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도 달맞이꽃은 핀다.
뉴스에서 연신 이어지는 속보가 시끄럽다. 금랑은 귓가를 울리는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병원에 도착하고 몇 시간이나 흘렀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저 뉴스는 지금 30번도 넘게 들은 것 같다. 지겹다. 지겹고 끔찍하다. 뭐 얼마나 좋은 일이라고 저렇게 떠들어댄단 말인가. 누군가에겐 그저 특별한 가십거리일지 몰라도, 자신들에겐 끔찍한 사고인데.
“말도 안 돼. 꽤 유명한 챌린저였잖아.”
“역시 다이맥스는 보기엔 멋있어 보여도 생각보다 위험하다는 거 아닐까?”
“그래도 이런 사고는….”
“당분간 역린 호수 근처 포켓몬 굴은 가지 말아야겠는걸.”
수군수군. 쑥덕쑥덕. 남의 일이니 할 수 있는 말들이 그의 어깨를 더더욱 무겁게 한다. ‘젠장. 젠장.’ 쉰 목소리로 몇 번이고 중얼거리던 금랑은 거친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직까지도 모든 것이 그저 꿈같이 느껴진다. 아니, 어쩌면 자신은 지금 악몽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그게 아닌 이상 이렇게 잔인한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 자신에게도 그에게도 잔인한, 이런 일이.
“금랑!”
누군가가 제 어깨를 마구잡이로 잡아 흔든다. 거의 넋을 놓고 있던 그는 억센 악력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부른 상대를 바라보았다.
“…너.”
“이게 무슨 소리야? 월견이 다쳤다니…! 많이 심각한 거야? 응급실에 들어갔다던데!”
‘애초에 심각하지 않았다면 응급실에 들어가지도 않았겠지.’ 그렇게 대꾸하려던 금랑은 제 대답이 너무 날카롭다는 걸 인지하고 숨을 골랐다. 진정해야 한다. 자신이 화내도 변하는 것은 없다. 더욱이 단델은 그 자리에 있었던 것도 아닌데 모를 수도 있지. 그래, 없었으니까. 거기에 없었으니까.
“이 몸도 정확한 상태는 몰라. 너, 어디까지 알고 온 거야?”
“나? 뉴스 정도만 봤는데…. 역린 호수의 포켓몬 굴에서 사고가 났고, 그게 월견이라고….”
“그래?”
그렇게 쉴 새 없이 떠들어댔으면서 겨우 저 정도 정보밖에 전달되지 않은 것인가. 평소 시합중계를 할 때는 오늘의 포켓몬 엔트리부터 경기 전의 행보까지 샅샅이 들춰내면서? 역시 미디어는 형편없다. 금랑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레이드 배틀을 하다가 사고가 났어. 갑자기 다이맥스 한 갸라도스가 크게 날뛰어서 포켓몬 굴 밖으로 튕겨져 나갔는데, 거기서….”
“뭐? 그럼, 금랑 너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거 아냐? 너는, 아니, 다른 사람들은 다 무사한가?!”
“아아. 뭐. 이 몸은 타박상 정도. 그 외엔….”
불안한 눈으로 답하던 금랑의 시선이 제 옆에 앉아있는 형제에게로 향했다. 울고 있는 여자아이와 그런 여자아이를 달래는 남자아이는 자신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어깨를 움츠렸다.
“죄, 죄송해요. 훌쩍. 저 때문에. 저희 때문에.”
“금랑 형, 미안해요. 내가 오빠인데, 동생을 챙겼어야 했는데….”
“…아니, 탓하려고 본 게 아니니 사과하지 말라고. 너희.”
아무리 화가 나고 열이 받아도 자신은 어린 것들에게 화낼 정도로 양아치가 아니다. 울음을 그치지 않는 남매의 머리를 양손으로 쓰다듬어준 그는 다시 단델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 녀석 빼곤 다 멀쩡해. 그 녀석만 크게 다친 게 문제지.”
“맙소사. ‘크게’ 라면, 어느 정도로…?”
“…의식도 없는 상태로 여기까지 이송됐어. 숨도 안 쉬었는데 인공호흡으로 겨우 숨은 붙여놨었지. 호수에 빠졌었거든.”
만약 자신도 없었다면 정말로 죽어버렸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면 아찔하지만, 한편으로는 온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진다. 단델과 달리 자신은 그와 함께 있었는데. 바로 옆에 있었는데. 자신은 왜 월견이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호수로 뛰어드는 걸 막지 못했나. 왜 조금 더 빨리 그를 구하지 못했나. 왜. 어째서.
“미안해.”
“…어?”
지금 이 상황에서 누군가 한 명에게 책임을 묻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의미 없는 자책을 하던 그는 갑작스러운 단델의 사과에 고개를 들었다가,
“미안해, 금랑. 시합만 아니었다면 나도 함께 갔을 텐데….”
참아온 것이 무력하게도,
그대로, 이성의 끈이 끊어지고 말았다.
“…너!!”
용이 포효하듯 힘껏 소리친 금랑이, 순식간에 단델의 멱살을 잡는다. ‘금랑 형!’ ‘진정하세요, 보호자 분!’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탄성은 날카로웠지만 폭발한 그를 막을 만큼 치명적이지는 못했다. 물론 말로 말려지지 않는다고 몸을 써서 말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지만, 그건 어쩔 수 없었지. 아직 어리긴 해도 또래들보다 훨씬 큰 두 소년들이 뒤엉켜 있는데, 그 누가 이 상황을 중재시키겠다며 나설 수 있겠는가.
“웃기지 마!! 네가 챔피언이니까 뭐든 다 해결할 수 있는 거 같아?! 이 몸도 최선을 다했다고! 네가 거기 있었으면 뭔가 변했을 거 같아?!”
“금랑, 무슨 소리야! 일단 진정을…!”
“월견은, 월견은…!”
‘월견 님 보호자 분!’ 금랑의 벅차오르는 외침을 틀어막은 건 응급실에서 나온 간호사의 부름이었다. ‘아아.’ 정신이 든 듯 얼빠진 소리와 함께 멱살을 놓은 그는 스르륵 단델에게서 떨어지더니, 다급히 간호사의 앞으로 달려갔다.
“월견은, 그 녀석은 무사한가요?”
“방금 수술이 끝났습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거지만, 상태가 호전 되려면 장기간 입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1인실로 옮길 건데, 잠깐 입원서류 좀 작성해 주시겠어요? 자세한 상황은 담당의께서 설명해 주실 거예요.”
“네, 네.”
방금 불같이 화를 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그는 순순히 대답하고 간호사를 따라 나선다. 아니, 사실 금랑은 본래는 온화한 성격이었으니 저 쪽이 본래모습이고 제 멱살을 잡은 것이 생각 밖의 모습이라 해야 맞겠지만 말이다. ‘대체 무슨 일이지.’ 이상하다 못해 아예 다른 사람 같았던 금랑의 모습을 가만히 곱씹어보던 단델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다가 제 옆을 지나가는 이동식 침대를 보고 숨을 삼켰다.
“…월, 견….”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는 환자는 제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 창백한 피부와 여기저기 감겨있는 붕대, 희미한 피 비린내와 알코올의 냄새. 자세한 걸 묻지 않아도 그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눈치 챌 수 있는 시그널들이, 오감으로 전해져 와서.
“음? 챔피언?”
침대를 따라가던 의사는 단델을 알아보고 멈춰 섰다. 아니, 따지고 보면 알아보지 못하는 쪽이 이상한 거겠지. 가라르 지방의 젊은 챔피언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인기가 있었고, 지금의 그는 챔피언의 상징과도 같은 망토까지 두른 채 병원에 온 것이었으니 말이다.
“뭐야, 역시 뉴스를 보고 온 건가? 잘은 모르지만, 환자와는 꽤 친한 사이였지?”
환자. 그건 분명 월견을 지칭하는 것이겠지. 단델은 새삼 그 호칭이 불편하게 느껴져 표정이 구겨질 뻔 했다. 뉴스를 봤을 때도, 단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응급실에서 나온 당사자를 보았을 때도 느껴지지 않던 현실감이, 저 호칭 하나로 확 살아나는 것 같아서.
“저, 괜찮다면 제가 월견의 상태를 여쭤 봐도 될까요?”
“음? 듣고 싶어? 이런 건 원래 보호자에게만 말해주는 건데.”
“응급진료비와 입원비는 제가 낼 생각입니다, 그러니 알려주세요.”
‘오.’ 의사는 강단 있는 단델의 말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아무리 연승을 이어가는 챔피언이라도
선뜻 누군가를 위해 돈을 쓴다고 나서는 것은 쉽지 않을 터. 두 사람은 단순히 도전자와 챔피언 사이가 아니라, 좀 더 사적인 관계였던 게 아닐까.
호기심과 놀람이 섞인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의사는 어쩔 수 없다는 투로 수술 경과를 알려주었다.
“일단 다행스럽게도 생명에 지장은 없어. 물에 빠졌을 때 물을 많이 마셔서 호흡기가 상하긴 했지만, 일상생활에 지장은 없을 수준이고. 하지만 격렬한 운동을 할 때면 힘들어 질지도 몰라. 그리고 호수 안에서 의식을 잃었을 때…, 음.”
술술 이야기를 이어가던 의사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머리를 긁적였다.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를 하려는 거구나.’ 직감적으로 그걸 느낀 단델은 함부로 재촉하지도 못하고 망설이다가, 결심한 듯 겨우 물어보았다.
“의식을 잃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게, 갸라도스가 만들어낸 물살에 휩쓸려서 호수 바닥의 여기저기에 부딪힌 건지…. 왼쪽 다리가 망가졌어.”
“네?”
“무릎이랑 발목의 인대가 상해서 재건 수술을 해야 했거든. 수술로 이어놓긴 했지만 이제 격렬한 활동을 하는 건 힘들어 질 거야. 자전거를 탄다던가, 뛰거나 하는 건….”
의사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바삐 월견의 뒤를 따라갔다. ‘설마.’ 제가 들은 이야기를 차분히 머릿속에서 정리하던 단델은 제 촉이 보내는 경고신호에 입술을 깨물었다.
격렬한 운동을 할 수 없다는 말은, 어쩌면, 시합도 힘들어 질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포켓몬 시합에서 직접 승부를 하는 건 포켓몬들이지 트레이너가 아니다. 바꿔 말하자면, 아주 어린 보육원생이라도 지시를 내릴 정도의 판단력만 있다면 트레이너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되기도 했다. 그래. ‘트레이너’ 만이라면 몸이 조금 불편한 것은 문제가 안 되었지. 문제는 월견이 일반 트레이너가 아니라는 것에 있었다.
‘리그는 무리라는 건가.’
가라르 지방의 리그에서는 거의 필수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모든 선수들이 다이맥스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다. 간혹 다이맥스 없이 도전해오는 선수가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지. 그리고 관중의 반응이 중요한 리그전에서 다이맥스를 쓰지 않는 것은, 역시 주목받기 힘들어지니 좋을 게 없지.
‘다이맥스의 에너지를 견딜 수 없다면.’
비록 직접 영향을 받는 건 포켓몬 쪽이지만, 옆에 있는 트레이너가 아무렇지 않기는 힘들지. 게다가 지금 월견은 다이맥스 한 포켓몬 때문에 중태에 빠진 것이다. 그런 그가, 과연 다이맥스를 거의 필수처럼 여기는 리그에 돌아올 수 있을까.
“저, 챔피언….”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에 숨죽이고 있던 그는 제 망토를 잡아당기는 손에 고개를 숙였다. 자신을 부른 것은, 아까 전 금랑에게 사과했던 어린 남매들 중 여동생 쪽이었다.
“월견 언니는 괜찮아요?”
“응? 아아. …괜찮다고 하는구나. 너무 걱정 마렴.”
“정말요? 다행이다….”
아이에게 진실을 말해봐야 상처만 주게 될 뿐 해결되는 건 없다.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어린 남동생을 떠올리며 선의의 거짓말을 말한 그는 욱신거리는 심장의 고통을 애써 무시해야 했다.
“그런데 너희는 집에 가지 않아도 괜찮아?”
“저희는 월견 언니에게 인사하고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구해줘서 고맙다고, 역시 억지 부려서 미안하다고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말끝을 흐린 남자아이는 안심하는 여동생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참으로 예의 바른 아이들이다. 단델은 일순 흐뭇해하였다가, 무언가 찝찝함을 느끼고 다시 되물었다.
“그런데 억지라니? 무언가 부탁이라도 했니?”
“그게…. 원래는 다른 포켓몬 굴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제가 갸라도스를 잡고 싶다고 해서 그 굴에 들어간 거라….”
“아….”
금랑도 월견도 다정한 성격이고, 특히 아이들에겐 더 친절했으니 저 부탁은 들어줄 수밖에 없었겠지. 단델은 웃으며 두 남매를 이끌어주었을 친우들을 생각하고 소리 없이 한탄했다.
만약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이런 사고는 생기지 않았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금랑과 단델을 몇날며칠이고 그 부탁을 거절한 사실을 미안해했을 것이다. 두 사람은, 그런 인물들이기에.
“월견은 오늘 피곤할 테니, 다음에 인사하는 게 어떨까? 푹 자야 회복될 거야.”
“그런가요?”
“으음, 그럼 다음에 올게요!”
‘안녕히 계세요!’ 힘차게 인사한 남매는 두 손을 꼭 마주잡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게 낫다. 무거운 짐은 조금 더 자란 후 짊어져도 되니까. 제 거짓말은 옳은 선택이다. 가슴에 손을 얹고 그리 되뇐 단델은 월견의 병실로 올라가기 전 대강의 일처리를 해두기 위해 접수처로 갔다.
금랑은 이미 입원서류를 다 작성한 것인지 접수처에서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응급 수술비를 결제하고 병실 위치를 전해들은 그는 어떻게 금랑을 마주해야 할지 고민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왜 화를 낸 걸까.’
자신의 부재에 대해 화낸 것이라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금랑은 ‘네가 거기 있었어도 변할 건 없었을 것이다’며 자신의 사과 자체에 화를 내었다.
제가 말실수 한 것인가? 마치 자신이 있었다면 다 해결했을 거라는 것처럼 들려, 의도치 않게 금랑을 무시하는 것처럼 들린 게 아닐까?
스스로를 돌아보는 동안 엘리베이터는 월견의 병실이 있는 층에 멈추었다. 크게 심호흡한 단델은 슬그머니 병실로 들어갔고, 보조의자에 앉아 기도하듯 고개 숙인 채 가만히 있는 금랑과 그대로 마주치고 말았다.
“아.”
짧은 한탄을 내뱉은 금랑은 민망한 듯 뒤통수를 긁었다. 아무래도 아까 전 제 행동에서 미안함을 느끼는 모양이라, 단델은 오히려 괜찮다는 듯 편하게 그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고생 많았어, 금랑.”
“…고생은 무슨. 난 별로 한 게 없는데 뭘.”
“그렇지 않아. 기다리는 것도 힘든 일이잖아?”
‘그런가.’ 무심하게 중얼거린 금랑은 월견의 손을 가볍게 잡아보았다. 링거 바늘이 꽂힌 핏기 없는 팔은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희미하게 느껴지는 맥박은 그가 멀쩡히 살아있다는 걸 알려주어서,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아깐 미안했어.”
“아니야. 너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스트레스를 받았을 텐데.”
“이해해 줘서 고맙네, 화내도 되는데 말이지.”
“너한테 화내고 싶지 않아. 너는 내 친구고 소중한 도전자니까.”
사람 좋은 녀석. 어쩌면 단델의 대단한 점은 어린 나이에 챔피언이 되어 무패 전설을 이어가고 있을 정도로 훌륭한 트레이너로서의 실력이 아니라, 그 나이에도 저런 넓은 아량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금랑은 맥 빠진 얼굴로 웃어 보이고 굽은 등을 쭉 폈다.
“의사에게 수술 경과에 대해 들었어.”
“그래? 이 몸도 아까 서류 쓰다가 들었어. 그러면 더 설명 안 해도 되겠네.”
“…더 이상 스타디움에 설 수 없겠지?”
“아마도. 치료를 잘 받으면 리그에 복귀할 수는 있겠지만, 과연 다이맥스를 쓸 수 있을지….”
그래. 다이맥스를 쓸 수 있을지 없을지. 그것이 월견의 선수생활을 결정지을 것이다. 물론 이 문제를 결정하는 것은 단순히 그의 몸 상태만이 아닐 것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다이맥스 한 포켓몬에게 당한 사고니 몸이 괜찮더라도 심적으로 다이맥스에 거부감을 느낀다면….
“월견은 이겨 낼 수 있을 거야.”
괜히 우울한 소리를 하는 건 환자에게도 좋지 않다. 단델은 애써 웃으며 금랑의 어깨를 두드렸고, 금랑은 월견의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황은 좋지 않지만 그러길 바랄 수밖에. 하지만 저 녀석은 강하니까, 할 수 있을 거야.”
“음! 나에게 도전하는 챌린저들 중 너희만큼 의지가 강한 트레이너는 없었으니까.”
“하하, 그거 기쁜 칭찬이네.”
단델이 빈말로 저런 소릴 하는 것은 아닐 테다. 금랑은 그렇게 생각하기에 겉으로 나마 웃을 수 있었다. 자신은 물론 그렇지만, 월견은 외면도 내면도 단단한 트레이너였으니까. 분명, 이런 역경쯤은 이겨낼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 단델의 저 위로는 꽤나 도움이 되었다.
“이 몸은 저 녀석 집에 가서 부모님한테 사정을 이야기하고 짐 좀 싸와야겠어. 아까 뉴스 보시고 연락하셨던데, 자세한 건 모르실 테니까.”
“짐이라, 나도 도와줄까?”
“괜찮아. 그렇게 바리바리 싸들고 올 것도 아니고. 만약 도움이 필요하게 되면 그때 부를게.”
“알았어. 일단, 같이 돌아가자.”
두 남자는 월견을 잠깐 바라보다가 함께 병실을 나왔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방 안에는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와 옅은 숨소리만이 깊게 잠든 그의 옆에 쌓여갈 뿐이었다.
❋
월견은 사고가 일어난 지 3일째 되는 날에야 비로소 눈을 떴다.
간호사와 의사가 바삐 움직이는 바쁜 환경, 따스한 햇살, 진통제의 효과가 떨어져 욱신거리기 시작하는 다리. 그 모든 것들은 꿈속에서 헤매고 있던 그를 현실로 되돌아오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신음소리를 흘리며 깬 월견은 눈에 익지 않은 천장만 멍하니 바라보다가 긴 숨을 내뱉었다.
“으윽….”
하반신에서 부터 올라와 온 몸으로 퍼지는 통증이 아찔하다. 힘이 들어오지 않는 것도 당황스러운데, 마비가 걸린 것처럼 살짝 저리기도 해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제게 무는 일이 있었지. 그러니까, 분명 금랑과 함께 와일드 에리어로 갔다가 포켓몬을 찾고있던 아이들을 만나 함께 포켓몬 굴에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서 다이맥스한 갸라도스를 만나, 배틀을….
“포트으.”
“아아. 아.”
언제 몬스터 볼에서 튀어나온 걸까. 월견의 주변을 맴돌던 포트데스는 걱정스러운 침대의 이불의 귀퉁이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그때 다친 건 괜찮을까.’ 포켓몬 굴 안에서 있었던 격렬한 배틀을 떠올리는 그의 얼굴에 깊은 어둠이 스쳐갔지만, 다행스럽게도 포트데스는 특별히 불편한 곳은 없는지 건강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포트, 포트.”
“미안해, 걱정했어? 나 얼마나 잔거야?”
“어머, 깨어나셨어요?”
제대로 대답할 수 없는 포트데스를 대신해서 입을 연 것은 상태를 체크하러 온 간호사였다. 익숙한 듯 월견의 체온을 측정하고 수액을 교체한 간호사는, 상대가 먼저 묻지도 않았는데 그가 궁금해 할 만 한 것들을 알려주었다.
“3일이나 주무셨어요. 그동안 가라르 지방의 온 마을이 떠들썩했고요. 꽤 큰 수술이었으니 그만큼 잔 것도 무리가 아니겠죠. 몸 상태는 좀 어떠세요?”
“떠들썩했다니…. 저 때문에요? 수술이라니, 제가요?”
“예. 아무것도 기억 안 나시나요?”
사고 직전의 일은 기억난다. 하지만, 그게 주변이 시끄러워 진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포켓몬 굴에서 다이맥스 포켓몬이 날뛴 일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인명피해가 있긴 했지만, 저렇게 과장되어 말할 정도로 시끄러워 질 이유는 없을 터인데.
“저 말고 다른 사람들은 무사한가요?”
“네. 수술까지 한 건 월견 씨 뿐이에요.”
“…저, 무슨 수술을….”
“그건 의사 선생님이 자세히 설명해 주실 거예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다급히 밖으로 나간 간호사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다. 자신은, 생각보다 상태가 좋지 않은 걸까. 갑자기 엄습해오는 불안에 포트데스를 끌어안은 그는 욱신거리는 왼쪽 다리를 힐끔 쳐다보았다.
다리를 다친 건가. 뼈가 부러졌다던가, 발목이 나갔다던가? 하지만 이 저릿저릿한 아픔은 처음 겪어보는 것인데.
“환자분, 몸 상태는 어떻습니까?”
진료차트를 들고 온 의사는 다정한 얼굴로 말을 건다. 자신의 처지를 몰라 잔뜩 긴장해 있던 월견은 그 상냥한 물음에 겨우 긴장을 풀고, 자신의 상태를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다.
“다리가 아파요. 잘 안 움직이는 것 같은데….”
“역시 그런가요.”
“역시, 라는 건…?”
신경을 쓰고 있어서 그런 건가, 자꾸 다리가 아파온다. 이 아픔이 그저 기분 탓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병원생활을 하느라 푸석해진 얼굴을 따라,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인대 재건수술을 했습니다. 발목이랑 무릎의 인대가 망가져서 말이지요. 그래도 수술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남은 건 재활치료를 하고, 무리하지 않는 것뿐이겠지요. 악화되면 큰일이니까요.”
“…인대가…, 그럼, 저, 무리라는 것의 정도는…?”
“운동은 일단 금지입니다. 걷는 것도 힘들 겁니다.”
단호한 의사의 말에 월견은 그제야 간호사가 방금 전 그리 말했던 이유를 눈치 챘다.
자만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은 유명세가 있는 챌린저다. 체육관 소속 트레이너 자리는 물론이며, 마이너 리그에서도 제안이 오곤 했던 도전자였는데. 방송에도 여러 번 얼굴을 비춰 익숙한 제가 ‘걷는 것도 힘든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그건 분명 화재가 될 법 하지. 어떤 의미로든, 말이다.
“…퇴원은 할 수 있나요? 저.”
“물론입니다. 당장은 아니겠지만요.”
“좋아질 수 있는 거죠?”
“다치지 않았을 때처럼 멀쩡해 지는 건 힘듭니다. 기껏 해봐야 조심해서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정도로 회복 되는 것과 악화되지 않는 게 고작이죠.”
의사가 최대한 말을 고르며 말하고 있는 게 느껴진다. 월견은 저 구구절절한 말이, 결국 ‘선수 생활은 무리다’라는 선언이나 다름없다는 걸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대답할 쪽도, 물을 쪽도, 그 누구도 대놓고 이야기 할 수 없는 진실. 그 불편한 현실 앞에서 의료진도 월견도, 나란히 입을 다물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재활치료는 언제부터….”
“그건 좀 더 회복되고 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우선은 수술의 피로가 다 풀릴 때 까지, 회복에만 집중해 주세요. 저녁에 또 문진 오겠습니다.”
의사와 간호사는 바쁘게 다음 병실로 이동한다. 혼자 우두커니 남겨진 월견은 멍한 표정으로 허공만 바라보다가, 슬쩍 포트데스에게 물었다.
“나,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포트으?”
“…아직은 승부하는 게 좋은데. 단델을 이겨 보고 싶었는데. 챔피언의 자리가, 아직 탐나는데.”
사실 가라르 지방의 챔피언 자리가 그렇게까지 탐나는 거냐고 묻는다면, 아주 간절한 건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제게 중요한 건 그 직책이 아닌, 지금의 챔피언을 이기고 싶다는 열망이었으니 말이다. 산이 있다면 정상에 올라가 보고 싶은 그런 마음으로 노리는 챔피언이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자신은 리그에 서고 싶은데. 이대로라면, 분명.
“월견!”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한 것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눈물이 찔끔 나올 뻔 했던 월견은 황급히 눈가를 비비고 고개를 들었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금랑과 눈이 마주쳤다.
“금랑?”
“하아, 깨어났다는 소식, 하아, 들었어.”
“누구한테…?”
“그거야 간호사한테 들은 거지! 후우, 깨어나면, 연락 해 달라고 했으니까.”
급하게도 뛰어온 것인지 금랑은 쉽게 호흡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벽에 손을 짚고 서서 한참 헉헉거리던 그는 흘린 땀이 식을 때가 되어서야 진정했고, 침대 옆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뛰어왔구나, 그렇게 급하게 안 와도 괜찮은데. 어차피 어디 가지도 않고.”
“3일 만에 깨어났다는데 어떻게 유유자적 와? 근처에 있었으니 망정이지.”
“병원 근처에 있었던 거야? 어쩐 일로?”
“그거야, 오늘도 널 보러 오려고 했으니까. 깨어날 줄 알았다면 더 일찍 왔을 텐데.”
‘매일 왔던 거구나.’ 월견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금랑은 다정하니까, 소꿉친구나 다름없는 자신이 다친 걸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거겠지. 심지어 그 사고 때는 아예 함께 있었으니 더 신경이 쓰였을 테고.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이 있는 두 사람은, 자질구레한 이야깃거리는 밀어둔 채 정말로 궁금한 것들만 물어보았다.
“넌 괜찮아? 그 애들은?”
“우린 멀쩡해. 너만 크게 다쳤지.”
“다행이다. 애들이 다쳤으면 마음이 좋지 않았을 건데.”
“너도 이 몸도 아직 애인데?”
“우리보다 더 애들이었잖아.”
금랑이 말하고 싶은 게 뭔지는 잘 안다. 하지만, 월견은 제 손안에 다 들어오던 소녀와 소년의 작은 손을 떠올릴 때면 저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들은 정말, 너무 어렸으니까. 걱정을 안 하고 싶어도 안 할 수 없었지. 그건 금랑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걱정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사과할 타이밍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아?”
“걱정시킨 건 사실이니까.”
“…나 참,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은 건 오히려 이 몸이라고.”
그가 기절해있던 3일 동안 금랑도 어느 정도 마음의 여유를 찾은 걸까. 응급실 앞에서 불같이 화를 냈었던 그는, 지금은 마치 바람조차 불지 않는 호수의 수면처럼 평화롭고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때 물살에 휘말려 떠내려가는 애들을 구한게 이 몸이었다면.”
“지나간 이야기는 하지 말자. 그리고 내 옆에 있었으니까 내가 먼저 나선 것뿐이잖아. 응? 금랑도 나를 잡으려고 했고.”
“놓쳐버린 게 문제지만.”
“그건 물살이 너무 세서 그런 거잖아. 너까지 다쳤다면, 난 더 슬펐을 거야.”
포트데스를 쓰다듬으며 말하는 월견의 말이 단호하기 짝이 없다. 금랑은 못내 그것이 서운하게 느껴져, 슬쩍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자신의 심정도 알아야 정상이 아닌가. 제가 얼마나 마음이 아픈데. 며칠 쉬면 털고 일어날 수 있는 부상이 아니라, 선수 생명이 끝나버릴 부상을 입은 당신을 보는 게 얼마나 힘들 줄도 모르고.
“맞아, 사고가 났던 날 단델도 왔다갔어.”
속상함을 이겨내기 위해서 그는 애써 다른 쪽으로 말의 주제를 돌렸다. 금랑의 작전은 제대로 먹혀들어가서, 심란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던 월견도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응. 뉴스를 보고 왔더라고. 네 응급수술비도 내줬어.”
“세상에, 비쌌을 텐데.”
“비쌌겠지. 하지만, 그런 거 아닐까? 자신에게 도전하러 와주는 챌린저에 대한 예우나 애정 같은 거.”
“라이벌이니까 오히려 두고 볼 수 없다, 라는 거 말이지?”
과연 그건 단순히 라이벌이기 때문일까. 금랑은 그 말에 어떻게 대답할지 망설이다가, 씨익 웃어보였다.
“그렇지. 단델 녀석, 이 가라르 지방의 모두가 포켓몬 승부를 즐기는 강한 트레이너가 되는 거 꿈이라고 했으니까. 너 같은 인재를 내버려둘 리가 없잖아?”
“네 말을 들으니 그런 것 같기도 한 걸…, 하하. 단델은 참 정이 많다니까.”
“아, 말이 나온 김에 녀석에게도 연락해 둘게. 소니아도 그렇고, 다들 걱정할 테니까.”
“응. 부탁할게. 금랑.”
‘그럼 실례.’ 익살스럽기까지 한 웃는 얼굴로 병실을 나온 금랑은 문이 닫히기 무섭게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월견이 깨어나서 다행이다. 하지만, 얼굴을 마주보고 있으려니 숨이 막혀 와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당사자는 분명 ‘네 탓이 아니고 네가 다치지 않은 게 더 다행이다.’라고 말했지만, 제 마음이 편하지 않다면 그 말이 다 무슨 소용인가.
물론, 월견의 성격과 자신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가 원망하거나 화낼 거라는 예상은 하지 않았었다. 그래, 차라리 한 소리 들었다면 마음은 더 편했으리라. 말로 입은 상처는 겉에서부터 오는 것이기에 금방 아물어도, 속에서부터 곪아가는 죄책감은 시간이라는 약도 잘 듣질 않아서.
“저기, 금랑 씨?”
우두커니 서서 스마트로토무를 꺼내려는 그를 부른 건 익숙한 얼굴의 간호사였다.
이 사람은 분명, 응급실에서 월견의 수술을 돕고 제게 입원서류를 작성해달라고 한 간호사였지.
그 날의 기억은 이제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아서 확신할 수 있다. 별로 좋은 예감은 들지 않는 와중에도 고개 숙여 인사부터 한 금랑은 스마트로토무를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네?”
“잠깐 괜찮으실까요?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아…, 월견 때문에요?”
“아뇨. 보호자 분…, 그러니까 금랑 씨의 일 때문에 부른 거예요.”
“네?”
이건 또 무슨 일이지. 안 그래도 정신이 없는데, 생각할 거리가 느니 정말로 죽을 맛이다. 물론 이런 금랑의 고통을 알 리 없는 간호사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손짓할 뿐이었고, 그는 결국 상대를 따라 병원의 휴식공간으로 향했다.
의자와 테이블, 음료수를 뽑아 마실 수 있는 자판기가 준비된 휴식공간에는 몇 명의 환자들이 쉬고 있지만 그 누구도 금랑과 간호사에게는 관심을 주지 않는다. 이런 곳에서 말할 정도의 일이라면 아주 비밀스러운 일은 아니라는 뜻이겠지만, 왜 속이 자꾸 울렁거리는 걸까. 금랑은 울렁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다름이 아니라…. 금랑 씨도 분명 그 사고 때 월견 씨와 함께 물살에 휩쓸렸었죠?”
조심스럽게 입은 연 간호사가 금랑의 눈치를 살핀다. 아아. 그제야 그는 자신도 그 사고의 피해자라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그동안은 월견의 부상에 신경 쓰느라 제가 겪었던 일에 대하선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일단 자신도 그때 부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긴 했었지. 그게 단순 찰과상이라 몇 주가 지나면 다 나을 상처라 해도, 자신 역시도 환자였다는 말이었다.
“네.”
“혹시 그 때 기억으로 많이 힘드신가요?”
“…예?”
“요 며칠 계속 월견 씨를 만나러 오는 걸 봤는데, 매번 너무 괴로워하시는 것 같아 의사선생님도 저도 걱정이 많았거든요. 금랑 씨만 원한다면, 심리치료 쪽으로 도움을 줄 수 있어요. 물론 이 치료는 월견 씨도 받을 거예요.”
‘어떠신가요?’ 간호사의 권유는 부드러웠지만, 금랑은 거기서 알 수 없는 강제성을 느끼고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제가 죄책감으로 힘들어 한 것도 맞고, 불안하고 초조해 한 것도 맞다. 하지만 자신은 저런 치료까지는 필요 없었다. 의료진이 그렇게 판단하고 직접 권할 정도로 필요해 보인다 하더라도, 자신은 이 제안을 거절해야만 했다.
“괜찮습니다.”
“예? 어째서…. 혹시 월견 씨와 함께 받는 게 부담스러운 거라면, 그건 일정을 조정하면….”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것 까진 받지 않아도 괜찮아서 거절하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어 보인 금랑은 자신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갔다. ‘금랑 씨!’ 간호사가 자신을 부르는 것이 들리지만, 그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잠을 설쳐 뻑뻑한 눈을 비비며 병원의 옥상으로 향하는 금랑의 표정은 여전히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였지만, 꾹 다물린 입은 간헐적으로 욱신거리며 감정을 뱉어내려 하고 있었다.
제가 힘들어 하는 것은 사고 당시의 기억이 트라우마처럼 남아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금랑 안에서 그 날 호수에서의 기억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아름답게 기억되어 있었으니까. 용맹하게 포효하는 다이맥스 갸라도스의 아름다운 비늘, 청량하게 빛나던 물살, 그리고, 물살에 휩쓸려가는 아이들에게 뛰어드는 월견의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기에.
‘그건, 꼭.’
망설임 없던 입수, 부드러운 유영. 그리고 두려움이라고 없는 표정까지.
그야말로, 그건 거대한 돌고래였다.
“치료는 무슨.”
제게 심리치료 같은 건 필요 없다. 월견의 선수 생활이 끝장난 그 사고를 그렇게나 아름답게 기억하는 제 머리가 문제라면 그건 내과나 신경과로 가야하는 문제겠지. 그는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기에, 간호사의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하아.”
옥상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마음을 진정시킨 그는 뒤늦게 스마트로토무를 꺼냈다. 우선은 단델에게 연락하고, 그다음엔 소니아와 야청에게 연락해야겠지. 월견을 기다리는 이들은 많지만 굳이 이 세 명을 먼저 떠올린 것은 역시 체육관 챌린지를 함께한 동료였기 때문이었지.
“여보세요?”
오늘은 바쁘지 않은 걸까. 신호가 두 번 정도밖에 울리지 않았지만 단델과의 통화는 금방 연결되었다. ‘형, 누구야?’ 멀리서 들리는 호브의 목소리에 굳어있던 표정이 풀어진 금랑이 슬쩍 물었다.
“여, 챔피언. 집이야?”
“응. 오늘은 경기 일정이 없거든. 무슨 일이야?”
“월견이 깨어났어.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연락했어.”
“뭐, 정말?!”
‘우당탕.’ 의자에 앉아있기라도 했던 것인지 통화 너머로 무언가가 넘어지는 소리가 난다. 그래. 놀랄 만도 하지. 아까 전 간호사의 전화를 받았을 때 자신도 저렇게 놀랐으니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언제 깨어났어?”
“아까 전에. 나도 연락 받고 와서 얼굴 본 다음 바로 너한테 전화한 거야.”
“고마워, 지금 갈게!”
빠르게 연결된 만큼, 참으로 빠르게 끝난 통화다. 익히 잘 알고 있었던 챔피언의 행동력을 다시 한 번 실감한 금랑은 소니아의 번호를 눌렀다.
❋
“응, 나는 괜찮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음에 시간 날 때 와주셔도 되어요. 아녜요, 저도 이제 다 컸는걸요. 응. 그럼 아빠한테도 안부 전해주세요.”
뚝. 후우. 통화를 끊기 무섭게 긴 한숨을 내뱉은 월견이 편하게 침대에 드러누웠다. 3일 만에 깨어났다고 해도 제게 미뤄져있던 할 일이 이렇게나 많다니. 이래서야 치료에 집중하기도 전에, 피로로 나가떨어질 것 같았다.
‘쉬고 싶다.’
리그 관계자인 부모님은 바빠서 당장 면회를 올 수 없다. 원래도 각자 바빠서 가족끼리 모이는 일이 없었던 만큼 지금 딱히 부모님의 손길을 바라는 건 아니었던 그는 별로 서운해 하지도 않고 스마트로토무를 내려놓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 때문에 누군가가 걱정하는 게 싫다. 어떻게든 혼자서 잘 버텨나가는 것이 특기이자 장점인 월견은 이번 부상도 최대한 자신의 선에서 이겨내 가려고 마음먹었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아직 등을 바닥에 붙인지 5분도 되지 않았는데 손님이 찾아왔다. 어차피 상태를 체크하러 온 간호사일 것 같지만 편하게 드러누워 있는 것은 예의가 아닐 것 같단 생각이 든 월견은 싫은 내색을 하면서도 다시 상체를 들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문 너머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은 챔피언의 붉은 망토자락이었다.
“정말 일어났구나.”
“아!”
이 얼마나 반가운 얼굴인가. 월견은 기뻐하며 슬쩍 손을 흔들었다.
금랑만큼 급박해 보이는 건 아니지만, 단델도 이마에 땀이 맺혀있는 걸 보아 급하게 병원까지 온 모양이다. ‘오늘은 경기 일정이 없었던 걸까.’ 스케줄이 빡빡한 챔피언의 행차에 감격보다는 걱정부터 한 월견이 침대 옆 의자를 가리켰다.
“어서 와, 앉을래?”
“고마워. 여기, 이거 선물이야.”
단델이 내민 것은 여러 가지 나무열매 맛 주스가 든 선물세트였다. 이런 것 까지 사오다니, 정말 다정한 사람이다. 제 응급수술비도 단델이 냈다고 하던데, 자신은 그에게 대체 어디까지 신세를 진 것인가.
“이런 것 까지 사와주고…. 너무 많은 걸 받은 것 같은데?”
“별거 아니야. 그냥 주스일 뿐인걸.”
“응급수술비도 단델이 줬잖아.”
“그건 내가 내고 싶어서 낸 거야. 네가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낸 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아.”
햇살처럼 웃은 그는 헝클어진 월견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침대에 누워만 있어서 여기저기 엉키고 부스스해진 백금발의 머리카락은 커다란 손을 거칠 때 마다 조금씩 부드러워졌고, 이내 어느 정도 가지런히 정리되어 작은 등 뒤로 넘어갔다.
“나, 다시는 단델에게 도전하러 가지 못할 것 같아.”
“…….”
“포켓몬 승부 정도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리그는 무리일 거야. 그 정도로 다쳤을 줄 몰랐는데 의사선생님이 그러더라고.”
차분하게 말하는 월견의 얼굴엔 흐트러짐이 없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확실한 실망감이 숨어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꺾여버린 승부욕과, 욱신거리는 아픔이 알려주는 불투명한 미래와, 상대의 호의에 보답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부정적인 확신. 그 모든 걸 감추기엔, 월견은 아직 어렸다.
“재활치료를 해도?”
“응. 무리하면 안 된데.”
“…그래도, 그래도.”
무어라 말을 하려던 단델은 한숨을 끝으로 입을 닫았다.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허튼 희망만 늘어놓는 건 너무 뜬구름 잡는 소리일 것 같아 그 마음에 닿지 않겠지. 그는 월견에게 제 진심을 전하고 싶기에, 섣부르게 말을 잇지 않고 한참을 침묵을 유지했다.
“그래도 금랑이라도 멀쩡해서 다행이다, 그렇지?”
“응?”
조용해진 단델을 대신해 입을 연 건 월견이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차라리 침묵이 나을 것 같이 느껴질 정도로 좋지 않았다.
적어도, 단델에게는 말이다.
“금랑이랑 나 둘 다 다쳤으면, 더 큰일이 됐을 거 아냐.”
“그건, 그렇지만….”
“어쩌면 다행일지 몰라. 금랑은 관장 제의도 받을 만큼 실력 있는 선수잖아. 만약 금랑이 다치고 내가 멀쩡했다면….”
“그런 말 하지 마!”
드물게도 큰 소리로 딱 잘라 말하는 단델 때문에, 월견은 불에 덴 것 마냥 화들짝 놀라 입을 닫았다. ‘아차’ 제가 환자를 상대로 호통을 쳤다는 사실에 등골이 오싹해진 단델은 잠깐 당황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이어갔다.
“…아무리 가정이라고 해도, 너의 가치를 남이랑 비교하듯이 그렇게 말하지 마. 더 소중한 목숨도, 덜 소중한 목숨도 없어.”
“단델….”
“네가 다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괜찮지 않아. 나도, 너와 좀 더 승부하고 싶었어. 슛 스타디움에서, 관중들의 환호를 들으면서, 다이맥스한 포트데스의 앞에서 지시하는 널 더 보고 싶은데.”
이런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 아닌데, 솔직한 말이 마구 새어나와 버린다.
제가 이런 소리를 하면 월견은 분명 부응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속상해 하겠지. 하지만, 저렇게 자신을 ‘다쳐도 괜찮은 무언가’로 여기는 걸 어떻게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있나. 단델은 결코 그런 언행을 그냥 두고 볼 남자가 아니었고, 그 상대가 오래 전부터 라이벌이었던 친우였다면 더더욱 눈을 돌릴 리 없었다.
“기도할게. 네 몸이 얼른 좋아지기를. 그리고 다시 리그에 돌아오기를.”
“돌아갈 수 있을까?”
“물론이야. 해보지 않고 단정 짓지 말자. 사실 규정으로 정해진 건 아니잖아? 아픈 사람은 참가할 수 없다던가, 하는 거. 있다면 내가 고쳐볼게. 로즈 위원장에게 말해서 말이야.”
“나 하나 때문에 그렇게 까지?”
“널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이후에 지금 같은 일이 다른 사람에게도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 단델의 되묻는 말에 월견은 온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에 또 올게! 피곤해 보이니 쉬어.”
“응? 나, 많이 피곤해 보여?”
“많이 까지는 아닌데, 조금 지쳐 보이긴 해.”
“그렇구나, 하하.”
역시 챔피언. 겨우 몇 십 분 이야기 한 게 전부인데, 아주 정확한 분석이다. 몸도 마음도 지쳐있던 월견은 단델의 배려를 사양하지 않았다. 사실, 먼저 가겠다고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10분 안으로 제 쪽에서 ‘이만 쉬고 싶다’고 말을 꺼냈을지도 몰랐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기도 했지.
아쉬운 작별인사 후 손님이 나가고, 자신은 다시 혼자 남는다.
벌써 노을이 지기 시작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월견은 순식간에 지나간 하루를 곱씹으며 천천히 몸을 뉘였다.
오늘만 해도 몇 번의 주사를 맞고, 몇 번의 검사를 받았던가. 당분간은 이런 나날이 이어질 걸 생각하면 벌써 지겹고 진절머리가 난다. 적어도 편하게 움직일 수 있는 증세로 입원했다면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외출도 하며 기분전환을 했을 텐데. 그리고 운이 좋았다면, 그런 기분전환을 하는 동안에 트레이너와 만나 1대1 승부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졸려….’
움직이지도 않고 아프기만 한 왼쪽다리는 납처럼 무거워서 자신을 잠들게 하지 못했지만, 그 무게도 피곤에 절은 몸을 완전히 잡아 두진 못했다. 마치 물속에 가라앉듯이 서서히 잠속으로 빠져든 월견은 스르륵 눈을 감았다.
❋
웅성웅성. 수군수군. 무의식 속에서 조금씩 커지는 소음이 선명해진다. ‘진짜 월견 선수야!’ ‘리그 카드에 사인 받고 싶어.’ ‘포트데스 보고 싶다. 진품 포트데스 라던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에 대해 떠드는 것 같은 그 목소리들은 모두 앳된 티가 났다.
‘누구지?’
자랑은 아니지만, 제가 다친 게 빅뉴스 감이 될 정도의 유명세는 있는 탓에 누군가의 화제가 되는 건 익숙하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들으라는 듯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걸 본 적은 별로 없었는데,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월견은 호기심에 눈을 떴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자그마한 그림자 세 개와 마주하게 되었다.
“헉.”
“이, 일어났다!”
“우와아, 도망가자~!”
침대에 빙 둘러앉아 자신을 보고 있던 것은 환자복을 입은 세 명의 어린 아이였다. 나이는, 그래, 단델의 동생인 호브의 또래 쯤 될까. 아이들은 마치 부엌에서 어머니가 갓 구워놓은 쿠키를 몰래 훔쳐 먹다가 걸린 것처럼 까르르 웃으며 병실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도주로는 제 3자에 의해 허망하게 막히고 말았다.
“잠깐~. 너희들. 사인 받고 싶었다며? 도망은 왜 가?”
병실 바깥 쪽 의자에 앉아있던 금랑은 아이들이 소리친 것들 들었는지 잽싸게 안으로 들어오며 문을 슬쩍 닫아버렸다. ‘우와앗~!’ 도주가 실패한 것 치고는 그다지 절망하지 않는 아이들은 여전히 하하 호호 웃으며 금랑의 옆에 달라붙었고, 금랑은 제 주변의 장난꾸러기 들을 데리고 월견에게로 향했다.
“금랑.”
“잘 잤어? 시끄러워서 깼다면 미안해. 이 녀석들, 네 팬이라지 뭐야? 널 보고 싶다고 졸라서 이 몸은 잠깐 나가있을 테니 들어가 보라고 했어.”
“내…, 팬?”
월견은 당황스러운 듯 안절부절 못하며 아이들을 훑어보았다.
제게 팬이 있다는 것은 그리 새삼스럽지 않지만, 자신은 이제 은퇴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아이들은 제 상태를 모르는 걸까? 만약 안다면, 더 이상 리그에 나갈 수 없는 제게 응원을 보낼 이유가 없을 텐데.
영문을 몰라 허둥지둥 하는 그와 달리, 아이들은 밝은 태도로 조잘조잘 이야기를 쏟아냈다.
“저! 매일 TV로 경기 보고 있어요! 전에 챔피언이랑 한 시합, 멋졌어요! 마지막 다이맥스에서 밀리지만 않았다면 이겼을 텐데!”
“그래도 킬가르도를 한 번에 쓰러뜨린 건, 승리 이상으로 값졌다고 아나운서가 그랬잖아!”
“맞아, 맞아. 월견 언니의 포트데스는 정말 강하니까!”
세 명이서 돌아가며 떠들고 있으니 어째 끼어들 틈이 없다. 자연스럽게 조용해진 월견은 결국 발언을 포기하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 아이들은 정말로 포켓몬과 가라르 리그를 좋아하고 있다. 말하는 표정과 들뜬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진실 된 애정이 자신에게도 전해져, 월견은 괜히 마음이 뜨거워졌다.
“저기, 많이 다쳤다고 들었어요!”
“…응? 어디서?”
“뉴스에서 그랬어요! 그래도, 저는 알아요!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버텨 역전하고 이겨내는 게 누나의 장점이잖아요!”
“퇴원하면 다시 리그전 하실 거죠?”
‘그런 건 불가능해.’ 현실적인 대답이 머릿속에서 맴돌지만, 자신의 입은 다른 말을 내뱉는다.
“응. 얼른 낫도록 할게.”
“와! 그럼 제 카드에 사인해 주세요! 옛날에 구매했거든요!”
“저도, 저도 사인요!”
원하는 대답을 들은 아이들은 기뻐서 주머니에 넣어놓았던 리그 카드를 내민다. 몇 개월 전 자신의 모습이 찍힌 리그 카드는 끝이 조금 구겨져있어, 얼마나 가지고 다니며 만지작거렸는지 눈에 선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사인을 받은 아이들은 공손하게 인사하고 병실을 나간다. 이 모든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금랑은 복도를 뛰어가는 어린 팬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병실 문을 닫고 월견의 옆자리로 돌아왔다.
“봤지? 네 팬들은 널 기다리고 있어.”
“…그러게.”
“그러게, 가 아니잖아? 반응이 미적지근한 걸~”
“그렇지만, 너무 놀라서….”
아직도 자신을 응원해 주는 사람이 있다. 그것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너무나도 감격스러워 말로 표현 할 수가 없다.
“나, 열심히 치료 받을게.”
“그래. 이 몸도 리그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기다리는 동안 이 몸이 챔피언이 되어도 원망하지 않기다?”
“안 해. 오히려 챔피언이 된 금랑에게 도전하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드니까.”
“하하.”
그 때가 처음이었다. 사고 이후, 서로를 마주보며 함께 소리 내어 웃은 것은.
금랑은 드디어 돌아온 꽃 같은 미소에 겨우 마음의 짐을 덜어놓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