미도리마 군하고?”
“그래.”
“음, 내기 걸면 뭐 하지.”
유메는 내기하자는 미도리마 말에 특별한 의문을 갖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겼다. 만약 데이트를 요청하게 된다면 무엇을 해 달라고 할까. 문득 유메 머릿속에 무엇인가 떠올랐다.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진 그를 보며 모두가 의아해했지만 유메는 결심한 얼굴로 말했다.
“마, 만약 미도리마 군이 지면.”
“응?”
“데, 데이트. 데이트 해주세요!”
“뭐?”
데이트 해달라니. 어마어마한 발언에 슈토쿠 부원 모두 경악한 표정으로 유메를 보았다. 유메는 무척이나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때 아니면 데이트 제안을 언제 할 수 있을까. 유메는 답이 돌아오기를 기다렸고, 미도리마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는 거다.”
“정말요?”
“그래.”
“그럼 미도리마 군이 경기에서 이기면 뭘 하고 싶어요?”
유메가 반문하자, 미도리마도 생각에 잠겼다. 뭔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딱 ‘이것을 하면 좋겠다.’는 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유메를 마주했다. 짙은 고동색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줍음과 긴장, 그러면서도 동시에 형연하기 어려운 불안감으로 가득한 눈이 자신을 바라보자, 미도리마 역시 괜스레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다른 부원들은 재미있는 걸 발견한 듯이 둘을 보며 실실 웃기 바빴다. 뭐가 없긴 뭐가 없어. 이전에 부원들이 미도리마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미도리마.”
“무슨 일이시냐는 겁니다.”
“하시모토 씨가 여기 왔다 갔다 하는 거 딱히 말리지는 않네?”
“나쁜 걸 하는 것도 아닌데 말릴 이유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건 그렇지만 미도리마 성격이면 귀찮은 거 딱 질색이라 할 것 같았으니까 오츠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 아니겠어?”
“그건 그렇네. 신짱 진짜 아무 생각 없는 거 맞아?”
“그렇다니까 왜 자꾸 묻냐는 거다.”
전혀 안 그래 보이니까 그렇지. 다들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음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게 유메가 도시락을 싸 올 때마다 딱히 말은 하지 않아도 맛있게 먹으며 정리하는 걸 돕기도 하고, 유메가 몸매 관리를 한다며 미숫가루를 마시고 있는 걸 보고 있으면 건강이 우선이라며 오하아사를 이유로 견과류 같은 걸 챙겨주기도 했다. 그래. 오하아사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마음에도 없는 상대 생일까지 알아내서 오하아사를 왜 챙겨주느냐고. 심지어 유메보다 먼저 알고 지낸 슈토쿠 부원들도 안 챙겨주는 그것을. 럭키아이템을 기쁘게 받으며 고맙다며 인사하는 유메를 보며 시선을 피하면, 귓가가 홧홧하게 달아올라 있는 것쯤은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챙겨주면서 부끄러워하는 주제에 뭘 자꾸 회피하냐고.”
미야지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미도리마를 볼 때가 많았고 파트너인 타카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근래 들어 자신과 유메를 보는 시선이 영 곱지가 않은데 그게 자신 때문이라는 건 백 퍼센트 알고 있었다. 그 뿐인가. 유메가 조금이라도 기분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면 신경 쓰는 것도 다 알고 있는데 정작 본인만 모르고, 자기 감정을 애써 피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게 눈에 다 보이는 부원들이었다. 미도리마가 생각을 마쳤는지 입을 열었다.
“내가 이기면 당분간 다른 사람들 도시락은 싸오지 말란 거다.”
“에?”
“야! 누구 맘대로!”
미도리마가 한 말에 좌중이 뒤집어졌다. 유메 음식 솜씨가 특출난지라 모두들 유메가 만들어오는 도시락을 맛있게 먹곤 했는데 갑자기 도시락을 싸 오지 말라니. 유메는 미도리마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가 하는 마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결론을 하나 냈는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했구나!”
“뭐?”
“맨날 여러 명 분량 싸 오면 힘드니까 그런 거죠? 저는 진짜 괜찮은데!”
“하아.”
이거야 원.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미도리마는 따라 고개를 끄덕이는 일 밖에 할 수 없었다. 유메가 도시락을 싸 오는 게 분명 힘든 일이긴 할 테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는데. 유메는 그렇게만 생각했는지 걱정 받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그래. 차라리 그렇게라도 생각하게 내버려 두자. 미도리마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내기 하겠느냐는 거다.”
“네. 알았어요. 열심히 해요!”
유메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몇 번 흔들더니 응원석으로 가려는 듯 대기실을 나서려 했다. 그런 그에게 미도리마가 다가와 뭔가를 내밀었다. 럭키아이템이었다.
“매번 이렇게 챙겨주지 않아도 되는데.”
“챙겨주지 않았으면 한다면 네가 오하아사를 보면 되는 일이란 거다.”
원래 유메는 오하아사를 믿지 않아 방송도 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오하아사를 보고 자신을 생각했다는 게 기뻐 빙글빙글 웃으며 받았다. 얼굴만 봐서는 차갑고 무뚝뚝하게 보이는 미도리마여서 처음에는 다가가도 될까, 하는 고민을 하게 만들었고 실제로 유메는 그런 고민들로 며칠 동안 골머리를 앓았다. 그렇지만 슈토쿠에 오가며 본 미도리마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다정하고 예의도 바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지금도 이렇게 멋진데 어른이 되면 더 근사하겠지. 그런 것들을 마음에 품고 유메는 보다 열심히 다가가리라 마음먹은 것이었다. 그리고 조금씩 미도리마가 자신에게 건네는 호의를 받을 때마다 같은 지향을 갖는 건 아니더라도 매 순간 행복하고 즐거웠다. 유메는 럭키아이템을 품에 안고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한 뒤에야 일행이 있는 응원석으로 돌아갔다. 드디어 인터하이 슈토쿠 대 세이린 경기가 시작되었다.
경기를 하는 이들을 보던 유메는 역시나 미도리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날렵하게 농구공을 골대 안으로 넣는 모습. 그건 거대한 돌고래였다. 그것 외에 유메로서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갑자기 유메는 이 경기장이 바다처럼 보였다. 바다 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다 물을 박차고 튀어오르는 돌고래처럼 미도리마는 경기장을 근사하게 만들었다. 다른 이들이 어떻게 여길지는 몰라도 유메만큼은 완벽하게 사로잡았다. 휴가가 이기든 지든, 미도리마가 이기든 지든 이제 관계없었다. 그저 농구에 몰두해 열심히 땀 흘리는 미도리마가 언제까지나 해 주었으면 했다. 날카로운 눈을 하고 농구장을 누비는 미도리마가, 유메는 그 어떤 장소에 있을 때보다 더 멋지고 빛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긴 공방이 끝났고, 결국 슈토쿠와 세이린은 무승부로 경기를 끝내야 했다. 모든 이들이 아쉬운 얼굴로 인사를 나눴다. 유메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선수들만큼은 아니어서 그저 조용히 박수를 치고 있었다. 얼른 슈토쿠, 세이린 부원들을 찾아가 위로해야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먼저 찾아간 건 세이린이었다. 휴가는 유메를 보자마자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이번에 새로 프라모델 갖나 했더니 영 안 됐네요. 선배 돈 굳었네.”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다음에 승부 낼 수 있을 거야.”
“하시모토 씨 말이 맞습니다. 어쨌든 이번이 마지막은 아니니까요.”
“선배하고 쿠로코 말이 맞네. 그러면 다음 경기도 준비하러 가 볼까.”
“나는 이만 실례할게. 모두들 고생했어요!”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메는 세이린 부원들 인사를 받고 슈토쿠 대기실로 갔다. 사정은 그들도 세이린과 다를 게 없었다. 슈토쿠 부원들도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자, 유메는 조심스레 대기실 문 앞에 기웃거리고 들어가지 못했다. 그 때 문이 열리고, 미도리마가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서서 뭘 하고 있냐는 거다.”
“괜찮아요?”
걱정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유메에 미도리마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다리도 아픈데 왜 서 있었어요, 유메 씨!”
“걱정돼서 왔구만. 괜찮아, 괜찮아.”
오히려 유메를 먼저 위해주는 슈토쿠 부원들 때문에 유메는 금방 마음이 풀어져 방긋 웃었다. 그 모습에 미도리마도 안심했는지 희미하게 웃었다. 다음 경기는 멋지게 했으면 좋겠다며 모두를 격려하는 그를 보며 미도리마는 오랜 시간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