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政略 / 정략
순욱은 태어날 때부터 인연이 정해져 있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신의 이름을 이제 겨우 알 정도일 시점에서 정해진, 부모님이 이어 주신 인연 정략결혼. 여러 이유로 가문의 이름을 걸고 이어진 인연에 관해 순욱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다. 명문가의 숙명인 가문의 명맥을 걱정할 필요 없이 서로가 원하는 이익이 있다면 계약처럼 맺어지는 것이고 자신은 계약서 같은 것보다 더 강력한 장치가 되는 것이다. 순욱의 입장에선 어쨌건 사람은 모르는 상태에서 만나 백년가약이 정해지는 것인지라 자신은 남들이 하는 애정의 갈등 없이 학문에만 집중하면 되는 것이고 남들이 결혼에 대해 고민할 때쯤 자신의 이상과 대업을 생각하면 되니 손해 없이 가문에 이득이 된다면 딱히 나쁘지 않은 전략이라 믿었었다.
진평이 자신의 시선에 들어오기 전까지 말이다.
장안에서 연주까지 망설임 없이 달려와 조조에게 안기던 그 사람을 처음 보았다. 순욱은 그저 신기하다 여겼다. 뭐라고 해야 할까. 첫눈에 반한다는 것도, 사랑의 설렘 같은 것도 아니다. 특별한 애정의 느낌이 아닌, 그냥 기이한 사람을 만났을 때의 느낌. 그게 진평의 첫인상이었다.
진평이라는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한나라의 진평. 후한 교육 과정을 거친 학생이라면 주야장천 듣던 그 이름 아닌가. 역사서에도 적혀 있을 만큼 유명한 그 진가문. 그리고 순욱 자신이 문약이라는 자를 가지기 전에 온 서신에서 봤던 이름이기도 하다. 이미 상대가 있으니 자연스레 후보에서 떨어졌지만 그런 진 가문과 연을 맺길 원하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을뿐더러 막내딸은 특히나 까다로울 정도로 조건을 걸거나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퇴짜 놓는지라 가문들 사이에 오가는 뒷말도 많았다. “계략.” 진평이라면 뒤따라오는 그 단어, 진 가문에서도 예외가 없었다.
어찌나 특별한 존재길래 조상의 이름까지 그대로 붙여 놓고 있는지 내심 궁금했는데, 그 존재가 자신의 눈앞에 미소를 지으며 서 있다. 그것도 조조 아래에서 말이다. 그저 처음엔 조조가 말하는 그 사람이 또다른 동명이인의 상대인 줄 알았다. 마주하는 순간 자신이 아는 그 진가 막내딸 진평이란 것을 깨달았고, 진평의 얼굴을 볼수록 오는 기이한 느낌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순욱의 입장에선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았다. 세상과 맞바꿀 것처럼 조건을 까다롭게 붙이던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조조 앞에 있다니. 지금이야 순욱이 모시는 어르신이긴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진가문 사람이라면 쳐다도 보지 않을 사람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내시놈 천한 자라며 어린학생까지 뒤에서 무시하며 내리까는 마당에 그걸 진 어르신이 허락이야 해주겠나? 큰 가문일수록 가문의 말은 절대적인데 가문과 연을 끊었나? 그 진 가문 어르신의 고집이 꺾였나? 온갖 생각이 들었다. 진평을 볼수록 온실에 있던 가는 화초가 덩그러니 넓은 황무지 한가운데 놓여있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여기 있지?
그 신기한 기분은 자신의 괴리감에서 오는 것인 걸, 순욱은 금방 깨달았다.
진평은 처음 만나 소개할 때부터 지금까지 순욱에게 특유의 둥그런 미소를 지어 인사했다. 그럴 때마다 순욱도 매번 미소를 띠며 화답했다. 웃으면 고양이처럼 유연하게 입꼬리가 올라가는데 그 미소가 사람의 인상을 유순하게 만드는 듯했다. 물론 순욱이 점차 알아가는 진평의 모습은 그 웃음만큼 둥그렇지는 않았다. 눈치가 빠르고 판단이 정확한 조조의 책사. 자신이 직접 가르쳤다는 그 상대는 내면이나 일 처리도 빼닮은 것 인지 전체적으로 틀린 적이 없었다. 낙양에선 인사 관련 일을 했다는데 사소한 행동 말투에도 사람의 성격을 파악할 정도로 꿰뚫어 보는 눈이 남달라 연주 내 사람을 뽑고 관리하는 일은 대부분 진평이 맡았다. 또 숫자 세고 분배하는 것에 능통했다. 내정뿐만이 아니라 군사를 배치할 줄 아는 능력도 있어 조조 앞에 내놓는 조언에 대해 궁금해하니 예전 기도위 시절 조조와 황건적 토벌을 다녔던 성과라고 하며 또 둥그런 웃음을 짓는다. 인력배치 예산 분배까지 핵심을 짚고 가는 것들은 대부분 조조 앞에 내밀기 전 진평을 거쳐 갔으니 조조 입장에선 자신이 자리를 비울 때 내정에 대한 걱정을 덜 정도로 많은 힘이 된다.
가장 무서운 능력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을 무너뜨리는 기술인데, 대부분 연주 호족들을 설득할 때 자주 동원되었다. 진가문이라는 명분은 진평의 힘이 되었고 그 힘은 자연스레 조조의 것이 되니 조조가 자신의 첫 번째 사라고 소개하는 것이 어느 순간부터 납득됐다. 한나라 고조 유방의 모사 진평의 이름을 받은 그의 후손은 후한 조조의 진평이 되었다.
진평은 조조가 서류 처리를 할 땐 대부분 밤까지 남아있었다. 퇴근 할 수 있는 책사들은 대부분 퇴근했지만, 내정의 핵심을 맡은 순욱이나 조조에게 넘기기 전 최종 확인을 하는 진평은 매번 야근확정인 듯 기지개를 켜 야근을 준비한다. 낙양도 장안에서도 쉴 틈이 없었을 텐데 딱히 힘들어하거나 귀찮아하는 흔적은 없으니 순욱은 저 작은 몸집에서 나오는 힘의 근원이 어딘지 궁금해질 정도다. 일에 집중이 안 되는 듯 진평은 펜을 앞뒤로 계속 까딱거리다 갑자기 순욱에게 고개를 돌려 뜬금없이 질문을 시작했다.
"순 선생님 혹시 정략이세요?"
"갑자기 왜..?"
"아니 그냥."
"... 네. 어릴 때 식만 올리고 아직까진 계속 따로 있어요."
"그렇구나. 역시 명문가일수록 정략이 많죠. 오빠 몇몇도 정략인데."
"진 선생님도 정략인가요?"
"저요?“
진평은 잠깐 멈칫하다 둥그런 미소를 짓곤 조조를 한 번 지긋이 쳐다보더니 순욱에게 슬쩍 귓속말로 속삭였다.
“필사적으로 피했죠. 근데 맹덕이는 못 피했네."
진평은 장난스레 이 말은 비밀이라고 웃곤 서류를 한번 보다 괜히 또 조조를 쳐다본다. 그 잠깐의 시선을 눈치챈 조조는 일하던 것을 멈추더니 진평 옆에 있던 의자에 여유롭게 앉아 팔짱을 낀 채, 특유의 미간을 찌푸린 표정으로 둘을 쳐다보았다.
"둘이 일 안 하고 무슨 재밌는 이야기를 하시는지?"
"대인 험담하고 있었죠."
"말은…."
"아. 정략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거 진 선생이 제일 싫어하는 단어인데."
조조가 웃으며 말하니 진평이 툭 하고 어깨를 쳤다. 왜? 하니 진평이 조조를 힐끗 쳐다보곤 순욱을 의식하는지 다시 특유의 유연한 미소를 지었다. 그걸 또 놓칠리 없는 조조가 어이없다는 듯 "허-"하고 내뱉으며 진평의 삐져 나와 있던 머리칼을 슬쩍 만져 원래 자리로 넘겼다.
"두 분이 많이 친하신 것 같아요."
"친하긴요.."
동시에 나온 즉답에 당황한 순욱이 하하하고 웃고 넘기다 문득 질문을 던졌다.
"두 분은 어떤 사이세요?"
그 질문에 조조와 진평은 서로를 한 번 멀뚱히 바라보다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고민할 일인가. 순욱은 속으로 생각했지만 둘의 대답을 기다리기로 한 건지 조조와 진평을 번갈아 가며 시선을 두고 있다.
"우리 어떤 사이야?"
"오래된 내 부하."
"부하라니 이쯤 되면 자기라고 불러야지?"
"어허 당신 지금 책사입니다."
"맹덕이 말하는 것 봐 섭섭하네…… 근데 오래되긴 했지. 이번으로 11년차."
"계산 잘해. 2년은 빼. 나 발령났을 때."
"그래 거기에 도망갔을 때…. 3년도 빼면 6년이네! 우리 별거 아닌데?"
"그렇답니다. 순선생."
순욱이 대답을 할 틈도 주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이 둘의 친밀감을 대신해준다. 서슴없이 장난으로 대하고 10년이 넘는 세월의 인연. 전화 한 통으로 망설임 없이 넘어온 것 만 봐도 둘이 상사 부하 같은 간단한 관계보다 더 복잡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오묘하다. 동료라 하기엔 가깝고 애인이라 하기엔 뭔가 이질감이 있다. 자기들도 딱히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모르는 관계라는 그 말도 진실인 것 같았다.
순욱은 둘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다 조조와 눈이 마주친다. 조조의 강해 보이는 눈은 그리 오래 쳐다보지 못해 싱긋 웃다가 진평을 쳐다본다. 진평의 어깨에 조조가 팔을 자연스레 올려 흥미로운 듯이 순욱을 바라본다.
"순선생. 혹시나 진 선생께 관심 있으신지?"
"아닙니다. 그런 건 아니고.."
"아 진짜? 저한테 관심 있어요??"
"진향. 넌 임자 있는 사람한테 그러고 싶냐?"
"그거야 모르지~ 마음이 있을 수도 있잖아. 근데 그거 조 어르신이 할 말은 아니다."
"참고로 사내연애 금지입니다. 줄 꼬여."
조조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칼같이 끊어 다시 일어나 자리로 간다. 진평은 그런 조조를 빤히 째려보다 다음에 술 한잔하자며 웃곤 다시 일을 시작한다. 이때까지는 몰랐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리 친밀하고 동등한 것이 아닌 것을, 저 이질감 속에서 깨달았어야 했다.
*
조조가 연주 기반을 잡기 위해 자리를 비우기 시작하면서 진평이나 순욱은 집에 돌아가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그 탓인지 진평과 순욱은 다른 책사들보다 각별히 친해지기 시작했다. 진평은 순 선생님이라는 호칭 대신 문약이라는 자(字)를 부르기 시작했고, 순욱은 어색하게 누님이라고 부르다 누님이 뭐냐며 진평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 후 순욱은 진평과 함께 일할 때 누나라 부르기 시작했고 서로가 어떻게 조조를 따르게 되었는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심심할 때마다 가벼운 추억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진평의 말 하나부터 열까지 조조의 이야기가 나왔다. 진평은 조조를 좋아했고, 조조도 진평을 각별하게 생각할 정도로 좋아했다. 서로가 대화하는 말투부터 이야기 하는 표정까지 순욱에겐 그리 느껴졌다.
여느 날처럼 머리를 식히기 위해 바람을 쐬러 나온 순욱은 전화를 하던 진평과 눈이 마주쳤고 진평은 순욱을 향해 특유의 둥그런 미소를 지었다. 저 미소는 버릇처럼 나오는 것인 걸 얼마 되지 않아 깨달았고 저 미소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지도 알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시선을 끊기 위해 만들어진 미소. 순욱은 그런 미소정도로 시선을 끊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가만히 마시던 커피를 들고 진평을 가만히 바라보면 어떤 기분인지 금세 파악됐다.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상대가 조조인 것도 알 수 있다.
"언제 와…? 그래. 그건 내가 전해줄게."
전화를 끊자 진평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아마 다음 주도 토벌로 자리를 비울 거라 예상했다.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때다. 연주 세력을 넓히고 내실을 굳건하게 하는 것. 병법의 기초 아닌가. 진평도 병법에 능하니 알고 있을 테지만 마음이 그렇지 못한 것이다. 순욱은 애써 가라앉은 모습을 못본 척 하지만 내심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오지랖인 거 겠지. 못본 척 하는 걸 아는 건지 다시 둥그런 미소를 짓곤 뒤돌아있는 순욱의 팔을 슬쩍 잡아 당겨 감싸 안아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둥그렇게 말했다.
"문약아 내일 쉬는 날인데 시간 있으면 술 마실래?"
술은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밝은 사람과 같이 있는 것이 좋았고, 같이 식사하는 건 즐거운 일이라 생각했다. 그거면 진평 기분이 조금 나아지겠지 싶어 순욱은 그래요. 하곤 흔쾌히 받아들였다.
“역시 순문약이야. 맛있는 거 먹자! 먹고 싶은 거 있어?”
진평은 순욱의 대답에 환하게 웃었다. 무엇보다 둥그런 미소가 아닌 진짜 기뻐서 나오는 이 웃음. 순욱은 그 웃음을 보면 기분이 좋아졌다.
진평은 밥보단 술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기에 술은 금방금방 넘겼다. 어떻게 저리 잘 마실까. 술자리는 처음이 아니지만, 매번 볼 때마다 신기했다. 그걸로 스트레스가 풀린다면 하루쯤은 괜찮겠지 하며 넘겨 앞에 있는 음식을 하나씩 먹기 시작했다. 순욱을 위해 여러 가지 음식이 나왔지만, 가끔 한두 개만 집어 먹을 뿐 그는 술이 있을 땐 오로지 술만 마셨다. 오늘따라 더 술을 찾은 탓인지 취하기도 쉬웠다. 점점 진평이 취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하 웃다가도 했던 말을 계속 반복하기 시작한다. 빈속에 술이 들어가니 오죽하겠나 싶어 헤롱거려져선 더 먹자고 하는 진평을 겨우 달래 나왔다. 가볍게 업고 데리고 가다 문득 진평의 집이 어디인가 생각했다. 어디였더라? “누나” 하고 부르는데 이미 “쌔근-” 등에서 잠든 소리만 들릴 뿐이다. 곤란하네. 이런 적은 처음인지라 어떻게 하면 될까 곰곰이 생각하다 순욱은 결국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와버렸다. 그렇다고 어디다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괜히 호텔에 갔다가 서로 오해 사기도 싫어 결정한 곳이다. 이쪽도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지만 여자라곤 누나나 가족 빼고 어딜 가본 기억이 없는지라 그나마 안전한 곳은 여기라 생각했다.
침대에 진평을 눕혔지만 미동도 없다. 쌔근거리며 자는 진평을 바라보다 문득 이 사람은 사람을 너무 믿는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순욱 자신이 뭔가를 할 사람은 아니라지만 무방비한 상태의 자신이 걱정도 되지 않나 싶기도 하고 자신이 남자로 보이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온갖 생각이 들었다. 잡다한 생각은 하지 말자며 일단 씻고 잘 준비를 했다. 준비를 하다 보니 내일이 더 걱정되었다. 일어나면 무슨 말로 설득을 해야 할지, 언제쯤 일어날 것이며 해장국은 뭐 먹을지까지. 이게 진짜 연애라면 신경 쓸 일이 많겠구나 싶었다. 걱정도 많고 신경 쓰는 것도 많아 귀찮게 여길 수 있지만, 상대방을 생각하는 일은 내심 즐거웠다.
씻고나와 침대 옆에 자리를 깔다 이불을 걷어버린 진평을 보았다. 잠버릇도 있나 보다 싶어 자세를 다시 잡아주고 이불을 덮어주려 숙이다 확- 하곤 목에 팔이 감겼다. 순욱이 균형을 잃어 휘청거린 채 진평과 마주 보았다. 잠에서 깨 장난치는 건가 싶어 빤히 쳐다보다 볼을 찔러보는데 인상 쓰며 고개를 휙 돌리다 다시 돌아오는 걸 보니 계속 잠든 채인 것 같았다. 잠버릇인가 싶어 빠져나오기엔 잠을 깨울 것 같고 딱히 나쁘지도 않았다. 잠깐만 있다 풀지 싶어 불편한 자세를 바로잡아 진평 옆에 누우니 고양이 입이 당장이라도 미소를 지어줄 것 같았다. 이내 진평 입술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맹덕아.”
그 한마디를 들었을 뿐인데 순욱은 가슴이 아파졌다. 왜일까. 자신의 이름이 불렸으면 하는 잠깐의 마음이 있던 걸까. 아플 이유가 없었고, 그게 당연하였다. 그는 조조를 좋아했고 조조를 위해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대체 왜 자신이 아픈 건지 알 수 없었다.
“왜 그래 향아.”
그저 꿈에서 깨지 않게 도와주겠다는 되지도 않는 변명거리로 자신이 조조인 것처럼 대신 대답하곤 나지막이 진평을 감싸 안았다. 몸집이 작아서 그런지 밀착하면 두 팔로 진평의 어깨까지 감싸 안아 줄 수 있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자신의 소리인지 진평의 소리인지 알 수 없었지만 순욱은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곤 눈을 감았다. 처음으로 진평이 작게 느껴졌다.
누군가 잠든 순욱을 툭 건드렸다. 순문약, 갈게. 하곤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꿈인가 싶어 자신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며 웃길래 자기도 손을 흔들어줬다. 좋아하는 목소리에 실없이 웃으며 “갈 거면 뽀뽀해주고 가.”라고 아무렇게 말해버렸다. 쪽- 하곤 누군가가 볼에다 입을 맞추는 게 느껴졌다. 즐거운 꿈에 웃어버렸는데 진평이 옆에 있다는 걸 깨닫곤 헉하고 눈을 떠 버렸다. 집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누나, 누나? 하곤 침대나 화장실 등을 돌아보곤 진평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나- 어디 있어요?”
“뭘 그리 놀라? 집에 왔지.”
“아 누나 그…죄송해요. 제가 딱히 누나한테 뭘 하려고 한 건 아니고, 그… 누나 집도 모르고..”
“뭘 그렇게 구구절절 설명해. 수작 부린 티도 안 나더라. 멍청아.”
전화 너머로 신나게 웃더니 걱정 말라며 쉬라는 진평의 말에 이내 안심이 되었다. 전화를 끊은 순욱은 잠을 깨기 위해 욕실 앞에 서 있다가 괜히 희미하게 남아있는 달달한 꿈의 감촉에 볼을 쓰다듬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다 흰 피부에 번진 산호색의 립스틱 자국이 남아 있는 걸 발견한 순욱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 거울 너머의 자신을 쳐다보지 못했다.
“망했다.”
*
진평은 친한 사람에게 장난치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얌전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웃기도 잘하고 가끔 장난도 치는 걸 좋아하는 사람. 진궁이 사둔 비타민 스틱을 잠깐 자리 비운 사이 몰래 숨겨뒀다 가위바위보로 이겨야 돌려주거나 책사들의 커피를 숫자대로 무작위로 사더니 제비뽑기로 랜덤 배분하기도 했다. 물론 바꾸는 것은 허용되니 큰 문제는 되지 않지만, 철이 덜 든 막내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도 눈치껏 다른 사람에겐 심한 장난은 치지 않는데 순욱이나 조조 같은 친밀감이 큰 사람은 예외인지 순욱은 매번 장난에 당하곤 했다. 예로 들어 미적지근한 커피를 뜨거운 척 연기해서 상대방의 반응을 본다거나 멍하니 걸어가던 사람 뒤에 조용히 다가가 놀라게 하거나, 남들 몰래 어깨가 넓다며 백허그를 한다거나. 다른 것보다 스킨십이 갈수록 심해졌다. 이것도 어르신이 자리를 많이 비운 탓인가 싶어 순욱은 받아주긴 했는데 정도가 지나쳐 선을 그어야 하나 고민도 할 정도였다. 생각은 그랬지만 정작 마음은 싫은 건 아니었는지 이내 허리에 두르는 진평의 팔에 익숙해졌다.
타이밍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순욱이 머리를 식히려 바람 쐬러 나오면 통화하는 진평과 마주치는 일이 잦았다. 전화하는 진평의 저 가라앉은 표정이 신경 쓰였다. 저 둥그런 미소로 자신에게 매번 걱정하지 말라 말하는 것이 지겨웠다. 상대가 누군지도 알고 무슨 이유로 저러는 것도 알고 있는데 저 경계는 언제쯤 없어질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순욱은 조용히 전화가 끝날 때까지 주변을 보며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용무가 끝난 진평은 순욱을 보며 잠깐 웃더니 언제나처럼 순욱의 팔을 자신에게로 잡아당겼다.
“순문약. 내일 쉬는 날인데 한잔할래? 같이 먹어주면 더 좋고.”
할 일이 조금 남아 있어서 어떻게 할까 생각했다. 솔직하게 말해 거절할 까 고민하다 진평의 눈을 보았다. 진평의 둥그런 웃음 속에서 그 눈빛이 무너져내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까의 가라앉은 표정이 생각나 순욱은 그 눈을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무슨 이유일까, 유독 진평의 부탁은 거절하지 못하는 순욱이었다. 그래요. 라고 말하니 이내 눈빛이 다시 반짝였다. 다행이다 싶어 순욱은 진평을 보곤 미소로 화답했다.
어쩌다 보니 술을 잔뜩 먹어버렸다. 순욱은 술을 잘하는 편이 아닌지라 한두 잔만 받기로 약속했는데, 진평의 페이스에 완전히 휘말렸다. 알딸딸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어 머리를 세차게 흔들다 눈앞에 진평이 엎드려 있는 걸 보곤 조금 정신을 차렸다. 하나, 둘, 셋…5병? 아까도 세 병 마신 것 같은데 많이도 마셨다.
"집에 갈래요? 누나."
진평을 흔들어 깨우지만 꾸물거리기만 할 뿐 여전히 말이 없었다. 어쩌나. 일단 계산부터 하곤 진평을 부축했다. 가로등이 있는 큰길을 걸어가다 밝은 호텔 로비의 조명이 시야에 들어왔다. 술에 취한 탓인지 조금 나쁜 마음이 생겨버렸다. 휘청거리는 진평을 겨우 데리고 호텔 데스크 앞에 멈춰 서있다 결국 키를 받아 들어갔다. 방문을 열고 과감하게 진평을 안아 들어 침대에 살포시 눕힌 후 문을 닫았다. 이게 맞는 일인가 싶어 잠깐 안경을 벗곤 마른세수를 했다. 그래 이 정신으로 어딜 가는 것도 위험하고, 잠깐 눈만 붙이는 거야. 마음속으로 그리 결심하며 다시 안경을 끼고 걸어가는데 진평이 침대에 엎드려 순욱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순문약 지금 들어올 때 나쁜 생각 했지?”
“…. 아닙니다.”
“이 더블베드는 어떻게 설명할 건데?”
망했다. 일어선 채 얼어붙어선 눈조차 못 마주치는 순욱의 반응이 재밌는지, 진평은 계속 고양이 입을 유지한 채 지켜보며 말했다.
“하긴 문약이 집에서도 잤는데.”
“다른 사람 있었으면 진짜 오해하겠네요.”
“그럼 뭐해. 진짜 사귀는 것도 아니고…… 혹시 너 문제 있고 그런 거 아니지?”
“지금 누나랑 있는 게 가장 큰 문제 아닐까요?”
그러게. 하곤 진평이 한참을 생각하다 푸핫 하고 웃어버렸다. 재밌다며 일어서서 순욱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다 아직 술이 덜 깬 건지 발이 꼬여버렸다. 몸이 먼저 반응한 그는 무의식적으로 진평을 안아 괜찮냐곤 물었다. 숨을 쉴 때마다 나는 술 냄새에 자신도 한껏 취한 기분이 들었다. 진평이 순욱의 목덜미를 감싸 안으니 가볍게 안아 들어 침대에 다시 눕혔다. 다시 일어나려는 순욱의 목덜미를 놓아주지 않자 순욱은 어정쩡한 자세인 채로 진평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평의 눈이 가느다랗게 곡선을 유지한 채 그런 순욱을 재밌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나도 순문약이랑 사귀어보고 싶네. 술 좀 마셨다고 맨날 이리 다정하게 안아 줄 거 아냐."
"제 어디가.."
"그냥. 뽀얀 피부에 얼굴도 잘생겼고 멋있잖아. 키도 크고 어깨도 넓어 듬직해 보이고 똑똑하지 거기다 친절하고 다정해. 잘 자란 명문가 도련님 여자들의 이상형 아니겠어?"
"…그럼 저랑 만나볼래요?"
취한 와중에도 진평은 당황한 기색이 가득한 채 순욱만 빤히 쳐다보았다. 정적만 가득한 호텔 속에 자기가 잘못 들었나 싶어 조용히 헤실 웃어넘기려 했지만, 눈썰미 좋은 순욱은 속일 수 없었다. 눈빛이 장난이 아니란 것인 걸 알려주지만 진평은 대답을 회피할 수밖에 없었다. 상식적으로 당연한 반응이지 않은가. 너는 이미…
"장난치지 마 순문약."
"진짜입니다."
"너 제정신이야? 취했어?"
"아뇨."
"그럼 미쳤어?"
"그것도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너 정략이잖아."
정략이라는 단어에 순욱은 잠시 조용해졌다. 역시 취한 걸까 싶어 한숨을 쉬곤 다시 가만히 있는 순욱을 달래려는데 그는 다시 입을 열어 마음속 구석에 있던 말을 내뱉었다.
"그럼 누나는요? 어르신에 얽매여 있는 건 정략이랑 다를 바 없잖아요."
순욱의 말은 진평의 정곡을 찌른 듯 진평의 말을 끊어버렸다.
"문약아."
"누나. 말 돌리려고 하지 말아요. 그렇게 멀쩡하면서 왜 따라서 왔어요? 저 놀리러 왔어요?"
“…… 그러게. 내가 미쳤나 보네.”
양팔을 뻗은 채로 드러누운 진평은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에 순욱이 뒤돌아 침대에 걸터앉으니 순욱의 뒷모습에 시선이 갔다. 넓은 어깨가 둥글게 움츠려 있었다. 그리고 그 넓은 어깨 너머로 나지막이 순욱의 고백이 들렸다.
“저 누나 좋아해요.”
“… 알아.”
“… 죄송해요. 갈게요”
“나도 너 좋아해.”
순욱의 동공이 커진 채 진평만 바라봤다. 싫어하진 않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런 반응까진 예상하지 못했다. 감정이 솟구쳐서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미소 짓고 있는 진평을 보곤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순욱은 누워 있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자신의 아래에 두었다. 시야에 서로의 얼굴만 보일 정도로 가까이 마주했다. 진평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곤 나지막이 속삭였다.
“취한 걸 수도 있어. 이게 거짓말이면 어쩔래?”
“그럼 하루만 믿을래요.”
그것이 둘의 첫 입맞춤이었다.
*
"둘이 무슨 일 있어요?"
"엥?"
"아니 분명 얼마 전까진 둘이 시끄러웠는데. 안 그래요? 순 선생님?"
".... 야근하느라 지쳤나 보죠."
여건의 질문에 진평과 순욱이 동시에 여건을 쳐다보았다. 그 사이에서 태연하게 서류를 다시 확인하던 순유가 진평에게 서류를 넘기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더니 순욱과 진평을 한 번씩 바라보곤 관심 없는 듯 다시 서류로 시선이 갔다. 팔짱을 낀 여건이 흠-하고 인상을 쓰더니 진평의 어깨를 툭 치곤 대놓고 손가락으로 순욱을 가리킨다.
“싸웠어요?”
“그럴 리가요.”
“아니 또 죽고 못 살던 사람들이 싸움이라도 했나 싶어서.”
“여쌤. 그렇게 말하면 다들 오해하는데요.”
“… 그렇게 붙어 다니면 오해할 만하죠.”
침착한 순유의 말 한마디에 마시던 커피가 목에 걸렸다. 이게 바로 돌직구구나 싶어 진평은 커피를 겨우 넘겼다. 순욱도 당황했는지 이내 기침을 하더니 조카님 하곤 어색하게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순유가 가지고 있던 서류를 이어받았다.
“우리가 그 정도야?”
태연하게 물어보는 진평이 어이가 없는 건지 순욱은 계속 인상을 찡그린 채 진평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 그날 밤은 진짜 거짓말이야? 진짜로? 온갖 생각이 겹치기 시작했다. 무서운 여자. 그렇게 지내놓고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것인지 내심 화가 나기 시작했다. 뭔가 말 하고 싶었는데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한동안 말하지 않고 일만 하고 있으니 진평도 순욱의 상태를 눈치챘는지 자리에 일어서선 탕비실로 들어갔다. 순욱도 텀블러에 있던 커피를 원샷하곤 뒤따라가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 진평 뒤에서 커피믹스를 다섯 개 뽑아 죄다 부어버렸다. 느긋하게 커피머신의 버튼을 누른 채 기다리고 있는 진평 뒤에서 순욱은 아까의 말에 질문했다.
“우리가 어느 정도인데요?”
“그러게. 친구는 아닌 것 같고.”
매번 회피식 대답에 순욱은 화가 나기 시작했다. 장난에 자신만 진심이 되는 것이 짜증 나기 시작해 툭 하고 커피를 젓던 티스푼을 던지듯 놓았지만 진평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순욱이 인상을 확 찡그린 채 바라봐도 태연한 지 몇 초 동안 뒤돌아 쳐다보다가 다시 커피머신에 시선을 두곤 말을 이어간다.
“기분 나쁜 건 알겠는데… 우리가 티 낼 정도로 떳떳한 사이는 아니잖아.”
순욱은 머리를 한 대 강하게 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대로 뒤돌고선 간다는 말도 없이 탕비실을 나가버렸다. 굳이 따라 나가진 않았다. 커피머신이 조금 있다 멈추자 따뜻한 커피를 가지고 느긋하게 나왔다. 눈조차 마주치려 하지 않는 순욱에게 진평도 괜히 토라져선 고집쟁이. 라고 말하고는 자기 할 일을 시작했다.
저녁부터 비가 많이 왔다. 연주가 잠길 정도로 내리는 비의 기세에 일찍 퇴근하기 잘했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진평은 창밖을 계속 바라보다 조조의 메시지창에 [연주성 쪽에 비가 많이 오네. 그쪽도 많이 와?] 라고 남겼다. 사라지지 않는 1의 숫자에 늦은 밤에 바쁘려나 싶어 스마트폰을 테이블에 놓자마자 지이잉-하곤 진동이 울렸다. 톡을 남겼는데 바로 전화를 거는 성급함을 보니 조조라고 예상했다. 역시나, 하며 피식 웃었지만 막상 전화를 받으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일하냐?"
"퇴근은 했고 검토할 건 조금 이따 보려고. 거긴 어때?"
"여긴 씨발 뭔 날씨가 이래? 어젯밤부터 저 지랄이더니 종일 비네. 그쳐야 나아가지. 이 상태면 쫑내야 돼.“
“그래도 손해 볼 거 있어? 몸이나 조심해. 무리 하지 말고 시간 있잖아.”
“어. 너도 얼른 자. 그거 내일 확인하고.”
“웬일이래? 우리 조맹덕씨 맨날 야근 돌리더니 철들었네.”
“새끼 빨리 자. 헛소리할 거면 끊는다.”
“조맹덕”
“왜…”
“…….아냐 잘자”
“그래.”
미적지근한 전화가 끊어지자 진평은 한숨을 쉬다 침대에 엎드려 누웠다. 이런 게 아닌데 공허한 기분이 들어 메시지를 다시 확인하다 눈을 감아버렸다. 날씨 탓인가. 아마 그런 거겠지 싶어 애써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다. 졸리다. 잠들려는 찰나에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올 사람이 없었다. 긴장한 채로 조심스레 문 앞에 서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건너로 들렸다. 진평은 설마? 하며 슬며시 문을 열었고, 그 앞에 비를 잔뜩 맞은 순욱이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어째서? 동공이 커진 채 순욱만 바라보고 있으니 안경 너머로 다정한 눈웃음을 지었다.
“그냥… 보고 싶었어요.”
급한 대로 수건을 가지고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옷부터 가방까지 다 젖어선 일단 가방 속에 있는 물건부터 젖기 전에 꺼내기로 했다. 일거리가 있는 태블릿과 달콤한 간식들이 나왔다. 간식도 여러 가지가 나와 진평은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먹을 게 잔뜩 나오는 걸 보니 괜히 햄스터 주머니 같달까. 웃음이 나왔다.
“전화로 하기엔 설명이 좀 어려워서. 퇴근 찍고 찾아왔어요.”
“그럼 보고 싶은 게 아니네.”
“….보고 싶어서 왔는데. 이건 거절할 때를 대비한 변명거리.”
바닥에 있던 태블릿을 켜더니 손가락으로 가리킨 위치엔 문서가 보였다. 제목만 봐도 분명 진평의 도움이 필요한 서류임을 알고 진평이 아…. 하고 탄식을 냈다.
“진짜.. 너도 치밀하네.”
“칭찬인 거죠?”
“그래. 근데 비는 왜 맞고 온 거야?”
“…. 마감 시간에 맞춰 맛있는 간식을 사려고 한 사람의 욕심입니다.”
하하 웃더니 이건 어디서 샀고 이건 무엇이 맛있다며 한둘씩 설명하다 바닥에 물이 뚝뚝 떨어졌다. 대체 얼마나 맞고 온 거야. 진평은 순욱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수건을 들고 직접 머리를 말려주었다. 진평에게서 좋은 향기가 났다. 차마 고개를 들기도 애매해서 최대한 숙여 진평에게 온전히 머리를 맡겼다. 비 맞은 강아지를 닦아주는 것처럼 툴툴 털더니 망가진 머리를 손으로 빗겨 정리하다 안 되겠다며 빨리 일어나라 순욱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일단 씻고 와. 옷부터 갈아입어야겠다. 욕실은 저쪽.”
순욱은 갑작스레 욕실 앞까지 떠밀려 당황한 채 걸어가다 잠깐! 하고 밀고 있는 진평을 멈춰 세웠다. 우물쭈물 말 못 하던 순욱이 고개를 숙인 채 우뚝 서 있기만 하다 겨우 고개를 들곤 입을 떼 말했다.
“저….. 옷.. 없어요..”
“아…걱정 마 옷 챙겨줄게. 앞에다 둘 테니까.”
진평은 당황한 기색 없이 둥그런 미소를 짓더니 기어이 순욱을 끝까지 밀고서 욕실 문을 닫아버렸다.
“수건은 거기 열면 있어! 아 참 칫솔도 거기 있고, 면도기는…. 어쩔 수 없다. 칫솔 쓴 건 꼭 가져가! 옷은 거기 문 앞에 바구니 안에 넣어 두면 빨래 돌려줄게.”
문 너머로도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말이 끝나고 살짝 문을 열어보니 앞에 바구니가 놓여있고 진평은 뒤돌아서서 다른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물러날 수도 없겠다 싶어 일단 바구니를 집어 들어 욕실 안에 가져왔다. 옷을 하나둘씩 옷을 벗어 놓을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런 걸 의도한 게 아닌데 싶다가 한둘씩 욕실을 확인했다. 두 개의 칫솔과 각종 욕실용품 사이에서 보이는 면도기와 면도크림에 괜히 눈길이 갔다. 샴푸가 어떤 건지 클렌징폼이 어떤 건지 몰라 하나하나 글을 읽어보며 찾아가며 씻었다. 점점 진평에게서 나는 향의 정체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수건으로 닦다 문을 살짝 열어 바깥 상황을 보니 진평은 다른 데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문 앞에 옷들만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순욱이 어정쩡한 모습으로 나왔다. 길이가 조금 짧은 파자마를 입은 채 진평 앞에 나오니 진평의 웃음이 터져버렸다.
“우와 이게 이렇게 짧은 거였어?”
“이거 어르신 거죠?”
“응. 맹덕이꺼.”
“혼나는 거 아니에요?”
“세탁해서 두면 누가 알아? 그리고 그건 길어서 불편하다고 잘 안 입던 거야. 나름 이 집에서 제일 큰 거로 골랐는데.”
“그럼 이 속옷..”
“걱정 마. 디자인만 보고 사이즈 잘못 고른 새것. 그건 가져가. 내가 몰래 사놓은 거라 맹덕이도 몰라. 색깔 예쁘지?”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조조가 남겨둔 흔적들이 많이 있었다. 욕실뿐만이 아니다. 간간이 걸려있는 남자 옷들. 남자 스킨로션 세트. 생활할 수 있는 도구들이 진평의 일상에 조조가 스며들어 있다는 걸 대신 답해줬다.
“… 어르신이랑 같이 살아요?”
이것저것 주절거리던 진평이 하던 말을 멈췄다. 주변을 둘러보다 조조가 남긴 흔적 때문이란 걸 알아채곤 괜히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게 대답했다.
“같이 사는 건 아냐.”
“제가 있으면 안 되는 공간 같네요.”
“….. 알고 있었잖아.”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보니 더 확신이 드네. 얽매여 있는 거.”
“….. 그럴거면 왜 왔어? 집에 갈래? 우산 줄게.”
진평의 표정이 굳었다. 순욱은 그런 진평을 피하지 않고 계속 바라보기만 했다. 서로의 감정을 숨길 필요가 있을까, 말은 하지 않아도 서로가 알게 모르게 예민해져 있었다. 들키고 싶지 않은 것과 알고 싶지 않은 것의 충돌.
“… 지금 잠옷 입고 집에 가라고요?”
“어쩔래? 난 오라고 한 적 없어.”
“알았어요. 항복.”
물러서지 않을 긴장감에 순욱이 먼저 손바닥을 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식탁에 있던 커피를 집어 들곤 자리에 앉아 그 앞에 태블릿을 세워 능숙하게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런 순욱을 보고 진평도 금세 감정을 가라앉혀 순욱이 사 온 간식을 예쁜 접시에 담아 내어왔다. 그러곤 건너 식탁에 자리를 잡아 같은 태블릿을 켜고 파일을 확인 후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키보드 소리만 들리는 와중에 집중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는지 진평이 또 사소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정략 상대가… 당형…. 딸 이라 그랬지”
“네.”
“…… 그래….”
“…… 사연이 있으니 그랬겠죠. 제가 그때 뭘 아는 것도 아니고.”
“야 딱 봐도 순가 이름값 해 먹으려는 거지.”
괜히 꺼냈나 싶을 정도로 어색해지는 기류에 한동안 키보드만 두드리는 걸 반복하다 진평은 그래도 순욱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은 건지 계속 질문을 이어갔다.
“근데… 예뻐?”
“네.”
“오~ 좋겠네~ 순문약”
“… 예쁜 게 중요한가요?”
“할 말 없게 만드네.”
이내 보여줘 보여줘~ 하곤 진평은 순욱을 재촉하지만 순욱은 꼼짝도 하지 않고 계속 키보드만 치고 있다. 휙-하고 태블릿을 뺏어 물러서지 않을 진평의 표정에 싫다는 표정을 계속 지었지만 결국 순욱이 지곤 핸드폰에 사진을 뒤적거리다 곤란한 듯 진평을 쳐다봤다.
“꼭 봐야 해요?”
“응. 그래야 공평하지. 넌 맹덕이 알잖아.”
“그거랑은… 다르죠…”
싫은 티를 내는 순욱에게 건네받은 핸드폰 액정에는 새하얀 피부에 검은 머리를 예쁘게 올려 꽃 비녀로 장식한 미인이 웃고 있었다. 진평은 감탄만 하다 순욱과 핸드폰 사진을 번갈아 보기 시작하니 순욱이 핸드폰을 뺏어 다시 집어넣었다. 나보다 예쁘네. 진평은 괜히 자신감이 사라지는 기분을 느꼈다. 이렇게 예쁜 사람을 두고 나랑 만나? 주눅 들기 시작하면서 순욱을 쳐다보기가 어려워졌다. 그런 진평을 꿰뚫어 보는 순욱은 진평의 태블릿을 툭툭 치며 자기 것 돌려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어?! 어. 하곤 다시 돌려주는 그 멍한 모습이 어이가 없는 건지 순욱은 허탈하게 웃어버렸다.
“또 이상한 생각 했죠?”
“ㅁ, 뭐??????? 아닌데????????????”
“거짓말 못 한다더니 진짜 못하네.”
“야….. 그런 건 생각만으로 끝내.”
“음. 어떤 생각일까. 이렇게 예쁜 사람을 두고 왜 나랑 만나는 거야? 같은 생각”
“순문약……. 너 자리 깔아라.”
순욱은 어이가 없다는 듯 진평을 쳐다보다 일이나 해요. 하곤 멍해져 있는 진평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딱- 하는 소리에 놀라더니 후. 하고 크게 숨을 내쉬곤 다시 일을 계속했다. 그러나 아까의 사진에 집중을 잃은 지 오래인지라 진평은 오늘 일을 포기한 듯 태블릿 화면을 꺼버리곤 말을 이어갔다.
“넌 원망 안 해?”
“딱히 그러진 않아요. 제약은 없으니까요.”
“그래? 나라면 평생 울고불고했을 걸.”
“… 그래서 누나가 빛나는거죠.”
“… 그거 고맙네. 빛난다 해줘서.”
순욱이 가져온 간식을 한 입 먹다 진평은 문득 순욱에게 시선이 갔다. 태블릿에 집중된 순욱의 모습을 감상하듯이 조용히 지켜보다 테이블에 그대로 엎드리곤 둥그렇게 미소지었다.
“좋겠다. 그 사람은.”
“…갑자기 왜 그래요?”
“그냥. 그 사람은 순문약 만난 게 천운이네. 맹덕이 같은 사람 만났어 봐. 맨날 속만 썩고 있을걸.”
“계속 그 말 해야 해요?”
“왜? 안돼?”
“아까 복수에요?”
갑자기 언성을 높이는 순욱의 태도에 진평은 놀란 듯 엎드리던 자세를 바로잡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급기야 순욱은 하던 일을 전부 멈추고 진평을 원망하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누나는 선택권조차 없는 게 얼마나 비참한지 알아요? 누나도 그게 싫어서 나왔잖아요.”
“…. 거기까진 생각 못 했어. 미안.”
“사람 다 뒤집어놓고 미안하다고 하면 끝이에요? 나한테 잘해주고 나 좋다고 하고 그러면서 무슨 관계냐 나한테 물어보고. 진평. 당신 대체 왜 그래요..?”
화를 낸 탓인지 머리가 지끈거려 순욱은 자신의 이마를 감쌌다. 뭔가를 직감한 진평이 순욱에게 다가가 자신의 이마를 대 열이 있는지 알아봤다. 진평의 피부가 좀 더 시원해서 머리가 어지러운 것이 조금 낫는 기분이 들었다.
“야 이 둔탱아! 이 날씨에 비 맞고 그러니 열이 나지!”
침대에 눕힌 순욱의 열을 온도계로 다시 확인하더니 해열제와 물을 꺼내 건네주었다. 잦은 야근으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는지 열감기가 온 것 같다는 진평의 말에 순욱은 하루 자면 괜찮아지겠죠 하며 넘겼지만 진평은 면역력이 부족해서 그렇지 부터 시작해서 이것저것 영양제를 가지고 오더니, 그것도 모자라 이것까지 다 먹어야 한다며 따뜻한 한방차까지 대접했다. 간호를 받는다는 느낌보단 간호 당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과한 처방이 어색했다. 이런 손길을 언제 받아봤나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진평에 대한 마음이 풀린 것은 아니다. 대체 저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장난인 건지 진심인 건지 말해주지 않는 그 속내. 진평의 진짜 마음이 알고 싶었다.
“대체 무슨 마음으로 그래요?”
양팔로 한껏 얼굴을 가려 감정을 최대한 추슬렀다. 장난이면 장난대로. 그냥 친구면 친구 인대로. 진평에게 무슨 말이 나오든 순욱은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도 진짜로 나를 가볍게 여긴다면 하는 생각에 불안해진 순욱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런 순욱을 지켜보던 진평은 조용히 순욱의 가린 얼굴을 보여달라는 듯 손을 나지막이 잡았다. 조금씩 팔을 풀어 눈을 뜨니 진평이 기다렸다는 듯 바라보다 순욱의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쓸어주었다.
“좋아하는 마음.”
그 단어 하나가 무엇이라고. 순욱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느낌에 참을 수 없었다. 진평은 자연스레 잡은 손을 자신의 허리에 놓고 조용히 순욱의 품에 들어왔다. 아파서 그런 건지 긴장해서 그런 건지 머리가 더 어지러웠다. 순욱은 더 이상 제대로 쳐다볼 수 없어서 진평의 품에 얼굴을 처박아버렸다.
“진평 최악이다.”
“그걸 이제야 알았어?”
진평은 순욱 안에 있는 욕망을 차근히 꺼냈다. 조조는 꺼내는 대로 드러내는 타입이면 순욱은 그럴수록 욕망을 숨겨 구석에 두었다. 인간의 근원은 이성이 아니라 타고난 욕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순자가 말했는데, 그 순자의 후손은 어찌나 예의라는 것으로 꽁꽁 싸맸는지 내면에 있는 욕망을 잘 감싸 숨겼다. 다른 사람들은 이내 흥미를 잃어 튕겨 나갔겠지만 상대는 진평이 아닌가, 진평은 그렇게 꽁꽁 숨기는 사람들을 잘 알았다. 그런 상대에게 자신을 믿게 만들되 많이 드러내지 않고 조금씩 드러내게 하는 기술이야 지겹도록 이용했던 기술이다. 괜히 조조의 정보통이 되었을까. 차이라면 이 숨겨둔 욕망과 진심은 진평만 알고 있을 것이며 진평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란 걸.
물론 서로가 이 관계가 잘못된 것이라곤 알고 있었다. 호기심이 이끌었던 관계는 점점 진심이 되어가고 있는 게 무서워졌다. 아니 오히려 이 관계는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이기에 더 대담해졌다.
*
토벌에서 돌아온 조조 옆에 진평이 서 있었다. 평소와 다르게 차려입은 단아한 원피스에 순욱은 시선이 계속 갔다. 어르신이 좋아할 만한 이유를 내심 알 것 같았다. 평소엔 숨겨두며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하되, 필요할 땐 누구보다 눈에 띄게 변한다. 말 그대로 조조가 숨겨둔 보물 같다. 조조는 느긋하게 나와 준비하는 듯 순선생 하며 인사하곤 다시 진평에게 시선을 두었다. 만족하는 듯 시선을 두다 진 가문의 상징인 관을 어루만져 바로 세워준다. 삐뚤어졌어요? 하고 다시 확인하는 진평을 보곤 웃더니 그냥, 간만에 본다며 진평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건드리곤 다시 준비하러 갔다.
이마를 살짝 만지는 진평 옆에 자연스레 다가가니 진평이 웃으면서 자연스레 순욱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대인. 신났네.”
“어르신 아버님…. 뵌 적 있으세요?”
“있지. 두세 번 정도? 어르신 잘 계시겠지?”
조조 대신 관청 주변의 환경을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 여기저기 둘러보다 순욱과 눈이 마주쳤다. 진평에게 시선을 고정하는 순욱에게 괜히 자랑하는 듯 웃으며 천천히 그 자리를 한 바퀴 돌았다.
“예쁘네요.”
순욱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에 진평은 웃어버렸다. 저 웃음은 진심으로 기뻐하는 웃음. 장난스레 언제는 예쁜 게 중요하나 그랬잖아? 라고 말하니 순욱은 외면하곤 헛기침을 했다.
“근데 뭔가 이상하지 않아? 오늘따라 기분이 이상해서 잠도 못 잤어.”
“맨날 뒤에 따르다가 어르신 옆에 서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그런가.”
진평이 옆에 서선 순욱의 팔짱을 꼈다. 이건 기분이 안 이상한데. 라며 웃으니 순욱이 휙 하고 팔을 빼냈다. 어르신이 보면 어쩌려고요. 곤란한 듯 작게 말하니 장난스러운 고양이처럼 입꼬리가 둥글게 올라간 채 미소지었다. 오늘은 고생하라며 진평이 순욱의 등을 툭 치곤 자신의 할 일을 하러 갔다. 진평이 시야에 사라지자 순욱도 자신의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즐거운 분위기는 얼마 되지 않아 반전되었다. 예상과는 다른 사건이 생겼다. 순욱의 표정에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순욱에게 소식을 들은 진평은 겨우 일어서는 정도였고, 힘이 생긴 조조는 복수에 눈이 멀어 곧장 서주를 치러 갈 것이라 했다. 그 험한 길을 진평이 따라갔다. 순욱은 일이 잡힐 리 없다. 들리는 소식조차 충격적인데 실제로 보는 서주는 지옥일 것이다. 너무 걱정되어서 전화를 했지만,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 미쳐버릴 것 같았다. 얼마 되지 않아 진평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너머로 듣고 순욱은 누구보다 빠르게 진평을 마중 나왔다. 다시 돌아온 진평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입을 열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입을 열 힘조차 없는지 휘청거리다 쓰러져버렸다. 순욱은 그런 진평을 다급하게 안았다.
다른 것보다 진평이 걱정되었다. 서주의 상황이 참혹하다는 걸 계속 듣고 있지만 직접 본 진평은 밥도 물도 입에 대지 않고 있다. 누워만 있는 진평을 겨우 일으켜 무엇이든 먹이고 달래고 일이 끝나면 무조건 진평에게 달려갔다. 순욱의 발길이 그 쪽으로 향하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계속 달려갔다. 상대는 조조, 주군의 여자다. 주군을 모시는 신하로서, 책사로서 건드려선 안되는 상대임을 알지만 오로지 진평만 생각났다. 중증이다 싶을 정도로 미친 듯이 걱정되어서 아예 주말엔 옆에서 달랬다. 누나. 조금 자요. 부서질까 품에 조심스레 안아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겨우 잠드는 진평을 보고 조금 안심이 되었다. 많이 지쳐있는지 숨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아 매번 숨을 쉬고 있는지 귀를 가까이 대거나 살짝 건드려 살아있는지 확인을 했다. 그리고 확인을 하면 매번 이마에 코에 입술에 자잘한 입맞춤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하는 모습이, 나약한 모습이 안쓰러워서 이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과 동시에 이대로 둘만 남아있었으면 하는 욕심도 생겼다.
순욱의 간호로 진평이 조금씩 회복하자 숨돌릴 틈 없이 다시금 일을 시작했다. 조조가 저지르는 만행에 대한 비난의 화살은 오롯이 진평에게까지 닿았다. 조조의 앞잡이. 조조를 지지한 대가. 누구보다 앞서서 조조에게 힘을 실어준 사람이다. 그런 소리를 최대한 들리지 않게 하려 막으려 하면 진평은 힘없이 둥그런 웃음을 지으며[진평은 본래 바른 사람이 아닌 거 장량이니까 잘 알겠지.]라고 웃어넘겼다. 장안에서도 조조에게 향한 비난의 화살을 받을 때 계책으로 살아남았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남을 것이라고. 첫 번째 패는 그렇게 조조의 신뢰를 받아왔다. 그 신뢰는 어디까지 갈까 이젠 걱정까지 되기 시작했다.
*
위험할 정도로 차가운 공기가 스쳐 지나갔다. 연주성에 조조가 돌아왔고 조조의 앞에 눈물로 애원하는 진궁의 모습이 보였다. 어르신! 하며 무릎 꿇고 진심으로 빌고 있는 진궁을 내동댕이치더니 대인! 하고 달려가 붙잡던 진평마저 내치고 다시 서주로 가버렸다. 분노에 가득 찬 조조의 모습을 퀭하게 순욱이 보고 있었다. 순욱은 모든 게 자신의 책임이라 여겼다. 조조에게 올라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준 것도 자신이기에 이 무고한 희생의 모든 것들도, 진평을 이렇게까지 몰아버린 것도 죄다 자신의 책임이라 여겼다. 조조가 다시 나가게 되면서 진궁과 진평, 그리고 순욱 각자에게 책임이라는 것이 생겼다. 그 책임이라는 것이 어떤 형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허망하게 있는 진평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듯 서류만 쳐다보고 있었다. 조조의 태도에 넋이 나간 사람들은 차례대로 먼저 퇴근하는 듯했다. 순욱은 그런 진평이 걱정되어 쳐다보고 있다가 자신이라도 정신 차리자며 엉망진창이 된 일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견성에 볼일이 있어 먼저 연주성을 떠났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던 순욱은 진궁에게 진평을 잘 달래 달라며 간절히 부탁했다. 견성에서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평소엔 떠나더라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진평의 표정이 당장이라도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내몰린 표정이었다. 그 표정이 잊히지 않아 진평에게 전화를 걸었다. 긴 통화음이 계속 들리다 통화음도 안 들리는 채 조용해지더니 나긋한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렸다.
“응 문약아.”
목소리를 듣곤 안심이 된 순욱은 겨우 한숨을 쉬곤 대화를 이어나갔다.
“누나.”
“왜?”
“……. 그냥요. 일 끝났어요?”
“응. 이제 가려고”
조용히 가라앉은 목소리가 여전히 순욱을 긴장시켰다. 주변 분위기 탓인 건지 오늘의 상황 때문인지 전화 너머로도 차가운 분위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저 누나…이런 부탁해도 괜찮아요? 조금 억지인 것 같은데.”
“어떤 건데?”
“지금 견성으로 와줄 수 있어요?”
“왜?”
“그냥… 보고 싶고. 곁에 둬야 할 것 같아서요.”
“무슨 소리야.”
“아니 그냥. 뭔가 두고 온 기분? 그런 찜찜한 기분 있잖아요. 그게 혹시 누나인가 싶어서요.”
한동안 말이 없던 진평의 너머로 자동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순욱은 진평이 올 것이라 확신했는지 인상 쓰던 미간을 자연스레 풀곤 진평의 대답을 기다렸다. 누나. 하고 나지막이 말하자 차에 시동거는 소리가 들렸다. 진평의 가라앉은 목소리 톤이 조금 올라갔다.
“문약아. 너 시간 많아?”
“딱히 바쁜 건 아닌데 왜요?”
“그냥. 나랑 통화 계속해달라고. 문약이 목소리가 듣고 싶네.”
“갑자기 왜 그래요? 진 선생님이 말랑찐빵이래요? 찐빵 먹고 싶다.”
“뭐라는 거야 진짜. 헛소리하는 거 보니 우리 문약이가 배고픈가 보네. 나 집에서 짐 챙겼다가 가는 길에 사갈 게. 대신에 계속 통화해줘.”
“도착할 때까지 통화하자고요…? 2시간 쯤 될 거 같은데?”
“해줄 수 있어?”
진평이 떼를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 사람이 순욱에게 통화해달라는 말만 여러 번 반복했다. 그 말은 이 행동이 지금에 있어 중요한 행동이란 뜻이다. 좋은 의미는 아니다. 협박을 당하는 건가? 위협을 당하는 건가? 순욱은 계책을 세웠다. 도청의 위험이 있어 직접 물어볼 수도 없다. 방법은 이 전화를 유지하는 방법이기에 배터리를 확인하고 충전기를 빠르게 찾아 연결했다. 가만히 충전기가 연결된 핸드폰을 들어 진평에게 안심하란 듯 말했다.
“네. 도착할 때 까지 할게요.”
진평은 순욱 앞에 나타날 때까지 전화를 놓지 않고 통화를 했다. 순욱 앞에 도착하자 진평의 핸드폰 전원이 꺼져 자동으로 통화가 끊어졌다. 흰색 봉투에 방금 사 온듯한 찐빵을 한가득 담은 채 진평이 차에서 내려 미소지었지만 순욱은 그 둥그런 웃음이 진짜 기뻐서 나오는 미소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 미소 속에 대체 무엇이 들어있길래 자신에게 숨기려 드는 건지는 순욱도 알 수 없었다.
얼마 되지 않아 연주성에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
죽기 직전까지 진궁에게 몰렸던 조조는 다시 올라서기 위해 무엇이든 했다. 극한의 식량난이 지속되어 황건적 토벌을 결행했고 조조는 기도위 시절 자신과 함께한 진평을 데리고 나가기로 했으나 진평은 가길 거절했다. 조조는 배신에 한껏 예민해져 있었지만 그렇게 하라며 진평을 뒤로한 채 순욱이 알려준 판로를 따라 나갔다.
순욱은 여전히 걱정되었다. 진궁의 배신의 화살이 자신에게까지 닿는 것이 느껴져 조심스러워졌다. 진평이라고 오죽할까. 오늘따라 유독 어깨가 작아 보이는 것이 신경 쓰여 쳐다보는데 옆에 있던 곽가가 안쓰럽다는 듯 순욱을 보곤 핸드폰 자판을 두드렸다.
[아 대박 갓쌤 눈빛 보소 ㅋㅋ]
[??]
[갓쌤 ㅈㄴ꿀떨어짐 진갓평쌤 보는 눈빛에 사랑이 떨어지네~♡♡♡♥♡♡♥♡♡♥♥♥]
“ㄱ..곽가 너는 옆에 있는데 자꾸”
당황한 듯 옆에 앉아있는 곽가에게 호통을 치다 일하던 책사들의 시선이 순욱에게 집중되었다. 견성에 있던 사무실에 임시관청을 만든지라 좁아진 자리는 조그마한 행동도 눈에 띄기 쉬웠고, 건너에 뒤돌아 앉아있던 진평도 무슨 일인가 싶어 뒤돌아선 순욱을 보았다. 괜히 부끄러워 일어서다 물 마시러 가야겠다며 텀블러를 가지고 빠르게 탕비실로 도망갔다. 탕비실에서도 여전히 곽가의 문자는 계속되었다.
[갓쌤 안쓰러울 정도라서 알려드림ㅠㅋㅋ
감히 조조의 여자를 건드린다? ㅈㄴ무서움 나 같음 엄두도 못 냄ㅋㅋ]
[그ㄹㄴㅓ거 아니니까 진짜]
[대체 갓평쌤 뭐가 좋음?
진평 무서운 사람임ㅋㅋ 여포도 속이고 조조도 속이는데~갓쌤 못 속이겠음?]
[그런 말 하지마]
[진평 조조과임. 백퍼ㄴㄴ천퍼임ㅋㅋ]
[너 그런 말 할 거면 차단한다.]
[ㅋㅋ ㅈㅅ안그러겟쑵뉘다앙]
한숨을 쉬곤 스푼으로 커피를 저었다. 놀리는 곽가가 얄밉기도 하지만 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은 아니다. 일어난 김에 머리도 식힐 겸 바깥으로 나오니 곽가가 이미 의자 한 자리를 차지하곤 홍삼이 쓴지 인상을 한껏 쓰고 있었다. 순욱은 자연스레 곽가 옆에 앉아 커피를 한 잔 마시더니 곽가의 말을 기다렸다.
“티라도 내지 말던가~ 사람들 다 알겠네ㅋ 근데 이미 다 아는 듯.”
“알고 있을걸.”
“엥? 그러고도 가만히 있대요? 그거 나름대로 대박임 개 소름;; 막장 드라마도 그 정도면 방송불가임 ㅇㅈ?”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거겠지. 그 사람도 나도.”
“너무 믿지 마요. 조조 패잖아요~”
조조의 패. 곽가가 정곡을 찔렀다. 진평은 조조의 패다.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알고 그가 자랑하는 책사. 사람을 믿지 않는 조조가 믿음을 이용하기 위해 쥐고 있는 패. 신뢰를 이용하는 진평을 순욱은 이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해야 했다. 거짓말을 못 하는 그 사람이 말하는 사랑을 믿어야 하는지, 그 사랑이란 것조차 조조가 이용하는 것인지 생각할수록 순욱은 헷갈리기 시작했다. 차라리 이 모든 것들을 조조에게 들켜 죽어버려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했다. 나는 이 사람을, 당신의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시원하게 말할 기회이지 않은가. 그러나 조조는 이미 이 관계를 알고 있을 것이다. 의심이 많은 조조는 자리를 오래 비우면서 사람을 심어뒀을 것이고, 그 사람은 우리의 이야기 하나하나를 옮겨 글로 적었을 것이라고. 그리고 아직 여전한 관계를 보며 '도구'로서 우리가 필요하다는 확신을 가져왔지만, 그 관계의 끝이 어디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조조가 손에 쥐고 있는 붉은 실은 언제 끊어질지 위태로울 뿐이다.
그날은 이상한 꿈을 꿨다. 어두운 길을 조심스레 걷던 순욱의 눈앞에 커다란 수족관이 나타났다. 푸른 물속을 뱅뱅 도는 아름다운 생명. 그 생명체는 자연스레 내 시선을 빼앗아갔다. 그건 거대한 돌고래였다. 거대한 유리 속에 갇혀있던 돌고래는 빙글빙글 내 주변을 돌다 옆에 있던 점잖은 남자에게 멈춰 슬픈 눈으로 바라만 보았다. 그는 그 눈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웃으며 내게 소개했다.
“아주 예쁜 돌고래지요. 제 자랑입니다. 이곳은 이 친구를 위해 마련한 것이죠.”
그는 돌고래가 너머로 보이는 유리를 손바닥으로 슬며시 쓸었다. 돌고래는 고개를 돌려 나를 한 번 쳐다보다 유유히 수족관 속을 빙글 돌았다. 아름다운 헤엄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좋은지 그 남자는 돌고래를 이용해 자신의 이득을 취했다. 저 돌고래는 행복할까. 신경 쓰일 때쯤 남자의 소유였던 돌고래는 이내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에 의해 꺼내지며 본래의 바다로 향했다. 돌고래는 이제 자유가 되었고, 이젠 모두가 행복해질 거라 믿었지만 돌고래는 드넓은 바다 주변을 빙빙 돌다 다시 자신을 가두던 그 사람에게 안기고 말았다.
그 남자는 되레 사람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당신들은 아무런 사정도 모른 채 그저 나를 비난하기만 해. 사랑하는 사이. 그 남자의 말이, 그의 사랑이라는 것이 또다시 돌고래를 가둬 빙빙 돌게 만들 거짓임인 걸 단번에 알아채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가 선택한 일이기에 내가 나설 곳이 없어 다시 뱅뱅 도는 돌고래만 슬프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기이한 꿈에 눈을 살며시 떠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 꿈은 무엇일까. 슬픈 눈을 가진 그 생명의 눈에서 진평이 떠올랐다. 나는 당신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내 고민되기 시작했다. 이대로면 당신은 이용당하고 상처받는 것이 뻔할 텐데 나는 당신의 그런 돌고 도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야 할지, 목숨을 걸고 넓은 곳으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되기 시작했다.
*
“문약아 우리 도망갈까?”
“.. 네?”
잠깐 견성 바깥 상황을 보는 김에 바람을 쐬려고 나온 것인데, 진평의 그 한마디에 순욱은 머릿속까지 새하얘졌다. 무슨 의도인 건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 진평의 그 말에 순욱은 그저 뒷모습만 쳐다보고 있었다.
“장난이죠?”
“진심이야.”
한동안 뒤돌아있던 진평의 뒷모습이 다시 순욱을 바라보았다. 장난스럽던 눈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눈에 진심이란 게 느껴졌지만 순욱은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말에 담긴 것이 진심인지, 배신에 대항하는 조조의 계책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 그냥 둘이서 평범한 집에 살면 어떨까 해서.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난 과수원이 좋더라. 나무를 여러 그루 심고 나무가 잘 자라길 바라면서 매일 나무들 사이를 거느리며 지켜보는 거지. 꽃이 피는 것을 보고 꽃가루를 묻히곤 열매가 예쁘게 열리고 익으면 맛있는 과일을 맛보고 상처가 나지 않게 조심스레 따서 시장에 내다 파는 거야. 그렇게 얻은 돈으로 조금씩 모아 우리끼리 살고 잠들기 전에 너랑 마주 보며 이렇게 살아가는 하루하루에 감사하며 잠드는 거지.”
순욱은 나지막이 가라앉은 진평의 목소리만 들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 꿈 같은 것이다. 둘이 같이 도망가게 되어도 조조는 둘을 찾아낼 것이고 찾아내지 못하더라도 두 가문은 멸문지화 당할 것이다. 누구든 예상하는 결말이다. 배신하는 자의 처벌. 가문뿐만이 아니다. 순욱이 끌어들인 사람들이 모두 피해 갈지 모르는 일이다. 조조라면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니까. 이미 배신의 무게를 한 번 감당했던 진평이 모를 리 없는 일이다. 그런 진평이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니 더 혼란스러웠다.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어.”
“누나…. 진향 당신은… 자유를 위해 있는 것이죠.”
“그 자유가 내가 원하는 자유인지 모르겠어.”
무엇을 말하려는 듯 머뭇거리던 진평이 버릇처럼 둥그런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맹덕이가 결혼하자더라."
"지금 이때요? 그건 진가문을 방패막이로 쓰겠다는 거잖아요."
"알아. 아마 하게 될 거야.“
순욱이 놀란 듯 진평의 팔을 잡고 언성을 높였다. 순욱의 흔들리는 눈을 쳐다보다 그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진평은 고개를 숙이곤 자신의 팔을 잡은 손을 살포시 풀곤 그 손을 힘없이 잡았다.
“이 자유는 그 사람이 쥐여준 거잖아. 조조가 길을 만들어줬고 난 그 길을 따라왔어. 그 길가에 네가 있는 거고."
순욱은 비로소 그 이질감의 정체를 확신했다. 정략. 정략을 피해 달려온 진평은 정작 조조에게 갇혀 따르고 있었다. 그게 무슨 자유일까. 당신이나 나나 이용당하는 그런 처지면서 자신은 그렇게 여유롭다는 듯 둥그렇게 웃었다. 거짓말을 못 한다는 사람이 그리도 자신의 처지를 숨길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정말로 당신은 그 사람이 주는 자유를 믿었던 것인가. 당장이라도 손을 잡고 같이 가자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순욱도 진평의 자유를 찾아주진 못한다. 서로의 책임이 얽매여 그 책임은 조조의 도구로 사용될 건 알고 있었다. 그 각오로 나선 대업인 것을, 천하 평정의 운명. 진평의 그 거창한 운명도 서로를 도구로 이용할 것이다. 이미 정해진 결말인 걸 알면서도 피해 보려 안간힘을 쓴 것인가. 허탈해졌다.
진평이 순욱의 대답을 바라는 건 아니다. 그저 자신의 마음이 누구에게 있는 건지 확인을 하고 싶은 마음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바보같이 당신을 지켜줄 힘이 없는 걸 아는 순욱은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그와 동시에 스스로 쏟아진 원망. 아둔하다. 이런 당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런 계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도망가자. 문약아…. 아무도 없는 데로… 문약아…”
떨리는 목소리로 순욱을 부르더니 이내 고개를 숙여버렸다. 처음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았다. 슬퍼는 했지만 울지는 않았던 사람이 처음으로 펑펑 울어버렸다. 순욱은 계속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대답할 수도 달랠 수도 없었다. 그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진평은 그런 순욱을 잘 알고 있기에 순욱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도 알았다. 그는 거절할 것이고 이 관계는 자연스레 멀어질 것이라고.
온전한 사랑은 욕망을 이길 수 없다. 온화한 의식이 본능적으로 이끄는 무의식을 이길 리 없다. 자신을 위해 진평을 원하는 조조와 달리 순욱은 진평의 행복을 향해 있었다. 처음부터 진평은 알고 있었다. 순욱은 그저 진평을 '사랑'해서 조조를 이길 수 없다고. 단지 진평은 길이 필요했다. 조조를 벗어날 갈래의 길. 그러나 순욱은 길잡이가 되어줄 수 없었다. 사랑 앞에선 당신을 이끌 장각도, 당신의 위기를 구하는 장량도 아닌 그저 순욱 한 사람이었다. 순욱이라는 자신 그대로의 힘으로 당장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저 진평을 안아주는 것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없다. 결국 해결도 없이 사랑하는 사람이 상처받는 것만 바라보는 방관자가 될 뿐이란 걸 순욱은 짐작했다.
서로가 말하지 않아도 이날은 우리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진평을 바라보며 가슴 속에 있던 감정을 보였다.
“사랑해요. 당신이 무슨 선택을 하든 곁에 있어 줄게요.”
계속 말하는데 자꾸만 눈물이 나버렸다. 눈물이 나더라도 감정을 다 털어내야 한다. 그런 순욱을 바라보는 진평은 나지막이 “멍청이.”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다. 진평은 예상은 했을 것이다. 그래 이래야 순문약이지. 애써 웃으며 입을 맞췄다.
*
진평은 더는 순욱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그저 처음처럼 둥그런 미소만 짓다 일하는 것만 반복했다. 순욱의 책상에 조금씩 약이 쌓여갔다. 피곤해서 그런지 소화가 잘 안 되네요. 라고 넘겨버렸는데 약을 자꾸만 먹어도 무언가 걸린 듯한 체기에 제대로 넘기질 못했다. 괜찮다 싶어 밥을 먹다가도 조금 지나버리면 속이 너무 안 좋아 화장실로 가 그대로 토해버렸다. 처음 있는 상황에 억울해져 버렸다. 나만 아픈 건지 야속하게 웃기만 하는 진평이 짜증나기 시작했다. 그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평소 하지 않던 욕부터 튀어나왔다.
“씨발… 어떡하지 진짜…..”
스스로만 비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