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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과 나

제가 소년을 만난 것은 드넓은 백지의 마침표 같은 곳에서였습니다. 마침표는 언제나 그곳에 있지만 어떻게 읽어야할지 곤란하기 마련이지요. 힘을 주어 읽어야 할지 아니면 밤새 앓은 나쁜 꿈처럼 눈을 뜬 채로 까맣게 잊어야 할지 보는 이를 선택하게 하니까요. 처음 마침표를 마주하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저는 그를 수도 없이 보았지만 수도 없이 낯을 가렸습니다. 밤비행기에 탑승했을 때에 피곤한 눈빛으로 보았던 유도등 불빛의 행렬들처럼 기억들은 마침표에서 마침표로 꼬리를 물고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늘어서 있었습니다.

 

소년을 처음 보았던 순간 카메라의 기분을 이해해버린 느낌이었지요. 아주 성능이 좋은 카메라요. 어느 한 지점을 너무 잘 포착하도록 되어 있는 바람에 기꺼이 주변의 것들을 흐려도 괜찮을. 색깔들의 한가운데에 서서 정지해버린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그 장소가 아주 거대한 사막의 한복판이었던 탓도 있었겠죠. 태어나서 해외의 큰 도시들은 여럿 나가보았지만 사막을 횡단하긴 처음이었습니다. 통상적으로 어리다고 여겨지는 나이를 아직 살고 있는 저조차 사막으로 향하는 항공편을 예약하면서는, 어린 나이의 치기 같은 행동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렵겠죠. 설명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의 저는 단 한 명의 샐러리맨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집 근처의 회사의 사무직으로 입사했었습니다. 원래는 육아휴직을 낸 사람의 대신으로 취직한 그러니까 아르바이트 개념이었는데, 제가 일하는 것을 본 윗사람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계약 기간이 끝나갈 무렵 제대로 일해보지 않겠냐고 권유하더군요. 저는 생각 없이 다시 회사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꽤 괜찮은 일이었습니다. 주변에서는 농담 삼아 갑자기 일이 어려워지고 그러지 않겠냐고 우려하기도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하는 일은 일전과 아주 비슷했습니다. 자리도 똑같았고 상사도 동료들도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 혼자 사는 맨션에서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회사에 다다라 여섯 시까지 일을 하다가 퇴근할 때에는 이따금 다찌석이 많은 술집에서 술을 기울이다가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당시의 저는 제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참 바보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말이든, 글이든, 그림이든 무엇이던 간에요. 왜냐면 저는 살면서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걸요. 그런 건 온전히 예술가의 영역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조금 더 근본적으로 이야기를 해봅시다. 딱히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요? 저는 그 모든 걸 하지 않아도 먹고 살아가는 일이 가능했습니다. 성의껏 일을 하다가 퇴근해서는 제가 번 돈으로 밥을 먹고 방세를 내고, 이따금은 영화를 보고 책도 사 읽었습니다. 훌륭한 삶이었어요. 훌륭한 삶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웬만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살아가잖아요. 예술가란 단어가 존재하는 건 모두가 예술가처럼 살아가지만은 않기 때문이잖아요. 저는 저에게 그런 것들이 필요 없다고 여겼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초코 우유가 필요하지만 필요하지 않은 사람도 있는 것처럼요.

 

석양. 가장 논리적으로 생각하자면 저는 석양이 보고 싶었습니다. 새로 산 휴대폰의 배경에 아프리카 초원인지 어딘지로 떨어지는 붉은 해가 선명하게 띄워져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물론 아프리카까진 갈 수 없었습니다. 비자도 그렇고 충동적이라는 단어를 덧붙이기엔 준비해야할 게 지나치게 많았기 때문입니다. 당장에 눈에 띄던 건 몽골이었지요. 몽골이 어떤 나라인지는 잘 알지 못했지만 그곳에 사막이 있다는 것만은 알았으니까요. 하네다 공항에서 몽골 울란바토르 공항까지, 열 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물론 갈 수 있는 방법으로만 따졌을 때요. 난생 처음 일본항공이나 ANA의 항공기가 아닌 다른 나라의 항공기에 탑승해, 인천에서 한 번 환승을 해야 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약간 제가 아니게 될 것만 같은 묘한 흥분감이 들었습니다. 인천공항에 발을 들이자마자 들른 화장실에서 손을 씻으며 본 제 얼굴을 보면서도, 제 얼굴이 참으로 낯설어 보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자기 얼굴을 어떻게 묘사해야할지 고민하는 사람은 많지 않잖아요. 마치 무심코 찍게 된 마침표의 발음법 같은 건 고민하지 않게 되는 것처럼. 마침표를 찍어두고도 눈길을 주지 않고 그저 글자에서 글자로 자간을 훌쩍 뛰어넘게 되는 것처럼. 저는 그때 처음으로 저를 만났습니다. 축 늘어진 눈꼬리에 두툼하지는 않은 편인 입술 그리고 얼굴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연한 붉은빛의 흉터를요.

 

저는 그리고 그곳에서 소년을 만났습니다.

 

모르는 언어들의 한복판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든 제가 나고 자라면서 몸에 둘둘 둘러온 언어 같은 건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몽골이니까 당연한 얘기겠지만요. 그 나라의 사람들은 사과를 사과라고 부르거나 야구를 야구라고 부르는 일이 없었어요. 거리를 활보하기 위해서 저는 제가 입은 언어들을 하나 둘 훌훌 벗어야 했습니다. 마치 제가 쓰는 말들이 오래 전에 꾼 아주 먼 꿈처럼 느껴졌어요.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고작 다른 말을 쓰고 있을 뿐인데도 일본과 족히 시차가 며칠쯤 나는 아주 낯선 공간에 떨어져버린 듯만 했습니다. 그를 만난 건 몽골의 언어가 겨우 귀에 익을 즈음이었어요. 마침내 투어 차량을 타고 사막을 가로지르고 있던 와중이었죠. 사막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별로 볼 게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인천에서부터 아주 거대한 사막을 가로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모르는 언어로 쓰인 간판들은 바람에 따라 이쪽에서 저쪽으로 서서히 움직이는 모래산과 다름이 없었거든요. 그리고 나고 자란 국가를 정말로 멀리 떠나온 그 여행의 한복판, 긴 문장의 마침표 같았던 사막 한복판에 그가 서 있었습니다. 사막의 모랫빛 속에서도 기이하리만치 눈에 띄는 연갈색 머리와 또렷한 붉은색 눈으로 모래산의 저편을 바라보는 그와 함께

 

석양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하늘은 노란 빛을 띠다가 서서히 붉게 물들었습니다. 하늘의 한복판에서 한나절 내내 강한 햇빛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리꽂던 해가 빨강에서 주황으로, 주황에서 연한 주황으로 넓은 면적을 그리며 얇게 퍼졌습니다. 구름들이 있었고, 구름의 끄트머리는 연한 분홍빛으로 물들었습니다. 땅 위에 선 모든 사람들의 그림자는 뒤편으로 검고 선명하게 늘어졌습니다. 밤의 어둠은 하늘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었죠. 해가 지게 될 쯤의 사막에서 제일 먼저 검은빛을 띠는 건 땅에 있는 것들이었어요. 그리고 저는 그 검정의 한복판에서 석양의 붉은 빛깔에 가득 젖어 있는 소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웃고 있지 않았습니다. 여느 관광객처럼 사진을 찍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눈을 살짝 내리뜬 채 조금은 슬퍼 보이기까지 하는 표정으로 지평선의 아래쪽을 향해 서서히 기우는 석양을 오래, 아주 오래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석양이 거의 지고 제가 정신을 차렸을 때 제 시야에는, 사막 한가운데에 우뚝 선 너무나도 작은 소년의 검은 실루엣이 덩그러니 서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저희 사이의 대화를 먼저 튼 건 바로 그 소년이었습니다. 투어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픽업차량이 제가 묵던 호텔 앞에 섰고 몽골인 가이드가 서툰 발음으로 제 이름과 다른 일본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미스터, 오키타. 투어 차량에서 내리고보니 미스터 오키타는 바로 그 소년이었나 보더군요. 방으로 돌아가려 발을 옮기려 할 때 등 뒤에서 아주 익숙한 언어로 질문이 들려왔습니다.

 

일본인이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잘 몰랐어요. 대신 등을 돌려 그 소년을 바라보았습니다. 내가 대답을 않자 소년은 다시금 입을 열었지요. 같이 맥주라도 한 잔 할래요? 그의 말을 듣고 저는 웃었습니다. 웃으면서 물었어요. 그런 건 대체 어디서 배웠어요? 하고요. 그는 대답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얼굴 표정이 바뀌는 일도 없었습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그의 심리를 건드리지 않았을까 고민했을 것 같았을 정도였어요.

 

그는 저에게 오래오래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을 것만 같았습니다.

 

맥주를 한 잔씩 하며 명함을 교환했습니다. 일본에 돌아온 뒤에는 한참 그를 잊고 살았습니다. 당장 뒷수습을 해야 할 게 너무나도 많았으니까요. 우선은 직장이 없었습니다. 경력을 살려 온갖 회사의 사무직에 원서를 넣었지만 우수수 떨어지기 일쑤였습니다. 회사의 면접관들은 늘 전 회사의 퇴사 사유를 끈질기게 물었거든요. 처음에는 평범하게 지금 면접을 보고 있는 회사를 지원하기 위한 준비 기간이 필요했다, 같은 뻔한 이유를 댔습니다. 고배를 몇 번 마신 후에는 그만두었지만요. 특별함이라도 살려보자 싶어 있는 그대로 대답하기 시작했습니다. 석양이 보고 싶어서 몽골로 떠났다고요. 물론 제가 회사에 붙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래요. 울며겨자먹기로 원서를 넣은 작은 출판사에서 면접을 보기 전까지는요.

 

출판사는 너무나도 기꺼이 저를 채용했습니다. 직원이 네 명 남짓 되고 사무실은 오피스텔을 쓰는 아주 작은 출판사였어요. 맨투맨을 입은 젊은 사장이 직접 면접을 보더군요. 제가 있는 그대로 퇴사 사유를 밝히자 사장은 박수를 치면서까지 좋아했습니다. 마치 무슨 개그 프로 방청이라도 온 사람처럼. 저는 사장을 앞에 두고, 손에 들린 종이컵을 만지작거리며 따라 웃었습니다. 또 떨어지겠군. 친한 친구에게 농담을 건네듯이 저는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면접이 끝나갈 즈음 사장은 웃음기 띤 얼굴로 제게 손을 건네며 말했습니다.

 

스우 씨, 스우 씨는 저희 회사에 꼭 필요한 인재입니다. 부디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별 대단한 회사는 아니었습니다. 페이지를 열면 글자보다도 광고가 많이 뜨는 문학 관련 인터넷 카페에 올라오는 글들 중에서 좋은 글들을 골라 달마다 시상을 하고 때로는 책을 엮어 출판하는 일을 매달 반복하는 곳이었습니다. 이 일을 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건 안목이라고 옆자리 동료는 제일 먼저 말하더군요. 글이 잘 되는 데에 사실 최초로 업로드 된 사이트의 투박함 같은 건 별로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사이트에 달리는 광고로만 겨우겨우 연명하다가도 이따금 사람들에게 잘 팔릴 만한 글이 올라와서 팔리게 만들기만 하면 그게 쏠쏠하다고 동료는 말했습니다. 완전히 복권이네요. 저는 무심코 대답했어요. 동료는 아랑곳 않고 자신의 할 말을 계속 할 뿐이었습니다. 그의 책상 위에 잔뜩 올려진 각종 건담 피규어들이 눈에 띄었던 게 기억이 납니다.

 

매일 정말 많은 글을 읽었습니다. 세상에 글을 쓰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였어요. 저는 잘 알지 못했지만 쓰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 사람 자체는 상당히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 중에서 잘 됐다고 생각한 글을 몇 편이고 뽑아 팀장에게 보내는 게 제 일이었어요. 물론 그 일이 잘 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시는 행갈이만 잘 하면, 소설은 맞춤법만 잘 지키면 전부 잘 쓴 것처럼 보였거든요. 재미는 있었냐구요? 그냥 글에서 재미를 찾으면 도둑놈이라고 생각했었죠. 저에게는 세상의 모든 글이 다 비슷해 보였으니까요. 흰색 종이 위에서 검은색 빛깔을 지닌 글들 사이의 차이점을 분간하라는 건 마치 오후 4시 31분과 32분의 차이를 설명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느껴졌으니까요. 그런 생각으로 좋은 글을 찾으라면 얼마나 잘 찾았겠어요. 제가 뽑은 글들은 결코 시상 목록에 오르는 일이 없었습니다. 덕분에 월급도 늘 8만 엔 남짓 되는 돈밖에 받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이건 완전히, 영업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으니까요. 제가 뽑은 글이 잘 되면 그만큼 돈을 더 받는 식이었습니다. 통장을 보면 갑갑하긴 했지만 회사를 옮길 일은 더욱 갑갑했습니다. 그냥 계속 그 오피스텔로 출근을 하고 만원 지하철로 퇴근했습니다. 사람이 꽉 찬 지하철의 창문으로 석양을 볼 때마다 괜히 몽골에서의 석양이 떠올라 마음이 먹먹해졌습니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저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딱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어이없는 발악 같은 바람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떠돌았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소년은 조금 살이 올라 있었습니다. 어쩌면 오랜만이기 때문이 아니라 일본에서 보았기 때문에 그래보였는지도 모르겠어요. 야경이 잘 보이는 호텔 최상층의 라운지에서 저는 그 소년을 다시 만났습니다. 사실 소년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4년제 대학을 갓 나온 프리랜서 사진작가라고 하더군요. 그래도 그에게는 그를 줄곧 소년이라고 부르고 싶게 하는 이상한 매력이 있었습니다. 일단은 지나치게 앳되어 보였습니다. 커다랗고 동그란 눈과 옅은 갈색 머리카락이 나이를 가늠하기 상당히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를 오직 그의 나이처럼 보이게 하는 건 그의 손에 들린 고가의 카메라 브랜드의 가방이었습니다. 카메라에는 전혀 인연이 없었지만 그 브랜드가 입이 벌어질 정도로 비싸다는 건 알았거든요. 먼저 도착해서 파우스트를 주문하자마자 그가 뒤늦게 가게에 들어와 제 맞은편에 앉았습니다.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다리를 꼬아 앉으며 직원에게 진토닉을 한 잔 주문했습니다.

 

창밖으로 빛무리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온통 붉거나 노랗거나, 그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고층 빌딩의 연한 푸른색 불빛. 사이사이로 보이는 가로등 불빛까지. 내가 창밖을 보고 있자 소년도 따라 창밖을 보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러고는 불쑥 말을 건넸습니다.

 

「환상의 빛」을 보신 적 있으세요?

 

불친절한 질문이었습니다. 「어벤져스」나 「배트맨」을 물어보는 거면 모를까 갑작스레 환상의 빛이라니요. 간신히 그렇노라고 대답했습니다. 본 적은 정말로 있었으니까요. 고등학교 시절 선생이 수업의 일환이라면서 보여줬던 덕분에요. 제 대답에 소년은 살짝 웃음을 지었습니다.

 

환상의 빛이란 뭐라고 생각해요?

 

웃음을 띤 채로 갑작스럽게 질문을 건넸습니다. 창문으로 비쳐 들어온 빛이 소년의 얼굴에 옅게 깔려 있었어요. 예뻤습니다. 빛이 들어와서 예쁜 게 아니라, 그에게는 얼굴에 깔린 빛마저 덩달아 예뻐 보이게 하는 이상한 매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질문을 듣고 떠오른 생각은 그것뿐이었어요. 통 어떤 영화인지 기억이 나지가 않았어요. 그저 주인공의 첫 남편이 지하철에 치여 죽었던 것만 기억이 났습니다. 무려 갓난 아들과 아내를 남겨두고요. 그때 영화를 보면서 진득하게 고민을 했었습니다. 제가 만약 주인공과 같은 상황이 되면 어떤 선택을 할지에 대해서요. 적어도 주인공처럼 살지는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주인공과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주인공처럼 살게 될 것 같다고도요. 사람들은 모두가 겨우 이런 궤적을 띠면서 살아가는 것일까? 그런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영화였습니다. 저는 무심코 손가락을 들어 눈앞에 있는 소년을 가리켰습니다.

 

대답하는 제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소년과 저는 많은 것들을 했습니다. 소년은 사진이 업이었지만 저를 사진으로 담는 일만은 유난히 꺼렸습니다. 제가 돈을 주면서 찍어달라고 부탁해도 찍어주는 일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출판사에 다닌다는 걸 밝히자 글을 써달라고 하데요. 창작과 편집은 다르다고 얘기하자 이번에는 글을 써보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살면서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부탁받았더라도 큰 눈동자로 울망울망 바라보면 도리가 없게 되더라구요. 소년의 스튜디오 안에 소년과 카메라, 저와 종이와 펜이 달랑 있었습니다. 글을 쓴다고 생각하자 그 스튜디오가 마치 영영 나갈 수 없는 단단한 벙커처럼 느껴졌습니다. 펜을 들고 한숨을 푹 쉬자 가만가만 제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기 시작했던 소년의 그 손길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름 휴가철이 다가오자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연차를 썼습니다. 부산에 가기로 했죠. 여행을 준비하면서 소년은 늘상 낯선 발음을 입에 물곤 했습니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해외에 나갈 때에는 그 나라의 인사말을 꼭 익히는 버릇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도 그래서 남모르게 말 하나를 연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부산에 도착해 밤바다를 활보하던 첫날 밤, 소년의 손을 그러잡고 서툴게 속삭였습니다.

 

사랑해.

 

소년은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잘 모르겠다는 눈치였죠. 저는 다시 한 번 소년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 소년에게만 들리도록 작고 깊게 속삭였습니다. 사, 랑, 해. 그제서야 소년의 입가에 작게 웃음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일이었을까요. 새 핸드폰을 켜고 화면에 뜬 붉은 석양을 마주하던 순간. 그 순간처럼 소년이 웃고 있었습니다. 제 허리에 손을 두르면서 속삭였어요. 선명한 일본어로.

 

나도.

 

그 즈음 첫 번째 글을 회사 사이트에 투고했습니다. 시였어요. 부산에서 있었던 일을 적었었죠. 아주 장황했습니다. 그걸 본 옆자리 사람은 웃더군요. 어떻게 알았냐구요? 웃으면서 제게 제가 쓴 글을 보여줬습니다. 이 사람 시 진짜 웃기지 않아? 라덥니다. 그날 저는 집으로 돌아와 혼자 끄적였던 시들이 쓰인 노트들을 죄다 북북 찢었어요. 가스레인지 불을 켜고 종이를 모조리 태우려고 할 때쯤 도어락 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소년이었어요. 부엌에 선 저를 보자마자 곧장 달려와 가스레인지를 껐어요. 다음으로는 찢어진 종이를 하나하나 들어 적힌 글자를 잠시나마 읽는 것 같았습니다. 뭐 하고 있었어? 긴 침묵이 지난 뒤 물었습니다. 저는 한참동안을 대답하지 못하다가 간신히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죠. 어느새 소년과 저는 거실 소파에 거의 마주보는 채로 나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고개를 숙인 채 거의 죄를 실토하는 죄인처럼 웅얼거리고 있었고요. 제 말이 끝날 무렵 소년이 소파 아래쪽으로 몸을 숙였습니다. 카메라 가방을 무릎에 올려놓았습니다. 결코 제 앞에서는 꺼내는 일이 없었던 무거운 고성능 카메라를 꺼내고는 전원을 켰습니다. 그러고는 파인더를 눈에 대더군요. 뭐라 말할 틈도 없이 찰칵, 소리가 났습니다. 제 사진은 그렇게 찍지 않겠다고 반 년 가까이를 뻐기던 소년이 처음으로 저를 프레임 안에 담던 순간이었습니다.

 

스우.

 

제 이름을 불렀습니다.

 

나는 너를 너무나도 찍지 않고 배길 수 없을 때에는.

그냥 너를 찍을 거야.

 

저는 그때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소년의 눈동자가 아주 붉다기보다는 실은, 붉은 기를 머금은 갈색에 가깝다는 사실을요.

 

소년과 처음 만났던 계절이 다시 지나갈 즈음에는 소년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던 남자 둘을 만났습니다. 소년이 아주 어릴 적부터 가족처럼 지냈다던 사람들입니다. 소년이 그들을 만나게 된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이웃이라는 것뿐이었어요. 아직도 그렇게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있구나. 생각하면서 저는 둘을 마주했습니다.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자마자 소년을 이루고 있는 많은 부분을 이해했습니다. 소년과 나이 차이가 지긋이 나는 그들은 소년을 늦둥이 동생처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어요. 어린 나이에 가족을 모두 잃은 소년을 학교에 보내 주고 심지어 비싼 카메라까지 쥐어준 것 또한 그들인 듯싶었습니다. 4년제 대학교까지 번듯하게 나온 소년에게 소년이라는 이름이 너무 잘 어울리는 건 아마 이 둘에 비해서 소년은 죽을 때까지 소년이기 때문이겠죠.

 

한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저를 받아주었습니다. 십몇 년 간을 줄곧 쌓아왔을 두꺼운 벽을 허물고 저를 그들의 무리에 끼워 넣어 줬어요. 갑작스레 술자리에 불려 나가기도 했고 여행도 함께 다녔습니다. 심지어는 같이 일해 볼 생각 없냐고 제안까지 하더군요. 소년의 맏형 쯤 되는 곤도 씨가 작은 회사의 오너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히지카타 씨는 곤도 씨의 오른팔인 것 같았구요. 제안 받은 일자리는 제가 몽골에 가기 전에 있던 회사에서 하던 일과 아주 비슷한 업무를 맡은 자리였습니다. 봉급도 이까짓 출판사보다야 많았습니다. 그야말로 반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저에게조차도 그랬습니다. 오직 반대하고 나섰던 건 세상에서 단 한 사람, 바로 소년이었어요. 약간 취해서는 집으로 찾아와 같이 마시자며 소년이 양주병을 흔들던 어느 밤이었습니다. 막 저녁에서 새벽으로 넘어갈 무렵 제 어깨에 기대 있던 소년이 출판사를 떠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왜? 무심코 물었습니다. 취한 머리로 생각해도 제가 이직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거든요. 소년은 침묵했습니다. 소년의 말을 작은 농담이었다고 생각할 무렵 소년은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네 글이…… 좋아.

 

소년치고는 솔직한 어조였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얼굴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글을 쓴 적 없어. 제가 말했습니다. 알아. 소년이 답했습니다. 쓰고자 한 적도 없어. 알아. 쓰고 싶었던 적도 없어. 알아. 써야하는 이유도 몰라. 알아. 질문과 답변이 한참 반복되었을 때쯤 컵에 담긴 양주를 훅 들이켰습니다. 소년은 아주 눈을 감은 채로 빈 병을 꼭 껴안은 채 입을 열었습니다.

 

그래도 글 쓰는 것보다 좋은 일도 없지?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소년의 멱살을 잡아 올렸습니다. 소년의 붉어진 얼굴이 힘없이 아래로 축, 늘어지는 게 보였습니다. 동시에 얼굴을 약간 찡그리다가 이내 멍한 눈빛으로 저를 보더군요. 취해서 멍한 눈빛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여느 때처럼 저를 지긋이 바라보던, 모든 것을 관조하는 듯한, 몽골의 석양을 가득 담았던 그 슬퍼 보이는 눈빛이었습니다. 멱살을 잡아 올린 채로 제가 잠깐 멈칫해 있자 소년은 오른손을 들어 제 얼굴 오른편에 위치한 흉터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거대한 돌고래였습니다.

 

제가 제 얼굴을 통조림 날로 긁었던 어느 어린 날 저는 거대한 돌고래를 보았습니다. 배고픔에 몇 날 배를 곯다가 겨우 번듯한 먹을거리를 처음 발견한 직후였어요. 저의 부모는 매일 수학 문제집이며 과학 문제집 같은 걸 풀지 않았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는데, 제 생일에도 어김없이 문제풀이를 시켜왔습니다. 생일만이라도 안 하게 해주면 안 되냐고 드러눕자 저를 방에 가두고 쫄쫄 배를 굶겼습니다. 겨우 부모가 모두 집에서 나가자 저는 방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튀어 나왔습니다. 의자를 싱크대 앞에 대고 밟고 올라가 난생 처음 찬장을 열었죠. 십 분여간 붙잡고 끙끙대다가 연 통조림 뚜껑은 제 오른쪽 턱으로 푹 파고들었습니다. 동물원도 가본 적 없는 제게는 난생처음 보는 돌고래였어요. 얼굴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 누워 있자 울렁거리기 시작하는 시야 사이로 돌고래가 한 마리 헤엄쳐 지나갔습니다. 고개를 돌려 돌고래의 꼬리가 한참 허공을 헤엄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녀석을 따라 또 한 마리가, 그리고 더 한 마리가 제 옆을 지나갔습니다. 저는 어느새 몸을 일으켰습니다. 걷지는 못했습니다.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제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나 자라왔던 낮은 판자촌. 그 사이를 느릿한 몸짓으로 떠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대로 제가 그 돌고래를 따라 떠나가버렸다면 어떻게 됐던 걸까. 혼자 있을 때면 한참이고 상처를 감싼 붕대를 만지면서 생각했습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인적이 없는 아주 썰렁한 도시였습니다. 도쿄처럼 건물이 많고 아주 넓지만 사람의 기척이 없는 그런 도시입니다. 저는 그 속을 끊임없이 헤엄칩니다. 돌고래를 따라서요. 돌고래는 이따금 저에게 말을 걸어오지만 저는 단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저 유유히 유영했습니다. 우주에서 처음 무중력을 경험한 우주 비행사의 기분이 이런 걸까 괜히 가늠해보기도 하면서. 그러다가 어느 날에는 가는 잠에서 깨어 귀를 만져보면 그곳에 아가미가 달려 있습니다. 팔이 달려 있을 자리를 내려다봅니다. 회색 지느러미 하나가 울렁거리는 허공을 따라 너울대고 있습니다. 두 다리는 어느새 하나로 모은 채 두 갈래로 갈라진 커다란 지느러미가 달려 있습니다. 꼬리라고 부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김새입니다. 그야말로 돌고래가 된 저는 헤엄쳐 나아갑니다. 한 번 가면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 인간들의 힘으로는 다다라본 적이 없는 아주 깊은 바닷속을 향해서입니다.

 

바닷속의 풍경은 분명 너무나도 푸근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수면 아래로 내려가면 하늘에서부터 내리꽂히는 햇빛이 비쳐 들어와 온 수면에서부터 바닥까지를 연푸른색으로 밝히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바닥을 가득 채운 건 붉은색의 산호초들입니다. 간혹 말미잘과 성게 같은 녀석들도 있습니다. 그 사이를 형형색색의 열대어들이 헤엄칩니다. 조금 더 내려가다 보면 머리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는 녀석들이나 얼굴이 일그러진 채 입을 쩍 벌리고 만나는 녀석들 때로는 온몸의 비닐이 모두 투명해 장기를 다 드러내놓고 다니는 녀석들도 만납니다. 못 볼 광경은 아니었습니다. 그야 저는 돌고래니까요. 돌고래인 저는 물속으로 돌아가는 게 맞을 것이니까요. 그런데 너무나 이상하게도 그 풍경에까지 상상이 다다를 때면 앉아 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어요. 무언가가 제 몸을 짓누르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마치 제가 진짜로 바닷속에 있는 것처럼 그랬습니다. 손이 점차 떨리고 쥐어짜기라도 하듯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상처가 덧나 흉터가 될 때까지 그랬던 것 같아요. 자세한 것은 채 기억나지 않습니다. 확실한 건 발작이 그칠 즈음에 저는 혼자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있었던 곳도 판자촌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집을 뛰쳐나와버렸던 걸까요? 그곳은 바다였어요. 바람을 타고 짠냄새가 흘러 콧속으로 흘러 들어오고 온몸을 습습하게 덮기도 하는. 바다가 보이는 곳. 처음 보는 바닷가 마을에 덩그러니 서서 바다를 보고 있었습니다.

 

시야 속에 비치는 저희 집의 거실이 사선의 결을 그리며 울렁였습니다. 귓가는 온통 먹먹해졌습니다. 베란다 바깥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던 사이렌 소리나 사람들의 이야기소리 등이 점점 먼 곳으로 사라지더니 영영 들려올 듯하지 않았습니다. 숨이 가빠왔습니다. 양 다리가 오므라들었습니다. 힘을 주어도 힘을 주지 않아도 양 다리를 지우개로 지우고 있는 생경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직 들려오는 것은 귀를 찢어놓을 정도의 거대한 침묵과 아주 낮은 울음. 잘 들어보니 그건 제 입가에 걸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눈앞을 희미하고도 빠른 멸치 떼가 쌩 스쳐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어요. 코에 걸려 있는 한 무리의 비린내를요. 다시 생각해봅니다. 과연 코라고 부를 수나 있었을까요? 그야 저는 다음 순간 흐물거리는 양 지느러미로 허공을 밀어냈는걸요. 이윽고 베란다 바깥을 향해 첫 헤엄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거대한 돌고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실은 너무나도 거대한 돌고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소년이 얼굴을 잔뜩 붉힌 채 제 미끈거리는 몸통을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소년. 어째서 네가 여기 있어? 작은 의문이 배어나와 울음이 되었습니다.

 

소년과 함께 한참 허공을 헤엄쳤습니다. 정확히는 수백 번도 넘게 상상 속에서 보았던 인적이 없는 그 도시를요. 도시는 건물들 때문에 북적여 보이기도 하고 적막해 보이기도 합니다. 소년과 제가 머무른 곳은 후자의 경우에 가까웠습니다. 소년이 그곳을 얼마나 저만큼 느끼고 있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간에 소년은 늘상 상대방더러 대놓고 자신의 마음을 읽지 말라는 표정을 짓고 있기 마련이었으니까요. 제 비늘을 따라 규칙적으로 주둥이에서부터 꼬리까지 느긋한 커브를 그리며 지나가는 커다란 고동 소리는 어디에서부터 들려오는 것이었을까요? 사실은 대답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그건 바다가 깊은 곳에서부터 저를 부르는 소리였습니다.

 

[소년. 나는 여기 있으면 안 돼.]

 

바다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저를 감싼 울림도 강해졌습니다. 마치 비늘이 갈기갈기 찢겨나갈 것만 같았습니다. 몸을 양옆으로 흔들었습니다. 잔뜩 요동치고 있는데도 소년은 떨어지는 법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제 지느러미를 더욱 꽉 잡으며 저에게 달라붙어 왔습니다. 온몸을 짓누르는 격통 가운데 제일 견디지 못할 것은 소년이 바다를 보고도 저를 붙잡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제 몸은 빠른 속도로 바다를 향해 가고 있었고요. 비늘이 바다에 닿기 직전 주둥이를 젖히며 크게 울음을 울었습니다.

 

[소년. 너도 여기 있으면 안 돼.]

 

그렇습니다. 울고 있었습니다. 제가 듣기에도 제 울음소리는 너무나도 서러워 보였습니다. 우는 와중에도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소년이 제 흉터에 손을 올릴 때마다 거대한 돌고래들이 위협적으로 귓가를 스쳐 지나갔기 때문일까요. 온 몸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간 탓인지 빠진 탓인지 어떤 자세도 제 뜻대로 취할 수가 없었습니다. 거실에 주저앉아 엉엉 우는 수밖에요. 소년은 제 어깨를 강하게 쥐더니 저를 바닥에 눕혔습니다. 허리 양 옆으로 무릎을 붙이고 배 위에 올라타 저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제 턱을 잡았습니다. 다음 순간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어요. 저는 저도 모르게 양 손으로 소년의 허벅지께를 붙잡았습니다. 애무도 뭣도 아니었습니다. 바다의 아주 깊은 곳으로 몸이 빠지기 직전 물결을 붙잡는 심정이었습니다. 물결이 무슨 손에 잡히기라도 한다는 듯 양 손을 허우적대며 헤엄이 되지 않는 발버둥을 쳐야 했습니다. 눈을 가리니까 돌고래가 지나가는 소리가 더욱 생생하게 들리더군요. 살짝 벌어진 잇새에서 작은 신음이 새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네 여기는 내 거야.

 

소년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쨍쨍 울렸습니다. 톤이 반 정도 높아진 채로, 묘하게 흥분하고 있는 목소리였습니다. 으으으아아아. 저는 정말로 울음소리처럼 대답했습니다. 대답이라고 할 수나 있었던 걸까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공명 같은 것일 수도 있었겠죠. 그 순간 제 몸을 감싸고 있는 검은 침묵보다도 제 위에 올라탄 소년이 더욱 더 깊은 바닷속처럼 느껴졌거든요. 저를 오래도록 부르던 고동의 근원이었고 온몸을 찢을 듯이 짓누르던 고통의 근원. 온몸을 찢을 듯이 짓누르던 고동의 근원이자 저를 오래도록 부르던 고통의 근원이었던. 소년의 젖은 입술이 제 입술 위를 천천히 덮기 시작했습니다.

 

그날의 소년은 대체 왜 저에게 그런 행동을 했던 걸까요? 의문은 머릿속을 쉬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소년 또한 제 곁을 떠나지 않았거든요. 그 사이 동거를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소년이 스튜디오를 츄오 구에서 제 사무실 근처로 옮겨오겠다고 하데요. 자취방 근처의 작은 오피스텔을 스튜디오 삼아 구했다고 했습니다. 소년은 조촐한 캐리어 하나만을 가지고 와선 제 집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서로가 서로의 집에서 살기 시작한 거죠. 월세도 나누어 내기로 했고 그 집도 원래는 제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가까이 보면 볼수록 소년에게는 목적성 같은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향하고 싶은 건지가 저로서는 정말로 알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환상의 빛」에 등장하는 그 남편처럼 어디론가 까무룩 사라져버릴 것도 같았습니다. 물론 그것은 또한 제 불안에 불과할 것이었어요. 소년은 어디론가 훌쩍 떠나라면 떠나갈 것 같은 느낌을 두르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사회의 일원으로서 건실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대형 의류 쇼핑몰 등의 외주를 받아 사진을 찍는다고 하데요. 꽤나 번듯하게 생긴 편인 히지카타 씨가 소년의 좋은 모델이 되어주곤 하는 것 같았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소년은 히지카타 씨와 함께 퇴근해 와서는 셋이서 같이 맥주라도 기울일 것을 제안하곤 했으니까요.

 

소년은 히지카타 씨가 상대라면 당장 나가 죽으라는 등의 심한 욕설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원래도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부드러운 편은 아니었어요. 자신에게 호의를 가진 게 확실한 사람에게조차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면―설령 내키더라도― 거칠게 반응하는 편이었습니다. 저번에는 소년의 회사 동료라던 야마자키 씨가 스튜디오 이사를 다 도와줬는데도 고마운 점이 없다는 듯 웃음도 짓지 않은 채 멍하니 보고만 있더군요. 고맙다는 말을 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게 소년의 생존법인 것이겠지요. 저는 우선은 마음 깊이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나이가 지긋한 두 형에게 보호를 받으며 살았고, 커가면서는 혼혈처럼도 보이는 눈에 띄는 외모 탓에 이래저래 공격을 받으며 살았기 때문에 소년이 얼마나 자신을 철저하게 둘둘 감추고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 익숙한지에 대해서요. 그게 곤도 씨에겐 유독 무르고 히지카타 씨에겐 유독 심하덥니다. 소년은 한동안 한 손에 롤휴지를 들고 퇴근해 집에 들어오곤 했어요. 퇴근길에 히지카타 씨의 집에 들러서 휴지를 훔쳐왔기 때문에 그랬다는 사실을 한참 후에 알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저와 함께 술을 먹던 와중에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 죽으라고 욕설을 퍼붓고 끊거나 히지카타 씨가 자주 즐기는 마요네즈에 설사약을 넣는 일도 월례행사 정도의 빈도로 상당히 빈번하게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함께 촬영을 나가서 문제없이 함께 몇 시간이고를 보내고 밥을 먹거나 한 술 더 떠 술집이나 노래방 등으로 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 한 켠이 괜스레 먹먹해져 왔습니다. 둘은 대체 무슨 관계인 걸까요? 통 가늠이 가지 않았거든요. 기이하기까지 했습니다. 너무 기이해서 어쩌면 둘이 제가 모르는 곳에서는 키스 같은 것도 서슴지 않을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요. 지금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지만 그 당시에는 소년과 히지카타 씨의 사이가 저와 소년 사이에 마지막으로 남은 벽 같았습니다. 유리벽이어서 속이 다 투명하게 비쳐 보이지만 그만큼 한없이 넓고 높아서 타파할 수 없는 벽이요.

 

딱히 질투 같은 감정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 벽을 넘어설 수 없다는 사실에 막막해했습니다. 소년에게 모르는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까지 전부 알고만 싶은 그런 마음 있잖아요. 한 가지 변명을 하자면 그래서 물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히지카타 씨랑 무슨 사이야?

 

꽤나 저돌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소년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보고 있었어요. 소년으로서는 꽤 보기 드문, 감정이 훤히 느껴지는 표정이었습니다. 차라리 농담처럼 건넸다면 웃어넘기면서 그렇게까지 당황하진 않았을 텐데. 소년과 저는 운전석과 조수석에 나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와이퍼를 빠른 속도로 움직이도록 켜두어도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폭우가 오고 있었죠. 도시 근교의 산으로 출사를 나갔던 소년이 비 때문에 기차가 끊기는 바람에 데리러 갔었어요. 소년이 있는 곳으로 다다라 소년을 태우자 비가 더욱 쏟아지기 시작해 운전이고 뭐고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차에 앉아 히터와 라디오만을 켜놓고 폭우가 잦아들기를 기다렸습니다. 라디오에서는 경쾌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외국 노래라서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지만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노래는 경쾌하고 가사는 알아들을 수 없는데 왜인지 그 노래가 아주 슬픈 노래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그때는 시에 대해 이것저것 찾아 읽고 있었거든요. 반어법이라고 했던가요? 정말로 슬플 때는 오히려 행복한 척을 하면서 슬픔을 표현하는 방법 있잖아요. 생각은 그곳까지 닿았지만 여전히 제가 느낀 것을 또렷이 설명할 수는 없을 듯했습니다. 세상은 오히려 그런 알 수 없는 것들로 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저는 참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백지 같아도 소년만은 선명하게 찍혀 있는 마침표이길 바랐거든요.

 

질문을 내뱉고 제일 먼저 느낀 건 제 목소리가 상당히 가라앉아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소년 또한 제가 장난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단번에 알았겠죠. 저를 보다가는 슬쩍 고개를 돌려 창문에 머리를 기댄 뒤 창밖을 보았습니다. 창문에 소년의 머리카락이 띠고 있는 연한 갈색 빛깔이 투명하게 비쳐 보였습니다. 그 위로 빗물들이 빠른 속도로 미끄러지고 있었죠. 히터에서 나오는 건조한 바람 탓에 목이 간지러웠습니다.

 

소년은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대답하지 않고자 해서 대답하지 않은 건 아닌 듯해 보였어요. 그저 대답할 말을 고르고 고르다 못해 말로 하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그날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빗속에서 두 시간 정도를 더 기다리다 못해 결국 겨우 근처 호텔 방을 잡았어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씻고는 나란히 커다란 침대 위에 누웠습니다. 별 일은 없었어요. 입을 맞추고 서로가 서로를 껴안고, 그 다음은 탈 없이 흘러갔습니다. 그때에는 그렇게 생각했죠. 며칠이 흐른 후 소년이 돌연 자취를 감추었을 때까지요.

 

처음에는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해 보니까 그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더랍니다. 직장을 다니면서 사람을 찾는 일이 어디 쉽냐구요. 사라지고 나서 생각해보니 이 세상에서 소년과 저의 교집합은 단 두 명의 사람밖에 없었던 겁니다. 물론 혼자 동네를 샅샅이 뒤져보다가 제일 먼저 연락한 것이 바로 그 두 사람이었죠. 그들에게서도 모르겠다는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진짜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을 한 건지는 저로서는 알 길이 없었지만요. 그 다음부터는 소년과 함께했던 곳들을 무작정 되짚어 나갔습니다. 조금은 더 명료한 방법이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제 머리로는 그 정도가 한계더군요. 소년이 다시 만나고 싶었던 건지 소년과 함께했던 시간들이 만나고 싶었던 건지. 소년을 일본에서 처음 만났던 호텔 최상층의 칵테일 바, 부산, 소년의 스튜디오가 있던 곳. 있는 연차 없는 연차를 다 끌어다 써서 돌아다녔습니다. 가장 마지막으로 가려고 마음먹게 된 곳은 몽골이었습니다. 그 시점에 이르러서는 회사에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죠. 소년은 여전히 찾지 못했는데도요. 그래서 저는 또다시 회사를 때려쳤습니다. 뭘 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느냐는 젊은 사장의 물음에 몽골, 하고 답하자 사장은 다시 박수를 치며 웃더라구요. 그때에는 그만 가만히 있었습니다. 웃기를 멈춘 사장이 그의 책상에 올라간 제 사직서를 책상 서랍으로 집어넣을 때까지요.

 

소년이랑 아직도 연락이 안 되냐?

 

히지카타 씨에게서 연락이 온 건 몽골로 떠나기 전날 밤이었습니다. 공항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새벽 세 시 비행기였거든요. 그렇노라고 문자에 답장을 보내고 캐리어로 눈길을 돌렸어요. 그러자 전화가 오더군요. 나올 수 있냐고 하데요. 잠시 머뭇이자 그 새 곧장 왜 그러냐는 물음이 들려왔습니다.

 

공항에…… 가야 해서.

 

흘리듯이 말했습니다. 공항? 히지카타 씨가 되물었습니다. 그제야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할 수가 있었죠. 몽골에서 소년을 처음으로 만났던 얘기, 소년과 히지카타 씨의 관계를 의심했던 얘기, 결국엔 소년이 사라지고 소년을 찾기 위해 방방곡곡을 떠돌았던 이야기를요. 마지막 남은 가볼 곳이 이젠 몽골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긴 설명이 끝나자 히지카타 씨가 수화기 너머에서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작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어요. 담배를 피워 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몽골에 가면 뭐가 달라질 것 같은데.

 

침묵이 흘렀습니다. 이 세상에서 움직이는 건 오직 핸드폰 화면에 떠 있는 통화 시각을 표시하는 숫자밖에 없는 듯 느껴졌어요. 어떻게 대답을 해야할지 그리고 무슨 말이 들려올지에 대해 아무런 예측도 감히 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런 걸 예측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가까웠어요. 왜냐하면 히지카타 씨는 저보다는 소년을 좋아할 터였으니까요. 사실 희미하게나마 알고는 있었죠. 모르고 있을 수가 없었어요. 히지카타 씨가 정말로 소년을 친동생처럼, 소년이 히지카타 씨를 친형처럼 아끼고 있다는 사실을요. 그 순간 누군가 머릿속에 빛을 밝혀주기라도 하듯 명확하게 알겠데요. 히지카타 씨가 지금 제게 전화를 걸고 있는 것도 소년에 대한 호의일 것입니다. 아주 어릴 때 부모님을 여의고 고아로 살아왔었다고 말해줬었는데. 저는 그제껏 왜 그걸 몰랐던 걸까요? 생각해보세요. 히지카타 씨는 소년과 무려 십 년 가까이를 옆집에서 함께 지냈다구요. 그건, 그것은… 소년을 찾겠답시고 겨우 회사를 때려친 제 사랑보다 훨씬 큰 것이었습니다. 물론 퇴직 자금을 끌어 모아서 몽골행 비행기표를 예약한 제 사랑보다도 훨씬 더요. 심지어는, 몽골에 가면 소년이 있을 것이라는 얄팍한 환상에 빠져 있던 제 사랑보다도 한참은 더 클 것이었습니다. 히지카타 씨를 앞에 두고, 도대체 제가 그 동안 소년에게 하고 있었던 건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옳은 것이었을까요? 히지카타 씨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괜히 그런 참회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더군요.

 

저는 대체 어떤 얼굴로 소년을 다시 마주하면 좋을 것이었을까요?

의문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해 저는 몽골로 떠났습니다.

 

새벽 세 시에 출발하는 항공편인데도 비행기 안엔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거의 다가 인천에서 환승해 가는 사람들인 것 같더라구요. 인천에 도착한 뒤 환승 구역의 의자에 누워 한 숨 돌렸습니다. 인천에서 몽골로 가는 비행기는 두 시간 뒤에나 있었거든요. 쪽잠을 겨우 자다 일어나니 탑승 시간이 가까워 있었습니다. 헐레벌떡 몸을 갈무리하고 게이트로 향했습니다. 새벽의 공항은…… 그래도 소란스럽더군요. 면세점 셔터는 모두 내려가 있고 출국장을 둘러싼 유리에는 온통 어둠이 내려앉아 있고, 게이트 앞에 줄을 서 있는 사람들 중 누구 하나 구태여 말을 하고 있지 않았는데도요. 이 거대한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태엽을 감겠다는 것처럼 먼 곳에서 비행기 한 대가 이륙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이 움직이는 건 기껏해야 그런 일일지 모릅니다. 제 몸보다도 몇 배는 더 큰 비행기가 구름 위로 훌쩍 뜨는 일 같은 걸지도 모릅니다. 그런 실없는 생각은 가뿐히 하면서 여전히 히지카타 씨의 말에 대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소년이 정말로, 히지카타 씨와 곤도 씨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잠적해버렸다는 사실에 대해서입니다.

 

히지카타 씨는 저를 죽여버리겠다고 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야 죽여버리고 싶겠죠. 이해합니다. 정직하게 말해서 일본에 있을 때 공항 출국심사를 모두 마치기 전까지 어디선가 칼이 날아와 제 몸에 꽂히는 상상을 수십 번도 넘게 한 것 같거든요. 그런 일 없이 저는 울란바토르 공항에 발을 들였습니다. 도착하니 아침이더군요. 현지인들이 공항을 방역하거나 면세점 셔터를 올리며 일사분란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입국장을 나와 캐리어를 끌곤 제일 먼저 공항 안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기내식을 거른 참이었고 가이드가 올 때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거든요. 쌀국수와 샌드위치 등을 파는 조촐한 식당이었습니다. 주문대 앞에 서서 제일 먼저는 원 클럽 샌드위치 플리즈, 하고 말했습니다. 점원은 제가 말을 하기 전과 마찬가지로 양 손을 포스기 화면 양 옆에 올린 채로 저를 멀뚱 보고 있더군요. 알아듣지 못했나 봅니다. 그러고는 주문대 위에 올라가 있던 메뉴판을 제 앞으로 내밀었습니다. 저는 손가락을 들어 “Club sandwich”라는 글자를 가리켰습니다. 점원은 그제야 손가락을 움직여 포스기 화면을 조작하기 시작했습니다. 해외에선 왕왕 있는 일이었지요. 점원과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건. 되는 일이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고 표현해야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또 스스로 음식을 주문대에서 가져가야하는 일본의 식당들을 생각하고 주문대 앞에 서 있자 이번엔 자리로 돌아가 있으라고 말해주더군요. 별 군말 없이 돌아가 있자 점원이 직접 와 트레이와 함께 샌드위치 그릇 그리고 음료를 건네주었습니다. 분명히 알았죠. 아마도 정말 그건, 일본에선 하진 못했을 경험이었을 거라고요.

 

샌드위치는 가장 간단하게 얘기해서 맛있었습니다. 평범하게 맛볼 수 있는 맛이었어요. 한 입 베어 물자 제일 먼저 느껴지는 건 혀끝에 뭉툭하고 푹신하게 닿는 고소한 호밀빵이었습니다. 두꺼운 호밀빵을 이로 베어낸 뒤 한 입 더 씹으면 빵 사이에서 후추가 섞인 마요네즈와 짭짤한 햄이 동시에 옆으로 삐져나와 입 안에 안착하는 게 느껴졌습니다. 톡 쏘는 토마토 맛도 함께요. 한참 그런 생각을 하면서 먹고 있는 와중에 갑작스레 누군가가 제 맞은편 의자를 뒤로 빼어 앉았습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노인이었습니다. 둥근 천모자를 쓴 채 지팡이를 짚고 있었죠. 인중과, 턱 밑으로 흰 수염이 퍽 길게 자라 있었습니다. 여름엔 덥겠다. 노인을 보며 제 머리는 겨우 그런 걸 생각하고 있었구요.

 

안녕하세요.

 

노인이 말했습니다. 퍽 어눌하게, 그렇지만 선명하게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것은 누가 뭐라 토를 달 수도 없이 분명한 일본어였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저도 마주 대답했죠. 제 귀로 듣기에도 노인의 말보다 제 말이 훨씬 더 유창한 것은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습니다. 저는 콜라를 마시고 있었죠.

 

일본에서 오셨습니까?

 

노인의 두 번째 말이 들려왔습니다. 아주 느릿한 속도로요. 저는 짧게 고민하다가 그렇노라고 답했습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함부로 신상을 알려줘선 안 된다고는 하지만, 아니라고 대답할 수도 없고 어쩌겠어요. 여행입니까. 노인은 또 바로 되물었습니다. 보통은 그렇다고 말해야 옳은 것이었겠죠. 처음 보는 사람에게 선뜻 할 수 있는 대답이 얼마나 많겠어요. 그런데 저는 왜인지 그 대답만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건 여행이 아니었으니까요. 갓 전원을 켠 휴대폰 화면에서 맞딱뜨린 석양을 보고 이끌려 온 것과, 사라진 소년을 찾아온 것. 여행이란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제 목젖에 걸린 말들이 맥박처럼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마치 말들이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랬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건 살아 있다는 행위와 너무도 유사했습니다. 제가 하고자 해서 되는 것도 아니면서 저를 온통 지탱하고 있는 행위. 저도 아니면서 왜인지 자꾸 저 대신 제가 되려고 하는 행위.

 

소년은 저에게 왜 글을 쓰라고 했던 걸까요? 그보다 사람들은, 이 많은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 와서 글을 써보자고 하는 걸까요? 회사에 있을 무렵 남들의 글을 읽어내리며 그 의문을 도무지 뇌리에서 씻어내기 어려웠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정확히는 안다고 할 순 없었지만 그 순간에는 묘한 확신 하나가 저를 훑고 지나갔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몸속에 말들이 차오르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냐고요. 그것은 잘 꾸며진 것도 아닙니다. 낯선 나라에서 처음 보는 외국의 사람을 앞에 두고 있어야만 겨우 발화할 만한 아주 은밀하고 낯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평생 안고 가고만 싶은 이야기를 이따금은 누구에게 이해받고 싶을 때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약간은 눈살 찌푸려질 정도의 잡음이 섞인 침묵을 사이에 두고서요. 이상하잖아요. 대화도 아닌데 왜 글이란 것은 기분 나쁠 정도로 남에게 이해받고 싶은 티를 내는 걸까요. 다들 그런 태가 나도록 쓰는 걸까요. 그 질문에 답을 내릴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침묵에 섞인 잡음에 기대곤 하는 걸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건 소년에게도 마찬가지인 일이었겠지요. 그래서 아주 오래 전부터 카메라를 들고 세계 곳곳을 떠돌고 있었던 것이겠죠. 작가에겐 표현의 질료가 언어인 것이 소년에게는 사진이었을 것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들이 또 마구 차올라서 어쩔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오기 때문에 저를 글 쓰게 했던 것은 아닐까요. 결코 그렇다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얘기하고만 싶은 이상한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요, 저는 소년이 세상의 귀퉁이에 적고 있었던 한 편의 시였습니다.

 

여행은 아닙니다.

 

노인의 말에는 겨우 대답했습니다. 일본어를 못 하는 사람이 알아듣도록 일본어를 하는 재능은 없어서, 그냥 늘 말하던 대로 했습니다. 노인은 그저 웃고 있었습니다. 대답이 없었던 탓에 알아들었을지 그러지 못했을지는 모를 일입니다.

 

밥을 먹자마자 투어 차량을 타고 사막으로 향했습니다. 버스는 만석이었습니다. 이따금 혼자 온 사람도 몇몇 보였죠. 그날 소년과 제가 꼭 그랬었던 것처럼. 꼭 그러했을 것처럼. 낮 시간에는 낙타를 타고 사막을 배회하거나 사막에서 썰매를 타거나 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그 춥다던 사막의 밤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해가 모래 산 근처로 기울고 온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었습니다. 그것은 지나가는 시간을 현현하는 아주 작은 의식 같기도 했습니다. 온 사람들이 다 게르에서 나와 하늘을 보고 있었죠. 물론 저도 보고 있었습니다. 그 오렌지빛 하늘 아래 덩그러니 서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소년을요.

 

소년의 눈빛과 제 눈빛이 마주하는 순간 갑작스레 하늘에 결이 일었습니다. 구름 한 점 끼지 않은 하늘은 점점 여러 결로 나누어지더니 그 위에를 오선지에 걸린 음표처럼 뭉툭하고 둥근 무언가의 무리들이 떼를 지어 지나갔습니다. 아주 느긋한 속도를 지니고 있는

 

그건 거대한 돌고래였습니다.

 

거의 동시의 일입니다. 석양빛으로 덮여 있던 소년이 한순간 물빛으로 쨍하게 빛나다가 말았습니다. 저에게 눈을 깜빡일 시간도 주지 않고 소년의 얼굴이며 손, 맨살이 드러난 곳에 잿빛 비늘이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결을 따라 바람이 불자 소년의 머리카락이 물에라도 빠진 듯 위로 훅 들려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처음 만난 뒤 백 번은 더 저의 눈빛으로 쓸어내린 것만 같았던 둥글고 커다란 붉은 두 눈동자가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발을 들자 제 몸도 물속에라도 있는 것처럼 허공으로 훅 들려 뒤로 고꾸러지더군요. 주먹을 꽉 쥐며 한 발을 내딛었습니다. 귓가에 온통 물이 한 방향으로 흘러갈 때 들려오는 거대하고 시커먼 소리가 맴돌았습니다. 그 사이 소년의 양 다리가 꼭 모아져 있더군요. 늘 허벅지와 허벅지, 종아리와 종아리 사이가 떨어져 있어 그 너머가 보였던 소년의 얇은 다리가 기이할 정도로 꼭 붙어 있었습니다. 소년의 바지 아래쪽을 보자 바로 납득이 가는 모양새였습니다. 손바닥 두 개를 모은 면적을 훨씬 웃도는 크기의 지느러미가 소년의 바지 아래쪽에서 발 대신 삐져나온 채였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하늘을 향해 첫 번째 헤엄을 쳤습니다. 그 모습을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까요? 소년의 몸에서부터 옷가지가 우수수 떨어져 내려오고, 석양 아래 드문드문 드러난 소년의 살구색 피부에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오늘의 햇빛의 잔해가 붉게 스며들어 있는 광경을요.

 

양 팔을 위로 올려 아래로 동시에 힘껏 내렸습니다. 몸이 허공으로 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행동을 반복하고, 반복할수록 제 몸은 점차 위로 올라갔습니다. 마침내 손을 뻗어 소년의 꼬리지느러미를 붙잡았어요. 소년이 곧장 저를 보았습니다. 저는 다음으로는 소년의 꼬리 중간 부근을 붙잡았습니다. 아직 뜨겁더라구요. 그리고 그 꼬리 안쪽에서 아직 돌고래가 덜 된 소년의 다리 두 쪽이 요동치고 있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저도 모르게 저는 그 꼬리를 꼭 껴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인지 소년이 그곳에 갇혀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내가 소년을 껴안자 소년은 헤엄치는 것을 멈추고 저를 내려다보더군요. 제 머리카락 사이로 뜨겁고 뭉툭한 것이 들어와 머리를 쓸어내리는 게 느껴졌습니다. 소년이 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습니다.

 

소고.

오키타…… 소-우-고.

 

소년의 이름을 소리 내어 발음했습니다. 소년이 대꾸하듯 저를 내려다보았습니다.

 

나, 나를……

나를… 찍어 줘.

 

물고기들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작은 물고기들과, 큰 물고기들과, 이따금은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입이 쩍 벌어진 심해의 물고기들도 아무렇지 않게 소년과 저의 곁을 지나갔습니다. 저는 아주 급하지 않게 그러나 느긋하지도 않은 손길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습니다. 카메라를 켠 뒤 소년의 손에 꼭 쥐어주었습니다. 소년에게서 손을 떼자마자 제 몸이 절로 소년에게서 몇 뼘 정도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아. 그때 보았습니다. 소년이 웃고 있었습니다. 이 긴 여행의 마침표처럼, 소년이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저는 앞으로 소년과 어디를 향하게 되는 걸까요.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몰랐기 때문에 저도 웃었습니다. 소년은 휴대폰을 들었습니다. 눈높이에 대고서는

 

찰칵

셔터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오던 너의

발자국이 패인 자리마다

반딧불이 꼭 한 마리씩은 고여 있었던

 

소년의 등 뒤로 얇은 빛이 겹겹이 끝도 없이 일렁거리는 것을 아무도 모를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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