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ello Again,
Then bye bye My Dear
성인 열람 권장
바이오쇼크 1, 2, 인피니트, 바다의 무덤 1,2부
전 시리즈를 아우르는 매우 강력한 스포일러
트리거 워닝. 사망요소, 유혈, 고립감, 우울감,
적나라한 시체 묘사, 각종 혐오표현 다수,
구시대적 요소, 고루한 설정 주의
너무 심한 캐릭터 붕괴
2세 주의
“The mind of the subject will
desperately struggle to create
memories where none exist...“
Barriers to Trans-Dimensional Travel,
-R.Lutese, 1889
대상의 정신은 존재하지 않는 기억을 생성하기 위해 절실히 노력한다 …
차원 이동의 여행의 장애물,
-R 루테스, 1889
<1968년, 12월 초>
똑. 똑. 똑.
그의 은신처에 들려오는 노크 소리. 랩쳐에서 듣기란 쉽지 않은 차분하고 단정한 소리다.
총을 빼들며 벽에 기대섰다. 잠금장치가 작동한다 해도 브루트 스플라이서라면 상황은 좋지 못 하다, 그 덩치는 육중한 몸뚱이를 사정없이 날려 뭐든 부수고 보지 않나. 그 덕택에 말 그대로 ‘납작’해진 생존자를 목도한 뒤의 그는 더욱 신중해졌다.
똑. 똑. 똑.
다행인 건 적이 하나뿐이라는 사실. 모니터 수신기가 반쯤 망가져 실루엣은 흐릿했으나 분명 덩치 작은 놈 하나다. 여기서 더 꼬이지 않아야 할 텐데.
그는 권총을 그러쥐며 심호흡했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사방이 램의 미친 신도들인 이곳에서 여기까지 버텼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겨우 이런 식으로 최후를 맞을 수는 없지. 살아야한다. 자꾸만 손에서 땀이 배어나왔다.
“문 좀 열어줘.”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건 받아들이기 힘든데.
“저기... 나야, 문 좀 열어줘.”
엉덩이가 사정없이 바닥에 부딪힌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억소리가 절로 나왔으나 우악스럽게 입을 틀어막았다. 사정없이 내리꽂인 손바닥에 입주변이 얼얼할 지경이다. 이제 안에 사람이 있는 걸 알았으니 본색을 드러낼까, 차라리 그랬다면 좋았을걸.
심호흡을 하려 노력했다. 숨을 마시고 뱉을 때마다 땀에 젖은 셔츠가 달라붙었다가 떨어졌다.
좋아, 머리 좀 쓰는데. 그는 생각한다. 순간적으로 동요할 뻔 했으나 시도에 그쳤고 대신 화가 치밀었다. 누구에게든 –특히 램에게- 발각된 게 분명했다. 그를 꿰어내기 위해 어지간히도 공을 들이는 모양이지. 램이라면 이 도시 전체의 감시 카메라를 관리 하고 있을테니 위치 정도야 손 쉬웠겠지만 문제는 이 시점의 싱클레어가 다시 랩쳐로 온 테넨바움과 협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그는 보이는 듯 마는 듯 숨죽인 인간에서 순식간에 요주의 인물로 격상했을 터.
이 외에는, 글쎄. 말도 안 되는 결론인데.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진 않더라도 그게 실체로 나타나 신경을 거스른다니. 좀 더 이성적으로 생각할 문제 아닌가?
걔는 죽었다, 10년 전에. 아직도 그 날은 생생한데, 그 난리통에 장례까지 용케 치뤘으니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겠다.
그 애를 아카디아에 있는 묘지에 뉘이고 싶었다. 꽤 괜찮은 자리까지 봐뒀으니까. 하지만 아내는 계속 죽어서라도 이 밖을 벗어나야겠다고 징징거렸고,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래... 저건 독일 억양이 드문드문 남아있는 스플라이서다. 그래야만 한다. 어쩌면 약해진 정신머리가 지껄이는 우스갯소리일 수도 있다. 이럴 때 들리는 환청이 그나마 좋아하던 인간의 음성이라는 게 반갑다면 반가운 점인가.
하지만 결국 문을 연다. 격벽 너머로 떨리는 목소리가 말했기 때문에. 자기야. 나 정말 막스야. 아카디아에 가고 싶어, 코니아일랜드도.
1.
[1968년 10월 말]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막스는 눈을 감긴 뒤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언저리를 두들긴다. 피아노를 치듯 살결을 간질이면 꼭 묻는다.
“몇 개?”
분명 살 위의 손가락 개수를 맞추라는 말이겠지. 이제 아내는 그가 편히 자도록 내버려두지도 않는다. 말려도 넘어갈 위인이 아니다.
“내 답은 ‘간지러워’거든.”
“그러지 말고~ 몇 개?”
그만하라며 손을 휘휘 젓고 나니 사방이 어두웠다. 그는 막스에게 등이나 켜달라며 중얼거리다가 스치는 악취에 얼굴을 찌푸린다. 자기야, 이게 무슨 냄새야. 중얼거리던 그는 축축한 공기와 함께 감도는 한기에 다시금 체념한다. 또 꿈, 그리고 현실.
몸을 일으키려던 싱클레어는 자신의 가슴께에 닿은 쇠막대를 보고 숨을 들이켰다. 툭, 툭, 툭. 막스의 손가락 같이 가녀린 느낌이 아니다. 툭, 툭, 툭. “살았...나?”
“이런 썅!”
저도 모르게 발이 먼저 나갔다. 중독자 특유의 부푼 살갗이 속절없이 찢어지며 소름 끼치는 감각이 구두창 너머로도 느껴졌으나 그런 것에 관심 둘 틈이 없다. 찢어진 살결 사이로 축축한 선홍빛을 드러내며 몸을 일으켰기에.
"에, 에이미... 이건 너무 아프잖아, 나, 난, 나는... 나는 항상....!"
개폐문 제어장치에 스파크가 튄다. 해킹을 한 모양인데, 다들 아담으로 미쳐서 제대로 된 사고도 불가능하다지만 이따금씩 아주 정신을 놓지 않는 자들도 있다. 간단한 해킹이나 잔꾀까지 부리는 자들은 특히나 까다롭지, 지금처럼.
약간 비틀린 턱을 매만지며 스플라이서는 달려들었고, 그는 권총에 손을 가져다댔다. 기회는 한 번 뿐이다.
"이런 씨발.... 너 그 새끼 맞구만? 우리 에이미랑 붙어먹은 개새끼...."
몇 번이고 방아쇠를 당겼다. 반동이 느껴지며 몸이 비틀거렸고 찢어지는 비명도 들린 것 같다. 관통하는 총알이 살갗을 뚫거나 뼈를 아작 내는 소리가 들릴 때는 어렴풋이 느꼈을지도, 사람을 죽이는 중이라는. 하지만 늘어진 시체를 보니 다음은 확실했다. 처리해야한다.
-라고 했던가. 여기서 주목할만한 점은 여전히 시체는 발치에 있다는 것. 문제는 스플라이서가 비명을 내지르며 고꾸라질 무렵 울리던 공공방송이다.
“랩쳐 가족 여러분, 힘들수록 우리는 하나여야 합니다. 저는 리더가 아닙니다, 우리 가족의 어머니이자 아버지라고 생각해주십시오. 우리는 하나입니다. 우리는, 가족이에요.”
이타주의에 관해서야 답은 같다. 경멸하고픈 맘도, 그렇다고 동조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랩쳐의 대다수를 차지한 이들에게 필요한 건 자신을 이해할 만한 사람이거나 좀 더 포용적인 사상이었다. 때 마침 종교를 내세운 램이 지금의 랩쳐를 휘어잡은 것도 당연지사. 어찌 보면 영리하지, 불우하기 짝 없는 개미떼들에게는 신을 들먹이는 것 만한 허세도 없는 것을.
하지만 지금은 램의 영리함에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울려 퍼지는 공공방송에 스플라이서들이 모여 들어 ‘영적 의식’을 시작한다. 미치광이 하나가 아담을 삼키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리틀 시스터가 올 때 까지 몇 날 며칠 기도를 올리겠지. 의식은 저 놈들이 죽을 때 까지 계속 될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은신처 안의 시체가 서서히 부패 중이라는 건 좋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너저분한 공간에도 전혀 다른 악취가 들어차기 시작한다.
시체를 처리해야했으나 적이 너무 많았다.
한 놈이면 몰라도 온갖 무장을 했을지도 모르는 스플라이서들을 상대할 방법은 없다. 수류탄은 다 썼고 그나마 있는 총알도 반 이상이 젖었다. 어쩌면 은밀하게 암살- 이것도 아니다, 개폐문 열리는 소리에 바로 들키고 말겠지.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아니면 기도하는 틈을 타 주위를 돌린 사이에 시체를 내던질 수도 있다. 지금 중요한 건 식량도 식수도, 다른 무엇도 아니라 시체를 치우는 일 아니던가. 은신처가 발각될 수도 있기에 무모한 짓이었으나 성공할 가능성이 제일 높기도 했다.
젠장, 일단 조금 쉬자고. 그는 매트리스 위에 앉아 이마를 짚는다. 제대로 된 생각이 힘들었다. 급한 대로 반쯤 삭아 떨어진 직원용 사물함 안에 시체를 넣어뒀지만 그렇다고 지워질 악취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자 시신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는지 얼기설기 닫아놓은 뚜껑이 살짝 들렸고, 나중에는 체액이 나오며 –하얀 나무판이 거무튀튀하게 물들었다.- 부푼 몸이 꺼지기 시작했다. 이 모든 건 그의 삶 자체를 아래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몇 번인가의 과신으로 인생은 전혀 다른 궤도를 띄고 말았다. 그 중에서도 뼈아픈 건 역시 페르세포네겠지. 램의 심경변화는 둘째치더라도 탈출 직전 위어의 가슴께에 달린 푸른 나비 뱃지를 본 싱클레어는 웃음을 터트렸고, 한동안 머릿속에서 그 웃기지도 않은 나비가 날아다녔다. 그래도 꽤 여유롭게 탈출을 계획할 수 있던 이유는 잠수정 열쇠가 그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램을 필두로 한 잘나신 랩쳐 가족에게 협상이 통하기란 쉽지 않아 아직도 이곳에 있지.
친분이 있던 사이먼도 그 맘 때 즈음은 전형적인 광신도가 되어버려 제대로 된 대화조차 쉽지 않았지. 그러다가 얼마 뒤 전쟁이 터지더니 앤디가 죽어버렸고 테넨바움이 그 앤디의 아들과 함께 랩쳐를 떠버렸다던 이야기를 –게다가 폰테인이 아틀라스였다는 황당한 사실까지!- 뒤늦게 들었을 때는 간만에 그 푸른 나비의 잔상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가? 그는 지금 이곳에 있다. 늘 그렇듯 해야 할 건 살아낼 궁리뿐. 탈출이라면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었으니 문제는 방법. 잠수정을 얻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면 어떻게든 사는 게 중요했다. 그가 믿은 것은 탈출 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함과 아직 누릴 것이 많은 자기 자신, 그리고 쨍한 태양 아래에서의 삶이었다.
그리고 원고.
아, 이것 참. 맞다. 막스의 원고도 있다. 겸사겸사 이뤄 줄 아내의 염원. 오랜 만에 떠오르는 그녀다. 꿈에서는 가끔 나와 신경을 거스르던 그녀를, 그는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픈 아내, 뜸한 남편, 식어버린 사랑, 좋았던 나날이여. 모든 게 진부했다. 바싹 마른 목구멍과 까딱이는 앙상한 손가락도 기억에서 박박 지워 없애고 싶었다. 그 모든 것 조차 아내라며 사랑할 사람도 아니었으니, 그 맘 때는 매일 매일이 서로에게 고통이었다. 자는 듯 눈을 감은 아내를 보면서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막스가 죽기 수개월 전부터 그들의 관계는 가끔 좋았고, 자주 나빴으며, 대부분은 차가운 얼음판 같았다. 아내는 아내대로 –어차피 여기서는 출간도 못 할- 책을 쓴다고 난리였으며 그는 나름의 사업으로 바빴으니 정작 서로가 필요할 때는 곁에 없었다. 대화 보다 내지르는 소리를 주고받았다, 문을 벌컥 여는 소리에도 돌아보지 않는 서로의 등이 익숙했으며 얼마 못 가 그 모습조차 사라져 약간의 생경함을 느끼다가 그 마저도 쉽게 적응했다. 그는 감상적인 인간이 아니었을 뿐더러 그렇게 변할 틈을 자신에게 주지 않으려 했으니까. 그래도 몇 년을 같이 살았다고, 해방감이 죄책감이라는 기분 나쁜 감각으로 엄습하거나 지겨움이 익숙함이 되어 매 순간을 낯설게 만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럴 때 마다 그는 투자를 자처하거나 회의를 잡았고 사업안을 검토했다. 그럼에도 제일 이상한 순간이 있다면 그건 텅 빈 침대가 아니라 창문 근처의 해초를 보고 쟤네가 노크한다는 어이없는 말을 하거나, 커피에 비스킷을 넣어 곤죽을 만들어먹을 사람이 이제 없다는 점일 것이다.
시취가 여전히 진동을 한다.
치미는 헛구역질에 입을 틀어막고 돌아누웠다. 그는 이 도시에서 겪은 온갖 상황을 떠올리며 최악의 상황을 가늠해본다. 물심양면으로 돕던 이를 빅대디 앞에서 져버린 거? 아니지, 어린 소년이 세큐리스 격벽을 사이에 두고 죽어가는 걸 외면했던 것. 이뿐인가, 보호자를 잃은 리틀 시스터가 스플라이서들에게 도륙당하는 걸 지켜만 본 적도 있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최악은 지금이겠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일들은 직접적인 위협은 못 되었다. 약간의 정신적인 충격이나 죄책감 비스무리한 꿉꿉함만 안겨줬을 뿐, 지금처럼 실체로 남아 그를 괴롭히지는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저건... 꽤 신선하지.
‘될 대로 되라지.’
라며 누구다운 사고방식으로 잠금장치에 다가가다가도 그는 얼른 몸을 틀어 몇 번이고 모니터를 확인했다. 맙소사, 아무도 없잖아? 이거야말로 신이 주신 기회지. 지금이면 시체라도 내놓을 수 있다. 그는 기다란 사물함을 붙잡아 격벽 문 앞으로 잡아 끌었다. 꽤 묵직한 무게와 함께 나무 사이로 새어나온 체액에 미끄러져 넘어질 뻔했지만 간신히 중심을 다잡았다. 가까이 있으니 상상을 초월하는 악취가 진동을 한다. 싱클레어는 바로 레버를 잡아당겨 세큐리스의 잠금 장치를 해제했고, 그 순간 열차 역에 익숙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기 시작했다.
“랩쳐 가족 여러분!”
그 여자의 목소리는 평소같이 차갑고 냉철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가느다란 분노가 섞여 조금씩 떨렸다. 아쉽게도 내용을 전부 듣지는 못 했는데, 곧 육중한 금속 몸체가 움직이며 쿵쿵 뛰는 소음이 모든 걸 묻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저 고약한 피조물을 너무나 잘 안다.
“이 자각 없는 존재는 그저 짐승일 뿐입니다, 구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죠. 짐승의 고통을 끝내주는 겁니다. 인민과 엘레노어를 위해서, 우리의 유산인 아담을 지켜냅시다. 침입자를 찾아내어 가족을-”
그건 빅 대디였다, 그것도 알파시리즈.
폐기 되었을 게 분명한 모델이 멀쩡히 움직이고 있다. 녹이 슬고 군데군데 지저분했지만 제 본분은 잊지 않았다는 듯이, 분주히 아담을 채취하는 시스터를 충실히 지키고 있다. 알파시리즈가 영리하게도 스플라이서를 이리저리 몰아가며 도륙하는 모습은 어처구니없이도 믿음직스러웠다. 그는 시체도 잊은 채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만 봤다.
[1968년, 12월 첫째 주]
멀뚱히 서 있던 여자를 낚아채듯 감싸 안고 재빨리 들어왔다. 톱니바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개폐문이 육중히 닫히자 레버를 당겨 확실히 잠그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기억이 되살아난다는 건 그리 즐겁지 않다. 스멀스멀 타고오르는 감각으로 인해 언젠가 만졌던 허리나 몸의 무게가 떠올랐다. 그는 여자를 뒤로 한 채 입을 뒤돌아섰다. 사람이... 여기까지 미칠 수 있나? 그리고 들리는 음성-
“당신 맞지?”
“...”
“내 말 들려?”
“너 누구야.”
“당신 맞냐니까!”
자기 할 말만 하는 것도 그대로다.
“어후! 무슨 냄새가... 자기 왜 여기 있어? 응? 꼴도 엉망이고.. 이게 다 뭐야. 빈센트 찾으러 왔어?”
코를 틀어막았는지 코맹맹이 소리로 자기 할 말만 쏟아 냈다. 여전하다. 여전... 한 건가?
“누구냐고 묻잖아.”
그녀는 숨을 고르다 말했다. 나야.
“당신 아내잖아! 막스!”
“넌 죽었잖아.”
“뭐?”
별 시덥잖은 감상보다 제일 먼저 떠오른 건 공포심이었다. 그는 몸을 휙 돌려 벽에 손바닥을 짚는다. 약간 긴장한 듯 숨을 뱉다가도 굳게 결심하며 생각한다. 어쩐지, 겨우겨우 정신을 붙든다 했지. 제대로 말 할 사람 하나 없고 한 공간에 감금되다시피 남겨진 지금 이 상황에서.
“뭐하는 거야 지금!”
둔탁한 소리가 역무실에 울려퍼지자 여자가 비명을 질렀고 머리 전체가 울렸다. 그는 미치고 싶지 않았다. 미치더라도 여기서 더 미칠 수는 없다. 제정신이 아닌 채로 사는 것이야말로 그에게는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자기 자신, 스스로의 통제력을 놓고 싶지 않았다.
욕지기가 느껴질 때 까지 벽에 머리를 박을 무렵 뭉툭한 게 그와 벽 사이를 가로막아 그는 그걸 그대로 내리쳤고, 여자가 거친 욕을 내뱉으면서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붙잡더니 가슴팍을 주먹으로 마구 내리쳤다. 미쳤어! 미쳤냐고! 그 말이 들리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처음으로 어른거렸던 건 녹색 눈, 그게 익숙한 모양으로 일그러져 그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죽고 싶어? 왜이래 대체! 그만하라고 했잖아!”
그녀는 붉은 멍이 오른 자신의 손을 다잡으며 글썽인다. 목소리가 마구 떨렸다. 어쩌자는 건지.
“무슨 말이라도 해봐...! 대체 왜 이러냐고!”
그 짧은 순간 그는 자신의 무의식이 도출한 허상에게 이 이상으로 반응하는 순간 벌어질 어마어마한 정신이상에 대해 잠시 고민했으나 이 실감나는 환영이 주는 몰입감에 그대로 입을 열었고 -“무슨 말? 내가 무슨 말을 더 해야 해? 이미 죽은 인간이 눈앞에서 얼쩡거리는데.”- 그 말에 그녀는 눈물을 비벼 닦더니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저 눈 까지, 세상에. 하나님 맙소사.
“내가... 죽긴 왜 죽어? 내가 왜!”
“...”
그는 대답하기를 포기하고 벽에 기대어 앉아 두통과 밀려오는 메스꺼움을 달래본다. 막스는 여전히 혼자 중얼거렸다.
“아냐... 이럴 때가 아냐.”
막스는 제자리를 뱅글뱅글 돌더니 멈춰 서서 속사포처럼 같은 말을 쏟아냈다. 대부분 “빈센트 어딨어?”에서 벗어나지 않은 말들이었고, 입을 꾹 다문 그가 태평한 인상을 줬는지 점점 말이 빨라지고 목소리도 높아지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역무실 전체가 울려서, 그가 말하자마자 -걔는 죽었잖아. 태어나자마자.-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거짓말...! 어떻게 그 딴 말을 해?! 어떻게!”
“그만, 그만...”
“개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제대로 말 해, 제발! 나 정말 하나도 모르겠어, 지금 전쟁 중 맞아? 이럴 거면 놀이공원을 왜 폐쇄한 거래? 당신이 좀 알아봤어야지! 그런 헛소리 하지 말고! 애가 저 안에 있을 거 생각하면 나 미칠 것 같단 말이야... 얼마나 무섭겠어, 아는 사람 하나 없을 텐데 그 어린 게 혼자...!”
그리고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그는 짜증이 치밀어 그녀를 노려보고 있던 참이다.
“나 손도 아파, 썅... 왜 거기다 머리를 박아? 왜!”
“하나씩 말 하지 그래. 놀랍게도 내 귀는 한 쌍 뿐이라.”
“빈센트 어딨어.”
“죽었다고.”
“웃기지마, 걔 잘못되면 당신도 죽는 거야. 내가 죽여버릴 거라고!”
“진정 좀 하지?”
“내가 어떻게? 어떻게! 내 아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진정을 할 수 있냐고!”
“...좋아. 차근차근 하자고. 하나씩 물어볼 거니까 한 번 씩만 대답해. 걔가 지금 어디 있는데.”
“아... 라이언... 라이언 놀이공원.”
“왜.”
“새해는 혼자 보내고 싶다고 했었어. 벌써 잊었어?”
“새해? 무슨 새해? 지금 12월인데.”
그 말에 막스는 벌떡 일어났다. 때 마침 그도 20년은 더 젊어 보이는 아내를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뭐라고 했어?”
“12월이니까 12월이겠지.”
“왜?”
“글쎄.”
“아... 지금 59년 맞지?”
“아니, 1968년인데.”
막스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 했다. 그저 코피만 주르륵 흘리더니 위태롭게 눈물방울을 매달고서는 말할 뿐. 썅. 이게 다 무슨 상황이야...
“너 코피 나네.”
“내가 죽었다고?”
“그래, 10년 전에.”
“어떻게?”
“아파서.”
그녀는 한참을 뒤돌아서 발만 동동 구르다가 손수건을 꺼내 코피를 닦았다. 이제야 잠잠해진 막스를 흘깃 보며 그는 그녀의 말을 곱씹는다. 죽었던 사람이 갑자기 살아 돌아온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유령이나 시체도 아닌... 과거의 아내라고? 아서라, 차라리 미쳤다는 게 제일 말이 될 텐데. 막스는 그를 본다.
“아...왜 이렇게 사람이 없어? 밤이라서 그런가?”
“아니. 전쟁이 났었잖아.”
“아직도 안 끝났어?”
“말하자면 길어. 사실 살아있던 폰테인의 계략으로 앤디가 죽고 도시가 쑥대밭이 됐다-로 결론 내리면 되겠지.”
“프랭크가 살아있었다고?”
그는 빠르게 미간을 찌푸린다. 그 때나 지금이나 아내가 저런 식으로 전 애인을 부르는 건 달갑지 않다. 저런 짓 까지 하는 걸 보니 막스는 막스인가, 아니면 그가 단단히 미쳤을 수도. 그가 아무 말도 않자 막스는 다시 말한다.
“당신 실버핀 레스토랑 알아?”
“뭐?”
“라이언네 중국인이 거기에다 실험실 차렸잖아.”
“한국인.”
“아무튼 기억나?”
“그래.”
“그럼 거기 허공이 쪼개졌다고 기사 났던 것도 알겠네. 얼마 안 가서 그 신문 다 회수되고 정정기사 나고... 그러더니 실험실 차린다면서 폐쇄됐잖아. 기억하지?”
그는 다시금 벽에 머리를 기대며 그녀를 바라본다. 테어라면 알고 있다. 라이언은 곧장 레스토랑을 폐쇄한 뒤 연구를 수종에게 맡겨놓고서는 소문을 통제했지만 기사가 종이쪼가리가 되어도 사람들의 혓바닥은 어쩔 수 없던지라.
“근데... 이제야 기억이 난다. 그거 라이언 놀이공원에도 생겼거든. 반란군이.... 아니다. 나 그 안으로 떨어졌었어. 한참 뒤에 정신 차리니까 여기에 서 있더라. 그거... 허공 갈라지던 거. 뭐라고 부르지?”
“테어. 거기에 사람도 들어간다는 거야, 지금?”
“내가 여기 있잖아. 무슨 말이 더 필요해?”
머리가 터질 듯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오래된 기억을 천천히 가늠한다, 테어라는 장을 열기 위한 설계도만큼은 특이해서 어렴풋이 기억한다. 이수종은 누구도 믿지 못하겠던지 장치 부품을 암호화해놓았으니 어지간히 지독한 인간인가. 징글징글한 놈팽이. 라이언이 독점적으로 관여하는 프로젝트라며 수종은 그를 쫓아내어 장치에 관한 한 그 어떤 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그 뒤로 내전이 시작되면서 바빠져 테어니 장치니 하는 것은 까맣게 잊었지만 아직까지도 단 한 가지는 확실히 기억한다. 장 너머로 보인다던 모습을 묘사한 기사 한 줄. 같지만 다른 도시가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랩쳐가.
“막스. 너 또 코피 나네.”
막스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인중을 문질러 닦는다. 그녀의 검지를 붉게 물들이며 느적느적 흘러내리는 핏방울을, 그는 넋을 놓고 바라보다 이어지는 말에 정신을 차렸다.
“솔직히...이해가 안 돼.”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내가 할 말이야.
2.
[1958년 12월 31일]
“나쁜 놈들에게 당신의 땀방울을 보이지 말라”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건 프랭크가 그렇게 되기 전에 가져다 준 책이기에 그럴 만도 하겠다며 막스는 책을 덮는다. 무려 사인본이다, 맨 앞 장에 그 애가 ‘사랑하는 막스에게.’ 라고 써줬던.
소식을 들은 뒤에는 한 동안 책만 봐도 울적해졌지만 이젠 그럭저럭 읽을 수는 있을 정도다. 그걸 건네주던 프랭크는 참으로 잊기 힘든 미소를 짓고 있었으니 특히나 공을 들여 만든 미소였겠지. 마치 영화배우 카드를 연상 시켰으나 그들의 웃음은 일상적이어야 보기 좋다.
솔직히, 이제 와서 어쩌자는 건가 싶었으나 그 옛날의 기억은 뼈에 스민 상흔과 같다. 가끔씩은 그 애의 얼굴만 봐도 쏟아지는 좋은 날에 가슴이 아렸다. 그 때가 그립지 않다는 말을 할 수 없다, 지금이 행복하다 해도. 하지만 돌아가고 싶지도 않은 게 그 날이기에 막스는 지난날을 지난날로만 간직했다. 영영 사라져야 의미를 갖는 시절도 있다.
이제 곧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이다. 이곳이라면 좋은 일 없이 더 나쁜 일만 있을 테지만 아무렴 어쨌든 살아야했다. 그래도 그녀에게는 의지를 다잡아주는 것들이 많다. 타자기, 만년필, 책, 그리고 빈센트와 남편. 그러니 말일은 꼭 가족과 함께 보내고 싶었지만 한창 사춘기인 아들은 내키지 않아 하는 눈치다.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일까? 하지만 이런 반항이라도 반갑기 그지 없다.
아들의 사춘기는 평온하다 못 해 밋밋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말대꾸, 말대답, 심지어는 사소한 반항조차 않는 아들이라니. 막스는 사춘기 당시 본인이 벌인 일들로 인해 단단히 각오 했으나, 오히려 맥이 빠질 정도로 침착한 아들이 골머리가 될 줄은 몰랐다. 가출을 하거나 나를 왜 낳았냐고 소리라도 치면 좀 좋아, 정말인지 속내를 가늠할 길이 없어 매일 매일을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느낌이다.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으로 지내고 있니? 혼란스럽지는 않고? 부모님이 밉지도 않아? 혹시 화가 나서 문이나 창문을 부숴도 몇 번은 눈감아줄게, 엄마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확실한 건 아무 것도 없고, 아들은 그저 혼자 있고 싶다는 의사표시만 넌지시 내비쳤다. 반항 같은 말이래봤자-
‘이제 제 방 건드리지 마세요. 제가 청소할게요.’
-정도.
당시 그녀는 아들의 묵직해진 목소리에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을 뿐. 건드리지 말라는 말에 가시가 돋혀있긴 했지만 그리 매정한 것도 아니라, 가능하다면 독심술이라도 쓰고픈 심정이었다. 아들은 눈에 보여도 보이지 않아도 모든 근심 걱정의 원인이었다. 혹시 감정을 너무 억누르는 건 아니니? 그러면 언제고 나쁜 방향으로 –너희 아빠처럼- 곪고 말걸. 혹시 내가 너희 아빠랑 너무 싸워서 그게 너한테 안 좋았던 거니? 한숨을 폭 쉬며 책상 위에 엎드렸다. 그래도 같은 남자라고, 남편한테 말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그이는 심각한 그녀의 태도에 언제나 태평한 반응을 돌려줬다. 알아서 잘 할 거라는 둥, 애들은 범죄만 안 저지르고 자라면 된다는 둥. 그걸 몰라서 초조한 게 아닌데.
한숨만 푹푹 내쉴 무렵 누군가 서재 문을 두들겼다. 얼른 가서 문을 여니 서 있는 건 아들.
“어머. 웬일이야?”
“음.. 그냥, 부탁 좀 하려구요.”
“무슨 부탁?”
그녀는 아들을 보자마자 볼을 쥐고 ‘귀여운 내 새끼!’ 라며 어르고 껴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가까스로 밀어 넣으며 어깨만 짚었다. 언제 봐도 그녀를 많이 닮았다. 얄쌍한 선이나 하얀 피부, 올라간 눈꼬리하며. 결정적으로는 적갈색의 머리칼까지 반짝이는 아들을 볼 때 마다 막스는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누구 아들이라서 이렇게 잘생겼지? 그야 내 아들이지. 남편은 그녀가 이런 식으로 말할 때 마다 불만스러워했지만, 그를 닮은 건 눈동자와 차가운 성격이면 충분하지 않나.
“무슨 일 있어?” 그녀가 걱정되는 듯 묻자 아들은 싱긋이 웃으면서 그랬다. 아직도 미소가 조금 어색한 게 아기처럼 사랑스러웠다.
“이번 말일에는 하루 묵고 올까 해요.”
“아... 그럼, 당연하지. 어디 가는데?”
“라이언 놀이공원이요.”
아, 그 정도야. 흠. 사실 조금 섭섭하지만. 그래도 막스는 웃음으로 화답했다.
“당연하지! 얼마든지 다녀와.”
[1968년 12월]
여기에 오기까지 벌어진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머리에 총을 맞기 직전 허공에 생긴 틈으로 떨어지면서, 동시에 의식이 희미해졌고 우주 같은 공간을 부유했다는 것을.
무한한 공간에 혼란을 느낄 찰나, 주위는 차분히 가라앉더니 서서히 형태를 잡아 올림포스 하이츠에 있던 그녀의 집으로 바뀌었다. 랩쳐에서 풍기는 특유 비린내가 아니라 상쾌하고 맑은 향이 가득한 그녀의 공간. 거실 벽면에는 결혼사진과 가족사진을 큼직하게 걸어놓았고, 널찍한 창문은 태양이 쬐는 듯한 느낌이 들도록 이중창 안에 조명 처리를 해놓았다. 덕분에 그곳만큼은 언제나 오전 10시의 투명한 햇빛이 새어드는 듯 나른하고 행복한 한 때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저 멀리 소파에 앉은 남편도 조명을 쬐며 담배를 피우고, 아들은 근처에서 피아노 건반을 꼼꼼히도 두들긴다. 그리고 왠지 그 광경은 그녀를 울고 싶게 만들었다. 아들의 뒷통수는 언제나 그랬듯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 꿈이었던 거야. 막스는 중얼거리며 그들에게 가려고 했으나 뭔가가 그녀의 몸을 붙든다. 마치 투명한 젤리로 가득찬 듯 허공이 그녀를 놓아주질 않았다. 사실, 이런 건 상관이 없다. 괜찮았다. 하지만 이 모든 평온함, 아들과 남편이 한 데 앉아 그녀를 맞이하는 이 일상이 꿈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절망스럽다 못 해 가슴이 뜯기듯 아팠다. 이렇게 생생하고 손만 뻗으면 닿을 듯 가까운데, 이렇게.
그렇담 우리 아들, 빈센트는 어딨지?
그제야 기억이 날 듯 말 듯... 아냐, 다시 멀어진다. 마치 안개 너머를 바라보는 듯 기억이 희미해진다. 아들을 보면 가슴이 찢어질 듯 슬픈데, 왜 그런지 알 수가 없다. 분명 끔찍한 사고가 있었다. 그건 확실하다. 그녀는 자신과 자신의 판단을 끊임없이 자책하고 증오하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당시에는 심장 전체에 문신을 두른 듯 결코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으나 지금은 아무 것도 모르겠다. 그 어떤 것도 기억나질 않는다.
빈센트!
이름을 내질렀을 때는 온 공간이 잘게 허물어져 분해되더니 공중으로 흩어지면서 다시 뭉쳐졌다. 너무 순식간이라 어안이 벙벙해질 찰나 그녀가 있던 공간은 라이언 놀이공원 역으로 바뀌어버린다. 서 있는 플랫폼의 맞은편에는 꽤 녹이 슨 대서양 급행열차가 자리 잡고 있었고, 열차가 지나가야 할 통로는 거대한 얼음으로 막혀있다. 얼음이 뿜는 한기에 정신이 번쩍 들자 모든 기억도 서서히 돌아온다. 아들이 놀이공원에 갇힌 채로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구역이 폐쇄되어, 그녀는 아들을 찾기 위해 무모하게 길을 나섰더랬다. 빈센트, 우리 아들. 그 애를 찾아야한다.
하지만 라이언 놀이공원 역은 내전을 감안해도 너무나 을씨년스럽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스플라이서들의 헛소리를 제외하면 무섭도록 이어지는 정적에 막스는 몸을 세차게 떨며 양팔을 감싸 안아 오소소 돋는 소름을 다독였다. 엄습하는 공포감도 아들을 찾기 위한 절박함을 이길 수는 없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보다 두 뼘이나 컸지만 그래도 애는 애다. 지금쯤 무서워서 혼자 서럽게 울 것이 분명하다. 먹을 것도 없어서 배도 곯았을 텐데. 안 된 꼴로 숨어있을 아들을 생각하니 목이 멘다. 평정심을 유지하기 너무나 힘이 들었다. 온 몸의 피가 사방으로 튀며 속삭이는 느낌이다. 아들을 찾으라고. 그녀는 세차게 뛰는 심장에 그대로 놀이공원으로 향하려 발을 내딛었고, 어떤 목소리가 번갈아 울린 것도 그 때였다. 깐깐하고 고지식한 느낌을 주는 남녀의 음성. 모르긴 몰라도 피도 눈물도 없을 사람들 같다. 한참을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던 목소리는 명령하듯 일렀다. 역무실로 가서 문을 두들기라고. 의심을 할 테니 당신이 당신임을 증명해야한다고도 했던 것 같다. 증명해야한다니, 누구에게? 그러자 둘 중 남성일 게 분명한 음성이 툭 던지듯 말했다. 남편.
남편-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다.-은 골똘한 얼굴로 깔고 앉은 매트리스를 노려봤다. 매트리스가 너무 더러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는 용케도 구해놓은 그가 신기할 지경이다. 역시 어디에 던져놓더라도 잘 살아남겠지.
생각도 잠시, 다시 떠오르는 아들 생각에 차오르는 눈물을 꾹 삼키며 그의 손등 위에 손바닥을 올려놨다.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나 빈센트 찾아야 돼.”
“그래, 귀 닳겠네.”
둘은 좁고 더러운 매트리스에 붙어 앉아 시간을 죽였다.
생각해야할 것이 많다. 망해버린 랩쳐부터, 기가 막히게 엇갈려 10년이란 공백을 놓고 마주한 남편, 빈센트, 그리고 앞으로의 삶까지. 무엇 보다 아들이 너무 걱정 되었지만 지금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눈물로 꽉 막혀 숨을 쉬기 힘들 지경이었다. 게다가 오거스터스도 있다. 다른 세상을 넘어왔다면 남편에게도 마음이 가지 않을 수 없다. 하루아침에 아내와 아들을 잃어버렸으니 그 조차도 평정심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겠지. 하지만 오늘만 해도 너무 많은 일이 그녀를 뒤흔들었다. 지금이 몇 시인지 신경도 쓰고 싶지 않을 만큼 졸음이 밀려오고 있었다. 나른한 몸을 천천히 뉘였다.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신을 믿지 않던 그녀인데도 무작정 빌고 또 빌었다. 잘 버티기를, 버티기를. 내 사랑.
[1959년 1월]
누구의 탓도 아닌 거 잘 알아. 그런데 나 너무 견디기 힘들어, 당신도 알잖아. 빈센트는 살아있을 거야. 나 어떻게든 그 애를 찾아내야해.
사랑해, 알지.
그리고 미안해.
싱클레어는 허탈한 얼굴로 책상에 놓인 쪽지를 내려놓았다. 이걸 처음 발견한 뒤로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으니 이젠 외울 지경이다. 다만 아내가 이 정도로 미쳤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 자기 자신과 힘겨운 논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다행히 갈등을 짧았고, ‘그녀라면 그럴 수 있다’에 다다른다. 문제는 그녀가 이 정도로 논리 없이 감정으로 움직이는 인간이었느냐는 당혹감이 아니다. 지금 어디서 어떻게 되었냐는 사실이지. 지레짐작 이외에는 아무 것도 가늠할 수 없는 것, 다만 지극히 현실적이고 논리 정연한 사고체계로 미뤄봤을 때 단 하나로 좁혀지는 결론.
죽었겠지.
창문 너머로 환히 비치는 태양 같은 조명을 흘깃 보며 그는 다시 한 번 생각한다. 무장도 않은 데다 몸도 안 좋은 아내가 라이언 놀이공원까지 다다랐을 리 없다. 기껏해야 올림포스 하이츠나 아도니스 근처를 서성이다 스플라이서나 라이언 공업 측 경관들에게 죽임을 당했을 게 분명하다. 그녀의 삶의 종지부를 함께하지 못 한 것도, 일이 이렇게 꼬일 때까지 신경 쓰지 못 한 자기 자신에게도 화가 치밀었으나 밀어 삼키는 건 쉬웠다. 이런들 아무런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매우 답지 못 한 처사였으나- 막스와 오랫동안 부대껴 살며 싫어도 갖게 된 감각을 가늠해본다. 사랑하면 닮는다는 유치한 말을 신봉하는 자는 못 되지만, 그런 사람과 내내 살다보면 싫어도 품게 되는 게 있다며. 그건 조개 안에 쿡 박힌 진주알 –그의 것은 조금 일그러졌다-처럼 어쩌다보니 생겨버렸다. 그래, 희망이올시다.
혹시라도, 아주 만약에, 희박한 확률로 그녀가 근처 어딘가에 숨죽여 살아있을 수도 있지 않나. 운 좋게 무기를 주워 숨은 뒤에 그래서 자신의 감정적인 판단을 후회하며 제일 믿음직한 사람의 구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면?
당연하지, 포기해야할 건 포기해야 마음이 편한 것을.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자신은 살아있으니 이대로 부활장치 개발에나 집중하며 살면 될 일이다. 아내와 아들의 명복도 빌어주고, 이따금씩 추억해가며 한 때의 괜찮은 기억으로 말쳐두면 될 일인데. 산 사람은 살아야하니까.
그러던 싱클레어는 재빠르게 몸을 숙여 맨 아래 서랍을 바라본다. 숨을 후 뱉으며 당겨 연 뒤 빈 서랍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이거지, 그래. 중얼거리며.
상황이 영 엉망으로 돌아가자 그는 부랴부랴 막스를 데리고 포트 프롤릭에 있는 사격장에 갔다. 큼직한 권총을 쥔 막스는 한 발을 겨우 당기더니 손목이 아프다며 징징거렸고, 그는 그녀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네 손에 맞는 걸로, 더 작은 걸로 구해오면 되잖아? 그리고 막스는 그가 줬던 작은 권총을 이 서랍에 처박아 뒀다.
아주 조금, 정말 의미 없으리만치 조금의 확률이었다. 하지만 어떤 건 무모하고 절박해야하지 않나? 어떤 건.
[1968년 12월 둘째 주]
넓다면 넓고 좁다면 좁은 역무실이지만 슬슬 익숙해지고 있다. 음식을 식량이라고 부르거나 쉴 곳이 은신처가 됐을 정도로 모든 게 생존과 직결된 것만 제외하면 그럭저럭 견딜만 했다. 건강을 우선으로 두고 살아야하기에 꽤 빠듯한 하루 일정이 있고, 그는 그걸 착실히 지켰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을 때가 많았다.
막스는 ‘신선한 물’이라는 라벨이 붙은 물병을 잡아들었다가 내려놓으며 말했다.
“당신 계획이 뭐랬지?”
사실 아직도 그가 어색했다. 떨어져 앉은 이 거리가 모든 걸 말해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0년 만에 너무 늙고 살이 올라서 이젠 다른 사람인가 싶을 정도다.
“외부인과 접촉하는 거.”
“...”
썅, 장난하나.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그는 하하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려 했고, 그녀는 책을 집는 척하며 몸을 비틀어 벗어났다.
“표정 보니 이제 내가 ‘헛소리 아니거든’ 이라고 말할 차례네.”
“아.. 비슷해.”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하는 법이거든. 테넨바움 기억해?”
“그 미친년.”
“이야, 어지간히 싫었나봐. 나도 마찬가지긴 해. 근데 그 여자 지금은 시스터들을 치료하는 중이고 한 번 탈출했다가 다시 왔거든. 애들 구하러.”
“애들? 설마 리틀 시스터 말하는 거야? 아직도 있다고? 왜?”
그는 눈썹을 비대칭으로 비트며 한 쪽 눈만 일그린다. 장난을 꾸미는 광대 같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훨씬 곤란해보이는 게, 할 말이 많아보였지만 이렇게 퉁 칠 뿐이다. 얘기가 길어,
그래, 알 것 같다. 힘이 빠졌다. 라이언이나 폰테인만 죽으면 끝날 일 같았는데 이곳의 비극은 아직도 끊이질 않았다. 제일 싫었던 건 여자아이들이 사라질 무렵 빈센트가 나이 꽤 있는 아들이라 은근히 안심한 자기 자신이다. 쓰게 웃었다. 결국 그녀도 이런 인간인데.
“너무 쳐지진 말고. 알잖아? 중요한 건 애들을 구하고 있다는 거니까. 그거면 됐잖아.”
“그러니까 어떻게.”
“테넨바움이 치료약을 개발한 모양이고.. 알파 시리즈도 깨우고 다녀. 아, 옛날 빅 대디들. 그 과정에서 내가 꽤 도왔으니 잘만 하면 지상으로 가는 건 문제도 아니겠지.”
“좋겠네. 잘 가. 잘 살고.”
“넌 계속 있을 거야?”
“그럼 달리 방법이 있어? 다시 열리겠지.”
“확신해?”
“응.”
“이야, 정말?”
“말했잖아.”
그 질문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지만 필요이상으로 답하지 않았다. 다른 세상에서도 그이를 만나 평생을 약속한 게 낭만적이어도, 그녀와 빈센트를 함께 기른 남자는 저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이곳에서는 자꾸만 기억이 뒤죽박죽으로 엉키다가 사라지는 것 같다. 벌써 빈센트의 목소리도 잊어버리고 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이러다가 전부 다 잊어버리는 건 아닐까?
“나 이 놀이공원에 거의 반년을 박혀있었는데 말이지, 테어는 딱 한 번 봤어. 무슨 말인지 알지?”
“육 개월 마다 한 번씩 열리나보네, 그럼.”
“생각해봐, 여기서 버티기 쉽지 않아. 게다가 거기서 넌 전쟁 중에 실종된 사람이라는 건데, 더더욱 찾기 쉽지 않겠지. 네 남편을 믿어? 언제까지고 계속 찾진 않을 텐데.”
“지금 내가 못 믿을 건 당신이면 족하거든.”
“이런, 날카로운데?”
짜증이 치밀었다. 여기나 저기나 그녀를 살살 건드리는 화법은 똑같은 게 몸서리쳐지게 싫었다.
“게다가, 따져보자고. 여기 물자도 점점 부족해져서-”
“아 제발, 조용히 좀 해봐! 나 생각 좀 하게!”
그제야 그가 입을 다물었고, 주위가 잠잠해지자 그녀는 목걸이에 달린 하트모양 로켓을 열어 그 안의 아들과 남편을 바라봤다. 사진이 너무 작아 이목구비가 흐려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기억을 되살리는 거라면 이걸로 충분하다. 이 목걸이를 사주던 남편만 해도 생생하다. ‘보통 이런 거 찬 여자는 딱 두 부류더라고, 과부랑 과부가 될 사람.’ 막스는 풋, 하고 웃었다. 하지만 웃음은 짧고 울적함은 길다.
별다른 방법이 없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저쪽의 남편이 힘써주길 애타게 기다리거나 –대체 어떻게 힘쓸지도 모르는 일이다. 세계에 걸친 실종이 아닌가.- 테어라는 게 다시 열리기까지 기약 없이 버티거나. 그게 그건가.
안다, 최선은 그가 넌지시 암시한 대로 함께 탈출하는 것. 다른 인생을 살아왔다고는 해도 남편은 남편이니 그럭저럭 괜찮은 여생을 보낼지도 모른다. 그래, 다시 집필을 할 수도 있다. 랩쳐처럼 책이 불타거나 검열을 받아 출간이 거부되지도 않겠지. 게다가 지금 이곳이 위험천만 하다는 걸 그녀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고 싶었다. 이곳에 남아있을 이유보다,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이 로켓 안만 봐도 차고 넘친다.
그녀는 싱클레어에게 라이언 놀이공원이 언제까지 폐쇄됐는지 물어보려 했지만 겁이 나서 그럴 수 없었다. 대신 아들의 목소리나 이목구비를 생생하게 떠올리려 애썼다. 주근깨가 듬성듬성 보이는 콧잔등. 그녀를 빼닮은 눈매. 햇빛을 받으면 결대로 반짝이는 녹갈색 눈동자나 빳빳한 머리카락. 둥근 뒤통수, 그러니까 모든 것...
-모든 걸.
[1959년 1월 넷째주]
“그래, 바로 여기에.”
로니는 다 헤져 낡은 구두 밑창으로 바닥을 연신 밟았다. 탭댄스라도 추는 듯 요란하게 밟는 걸 보니 어지간히 황당한 일이었나 본데.
아틀라스는 악취의 근원지인 목 매단 시신을 보고 얼굴을 찌푸린다. 하필이면 시체를 입구에 저렇게 걸어놓다니. 얼른 자리를 옮기고 싶었다. 하지만....
“로니, 확실한 거야?”
“믿기 어려운 말이라는 거 나도 잘 알아, 아틀라스. 하지만...”
그는 바닥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그년이 대체 어딜 갔겠어?”
그래, 일리 있군.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재미 삼아 죽이는 그가 황당히 놓쳤다면 저리 화내는 게 당연하다. 사실 사람을 언제 어떻게 죽이든 상관없었지만 이런 광기는 퍼져나갈수록 통제가 힘들기에 어느 정도 제지하곤 했다. 그러면서 확고해지는 아틀라스의 캐릭터와 주변의 신뢰는 말할 것도 없지. 가만 보니 이번 신원, 꽤 유용하면서 즐거운 구석까지 있다.
“웬 구멍이 생긴 거야, 그것도 갑자기...”
“알아, 알아. 난 자네를 믿고 있어, 로니. 아마도 빌어먹을 라이언이 제 첩자들에게 비밀리에 제공한 플라스미드를 사용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혹시 모르니 그 여자의 생김새나 알려주지 않겠어? 몽타주라도 만들어 동지들에게 알려줘야지, 조심하라고.”
“아, 그거라면 걱정 마. 방금 누군지 떠올랐으니까...”
자네를 믿고 있어. 이 하나를 표정에 담기 위해 그는 나름대로 결연한 다짐을 하며 머릿속으로 하나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언젠가 막스가 그의 어깨를 단단히 붙들고 일러줬던 말이다. 프랭크. 난 널 믿어. 그 때 그녀의 일렁이는 녹색 눈을 보니 영영 저 안에 빠져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섬뜩했었지. 그 눈이다, 그 표정. 난 널 믿어. 그리고 들려오는 이름에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3.
[1968년 12월]
몇 주가 지났을까. 좋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젠 스플라이서들이 떼거지로 근처를 어슬렁거려 나가기 쉽지 않아 식량이 점점 부족해지고 있었다. 그는 바싹 마른 목을 간신히 축이며 아직 들르지 않은 곳들을 생각해본다. 근처에 놓인 여행 가방이나 쓰레기통은 벌써 뒤졌으니 반경을 넓혀야겠지. 곧 싫어도 나가야만 할 때가 올 것이다, 살아야하니까.
그 중에서도 안 좋은 건 날이 갈수록 예민해지는 막스였다. 그녀는 고립된 장소와 더불어 제대로 씻지 못 하는 상황을 힘들어했다. 진동하는 고린내나 번들거리는 얼굴, 기름에 축 눌러 붙은 머리칼을 보며 그는 자기 자신도 별반 다를 거 없이 추레하리라 예감한다.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막스는 퀭한 눈을 마구잡이로 굴리며 중얼거렸다. 더 이상 못 참겠다고. 며칠 전부터 누누이 하던 말이기에, 아마 오늘도 제 풀에 꺾일 것이라 생각하며 잠자코 있었다. 하는 말에 족족이 대꾸하는 게 긁어 부스럼이라는 걸 그는 아주 오래 전 경험으로 배웠다.
“샤워 어디서 한댔지?”
“근처 공중 화장실.”
“언제.”
모니터 속에서 일렁이는 실루엣들을 보며 말했다. “오늘은 아니네.” 그러자 막스는 벌떡 일어서며 그를 노려봤다. 불만에 가득 찬 눈, 아주 많이 봐온 얼굴이다. 뭔가가 수틀리면 꼭 저렇게 입술을 씹었다.
“나갈래.”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네.”
“아냐, 나갈 거라고.”
“스플라이서들이 저렇게 많잖아. 조금만 기다리면 자기들끼리 싸울 걸,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가든가...”
“나 못 참겠어. 이대로 못 살아!”
“내가 말 하지 않았나? 램의 스플라이서가 너무 많아서-”
“아- 이렇게 해도 못 알아듣겠어?! 아니면 모른 척 하는 거야?!”
여기서 말문이 막히면 안 되는 거였다, 머뭇거리자 그녀는 곧장 말을 가로챘다.
“여기 있기 거북하다고!”
“알아. 쉽지 않지.”
“전부 다.”
“안다고, 조금만 참으면...”
“전부 다 거북하다니까?! 특히 당신!”
진정시키려 천천히 일어나자마자 그녀는 물러섰다. 당황할 필요는 없지, 그는 이 거리감을 알고 있지 않나. 경계심과 불신이 뒤엉켜 설령 당황스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열 뼘 남짓한 거리. 그래, 언제부턴가 그녀는 형체 없는 위협을 염두에 두곤 했다.
긴장감은 서로를 꽉 붙들어 공기 안에 스며든다. 뒤로 물러설 수도, 그렇다고 다가갈 수도 없어 마냥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고심했다. 미쳐 알아차리지 못한 척 능청을 떨어왔으나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다. 아니라면 저 눈에 담긴 경계심을 달리 뭐라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녀가 긴장한 듯 제 두 손을 꽉 그러쥐며 격벽 문을 바라본다. 제일 나쁜 상황은 안 봐도 그려진다.
“얘기 좀 하지.”
“...”
“얘기 좀 하자고.”
“그럼 묻는 말에 대답해.”
좋아, 라고 말하자마자 후회했다. 묘한 표정을 하며 그녀가 말했으니까.
“아내 임종은 지켰어?”
“이런. 굉장히 뜬금 없-”
“임종 지켰어?”
“자기야, 화난 것 같네. 진정해.”
그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다가가자 막스는 잽싸게 바닥에 있는 유리병을 주워다가 집어던졌다. 아슬아슬 빗나간 병은 그의 등 뒤에서 박살났고, 유리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파편 대신 귓가에 촘촘히 박혔다. 막스는 고함을 내질렀다. 귀가 먹먹했다.
“아내 임종 지켰냐고! 아파서 뒤지기 직전에 옆에 있어줬냐니까?!”
“그게 중요해, 지금?”
그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살짝 커지자 막스는 손바닥으로 입을 때리듯이 가렸다. 경멸과 경악이 섞인 눈으로 그를 샅샅이 훑으며.
“당신... 안 지켰구나.”
“...일단 내 말 좀 들어봐-”
“미친 새끼. 당신이 그러고도 인간이야?”
“내 말을-”
“이제 와서 나한테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냐고! 썅! 어떻게.... 어떻게 사람이 그래? 어떻게!”
“아... 다 했지? 그럼 이제 그만하자고. 언성 높이기 싫거든.”
“왜? 죄책감 들어?”
그녀를 노려보자 이젠 울 것 같이 일그린 막스가 있다. 그는 저 얼굴을 제일 못견뎌했다, 평생 동안. 저 얼굴을 보면 기억 속의 아내가 떠오르니까. 나 있잖아, 당신 맘 알 것 같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지 않았다. 다만 귀찮아서, 지겨워서, 어쩌면 별로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아 침묵으로 일관했다. 연말에 집을 나간 아내는 폭동에 휩쓸려 피칠갑을 한 채 돌아왔고, 그 뒤로는 점점 몸이 약해지기만 하더니 침대에서 나오질 못 하다 죽었다. 죽기 얼마 전인가 아내의 팔은 나뭇가지에 돼지가죽을 두른 것 같아 보기도 싫고 만지기도 싫었지. 광대가 튀어나왔다. 살과 함께 머리도 너무 빠진, 이름만 막스인 쪼그라든 미라를 원할 리 없는데. 도망치듯 안방을 나오며 생각했다.
‘어떻게 저 꼴을 하고....’
그러면서도 안 된다고, 나중에 분명 후회할 거라고 마음 깊은 곳에서 노이즈 가득한 목소리가 낮게 읊조렸지만 그는 사사로운 것에 귀 기울이는 인간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 때는 그랬다. 평생을 한 결 같이 살았다면 좋았을 거다.
“자기야. 원하는 게 있으면 말을 해봐. 서로서로 조율해나가는 게 또 이런 생활 아니겠어?”
막스는 지친 듯 주저앉는다. 한 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다 뱉은 말.
“당신이 제일 잘 알잖아.”
그래, 유난히 예민했던 그 날의 막스를 구슬려야 했나. 제대로 못 했을 식사나 했어야 했나. 전부 가지고 있는 보울리의 바이닐을 턴테이블에 올려놓은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음악으로 정적을 채워야했나.
감정을,
생각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헤아리는 인간도 못 되었고, 그렇다고 그 때는 한가하지도 못 했으니 자기 글이 잿더미가 되거나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는 상황에서 그녀가 그렇게 힘들어할 줄도 몰라서, 올해는 특히 별로였으니 내년에 좋을 것만 생각하자는 뻔한 말조차 떠올리질 못 했다.
안다, 그럼. 이제 와서야 전부 다 구질구질한 가정들. 그녀는 죽었고, 시체도 재가 되어 바스라져 이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지. 물고기들의 아가미 사이사이에 끼어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여기 있다. 눈앞에 생생히 살아, 말하고 움직인다. 그런데...
“나 당신 아내 아니야. 당신도 내 남편 아니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막스가 천천히 일어났다.
“그럼 난 갈게. 나 혼자 어떻게든 할 테니까 근처에 안전한 곳만 알려줘.”
“굳이? 나 같으면 여기 있을걸. 여기만큼 안전한 곳도 없-”
들은 척도 안 하며 막스가 레버를 당기자 세큐리스 격벽문이 천천히 올라갔다. 막스는 헤진 핸드백에 권총이나 물 같은 걸 우겨넣는다. 이윽고 문이 완전히 열린 순간, 밖으로 나서려던 막스는 뜻밖에도 멈춰 섰다. 시선을 한 곳에 고정하며.
무슨 일이야?
말하고 싶었지만 날카롭게 뻗어나간 그의 본능이 모든 걸 속속들이 본 듯 입을 우겨 다물게 했다. 입을 다물라고. 다물어야만 한다고. 여전히 막스는 시선을 저쪽에 둔 채 천천히 손을 뻗어 레버를 그러쥔 뒤 느리게 잡아 내렸다. 철컥. 어딘가 엇나간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육중한 근육덩이가 도약을 하는데, 문은 아무런 미동이 없다.
“내가 왔다, 이 게이새끼들아!”
막스는 난생 처음 듣는 비명을 지르며 핸드백 속의 권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겼다. 사정없는 비명소리에 비해 총을 다루는 모양새는 꽤 침착한 게 되레 기이한 인상을 준다. 다행히 총알은 명중했는지 젖은 살이 짓이겨지는 소리와 함께 브루트 스플라이서가 날뛰며 비명을 질렀다. 괴음은 멀어졌지만, 잠시뿐일걸 그는 안다. 뭐라도 해야 한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막스는 온몸 –특히 손- 을 심하게 떨며 쓰러지듯 뒤로 눕더니 울먹였다. 누, 눈을, 눈을 맞췄어. 근데, 아까 나, 내가 너무, 소리 질러서, 눈치를 챘나봐-
“미안해.”
“자기야. 진정해. 일단 일어나, 숨어야지.”
그런데 숨을 곳이 있긴 한가? 그는 한 번 더 레버를 잡아 내렸으나 역부족이었고, 작게 욕지거리를 하며 안쪽으로 뛰어들기 전 역무실을 구석구석 훑었다. 브루트 스플라이서의 괴성이 다시금 들려온다. 거 참, 끔찍하게 상스러운 말들.
사물함? 아니, 몸뚱이를 부딪혀오면 제일 먼저 짓이겨질 거다. 밖으로 나가야 하나? 여기 말고는 숨을 곳도 없어서 금방 들킬 게 뻔하다. 그는 허탈하게 벽에 기대어 섰다. 막스는 기어오다가 아까 튄 유리 조각에 손을 베였으나 아무 것도 느끼지 못 하는 모양이다. 온 몸을 심하게 떨면서 웅크려 앉아 숨을 가쁘게 쉬었다. 피가 흐르는 손으로 눈물을 닦으니 그녀의 얼굴은 피범벅이 되어 이미 살해당한 사람 같다. 흐느끼며 말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는 차마 대꾸할 힘도 없다. 몰랐으니까, 죽음이 다가온다는 게 이렇게 허무한 일이라는 걸. 그리고 별 다른 거창함도 없다는 걸. 이런 식으로 알게 될 줄은.
막스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그는 그녀를 부축하여 서로의 몸에 기대어 섰다. 육중한 소리가 점점 다가오자 문득 그녀의 가슴께에 얼굴을 묻고 싶었다. 너는 항상 울면 그런 소리를 낸다고, 말하고도 싶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방아쇠를 관자놀이에 대고 당길까 고민하기도 했다.
이윽고 브루트 스플라이서가 달려와 문 사이로 고개를 들이 밀 때, 그는 뱉었다. 탄식 같은 한 마디.
“아, 하느님.”
방아쇠를 몇 방 당겼는데 소용이 없다. 저 부푼 괴물에게는 총알도 간지러울 뿐인가. 그는 죽음을 직감한다. 마지막으로는 고향을 떠나오며 봤던 수평선이 보였다. 바다와 하늘을 가로지르는 파란 선. 바다냄새. 찝찔한 소금내. 멀어지던 땅.
눈을 떴다.
막스가 어김없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귀를 더욱 먹먹히 만드는 드릴 소리에 얼굴을 찡그린다. 살갗이 사방으로 튀며 입안에 찝찔한 피냄새가 진동을 했다. 사람이 일정 이상의 고통을 겪으면 아드레날린을 분비한다는 걸 잡지에서 읽은 적이 있다. 아프지 않으니까, 아프지 않은데. 브루트 스플라이서가 피를 토해내며 고꾸라졌다. 알파시리즈가 쓰러지는 몸뚱이에서 드릴을 빼냈다.
-
싱클레어가 피를 뒤집어쓴 채 쓰러지자 그녀도 정신을 잃었다. 부유하는 어두운 공간, 그 속에서 그녀는 어떤 여자를 본다.
엄청 어리네.
곧 이질감을 느낀다. 허공의 공기 한 점마저 그녀를 밀어낸다, 그녀는 이곳에 있을 수 없다. 그래서도 안 되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바람을 거스르는 듯 불편하고 생경한 감각을 느끼며 그녀는 어떤 여자를 바라봤다. 화장이 진한 어린애. 큐피트 화살의 직원처럼 보인다. 막스는 그녀의 나이를 알아보기가 어려웠는데, 어른스러운 행동거지와 화장을 감안하더라도 풍기는 분위기가 너무나 오래되고 지쳤기 때문이다. 이목구비를 찬찬히 뜯어보고 나서야 막스는 당황한다.
여자는 약간 어색하게 옷 매무새를 다듬는다. 흑갈색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멀어졌다. 그 순간 막스는 동시에 다른 공간에 존재한다. 걸어가는 앳된 여자를 보면서도 비명와 총소리가 한데 섞인 올림포스 하이츠에 존재한다. 막스가 보인다, 아틀라스 패거리가 머리칼을 우악스레 쥐고 총구멍을 들이밀었다. 익숙한 기억이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걸까? 혼란스러웠지만 말 못할 움직임에 몸을 맡기기로 한다. 지금의 그녀는 각기 다른 세계를 한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흑갈색의 여자가 발을 내딛는 순간, 올림포스 하이츠를 비롯한 같지만 다른 세계에 눈부시게 빛나는 타원이 생기며 왈칵 열린다. 그렇게 모든 세계에 생긴 쪼개진 허공은 불행하다면 불행하고 운이 좋다면 좋을 적발의 여자를 삼켜 다른 세계로 보내버렸다.
그 뒤에 찾아온 것은 또 다른 공간이다. 여전히 불청객과도 같은 그녀를 밀어내려 하지만 한층 순응적인 태도에 움직임도 잠잠하다. 폰테인 백화점이 랩쳐 보다 더 아래에 위치한 해구에 놓여있다. 그녀의 의식이 점점 멀어지며 아득히 외쳤다.
왜 저게 저기 있지? 왜?
하지만 이내 사그라든다. 여기서는, 이 안에 있으니까. 그 뿐이다.
다시 본 흑갈색의 여성은 서비스 베이에 있는데, 몰골이 아주 엉망이다. 립스틱은 반쯤 지워졌고 같은 색으로 칠한 손톱의 매니큐어도 마찬가지로 점점이 벗겨져 금간 도자기를 보는 듯 했다. 저 예쁜 옷도 글쎄 다 헤지고 더러워져 삐져나오고 난리도 아니다. 하지만 여자는 아랑곳 않고 스플라이서들을 잘도 피해 숨는다. 이따금씩 능숙하게 석궁을 쏘기도 했다.
저 애가 연 거야.
그녀는 직감한다. 자신은 거대히 돌아가는 우주의 틈에 우연히 끼어든 홀씨라는 걸. 돌아가는 움직임을 바꿀 수가 없다면,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싹을 틔우는 수밖에 없었다.
[1959년 1월]
“씨발, 그럼 뒤졌는지 어떤지도 모르는데 어쩌란 말이야.”
이 새끼 낯짝을 재떨이로 쓸 수도 없고! 그는 가래침을 찍 뱉으며 분을 삭히기 위해 이를 악 다물었다. 그가 누구냐고? 루이 맥그랩, 인생에서 세 가지 재능을 타고난 수재 중의 수재다. 정당한 응징, 청산유수의 혓바닥, 사람과 사람사이의 연결고리. 하지만 세상은 그의 재능을 더러 살인과 사기, 밀수라 불렀다.
그래도 악착 같이 살다보면 수배 당한 인생에도 빛은 보이는 법. 좆대로 하면 되는 무법지대라길래 –지상이래봤자 전기의자가 최선이었으므로- 얼씨구나 내려온 이 하수구 덕분이다. 하지만 그는 폰테인 밑에서 선원으로 일하다 지금은 웬 거들먹거리는 사업가의 똥개가 되어 멍멍 짖고 있다. 걸쭉하게 남부 억양을 지껄여대는 돈 많은 튀기새끼는 그랬다. 그에게 아도니스 고급 리조트와 올림포스 하이츠를 근처를 돌아다니며 어떤 여자를 찾아보라고. 전쟁이 터져 죽니 사니 하는 상황이라 너무나도 무모했으나, 사실 당시에는 그 감옥에서 탈출하는 게 제일 중요했다. 다년간의 뒷골목 생활로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장난감이고 희생양이고, 굴리고 놀다가 버릴 수 있는 일회용 콘돔 같은 신세. 너클이 그 썩은 구울이 되었으니 다음은 안 봐도 뻔하지. 그런데 그 싱클레어라는 작자는 글쎄, 그 여자의 소재만 확실히 알아온다면 아주 많은 돈에다 번듯한 새 신분에 지상으로 탈출까지 시켜주겠다는 제안을! 이거야 원, 땡잡았다.
처음에야 무전을 주고받으며 성실하게 임무를 이행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탁월한 재능이 속삭였다. 그냥 그년은 뒈졌다고 해! 시체는 널렸으니까 적당한 거 하나 골라서 다리 한 짝만 보내주자구! 그리하여 맥그랩은 푹푹 썩은 시체나 찾던 참이다. 솔직히 플라스미드 사용자도 아닌 늙다리가 혼자 이 미친 곳을 나돌아 다녔다면 한참 전에 나가뒤진 게 뻔하다. 그는 적당한 변명거리도 생각해가며 쓰러져 죽은 시신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며 돈도 챙기고 반지나 목걸이도 빼냈다. 높으신 분들이 사는 곳이어서 그런지 시체들도 때깔이 곱다. 썅, 그래도 이렇게 뒤진 걸 보니 속이 다 시원하다. 결국 나중에는 살아남는 놈이 장땡인거지. 킬킬 거리며 허리춤의 권총을 만지작거리는 순간, 귓가가 반응했다. 그는 잽싸게 구석의 기둥 뒤로 달려가 숨을 죽였다. 어떤 놈들이지?
“로니, 확실한 거야?”
저 아일랜드 놈이라면 누군지 안 봐도 뻔하다. 아틀라스. 저 놈의 추종자 몇몇과 방을 함께 썼지. 곧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지만.
“믿기 어려운 거 나도 알아, 아틀라스. 하지만...”
저 새끼들은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여차하면 저 놈들의 낯짝에 총알이라도 박아줄 각오로 맥그랩은 입술을 깨물었다. 듣자하니 뭐...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 같다. 가능한가? 그는 그 와중에도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직업상 버릇이다.
“그년 분명 막스 노이만이었어.”
순간의 그는 프로가 아니었다. 그저 놀라 총을 떨군 멍청이 등신일 뿐. 갑자기 사방이 조용해지더니 철컥, 하고 총이 장전되는 소리와 함께 발걸음이 가까이 다가왔다.
‘니미 씨발, 좆같은....’
하지만 이 다음의 그는 프로였다. 그는 머리 위로 손을 얹은 채 떨궜던 권총을 발로 차버렸다. 권총이 튀어나오자마자 총알이 발사되며 소름끼치게 튀는 소리가 울러퍼졌다. 그래, 이제 이판사판이지. 맥그랩은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보쇼들! 난 싱클레어가 보낸 사람이다, 이거야! 그 양반이 볼일이 있으시다고!”
“손을 머리 위에 얹어! 그리고 모습을 보이시지.”
듣기만 해도 역겨운 정의로워 죽겠는 억양이다. 미묘하게 연극조-
“그랬다간 벌집 될 걸 누가 모르겠어? 그 양반이 아주 큰 건을 제시하러 왔다고, 듣자하니 그쪽들 지금 상황이 아주 안 좋지 않아?!”
“글쎄, 그렇게 말했던 라이언의 첩자들이 벌써 한무더기였지. 내가 보기엔 자네도 별반 다를 거 없군.”
“기다려보쇼.”
이 튀기새끼가 눈치 있기를 바래야 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라디오 무전기의 안테나를 길게 빼고 버튼을 누른 채 소리쳤다. 침이 사방으로 마구 튀었다.
“이보쇼, 사업가 양반! 약속대로 아틀라스와 만났거든! 하지만 날 라이언의 첩자로 몰아서 말이지! 그쪽이 말 좀 해줘야겠는데! 아틀라스에게 볼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냐 이거야!”
5초 간의 너무나도 긴 정적 끝에 하하하-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제발, 대가리를 좀 굴려라. 제발.
“발 한 번 빠르시네. 한참 걸릴거래서 난 또, 내년 계획이나 세워두고 있었지. 그것 보다 아틀라스라고 했던가? 거기 있나?”
“왜 아틀라스를 찾는 거지?”
아일랜드 놈의 부하로 보이는 백발의 남자가 소리치자 싱클레어는 아... 하며 곤란한 듯 뱉었다.
“좋아. 그러면 일단 내가 제안할 사업계획이나 들어보지 않겠어? 이거야말로 상부상조할 기회거든.”
“묻는 말에 먼저-”
“됐어, 로니. 내가 맡지. 싱클레어! 내가 자네를 어떻게 믿지? 네놈만큼 뒤가 구린 인간은 없다고. 라이언의 청소부나 다름없는 똥개 아니던가?”
“이야, 반가운걸. 그런데 난 신뢰가 아니라 거래를 주고받자는 거야. 뭐, 이런 비즈니스에서야 중요한 게 믿음이니 자네의 의심을 나무라고 싶진 않군. 하지만 이 시점에서 누가 어떻게 불리한 지 이미 알 사람은 알고 있거든. 그러니까 서로 원하는 걸 주고 받자는 거지.”
“미안하지만 기본 전제부터 틀려먹었어. 거래가 목적이었다면 환심을 살만할 콩고물이라도 들고 왔을 텐데, 그렇게 교활한 자네도 오늘은 참 이상하군. 안 그러나?!”
총을 다시 고쳐 잡는 금속성의 불길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맥그랩은 심호흡을 하며 작게 읊조렸다. 씨발.
“이런, 혁명 대장. 진정해. 이래 뵈도 앤디와 사업적으로 돈독한 관계라 눈 밖에 나면 곤란해서 말이야. 깜짝 선물 준비 못 한 건 사과하지. 다만 지금 자네 위치 좌표가 실시간으로 찍히고 있거든. 이 무전이 끊긴 뒤 며칠이 지나도 자네가 안전하다면, 그거야말로 작은 선물 정도는 되겠지. 그 때 마음이 바뀌면 얘기나 나눠 보자구.”
이런 니미개씨발, 어쩌자고 저런 도발적인 멘트로 마무리를 지은 건지. 등골이 오싹해진다. 살려고, 썅, 이 미쳐 돌아가는 똥통에서 살아남으려고 이 개짓거리를 서슴치 않았건만 이 개짓거리 때문에 죽게 생겼다. 결백을 증명한답시고 떨궈 던진 권총이 눈물 나게 그리웠다. 지금 그는 사자 두 마리 앞에서 발가벗은 채로 달달 떠는 새끼동물이다. 하지만 사자들은 그르렁 거린다. 예상 보다는 희망찬 말을.
“우선 자네는 나오도록 해, 물어볼 게 많거든....”
먹혔다. 맥그랩은 무전기를 손에 쥐고 기둥을 빠져나왔다.
손을 머리 위로 올린 채 다가가니 이상하게 익숙한 얼굴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틀라스에게 무전기를 건네주는 순간, 맥그랩은 잊을 래야 잊을 수 없는 차가운 눈을 본다. 저런 새끼라면 심장도 안 뛸걸. 언젠가 생각했던 그대로의 눈이다. 프랭크 폰테인.
무전기가 아틀라스의 손에 닿는 순간 그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소용돌이치며 살갗을 뚫고 두개골을 지나 뇌에 박힌 총알을, 그는 아프지 않아 해도 됐다. 금방 숨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건,
“그런데, 이 편이 더 깔끔하겠지.”
라며 웃는 프랭크 폰테인의 음성이었다.
-
막스. 자기야.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재미난 점은 있거든. 넌 항상 내가 해주는 농담이면 자지러졌잖아. 아, 내 말만 들으면 깔깔 웃는 네가 어지간히 보기 좋아야 말이지. 넌 항상 입도 안 가리고 웃더라고. 입을 크게 벌리면서 몸을 뒤로 한 번 젖혔다가 손바닥으로 내 어깨나 등을 –필요 이상으로 세게- 치며 말하지.
“자기야! 너무 웃겨!”
그리고 들려오는 게 무슨 유리구슬이 우르르르 굴러가는 소리거든. 네 웃음소리가 꼭 그래. 오래 듣고 싶지는 않은데, 일단 들으면 기분은 좋지.
그래, 그러니까 그나마 재미난 점이라면 얼마든지 이야기 해줄게. 난 눈에 띄고 싶지 않거든. 신문 전면광고 마냥 동네방네 나를 자랑해서 제대로 된 일이 없어. 굳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굳이 나를 발견하지 않아도 될 만큼 적당히 숨기면서 사는 것만큼 편한 게 없거든. 나는 평생을 이렇게 살았어. 언제나 중간을 지켰다 이거지. 앤디와 적당히 유쾌한 관계를 유지한 것도 이게 편해서였거든, 혁명이니 반란군이니 난 별로 관심 없어. 게다가 그 치들은 앤디가 힘 좀 쓰면 얼마 못 가 짜부라질 머리 빡빡 깎은 원숭이들이라. 굳이 그런 놈들 신경써가며 대의니 뭐니... 어휴, 내가 그럴 것 같아? 내가 그랬다고 하면 넌 또 입도 안 가리고 웃을 거잖아.
“자기야! 너무 웃겨!”
그래, 웃기면 웃어야지. 지금 난 네 덕분에 내가 평생을 지켜오던 선을 넘어버린 참이거든. 아마 이걸 앤디한테 들키면 우리의 유쾌한 관계는 금방이라도 박살날 거고, 나는 바로 다음날이라도 내 스위트 홈에 가득 들어찬 스플라이서 무리나 총을 쏴 갈기는 보안로봇들과 함께 세상을 하직하겠지. 넌 나답지 않다고 할 거지? 말도 안 된다고 하겠지. 나도 알아. 하지만 어쩌겠어, 애초에 내가 너랑 만나 여기까지 온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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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주 금요일, 첫째 주 수요일, 올림포스 하이츠와 카슈미르 레스토랑 근처. 한 시. 늦지 말 것.]
‘둘째 주 금요일’과 ‘첫째 주 수요일’의 위치를 바꿔 적던 참이다. 들리는 대로 받아 적긴 했지만 시간 순서를 엉망으로 읊은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고.
필요한 물자를 모두 체크했다가 그는 불현듯 책상을 한 번 내려쳤다. 다른 물건들까지 흔들리면서 얹어놨던 액자 하나가 엎어져버렸다. 그는 버릇처럼 엎어진 액자를 다시 세워두며 중얼거렸다.
제기랄.
그래, 제기랄.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이지? 그는 방금 자신이 평생을 지켜오던 선을 넘어버렸다. 앤디와 기껏 협력하며 이 미친 상황에서 잘 버티고 있었건만, 아내의 신원을 확보하는 대신 아틀라스 패거리에게 무기와 돈 까지 대주기로 하다니.
그도 그럴 게 맥그랩이 죽기 전까지 라디오 무전기에서 들려오던 내용은 가히 희망적이라고 할만 했다. 막스는 살아있었다. 다만 갑자기 사라졌다고 했다. 순간이동 플라스미드를 사용한 건가 싶었지만 그렇다기엔 바닥에 생긴 허공으로 떨어졌다는 점이 걸렸다. 게다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어디에서도 그녀의 흔적을 찾지 못 해 몽타주를 만드니 마니 하는 얘기가 나오는 걸 보면 플라스미드는 아니다. 사람의 모습을 영구적으로 숨겨주는 플라스미드는 들어보지도 못 했으니까. 비스무리한 강화제가 있긴 했지만 그건 마법스플라이서를 오랫동안 연구해야 얻을 수 있었다. 막스가 사용했을 리 없다.
책상이 답지 않게 너저분하다. 그는 다시 한 번 신문을 들어 올리며 몇 주 전 기사를 꼼꼼히 읽는다. 대문짝만한 기사 하나는 허공이 갈라지던 ‘테어’ 현상에 관한 설명과 함께 그게 조작이었음을 과하게 짚어가며 거의 애원하고 있었다, 제발 이 기사를 믿으라고. 그러나 이렇게 애걸복걸 해본들 테어가 조작이 아니라는 걸 알 사람은 이미 알고 있다. 그도 그 사람 중 하나다.
분명 같지만 다른 랩쳐가 보이고 있다고 했지. 당시에는 영 관심이 가질 않아 굳이 캐묻지 않았지만, 아직까지도 연구실이 실버핀 레스토랑에 있다는 건 기억하고 있다. 테어를 다시 열만한.... 장치를 고안하고 있다고 했던가.
답은 나왔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 은밀한 미친 짓을 다시 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는 한숨을 쭉 쉬며 책상에 놓은 가족사진을 바라봤다. 평생 동안 그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듯 사랑해주더니, 이젠 정말 절벽으로 들이미는 그녀다. 세상모르고 아들의 어깨를 짚은 채 웃는 아내도, 아무 것도 모르고 마냥 해맑던 아들도 처량히 느껴져 그는 다시 액자를 엎었다.
4.
[1968년 12월]
“테넨바움 입니다.”
막스를 깨운 건 라디오 무전기의 수신음을 뒤로한 채 들리는 음성. 순간 파헤쳐지다시피 너덜거리는 시체를 보고 비명을 지를 뻔 했으나, 가까스로 입을 틀어막으며 무전기를 집어 들었다. 싱클레어는 죽지 않고 기절한 모양이니, 지금의 그녀는 무엇 보다 멀쩡한 사람과의 대화가 절실하다. 홀린 듯 입을 열었다.
“저기..”
예상과는 다른 음성에 테넨바움은 당황한 눈치다.
“...누구죠?”
“아...”
아직도 독일어 말씨가 많이 섞인 딱딱한 억양. 이곳에 온 뒤로 내내 들리던 헛소리나 욕설이 아닌 누구 보다 정상적인 인간의 말씨다. 목이 메기 시작했다. 눈가가 뜨거워지자 손등으로 눈물과 함께 말라붙은 핏자국을 훔쳐냈다. 살점도.
“싱클레어 씨! 제 말 들립니까?”
“....”
대답대신 들려오는 훌쩍임에 테넨바움은 황급히 무전을 끊어버렸지만, 그 만으로 기이한 위로는 충분했다. 이 미친 세상에서 말이 통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건 희망적이다 못 해 벅차오르기까지 한다. 막스는 무릎을 감싸 안아 웅크리며 한참 동안 스스로를 진정시켜본다. 그리고 문득 고개를 들어 주변을 찬찬히 훑었다. 손가락이 이제야 아려온다, 유리조각이 너무 많이 박혔다.
이 좁은 곳에 진동하는 각종 비린내와 깊게 스민 시취, 안 씻어 진동하는 끔찍한 악취들은 이제 익숙해지고 있다. 막스는 커다란 조각들을 빼내며 작게 신음했다. 다행히 작은 조각들이 많이 박히진 않은 것 같다.
랩쳐는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그녀는 생각한다. 내전 때문에 흉흉하긴 했지만 복구가 불가능해질 만큼 망가질 줄은 몰랐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무도회장처럼 늘어진 조명과 조각상, 분수들이 눈에 선하다. 창 너머로 보이던 네온사인 걸친 건물도 역시. 가끔 상업 지구에 갈 때면 꼭 아기를 들쳐 안고 식당 뒤편으로 향했다. 커다란 유리창 너머 심해는 이 도시에서만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광경 중 하나였다. 그녀의 아기는 책에서만 봤던 하늘과 심해를 혼동해서 나중에는 바다 안에서 별자리를 찾으려고 했지. 한참 동안 심해와 하늘의 차이를 설명하느라 골머리를 앓던 것도 꽤 즐거운 기억이다.
랩쳐는, 그래. 그랬다. 황홀한 도시. 이 도시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심어준다. 거리에는 항상 은은한 노래와 함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람과 일에 대해 이야기하며 지금의 삶을 만끽했지. 하지만 잘 익은 열매가 제일 먼저 썩는 것처럼 랩쳐도 안쪽부터 무르고 터지기 시작했을음, 많은 이는 몰랐고 많은 이가 외면했으며, 어떤 이는 맞서 싸웠으니 소수의 이들만이 때모를 종말을 지켜만 봤다. 그리고 막스는 외면하는 쪽이었다.
너무 순진해서, 아니면 지쳐서, 어쩌면 믿고 싶어서. 좋은 미래만 믿고 내려온 이들과 그들의 삶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남편이나 빈센트와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너무 행복했으니까. 굳이 끔찍한 일들에 관심 둘 필요가 없었다. 아랫동네에서 벌어지는 사기니 살인은 차마 신문 기사에 실리지도 못 했기에 모른 척도 쉬웠지. 하지만 그 일들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리틀시스터. 여자아이들. 전단지. 그걸 보는 순간 모든 평범한 날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뻔뻔하게 리틀 시스터 고아원 앞에 붙은 전단지들은 부모의 간절함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 다들 모르는 걸까, 모른 척 하는 걸까? 돌아다니는 빅대디와 고아원을 보며 아무 것도 연상하지 못 한 걸까?
아마 다들 믿고 싶지 않았겠지. 자신의 아이들이 잠수정을 잘못 타서 어디 도시 안 쪽 깊은 곳을 헤매고 있을 거라 굳게 믿었을 지도. 그게 아닌 부모들은 더 안 좋은 선택을 하거나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졌으니까. 그 중에는 알고 지내던 사람들도 있었다. 많았지. 막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언젠가 랩쳐가 망할 거라고 남편과 자주 이야기했지만 그게 이렇게 빠를 줄은, 그리고 이런 식일 줄은 몰랐는데. 사람들, 그 많던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막스는 무전기를 내려놓는다. 더 생각하는 대신 쓰러진 싱클레어에게 시선을 옮겼다. 얼굴이 피범벅이라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물에 적셔 그의 얼굴을 천천히 닦아냈다. 진동하는 피비린내에 코가 마비될 지경이다.
그동안 안팎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흥미로웠던 건 예전의 기억을 이곳의 새로운 기억이 점점 밀어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두통과 함께 겹쳐 떠오르는 이미지는 물론 행복하기도 했지만 대게 우울하고 어두웠으며 지금의 그를 향한 배신감만 안겨줬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기억 속 자신의 태도다. 언제나 아프고 화가 나 있고, 바뀌는 것 없던 세상과 상황에 절망한 자신. 거의 모든 걸 놓았지만 그래도 타자기는 망가지지 않았기에 모든 희망을 걸어놓을 곳은 그 작은 기계 뿐, 어디에도 남편은 없었다. -그녀는 그 점에 첫 번 째로 당황한다.- 그리하여 이곳의 자신이 ‘싱클레어 씨가 지금 오고 계세요.’ 보다도 듣고 싶었던 ‘사랑해’와 ‘고생했어’를 끝끝내 듣지 못 했을 때, 마지막으로 붙든 감정이 아쉬움이라는 비교적 밍밍한 감상이라는 점도 막스는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그를 예상하고 있었다. 이 곳의 남편을 평생 겪었기 때문일까. 오랜 시간 체념이란 길고 긴 감정에 몸을 담구고 자신을 적셔 물들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못 다한 배신감을 마주한 게 그녀였나 보다. 이곳의 그녀 보다 이런 저런 기대심과 확신까지 있는 그녀가.
여전히 그를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지만 그녀만큼은 막연히 알 것 같던 순간이었다.
“깼네.”
싱클레어는 막 죽은 사람처럼 게슴츠레 눈을 떴다. 얼빠진 듯 허공에 시선을 놓은 그가 우습다.
“당신은 죽었고 여긴 지옥이야.”
“그런 것 같네.”
느릿느릿 일어난 싱클레어는 고개를 푹 숙이며 낮게 신음 했다. 두통이 있는 모양이지. 얼른 말을 붙였다.
“무전 왔어. 테넨바움.”
“뭐? 언제?”
“으응, 얼마 안 됐어.”
“무슨 말은 안 했고?”
“안 하더라. 그 여자 지금 머리 좀 아플 거야.”
“이제 내가 ‘무슨 일인데 그래?’ 라고 말할 차례네. 근데 자기야, 어쩌지. 이미 뭐가 뭔지 알 것 같거든. 근데 그냥 입 다물고 있을게. 무전기 좀 줘.”
“내가 어쨌을 것 같은데?”
“그 새를 못 참고 무전을 받았겠지.”
“...어떻게 알았어?”
“넌 뻔해.”
“그럼 어쩌라고? 멀쩡한 사람 목소리 좀 듣고 싶었어. 대화 안했으니까 걱정 마.”
“이런, 누가 뭐랬나? 잘했어.”
막스는 싱클레어를 흘깃 보며 말했다. 그는 모니터를 살피고 있다.
“나 여기.. 좀 있어도 되지?”
“마음 바뀌었나봐.”
“그 꼴 보고 어떻게 혼자 돌아다녀. 못하겠어.”
“잘 생각했어. 역시 사람은 몸으로 겪어야 현명해지는 거지.”
싱클레어는 무전을 연결하는가 싶더니 탄식하며 말했다.
“아... 그건 그렇고. 분명 너에 대해 한 번은 추궁할 텐데, 나 이걸 뭐라 설명해야할지 감이 안 잡히네. 그 여자도 애들 때문에 절박해서 어지간한 말로는 어림도 없을 거거든.”
“있는 그대로 말 하면 되잖아.”
“이래서 뻔하다는거지.”
그는 버튼을 누르며 무전을 연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테넨바움은 미심쩍은 듯 답신을 보내왔고, 그는 꽤 여유롭게 받아쳤다.
“글쎄. 내 생각에는... 흠. 참 어렵네. 아무래도 몰래 들어온 정신 나간 여자 아니겠어? 내가 살아있는 거 보니 아주 맛이 간 건 아니었나본데.”
막스는 숨죽인 채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테넨바움은 아까의 일로 께름칙했는지 그녀가 듣기에도 많은 것을 생략한 이야기를 전했지만 그도 딱히 캐묻지는 않았고 그렇게 짧은 무전은 마무리됐다.
듣자하니 곧 사람들을 만나 탈출할 모양이다. 그러면 싱클레어는 지상으로 올라가 다시 한 몫 단단히 거머쥐겠지. 적어도 남편은 지상에 돌아오기 전 대소실 사건에 연루되지 않되 언제든지 돌아와도 문제없도록 손을 써놨으니 (그녀에게 과정은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다) 지금 이 사람도 별반 다를 바 없는 과정을 통해 내려왔을 거다.
어떻게 들어도 그들의 상황은 좋아지고 있었지만 이제 그녀는 조급해할 기운조차 없다.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시간은 지나고 있기에, 이것만으로 안 좋은 신호는 충분하다. 싱클레어는 그녀의 얼굴을 살피다가 담배를 꺼내 피운다. 성냥은 또 어디서 저렇게 많이 구한 걸까. 궁금했지만 말하려는 건 이게 아니다.
“내 남편 지금 뭐하는 걸까.”
그는 허공으로 시선을 옮긴다. 대화할 사람이 필요하다, 그게 설령 껍데기만 남편이라 해도.
“널 찾겠지.”
“그래서 내가 아직도 여기 있고.”
“그 난리 통에서 사람 찾기 쉽지 않을걸. 전쟁 중이잖아? 게릴라전으로 정신없어도 전쟁은 전쟁이거든.”
“아... 그럼 빈센트라도 찾았음 좋겠어.”
“찾았겠지. 어디까지나 ‘아마도’.”
“직접 찾으러 돌아다니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하하, 그럴 리가.”
날 그렇게 몰라? 까지 말한 싱클레어는 담배를 문다.
이제 막스는 저 말을 받아치며 말꼬리를 잡아 끌 기운조차 없었다. 저 사람의 상황은 날이 갈수록 좋아지는데, 그녀의 상황은 여전히 제자리걸음 그 때 그대로다. 남편은 뭘 하고 있을까? 아니, 남편과 만날 수나 있을까? 어떻게 돌아갈 수 있지?
“저건 언제 치울래?”
막스는 이 상황을 더 암울하게 만드는 브루트 스플라이서의 시신을 가리켰다.
“그러게, 썩기 전에 내다 버리자고.”
“으.”
“마침 아무도 없네. 지금 가져다 버릴래? 나 혼자서는 힘들겠는데.”
“저걸 만지라고?”
“됐어, 그럼. 모니터 좀 살피다가 스플라이서들 보일 때 귀띔 하면 내가 더 오래 살 수 있겠지.”
“아냐, 같이 가.”
그들은 나란히 서서 굵직한 발목을 손에 쥔다. 이미 발목부터 성인 남성의 종아리에 맞먹는 거구의 시신은 제대로 힘을 쓰기도 전에 그들의 기를 죽여 놓았다. 근육으로 가득 찬 몸통도 사후경직으로 더욱 단단해져, 결국 시체를 2미터도 채 못 옮기고서는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막스는 자신의 창백한 손을 내려다본다. 차가워진 살갗은 생각보다 징그럽고 역겨운 감촉이라, 자꾸만 감각이 되살아나 절로 몸서리 쳤다. 심하게 떨리는 두 손도 아직도 드문드문 박힌 유리조각으로 인해 군데군데 붉게 부어 피까지 새어나왔다. 싱클레어는 곁에 앉으며 말한다.
“참 거지같지. 안 그래?”
“나 손.... 손이 너무 아파.”
“줘.”
그다지 능숙하진 못 해도 나름 신중하게, 그는 상처에 물을 부어가며 남은 조각들을 빼냈다. 한참 동안 그의 숨소리와 함께 막스의 앓는 소리만이 은신처를 가득 채웠다. 그가 서툴게 붕대를 감아줄 때 막스는 손 전체가 아려오는 와중에도 웃음이 나왔다.
“언제 배웠어? 이런 거 못 하던데.”
“안 한 거겠지.”
“거짓말.”
이윽고 다소 투박한 모습으로 감긴 붕대에는 여전히 피가 배어나왔으며 살갗이 욱신거렸지만 그럭저럭 힘을 보탤 수는 있었다. 막스는 그의 만류에도 함께 스플라이서의 다리를 붙잡아 있는 힘껏 끌어다가 매표소 부스 근처까지 내다놓았다. 물론 돌아오고 나서는 말 나누기 힘들 정도로 지쳐 한 동안 누워있어야 했다.
자축의 의미로 열었던 통조림 세 캔은 차고 넘쳤다. 막스와 싱클레어는 짤막하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오랜 만에 괜찮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런 시간이 늘 그렇듯 짧기 그지없었다. 빈센트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다시 막스의 앞날이 수면 위로 떠오르며 마무리 됐기 때문이다. 그녀가 마주한 건 현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제로에 가깝다는 결론 뿐.
남편의 도움만을 손 놓고 기다릴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아주 나쁜 악몽처럼 어떤 경우의 수라도 물거품이 되기 일쑤, 그 중에서도 폰테인 백화점의 감옥 개조안을 뒤늦게 들었을 때는 비명이라고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막스는 일반인과 범죄자를 한 데 묶어 수장한 것과 더불어 유일한 테어 발생지의 유실에 대한 울분을 토하고 싶었지만, 너무나 지쳐버렸다. 그러는 대신 한숨으로 대화를 마무리 했다. 싱클레어도 그녀의 지친 얼굴을 보고서는 입을 꾹 다문 채 담배만 연거푸 피웠다.
막스는 좁은 매트리스 위에 누웠다. 온 몸이 눅진하게 녹아버려 바닥과 하나가 된 듯 막막함에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머릿속에 한 장면이 어렴풋이 보였지만, 늘 그렇듯 희미한 기억을 굳이 되살리지 않고 그대로 눕혀뒀다. 잠을 자려 애썼다.
어떤 간절함은 집착이 되어 다부진 믿음으로 돌아온다. 믿고 싶지 않은 게 많았고 진실을 받아들이고 체념했을 때 벌어질 상황도 겁났다. 기억 속의 그대로, 하얗고 부끄러움 많아 보이는 깨끗한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었다. 다른 건 상상도 할 수 없지. 그럴 수 없다.
이 세상의 안 좋은 건 전부 대신 안고 가고 싶었다. 빈센트가 태어난 뒤로 거의 평생을 바람막이로 살았지만 그런데 딱 한 번을, 그 한 번을 신중하지 못 해서. 차라리 같이 가자며 주책을 떨 걸 그랬나, 고집을 부려가며 옆에 딱 붙여놓을 걸 그랬나. 하지만 때 지난 가정은 위안 대신 날카로운 죄책감을 안겨줬고, 그녀는 흐느껴 울며 자신을 책망했다. 또 하루가, 아무도 모르게 지나고 있었다.
[1959년 1월 말]
“아, 네. 뭐. 큰일이네요.”
싱클레어는 자리를 뜨려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마침 자신을 바라보는 앤디의 눈빛이 부담스러워질 참이다.
요즘 들어 아틀라스 패거리는 크고 작은 전투에서 승기를 잡는 일이 잦아졌다. 덕분에 앤디는 미치기 일보 직전인데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에게 불분명한 거대 자금이 오고간다는 소문까지 들은 모양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말이 나온 게 좋은 신호는 아니라는 걸 모를 리 없는 그다. 앤디는 여전히, 압정이라도 꽂아 박듯 그를 노려본다.
“그것 뿐인가?”
“위로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해드리고요.”
“그래, 그렇지. 자네라면 그렇게 나와야지.”
슬쩍 돌린 고개 사이로 보이는 라이언은 자신의 술잔을 채우며 웃고 있었다. 그는 몸을 틀며 그를 바라봤다.
“그 말, 제가 제대로 알아들은 거 맞습니까? 놀랍네요?”
“어디 계속 해보게.”
“아뇨, 여기서 더 말하다가는 어떤 말을 해도 좋을 대로 생각하실텐데요. 그렇게 둘 순 없죠.”
“그래. 아들은 찾았나?”
“모르고 말하신 겁니까? 아니라면 장난이 과하시네.”
그는 회장실을 나오자마자 버릇처럼 담배를 입에 물었다. 앤디와 나눈 대화를 곱씹으며 착잡한 심경으로 주변을 한 번 훑기도 했다.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건 쉬운 일이지만, 이걸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는가는 전혀 쉬운 문제가 아니니까. 아들 일도 충분히 개연성 있는 일인데, 거기에다 아내까지 실종됐다는 걸 알게 되면 앤디의 편집적인 사고가 기가 막힌 앞뒤 상황을 망상해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건 어느 정도 사실에 들어맞을 거고, 그럼 미치고 팔짝 뛰어 돌아버린 앤디가 그의 인생을 어찌 끝낼지는 안 봐도 뻔 한 일. 그렇다고 아틀라스 일당에게서도 희망적인 소식은 전혀 들려오지 않는다. 설마 일부러 입 닫고 있는 건 아니겠지. 뭐, 그 놈들이라면 그럴 것도 같다.
그의 맘 귀퉁이에 고개를 내민 무언가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특히 자신의 앞날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에서 반들반들하니 때깔만 좋은 감각은 빠르게 빛을 잃었고 어느새 그는 어떻게 꼬리를 잘라낼지나 고심하는 꼴이다. 그야 산 사람은 살아야하니까. 아들은 죽었고, 막스도 죽었고 그래서 이 모든 것이 헛짓거리였다면 제일 먼저 챙겨야할 건 자기 자신이다.
그 때 싱클레어의 시야에 들어오는 건 길버트 알렉산더. 종종걸음으로 걸어와 복도 끝에서부터 점점으로 커지는 길 박사는 한눈에 보기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안 그래도 창백한 얼굴에 당혹감까지 감도니 마치 겁에 질려죽은 사람 같달까. 생기 없이 밋밋하다.
“이봐요, 길. 오랜 만이네요? 실험실 밖에서 만난 건 더더욱. 별 일 없으시죠?”
“아... 모르셨습니까? 싱클레어 씨?”
“글쎄요, 딱히 들은 게 없어서.”
“수종 박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뭐라고요?”
젠장, 뭐라고? 순간적으로 소리를 지를 뻔했으나 그는 남을 다루는 것만큼이나 자기 자신의 컨트롤도 능숙했다. 그는 소리를 지르는 대신 그 빌어먹을 인간과 협업했던 가장 중요한 일과 함께 그 인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일을 떠올렸다. 실버핀. 막스. 차원이동. 이런!
“빅대디한테- 아닙니다. 나중에... 나중에 말씀드리도록 하죠.”
“하하, 이것 참. 그건 뭐 궁금하니 나중에 듣도록 하고요, 장례는 치룬 답니까?”
“수종의 연구실이 마침 격전지라 어렵겠습니다. 저도 뒤늦게 소식만 전해 들어서...”
“흠. 뭐. 그럴 만도 하겠고,,. 그럼 불쌍한 이수종의 연구들은 어떻게 되나요? 비타 챔퍼는 말해봤자 입만 아프고. 나머지는 어쩔 예정인지나 모르겠는데. 저도 뭐, 궁금해 할 입장은 되지 않습니까? 뭐 좀, 아는 거 있으세요?”
“그건 문제 될 게 아닐 겁니다. 수종이 못 다한 연구들은 제가 마무리 짓기로 했으니...”
“박사. 확실합니까? ‘전부 다’요?”
그러자 박사는 문을 열려다 말고 눈알을 굴렸다. 언제나 감정 없어 보이던 부리부리한 눈매에 들어찬 묘한 시선을, 그는 놓치지 않고 잡아낸다. 곧이어 들려오는 건 역시나 ‘네. 전부 다.’ 라는 짤막한 말. 몸을 감추듯 회장실로 사라지는 박사를 보며 꽤나 괜찮은 예감을 하던 싱클레어였다.
[1968년 12월]
그건 거대한 돌고래였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믿었다. 남편은 옆에서 저건 돌고래가 아니라 대왕 고래고, 이런 차가운 바다에는 돌고래가 살 수 없다는 둥 묻지도 않은 말을 하곤 했지만 그녀에게 중요한 건 아들이니까. 그 애는 낮고 작은 시야에서 보이는 대왕 고래나 상어들의 뱃가죽을 볼 때 마다 언제나 돌고래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막스의 눈에 보이는 것도 역시 거대한 돌고래다.
“아. 돌고래.”
막스가 유리창에 손바닥을 가져다대자 그는 창문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흠, 근데 저걸 상어라고도 부르는 줄은 몰랐네.”
“하하하! 아냐, 빈센트가 저것만 보면 돌고래라고 했었어.”
“그래?”
“그래.”
막스는 자연스레 쓰레기통을 뒤지다가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빼냈다. 가끔은 뉴모 수송관에서 쓸만한 권총이나 총알이 발견되기도 했지만 오늘은 아닌가보다. 그나마 유통기한이 아슬아슬 남은 펩바 두어 개나 물병이 전부. 막스는 아직 들르지 않은 곳을 찬찬히 생각한다. 저번에 스플라이서 하나가 뭔가를 잔뜩 쌓아두던데 잘만 하면 당분간 식량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녀는 이제 라이언 놀이공원이라면 지형은 훤했다. 기약 없이 버텨야하더라도 어찌 저찌 살아남을 수는 있을 것 같다.
“있잖아? 다음 주에 그 여자애랑 연락 닿을 것 같은데.”
“잘됐네.”
“그래서... 그게 다야?”
“다야. 내가 계속 말하지 않았어? 그 때나 지금이나 난 달라진 거 없어.”
“놀랍네.”
“정신 차려.”
막스는 유리창 너머의 빛을 받아 파랗게 뜬 그의 얼굴을 본다. 그의 얼굴에 얹힌 수채화 물감은 세필붓으로 이곳저곳에 잔주름을 새겨놨다. 그는 지쳐보였다, 너무 많이. 안쓰러운 모습에 가슴이 뻐근할 지경이었지만 정신을 다잡았다. 그는 말한다.
“언제나 그러고 있거든.”
“아니. 전혀!”
“언성 높이지 마.”
“그럼 한 번 더 말 할 테니까 알아들어, 난 여기 있을 거야.”
은신처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틀자 그는 말했다.
“우리 조금만 더 계산적으로 가자고. 그게 언제 다시 열릴지도 모르잖아. 너 온 지 한 달이 넘어가고 있는데 난 테어를 본 적도 없어!”
“언성 높이지 말라며?”
“말꼬리 잡지 마.”
“나한테 왜 이래? 난 당신 몰라....! 우리는-”
“놀랍네. 네가 지금 뚝 떨어진 도로시 꼴이어도 여기 있는 누구 보다 날 잘 알 텐데.”
“아, 제발...!”
“내가 어떻게 해야겠어?”
“혼자 가.”
“이것 참, 납득이 안 되네 전혀!”
그녀는 다시금 창밖을 바라본다. 대왕고래는 사라지고 없었다. 무섭도록 끝없는 바다만이 허공을 채우고 있을 뿐. 생각을 곱씹자 차마 제대로 보지도 못 한 사진과 말들이 천천히 가라앉아 그녀의 머릿속을 뒤덮었다. 놀이공원. 무전, 빈센트, 흑백사진-
사진.
“납득가게 해줄게.”
“대체 뭘 어떻게-”
“그 애는 죽었어. 한참 전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을 찾는 것 같았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다.
“전쟁 때문에 놀이공원이 영구적으로 폐쇄됐잖아. 견디기 힘들었을거야.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어도 얼마 못 갔겠지. 뒤늦게 남편이 사람을 보내긴 했는데...”
막스는 갑자기 꽉 조여오는 가슴께를 부여잡으며 눈물을 참았다.
“나는 그걸 못 받아들였어. 며칠이 지나도... 믿을 수가 없었어.”
그가 다가오자 그녀는 손짓한다.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계속 말했다. 사진을... 보긴 봤는데 믿을 수가 없었다고.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만 싶어서 무작정 뛰쳐나왔다며. 하지만 이곳으로 오자마자 자신의 기억은 엉망으로 꼬이더니 나중에는 사라지고 만다. 그녀는 그 순간을 ‘반가웠다’고, 기억한다. ‘희망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더 지나면 많은 걸 잊을 거고, 기억이 잠식되어 아무 것도 모른 채 살아갈 수도 있다. 이곳의 빈센트는 오래 전에 하늘로 갔으니까. 아무도, 그애가 언제 뛰어 놀았고 그래서 어떤 양말을 좋아하는지 어딜 가야 좋아하는지, 아무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녀는 쉬지 않고 말한다.
“이건... 이어져봤자 제대로 된 관계가 못 돼. 나는... 난... 너무 힘들어, 그래. 그래도... 그 애를 기억하는 사람이어야 돼. 그 애의 흔적이 있는 곳이어야... 버티겠어.”
몇 년 인가 뒤의 그는 주름이 깊어서, 아니면 너무 오랫동안 홀로 살아서, 어쩌면 아직도 그녀를 마음 깊이 둬서 답지 않게 표정을 일그리고 구겼다. 그녀는 막혀오는 목을 간신히 다독이며 더듬더듬 말한다. 생각해봐, 당신이 다시 같이 있고 싶은 것도 내가 아니잖아.
뒤돌아 글만 쓰던 여자지.
우리는 서로의 낡은 앨범 같은 존재야. 나는 당신을 보면서 어떻게든 시간 쪼개가며 놀이공원 같이 가던 남자를 그리워할 거고, 당신은 언제까지고 기억 속의 여자가 건강해지기만을 바라겠지. 그런데 언젠가는 마지막 장을 덮어야 하잖아, 싫어도 추억은 금새 바닥나. 그럼 그 다음에 우린 뭘 보며 살아야해? 우리 그냥, 이제 우리가 뭘 하면 좋을지 생각하면 안 될까? 미련했던 우리가 그 순간 뭘 못하고 뭘 놓쳤는지 생각하면서? 비슷한 순간이 돌아올 거야, 자기야. 적어도 당신은 이제 10년 전에 못 한 말을 할 수 있잖아, 그걸로 만족하면 안 될까? 적어도 그걸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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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가볍게 노크 한 뒤 그녀의 서재 문을 열어젖히며 말했다.
“자기야, 나 일주일 동안 나가있을 것 같은데.”
“잘 가.”
“이야, 서운한데? 같이 가자고 할 줄 알았는데.”
그는 문턱에 기대어 서서 그녀를 바라봤지만 여전히 돌아볼 기미가 없다. 비처럼 쏟아지는 타자기 소리만이 대답을 대신할 뿐. 언제 지상으로 갈 지도 모르는데, 그녀는 자신의 글이 다른 누군가에게 필요하기라도 한 것처럼 (적어도 여기서 그런 이는 아무도 없다.) 미친 듯이 집필에만 몰두했다. 뭐랄까, 굳게 믿는 모양이다. 아니면 믿고 싶을 지도, 언젠가는 자신의 글을 모두가 다시 읽을 거라고. 뭐, 저 빈약한 믿음이 아니었다면 그는 산 아내가 아니라 목에 밧줄을 매단 아내와 살게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심심한 감사 정도는 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는 다시 말한다.
“자기야. 내 말 듣고 있어?”
“혼자 가. 아, 혼자는 아닌가. 잘 놀다와.”
“재밌네. 확신해?”
“그 말에 흔들렸다면 좋았겠지.”
“너 저번부터 나를 오해하는데...”
“이 정도 양보했으면 인정하고 나가. 얼굴 붉히기 싫고 당신이랑 얘기하기도 싫어.”
그 말에 그가 서재 안으로 들어가 막스의 어깨를 짚자, 그녀는 곧장 몸을 틀어 손을 쳐냈다. 오랜 만에 보는 얼굴은 여전히 그를 매섭게 노려본다.
“건들지 마.”
“그게 아니라, 자기야. 다 좋아질거라니까?”
“썅...”
그녀는 벌떡 일어나 그의 가슴팍을 세차게 밀쳤다. 그가 조금 비틀거리는 사이 귀가 아려오는 걸 보니 또 그녀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나보다. 막스는 거의 울부짖고 있었다.
“그 말...! 그 좆같은 말 십 년 전부터 되풀이 했잖아! 그런데 나아진 게 조금이라도 있어?! 뭐가 좋아졌는데? 당신 사업?! 당신 일?! 당신 앞 날?! 거기에 난 어디 있는데, 대체 어디 있냐고!”
“너 또 이러네, 진정 좀 하고...”
“조금만 있다가 다시 돌아간다며....! 만약 이 상황이 정반대였으면 당신은 올라가려고 갖은 짓을 다 했겠지, 여기 올 때처럼 이혼이나 들먹이면서!”
“말은 바로 해야지, 자기야. 쫄래쫄래 쫓아온 게 누군데.”
“그렇게 만든 건 또 누구고?! 당신 그 역겨운 욕심 때문에 누구 인생 망쳐놨는지 뻔히 알면서 그 딴 말을 해!”
“오기 전에 이럴 거 말 안 한 거 아니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따라온 건 너-”
“당신 인생이 재미없지? 만족을 못 하고 아무런 의미 없는 거에나 개새끼처럼... 스스로가 얼마 하찮고 우스운지 생각해본 적도 없잖아? 제대로 마주보기도 싫겠지, 인생에 남은 거라고는 하나도 없이 쓰레기 같은 짓거리만 반복했다는 거! 인정하기 싫으니까!”
“아... 관둬, 관두자고.”
또 시작이지. 그는 이 상황이 지겨워져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한 손으로 책상을 짚은 채 그녀는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고선 흐느낀다. 그 소리 듣고 있자니 차라리 고래고래 소리라도 질러줬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지상에서나 여기서나 난 달라진 게 없어... 근데 여기서 난 남편한테 빌붙어 사는 미친년이야.”
“...”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내가 죽길 바란다고.”
“그런 거 아니니까, 좀...”
“나가.”
“자기야.”
“꺼져.”
멀어져 문을 닫기 직전 보였던 건 주저앉아 흐느끼는 막스의 뒷모습. 그가 자신의 서재로 들어가려 문을 열자 막스는 안 방 침대에 누워 눈을 반쯤 뜬 채 숨만 몰아쉬고 있다. 녹색 눈이 구르고 구르다 녹갈색 눈과 맞닿는, 이 순간을 그는 알고 있었다.
“여보,”
그녀는 입꼬리를 떨며 그를 본다.
“그래도 남편이라고, 보고 싶은 거 있지. 잘 왔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고마워,”
이 때도 역시.
막스는 며칠 뒤 죽었지만 그 때는 그가 없었다. 한참 동안 맴돌던 건 삽십 년이나 늙은 듯 가늘게 흔들리는 막스의 목소리. 내가 너무 심술부렸지. 라며 다정하게 말해주던 음성. 죽어가는 막스를 받아들이기 어려워 문을 박차고 나가자 거기에는 눈이 아리게 진득한 색으로 내리깔리는 노을이 있었다. 그리고 막스. 해변. 모래. 짙은 청록색의 수면에 황금이 박혀 일렁인다. 막스는 이곳을 제일 좋아했다. 코니 아일랜드. 대관람차에 올라타면 수평선이 끝도 없이 보인다며. 그는 찝찔한 바다 냄새를 맡는다.
“자기야, 바람이 너무 세다!”
막스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말했다. 그녀의 머리칼은 산발로 휘날려 결코 좋은 꼴이 아니었고 표정도 우습기 그지없었으나 그는 그 모습이 좋았다. 아니지, 좋지 않은 모습이 있었던가. 그는 고개를 휘휘 저어가며 말했다.
“조금만 더 있어볼래?”
“아, 지금 들어가자! 머리 봐, 이게 뭐야?”
막스는 그를 바람막이처럼 세워둔 채 말 없이 걸었다. 무심코 본 막스는 노을을 등지고 있어서 머리칼이 타오르는 듯 밝게 빛났다. 눈이 부셨다. 좋은 날이 있었다. 생각한다. 너무 많았다고. 그런데 그 많던 좋은 날이 상황을 견디지 못 하고 모래성처럼 부서져 어디론가 흩어져버렸다. 막스는 노을을 등졌을 때 제일 빛나던 사람이었는데, 결국 새파란 심해 속에서 죽어갔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이제는 영영 볼 수 없기 때문에. 막스는 말했다.
아니, 소리쳤다.
“저거 보여?! 테어가-”
막스는 그를 바라봤다. 가장자리가 눈부시게 빛나는 타원형의 막이 보인다. 마치 흑백의 창문을 바라보는 듯, 너머로는 아마도 실버 핀 레스토랑일 곳이 무채색으로 어른거렸다. 장 너머엔 꽤 당황한 것처럼 보이는 젊은 남자가 그 안을 쉼 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검은 머리에 햇빛을 못 쬐어서 꽤나 창백해진, 그러나 여전히 까무잡잡한 피부. 저 얼굴이라면 모를 리 없다, 그는 막스를 바라봤다. 그녀는 미간을 잔뜩 일그리며 입술을 앙 다문다. 그가 속삭였다, 얼른 가라고.
그녀는 뒤돌아 천천히 그의 몸을 부여잡아 꽉 안았다. 잘 있어. 그녀는 말했다. 건강해야해. 이다지도 뻔 한 말까지. 하지만 지금은 사무쳤다.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영원할 것만 같던 순간이 찰나로 끝나 막스가 멀어지자 그는 말했다. 고생 많았네.
“고생 했어.”
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5.
[1959년 1월 말]
“세상에, 하나님.”
장 너머로 막스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그는 이게 꿈이 아닌가 잠시 생각한다.
길 박사를 구슬리기란 예상보다도 쉬웠고, 수종도 죽어 라이언이 테어 연구에 소홀해진 틈을 타 비타 챔퍼 연구를 들먹이며 루테스 장치를 다시 가동시켰다. 박사도 지금쯤 페르세포네에서 사랑의 세레나데나 읊을 테니 –답가가 돌아올지는 모르겠으나.- 이곳에서 책잡힐 일은 없다, 적어도 잠시 동안은.
뿌옇게 지직이는 흑백의 허공 너머, 피범벅이 된 슬랙스와 블라우스를 입은 채 막스가 테어를 향해 걸어온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정신이 멀쩡해 보인다는 점이다. 막스는 핸드백을 손에 꼭 쥔 채 앞에 섰다. 붕대 감은 손으로 방울방울 흘리는 눈물을 닦았다. 여보. 그녀가 말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와.”
그녀가 한참을 머뭇거렸기에 장치가 언제 꺼질지 몰라 노심초사 하던 사이, 막스는 심호흡을 하다 망설임 없이 팔을 내밀었고, 그는 장을 거치면서 흑백의 사람이 컬러로 바뀌는, 더 없이 비현실스런 광경에 지금 이 순간이 꿈이 아님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본다. 이윽고 싱클레어는 장 너머에서 뻗어 나온 때 탄 손을 시작으로 돌아온 도로시를 받아냈다. 끔찍한 몰골인 막스를 안아 들면서는 앞으로 그들이 헤쳐나가야 할 지난 일과 닥칠 일들로 인해 순간 겁이 날 지경이었으나, 그녀가 말없이 울기 시작하자 다만 가슴이 턱 막혀서, 그래서 부서질 것처럼 안았다. 이제 다 괜찮을 거야. 막스는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
마지막으로 보였던 건 파랗게 물든 천정,
창문 너머의 심해가 어김없이 방안을 물들였으니까. 가끔씩 일렁이는 해초 그림자는 길게 늘어져 머리카락처럼 넘실거렸다. 이렇게 있으면 가끔은 물고기 떼의 그림자가 몰려들어, 내려다본 양떼처럼 우글거리지만 오늘은 아닌가보다.
온 몸을 타고 오르는 한기에 손이 덜덜 떨렸다. 이불을 이만큼이나 덮었는데 온 몸이 차갑다. 이모의 임종을 지켜보던 때가 떠오른다. 이모는 자꾸만 춥다며 몸을 웅크렸다. 이불을 덮어달라는 말에 엄마는 고개를 저으면서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애처럼 칭얼거리는 이모를 보며 막스는 생각했다. 어쩌면 영혼이 빠져나가는 중이라 추울지도 모른다고. 살갗을 벗어나면 더 시리고 춥겠지. 시간이 흐르고 흘러 이모와 거의 비슷한 나이가 된 막스는 다시 생각한다. 괜찮은.. 소재 아닌가? 죽은 걸 인정 못 한 영혼이 시체를 뒤집어쓰며 살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얘기. 뭘 어떻게 해도 따뜻해지질 않으니까. 온기는 산 자의 특권이라서.
뭐라도 적고 싶었지만 손가락을 움직일 만한 힘이 없다. 아쉽게도 남편은 오지 않을 것 같고, 침대 맡에서는 자기가 더 어쩔 줄 몰라 하는 가정부만이 그녀를 내려다본다.
“싱클레어 씨가 지금 오고 계세요.”
아, 그 사람이라면 한 발 늦을 거예요. 그이는 언제나 그랬죠.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웃으면서 –입꼬리에 미세한 경련만 일었으나- 고개를 까딱이는 걸로 만족했다.
삶에서 몰두할 수 있는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원하는 건 많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허락 된 건 글자와 글자를 이어 붙여 자신을 갈아낸 것뿐이다. 언제부턴가는 불가능한 것을 꿈꿀 만큼 미련해지질 않았으니까. 포기가 빨라졌다, 그래서 많은 걸 보내줄 수 있었다.
말로 하자니 꽤 아름다워 보여도 실상은 구질구질 했고 가장 큰 피해를 본 건 아무래도 남편이다. 정말인지 옆에서 오래도 참아줬다. 그도 그럴 게, 그렇게 영민한 사람이 순간에 속아 넘어 평생을 구걸했고, 못지않던 그녀도 속아주듯 속아버려 여기까지 왔으니까. 잘못됐다고 생각한 때가 많았을 거다, 애도 없어서 끝을 내기엔 쉬웠지만 그들은 자꾸만 순간과 상황에 말려 들었다. 미안하다는 말에 무너지거나 눈물에 약해져서, 자꾸만 서로가 서로를 멍청하게 만들었고...
잠이 쏟아진다. 그이가 좀 더 일찍 잠수정에 올라탔다면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 텐데. 그래도 이렇게 널따란 세상에서 가족이라고 부를 만한 건 서로 뿐이었으니까.
생각해보면, 알 것도 같다. 살다보니 부모를 잃고 형제자매도 없이 살아온 사람들에게 서로를 떼어놓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나보다. 우리 둘 다 그렇게 의지할 곳이 없던 거겠지. 아니면 바보 같아서 서로 밖에 몰랐을지도. 어쩌면 사랑이라는 이유로 혈연만큼 가까워질 수 있는 관계에 우리 둘 다 중독되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저 서류 몇 장에 의미 없을 반지 두어 개로 묶인 관계라지만, 그럼에도 서로의 어깨만큼은 맘껏 내어준 그 막연함은 대체 뭐였을까. 아, 당신이 오고 있다는 말에 기분이 좋은 걸 보니 아무래도 그건 미련함과 멍청함이 맞긴 맞던 모양이다.
오거스터스, 그이는 머리가 잘 돌아가지만 그 나이를 먹고도 세심함이 부족해서 나중에야 힘들어하겠지. 정장을 차려입을 때면 셔츠카라 하나 까지 신경 쓰는데다, 사람들의 표정 하나 말투 약간에도 많은 걸 알아내지만 정작 아내를 이해하는 건 평생을 어려워했다. 어쩌면 완전히 알아주는 세심함보다도 이해하려 발버둥치는 조급함이 더 사랑스러웠을지도 몰라. 남편은, 그래. 오히려 기일 날엔 덤덤할 거야. 장례식 때도 눈물 하나 보이지 않아, 그이와 가까운 사람은 우리의 관계를 쇼윈도라고 오해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당신을 잘 알아. 당신은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보통의 나날에 속앓이를 할 거잖아. 평범한 순간이 낯설게 느껴질 거야. 그리고 그걸 제일 견디기 어려워하겠지. 당신은 언제나 우습고 바보 같다. 그러게, 항상 왜, 당신은 왜 그래? 묻고 싶지만 말도 나오지 않고 그이는 곁에 없으니까. 아쉽게도.
요란스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쿵쿵 거리는 소리가 다가오자 생각도 희미해져 그녀는 허공을 멍하니 바라봤다. 너무 일찍 하늘로 간 아기가 떠오른다. 울지도 못 하고 숨도 한 번 못 쉬어본 아기. 어머니가 해줬던 야채수프가 생각났다. 그이가 반지를 끼워준 순간이나.... 같이 간 해변의 놀이공원. 들큼하게 진동을 하던 솜사탕 냄새, 찌푸리던 미간. 바다냄새. 안방 문이 열렸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숨을 뱉었다. 아,
여보.
6.
Ten
Years
Later
서브젝트 델타는 맡은 바를 충실히 이행한다. 그녀의 곁에 있는 아이들을 봤기 때문일까, 지금의 델타는 평소보다도 절박한 심정으로 스플라이서들을 도륙했다. 그도 그럴 게 드문드문 기억나는 이미지 속 아이와 그녀 곁에서 웃던 아이들은 꽤 닮아있었다.
그 아이를 떠올리면 언제나 강한 밧줄이 떠오른다. 손에 잡히지도, 보이지도 않는 단단한 밧줄은 그 아이와 그를 엮어 언제 어디에 있어도 서로를 떠올리게 만드는 불가항력의 힘을 갖고 있었다. 멀고 먼 곳에 아이가 있는 게 느껴진다, 어서 가야한다. 몽롱한 의식 속의 본능 또한 그에게 끊임없이 속삭였다. 가야한다고, 어서 가라고. 그 애의 곁으로. 하지만 아이가 어디 있는지는 모른다. 마지막으로 엎어진 스플라이서의 몸뚱이를 지그시 바라보던 델타는 이내 보안 부스를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녀가 없다. 대신 파지직, 하고 뭔가 구겨지듯 찢기는 금속성 소음과 함께 다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넨바움.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당신을 두고 가야하지요, 미안합니다. 이 도시가 잠겨버리기 전에 내가 도와야할 이들이 있어요. 이 싱클레어라는 자는 우리의 협력자이니 이제부터 당신을 엘레노어에게 안내 해줄 겁니다. 잘 있어요, 헤르 델타. 행운을 빕니다.”
델타가 그녀의 말을 천천히 인식하는 사이, 그녀의 말이 끝나더니 또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그녀가 소개해준 남자인가보다.
“야아, 이것 좀 보시게! 철갑옷을 두르신 정의의 기사님이 따로 없어, 철마 까지 있으면 딱이겠는 걸. 난 오거스터스 싱클레어라고 해, 친구.”
요란했다, 델타는 어쩐지 불안감을 느낀다. 말을 끝마칠 때 까지 우선은 서 있을 작정이다.
“테넨바움 할망구와 나는 폰테인네 건물에 볼 일이 좀 있어. 자네가 엘레노어 램을 찾으러 갈 그곳이지. 내 생각에는 자네랑 내가 거하게 한 건 할 수 있을 것 같단 말야. 어서 열차를 타, 라이언 놀이공원으로 오라구. 금방 만날 수 있을 거야.”
머뭇거리던 델타는 느릿느릿 열차 위에 올라타 레버를 잡아당겼다.
열차는 심해를 가르며 나아갔다, 부지런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