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것은 전쟁 후의 이야기
‘단장님!’
어깨에서 양 갈래로 묶은 연한 하늘색의 머리카락,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녹색의 눈동자가 굉장히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어떤 머리를 하더라도 상관없었고, 어떤 옷을 입어도 상관없었다. 그저 그녀의 웃는 모습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부르는 그 다정한 목소리가 항상 사랑스러웠다. 그런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는 시간은 고통스러웠던 과거와, 힘들었던 하루를 잊게 하는 유일한 원동력이었다.
그녀와 책을 읽으며 조곤조곤 대화를 하는 것도 즐거웠고, 직접 만든 간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행복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그는 항상 다짐을 바로잡았다. 그녀가 모두를 지키기 위한 대적자라면, 그 대적자인 그녀를 내가 지키겠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잃지 않겠다고.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그녀라고.
*
‘… 장님.’
‘… 단장님…’
‘… 단장님!’
“…!”
누군가의 다급한 부름에 이카르트는 눈을 떴다. 익숙한 목소리인 것이, 나이트워커중 한 명이 그를 깨운 것 같았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무슨 일이 있었지…? 흐릿하던 기억 속에서 그는 누군가를 찾아냈다. 유린. 그의 연인. 그녀를 찾기 위해 멋대로(아마 나인하트가 허락을 해주지 않을 가능성이 상당히 컸을 것이다.) 몇몇의 기사들과 함께 이 미궁에 들어왔던 것이 기억이 났다.
미궁 속은 그들이 생각 했던 것보다 더 복잡했고, 몬스터의 수도 꽤나 많았다. 나이트워커의 특성에 맞게 몸을 숨겨 들어오기는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적들이 그들을 정확히 찾아내 공격하기 시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카르트는 단장으로써 단원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미끼가 되어 적을 이끌고 달려 나갔고, 그들을 최대한 처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것에도 한계가 있었는지 그는 집중 공세를 받기 시작했고, 결국은 상처를 입고 몸을 숨긴 채 잠깐 기절을 했던 것 같다.
… 그 새에 단원들이 날 찾은 건가. 꽤 빠르군. 이미 그를 찾은 시점에서 의미 없는 생각을 하고 있던 이카르트는 이내 작게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괜찮으십니까, 단장님? 단원들의 물음에 대충 고개를 끄덕인 그는 주변을 대충 둘러봤다. 그녀는 아직 찾지 못했나? 그의 물음에 단원들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상당히 깊숙이 들어가신 것 같습니다. 저희도 들어온 지 꽤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아요.”
“아니면 저희가 이 미궁 속에서 길을 잃었는지도 모르죠.”
“유린님께서도 그런 상태이신지도 모르겠어요.”
“… 그렇다면 더더욱 이러고 있어서는 안 되겠군.”
“그래도 단장님은 좀 더 쉬시는 게 좋지 않으시겠습니까? 저희는 단장님 덕분에 상처가 거의 없지만….”
“별거 아닌 상처들이다.”
그래. 그녀가 입어 왔던 상처들에 비하면 별거 아니지. 가장 심해보이는 팔에만 챙겨왔던 붕대를 단원들의 도움을 받아 대충 묶었다. 금세 붕대가 붉게 물들었지만, 그는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단원들을 뒤로한 채 천천히 벽에 손을 짚은 채 걸어나갔다. 단원들은 그가 걱정스러운 듯 서로를 둘러봤지만, 이내 이카르트가 더 다치지 않을 상황을 만들지 않으면 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재빠르게 이카르트의 뒤를 따랐다.
*
“… 여긴 아까 왔던 곳인 것 같은데요.”
“여기 제가 남겼던 리본이 묶여 있는걸 보면….”
“… 복잡하게도 해놨군.”
벌써 몇 시간이 지났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는 작게 혀를 찼다. 상급 기사들을 더 데리고 갈까, 싶으면서도 다치면 그녀가 그녀 본인이 다치는 것보다 더 슬퍼할 것을 알기에 피해를 최소화 하도록 일부만 데려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결정을 후회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한치 앞도 알 수 없었다. 미궁은 가면 갈수록 점점 어두워졌고, 길은 복잡해 졌으며, 자신들 이외에는 정신을 잃었던 시그너스와 레지스탕스, 그리고 노바의 병사들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낯설지 않은 것이, 그녀와 함께 들어갔던 이들과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그는 알아차렸다.
그들을 깨워 그녀는 어디 있냐고 묻자, 자신들도 잘 모른다는 답변을 꺼냈다. 너희들이 아니면 누가 알지? 차가운 말을 건네려던 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들을 다그쳐봐야 자신의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에. 그가 낮게 한숨을 쉬자, 멍하니 바라보던 한 시그너스 병사가 말을 건넸다.
“… 저희도 자세한 것은 모르나, 마지막으로 보기 전의 유린님은 어딘가 이상하셨어요.”
“이상했다?”
“네…. 뭐라고 해야 하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이, 벽에 손을 뻗으시거나, 어딘가로 계속 달려가셨는데….”
“… 홀렸다? 이곳의 어디에 홀릴 것이 있었지?”
“저희도 보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안색이 굉장히 창백하셨고…. 그 뒤로는 모두 정신을 잃어서….”
…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벽에 손을 뻗고, 그 뒤로 어딘가로 달려갔다고 하는데 그들은 그녀의 그런 모습만을 봤을 뿐. 안색이 창백했다는 이유도 잘 모르겠다. 그녀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경우는 누군가가 위험에 처했다는 경우인데, 그 누군가들은 여기에 기절한 듯 잠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대체 무엇을 봤다는 것인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느껴졌다는 말도 어딘가 신경 쓰였다. 마치, 그녀만이 환각을 봤다는 것처럼….
“… 환각인가.”
검은 마법사와의 전투 중에 거쳐 가는 곳이었다. 그런 일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거기다 그도 보지 않았던가. 영웅 팬텀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시기, 모습을 바꾸고 자신들을 속이려 했던 군단장. 그녀가 있지 않았던가. 그는 이것만으로도 대충 그녀가 봤을 환각을 유추해 냈다. 그러고는 자신과 함께 온 단원들을 보며 병사들을 데리고 나가라고 명령했다.
“… 예? 저희가 나간다면 단장님은요?”
“나는 그녀를 구하러 간다.”
“… 안됩니다! 단장님 혼자서는 위험해요!”
부상도 입으셨잖아요! 그제야 단원들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이카르트를 말렸으나, 이카르트는 이미 결단을 내린 듯 그들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명령을 어기고 이카르트를 따라온 것만으로도 이미 징계감인데, 이카르트까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들의 얼굴이 창백해 졌다. 그걸 이카르트가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그는 덤덤하게 입을 열 뿐이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그러니 빠져나가 나인하트에게 전하도록.”
“… 단장님….”
“… 만약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그녀의 곁에서 함께 있는 게 나을 테니까.”
사실 이카르트가 제일 후회했던 것은, 기사단장이라는 자리 때문에 그녀와 함께 가지 못했던 자신이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린 단원들은 더 이상 그를 말리지 못했다. … 부디 두 분 다 무사히 돌아오셔야 합니다. 그들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찾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유린?”
한참 미궁을 헤매던 이카르트는 그녀를 찾아냈는지 빠르게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녀의 에메랄드빛의 눈동자에선 눈물이 가득 흘러내리고 있었다. 린을 꽤 오래 봐왔지만, 그렇게 우는 린을 처음 본 이카르트는 놀라 그녀에게 다가갔다.
“린. 유린. 왜, 왜 울지?”
“… 단장님? 이카르트님…?”
“그래.”
“… 윽, 다, 단장님이, 왜, 여기에…”
“그대가 걱정돼서 찾아왔다. 당연하잖나.”
“… 그렇지만… 단장님은 화이트 스피어에….”
“다른 단장들이 있잖나.”
“….”
그녀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단지 그녀를 끌어안은 그의 품에 몸을 기대왔을 뿐이다. 그러나 조금은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 이렇게 기대오는 걸 보면 그래도, 조금쯤은 안정이 된 걸까. 그는 아직까지도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아무 말 없이 다정하게 도닥일 뿐이었다.
*
그렇게 한참을 울던 그녀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는 이카르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그는 모든 병사들이 무사하며, 지금쯤 무사히 탈출했을 거라는 이카르트의 말에 겨우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이런 다정한 면은 그에게 가끔은 독이 된다는 걸 그녀는 모르는 걸까. 지금이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상황을 모르는 질투는 가끔 이렇게 판단을 흐트러지게 만든다. 어둡고, 질척이는. 그런 감정을….
이카르트의 생각이 조금 더 이어지려던 찰나, 린은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표정은 이제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비장하기까지 해서, 그는 그녀가 어디를 가려는지 알아차렸다.
“… 바로, 가는 건가.”
“네. 이건 대적자로서, 제가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그렇다면 함께….”
“아뇨, 이젠 괜찮아요.”
저는 단장님이 무사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엷은 미소에 그는 입을 뗐으나, 말로는 나오지 않았다. 왜 모든 것을 짊어지는 것이 그녀여야 하는가. 자신이 기사단장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자신이 단장이 아닌 평범한 단원이였다면. 그랬다면 그녀의 곁에 함께 있을 수 있었을 텐데. 그녀가 등을 맞댈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었을 텐데. 그녀만은…, 스승님처럼 잃지 않을 수 있을 텐데. 불안감에 한참을 미궁을 헤맸고, 안도감에 그녀의 손을 잡았으며, 이제 다시 불안감을 느끼며 그녀를 가장 강한 적에게 보내줄 수밖에 없는 그를. 차라리 죽음까지 함께 해달라고 하면 기쁘게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바라는 것은 그 것이 아니었다.
“괜찮아요. 꼭 돌아갈 거예요. 단장님의 곁으로. 지금도 그렇고, 또 언제나 그랬듯이.”
“ … 그래. 언제나 그랬듯이.”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그녀를 막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 이걸, 가지고 가라.”
“이건…?”
“… 원래 전쟁이 끝나면 주려고 했던 것이지만. 혹시라도 힘들면 이 걸 보고 날 떠올려 줬으면 좋겠다.”
그 것은 반지였다. 백금색의 빛이 영롱하게 반짝이는. ‘이게 뭐에요…?’ 라는 의문이 가득 담긴 얼굴에 그는 낮게 웃으며 반지를 그녀의 오른손 약지에 끼워주었다. 그러는 그의 같은 손가락에도 크기만이 다른 반지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 감정을 어떻게든 전하고 싶었지.”
“이 전쟁이 끝나면 나와, 약혼을 해주지 않겠나?”
“… 약, 혼이요…?”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 모습에 어울리지도 않게 그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드리웠다.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이 시작하기 전에 줄까도 생각했지만, 그러기엔 상황이 너무 여의치 않았지. 나는 나대로 기사단장으로서, 그대는 그대대로 대적자로서의 일이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지금은 이렇게 단 둘이니까.”
“… 단장님.”
“둘 다 무사히 돌아온다면, 그 때는 영원히 함께 있고 싶다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녀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아까처럼 슬프고 괴로워서가 아닌, 감동과 애정의 눈물이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살살 문질렀다. 마치 허락을 구하듯이. 그녀는 그 것을 알아차리고 밝게 웃었다.
“네…. 좋아요. 하고 싶어요.”
“그대의 의견을 들으니 기분이 좋군.”
그들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웃었다.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떨어지지 않겠다는 의미. 둘은 그것을 알고 있기에, 그녀가 떠나기 전까지 서로에게 온기를 나눠줄 뿐이었다.
*
“….”
그는 멍하니 그녀가 사라진 곳을 응시했다. 평소 당황하는 일이 거의 없던 이카르트였으나, 그녀가 관련된 일이면 예민해 지고는 했다. 그리고 지금 역시도.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에르다가 되어 버린 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던 충격이었다.
검은 마법사를 쓰러뜨리고 돌아온 그녀를 맞이하려고 했다. 마지막 전투를 위해 함께 들어온 다른 이들 역시 마음 한 구석에는 돌아오는 가족을 위한 반가움이 서려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의 감정을 모두 부수기라도 하듯 흔적조차 없었다. 그가 앓는 소리를 내자 호크아이가 다가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진정이라도 하라는 걸까. 그러나 그는 최고로 진정된 상태였다. 그보다는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다는 상태에 가깝다고나 해야 할까. 머리가 비워지자 드는 생각은 오로지 그녀가 제 앞에서 사라졌다는 생각뿐이라서. 그래서 답지 않게 살짝 눈물이 맺혔다.
“… 이카르트, 울어?”
“… 울지 않는다. 그저….”
그저 마음이 뻥 뚫린 것처럼 공허해졌을 뿐이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심장이 고통스러워서 아팠다. 유린. 난생 처음으로 이렇게 평생 함께 하고 싶었던 사람. 그런 사람이 사라진 자리는 지켜보는 것조차 괴로웠다. 그녀를 따라가지 못한 자신을, 그는 또 후회하고 있었다.
*
“….”
“… 저어, 단장님?”
“….”
“… 놓아 주세요….”
“싫다.”
“… 단장니임….”
저 일하는 중이에요…! 그녀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자신을 꼭 끌어안고 있는 이카르트를 떼어놓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녀가 그를 힘으로 떼어놓을 수가 없으니 결국은 그의 품에서 얌전히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그는 서류를 보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거나 어깨에 그의 고개를 기대거나 하면서 그녀가 살아있음을 느끼려 애썼다.
*
그녀가 사라지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때였을까, 갑자기 검은 마법사의 공격으로 사라졌던 병사들이 하나둘 돌아오기 시작했다. 슬픔에 차있던 연합원들 역시 살아 돌아온 동료들을 울며 웃으며 그들을 끌어안았다. 이카르트는 돌아온 병사들을 잠깐 지켜보더니, 이내 그들 사이를 빠르게 살폈다. 혹시, 혹시나. 그녀도 돌아오지 않았을까 싶어서.
그리고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돌아온 이들 사이에 멍하니 서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온통 까만 하늘 아래에서 흩날리는 그녀의 하늘빛 머리카락과 조금 멍해 보이는 녹색의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빛이 났다. 그는 그것을 보는 순간 숨이 막혀 와서 그대로 행동을 멈췄다.
그녀는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그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그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멍해보이던 표정 또한 환하게 밝아졌다. 단장님! 그녀가 웃으며 그에게로 빠르게 달려갔다.
“단장님!”
“… 유린.”
그는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본 순간부터 살짝 팔을 벌렸다. 그리고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분명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둘에게는 이 시간이 가장 길게 느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였다. 서로가 서로의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봤을 때의 그 감정은, 말로 설명하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았지만, 그런 것은 이 순간만큼은 상관이 없었다. 오로지 두 사람만이 서로에게 보이고, 서로의 목소리만이 서로에게 들렸다.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그렇게.
*
“그래서, 두 분이 약혼을 하신단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만.”
“… 언젠간 그 말을 하실 거라고 생각은 했습니다만, 생각보다 빠르군요.”
“… 이번 일을 겪고 나니, 어쩐지 더는 견딜 수가 없어지더군.”
“그랬었죠. … 뭐, 그녀가 허락한다면 상관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녀가 당신의 말을 거절할 리가 없겠지만요. 그렇지 않습니까? 작게 한숨을 내쉰 이카르트는 나인하트의 말에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오래 지켜봐온 두 사람이었다. 그녀가 10대 중반, 그녀가 시그너스 기사단에 들어왔을 때부터. 나인하트나 시그너스의 말은 물론 거부할 수 없었겠지만, 그녀는 유독 이카르트의 말에 약해지곤 했다. 그러니 알아차리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 그 때에는 이카르트도 나인하트도, 심지어 그녀도 이카르트가 이렇게 그녀에게 간절해질 거라곤 누구도 생각 못했겠지. 이카르트는 가면 너머로 입가로만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나인하트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쨌든 알겠습니다. 여제님께도 말씀 드리도록 하죠. 약혼식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 그냥 둘이서 가볍게 하려고 한다만.”
“이카르트, 당신답군요.”
“린도 사실은 조금 더 조용한 걸 좋아하는 편이니까.”
“그건 좀 의외로군요. 언제나 다른 사이에 둘러싸여 계시기에, 좀 더 시끄러운 걸 선호하시는 줄 알았습니다만.”
“나도 가까이에 있지 않았더라면 아마 더 오래 몰랐을 거다.”
그러시겠죠. 태연하게 대답한 나인하트가 얄미워 노려보던 이카르트는, 이내 다음 말을 꺼냈다.
“아, 그리고. 그 전에 둘이서 며칠간 여행을 다녀올까 하는데. 그 것도 괜찮겠나?”
“… 음. 그건 좀 애매하군요. 한창 전쟁 뒤처리로 다들 바쁘니 말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마치고 갈 거다. 아니라면 그녀가 더 반대를 할 것 같아서 말이지.”
“그녀의 성실함은 알아주는 편이죠. 모든 기사들의 귀감으로 삼고 싶을 정돕니다.”
“… 귀감으로 삼는다고 해서 모두 따라할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알고 있습니다. 단지 조금만이라도 본받아줬으면 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죠.”
“… 누군지 대충은 알 것 같군.”
“뭐, 이것도 알겠습니다. 뒤처리가 끝나면 두 분께 휴가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다.”
이카르트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인하트의 집무실을 나섰다. 나인하트는 이카르트와 린이 작성한 서류들을 바라보았다. 이 두 사람이라면 한 번쯤 휴가를 보내줘도 괜찮겠지. 그는 천천히 이카르트가 제출한 휴가 신청에 손을 뻗었다.
*
“약혼?! 약혼이라고?!
“응, 나 곧 단장님이랑 약혼해.”
“….”
뜨억. 남자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바뀌었다. 안색이 창백해 졌다가, 붉어졌다가. 그 모습을 본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 왜 그래? 어차피 할 거라는 걸 몰랐던 건 아니잖아.”
“물론, 물론 알고 있었지만.”
이윽고 남자의 검은 눈동자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혔다. 처음엔 저 렌즈가 어색하기만 했는데, 지금은 너무나도 익숙해져서 원래 검은색인 것 같았다. 그래도 저와 같은 색일 때가 더 좋았는데. 쓸 데 없는 생각을 하던 그녀는 쏟아질 것처럼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라며 손수건을 건넸다.
“… 그래도, 난 내 동생을 이렇게나 일찍 보내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지.”
“결혼을 하는 것도 아닌걸.”
“그렇지만…. … 결혼은 조금 더 천천히 하자.”
그는 결국 그녀를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동생이 10년 전부터 줄곧 사랑해 오던 남자였다. 그런 남자를 오랫동안 상처 줬다고 마냥 미워하기만 할 수도 없었다. 그걸 알고 있었다. … 그래도 역시 이렇게 홀랑 데려가 버리는 건 너무하지 않나? 아직 동생은 23살인데. 나도 좀 더 동생 곁에 있고 싶은데! 누가 들으면 엄청난 시스터 콤플렉스라고 질린 표정을 지었겠지만, 힘든 과거를 함께 견뎌와서인지, 그는 유독 자신의 동생을 제 품에서 놓지 않으려고 하는 성향이 있었다. 물론, 그걸 모르는 린이 아니었으니. 그녀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게 웃었다.
“그래, 그럴게. 조금 더 오빠 곁에 있을게.”
“… 응. 약속.”
“약속.”
그녀는 그의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걸었다. 린 역시 가장 힘들었을 때 자신을 지켜준 제 오빠의 곁에 조금 더 있고 싶었다. 이카르트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사랑하는 상대. 그런 오빠를 보내고 싶지 않은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기에.
*
“… 와아! 너무 예뻐요!”
“… 그런가. 그대의 마음에 드는 것 같아서 다행이군.”
“정말 마음에 들어요! 데려와 주셔서 감사해요!”
전쟁의 뒤처리가 끝나기도 전에 이카르트와 린은 나인하트와 시그너스의 승인 받아 데이트를 나오는 데 성공했다. 첫 번째 장소는 (피렌체를 제외한) 나이트워커들의 조언을 받아 정했던 아쿠아리움. 공깃방울을 쓴 그녀는 많은 물고기들과 물개들이 돌아다니는 곳을 보며 린은 눈을 반짝였다. 어지간히 신기한 눈치라며 작게 웃던 그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대는 수영을 잘 못한다고 들어서 말이지.”
“… 음, 네. 잘 못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냥 맥주병이죠.”
“그 정도인가. 그래서 아쿠아리움이나 리에나 해협 쪽으로는 가지 않으려고 했었군.”
“그렇죠. 책사님께서도 그걸 아시고는 보내지 않으려고 하시더라고요.”
“단원을 익사시키고 싶지 않다면 그렇게 해야지.”
조금은 신랄한 말이었지만, 그녀는 웃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 순간 그들의 눈앞으로 무언가가 지나갔다. 그건 커다란 돌고래였다. 아름답고도 멋진 그 모습에 린이 아까보다도 더욱 눈을 반짝였다. 그는 그 모습에 이제는 소리 내어서 웃어보였다.
그는 이전부터 그녀의 이런 밝고 명랑한 미소를 짓는 것을 꽤 좋아했다. 자신이 짓지 못하는 표정이기도 하지만, 자신만큼은 아니어도 꽤 차가워 보이는 얼굴이 이런 미소를 지을 때면 얼음이 녹아내릴 만큼 따뜻해졌기 때문이다. 이 표정은 그에게만 지어보이는 것이기도 하고. 그는 지금 이 표정을 조금 더 짓게 하고 싶었다.
“조금 더 구경하고 싶다면 따라와라. 나도 완벽하게 아는 건 아니지만, 아쿠아리움에는 꽤 구경할 곳이 많다고 들었다.”
“네, 좋아요!”
“… 그리고, 돌고래 버스도 운행하고 있다고 하니, 그 것을 타고 무릉에 가도 좋겠군. 그대가 돌고래를 꽤 흥미로워 하는 것 같으니.”
“그 것도 좋아요!”
‘단장님과 함께라면 무엇이라도 좋아요.’
‘나도 그렇다.’
연인은 마주 웃으며 작게 밀담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이카르트가 이끄는 손길에 따라 그녀도 힘껏 발장구 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참이나 아쿠아리움을 구경했다. 이카르트를 따라 심해로 들어갔다가 피아누스에게 걸려 당황하기도 하고, 심해어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기도 하고, 오르비스 탑으로 올라가는 곳에서 펭귄들을 보기도 하고…. 가는 곳마다 즐거웠는지 그녀는 계속해서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같이 보고 있음이 분명한데도 그를 끌어당기는 그녀가 그의 눈엔 상당히 귀여웠다. 물론 그의 눈에는 그 어떤 모습도 사랑스러웠지만, 그 사실은 그녀에겐 영원히 비밀일 것이다.
*
그들은 하루를 아쿠아리움에서 보내고, 돌고래 버스를 타고 무릉으로 가서 쉬기로 했다. 아쿠아리움은 관광지로는 좋지만, 무릉만큼의 편의 시설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쳐있을 린을 너무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는 그녀를 위해 온천까지 딸린 가장 좋은 숙소를 마련했다. 마침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뒤처리 때문인지, 여행객이 적어서 손님이 많이 없었다. 그는 그 점이 너무 좋았다.
그녀는 배정해준 숙소에 들어와 바로 침대에 누웠고, 그는 침대의 끄트머리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침대가 크고 푹신푹신해서 좋았는지 그녀는 잠시 이리 저리 굴러다니다가, 그를 마주보며 웃었다. … 단 둘이 오길 잘했군. 그는 작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았다.
“… 가끔은 너무 집착하는 게 아닌가 싶긴 하지만.”
“네? 뭐라고 하셨나요?”
“아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숙소도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
“물론이죠! 단장님이 신경 써서 마련하신 곳이잖아요!”
“… 그렇게 말해주니 공을 들인 보람이 있군.”
“감사합니다!”
“이 정도는 별 것 아니다.”
그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자, 그녀는 배시시 미소 지어 보였다. 아, 이건 좀 무방비 한 것 아닌가. 밖에서 단 둘이 있으면 모를까, 이곳은 단 둘뿐인 실내 공간이다. 그런 곳에서 이런 미소라니. … 귀여워서, 입술에 입이라도 맞추고 싶은 심정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놀라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는 머릿속에서 그 생각을 지워버리고는 그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이내 그를 마주 안았다. 그러자 그는 그녀의 품으로 더 안겨들었다. 그녀는 다시 웃으며 그를 조금 더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단장님도 많이 힘드셨나 봐요.”
“물론 힘들었다. 최근에 임무와 서류가 거의 끊이질 않았으니까.”
“그랬죠. 그래서 휴가를 가자고 하셨을 때, 사실 그저 숙소에서 쉬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 물론 그 것도 좋지만, 그래도 그대가 조금 더 많은 것을 보고 행복해 졌으면 했다.”
“정말 다정하시네요.”
“… 그건 모두 그대 한정이다. 미안했던 만큼 잘해주고 싶으니까.”
“… 단장님.”
그가 이렇게 다정한 것은 그녀 한정이었다. 그는 그 일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상처 줬던 만큼, 그 이상으로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렇게 대해주고 싶었다.
*
과거의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었고, 소중한 사람은 오로지 그의 스승님 단 한 분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전에 그녀에게 상처를 많이 주고는 했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미안한 일 뿐이었다. 경멸은 하지 않아도 무시했고, 차가운 말로 상처를 주고. 자신과 사귄다고 했을 때 그녀의 오빠가 보인 행동을 그는 이해하고, 그에게 사과까지 건넸었다. 린은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지만, 그는 그녀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은 만큼 그녀의 단 하나 남은 가족에게도 밉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그녀의 오빠는 린을 행복하게 하해주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말을 건네기는 했다. 단장에게 하는 말로는 꽤 당돌한 말이었으나, 하는 오라비나 듣는 이카르트나 당연하다고 생각한 듯 했다. 곤란한 표정을 한 것은 그녀뿐이었다. 그녀의 그런 표정을 본 두 사람은 이전 상황도 잊고 소리 내어 웃었었다. 그녀는 놀리는 거예요? 하고 입술을 비죽였으나, 그런 모습도 귀여웠기에, 둘은 동시에 그녀를 끌어안았었다.
*
…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조금 괘씸한 것 같다. 은근히 무시당했던 것 같은데. 그가 인상을 살짝 찌푸리자, 그녀는 많이 피곤해요? 하고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가 고개를 살짝 저었지만, 그의 표정이 그래도 풀리지 않자, 오늘은 일찍 쉴까요? 하는 그녀의 말이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지금 같은 침대에 누워 있잖아? 이대로 같이 잠들면 좋지 않을까.’
문득 들었던 불쾌함이 사라지고, 그녀와의 휴식이라는 생각만이 남아 있었다. 나쁜 생각 보다는 좋은 생각이 낫군. 그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은 이렇게 함께 잠들어도 되겠나?”
“…? 물론이죠. 당연한 걸 왜 물어보세요.”
‘그렇다면 얼마든지.’
그는 당연하다는 말하듯 그녀의 품에서 살짝 눈을 감았다. 따뜻하고, 또 그녀 특유의 달콤한 향기가 그를 어쩐지 나른하게 만들었다. 린이 말하기 전까지는 잠에 대한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는데, 그의 말대로 조금 피곤하기는 했던 모양이다. 그녀와 조금 더 대화 하지 못하는 점은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도 그녀는 이렇게 곁에 있어줄 테니까. 그가 느릿하게 눈을 감자,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그를 재우려는 듯 낮게 허밍소리를 냈다. 그 나지막한 소리를 들으며 그는 먼저 천천히 잠에 들었다.
*
다음날 아침이 밝아왔다. 린은 평소처럼 일찍 눈을 떠 멍하니 이카르트를 바라보았다.
‘굉장히 잘 생기셨는데, 의외로 주무실 때는 어린아이 같단 말이지.’
천천히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그의 뺨을 살살 쓰다듬어봤다. 그는 그녀의 손길이 기분 좋았는지 작게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었다.
‘귀여워….’
그녀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답지 않게 우물거리는 입도 귀여웠고, 자신에게 기대오는 것도 귀여웠고, 자신을 더 세게 끌어안아 오는 손길도 너무 좋았다. 어떻게 이런 멋진 남자가 자기 연인이 됐지 싶었다. 사실 아직까지도 믿기지 않았다. 이렇게 멋지고 사랑스러운 단장님이 자신의 연인이 되었다는 것이. 몇 년간의 짝사랑이 꿈같을 정도로 행복했던 탓이었다. 그래, 그녀는 행복했다. 그 행복이 무너지지 않을까 했던 날도 많이 있었다. 사람은 행복할수록 앞으로 올 불행을 걱정하는 존재이니까.
그런데 이제는 그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에게서 받은 손가락의 반지를 볼 때마다 부정적인 생각이 싹 날아가고는 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과 그의 오른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보았다. 누군가 봤으면 신혼부부처럼 보이지 않을까? 장난스럽게 웃던 그녀는 그제야 살짝 눈을 뜬 이카르트를 바라보았다. 이카르트는 들켰군. 하면서 작게 웃고는 그녀의 입술 위에 살짝 입을 맞췄다.
“좋은 아침이다, 그대.”
“네. 좋은 아침이에요, 단장님.”
두 사람은 마주본 채로 웃었다. 그들의 인사처럼 좋은 아침이었다.
*
“오늘은 어딜 가보고 싶지?”
“… 글쎄요. 이 근처에 백초마을이 있으니 그 곳에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백초마을이라. 좋군. 경치도 예쁘고, 뭣보다 몸에 좋은 약재들을 많이 구할 수 있다고 하더군.”
“맞아요. 그 약재들을 함께 구하러 가는 것도 좋은 여행이 될 것 같았어요.”
“물론이다. 그대와 나의 건강 회복에도 좋을 것 같고 말이지.”
“건강은 중요하죠.”
직원이 챙겨준 아침식사를 챙기며 먹으며 그들은 짧게 대화를 나누었다. 약재들을 구해 약을 해먹는 것이 원기 회복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 김에 전쟁으로 지친 기사단원들에게 도움도 주고. 물론 이 의견은 린의 의견이 100%였다. 그 의견이 아니었더라면 그 약재들은 전부 린의 입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대는 너무 착해서 탈이다.”
그가 입술을 살짝 비죽이면서 말하자, 그녀는 작게 웃었다.
“그래서 더 좋아하시잖아요?”
“그대는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군.”
“단장님이 저에 대해 더 많은걸 알고 계시잖아요?”
“그 말이 맞긴 하다만, 그래도 너무 많이 알아버리면 조금 아쉽기는 하다. 조금 더 알려주고 싶고, 조금 더 해주고 싶은 게 많은데 그게 필요 없게 되어버리는 것 같거든.”
“… 쓸 데 없는 걱정이네요. 알아도 더 알고 싶고,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걸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이번에는 그가 작게 웃어보였다. 붉어진 얼굴을 어쩐지 쓰다듬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침식사를 먹고 나면 꼭 실행해야지. 그는 그렇게 다짐하며 샐러드를 포크로 집어 제 입가로 가져갔다.
*
“도라지도 있고…, 산삼도 있고…. 꽤 많이 있는 것 같군. 그러나 이 약재들은 장인한테 맡기지 않으면 안 되겠어.”
“그렇죠. 우리들끼리 하면 이 약재들이 모두 망가져버릴 지도 몰라요.”
“망가지진 않아도 약재의 효능을 최대로 살리는 게 좋기도 하고.”
“맞아요.”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도라지를 집어 들었다. 사실 이런 약재들을 그냥 먹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최근 몸이 많이 지쳐서인지 굉장히 하나쯤은 먹어도 되지 않을까 싶어졌다. 그 것을 알아차렸는지 그는 물병을 건넸다. 물로 씻어서 먹으라는 의미인걸까.
“감사해요. … 역시 단장님은 준비성이 좋으시네요. 저는 생각도 못했는데.”
“… 내가 하나 먹으려고 가져왔을 뿐이다. 감사 인사는 필요 없으니 먹도록.”
“네에-.”
그녀는 도라지를 그가 건넨 물병을 열고 도라지를 깨끗하게 씻었다. 그리고 입에 냠, 하고 넣었다.
“… 쓰다.”
“…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쓴 법이다, 그대. 기왕 먹기 시작한 거니 하나는 다 먹는 게 좋을 것 같군.”
“… 알고는 있어요. 사실 음식을 가리는 편은 아니니 이 정도는 괜찮지만, 그래도 좀 단 맛이 나면 좋을 텐데.”
“만들 약들은 그렇게 만들어 달라고 하도록 해보지.”
으엑. 그녀의 얼굴이 있는 대로 찌푸려졌다.
‘저런 표정 하는 걸 보는 건 처음인데.’
음식을 가리지 않는 그녀답게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도 도라지 한 개를 모두 먹어 치웠지만, 다시는 이렇게 먹지 않으리라는 다짐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자신도 하나 먹어볼까. 그가 도라지 뿌리를 바라보자, 그녀가 말없이 다시 물병을 건넸다. 그 역시도 아까 그녀가 했던 것처럼 도라지를 씻어서 입에 물었다.
“… 확실히 조금 쓰기는 하군.”
“그렇죠? … 진짜 좋은 약재라더니, 입에 많이 쓴가 봐요.”
“… 그래도 못 먹을 정도는 아니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군.”
“… 그거야 인정하는 바이지만요.”
약은 꼭 조금 달게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어요. 도라지를 노려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며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입에는 몰라도, 그녀의 입에는 좋고 맛있는 것만 먹여주고 싶었다.
‘… 아, 이 생각을 들으면 굉장히 팔불출이라고 하겠군. 특히 피렌체나 호크아이놈이 말이야.’
자신이 팔불출 같다는 점을 인지할 정도라면, 그 두 사람의 눈에는 필히 그렇게 보일 정도였다. 물론 자신이 그녀에게 팔불출이라는 말을 부정할 생각은 없긴 하지만, 그래도 그 둘에게서 듣는 것만은 굉장히 억울했기 때문에, 절대로 그 둘에게는 말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도의진.”
“… 어이쿠, 기사단장님과 대적자님 아니신가.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나?”
“약 제조 때문에 왔다. 뻔한 것 아닌가.”
“당연한 거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말을 해주고 왔으면 미리 준비를 해뒀을 텐데.”
“괜찮다. 천천히 해도 되는 일이거든.”
“기사단장님 입에서 천천히 라는 말이 나오다니 내일은 태양이 서쪽에서 뜨나?”
“… 조용히 하고 약재나 받아라.”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약재가 가득 들어있는 주머니를 도의진에게 건넸다. 도의진은 안경을 올리며 주머니를 열었다.
“어이고, 많이도 가져오셨네. 한동안은 더 가져올 것도 없겠어.”
“… 그 정도로 많이 가져온 건 아니다. 아직 많이 남아 있기도 했고 말이지.”
“어휴, 농담도 못하겠네.”
도의진은 씨익 웃으며 주머니와 그보다 이 전에 건넨 메소들을 잘 챙겼다. 영 못미더운 사내지만, 약만큼은 잘 만드니 어쩔 수 없지. 그러고는 만들어야 할 약 목록을 확인했다.
“기력을 회복하는 약, 상처를 치료하는 약, 그리고… 수면제. 이렇게만 만들어 드리면 되는 건가?”
“그래.”
“… 흠. 대적자님이 많이 사랑받으시나 보군.”
이카르트의 옆에 조용히 서 있다가 갑자기 불려서 당황한 린이 놀란 얼굴을 했다. 그녀의 귀가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리고 기사단장님은 귀여운 애인을 두셨고 말이지.”
“조용히 해라.”
이젠 정말로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의 이카르트에 그제야 찔끔 눈을 깜빡인 도의진이 내일 아침까지 만들어 둘 테니까 어서들 가셔. 하고 손을 휘저었다.
“재수 없는 놈.”
나 기분 안 좋아요 라는 표정을 지어보인 이카르트는 자신을 달래며 손을 잡고 숙소로 이끌자, 그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그녀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
“벌써 이틀이 지나갔네요. … 이제 이틀 정도가 남았는데 더 가고 싶은 곳은 있으세요?”
“… 흠, 글쎄. 내가 가고 싶은 곳은 마지막 날에 가고 싶은데. 그대는 내일 가보고 싶은 곳이 있나?”
“… 음. 그럼 커닝 타워로 쇼핑을 가고 싶어요.”
“좋군. 쇼핑 좋아하나?”
“음… 싫어하지는 않아요. 그리고 뭣보다 단장님께 옷을 한 벌 선물해 드리고 싶었거든요.”
“음. 그럼 난 그대에게 어울리는 장신구를 선물하고 싶군.”
“후후. 서로의 안목을 볼 수 있는 좋은 날이 될 것 같아요. 서로의 취향도 판단할 수 있고 말이에요.”
“그렇겠군. 꽤 기대가 된다. 그대는 내 어떤 모습을 좋아할지 말이다.”
“저도 기대가 돼요.”
깜빡이는 눈동자가 이윽고 꽤 예쁘게 휘었다. 정말 기대가 되나보군. 요 이틀 동안 계속 봤던 표정인데도 새로워서 그 역시도 다정하게 웃었다.
*
“이 머리핀도 꽤 잘 어울리는군.”
“그런가요? … 이런 머리핀은 오랜만이라 좀 어색한데요.”
“그래. 잘 어울린다. 아주 예뻐.”
머리 위쪽에 살포시 얹어 놓은 푸른색의 별무늬 머리핀. 그 핀을 고정해 놓은 린은 꽤 귀여웠다. 짧을 때나 어울릴 줄 알았는데, 이렇게 긴 머리에도 잘 어울리다니, 역시 내 연인답군. … 여전히 팔불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그는 이것과 방금 전에 봤던 푸른 화관까지. 하고 점원에게 말을 건넸다. 점원은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곤 포장지를 꺼냈다.
“화관은 쓰고 갈 테니, 머리핀만 포장해 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손님. 감사합니다.”
린의 말에 점원은 그녀의 머리핀을 조심스럽게 풀어 상자에 담아 포장해 주었다. 이카르트는 화관을 집어 들어 다시 그녀의 머리 위에 씌워주었다.
“이 화관이 마음에 들었었나 보군. 쓰고 가기까지 하겠다니 말이다.”
“네. 저는 이런 장식을 꽤 좋아하거든요. … 단장님도 이 화관을 꽤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기도 했고 말이에요.”
“나는 그대가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았을 거다.”
“… 정말이지, 단장님은 저를 항상 쑥스럽게 만드세요.”
“내 삶의 낙이지.”
린은 입술을 살짝 비죽이다가, 이내 이카르트가 입고 있는 옷을 보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 역시 이카르트에게 검은색의 정장을 사주지 않았던가.
아무런 패턴 없는 올 블랙에, 새하얀 와이셔츠를 곁들인 정장. 그 옷은 검은색 머리의 이카르트에게 굉장히 잘 어울렸다.
‘역시 단장님이야.’
그녀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린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이카르트는 점원에게 메소를 지불하고 제 품속에 머리핀을 넣었다. 그러고는 린에게 손을 건넸다. 멋있어… 멍하니 생각하며 이카르트가 건넨 손을 잡았다.
*
휴가의 마지막 날, 이카르트는 린을 데리고 페리온으로 왔다. 페리온은 임무할 당시에도 많이 오는 곳이긴 하지만, 이카르트가 이곳을 오고 싶어 했을 줄은 몰랐기에, 린은 이카르트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단장님… 페리온에 용건이 있으셨나요?”
“그래, 있지. 아주 중요한 용건 말이다.”
“… 중요한 용건이요?”
“그래. … 조금 이따 알게될 거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무슨 일이지? 그녀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카르트를 바라보다가, 이내 이카르트가 이끄는 손길대로 길을 따라 나섰다.
그렇게 약간을 더 걷다가 발견한 것은 이곳이 익숙한 길이라는 것이었다. 익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곳은 부모님과 함께 살던 곳, 그리고… 부모님이 잠드신 곳이었으니까.
이카르트를 따라 나서는 발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왜, 왜 이곳에. 눈동자가 천천히 흔들렸다. 눈물이라도 흐를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이내 더 걷지 못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그가 그녀를 뒤돌아보았다.
“… 어디로 가는 길인지 알아차린 모양이군.”
“… 모를, 모를 수가 없는 길이잖아요. 여긴… 여긴 어떻게 아신 거예요? 한 번도 알려드린 적이 없는데.”
“그대의 오라버니에게 물었다. … 곧 약혼자가 될 텐데, 인사라도 드려야 하지 않겠나.”
“…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다면, 미리 말씀해 주시지….”
“휴가 전부터 그대가 이렇게 슬픈 표정을 할까봐 미리 말하지 못했다. … 조금 더 즐기다가 부모님을 만나면 그래도 기분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생각했나 보군.”
그녀는 결국 눈물을 한 방울 두 방울씩 떨어트렸다. 부모님을 만날 수 있어서 기쁜 것도 같았고, 죽으신 분들을 만나러 간다는 사실이 슬픈 것도 같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을 만나러 갈 각오가 된 모양이었다. 그는 울지 말라는 듯 그의 손등을 두어 번 토닥여 주고는, 다시 한 번 그녀를 이끌고 걸어 나갔다.
*
“… 어머니, 아버지, 저 왔어요.
“… 안녕하십니까. 이카르트라고 합니다.”
린은 자신의 부모님의 묘 앞에 조심스레 무릎을 꿇었고, 이카르트는 오던 중간에 꺾어온 꽃을 무덤 위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녀를 따라 조심스레 인사를 건넸다.
“… 오랜만이죠. 기사단에 오게 된 이후로 온 적이 없는 것 같아요. 10년 동안 너무 바빠서 찾아오지 못해서 죄송해요.”
“… 따님과 아드님을 지켜보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따님께 상처를 많이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묘비를 쓸었고, 그는 여전히 선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다가 그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려는 듯 무릎을 굽힌 채로 손수건을 꺼냈다.
“… 이제는 바쁘다는 핑계로 찾아오지 않는 일은 하지 않을게요.”
“대적자라곤 하지만, 사실 저는 겁쟁이였어요. 사실은 부모님을 만나러 올 용기가 없었던 거에요.”
“… 항상 저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을 지키다 보니 알았어요. 이건 나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와 아버지도 꼭 지키고 싶었던 대상이 우리였을 뿐이라는 걸요.”
“지켜주셔서 감사해요.”
“앞으로 자주 찾아올게요. 사랑해요. 정말 많이요.”
그녀가 결국 오열하듯 울자, 그는 정장 자켓을 그녀에게 덮어주고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힘들어 하는 그녀에게 먼저 돌아가라는 듯한 말을 건넸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먼저 돌아가자, 그는 묘비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조곤조곤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저는 린을, 따님을 많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 그러니까, 린이 많은 사람들을 지키려 한다면, 저는 그런 린을 평생 지키고 싶습니다. 두 분이 린을 지켜주셨던 것처럼.”
“저는 곧 그녀와 약혼합니다. 곧 약혼자가 되는 셈이죠.”
“두 분께 한 약속을 꼭 지키겠습니다. 그녀를 꼭 행복하게 해주겠습니다.”
“… 그녀를 지켜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묘 앞에 고개를 깊게 숙였다 들었다. 그러고는 린을 따라서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
모든 일정을 마치고 에레브로 돌아가는 배 안, 린은 울어서 완전히 붉어진 눈과 코를 하고는 이카르트를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 뭘 하셨기에 먼저 돌아가라고 하신 거예요?”
“… 그대의 약혼자로서, 그대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말을 했다. 어쩐지 그대의 앞에서 말하기엔 조금 쑥스러웠거든.”
“… 그런가요.”
어쩐지 후련한 듯 웃어 보이는 그녀의 눈가에 살포시 입을 맞추고는 그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나저나 어디가 제일 마음에 들었나? 마음에 드는 곳엔 나중에 다시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말이지.”
“… 아쿠아리움이요. 그 곳에는 꼭 다시 함께 가보고 싶어요.”
“그래. 나도 아쿠아리움은 꽤 마음에 들었으니까, 나중에 꼭 다시 오도록 하지.”
“… 좋아요.”
그녀의 어깨를 꼭 끌어안으며 그녀를 자신에게 기대게 했다. 따뜻하고 안락한 그의 품에 기대어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사랑해요, 단장님.”
“나도, 정말 많이 사랑한다, 유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