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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질 자들을 위하여

1

 

 

그건 거대한 돌고래였다.

 

위련은 거세게 출렁이는 나룻배를 부여잡았다. 흔들릴 때마다 시커먼 밤바다가 뱃속으로 흘러 넘쳤지만 위련은 아랑곳 않고 몸을 꼿꼿이 세웠다. 빗물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내며 위련은 제 앞을 응시했다. 때때로 배에 부딪혀 조각난 파도가 시야를 방해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이따금씩 물 위로 나타나는 돌고래는 무엇이 그리 고통스러운지 울부짖고 있었다. 눈가에 박힌 보랏빛 수정 탓인지, 다른 무언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거센 빗소리와 천둥소리에 묻힐 법도한데 그 흉흉한 울음소리만이 선명하게 공중을 떠돌았다. 그 몸부림을 덤덤히 받아들인 위련은 눈을 감았다.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더 이상 이곳에 있어봤자 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1, 2, 3…. 속으로 셋을 센 위련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귓가에 꽂히던 거친 소리들이 지워지고 삐, 삐, 둔탁한 기계음이 채워졌다. 조심히 벌어지는 시야 사이로 새하얀 빛이 가득 차자 위련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몇 번 눈을 감았다 뜬 후에야 빛에 익숙해진 위련은 제 앞에 누워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가슴에 걸쳐진 담요가 그의 숨소리에 맞춰 오를락 내렸다. 드러나 있는 얼굴은 마치 죽은 듯이 창백했고, 그 안쓰러운 안색과 다르게 모노클만은 홀로 반짝이고 있었다. 아, 저것만 없었어도 그가 이렇게 고통 받을 일 없을 텐데. 모노클을 향해 손을 뻗던 위련은 잠시 주줌하다 이내 그만뒀다. 애석하게도 저 모노클은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상대의 신기는 저런 물건이 아닌 눈알, 그러니까 신체 일부였다.

위련은 세수하듯 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제 예상보다 상황이 심각했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아차렸다면 이런 일 없었을 텐데. 위련은 제 무능함을 탓했다.

 

본인이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안화의 유해화가 진행 중이었다.

2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아침 일찍 중앙청에 출근해 책상에 쌓여있는 서류 더미와 알림 가득한 메일을 확인 하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부지런히 해내지 않으면 추가 근무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위련은 지체 없이 책상에 앉아 일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서류를 분류하던 위련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면서도 곰곰이 생각하던 위련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항상 제 사무실에 있던 안화가 보이지 않았다. 못미덥다는 이유로 온갖 간섭을 하다 아예 제 몫의 책상을 사무실에 들여놓은 안화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항상 위련보다 먼저 출근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안화가 늦잠 잘 리 없고, 외근 나갔나. 어쩌면 안화가 미리 언질을 주었는데 까먹었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위련은 그의 부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 날 안화는 점심이 지난 이후에야 느즈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화, 오늘 외근 다녀왔어?”

“…그래.”

“역시 그렇지? 안화가 출근하지 않아서 깜짝 놀랐는데 안화가 땡땡이 칠 위인은 아니니까. 안화가 말했는데 내가 까먹었나봐. 나도 참 정신없네.”

 

이제부터 그런 기본적인 스케쥴도 기억하지 못하면 어쩌느냐고 한 소리하겠지. 위련은 제가 말을 하고도 이어질 안화의 잔소리에 가슴을 졸였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상대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대신

 

“오늘은 내 사무실에 있겠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연락해.”

 

그리 짧게 말을 마치고 자리를 떴다. 그의 뒷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불안했지만 가슴 한쪽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그 감정을 애써 외면했다. 왜냐면 안화가 제게 말하지 않을 비밀은 없으리라 생각했으니까. 위련은 되래 이 일을 기회로 생각했다. 안화의 도움 없이도 완벽히 일을 해낸다면 그에게 조금이라도 인정받을 수 있을 테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꽤나 안일한 생각이었다.

 

위련이 결국 그의 사무실로 찾아간 것은 그로부터 3, 4일 후였다. 기회도 하루 이틀이지, 그가 이리 오래 자리를 비운 것은 이상했다. 물론 본인이 제 사무실에 있겠다는 게 무엇이 이상하겠느냐마는, 애초에 온갖 핑계를 대며 위련의 사무실에 한 자리 차지한 것은 안화 본인이었다. 퇴근 시간 즈음에 사무실에 들러 서류를 검토하군 “잘했네.” 짤막히 말을 마치고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며 위련은 애써 숨겨놨던 불안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혹시 제게 화가 난 일이라도 있나? 중앙청을 맡길 새로운 지휘사 후보라도 찾고 있는 건 아닐까. 한 편으론 안화가 그럴 리 없다는 마음과 싸우던 위련은 끝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한 위련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안화, 나야.” 그리 작은 소리로 말한 것도 아닌데 별다른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보아 부재중은 아닌 모양인데, 혹시 잠시 눈을 붙이고 있나? 평소였다면 돌아갔을 테지만 더 이상 물러나기 싫었던 위련은 오늘따라 아집을 부렸다.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나 들어간다.” 허락 없이 들어왔다고 혼내면 혼내라지 뭐! 위련이 개문 버튼을 열자 문은 별다른 잠금 없이 열렸다.

사무실에 한 발자국 내딛은 위련은 망설임 없이 책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별다른 일 없으면 안화는 항상 그 자리에 앉아 서류 더미들과 씨름하고 있었다. 저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왜 왔냐고 무심히 물었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비어있는 의자가 아무렇게나 밀쳐져 있었고, 바닥엔 서류가 어수선하게 내팽개쳐져 있었다. 아무리 급한 일이 생겼더라도 그가 이 꼴을 내버려뒀을 리 없을 텐데. 위련은 그제야 제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는 걸 깨달았다.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심장 소리가 귀를 타고 뇌까지 닿아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다. 위련은 홀린 듯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책상에 다가갈수록 불안함은 또렷해지다 못해 확실해졌다. 안화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 그것도 보통 일이 아닌. 그저 몇 발자국 떨어졌을 뿐인데 천리와도 같던 거리에 겨우 도달한 위련은 나지막이 불렀다.

 

“…안화?”

 

책상 뒤에서 몸을 굽히고 있던 안화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괜히 베스트의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안화는 덤덤히 입을 열었다.

 

“서류가 떨어져서 줍고 있었을 뿐이야. 그렇게 심각하게 바라보지 마.”

 

안화는 위련과 눈을 마주쳤다. 한 치 흔들림 없이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던 위련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전히 심장이 뛰고 있었다.

 

“내가 그런 말에 속을 거라 생각했어?”

 

방금 전까지와 달리 망설임 없이 상대에게 저벅저벅 걸어간 위련은 바로 옆에 떨어져있던 무언가를 주워들었다. 위련은 그게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끝없는 윤회를 보는 동안 수없이 봐왔던 것, 종말에 끝에 다다를 때마다 보았던 것. 이제 다시는 볼 일 없을 거라, 보지 않을 거라 여겼던 불길한 수정.

위련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가여운 그 손을 바라보며 안화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변명이 통하지 않을 거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저 상대의 말을 기다렸다. 이미 마음의 준비를 마친 안화와 달리 갑작스레 상황에 직면한 위련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대체 왜, 어째서, 어떻게, 이런 일이. 짧은 침묵 끝에 위련이 내뱉은 질문은 간결했다.

 

“언제부터야?”

“3, 4일전부터.”

 

…역시. 애써 억누르던 불안함이 현실이 되자 순식간에 서늘함이 밀려왔다. 쿵 내려앉은 심장은 멈춘 것처럼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오한을 참지 못하고 목에 올라온 닭살을 꾹 누르며 위련은 안화에게 시선을 옮겼다.

 

“누구누구 알고 있어?”

“레이첼, 앙투아네트.”

“지금 당장 중앙청 치료실에 입원해.”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무슨 뜻이야?” 금색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내가 생각하는 그 뜻이야?” 안화는 대답이 없었다.

 

“있잖아, 안화.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고 있잖아. 아무리 너는 마음 없다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 바로 앞에서 자결할 거란 말을 들어야겠어?”

 

위련은 상대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렸다.

 

“이건 지휘사로써 명령이야. 입원해.”

 

단호한 뒷모습을 바라본 안화는 머리를 짚었다. 이럴 까봐 그가 알기를 꺼려했던 건데. 제 지휘사가 저리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꺾기 어려웠다. 평소엔 무슨 일이든 오냐오냐 순순히 따르면서 안화와 관련된 일이라면 다른 사람처럼 굴었다.

 

“알았다. 네 말대로 중앙청 치료실에서 입원해 치료를 받지. 다만 그곳에서도 업무는 진행할 거다.”

“왜…!”

“내가 쓰러져도 중앙청 업무는 돌아가야 하니까.”

“내가 할 테니까 안화는 쉬어.”

“아직 너 혼자서는 무리다.”

“그런 사람이 치료 받는 걸 거부해?”

“거부하진 않았어, 고민 중일 뿐이었지.”

 

말장난은 그만하자. 위련은 대화를 끊고 급히 레이첼에게 연락했다. 지금부터 안화의 유해화를 막아야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3

 

 

쇠똥구리 모양 보석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제 손가락 사이에 금색을 이리저리 형광등에 비추어 본 레이첼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이야, 리프의 신기는 한 번 연구해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하게 될 줄은 몰랐네!”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잘도 태평한 소릴 떠들어댔다. 언행은 다소 가벼워도 항상 제 할 일은 뚝딱 해치운다는 사실을 잘 아는 위련도 이번만큼은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럴 시간 없는 거 알잖아.”

“너무 그러지 마, 데이터가 많을수록 성공 가능성이 높아진다구.”

 

매섭게 쏟아지는 시선을 가볍게 넘긴 레이첼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여전히 위련은 못마땅한 듯 팔짱을 끼고 있었다. 팔뚝에 얹어진 손가락 하나가 까닥까닥하는 모양새가 익숙하다. 안화가 자주하는 행동이었다. 저도 모르게 옮은 모양이네, 그리 생각한 레이첼이 말을 이었다.

 

“불사결정을 연구한 덕분에 관련 분야의 기술이 월등히 높아졌지만 그래도 앙투아네트 때처럼 성공할 거란 보장은 없징.”

“이번에도 그 때처럼 유해화 된 부분을 원래대로 회복시키려는 거지?”

“그렇지, 문제는 유해화가 꽤 진행된 상태란 점이지. 게다가 신기도 신체 일부가 변형된 형태고.”

 

말을 마친 레이첼은 보석을 왼쪽 눈가 언저리에 가져다댔다. 안화의 신기인 호루스의 눈은 그의 왼쪽 눈에 기생-이런 표현을 쓰면 호루스가 기분 나빠하겠지만 현재 위련은 신기의 심기를 맞춰줄 생각이 일절 없었다-하고 있었다. 신체와 직접적으로 접촉, 아니, 아예 신체의 일부인 만큼 유해화가 더 빨리 진행됐으며 치료도 까다로웠다. 위련은 레이첼의 손에 들린 보석을 빼앗듯 가져왔다.

 

“그럼 신기를 완전히 제거하는 방법은 어때?”

 

위련의 말이 끝나자마자 레이첼의 안대에 느낌표가 떠올랐다. 잠시 침묵한 그가 계산을 끝마쳤는지 입을 열었다.

 

“가능성이 없진 않아. 하지만 안화가 동의할까?”

“안화의 의견은 필요 없어.”

“이럴 때보면 위련은 무섭다니까. 다른 신기사들에겐 유하면서 안화한테만 유독 그래.”

“만약 이 방법을 쓴 다면 성공 확률은?”

 

잡담할 여력이 없는지 위련은 상대의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다소 예의 없는 행동에도 레이첼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을 이었다.

 

“1할 정도려나.”

“1할이나 되네.”

“푼일 수도 있고.”

“리여도 상관없어.”

 

최대한 빨리 준비해. 위련은 그 말을 끝으로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현재 안화의 몸 상태는 극비에 붙여졌다. 영원한 비밀은 없듯이 언젠가 알음알음 퍼져나갈 소식이었지만 당연한 선택이었다. 안화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대책 없는 상태에서 그의 몸 상태가 새어나가 봤자 좋을 리 없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앙투아네트와 에뮤사가 대비할 시간을 벌기 위한 결정이었다.

위련은 입술을 잘근 씹었다.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 답답했으나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급기야 이럴 바엔 윤회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편이 나았을 거란 생각까지 스쳐지나갔다. 윤회 속이면 어떠한 일이 생겨도 7일만 지난다면, 7일만 버틴다면 그는 다시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돌아올 테니까.

…내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람. 위련은 헛웃음이 나왔다. 지긋지긋하다 못한 윤회가 다시 시작되길 바라다니, 심적으로 지치긴 한 모양이었다. 병실 앞에 선 위련은 밀려들어온 생각을 급히 덮었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제 뺨을 두어번 가볍게 찰싹였다. 잡념을 버리기 위해 얼얼한 통증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가죽 장갑 감촉에 쌓여진 통증이 완전히 가시고 나서야 위련은 병실 문을 열었다.

 

“자주 오지 말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을 텐데. 너를 주시하는 눈이 얼마나 있는지 벌써 잊었나?”

“괜찮아, 나도 이제 그 정도는 떨궈낼 수 있어.”

 

병상에 누워있음에도 안화는 평소와 똑같이 서류 더미 속에 파묻혀있었다. 반강제로 입원한 만큼 서류 작업은 제 의지대로 할 거라는 강력한 고집 때문이었다. 위련은 협탁 위에 쌓인 서류를 한 아름 안아들었다. 안화의 눈썹이 꿈질 움직였다. 뭐하는 짓이냐고 안화가 묻는 것보다 위련의 입이 열리는 것이 빨랐다.

 

“곧 수술 들어가니까 그 때까지만이라도 푹 쉬어. 체력이 제일 중요하대.”

 

위련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햇살을 머금은 온화한 미소였지만 안화는 탐탁지 않아 보였다.

 

“레이첼 말로는 이제 수술로도 힘들 거라 했는데.”

“네 신기를 제거할 거야.”

 

말의 무게에 비해 안화는 별로 놀란 눈치가 아니었다.

 

“생각보다 놀라지 않네?”

“아주 불가능한 방법이 아니니까. 게다가 네가 이렇게 나올 거라 예상 못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넌 내 의견을 물으러온 게 아니겠지. 안화의 말에 위련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딱히 속내가 간파되어 당황스럽다거나 할 말을 잃은 건 아니었다. 어차피 숨길 마음 자체가 없었으니까. 안화를 상대로 어쭙잖은 잔꾀를 부려봤자 후폭풍만 거세진다는 걸 위련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말에는 꽤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난 거절할 거다.”

“왜?”

 

위련은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반문을 급히 갈무리했다. 서로 맞닿은 시선도 급히 피했다. 푸른 눈동자가 저를 계속 주시하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위련은 외면했다.

 

“앙투아네트의 결심과 달리 그를 살린 것처럼, 나도 널 살릴 거야. 거기에 네 의견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네 감정인가.”

 

위련은 다시 한 번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는 속마음이 꿰뚫려 할 말이 없어진 게 맞았다. 안화는 고개 돌린 제 지휘사를 바라봤다. 위련은 저와 관련된 일이라면 이상한 아집을 부렸다. 원인은 복잡했지만 굳이 단 한 가지로 축약하자면 사랑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어긋나다 못해 손쓰지 못할 지경이 되어버린 애정. 저 하나만을 향하였고 무엇보다 딱히 싫지도 않아 내버려두었던 저 애정이 한껏 삐뚤어진 채 돌아왔다.

 

“위련.”

“푹 쉬어, 안화.”

 

서류를 전부 다 안아든 위련은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병실을 나왔다. 쫓기듯 후다닥 밖으로 나오던 위련은 그만 문 앞에 있던 무언가와 콩 부딪혔다. 넘어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갈 곳 잃은 힘에 비틀거리자 상대가 급히 위련을 붙잡았다. “괜찮아?” 익숙한 음색이 머리 위로 떨어지자 위련은 고개를 들었다. 가슴 녘부터 늘어져있는 새하얀 머리카락을 타고 쨍한 분홍색을 머금은 눈동자까지 올라가자 동공 대신 자리 잡은 새하얀 열쇠 구멍에 시선이 멈췄다.

 

“미안. 들으려고 들은 건 아닌데 들어갈 타이밍을 놓쳐서.”

 

신기사 이얀은 머쓱한 듯 제 뒷목을 주물렀다. 하하, 어색하게 웃은 이얀은 저만치 멀리 떨어진 자판기를 가리켰다.

 

“잠깐 차 좀 마실래?”

 

위련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얀은 상대를 질질 끌다시피 데려와 소파에 앉혔다. 복도에 놓인 가죽 소파는 싸구려인지 딱딱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위련은 주머니에서 대충 동전을 꺼내 집어넣는 이얀을 묵묵히 바라봤다. 이얀은 “련, 코코아가 어때? 괜찮아?” 그리 말하며 이미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그럴 거면서 왜 항상 묻는 거야. 위련은 웃음이 나왔다.

이얀에게 종이컵을 건네받은 위련은 말없이 코코아를 한 모금 마셨다. 음료가 입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가 뚜렷히 들릴 정도로 복도는 조용했다. 웬일로 입도 뻥끗 하지 않는 게 이얀은 말을 고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침묵 끝에 이얀이 입을 열었다.

 

“얘기는 들었어.”

 

짧지만 많은 이야기가 담긴 말이었다. 위련이 저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이얀은 급히 말을 이었다.

 

“당사자한테 들은 거야. 내 신기, 이래저래 쓸모가 많잖아. 오늘도 호출해서 불려온 거고.”

“안 가도 돼?”

“생각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거 같아서.”

 

별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목이 타는지 이얀은 커피를 들이켰다.

 

“살고 싶지 않아서 거절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 뭐라고 해야 하지, 막연히 살고 싶단 원초적인 본능보단 중앙청을 두고 눈 감고 싶지 않을 거 같아. 병상에서도 서류 작업하는 꼴 좀 봐.”

 

치가 떨린다는 듯 이얀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린 시절부터 일찍이 사회에 뛰어들어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지만 그만한 독종은 처음이었다. 잠시 눈을 내리깐 이얀은 위련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위련도 있고.”

“내가 못 미더워서?”

“아니, 그냥 좀 더 단순하게. 널 혼자 두고 가기 싫겠지.”

“아직 나한테 중앙청을 맡길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아니, 그런 거 아닌데. 내가 말한 건 좀 더 로맨스적인 늬앙스였는데. 왜 자꾸 그런 쪽으로 가는 거야? 안화도 참, 뿌린 대로 거둔 거니까. 설명하길 포기한 이얀은 그냥 말을 말았다. 괜히 남의 연애사에 간섭하지 않은 게 도리였다.

커피를 마저 입에 털어놓은 이얀은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힘차게 자리에 일어난 그는 괜히 치마를 탈탈 털었다. “나도 한 번 얘기해볼게. 본인 옹고집을 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방법이 있다는데 손도 못써보고 떠나보내기는 싫거든.” 그러곤 위련을 향해 한 번 찡끗 윙크를 지었다.

 

“수술은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진행될 거 같으니 설득할 필요 있나 싶긴 한데. 그래도 이런 건 본인 마음가짐이 제일 중요하다잖아. 본인이 받아들여야 성공 확률도 높아지고, 나중에 회복도 빨리 되고 좋겠지.”

“부탁해. …고마워, 이얀.”

 

이런 걸로 뭘. 한 번 씨익 미소를 보인 이얀은 위련에게 간단한 인사를 남기고 병실로 들어갔다. 위련은 이미 상대가 떠나고 없어진 빈 공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어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있었다.

 

4

 

 

한 낮의 시가지 공원은 한적했다. 따스한 햇살이 잔디를 비추고 선선한 바람이 지나가는,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평화로운 이곳은 얼마 전까지 흑문 몬스터가 점령하던 지역이었다. 암흑의 손 두목인 렉터를 필두로 몬스터를 토벌하고 시설까지 새롭게 정비했으나 그럼에도 찾는 인파가 드물었다. 중앙청에서 대대적으로 홍보를 해도 새롭게 단장한 공원에 대한 호기심보다 불안함이 더 컸는지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덕분에 이 공원을 찾는 사람이라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는 신기사들 뿐이었다. 지금 이얀처럼 말이다.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을 하나 알아버렸어.”

 

벤치 위로 나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나뭇잎 사이로 언뜻 비치는 빛을 피하며 등받이에 몸을 기댄 이얀은 한숨을 푹 쉬었다. 사실 그에게 이런 일은 흔했다. 뭐든 발을 담그고 보는 성격 탓이었다. 철이 들기 전부터 연예계에 뛰어들어 온갖 일들을 보고 들어온 이얀은 어떠한 사실을 알게 되어도 눈 깜짝 안 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처음으로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뭐라고 할까, 너무 깊은 수렁을 봤다고 해야 할까, 정말 보면 안 될 걸 본 기분이라고 할까….

게다가 이런 일은 당연하게도 비밀 엄수가 세트로 딸려오기 때문에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 그런 생각이 들지도 않았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말하고 상담 받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얀은 결국 말할 수 없는 비밀 대신 마법의 주문을 외쳤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그러자 돌아올 리 없는 대답이 들렸다.

 

“여기 고뇌에 빠진 길 잃은 어린 양이 보이네요.”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었는데? 이얀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뒤돌아봤다.

 

“아름다운 아가씨, 무슨 고민거리가 그렇게 많으실까요? 자, 이 신관에게 다 토로하세요!”

 

풀숲에서 걸어 나온 상대는 이얀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신을 모시는 자면서도 정갈하지 못하게 앞섬을 다 풀어헤치고 다니는 불량 신관 세츠였다. 그는 벤치에 몸을 기대 한껏 폼을 잡고 있었지만 머리에 붙은 나뭇잎 때문에 그닥 분위기는 살지 않았다.

 

“나 농담할 기분 아니야.”

“아하하, 알아. 딱 그래 보여.”

“처음으로 여기저기 찔러보는 짓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등받이를 한 손으로 가볍게 뛰어넘은 그는 그대로 벤치에 몸을 맡겼다.

 

“안화쨩에 대한 일이지?”

“역시 세츠도 들었구나?”

“동생이 협조를 부탁받아서 보호자 명목으로. 우리 리프 능력이 워낙 좋잖아!”

 

이얀은 세츠의 팔불출을 가볍게 넘겼다. “대충하면 안화 얘기가 맞는데 정확히 따지면 안화 얘기가 아니야.” “그럼 위련 얘기겠네.” 딱히 어렵지 않은 추리였다.

 

“난 왜 그 둘 사이에 껴서 새우등 터지고 있는 거야. 사람 목숨 걸린 문제니까 내버려둘 수도 없고.”

“아하하, 여전히 오지랖 하난 넓네. 이럴 땐 술 한 잔 마시는 게 딱인데.”

“넌 네 친구가 몸져 누워있는데 술이 들어가?”

“그러니까 더 간절해지지.”

“365일 간절한 사람이 그런 말 해봤자 와닿지 않아.”

 

이얀은 세츠에게 그만 일어나라고 턱짓했다.

 

“안화가 아니라 위련이를 설득해야할 일이었어. 너도 좀 도와줘.”

“네가 바란다면, 불가능하더라도 들어줘야지.”

“듬직하네요, 신관님. 처음으로 세츠가 든든하게 느껴졌어.”

“처음이라니 난 항상 든든해.”

 

뭐래. 이얀은 어깨만 들썩였다.

 

 

그런 의미로 나도 수술을 반대하는 입장으로 돌아섰어. 세츠를 대동한 이얀이 그리 말하자 위련은 당황한 듯 서류를 떨궜다. 제 사무실 바닥에 흩뿌려진 서류를 수습할 생각도 못하고 위련은 이얀에게 쏘아댔다.

 

“왜?! 너무해! 설득 해준다면서 네가 설득 당하면 어떡해!”

“어, 음, 그게… 인류를 위해서….”

“나한텐 인류보다 더 중요해!”

“네가 이렇게 나오니까 안 돼! 그리고 지휘사란 양반이 그런 말 하지 마! 네 위치를 생각하란 말이야!”

 

이얀은 머리를 박박 긁었다. “수술 성공 확률 못 들었어? 1퍼센트래, 10도 아니고 1. 100번 시도해야 1번 성공할 수 있다잖아.” 이얀은 위련의 금색 눈동자와 마주했다.

 

“너, 죽어도 괜찮아?”

 

정말? 이얀이 다시 한 번 되묻자 위련은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한 달, 길어봤자 삼 개월이 최대라고 했어. 위련은 천천히 제 생각을 말했다.

 

“이얀, 너도 말했잖아. 방법이 있는데 손도 못써보고 떠나보내기 싫다고. 나도 그래. 뻔히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왜 반대하는지 모르겠어.”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게 좋을 거 같네.”

 

바닥에 내팽겨진 서류를 전부 집어든 세츠가 입을 열었다.

 

“잠깐, 세츠!”

“어차피 여기 있는 멤버 모두 윤회랑 위련의 업적에 대해서 알고 있잖아.”

 

위련보다 한 뼘도 더 넘게 큰 세츠는 몸을 쭈그려 상대와 눈을 마주쳤다.

 

“련, 그는 너를 걱정하고 있어. 혼자 남겨질 네가 걱정 돼서 수술을 거부하는 거야.”

 

마치 동생을 달래듯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사랑하는 이가 죽어서 없어진다면 넌 어떻게 될까?”

 

“윤회를 다시 시작하고 싶단 생각이 들지 않겠어?”

 

그의 목에 걸린 십자가가 반짝였다.

 

“신의 사랑을 받는 네가 원한다면 다시 윤회가 시작될 수도 있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 단 한 번이라도, 그런 생각 한 적 없어?”

 

위련은 입을 다물었다. 그 반응을 본 이얀은 안화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일전에 이얀이 안화에게 들은 말은 하나였다. 윤회가 다시 시작될지도 몰라.

 

이얀은 그런 안화의 반응을 기우로 일축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위련이 그런 짓은 안 해.” “네가 위련을 정확히 몰라서 그래.” 안화는 평소처럼 오만한 말투로 말했다.

 

“위련은 단 한 사람을 위해 윤회에서 벗어났지. 그렇다면 반대로 한 사람을 위해 윤회를 일으킬지도 몰라.”

“그 사람이 안화 너다, 이 말이야?”

 

이얀은 윤회 속에서 위련이 해온 일을 덤덤히 들었다. 당사자는 기억 할 수 없는 부탁 하나를 붙들고 셀 수 없이 많은 일주일을 보내 끝내 윤회에서 벗어났던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이얀은 문득 궁금증이 하나 솟아올랐다.

 

“그래놓고 잘도 위련을 거절했네. 뭐, 네가 그렇게까지 해달라고 한 건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좋아하면 부담스럽지 않아? 사귀는 사이였어도 그 정도 정성은 부담스럽겠다. 그 고생을 했지만 싫다고 도망가도 할 말 없겠어.”

“별로 부담스럽지 않아. 애초에 싫지 않으니까.”

“뭐?”

“위련의 애정은 매우 흥미롭지.”

 

이얀은 할 말을 잃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안화가 위련에게 연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이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 이런 건 몰랐지. 그러니까 일반인이라면 기겁하고 도망갔을 수준-인터넷 용어로 말하면 얀데레인가 뭔가 하는 그거- 말이다. 이얀은 안화를 외면했다. 이 또라이들. 끼리끼리 만난다더니. 역시 머리가 너무 좋아서 어떻게 되어버린 게 분명해.

 

“네 이상성애에 대해선 듣고 싶지 않아. 아무튼 그래서? 그냥 이대로 버티다가 유해화 되기 직전에 자결하려고?”

“내가 버틸 수 있는 최대 기간은 삼개월이지. 나는 그 안에 위련의 마음을 정리시킬 거다.”

“잘도 정리 시키겠다.”

“완전히 져버리는 정도는 나도 가능할 거라 생각하지 않아. 다만 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는 충분하겠지.”

 

말은 쉽지. 이얀은 잠시 눈을 감았다.

 

“갑자기 생각났는데, 잘하면 지금도 윤회 속일 수도 있겠는데.”

“그건 아닐 거다. 그렇다면 위련이 저리 초조하게 굴지 않겠지.”

“나도 그냥 해본 말이야.”

 

이얀은 눈을 떴다. 마주한 안화의 얼굴엔 다크써클이 짙었다. 창백한 손끝도 미세하게 흔들렸다. 남들보다 곱절은 많은 업무를 해도 제 컨디션 하나만큼은 칼같이 지키던 그에게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언제나 말끔한 얼굴로 나타나 잔소리를 해대는 모양이 재수 없었는데, 막상 저리 피곤에 쪄든 얼굴을 보니 기분이 복잡 미묘해졌다. 왠지 책상에 쌓아올려진 서류를 한시라도 빨리 처리하고 싶어졌다.

“그럼 있잖아, 안화.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을게.” 몸을 일으키기 전 이얀이 입을 열었다.

 

“너야말로 정말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어?”

 

사실은 죽기 싫지? 이얀의 물음에 안화는 대답 대신 그저 눈을 감았다.

 

5

 

 

창문 블라인드 사이로 새어나온 햇살에 안화는 눈을 떴다. 유해화가 시작된 이후 잠을 청해봤자 온 몸에 엉겨 붙은 찐득한 피로가 가시지 않아 기분 나빴는데 웬일인지 개운했다. 딱히 좋은 잠을 자서 그런 건 아니었다. 누군가 제 몸 속에서 요동치는 환력을 일부 잠재운 것이리라. 안화는 인상을 썼다. 그렇게 오지 말라고 했었는데.

고개를 돌리자 그의 예상대로 위련이 제 옆에 있었다. 침대에 엎드린 채 눈을 감고 있는 그에게 따스한 햇살이 드리웠다. 눈가에 머무는 햇빛이 거슬리는지 이따금씩 꼼지락 거렸지만 끝내 눈을 뜨진 않았다. 안화는 흐트러진 앞머리를 향해 손을 뻗다 그냥 그만두었다. 단정히 접어올린 와이셔츠 소매를 지나 보라색 핏줄이 선명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손으로 위련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안화는 대신 위련을 눈에 담았다. 새근새근 숨소리에 맞춰 어깨가 오르다 내려갔다.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얼굴은 헬쓱했다. 아픈 건 분명 저인데, 다른 이가 보면 위련이 투병중이라 오해 받을 수 있을 정도였다.

문득 이얀이 제게 했던 물음이 떠올랐다.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어? 사실은 죽기 싫지? 솔직히 말하자면 죽음 자체는 두렵지 않았다. 걱정도 되지 않았다. 그런 건 이미 흑문이 열렸을 때부터, 신기사가 됐을 때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게다가 중앙청은 앙투아네트와 에뮤사가 있으며, 이제 흑문이 언제 어느 규모로 열리는지 예측 가능한 기술력에 도달했다. 제가 없어도 충분히 세계의 존속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이라면 그래, 지휘사였다. 이 여린 지휘사를 두고 눈을 감을 수 있을까. 이 감정이 사랑인지 다른 무언가-예를 들어 세계 멸망 같은 불안감-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천천히 거리를 벌려 제게서 떨어뜨리고, 없어도 괜찮다는 걸 상기시키고, 마음의 준비를 시키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제게 주어진 3개월은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계절 하나가 바뀔 시간이다.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다른 이들도 지휘사의 자립을 도와줄 것이다. 그가 제 곁을 홀로 꼿꼿하게 서있을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게 아쉽긴 해도 제가 사랑하는 지휘사가 괜찮다면 충분했다. 안화는 괜히 입 안이 씁쓸해졌다.

 

그러다 위련이 눈을 떴다. 아직도 졸린 눈을 비비며 자연스럽게 안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상대와 눈을 마주치자 배시시 웃는 그 얼굴에 여전히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일어났어? 제게 건네는 목소리가 따스했다. 안화는 괜히 퉁명스럽게 물었다. “왜 또 왔어?” 위련은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있잖아, 네가 뭘 걱정하는지 들었어.”

“…분명 말하지 말라했는데.”

“내가 말해달라고 했어. 너무 그러지 마.”

 

잠시 말을 고른 위련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생각이 안 들진 않았어. 7일의 윤회 도중이었다면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텐데, 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세라핌한테 부탁해서 윤회를 시작한다던가 그러진 않을 거야. 그럴 힘도 없고, 세라핌이 들어줄 리도 없고. 세라핌이라면 그런 바보 같은 부탁하지 말라고 쫓아낼 거야.”

 

잠시 눈을 내리깐 위련은 다시 고개를 들어 안화와 눈을 마주했다. 안화를 바라보는 그 금색 눈동자는 한 치 흔들림도 없었다.

 

“무엇보다 안화가 부탁한 일이었잖아. 너는 기억 못하겠지만 네게 처음으로 부탁받은 일이었어.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이루어준 부탁이고. 그런 걸 내 손으로 뒤엎을 리 없잖아. 아무리 네가 없어진다고 해도 말이야. …이얀이랑 세츠랑 얘기하고 나서 많이 생각했어. 내가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했구나, 하고. 지휘사로써 신기사들을 다독여야하는데 내가 내 감정에 휘둘려서 말이야.”

 

안화는 여전히 말없이 상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위련도 그걸 알았는지 잠시 숨을 고르다 마저 말을 이었다.

 

“네가 수술을 받다 떠나든, 제 명에 떠나든… 난 받아들일 수 있어.”

 

약속할게. 위련이 말을 마치자 안화는 잠시 눈을 감았다. 이거면 됐다. 이러면 됐다. 안화는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나도 수술을 받도록 하지.”

 

너를 믿는다, 위련. 위련은 대답 대신 안화의 손을 꼬옥 잡았다.

 

6

 

 

수술중이라고 적힌 안내등은 여전히 붉었다. 안화의 수술이 시작된 지도 벌써 10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대기실에 앉아있던 위련은 손에 들린 서류를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에뮤사와 앙투아네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술이 시작되고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잡념을 떨치기 위해 시작한 서류 결재도 6시간이 지나가자 슬슬 머리가 아프더니, 이제는 이게 무슨 말인지 애초에 글자가 맞는지 구분이 못하는 지경이 되어 결국 내려놓았다.

잠시 벽에 기대 피로를 씻어내던 위련은 복도 저 끝부터 뚜벅뚜벅 걸어오는 소리에 눈을 떴다. 수술실을 경호하러 온 신기사려나. 안 그래도 베라 혼자 거진 10시간동안 수술실 앞을 경호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강철 같은 체력과 임무 완수에 대한 책임감을 가진 베라여도 슬슬 휴식이 필요할 때가 되었다. 누가 왔으려나. 우윈? 바쿠라? 예상 외로 세츠가 자원해서 왔을지도. 신뢰도 높은 신기사들을 떠올리며 위련이 고개를 돌리자 제 예상과 전혀 다른 얼굴이 서있었다.

 

“아, 죄송해요. 주무시고 계셨는데. 저 때문에서 깨서….”

 

세츠의 여동생인 리프였다. 그의 손에 들린 봉투가 부시럭 소리를 냈다. 아무리 인력이 모자라도 어린 신기사들에게 경비를 맡길 일은 없을 텐데. 게다가 리프는 오늘 비번이고. 일부러 걱정 돼서 온 걸까? 일단 위련은 움츠러든 그를 다독였다.

 

“아니야, 안 자고 있었어. 안화가 걱정돼서 온 거야?”

“그것도 있고. 저기, 계속 여기 계셨다고 해서 뭐 좀 드시라고….”

 

그리 말하며 리프는 쭈뻣쭈뻣 봉투를 건넸다. 중앙청 앞 편의점 로고가 적힌 봉투 안에는 물과 간단한 간식거리가 들어있었다. “베라 씨는 비상식을 가지고 있다고 거절 하셨어요….” 베라답네. 그리 생각하며 위련은 꾸러미 속에서 하나 꺼냈다. 사과 쿠키였다. 종종 추가 근무에 허덕이고 있을 때 안화가 무심히 던져주고 가던 간식이었다.

 

“전에 안화 오빠가 좋다한다고 말해서….”

“응, 이 쿠키 좋아해. 고마워.”

 

위련의 미소를 지켜보던 리프가 조심히 물었다. “…저, 잠시 옆에 있다 가도 될까요?” “물론.” 위련은 의자 위에 헤집어진 서류를 한쪽으로 치우곤 깨끗해진 자리를 통통 두드렸다. 리프가 자리에 앉자 위련이 말했다.

 

“안화는 괜찮을 거야.”

 

흠칫, 정곡이 찔린 듯 리프는 어깨를 들썩였다. 무어라 말해야할지 떠오르는지 리프는 입만 연신 뻥끗 거렸다. 위련은 그가 말을 정할 수 있을 때까지 담담히 기다렸다. 리프도 워낙 속내를 감추는 타입이라 티는 안 냈지만 많이 불안했을 것이다. 리프에게 안화는 친오빠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세츠와 안화가 대학 동기라 리프도 초등학생 때부터 알고 지냈다고 했었나. 세츠가 신관 수업을 위해 도시에 없었을 때는 그 대신 안화가 리프를 돌본 적도 더러 있었다고 들었다.

생각을 마친 듯 리프가 말했다. “가족이 모두 신자지만… 저도 졸업 후엔 수녀 학교에 가지만 사실 지금까지 제대로 기도한 적이 없거든요. 전부 시늉만 했어요.” 리프는 깍지 낀 손가락을 꾸물거렸다.

 

“근데 오늘 처음으로, 진심으로 신께 기도드렸어요. 안화 오빠가… …. …제 신기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분명 도움이 될 거야. 리프의 신기는 굉장하잖아.”

 

위련은 애꿏게 피부를 긁고 있는 리프의 손을 감싸 잡았다. 리프는 고개를 들었다. 두 금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부러워요. 위련님은… 뭐라해야할까… 강하셔서.”

“나도 처음부터 이러지 않았어.”

 

윤회가 이렇게 만들었지. 위련은 뒷말을 삼켰다. 리프는 윤회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그 후 리프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사소한 잡담이 오갔다. 리프는 위련도 힘들 텐데 저가 괜히 방해하는 게 아닐까 걱정했지만, 사실 위련의 행동은 스스로를 위한 일이기도 했다. 가슴 속에서 떠오르던 불안함이 머리에 닿기 전에 리프가 찾아오고 그를 다독이면서 스스로의 감정도 누를 수 있었다.

한껏 긴장돼 꼿꼿이 굳어있던 리프의 어깨가 내려갔을 즈음, 다시 한 번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야 말로 교대하러 온 신기사인가? 그렇게 생각한 위련 앞에 붉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위련은 상대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어? 베라?”

“상황을 보고하러 왔다.”

 

베라는 그렇게 오래 서있었는데 힘든 기색 하나 없었다. 그는 그저 덤덤히 제 말대로 상황을 보고했다.

 

“안화의 수술이 끝났다.”

 

7

 

 

안화가 자리를 비운지 벌써 한 달이 다되어갔다. 또한 안화의 투병 사실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게 되었다. 그리 오래 자리를 비웠는데 이변을 느끼지 않길 바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욕심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 병이 유해화라는 사실이 퍼지지 않은 것이었다.

 

역시나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아사나는 비어있는 안화의 책상을 착잡하게 바라봤다. 서류 결재를 위해 지휘사의 사무실에 방문한 참이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안화를 소개받고 혼나기도 하고 드물지만 칭찬도 받고 그랬는데. 책상은 주인이 언젠가 돌아오리라 생각했는지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다. 위련과 대화하던 이얀은 볼 일을 마쳤는지 아사나에게 다가왔다. “이제 가자.” “응.” 위련에게 인사를 마친 아사나는 여전히 심숭생숭한 마음으로 사무실을 나왔다.

부서로 돌아가는 복도에서 아사나는 이얀에게 조심히 말을 건넸다.

 

“안화 선배, 아직도 아픈가봐. 혹시 무슨 병인지 못 들었어?”

“음… 뭔가 엄청나게 큰 병이란 것만 들었어.”

 

엄청나게 큰 병. 이얀이 비밀 유지 겸 적당히 둘러댄 단어였지만 아사나에겐 다르게 받아들여졌다. 그 안화 선배가 한달동안 출근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나게 큰 병. 어떠한 일이 있어도 출근 도장을 꾹꾹 찍던 그가 병가라니, 혹시 불치병이라도 걸린 걸까?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인지 아사나는 답지 않게 눈을 내리깔았다.

 

“혹시 안화 선배, 이대로 안 돌….”

 

앗, 스톱! 아사나가 말을 잇기 전에 이얀은 황급히 입을 막았다. 이얀의 행동 탓인지 제가 하려던 말 때문인지 깜짝 놀란 아사나가 눈을 크게 떴다. “너, 더 이상 말하면 백퍼 후회한다.” 이얀은 그제야 손을 뗐다.

 

“고, 고마워, 이얀.”

 

아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분명 그랬을 것이다. 설령 우려하던 일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아사나는 그런 말을 꺼냈다는 자체만으로 후회했을 것이다. 항상 입조심 해야겠다고 다짐해놓고서 또 불길한 말을 내뱉을 뻔한 자신을 자책하려던 때였다.

 

“그럴 걱정 할 필요 없다.”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넘어왔다. 익숙하면서도 오랜만에 듣는, 굉장히 그리운 음색이었다. 그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외쳤다.

 

“안화!”

“선배!”

 

이얀은 한 치 망설임 없이 상대를 향해 뛰쳐나갔다. “사, 살아남았구나! 다행이다! 진짜 연락 안 돼서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다른 사람 연락이면 몰라도 내 연락은 받아야지! 진짜! 우리 사이에!” 말은 그리하면서도 이얀은 상대의 온 몸을 샅샅이 살펴본 후에야 안도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딱히 이상한 데 없네! 정말 다 나았나봐! 하하, 웃고 있는 이얀과 달리 아사나는 주춤한 채로 다가오지 못했다.

 

“저기, 안화 선배. 그 안대는….”

 

이얀은 그제야 왼쪽 눈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제 더 이상 그 자리엔 호루스의 눈 문양도, 모노클도 없었다. 대신 커다란 안대가 왼쪽 얼굴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나은 건 아닌지 안대 밑으로 하얀 붕대가 찔끔 삐져나와있었다. “아….” 이얀은 그제야 조그맣게 탄식했다. 전반적인 상황을 알고 있는 이얀 입장에서 신기의 부재는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반응을 생각하지 못했다. 아마 아무 정보 없이 안화를 마주했다면 저도 꽤나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와 같은 신기사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됐다.”

“설명이 너무 간단하네.”

 

담담해 보이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본 아사나는 더듬더듬 제 예상을 짚었다.

 

“혹시… 그 병이라는 게… 유해화였어요?”

“더 이상 비밀은 아니니까 숨길 필요는 없겠지.”

 

유해화와 신기 제거.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렇게 큰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된 아사나는 크게 동요했지만, 금방 진정했다. 그런 건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으니까. 어찌됐든 살아있다. 살아서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제 눈 앞에 서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어찌됐든 이제 괜찮으신 거죠?!”

“그래.”

“정말 다행이에요!”

 

그제야 아사나도 숨을 골랐다. “괜찮으면 만사 오케이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 이얀은 안화를 바라보다 씨익 웃었다. 그러곤 “자자, 안화 씨. 지금 기분을 표현하자면?!” 한 손으로 마이크를 쥔 시늉을 하며 안화에게 들이댔다. 안화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은 초롱초롱 빛났다. 평소라면 대꾸도 안 했을 장난이었지만 안화는 웬일로 미소 지었다.

 

“머리가 맑군.”

 

두 후배는 활짝 웃었다.

 

 

한 차례 소란을 보낸 안화는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하루도 빠짐없이 오던,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기겁할만한 표현인, 정말, 그리운 장소였다. 선의의 거짓으로도 컨디션이 좋다고 말할 수 없었지만 복도를 가로지르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아직 다 떨치지 못한 피곤이 몸을 짓눌렀지만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다. 공간을 가득 메우는 구두굽 소리가 규칙적이다 못해 경쾌하기까지 했다. 그는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다. 사무실의 주인은 그가 올 거라 예상했는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안화, 하고 밝게 웃었다.

 

“조금 더 쉬어도 되는데.”

“내가 마음 놓고 쉴 환경을 만들어준다면 그렇게 하지.”

 

평소처럼 퉁명 맞은 대답이었지만 위련은 뭐가 좋은지 웃었다. “여전히 짓궂다니까.” 안화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누르며 제 책상으로 다가갔다. 단정히 정돈된 책상은 이 사무실을 떠난 마지막 날과 변함없었다. 안화는 제 손으로 책상을 한 번 훑었다.

 

“에뮤사랑 앙투아네트한테는?”

“아직.”

“병문안은 왔지만 그래도 얼굴 한 번 보러가자. 병원에서 보는 거랑 이렇게 보는 건 다르잖아.”

 

그리 말하며 위련은 자리에서 일어나 안화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위련의 발걸음도 가벼웠다. 위련은 괜히 안화의 넥타이를 매만졌다. 일전에 위련이 선물로 준, 검붉은색의 깔끔한 넥타이였다. 가슴께에 느껴지는 손길이 단정했다. 안화는 위련의 손짓을 바라만보다 입을 열었다.

 

“위련.”

“네가 보는 나는 그대로지?”

 

그러니까 나도 그대로야. 안화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미 안다는 듯, 위련은 나긋하게, 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말이 가로채진 안화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딱 제가 원하는 대답을 들었기 때문에, 굳이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었다. 위련은 아직 성에 차지 않는지 계속 말을 이었다.

 

“신기사가 아니어도 안화는 안화인 걸. 신기사가 아니라 안화를 좋아한 거니까. 난 여전히 안화가 좋아. 수술 받겠다고 결심해줘서 고마워. 전에 이얀이 그랬어. 수술 받은 당사자의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다고. 그러니까 안화가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것도 안화가 결심해준 덕분이라 생각해. 난 안화가 이렇게 내 곁에 있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아.”

 

정말 좋아해, 안화. 세상에서 가장. 대답은 평소처럼 안 해도 돼. 그 말을 끝으로 위련은 넥타이에서 손을 뗐다. 안화는 그저 위련의 미소를 눈에 담았다. 처음엔 버벅이다 말을 제대로 끝맺지도 못했는데, 이제는 좋아한다는 말이 제법 자연스러워졌다. 좋아해, 나도. 안화는 차마 내뱉지 못하고 속으로 곱씹었다. 제가 할 수 없는 일은 없다고 자부하는 안화지만, 이 대답만큼은 지금 시점에서 유일하게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언젠간 저도 대답할 수 있게 되겠지. 귀를 타고 들어왔던 나긋한 음성이 계속 가슴을 간지럽혔다.

 

안화는 잠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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