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hen Spring Has Come
※ 약 네타 주의
+ 추천 BGM : Mili – YUBIKIRI-GENMAN
꽤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겨울이니 당연한 거지만, 그래도 추운 지방에서 태어나 자란 히나에게는 견딜 만한 수준이었다. 그렇게 가만히 얕은 추위를 흘려보내며 멍하니, 빠르게 어둠이 내려앉은 정원을 보고 있으려니 슬며시 뒤에서 말을 걸어오는 이가 있었다.
"혼자 나와서 뭐 해?"
"아―. 그냥, 바람 쐬는 중."
"도망 나온 거겠지?"
"알면서 뭘 물어 봐, 성격 나쁘네."
"허? 너한텐 듣고 싶지 않다."
히나는 하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또래에 비해 체구가 작은 히나에게는 훨씬 크게 느껴지는 훤칠한 키에, 츠무기와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준수한 청년이 사뭇 장난스러운 미소를 띤 채 서 있었다. 고모의 아들이자, 오늘 히나가 불려 온 지루한 파티의 주인공이기도 한 사람이었다. 장차 가문의 명예를 이어 받을 후계자. 사토 키스케.
"그래서? 오늘은 뭐가 마음에 안 드는데?"
"다."
"흠, 그것도 참 일관적인 대답이네."
"사람이 일관성이 있어야지. 뭐, 어차피 오늘의 메인은 오빠니까 슬쩍 빠져도 괜찮지 않겠어?"
"…어디 맞춰 볼까. 너한테 슬슬 눈길 주는 도련님들이 싫은 거지? 아니, 걔들을 은근히 채근하는 모친들 쪽인가?"
히나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키스케의 얼굴에는 웃음이 찼다.
"아니 무슨 지금이 중세 유럽이야? 여기가 귀부인들 사교 파티냐고?"
"너는 출셋길로 잡기 쉬운 프린세스고?"
"오빠."
"알았어, 알았어. 하지만 의미적으로 틀리진 않잖아? 리코는 아직 중학생이지, 마나는 이제 유치원 갈 나이인데. 골라잡자면 너밖에 없지."
이제 히나의 두 눈에는 차디찬 서리만이 맺혀 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날카롭게 벼려진 경멸이었다. 키스케는 속으로 수긍했다. 그들 부류는 히나가 가장 싫어하는 타입의 인간들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눈부심에 미혹되어 그 속은 조금도 알지 못하면서, 그저 그 눈부심을 이용해 저들의 이익만을 얻으려 손을 내뻗는 자들.
사실, 히나가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키스케는 감사한 일이었다. 이런 자리에서는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기들끼리의 비밀인 척, 함부로 입을 놀리고 평가질을 한다. 서로를 깎아내려 이간질을 하고, 치켜세워 아첨을 하고, 그래, 정말 말 그대로 '겉으로만' 눈부시게 보일 뿐이다. 추악한 계산을 가면 아래 감추고 즐기는 척을 하는 거다.
백색증이라는 특이점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생긴 외모 때문에. 어릴 적부터 그런 대상이 되어 왔기에 싫어도 사람들을 예민하고 날카롭게 살필 줄 아는 그의 사촌 동생은 그런 얼룩진 감정과 시선들이 마구 부딪히는 이런 자리를 무척이나 꺼려, 아니, 극히 혐오했다.
"……가고 싶다."
"조금만 참아. 어디 보자, 한 30분만 더 있으면 집에 보내줄 테니까."
"집 말고."
"어? 이 시간에 집 말고 어딜 가려고?"
"……."
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물고, 저 너머, 바깥에 심어진 나무를 바라볼 뿐이었다.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감정이 흘러나와 억지로 삼키는 듯이.
"겨울에 벚나무를 노려봐서 뭐하게?"
"…안 노려봤어. 그냥 본 거야. 거기 있으니까."
고집스럽게 꾹, 꾹, 누르듯이 짜내는 목소리가 제법 무거웠다.
'오호, 이것 봐라?'
키스케는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그는 히나만큼 상대의 기분을 잘 파악하지는 못했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꽤 눈치가 빠르다고는 할 수 있었다. 경영자의 기본 소양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히나가 숨기겠다고 마음먹지 못할 만큼 흔들리게 하는 누군가가, 아마도 벚나무와 뭔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겠다는 말이다. 다만 지금은 그런 걸 캐묻기에는 시기도 장소도 좋지 못했다.
히나는 여전히 먼 곳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 시선 끝에 있을 상대가 누구인지, 무척 궁금해졌다.
* * *
"사쿠야가 준 목걸이, 열쇠에 달린 꽃 모양, 자세히 보니까 벚꽃이 아니네."
"응! 음, 뭐라고 했더라……. 앵초?"
"앵초?"
"벚꽃이랑 닮아서, 그런 이름이 붙었대."
"……그러면, 벚꽃의 따라 쟁이네."
"그렇게 생각해?"
"그러면?"
"음~ 같이 있으면서 닮아졌다던가?"
"뭐야, 그게."
"아하하. 그치만 이거, 히나에게 꼭 주고 싶었어."
"…왜?"
"―앵초의 꽃말은 '행복의 열쇠' 래. 히나가 꼭, 행복의 문을 열었으면 좋겠어서."
히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익숙한 방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잠깐 책상에 엎드려 졸아버린 사이 아주 오랜만에 그리운 꿈을 꾸었다. 아직 어리고, 서툴기만 했던 그 시절의 꿈. 저는 세상을 향해 날을 잔뜩 세우고 있었고, 그런 제게 끈질기게 손을 내밀어 오며 웃는 이가 있었다. 그는 지금도 그러했고, 이런 꿈을 꾼 이유는 알았다. 직전까지 그 아이가 보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러한 이유도 알고 있었다.
"……."
히나는 피곤한 눈가를 문지르다간 벗어두었던 안경을 도로 집어 썼다. 잘그락, 안경 줄의 장식들이 스치며 소리를 냈다. 꿰다 만 비즈와 구슬이 책상 위를 가볍게 굴렀다. 그리고, 비즈 박스 옆에 놓여 있던 휴대폰이 가볍게 울렸다. 도착한 메신저의 수신인을 확인한 히나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사쿠야에게서였다.
【저기, 혹시 시간 괜찮으면 잠깐, 만날 수 있을까?】
무언가의 예감이 들었다. 히나는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이러한 직감은 꽤 잘 들어맞았으니까.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간, 이내 답장을 써 보냈다. 그래, 라고, 어려운, 짧은 한 마디를.
사이좋은 친구 사이. 오늘, 이 관계는 흔들리게 될 것이다.
하늘이 맑았다. 무거운 마음과는 관계없이, 야속하게도. 히나는 창밖을 향하던 시선을 다시 현실 앞으로 돌렸다. 벚꽃을 닮아, 봄을 닮아. 지나치게 따스한, 제게는 그저 과분한 소년이 긴장한 채, 거기 앉아 있었다. 숨이 막혔다. 히나는 전혀 흔들림 없는 모습을 가장하고 되물었다.
"그러니까, 너는 나랑 연애를 하고 싶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거야?"
너를 좋아한다고, 길게 꾸민 말없이 건네 온 솔직한 고백이, 절대 저를 향하지 않기를 바랐다. 자기 마음을 자각하지 않고도, 자각하고도, 저를 아끼고 좋아해주는 그 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기를 바랐다. 간절히 바랐다. 헌데, 지금 그 소원도 끝을 고한다.
"……아니."
"……어?"
"못 들은 걸로 할게."
당황감이 역력한 얼굴을 바라보며, 히나는 아무도 모르게 주먹을 꾹, 꾹,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 살을 연신 파고들며 경고를 보냈다.
"고맙지만 그 마음은 받아줄 수 없어."
마음 약해지지 말고 거짓말을 계속 하라고.
"이런 얘기는 확실히 말하는 게 좋지. 우리, 솔직히 현실적인 차이가 크잖아. 친구 사이를 벗어나면 뭐가 남을 것 같아?"
"……."
"각자의 위치라는 게 있어. 너는 너한테 맞는 평범하고 착한 사람, 나는 나한테 맞는 높고 좋은 사람. 그게 어울리는 짝이라는 거야. 우리는 친구는 될 수 있어도, 연인 사이는 될 수 없어. 그러고 싶지도 않고. 너도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봐. 꿈 한 번 잘못 꾼 착각은 아닌지."
숨이 막힌다. 스스로 그 목을 조르고, 자신의 목까지 조르고, 애써 웃지도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마주하는 것은 그야말로 고문이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이렇게까지 해야만, 그 마음을 접어줄 테니까.
사쿠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충격을 받은 듯 굳어있었다. 히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그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천천히 사쿠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기서 가주려는 걸까. 그렇다면 다행일 텐데. 히나는 이다음에 일어난 일에 입술을 깨물지 않도록 애썼다.
"……안 돼?"
끊어질 듯이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진다. 뚝, 뚝, 떨어져 내리는 눈물이 차가운 바닥에 맺혔다.
"나 좀 사랑해주면 안 돼?"
차라리 이게 다 꿈이었으면. 히나는 당장 눈을 질끈 감고 죽고만 싶어졌다.
이건 두려움이다. 저를 붙잡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울며 매달리는 건 전부 저를 잃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고, 그 두려움은 사랑받지 못한 그의 과거에서 나온다. 전부 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인데, 내놓아야 하는 답은 하나뿐이라.
"……내가 뭐라고 대답할지, 알고 있잖아."
크게 뜬 두 눈에서 또르륵, 투명한 물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슬로우 모션처럼, 그녀를 붙잡고 있던 손이 떨어져나가고, …사쿠야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히나는 끝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미, 미안. 내가, 혼자 이렇게 고집부릴 일이… 아닌데. ……곤란하게 해서 미안해, 히나. 먼저, 갈게."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멀어지는 뒷모습이 심장을 쥐어짜듯이 죄어왔다. 이내 그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히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너무 꽉 쥐어서 하얗게 질린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손을 천천히 들어, 입을 틀어막자마자, 아슬아슬하게 막혀있던 둑이 뚫린 것처럼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참고, 참고, 또 참고 있던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 터져버렸다.
그저 순진하고, 착해 빠져선, 왜 자기가 사과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쁜 건 저인데. 잔인하게 굴고 있는 것도 상처를 입히고 있는 쪽도 저인데. 사과를 해 마땅한 건 이쪽인데. 왜. 대체 왜. 만약의 상황이 두려워서. 세상이 저를 보는 눈으로 그가 저를 보게 되는 순간이 올까봐, 그래서 저를 떠나버리게 되면 어떡하나, 이 관계를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그 옆에, 계속 있고 싶어서. 잃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이렇게 이기적으로 굴어 너를 아프게 하고 울리고 말았는데. 왜 네가 사과를 하는 거야.
그래, 이건 두려움이다. 전부 그 때문이다. 그래서 일어나지도 않은 만약의 일에마저 겁을 내서 회피하는 것뿐이다. 한없이 부드럽고 따스한 그의 진심에 날카롭게 벼려진 얼음을 비수처럼 꽂아 넣더라도. 그렇지만, 그래도.
"――."
……부디 이런 나를, 싫어하지 말아줘.
* * *
똑똑,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에 사쿠야는 멍한 정신을 되돌렸다. 들어오세요, 라고 대답하자, 이내 익숙한 사람들이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같은 봄조에 소속된, 사쿠야에게는 새로운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었다.
"다같이, 무슨 일 있나요?"
"아니, 그건 이쪽에서 할 말이지……. 괜찮아? 사쿠야."
아아, 걱정을 끼쳐버렸구나. 사쿠야는 맥없이 웃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히나를 만나고 돌아와서, 남은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사쿠야는 그저 멍하니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이번만큼은 도저히 아무렇지 않은 척 웃을 자신이 없었다. 이런 걸 실연이라고 하나, 처음으로 알았다. 자신이 히나를 많이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도 다른 사람이 알려줘서야 처음 알았는데, 틈도 없이 거절당하고 나니 또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그 순간에 울며 매달리고 만 것은, 이대로 이 관계가 깨져버릴까 갑자기 두려워져서였다. 급작스럽게 발목을 붙잡혀, 저도 모르게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다.
"왜 나까지……."
"네가 감독님한테 실연당했다느니 뭐니 할 때도 들어줬잖아."
"……."
"그래, 그래. 한 번 들어줬는데 두 번 못 들어주겠어. 그러니까 말해 봐, 사쿠야. 밖에서 히나하고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심각한 전쟁 있었대도 TOP SECRET, 지켜주겠다요."
"전쟁이라니. 진짜 한 번에 심각해졌잖슴까!"
"아하하……."
얘기를, 해도 될까. 어떻게 얘기하면 좋을까. 이런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도, 또한 처음이었다. 진짜 가족이었던 사람들은 먼저 손을 내밀어준 적조차 드물거나, 없었기에. 전부 처음이어서 실수를 해버린 걸까. 사쿠야는 괜히 손가락을 톡, 톡, 두드리다간, 조금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전에, 말한 적 있었죠. 초등학교 때, 꼭 천사처럼 예쁜 아이와 친구가 된 적이 있었다고."
"있었지."
"그거, 히나 얘기 아니었어?"
"맞아요. 그게 히나였어요."
하얀 피부는 옅게 분홍빛이 돌고, 긴 머리카락과 속눈썹까지도 깨끗한 백색, 토끼 같다고 생각했던 새빨간 두 눈은 꼭 보석처럼 반짝여서. 처음 본 그 순간에 천사가 거기 앉아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히나를 좋아하는 마음을 자각하고 있는 지금 돌이켜보면, 그 때 이미 첫눈에 반했었던 거라고 알 수 있었다.
"계속, 그리워했었어요. 히나와 함께했던 1년이, 제게는 더없이 행복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만나고 싶다고, 계속. 그래서 다시 만났을 때는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비록, 제가 추억하던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더라도, 그래도 히나는 여전히 히나여서."
왜 이제 와서 깨달은 걸까. 아니, 조금 더 빨랐다고 해도 같은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사쿠야는 세워 앉은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제가 혼자 들떠서, 무심코 부담을 줘버린 것 같아요. 히나가, 이대로 떠나버릴까봐, 갑자기 무서워져서. 저도 모르게 히나를 곤란하게 만들었어요. 이제 저를, 싫어하게 되면 어떡하죠……."
한 번 추락하기 시작한 기분은 끝없이 심해를 향해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 흐름을 끊은 것은 조금은 한숨이 섞인 듯한 이타루의 목소리였다.
"글쎄, 아닐 텐데."
"……?"
"히나가 뭐라고 했어?"
"…고맙지만, 그 마음은 받아줄 수 없다…고."
"또 다른 말은?"
사쿠야는 천천히 기억을 되돌렸다. 건조하게 날아들어 박힌 말들을 떠올릴수록 또 목이 메이는 것 같았다. 히나는 무표정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서늘한 얼굴이었다. 아, 그래서 더 당황한 건가. 사쿠야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서, 대사를 읊듯이 그 말들을 입에 담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밖으로 낼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현실적인 차이가 크다고, 각자의 위치라는 게, 있다고. ……「너는 너한테 맞는 평범하고 착한 사람, 나는 나한테 맞는 높고 좋은 사람. 그게 어울리는 짝이라는 거야. 우리는 친구는 될 수 있어도, 연인 사이는 될 수 없어. 그러고 싶지도 않고. 너도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봐. 꿈 한 번 잘못 꾼 착각은 아닌지.」 …라고."
"Oh……. 드라마에서 많이 들은 대사랑 똑같다요."
"…너무한데. 꼭 그렇게까지 말해야 해?"
"그래, 거기. 그거라고."
"……에?"
무언가의 한 장면을 가리켜 지적하듯이, 턱을 괴고 가만히 듣고 있던 이타루가 검지 손가락을 세웠다. 영문을 모르는 시선들이 그를 향했다. 이타루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물 흐르는 듯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히나가 언제 사쿠야한테 그렇게까지 심하게 대한 적 있었어? 사쿄 씨한테도 할 말 다 하는 공주님이 사쿠야한테는 계속 관대했어. 이 정도로 캐릭터성이 확실하면 도리어 해석하기 쉽지."
"…이타루 씨, 알아듣게 말해주실래요."
"그렇게까지 심하게 말한 건 히나의 진심이 아닐 거라는 소리. 보통 B에게는 늘 관대한 A가 B에게 모진 소리 하며 밀어낼 때는 반드시 무슨 문제로부터 B를 지키기 위해서 피눈물을 삼키고 있지."
츠즈루가 기어이 '글러먹었다, 이 사람…….' 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타루는 그런 츠즈루를 보고는 한 번 빙긋 웃었다.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그리고는 다시 사쿠야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사쿠야, 너무 우울해하지 마. 히나는 널 너무 많이 아끼고 있는 것뿐이야."
"……네. 감사합니다."
다음 날, 히나는 아무렇지 않게 기숙사에 놀러 와서 변함없는 모습으로 사쿠야를 대했다. 그에 안심한 건지, 사쿠야도 점차 본래의 기운을 되찾아갔다. 이대로 아무 문제없을 거라고, 지켜보던 다른 봄조 단원들도 안심했다. 일상은 일상으로 돌아왔다.
……천천히 부식되어 떨어져나가는 톱니바퀴 하나를 제외하고.
* * *
히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꾸준히 몇 날 며칠을 울리던 스마트폰도 요즘에는 조용해졌다. 스스로 무척 못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것도 한계, 억지로 웃으며 여전히 친한 친구인 양 구는 것도 한계, 거짓말을 계속하고 숨기는 것도, 악인임이 분명한데도 좋은 사람인 척 꾸미고 있는 것도, 전부, 전부, 전부. 견딜 수가 없어서.
쨍그랑!
집어 던진 손거울이 산산 조각난 채 바닥에서 반짝였다. 요란하게 깨지는 소리에 방으로 들어온 유이토가 마구잡이로 흐트러져 있는 거울 조각과 침대에 맥없이 누워있는 소녀를 번갈아 보고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곧이어 들어온 메이드가 조각들을 치울 때까지도 히나는 미동이 없었다.
빠르게 정리가 끝나고 방 안이 조용해지자, 유이토는 곧장 방을 가로질러 들어가 침대 발치에 섰다.
"아가씨."
"……."
10년. 그게 두 사람 사이의 시간차였다. 그런 만큼, 유이토는 히나의 전담 집사라고는 하지만 둘만 있을 때는 오히려 오빠 같은 느낌이 강했다. 그건 히나가 바란 것이기도 했다. 7살의 어린 아가씨에게 배정된 첫 날, 이제 막 글을 쓰고 장난치며 뛰어놀 나이의 여자아이는 세상 물정 다 아는, 어린 아이답지 않은 얼굴을 하고 그에게서 단 하나의 약속부터 받아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배신하지 않고 곁을 지킬 것.」
그건 일종의 계약이었지만 그보단 조금 더 가벼운 것이었고, 그 안에 담긴 것은 그보다 더 무거운 것이었다. 지칠 대로 지쳐서, 세상을 미워하게 된 아이가 유일한 제 편을 만들어야만 했기에 내건 약속. 유이토는 계속 그 약속을 지켜왔다. 아가씨가 처음으로 진짜 친구를 만들었을 때도, 그 친구와 헤어져야만 했을 때도, 스스로 눈을 닫고 어둠 속에서 무너져 있을 때도, 딛고 일어나 다시 빛 아래 섰을 때도. 지금까지도 쭉. 그러니 이것도, 그의 일인 것이다.
몇 번을 불러도 히나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뒤집혀 있던 스마트폰이 울렸다. 유이토는 놓치지 않고 재빨리 그것을 집어 들었다. 계속 늘어져있기만 하던 히나가 벌떡 일어났다.
"뭐 하는……!"
"실례하겠습니다."
뚝. 벨소리가 끊기고, 전화가 연결된 순간 차가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히나가 많은 말이 담긴 얼굴로 노려봤으나 유이토는 시치미를 떼며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히나는 기가 찬 숨도 내뱉지 못하고 조심스레 스마트폰을 건네받았다. 예의는 아니지만 지금이라도 조용히 끊어버리면 될 일이다. 그러나 통화를 종료하기도 전에 건너편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그녀의 손을 굳어버리게 했다.
【끊으면 진짜 가만 안 둔다.】
유키다. 히나는 숨을 죽이고 침을 삼켰다. 할 일을 마친 유이토는 꾸벅 인사를 하곤 조용히 방에서 나갔다. 히나가 내내 얄밉게 바라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어찌 되었든 한 소리를 하는 건 나중이다.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간다. 히나는 일단 스피커에 귀를 댔다.
"……네."
자연스레 존댓말이 나갔다. 어느새 무릎을 꿇고 앉은 히나는 유키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의상, 오늘 완성했어.】
"아……."
그러고 보니 곧 봄조의 두 번째 정기공연이 있구나. 가을조의 첫 공연이 끝난 후, 히나는 정식으로 만카이 컴퍼니의 의상 팀으로 소속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아무 일 없었다면 지금쯤 일을 끝내고 유키와 함께 숨 돌릴 겸 어디 놀러라도 가자며 기지개를 켜고 있었을 테다.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 팽개칠 생각은 아니었어."
【사과 듣자는 거 아니고. 잠깐 나와.】
"……."
【사쿠야하고 무슨 문제가 있는지는 둘째 치고. …나하고의 관계까지 모른 척 하고 있을 셈이라면 용서 안 할 거니까.】
어라, 이런 말 잘 안 하는 성격인데. 히나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을 삼켰다.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면 단호히 거절하기도 어렵다. 무엇보다, 그는 좀, 거스르기가 무서웠다.
"……어디로 나갈까."
그리하여 히나가 불러내진 곳은 이전에 몇 번 간 적이 있던 플라워 카페였다.
문을 열면 딸랑, 맑은 풍경(風鈴) 소리가 귓가를 밝혔다. 천장 곳곳에 늘어진 넝쿨 꽃들이 꼭 커다란 온실 안인 듯 착각하게 만들었다. 여기저기서 커피 향과 섞인 꽃향기가 기분 좋게 흘렀다. 그러나 히나는 마냥 안정적이지 못한 기분으로 한 발 한 발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다 문득, 벽에 걸린 액자에 시선이 닿았다. 푸른 빛깔의 수채화로 몽환적이게 그려진 그림. 별빛 가득한 밤하늘을 유영하고 있는 그건 거대한 돌고래였다.
한 번. 딱 한 번, 어릴 적에 본 적이 있었다. 수족관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기에, 근처 수족관 하나를 통째로 빌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갔었다. 객석이 놓인 넓은 홀의 한 벽면을 푸르게 채우고 있는 거대한 수조 안을 유유히 날고 있던 돌고래들을 보며 둘이서 마냥 시선을 빼앗겨 한참을 그 앞에만 서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작았던 그 때에는 돌고래도 그저 고래만큼 크게만 보여서. 잔뜩 들뜬 얼굴로 푸른 물결 잔상 속에서 저를 보고 활짝 웃고 있던 그 아이가, ……아름다워서.
"――."
단숨에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턱 밑에 맺혔다간 발밑을 적셨다. 누군가의 손이 움츠린 등을 꾹 눌러 밀었다.
"여기서 울면 이상하게 보잖아. 저 안에 들어가서 울어."
결국은 끌려가다시피 손목을 잡혀 들어간 구석 자리에 앉아, 히나는 한참을 울었다. 물밀듯이 밀려온 그리움이 커다란 파도가 되어 짓이겨진 마음을 하염없이 집어삼켜서 도저히 격해진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유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울음이 그칠 때까지 가져온 바느질 도구를 늘어놓고 천에 자수를 놓았다.
히나가 사쿠야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유키도 사람을 파악하는 눈은 날카로운 편이었으니까. 히나는 사쿠야에게만 관대했고, 사쿠야 앞에서는 유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매사에 사쿠야를 신경 썼고, 둘이서 쇼핑을 겸해 놀러 나갔을 때도, "여기는 나중에 사쿠야도 데려와야지" 라던가, "저거 사쿠야가 좋아하는 건데" 라던가, "이거 사쿠야한테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라던가……. 지적하면 그만큼 친한 친구니까, 라고 일관했지만, 어딜 어떻게 보아도 사랑에 빠진 소녀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물론 히나도 겉을 꾸미는 데에는 능숙해서,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면 다들 친한 친구라는 변명을 믿고 있었다.
"다 울었어?"
"……진짜 안정적이네, 유키."
지친 목소리로 훌쩍이며 말하는 히나에게 드디어 눈길을 준 유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업자득이잖아?"
히나는 입매를 일그러뜨리며 시선을 내렸다. 유키는 아랑곳 않고 하던 것들을 정리해 집어넣더니 아이스티 두 잔을 주문해 가지고 왔다. 잘그락, 앞에 놓인 잔의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히나는 한참 멍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불투명하게 비친 제 꼴이 참 말이 아니었다. 자업자득. 맞는 말이었다. 이 모든 게 스스로 자초한 일인데, 이렇게 괴로워 할 자격도 없을 텐데.
"……왜 그렇게 어려운 길로 가는 건데? 좋아하잖아. 서로."
"……."
그러게, 왜 어려운 길로 갈까. 이미 답은 나와 있는 자문이었다. 자신이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잠시 더 침묵을 지키고 있던 히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어렵게 어렵게, 무거운 입을 열었다.
"…나는, ……사쿠야와 헤어지기 싫어."
토해내듯 말하는 그 얼굴이 너무나도 괴롭게 일그러져 있어서, 유키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싫어, 나는, 이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아. 사쿠야가 왜 나를 좋아해? 나는 사쿠야가 나를 더 몰랐으면 해. 더 알지 못했으면 좋겠어. 이 안에, 사쿠야가 몰랐으면 하는 것들은 잔뜩 있어. 내가 가지고 있는 그런, 어둡고 시커먼 그런 것들, 다 몰랐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때의 그런 눈으로, 그런 시선으로, 그런 생각으로, 나를 보게 될 게 너무너무 무서워……."
"……히나."
"그 뿐만 아니야! 현실적으로만 봐도 그래. 알아. 사쿠야는 그렇지 않을 거라는 거. 그 때도 나를 나로 봐준 건 유일하게 사쿠야 뿐이었어. 내가 아무리 밀어내도, 포기하지 않고 손을 내밀어줬어. 사쿠야는 계속 그럴 거야. 하지만 그건 사쿠야 뿐이지."
"……."
"날 봐. 나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야. 당장 사쿠야하고 거리에 나가면 열에 열은 다 나를 힐끔거려. 그 중에 반 이상은 '예쁘다' 보다는 '특이하다' 는 단어를 먼저 떠올리겠지. 그럼 같이 있는 사쿠야는? 전부 괜찮다고 쳐. 연애를 해봐. 어디서라도 얘기가 안 새나갈까? 공식적인 사교장에라도 나가게 되면? 그 자리에 사쿠야가 없더라도 남 얘기하기 좋아하는 치들은 자기들 좋은 대로 사쿠야에 대해 말을 만들겠지. 그런 더러운 입에 사쿠야 얘기가 오르내리는 거, 생각만 해도 싫어. 소름 돋아. 끔찍해. 왜 나 때문에 사쿠야가 입을 모든 피해를 감수해야 해? 대체 왜?"
너무 어릴 적부터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너무 많았고, 너무 깊었다. 모든 것을 향해 가시가 돋쳐 있던 그 시절에 사쿠야와 함께 했던 1년은, 히나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빛나는 보물 같은 시간들이었고, 세상에 지쳐 어둠 속에 갇혀있던 그녀에게 구원이 되어준 유일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사쿠야가 저를 떠나갈 것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더더욱, 사쿠야를 지키고 싶었다.
사쿠야가 히나의 세계에 따스한 봄을 안겨준 유일한 빛이었기에.
"지금 하고 있는 짓이 되게 꼴사나운 거 알아?"
"…알아……."
"그럼 그만 두지 그래. 꼴사나운 짓."
"…지금까지 뭐 들은 거야? 나는,"
"자. 이번 공연 티켓이랑 플라이어."
문답무용. 히나는 어쩔 수 없이 말이 삼켜진 입을 꾹 다물고, 앞에 내밀어진 것들에 시선을 두었다. 『이상한 나라의 청년 앨리스』. 마스미와 이타루가 등을 맞대고 앉은 사진이 담긴 공연 전단지 위에 적혀 있는 제목이었다. 유키가 신나서 의상에 공을 들인 티가 났다. 맥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마 제가 있었다면 2배로 티가 났겠지, 싶어서. 하지만.
"……못 가."
"안 오는 거겠지. 어차피 그거 천추락 티켓이니까 그동안 잔뜩 고민하고."
"유키."
"아―, 진짜! 사쿠야는 기다리겠다고 했어. 네가 이 시간을 거쳐서 무슨 선택을 하든. 기다려주겠다고. 그게 지금 자신이 할 일이라고. 그러니까 너는 네가 할 일을 해. 하고 싶은 만큼 고민하고 또 고민하라고. 너 머리 좋잖아?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 가지고 머리 쥐어뜯는 것보다 일어났을 때 대처라던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방법 쯤 생각해낼 수 있잖아, 세상 제일 공주님 주제에!"
짜증 섞인 타박이었지만 친구라는 위치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할 수 있는 최대의 응원의 말이기도 했다. 그런 건 그도 그다지 익숙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세상의 시선에 질린 건 그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히나가 왜 이러는지도, 솔직히 그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하고 싶은 대로, 그가 행복해지는 일을 하고 있었고, 히나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랐다. 진심으로.
"정말이지, 대체 왜 고3이나 된 사람들의 복잡한 연애사에 중3이 끼어들어야만 하는 건데. 간다."
"……."
유키가 떠나고도 한참, 히나는 그 자리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해가 떨어지며 노을이 지기 시작한 바깥에서 붉은 빛이 새어 들어왔다. 얼음이 다 녹아버린 아이스티는 결국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히나는 한숨조차 내쉬지 못하고, 힘없이 티켓과 플라이어를 챙겨 나섰다.
고민에 고민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하루, 이틀, 사흘, ……. 이렇게까지 방황해본 적이 언제 있었던가. 길을 잃었을 뿐 아니라 어디로 가야할지 선택하기도 힘든 암흑 속에 덩그러니 서있는 기분이었다. 어둠은 무서워하지만, 그렇기에 그런 비유를 사용하는 게 알맞다고 생각했다. 동화 속의 앨리스는 어땠을까. 꿈이라고는 하나 앨리스는 그녀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이상한 나라에 떨어졌다. 다 같이 미쳐버려도 이상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기억났다. 실제로 그런 낌새도 있지 않았던가. 내용도 가물가물했다. 다만 잊혀지지 않는 한 장면이 있다면…….
히나는 베개에 고개를 묻으며 몸을 웅크렸다. 괴로운 신음이 연달아 흘러나왔다. 꼭 험한 운동을 하고 와서 근육통으로 시달리고 있는 환자 마냥.
계속해서, 자기 자신과의 긴 싸움이 이어졌다.
* * *
"다들 수고했어!"
"수고하셨습니다!"
"애드리브 투성이였다요―."
"제 말이요!"
"하하, 그래도 관객 분들, 모두 즐거워해주셨죠."
"아, 맞아. 사쿠야 군."
봄조의 2회차 공연도 무사히 종료. 훈훈한 기분으로 그들을 보고 있던 이즈미는 생각났다는 듯이 가지고 들어온 선물 상자를 사쿠야에게 건넸다. 연분홍색 포장지에 붉은색 리본. 사쿠야가 숨을 멈춘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위기를 읽은 모두가 입을 다물고, 일순간 분장실 안이 조용해졌다. 사쿠야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들자, 이즈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쿠야는 떨리는 손으로 리본을 풀고, 포장을 뜯어냈다. 안에서 나온 하얀 상자를 열면, 익숙한 벚꽃 꽃다발과 함께 익숙한 목걸이가 감긴 작은 카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로즈골드 색의 체인 끝에 달린 것은 열쇠 모양의 펜던트. 열쇠 머리 위에는 자그맣게 반짝이는 큐빅과 벚꽃 모양의 장식이 붙어있었다. 사쿠야는 서둘러 카드를 열었다. 낯익은 필체가 눈에 들어온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가진 것이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라면. 길을 가르쳐 줄래? 체셔.]
벌컥 문을 열고 그저 달렸다. 인파가 빠진 복도를 가로질러, 탁 트인 로비를 지나, 캄캄해진 밤 골목으로 뛰쳐나왔을 때엔 이미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있었다. 아니, 선물 상자가 눈에 들어온 그 시점에 이미 다른 생각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첫 공연 내내, 공연이 끝날 때마다 도착했던 선물의 포장이었다. 그 때도, 마지막 천추락 공연이 끝났을 때 보내온 것은 벚꽃 꽃다발이었다. 열쇠 목걸이도. 어릴 적 그가 히나에게 선물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다른 것이라면 장식된 꽃이 다를 뿐이다. 히나의 것은 앵초. 꽃말은…….
"―히나!!"
……행복의 열쇠.
"……오늘은 의상, 제대로 갈아입고 있었네."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서있던 소녀는 그 불빛만큼 희미한 미소를 그려냈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운 느낌이 들었다. 뿌연 빛을 받은 벚나무가 꼭 무대 위의 소품인 것처럼 보였다. 가벼운 바람에 흔들려 흩날린 꽃잎 몇 장이 아스라이 바닥에 내려앉았다. 사쿠야는 숨을 삼키고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섰다.
"히나,"
"미안해."
"……."
못 본 새에 꽤 야위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쿠야는 또래보다 작은 편이었다. 그런데 히나는 그보다도 더 작아서, 어쩐지 지켜줘야 할 것 같다면서도, 히나는 저보다 강하니까, 어쩐지 의지하게 될 때도 있었다. 아니, 실제로 의지하고 있었다. 히나는 언제나 그에게 용기를 품을 수 있게 해주었고, 단단한 지지대가 되어주었으니까. 사쿠야는 그런 그녀를 동경했고,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히나가, 사과할 건 하나도…"
"아니. 있어. 많아. 그러니 들어."
"……네."
웃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어쩐지 웃음이 나려 했다. '들어줘' 가 아니라 '들어'. 명령조로 말하는 건 히나의 버릇이었다. 하지만 결코 불쾌하지는 않았다. 강압적이지 않았고, 도리어 히나에게 무척 어울렸다. 그런 생각은 조금도 모르고, 히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 날, 너한테 너무, 심한 말을 했어.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지만 널 상처 입히고 울리기까지 했어. 그리고 요 근래에도, 갑자기 연락두절하고 잠적해버려서, 혹시 그게 전부 네 탓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면, 사과할게. 전부,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용서해달라고는 안 해. 그냥, 미안해."
히나는 잠시 힘겨운 한숨처럼 호흡을 터뜨리곤 다시 말을 이었다.
"계속, 계속 고민했어.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 그치만 아직도 모르겠어. …전부 내가 무서워서 그랬어. 네가 나로 인해 상처 입게 될까봐. 나 때문에 나를 떠나게 될까봐. 다른 사람들처럼 나를 보게 되는 날이 오면 어떡하나."
"그런, 히나, 나는."
"안 그럴 거야. 알아. 사쿠야는 바보같이 착하니까. 그치만 세상은 안 그래. 솔직히, 사쿠야도 신경 썼잖아. 밖에서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날 쳐다보고, 뭐라고 이야기하고, 아무리 둔해도 모른 척 할 수 없잖아."
사람은 믿을 수 없다. 세상은 결코 누구에게도 상냥하지 못하다. 그걸 일찍이 깨우쳤기에 길을 잃었다. 히나는 입을 다물었다. 꾹, 꾹, 버릇대로 주먹을 쥐어 손바닥을 손톱으로 눌렀다. 긴장을 하거나 불안정할 때마다 남몰래 하는 행동이었다.
사쿠야는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듣고만 있다가, 이내 부드럽게 미소를 띄웠다. 히나는 강했다. 그렇지만 의외로 겁이 많았다. 귀신을 무서워하고, 캄캄한 것도 싫어하고, …아니, 이런 데선 상냥하기 때문이라고 하는 게 맞는 걸까? 결국 히나는, 그를 걱정해서, 그녀 자신 때문에 다치는 일이 없게 하려고 그런 거였으니까.
"히나는 널 너무 많이 아끼고 있는 것 뿐이야.“
이타루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 말 그대로였다. 히나는 저를 지키려고 도리어 멀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사쿠야에게는 반대였다. 히나가 없었다면, 분명 그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라고 확신할 수도 있었다. 히나가 있었기에, 어떻게든 그곳에서 버텨낼 수 있었고, 무대에도 계속 설 수 있었다.
"…히나, 나는, 히나가 있으면 아무 것도 무섭지 않을 것 같아."
"……."
"줄곧 그랬거든. 내가 힘들고 고민에 싸여서 길을 잃을 것만 같을 때마다, 사랑받지 못하고 외롭기만 하던 그 시절에도. 히나가 있어서 힘을 낼 수 있었어. 용기를 내어 한 발 더 디뎌볼 수 있었어."
또르륵, 물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눈가에 열이 오르며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히나는 꽉 막힌 목구멍에 들어찬 울음을 억지로 눌러 참으며 사쿠야를 올려다보았다.
"히나는, 처음 그대로야. 나, 히나를 처음 봤을 때, 천사가 내려와있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걸까, 했어."
"…뭐, 뭐야, 그게?!"
"아하하, 몰라. 그치만 사실이야! 그러니까, …히나는 지금도 내 천사님이고, 동경하는 공주님이야."
「여기서 나가는 길 좀 가르쳐 줄래?」 앨리스가 말했다.
"싫은 거짓말은 하지 않아도 돼."
「그건 네가 어디로 가고 싶은가에 달렸지.」 체셔 고양이가 대답했다.
"나는 여전히, 네 옆이 좋아."
"――!"
어렸던 그 날의 햇살이 스민 환한 웃음이 플래시백이 터진 듯 겹쳐졌다.
쏟아질 것 같은 별빛이 총총히 박힌 밤하늘을 천장에 두고, 바람을 타고서 벚꽃잎이 눈처럼 흩날렸다. 하늘의 별이 꽃잎이 되어 내리는 것 같기도 했다. 소녀는 손을 내밀어 온 소년의 품에 와락, 뛰어들었다.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한 소녀를, 소년은 당황하면서도 이내 따스히 감싸 안고 달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 때도 울었었지. 몇 번을 친해지고 싶다고, 친구가 되자고 다가가는 그를 한사코 날카롭게 밀어내던 어린 날의 히나에게, "내가 싫어?" 라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히나는 너처럼 착하기만 한 애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대답했었다. 그런데 어쩐지 그게, 그것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했던 모진 말들도 전부 다, 진심이 아니라 거짓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다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네 옆이 좋다고. 그러자, 히나는 울음을 터뜨렸었다.
생각해보면 아직 어렸기 때문에 히나의 거짓말이 서툴러서, 둔한 자신이라도 알아챌 수 있었던 건 아닐까, 한다. 일찍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친척집을 전전하며, 사랑받지 못하고 외로이 남겨지는 것이 얼마나 슬프고 힘든 일인지 잘 알았기에. 늘 괴물이라 놀림 받으며 혼자 있던 히나를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그 때는 단순히 그런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고 손을 내밀 수 있었던 이유는…….
"히나. 나, 너를 정말 좋아해."
……그 아이에게, 사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히나가 너무 우는 바람에, 사쿠야는 밖에 더 있지 못하고 히나를 데리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이즈미와 봄조 단원들에게 조금만 있다가 가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난 사쿠야는 모두가 떠난 분장실에 히나를 앉혀놓고, 그녀가 진정이 될 때까지 달래고 있었다.
한참을 울고 난 뒤에, 히나는 훌쩍이며 사쿠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그의 한 손을 두 손으로 꼭 붙잡고 있었다. 사쿠야는 새삼스레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누르고 있었다.
"…저기, 히나? 계속 이렇…게…만 있을 거야?"
"응."
"……그, 저기."
"싫어?"
"아, 아니! 아니! 전혀! 전혀 안 싫어! 좋아!"
"……풋."
아, 웃었다. 당황해서 붉어졌던 얼굴에 포스스 안도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괜찮아? 어지럽지 않아?"
"괜찮아."
"…있지.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히나, 밥은 잘 먹었어? 잠은 잘 잤고? 전보다 더 마른 것 같아."
"잔소리할 거면 싫어."
"으음……. 그치만, 계속 걱정했단 말야."
"……솔직하게 말해?"
"응. 부탁이야."
이게 뭐라고 부탁씩이나. 귀여워.
힐끔 올려다보니 꽤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히나는 피식피식 흘러나오는 웃음을 삼키고, 꼭 붙잡고 있던 사쿠야에 손에 깍지를 꼈다.
"사실은, 잘 못 먹었어. 잠을 잘 못 자니까 속이 뒤집어져서, 뭘 먹을 수가 없었어."
"왜 못 잤는데? 생각이 많아서?"
"……그것도 있고."
"그리고?"
"……."
"아, 말해주기 싫으면 안 해도,"
"사쿠야."
이름이 불리자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왜? 하고 되물으니 히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사쿠야의 손을 꼭 잡고 자그맣게 말했다.
"…우리, 이제 사귀는 거 맞지."
"――."
사쿠야는 얼굴에 불이 붙은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화다닥 열이 올랐다. 새빨개진 얼굴로 당장 뭐라 대답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당황감과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대답이 없자, 히나가 잡은 손에 콱 힘을 주었다.
"맞아, 아니야!"
"마, 마맞, 맞, 맞아…!!"
"……그래, 그러면 내가 준 목걸이, 지금 해."
"어, 어, 어???"
"빨리!"
재촉하는 말에 더듬더듬 대답한 사쿠야는 아직도 다른 손에 쥐고 있던 목걸이를 얼른 목에 걸었다.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히나는 이제 됐지? 하고 어색하게 웃는 사쿠야를 보고서야 꾹 다물고 있던 입술 사이로 길게 숨을 내뱉었다.
"나, 스트레스 받으면 잠이 안 와."
"…어?"
"……중학교 때부터 그랬어. 조금 신경 많이 쓰고 스트레스 받으면 불면증이 와서, 며칠 잠을 못 자."
"……어디 아픈 건, 아니고?"
"그런 건 아니야. 그냥, 내가 예민해서 그래."
아직, 아니 어쩌면 앞으로도 이야기하지 않을 건 이야기하지 않고 숨긴 채, 계속 그렇게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정도는, 말해 봐도 괜찮을 테다. 괜히 신경 쓰게 만드는 것도 싫고, 괜히 걱정하게 만드는 것도 싫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알게 될 사실이라면 미리 말해두는 게 좋으니까. 예상대로 걱정스럽게 히나를 바라보던 사쿠야는 잠시 눈을 굴렸다.
"……저기, 안아줘도 돼?"
히나는 입술 안쪽을 꾹 물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사쿠야가 팔을 뻗어왔다. 무심코 울며 안겨들었을 때는 아무 생각도 못 했고, 정신이 없기만 했는데, 지금은 그 품이 그저 따스하고, 한없이 다정하기만 했다. 다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혹시 나랑 헤어지고 나서, 힘든 일 많았어?"
"내가 예민해서 그렇다니까."
"반은 거짓말 같아서."
"……왜 꼭 이럴 때만 눈치가 빨라?"
"으음, 미안해…?"
"거긴 사과하는 게 아니지. 바보 사쿠야."
취소. 눈물은 쏙 들어가 버렸다. 아하하, 어색하게 웃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히나는 살짝 붉어진 뺨을 가만히 사쿠야의 품에 기댔다.
"싫은 얘기해야 해서 깊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히나가 그렇다면 더 묻지 않을게. 하지만 이다음에, 혹시 힘든 일이 있어서 잠이 안 올 때면 나한테 얘기해줘. 전화해도 돼. 자고 있었어도 히나 전화는 꼭 받을 테니까."
"치, …그러면 미안하잖아."
"그, ……그래도 나, 히나에게 조금이라도 의지가 되었으면, 하니까."
부끄러움이 가득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사쿠야를, 히나는 고개를 들어 가만히 바라보았다. 문득 눈이 맞았다. 시선이 맞부딪히는 동안, 두 사람 모두 아무 말이 없었다.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데이기라도 한 듯 떨어지고 나니 어색한 공기가 가득 감돌았다.
"……저, 저기, 그만, 가, 갈까?"
"아, …그, 그래. 저기. 나도 집에… 가야 해."
어색한 웃음, 그리고.
"……나갈 때까지 손잡을래."
새침하게 말하며 히나가 먼저 사쿠야의 손을 잡았다. 서로 부끄러움을 감추느라 시선은 다시 맞지 않았지만, 아까보다 더 어둑해진 바깥으로 걸어 나가는 동안 별다른 말이 오가지도 않았지만, 어느새 두 소년소녀의 얼굴에는 행복한 웃음이 피어있었다.
다음 날, 다시 기숙사에 발을 들이기 시작한 히나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유키였다. 미안했다, 정신 차리게 해줘서 고맙다,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으며 사과의 표시 겸 감사의 답례라며 이것저것 떠밀리듯 받고 난 유키는 언제 그렇게 망가진 모습으로 울고불고 난리를 쳤냐는 듯이 그저 헤실 거리고 있는 히나를 어이없게만 쳐다보았다.
"이제 살만 한가 보지?"
"미안하다니까, 정말로."
"…뭐, 잘 해결됐으면 됐고."
"응."
귀여운 아이싱이 그려진 쿠키를 집어 입에 물고는 또 헤헤 웃고 있는 히나를 본 유키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 저런 상태로 얼마나 갈지.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것 같았다. 당장 옆에서 보이는 본보기가 이래서야 어쩐지 사랑에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이제 정식으로 연인 사이가 되었으니 저를 붙잡고 무슨 말을 늘어놓을지도 피곤한 상상이었다.
그래도, 이제껏 답답해 죽을 것 같던 상황은 날아간 결과니 어느 정도는 받아주기로 했다.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기로 결정했다면 무엇보다도 좋은 게 아닌가.
"아, 그러고 보니 너 잠적한 동안 사쿠야 생일 그냥 지나가버렸는데, 뭐 안 해줘도 괜찮아?"
"응? 아―. 괜찮아. 생일 선물 줬어."
"줬어? 헤에, 그래도 준비하고는 있었나 보네."
"그냥, 음, 뭐랄까, 별로 고민할 게 없었달지. 전에 받은 선물의 답례 겸… 오늘부터 1일이라는 기념도… 겸사겸사……?"
"…아, 그래."
그리고선 밀크티를 한 모금 마시고 또, 헤헤 웃었다. 유키는 안정적으로 대놓고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보았다. 아무래도 당분간 이 이상한 상태가 지속될 것 같으니 역시 그리 오래 상대해주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유키."
"왜."
"나, 사쿠야를 정말 많이 좋아해."
당사자한테 말해주지 그래? 유키는 일관적인 반응이었다. 히나는 그러게! 하고 방긋, 웃었다.
행복하게, 봄이 찾아온 자리에 어울리는 환한 웃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