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붉은 파랑(波浪)
그날은 유난히도 볕이 따가웠다.
평소와 다름없는 조용한 옥허궁. 원시천존은 안쪽 방에서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고, 제자들은 제 나름대로 시간을 보내며 하루를 소모하고 있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하늘을 보며 평화로운 시간을 곱씹던 옥정은 자신 외의 다른 제자들이 이미 궁을 떠난 것을 눈치 채고 한 발 늦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제 무리를 하여서 그런가. 어깨가 조금 무겁고 뻐근하다. 이런 날에는 괜히 무리하지 말고 얌전히 명상이나 하는 것이 이롭지. 성실하지만 무모하지는 않은 그는 오늘을 쉬어가는 날로 정하고 발걸음을 옮기다가, 낯선 목소리에 멈춰 섰다.
“거기, 잠깐만요.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는 분명 여성의 것이었다. 여선들은 모두 서곤륜에 있을 터인데, 어째서 옥허궁에서 여자가 있단 말인가. 의아함을 품고 고개를 돌린 옥정은 자신을 부른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입을 열려다가, 그대로 얼어버리고 말았다.
“갑자기 불러서 죄송합니다. 혹시, 원시천존 님이 어디 계신지 아십니까?”
“…아….”
제게 말을 걸고 있는 이는 초면이지만, 낯선 질문자의 뒤에 서있는 사람은 누군지 알 것 같다. 서곤륜의 주인. 여선들의 우두머리. 언제나 반투명한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녀도 온 몸에서 빛이 나 눈에 띄는, 태생부터 선녀이자 신인 자. 서왕모.
‘원시천존 님을 뵈러 오신 건가.’ 높으신 분들끼리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는 건 놀라울 것 없는 일이지만, 방문 소식을 듣지 못했던 옥정은 약간의 당혹스러움에 곧바로 대답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아니, 과연 그건 당혹스러움 때문이었을까?
그는 반듯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의 시선을 피해 눈을 감았다가, 건물의 안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제일 안쪽 방에서, 무언가를 정리하고 계십니다만.”
“아,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스승님, 그렇다고 합니다. 서두르시죠.”
서왕모를 ‘스승님’이라고 부른 여성은 그제야 시선을 거두었다. 정황을 보건데, 그는 서왕모의 제자 되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잠깐. 그렇다면.
무언가 떠오른 것이 생긴 옥정은 상대를 살펴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가, 또 다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아, 그러고 보니.”
갈 길을 가려다 말고 갑자기 자신을 올려다보는 얼굴에서 웃음꽃이 핀다. 그는 이름 모를 상대의 눈빛에서 전해오는 기(氣)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릴 뻔 했다.
‘역시 소문의 그 제자인가.’ 제가 떠올린 것이 헛된 정보가 아닌 걸 확인한 옥정은 제 기억 속을 뒤져 소문의 내용들을 짜깁기해 나갔다.
“그대는 원시천존 님 제자인가요? 부끄럽게도 저는 서곤륜 밖으론 잘 나오지 않아서, 아는 게 별로 없거든요.”
옥정은 대꾸할 수가 없었다. 분명 대답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도무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아서 곤란했다. 겨우 눈이 마주친 것뿐인데 이런 기백이라니. 마치 오래 묵은 맹수와 마주친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이었다.
“저는 비렴이라고 합니다. 그대의 친절함에 감사를 표합니다.”
자신을 비렴이라 소개한 젊은 여선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옥정에게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고 서왕모를 따라 나섰다.
거의 하나의 것처럼 겹쳐져 들리는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고, 가슴과 목 언저리를 짓누르는 것 같은 중압감이 조금씩 옅어진다. 두 손님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을 즈음이 되어서야 크게 숨을 몰아쉰 옥정은 식은땀으로 젖은 제 목을 더듬었다.
‘옥정, 서왕모 님의 으뜸제자 본 적 있어? 엄청 예쁘다고. 성격은 좀 드세지만.’
그런 말을 들었을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했었다. 특별히 관심이 가거나 꺼려질 것도 없이. 그렇구나, 로 정리할 수 있는 사실직시. 그것도 그럴 것이, 서왕모의 제자가 아름다운 것과 제 수행이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확실히, 저런 얼굴이라면…. 시끄럽게 떠들 만도 하다. 모순된 행동이긴 하지만, 옥정은 우습게도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정말로, 입에 오르내릴 얼굴이라고.
아니, 애초에 그를 아름답다거나 절색이라는 말로 표현해도 되는 걸까. 옥정은 시야에서 사라진 비렴의 얼굴을 다시 떠올려 보며 숨을 골랐다.
곧게 선 자태, 내면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진달래 색 눈동자 한 쌍. 의연하고 당당한 미소와, 절개(節槪)를 느끼게 하는 걸음걸이. 아름답지만 단순히 어여쁜 것이 아닌, 생명력이 넘치는 것이. 꼭….
‘꼭, 매화 같았지.’
처음엔 맹수라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돌아보니 신목(神木)이었던 것 같다. 만약 천년 묵은 홍매화가 요괴선인이 된다면, 저런 자태를 하고 있지 않을까?
흐트러진 마음을 겨우 정리한 옥정은 아무도 없는 곳을 찾기 위해 바깥으로 나섰다.
❋
옥허궁의 고요함은 근엄함이 느껴질 정도로 무겁고, 적당한 볕이 들어오는 복도는 서왕모의 궁전과는 또 다른 느낌의 아름다움이 가득하다.
서왕모과 원시천존이 담설(談說)을 나누러 궁 안쪽으로 들어간 후, 석상처럼 정자세로 복도에 서서 스승의 귀환을 기다리던 비렴은 문득 밀려오는 나른함에 눈을 감았다. 날씨가 지나치게 좋다. 기둥을 등지고 섰음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따스한 볕이 눈꺼풀을 무겁게 해 곤란하다. 눈부심 때문인지 피곤함 때문인지 도무지 눈이 떠지지 않던 그는 결국 두 눈에게 쉬는 시간을 주기로 하고, 정적의 어둠속에서 떠오르는 잡념들을 정리했다.
‘세상에는 그렇게 생긴 남자도 있구나.’ 그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그려진 것은, 방금 자신과 대화했던 이름 모를 남성의 얼굴과 그에 대한 제 감상이었다.
인간계에서 태어나 지냈던 시간은 10년이 채 되지 않았고, 그 이후로는 쭉 곤륜산에서만 지낸 자신은 그리 많은 남자를 만나보지 못했었다. 어렸을 때 보았던 남자라고는 가족들이나 마을 사람들 정도가 전부였고, 서곤륜에는 여선들만 모여 있다 보니 몇 십 년이나 수행하면서도 남자를 볼 일이 없었지. 그래도 얼마 전 부터는 외출이 허락되어 원시천존의 제자들과 만나보고 대련도 해봤었는데…. 방금 전 그 남자처럼 감탄이 나오는 남자를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꼭 난초 같았단 말이지. 그림에서 튀어 나온 것 같았어.’
단순히 잘생겼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물론 굉장히 잘생기기도 했지만, 비렴이 그를 곱씹고 있는 건 남자가 가지고 있던 독특한 분위기를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혼의 맑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남색 눈동자, 잘 관리한 난초 마냥 바르고 부드러운 자태, 나긋한 미성, 그리고, 이지적인 얼굴에 슬쩍 스치는 절제된 온화함이.
‘이름도 못 들었네. 누굴까.’
아무리 갈 길이 급해도 이름 정도는 들어둘 걸 그랬다. 하여간, 이 급한 성격은 도무지 고치려고 해도 고쳐지지가 않았지. 스스로의 성급함에 쓴웃음을 지은 비렴은 두 눈을 뜨고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돌아가서는 또 수행을 해야겠지. 오늘은 이렇게 외출도 하고 왔으니, 더더욱 정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은 아직 배움이 부족한 몸. 주변에서는 다들 ‘대단하다’고 말해도, 자신이 납득하지 못하는 이상 배움에 게으름을 피울 순 없었다.
“비렴아.”
각오를 다지며 굳은 몸을 풀던 사이, 서왕모가 혼자서 돌아왔다. 아아, 이제는 서곤륜으로 돌아갈 시간이구나. 얼른 몸을 풀고 싶어 근질근질하던 그는 제 스승을 귀환을 누구보다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다녀오셨습니까, 스승님?”
“응. 이제 돌아가자꾸나.”
“네. 그럼, 앞장서겠습니다.”
제 스승은 귀한 몸이시다. 뭐라 해도, 모든 여선들의 수장이고 대표였으니까. 그러니 제가 앞장서 길을 안내하고 모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신은, 그 귀한 몸의 수제자이고 으뜸제자였으니까.
‘원시천존 님은 배웅도 나오지 않으시는 건가.’
의연하게 앞서나가던 비렴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제 스승에게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자신은 엄연히 아랫사람. 제 스승과 동격, 혹은 그 이상 급인 상대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는 건 역시 예의가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제 스승은 원시천존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온 걸까. 평소엔 전할 말이 있어도 영수나 제자들을 통해 서신을 주고받았으면서, 얼마나 중요한 일이기에. 옥허궁까지 행차하여 자신도 모르는 밀담을 나누고 가는 것인가.
“무슨 생각을 하니, 비렴아.”
“예?”
“유독 조용한데, 무언가 고민이라도 있니?”
아아, 제 스승의 통찰력이란 얼마나 무서운가. 이것저것 생각하느라 자연스럽게 말수가 줄었던 비렴은 소리 없이 탄식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오셨나요.’ 그런 걸 물어 볼 만큼 자신은 어리고 눈치 없지 않았다. 그렇다면 뭐라고 대꾸해야 할까. 이미 들켜버린 진실에 거짓을 고하는 것은 바보 같은 자승자박이 될 뿐인데.
아주 잠깐의 침묵. 그 짧은 정적의 틈에서 문득 제가 입 밖으로 내뱉어도 괜찮을 것 같은 주제를 떠올린 비렴은 능청스럽게 서왕모에게 답했다.
“그 사내, 이름이 뭔지 아십니까?”
“그 사내?”
“네. 아까 저희에게 길을 가르쳐 준, 그 고운 사내 말입니다. 원시천존 님 제자인가요?”
‘고운 사내’ 꽤나 직설적인 수식어에 은은한 미소만 짓고 있던 서왕모가, ‘후후’하고 소리 내어 웃어버린다.
“옥정 말이구나.”
“옥정?”
“그래. 원시천존의 제자고…, 너와 비슷한 시기에 곤륜에 왔었던가. 아마 네 또래일 텐데.”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사는 선인들은 대게 시간의 흐름에 둔감한 편이었다. 특히 서왕모는 원시천존과 맞먹을 정도로 오래 살았으니, 세월을 제대로 가늠할 수 없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지. 그러니 저렇게 말하셔도, 정말 제 동년배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저 쪽이 훨씬 연상일 수도 있겠고, 그 반대일지도 모르지.
“옥정은 꽤 실력 있는 도사이니, 나중에 대련 상대가 되어 달라 권해보는 건 어떻겠느냐?”
“정말이십니까? 그래도 괜찮을까요?”
“그럼. 네게 서곤륜은 이제 너무 좁을 테니, 바깥공기도 자주 쐬어야지.”
‘아무리 남녀가 유별한 곤륜산이라 해도, 네 재능은 서곤륜에만 머무르기엔 너무 아까워.’ 아주 어릴 때부터 서왕모가 제게 해준 그 말이, 문득 귓가를 스친다.
저 말은 확실히 칭찬이지만, 최근 들어 유독 저런 이야기가 많아진 것은 어째서일까. 기분 탓이라 하면 반박하기 힘들지만. 마치 다 자란 새끼를 둥지 밖으로 조금씩 밀어내는 어미 새의 행동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래도 저는 스승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이 가장 재미있습니다.”
“그러느냐.”
빈말이라도 기쁘구나.
바람결에 흘리듯 말한 서왕모가 구름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눈부신 곤륜의 하늘을 힐끗 바라 본 비렴은 빈말이 아니라고 대꾸하려다가,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
“나, 어제 그 사람이랑 만났어.”
“응? 누구 말하는 거야, 옥정?”
“서왕모 님의 으뜸제자 말이야. 비렴, 이라고 했나….”
“오! 정말?”
제 말 한마디에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던 동기들이 일제히 눈을 빛내고 자신을 바라본다. ‘아니, 이게 그렇게 주목받을 일이던가.’ 예상 밖의 뜨거운 반응에 옥정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지만, 동기들은 그가 상황파악을 하기도 전에 질문들을 쏟아내었다.
“무슨 이야기 했어? 예쁘지?!”
“별다른 이야기는 안 했어. 원시천존 님은 어디 계시냐고 묻기에 답해준 게 전부야.”
“정말? 그거 외엔 별다른 말 없었고?”
“없었다만….”
대체 제 동기들은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어 자신을 추궁하고 있는 것인가. 아직도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옥정이지만, 다들 비렴에게 대단히 관심이 많다는 것 하나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혼자 왔었어? 어지간하면 서곤륜 밖으로 안 나올 텐데, 무슨 일이래?”
“아아. 그게…. 서왕모 님이랑 같이 있더라고. 아마 서왕모 님의 동행으로 온 게 아닐까 싶던데.”
“서왕모 님이? 별일이네, 옥허궁에 행차하시고.”
“아아. 나도 어제 좀 늦게 나갈 걸~”
다들 수다만 떨 뿐, 수행을 계속할 생각은 없는 걸까. 제가 괜히 쓸데없는 소릴 해서 집중하던 분위기를 흐린 것 같아 썩 기분이 좋지 않다. ‘저기….’ 고지식한 면이 없잖아 있는 옥정은 제 실언 때문에 흐름이 망가진 것 같아 어떻게든 이 상황을 수습해 보려고 입을 열었지만, 그의 노력은 시도해 보기도 전에 소용없게 되어버렸다.
“잠깐 실례합니다.”
옹기종기 모여서 떠드는 무리의 뒤로 단정한 발소리가 다가온다.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는 목소리가 더없이 낯설어 순식간에 입을 다문 제자들은, 침묵 속에서 조용히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아, 저기 있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역시 그는 여인의 모습을 한 일종의 맹수인 게 아닐까? 도대체 언제 어떻게 나타난 것인지 모르겠지만, 뒤돌아 본 곳에는 의젓한 얼굴로 웃고 있는 비렴이 서있었다. ‘세상에.’ 그에 대해서 떠들고 있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사내들뿐이던 장소에 불쑥 여성이 발을 들였기 때문일까. 제자들은 섣불리 말을 붙이지도 못하고 서로의 눈치만 보았지만, 옥정은 침착하게 상대를 바라보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뿐이었다.
오늘은 혼자 왔구나. 스승과 함께하지 않을 때도 저렇게 반듯하게 걷는 걸 보면 바른 몸짓이 완전히 몸에 숙달되어 있는 것 같은데, 얼마나 연습해서 몸에 익힌 걸까. 서왕모 님의 제자란 다 저런 것인가. 평소엔 서곤륜 바깥으로 나오는 일이 없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이 있어 여기까지 온 것인가.
무수한 의문을 안고 상대를 응시하던 옥정에게 돌아온 것은, 당당하지만 무례하지는 않은 손짓이었다.
“거기, 당신.”
“…음? 나?”
“응. 당신. 우리 구면이지요?”
비록 어제 잠깐 만난 게 전부이긴 했지만, 확실히 초면이라 말할 수는 없었지. 옥정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대답을 표했다.
“잠깐 볼일이 있는데, 시간 좀 내줄 수 있을까요?”
“…볼일? 무슨 일이기에….”
어제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던가. 그는 짧은 만남을 회상해 본 후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 가는 일이 없다. 이름을 알려주었을 때 이쪽에서도 통성명을 하는 걸 잊긴 했지만, 뭐라 말하기도 전에 자리를 뜬 것은 상대 쪽이 아니었던가.
대체 무슨 볼일이지. 대체. 무슨 이유로, 자신을….
“아, 당연히 되지! 그렇지, 옥정?”
“뭐?”
“그럼, 그럼. 안 될 이유가 없지, 암!”
“우린 다른 곳에 가서 수련할게, 그럼!”
당사자는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려 했지만, 주변의 구경꾼들은 낯선 손님께 지목받은 동기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조심성이 넘치는 본인을 대신해 덥석 대답한 동기들은 자기들끼리 무리지어서 자리를 피해버렸고, 머지않아 광활한 공터 한가운데는, 옥정과 비렴만이 덩그러니 남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어제와 같이 얼어붙는 감각은 느껴지지 않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옥정은 흔들림 하나 없는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한 쌍의 진분홍 빛 눈동자에게서 시선을 피하지 못하다가, 마른 침을 삼키고 겨우 말을 이어나갔다.
“어수선한 모습을 보여 버렸군요. 미안합니다.”
“아냐, 굳이 사과할 것 까진 없는데. 그것보다 슬슬 말 놓지 않을래? 어제는 스승님 앞이라 존대했지만, 듣자하니 나이도 비슷한 것 같은데.”
“응? …어, 으음. 그래.”
방금 전까지는 꺾어도 부러지지 않을 고목마냥 고상하게 굴던 그인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순식간에 말을 놓고 친근하게 굴어오고 있다. 극명한 온도차. 맹수에서 매화꽃으로 변한 상대방은, 거침없이 서로의 거리를 좁혀왔다.
“그러니까, 이름이 뭐더라? 미안, 이름도 제대로 모르면서 불러낸 꼴이 됐네.”
“옥정이야. 알려준 적 없으니 모르는 것도 당연해.”
“아니, 스승님에게 물어봤었거든. 근데 잊어버렸네. 미안하군.”
“물어봤다고? 서왕모 님께?”
“응. 아. 그러면 안 되는 거였나?”
안 될게 무엇이 있나. 옥정은 느릿느릿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제겐 물어봤다는 사실이 오히려 기쁘게 다가왔다. 물론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건 유감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차피 이름이라면 몇 번이고 가르쳐 줄 수 있으니 그런 망각 정도는 상관없지 않은가.
“그런데, 볼일이라는 건?”
“아, 맞아! 용건이 있어 왔었지. 잊고 있었네.”
‘하하.’ 시원스럽게 웃은 비렴은 슬쩍 시선을 돌리더니,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다시 옥정을 마주보아왔다.
“다름이 아니라…, 나랑 대련해주지 않겠어?”
“대련?”
“응. 스승님이 네 칭찬을 하더라고. 꽤 강하다고 말이야. 잘난 체 하는 것 같이 들리겠지만, 서곤륜 안에선 더 이상 내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이 없어서 수행에 곤란을 겪던 참이었거든.”
자칫 건방져 보일 수 있는 말도 당당한 태도로 말하니 그 무게가 다르게 느껴진다. 묘한 표정으로 코밑을 문지른 옥정은 대답을 기다리는 상대의 모습을 가볍게 훑어보고 헛기침했다.
자신을 높게 평가해 준 건 고맙지만, 정말 괜찮을 걸까. 상대는 여성이다. 대련이라는 건 일정한 규칙 아래에 서로의 실력을 겨루는 수행이라지만, 자칫 잘못해서 몸에 흉터라도 남게 만든다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은데.
“흠, 혹시 여자라서 싫다는 건 아니지?”
“아냐. 그럴 리가!”
“하하, 그렇게 당황하면 내가 더 민망한데.”
다소 능청맞은 얼굴로 웃은 비렴은 준비해 온 목검 중 하나를 냅다 옥정에게 던졌다. 당황해서 방심한 마음과는 달리 제대로 반사 신경을 갈고닦아둔 그는 눈앞으로 날아온 목검을 낚아채고, 마른 침을 삼켰다.
그래, 상대는 엄연히 자신과 같은 수행중인 도사. 그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동기들에게는 하지 않는 걱정을 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제 마음가짐을 타박한 옥정은 비로소 결심이 선 것인지, 검을 고쳐들고 뒤로 물러섰다.
“잘 부탁할게, 비렴.”
“음. 이쪽이야 말로.”
서로를 향해 목검을 겨눈 두 사람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스쳐지나간다. 하나. 둘. 마음속으로 수를 세던 옥정은 ‘셋’을 세는 것과 동시에 제게 달려오는 비렴을 향해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
상대의 어깨를 향해 내지른 검에 부딪힌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착시, 혹은 회피. 허무하게 허공을 가르는 목검 아래, 상체를 숙이고 파고드는 비렴을 뒤늦게 발견한 옥정은 비어있는 몸통을 지키기 위해 급히 무게 중심을 옮기는 수밖에 없었다.
“어딜!”
몸을 틀어 공격을 피한 것은 좋았지만, 자세가 흐트러진 그는 기합과 함께 곧바로 이어지는 비렴의 검을 막을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공격을 허용하게 된다. 승부욕이 넘치는 것은 아니라지만 호락호락 져줄 생각도 없던 그는 망설임 없지 들고 있는 검으로 자신을 타격하려는 검을 내리쳤다.
묵직한 충격. 서로의 힘이 부딪혀 생긴 충격에 목검들이 떨려오고, 튕겨나가듯 서로에게서 떨어져나간 두 사람이 호흡을 가다듬는다.
‘이런.’
아까 그 말은 그냥 자신감이 아니었구나. 성격이 드세다는 동기들의 말은, 혹시 이런 걸 의미하는 것이었나. 생각으로 복잡한 머릿속과 달리, 옥정의 얼굴에는 순수한 미소가 번진다. 이런 상대가 곤륜산에 있었는데, 이제야 검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니! 너무 늦지 않느냐는 한탄과, 지금이라도 만나서 다행이라는 안도가 열기 오른 몸에서 뒤엉켰다.
거친 호흡이 정돈되자 옥정과 비렴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달려들어 거침없이 목검을 휘둘렀다. 나무와 나무가 맞부딪히는 소리는 둔탁했고, 바삐 움직이는 발소리는 요란스러웠지만…. 격렬하게 대련에 임하는 두 사람의 입에는 약간의 기합소리와 날숨 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비렴 아가씨!”
그 때였다. 금속 물체가 움직이는 것 같은 기묘한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오더니, 청동 빛의 거대한 새가 경합으로 어수선한 땅에 내려앉았다.
‘아.’ 이름을 불린 비렴은 들뜬 표정을 감추고 재빨리 청조(靑鳥)의 곁으로 다가갔다. 마치 맹금류를 닮은 그 새는 서왕모가 기르는 영수. 즉, 그의 입장에서는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할 수 없는 상대였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야?”
“서왕모 님이 찾고 계십니다. 급한 일은 아니신 것 같았지만, 전해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아…, 그래? 쯧.”
곤란하다는 듯 혀를 찬 비렴은 땀에 젖은 얼굴을 가볍게 손등으로 훔쳤다.
“미안한데, 나는 이만 가봐야겠어. 승부도 못 내고 가네. 꽤 즐거웠는데.”
“아냐. 사과하지 않아도 돼. 서왕모 님이 부르시는 거라면 어쩔 수 없으니까.”
“이해해 줘서 고마운 걸. 자상하구나.”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모습을 정돈한 비렴은 슬쩍 청조의 위에 올라탔다. ‘아아, 여기 올 때도 저런 방법으로 온 건가.’ 옥정은 익숙하게 영수의 등에 타는 상대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비행보패가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서곤륜에서 여기까지 온 것인지 신경 쓰였는데, 저런 방법이라면 크게 눈에 띄지도 않고 보패도 필요 없겠지.
“이봐, 괜찮다면 다음에도 또 대련해 주겠어?”
청조가 날아오르려 할 때, 손짓으로 비행을 막은 비렴이 잽싸게 옥정에게 묻는다. 옥정은 그 물음에 길게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고, 아름다운 얼굴로 웃어보였다.
“응. 얼마든지.”
바라던 대답을 들은 비렴은 미소로 화답하고 떠나간다. 누군가를 태웠음에도 불구하고 빠르게도 날아가는 청조를 우두커니 보고 있던 옥정은, 그제야 긴장을 풀고 목검에 체중을 의지하고 편하게 설 수 있었다.
“하아.”
간만에 전력을 다 해 움직였더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로감이 몰려오는 것 같다. 제 동기들은 모두 훌륭한 도사들이지만, 이렇게 까지 거침없이 공격해오는 인물은 없었는데. 여성의 몸으로 이토록 야성적일 줄이야. 괜히 첫 만남에서 제가 얼어붙은 게 아니란 생각이 들고 마는 옥정이었다.
‘다음에, 또.’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는 다시 대련하고 싶다는 의사를 보였었다. 얼마든지, 라고 대답했으니 언제가 되어도 부담 없이 와주었으면 좋겠지만…. 과연 어떨까.
“주책없게….”
상대도 즐거워 한 것 같아 다행이긴 하지만, 방금 전 제 미소는 너무 노골적이었다. 대체 자신은 왜 이렇게 들뜬 것인가. 예상치도 못한 강한 상대를 만나서? 간만에 실컷 몸을 풀어서? 그것도 아니면, 그가, 비렴이 다음을 기약해 주어서?
어느 쪽이 제 진짜 마음인지는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미숙한 모습을 보인 것 같아 낯이 뜨거워진다. 목검에 의지한 채 한참을 기대어 서있던 옥정은 땀이 식은 몸에서 도는 한기에 기침이 나올 즈음에야 자리를 뜰 수 있었다.
❋
고요함은 마음을 안정시켜 주지만, 때로는 마음을 어지럽혀 놓기도 했다. 청조에 내려 궁 안으로 들어온 비렴은 쥐죽은 듯 조용한 내부에 덜컥 겁을 먹고 마른침을 삼켰다. 평소에도 정숙한 편인 장소이긴 해도, 이렇게까지 무음에 가까운 조용함은 처음이지 않은가.
“스승님?”
일부러 발소리를 죽이지 않고 나아가던 그는, 궁의 중심에 있는 방의 앞으로 가 목소리를 내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단지 그것 하나만으로 이렇게 애가 탈 수 있을까? ‘들어가겠습니다.’ 다소 일방적인 통보를 한 비렴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 문을 밀어 젖혔고,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문턱을 넘어갔다.
“아. 비렴아.”
아아. 다행스럽게도 자신을 맞이하는 이가 있다. 비렴은 자신을 바라보는 스승과, 그 품에 안긴 작은 그림자를 보고 재빨리 멈춰 섰다.
서왕모와 꼭 닮은 어린 소녀는, 깊게 잠든 것인지 말소리가 오가는 와중에도 눈을 뜨지 않는다. 그 아이가 누구인지 아는 비렴은 두 눈을 크게 뜬 채 입만 벙긋거리다가, 이내 상체를 크게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따님이 숙면 중인 것도 모르고….”
“아니란다. 모르고 그런 거니, 어쩔 수 없지.”
자애로운 서왕모는 쉽게 제자의 경솔함을 용서하고 비단 이불을 딸의 어깨 위로 끌어올렸다.
“그것보다, 일찍 돌아왔구나. 네가 올 줄 알았다면 용길을 깨워둘 걸 그랬어. 너를 꽤 좋아하는데.”
“따님이? 저를요?”
“그럼.”
스승이 거짓말을 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저 말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비렴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제가 기억하는 용길공주는, 늘 제게 인사만 남기고 숨어버리는 병약한 소녀였는데. 그게 호감의 표시였단 말인가? 좋아한다면 좀 더 말을 걸어 주어도 좋을 텐데. 저 자신도 아직 어린편이라지만, 아이의 마음이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래, 옥정과의 대련은 어땠니?”
의아해 하는 비렴을 두고, 서왕모는 제자의 외출에 대한 것부터 물어온다. 성격이 급하고 본론만 중요시 여기는 비렴은 ‘이럴 때는 보통 왜 찾고 있었는지부터 말해주는 게 좋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지만, 차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제게 온 질문에 성실히 답했다.
“정말 강하더군요. 덕분에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결판은 못 내었지만….”
“내 부름에 급히 오느라 그랬구나.”
“대련은 언제든 할 수 있지만, 스승님의 부름엔 즉시 응답해야 하니까요.”
“그리 급한 일도 아닌데….”
제자가 제 말을 더 우선시 했으니 스승이라면 응당 기뻐해도 좋을 상황이건만, 서왕모는 오히려 안타깝다는 듯 난색을 표했다. 눈을 내리깔고 느리게 한숨 쉰 서왕모는 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즐거웠니?”
“대련 말입니까? 예, 즐거웠습니다. 지금까지 대결한 상대들 중, 그만한 상대는 처음이라 조금 들뜨기까지 해버렸습니다.”
“그거 기쁘구나. 나의 제자가 드디어 접어놓은 날개를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얻다니.”
스승의 애틋한 시선에, 비렴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인다. 예쁨 받는 것은 싫지 않았지만, 마냥 그 말에 기뻐할 수는 없었지. 성격이 급하고 직설적인 면이 있긴 해도, 그는 대단히 이성적이었다. 자기 자신의 단점 같은 건,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날갯짓도 제대로 못하는 제자인걸요.”
“왜 그렇게 생각하니? 늘 말하지 않았니. 너의 재능은 내가 보장한다고.”
“하지만 아직 전 제 힘을 제대로 다룰 줄 모릅니다. 베어야 할 것과 베면 안 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검은 무기가 아니라 흉기일 뿐이죠.”
“오. 비렴아. 너는 아직 어리단다. 아직 한창 갈고 닦아야 하는데 벌써 완성되길 바라다니. 정말 성격이 급하구나.”
“하지만….”
반사적으로 부정하는 말을 내뱉은 비렴이 입을 닫고 고개를 들었다. 곤란함이 가득한 얼굴로 입만 벙긋거리는 그는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겨우 생각을 정리하고 말을 이어갔다.
“저는, 제 자신이 미숙한 것을 아는 데 칭찬의 말을 듣게 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스승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전에 스승님께 받은 보패를 처음 사용했던 때, 궁 옆의 도원 한 구석을 박살내 버린 것을. 저는 그저 자신이 가진 힘에 휘둘리는 애송이일 뿐입니다.”
“미숙하면 칭찬받을 자격이 없어지는 거니?”
“그건…, 아니지만….”
서왕모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는 알고 있다. 스승이 재능을 가진 제자를 독려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고, 자신도 제 재능이 남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스스로에게 엄격한 그는 자기 자신의 미숙함을 용납할 수 없었다. 최고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제가 이 힘의 주체가 되는 걸 바라는 것뿐인데. 그것조차 못하는 제가, 어찌 칭찬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겠나.
“조급해 하지 마렴. 너의 세월은 길고, 배울 것도 아직 많이 남았지 않니. 누구든 어리고 미숙한 시절이 있고, 그 시기를 넘어서야지 성장하는 거란다.”
“…네.”
“그래. 착하지.”
마치 아이를 달래는 것 같은 말투다. 아니, 스승의 눈에는 자신이 아이나 다름없어 보일 테니 특별히 이상할 것은 없나. 절로 쓴웃음을 지은 비렴은 표정을 지우기 위해 손등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내가 널 찾은 건, 권할 것이 있기 때문이란다.”
“권할 것, 말입니까? 무엇입니까?”
“다름이 아니라…. 슬슬 선인 면허를 따보는 게 어떠니? 너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진심이십니까?’ 비렴은 스승의 말에 반사적으로 대꾸할 뻔 했지만, 그의 이성은 다행스럽게도 튀어나오려는 목소리를 꽉 억눌러 주었었다.
“면허 준비를 하는 과정은 좋은 공부가 될 테니, 떨어진다 해도 나쁠 것 같지 않고. 합격한다면 그만한 경사가 없지. 안 그러니?”
자신의 제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아채는 건 어렵지도 않다는 것인가. 서왕모는 상대가 거절할 수 없도록 그리 말을 덧붙였다. 당했다. 빈틈없는 제안에 허를 찔린 비렴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음. 음. 참고로 옥정도 슬슬 면허를 딸 때가 되었으니, 같이 수행하자고 권해보렴. 청조에게 말해둘 테니, 언제든 가서 대련하고 와도 된단다.”
“그렇게 까지 해주시지 않으셔도… 아니, 감사합니다. 그리 하겠습니다.”
습관적으로 겸양의 자세를 보인 비렴은, 곧바로 제 발언을 취소하고 호의를 받아들였다. 어차피 거절하더라도 제 스승님의 말솜씨에 못 이겨 수락하게 될 테니, 차라리 한 번에 받아들이는 게 낫다. 그리 생각한 것도 있었지만….
'좋은 핑계거리가 생겼군.'
옥정과 또 대련할 수 있다면, 역시 거절할 수 없어지지. 그 만한 실력자와 붙을 기회를 제가 어찌 놓치겠냐는 말이다. 곤륜에 입산했을 때부터 자신의 힘을 마음 것 발산할 수 있는 상대를 갈구하고 있던 비렴은, 제 영혼이 바라는 것을 똑바로 직시하고 손을 뻗었다.
“대련하고 와서 많이 피곤하지? 이만 쉬러 가렴.”
“네. 실례하겠습니다.”
용길공주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방을 나온 비렴은 제 방으로 돌아가면서 한숨을 푹 푹 내쉬었다.
제가 수행한 기간이 짧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대뜸 선인이 되라니. 정확하게는 ‘준비를 해 보아라’ 정도의 뉘앙스였지만 비렴은 그걸 그저 권유 정도로만 생각하진 않았다.
시험을 우습게 보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솔직히 제 실력 정도면 합격하지 못할 것도 없다. 선인이 되면 제자를 들이고 후배양성에 힘써야 되게 되는데, 그러면 수행할 시간도 없어지지 않는가! 자기 자신의 힘도 제대로 못 다루는 스승이라니, 상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심지어 그 스승이 자신이라면….
‘아, 답답해.’
이렇게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몸을 움직여줘야 한다. 방금 전까지 대련하고 온 주제에 무슨 소리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꾸준한 수행으로 단련된 비렴의 몸은 아직 좀 더 움직일 수 있었다.
‘…다시 찾아가 볼까?’
평소라면 머릿속이 빌 때 까지 서곤륜을 몇 바퀴씩이나 뛰어다녔겠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선택지는 조금 전 검을 마주했던 상대였다. 제 공격을 막아내고, 받아쳐내고, 기회를 노려 역습을 가하던 진지한 얼굴을 떠올리던 비렴은 어느새 한숨을 멈추고 상쾌한 얼굴로 웃음을 흘리기까지 했다.
“비렴 아가씨, 뭐가 그렇게 기분 좋으세요?”
“응? 나?”
“네. 지금 굉장히 기뻐보이시는데요.”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청조는 비렴에게 그리 묻더니, 곧바로 무언가 짐작 가는 게 있다는 듯 제 생각을 덧붙였다.
“혹시 서왕모 님께서 다시 보패를 주신다고 했나요?”
“뭐? 아냐, 그런 거. 애초에 보패는 내가 자진해서 반납한 거니, 돌려달라고 하면 언제든 주실 걸? 스승님은 상냥하신 분이니까.”
“그럼 다른 좋은 일이라도 있나요?”
“좋은 일이라….”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좋은 걸까. 머리를 긁적인 비렴은 결국 제 생각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말을 내뱉어 나갔다.
“아까 그 남자 있잖아. 나랑 대련했던.”
“옥정 도련님 말씀이신가요?”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굉장하지 않았어? 나랑 그렇게 오래 대련한 사람은 그 남자가 처음이잖아?”
“확실히, 비렴 아가씨랑 대결한 원시천존 님 제자들 중 그 분 정도로 합이 잘 맞았던 분은 없었죠.”
외출이 잦은 편이 아니라 비교대상이 많지 않기는 하지만, 어차피 어지간한 실력자가 아닌 이상 상대가 누구든 비렴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제 주인과 그 주인이 선택한 제자에 대한 신용이 깊은 청조는 제법 자랑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남자가 있었다니. 정말이지 손해보고 살았지 뭐야. 좀 더 일찍 알았다면 더 자주 대련해달라고 했을 텐데.”
“그 정도 인가요….”
“당연하지! 그리고 이건 사견이지만, 굉장히 미인이지 않나? 움직임도 절도 있게 깔끔하고, 그렇게 거칠게 싸우는데 표정도 흐트러지지 않는 그 굳센 태도에…. 웃으니까 훨씬 잘생겼던데 점잖은 표정만 짓고 있고 말이야. 아, 물론 성실하고 진지한 남자는 조금 뻣뻣한 쪽이 귀엽다고 생각하지만….”
“…….”
“…응? 왜 그래, 청조?”
아까 전 까지는 흥미롭다는 듯 자신을 보고 있던 청조가, 지금은 대단히 놀란 얼굴로 눈만 깜빡이고 있다. 혹시 제가 무슨 실언이라도 한 것인가. 비렴은 신중을 기하지 않은 제 성격이 또 무슨 사고를 친 게 아닌가 걱정했지만, 돌아온 것은 예상 밖의 물음이었다.
“혹시 옥정 도련님한테 관심 있으세요?”
“…엥?”
“아니. 나무라는 것은 아니에요. 잘 어울리는 선남선녀라고 생각하니까요. 다만 비렴 아가씨가 연애에 관심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거든요.”
“아니, 잠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드물게도 크게 당황한 비렴은 두 손을 저으며 상대의 말을 끊었다.
“뭔가 착각 하는 것 같은데, 그런 거 아냐. 그냥 강하고 잘생겼다는 거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아, 네….”
“정말이라니까? 애초에, 내가 연애니 뭐니 할 처지도 아니고. 내 앞가림하기도 바빠.”
제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힘을 완전히 뜻하는 대로 다룰 수 있게 되는 것. 그 제일 기본적인 조건도 충족하지 못한 자신이 다른 것에 눈을 돌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제 자신에겐 더없이 엄격한 비렴은 속으로 그리 단언하고, 못미더워 하는 청조에게 끝없이 변명해나갔다.
“그리고 뭐랄까, 그렇게 참한 남자에겐 좀 더 그럴듯한 여자가 어울리지 않을까?”
“예??”
“아니. 나는 솔직히…. 원시천존 님 말대로 ‘왈가닥’이지 않나.”
“그거랑 이건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청조는 정색하고 반박했지만, 비렴은 허허 웃을 뿐 그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다.
여자는 얌전하고 정숙해야 한다는 것은 대단히 낡은 생각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로, 비렴은 늘 제가 한 성격 한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았었다. 성급하고, 말보다는 행동이 빠르고, 스승과는 달리 온화하거나 융통성이 있지도 않다. 그야말로 날카로운 창과도 같은 자신인데, 상대가 과연 관심을 가질까?
겨우 두 번 만난 사이에 어떻게 상대를 다 아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비렴은 그와 대련하며 날것 그대로의 상대를 확실하게 느꼈기에 저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대나무 같고 난초 같은 사람이었다. 몸짓에서 나오는 고아(高雅)함이, 시선에서 느껴지던 청아함이, 제 거친 성품과는 도무지 어울린다 생각되지 않는 사람이라서.
‘대련이라도 해주는 게 다행이지.’
다른 제자들 마냥 진저리 치며 내빼지 않는 게 어디인가. 끝까지 항변하는 청조의 말을 뒤로 한 비렴은 도망치듯이 궁 아래의 산길로 뛰어갔다.
❋
‘옥정 말이야, 요즘 조금 이상하지 않아?’ ‘이상하다고 할까, 굉장히 들뜬 것처럼 보이지?’ ‘선인면허 준비를 하느라 피곤할 텐데. 뭐가 그리 좋은지.’ ‘그거야 그 준비를 같이 해 주는 특별한 사람이 따로 있으니 그런 거 아냐?’ ‘아아, 그 여자 말이지. 서왕모 님 으뜸제자인.’
‘다 들리는데.’
아니, 저건 일부러 들으라고 하는 말인 것인가. 옥정은 제 뒤로 들려오는 동기들의 쑥덕거림에 한숨을 내쉬었다. 딱히 저 말들을 험담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다지 듣기 좋은 대화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었다.
“너희, 뭘 당사자 뒤에서 쑥덕거리고 있어? 소인배 같이 말이야. 그러니 인기가 없지.”
점잖은 옥정이 잠자코 있으니 동기들은 짓궂은 말은 멈추지 않는다. 그 꼴을 도저히 못 봐주겠던 적정자는 은근슬쩍 비꼬며 대화의 장을 해산시켰다. ‘쯧.’ 한 마디 대꾸도 않고 가버리는 동기들을 흘겨보던 그는 주변이 조용해진 후에야 뒤늦게 옥정에게 다가갔다.
“너도 한 소리 하지 그래?”
“됐어. 떠들게 내버려 둬.”
“하아. 넌 정말, 성격이 좋은 건지 너무 시원시원한 건지….”
다혈질에 감정이 앞서는 것도 꼴불견이지만, 옥정은 너무 진지하고 차분해서 문제다. 때로는 화도 내야지 속이 편한 법인데, 어떻게 자신처럼 비꼬는 말 한 마디도 못하는 걸까?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옥정을 바라보던 적정자는 다시 제 갈 길을 가려 했지만, 무언가 생각난 것이 있는지 우뚝 멈춰서 질문했다.
“그래서, 진전은 있어?”
“뭐?”
“아니. 그러니까…. 비렴이랑 말이지. 매일 만나서 수련하면서 친해졌을 거 아냐? 이제는 꽤 사이좋아졌겠지? 대련하다 잡담도 하고, 아냐?”
옥정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말에서 느낀 건 당치도 않는 시비였으니 무시할 수 있었지만, 적정자의 질문에서 느껴지는 것은 명백하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처음보다는 친근해졌지.”
“…그게 끝?”
“끝이야.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건지는 알겠지만, 비렴과 나는 아무 일도 없거든.”
상당히 냉정한 대답이다. 적정자는 딱 잘라 말하는 상대의 태도에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제가 ‘우리는 점점 수상한 관계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같은 종류의 대답을 원하고 물어온 건 맞지만, 보통 저렇게 까지 딱 잘라 말할 필요가 있을까? 부정하고 싶다면 좀 더 부드러운 말투를 쓸 수 있는 옥정이고, 아무리 불쾌한 질문이었다 해도 그는 쉽게 감정적이게 굴지도 않는데?
“혹시나 해서 묻는데, 싸우거나 한 건 아니지?”
“누가? 나랑 비렴이?”
“달리 누가 있겠어?”
“싸울 일 없어. 그리고 비렴은 굉장히 너그러워서 어지간한 일은 다 웃고 넘어가니까.”
말은 그리 하지만, 역시 표정이 썩 좋지 않아 보인다. 대체 옥정은 무엇이 문제여서 저리도 언짢아하는 걸까. 무언가 수상한 기운을 감지한 그는 아예 상대를 향해 돌아서서 코가 마주 닿을 정도로 바짝 다가섰다.
“그럼? 뭐가 문제야?”
“문제라니?”
“아니, 네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잖아? 내 질문이 기분 나빴던 거라면 미안하긴 한데.”
“아니, 이건 네 잘못이라기 보단….”
무심코 해명하려던 옥정은 중요한 순간 다시 입을 다물었다. 정말이지, 이렇게 까지 답답하게 굴면 오히려 오기가 생겨서라도 캐묻고 싶어진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마음을 진정시킨 적정자는, 아예 다른 사람은 듣기도 힘들도록 속삭이듯이 작은 소리로 옥정을 추궁해 나갔다.
“설마 차였냐?”
“…그건 또 무슨….”
“말 그대로야. 고백했다가 차여서 어색한 상황이냐고. 아니면 비렴이 먼저 고백했는데 네가 찼다던가.”
“아니. 잠깐. 너무 갔는데, 적정자.”
마치 큰일 날 소리라도 들은 사람처럼 옥정은 고개를 몇 번이고 좌우로 저었다.
“고백이라니, 그게 무슨, 아니, 대체 무슨….”
“뭘 그렇게 당황해? 누가 보면 원시천존 님이 ‘연애 하면 파문이다!’라고 말해놓은 줄 알겠네.”
“그건 아니지만, 비렴이랑 어떻게 그런.”
“흐음? 뭐야 그 말투는, 역시 비렴 같이 드센 타입은 부담스럽다던가?”
비렴은 누가 봐도 아름답다고 할 얼굴을 가졌어도, 성격은 그렇지 못하다. 드세고, 성급하고, 누구 하나가 뻗을 때 까지 승부를 하려고 드는 집요한 구석도 있는 탓에 그를 무서워하거나 어려워하는 남자들도 이 곤륜에는 꽤 있었지. 그렇기에 적정자는 옥정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일 거라고 짐작해 본 것이었다. 꽃이 아름답다 해도 줄기의 가시가 너무 날카로우면 피할 수밖에 없으니까, 아무리 좋은 무기라도 사용자가 다치면 놓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니까.
하지만 옥정의 대답은, 단번에 적정자의 추측이 엉터리임을 일깨워 주웠다.
“비렴은 늠름한 거지, 드센 게 아냐. 남자들 중에선 비렴보다 성품이 거친 녀석들도 한 가득 있는데 그런 평가는 부당하지.”
“…아, 그래…?”
“그리고…, 부담스럽다 하기 보다는, 뭐라고 해야 좋을까.”
‘하아.’ 한숨을 쉬며 잠깐 말을 끊은 옥정의 얼굴에, 희미하게 열기가 오른다. 다른 사람들은 눈치 챌 수 없었겠지만 적정자는 그걸 알 수 있었다. 표정을 감추기에는, 제가 너무 가까이 다가와 있었기에.
“비렴은 나와 교제하기엔 너무 아까운 상대니까.”
“아…?? 미안한데, 뭐라고??”
“비렴의 옆에 서기엔, 내가 초라하다고.”
“이런 맙소사,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어지간히도 어이가 없었던 걸까, 적정자는 반사적으로 버럭 소리쳤다가 급히 제 입을 막아버렸다. 아까 전 동기들을 쫓아냈으니 망정이지, 만약 누군가 있었다면 주목받기 딱 좋은 상황이었으리라. 자신의 돌발행동에 민망함을 느낀 그는 헛기침을 한 후, 다시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
“확실히 비렴이 미인이긴 한데, 너도 얼굴 하나는 끝내주잖아? 솔직히 우리들 중에선 네가 제일 미남이라고. 게다가 선인면허 준비를 할 정도로 실력도 괜찮고, 안 그래?”
“갑자기 그렇게 칭찬한다고 해도 말이지.”
“아니, 근데 진짜 이해가 안 간다고. 누구든 그런 미인이 ‘같이 대련하자’며 권해올 정도로 관심 가져 주면, 내 수준이 어쩌고저쩌고 하기 전에 얼씨구나 하고 꼬셔보려고 할 걸?”
“그건 네가 비렴을 몰라서 하는 말이야. 어쨌든,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그렇게만 알아둬.”
슬슬 비렴과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간다. 그리고 이런 불편한 추궁과 해명은 그만 두고 싶다. 여러모로 자리에 남을 이유가 없어진 옥정은 그렇게 어영부영 적정자를 뿌리치고 떠났고, 상대가 뭐라고 말하는 지 듣지 않기 위해 귀를 막아버렸다.
‘다들 비렴을 잘 몰라서 저러는 거야.’
적정자의 말이 자꾸 머릿속에서 맴돌지만 옥정의 의견은 변하지 않았다. 자신과 함께하기에 비렴은 너무 아까운 사람이다. 아니. 굳이 제가 아니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의 누구라도 비렴을 곁에 둘 수 없고, 그의 곁에 설 수도 없을 것이다. 옥정의 생각은 답지 않게 꽤 완고해서, 적정자의 그럴듯한 의견을 묵살시켜 버렸다.
‘비렴은, 누군가에게 메여있기에는.’
매일 검을 부딪치고 있기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기에 알 수 있다. 비렴은 언제나 높은 곳만을 바라보고 있는 야심가다. 조금 더 능숙하게, 조금 더 완벽하게. 지금 자신이 있는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충분하다’는 말로는 도무지 진정이 되질 않는. 앞만 보고 나아가는 전차 같은 사람.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하는 그가, 어찌 사사로운 것에 관심을 가지고 정을 돌리겠나.
‘더욱이, 연애 같은 것에 눈을 돌릴 사람도 아니고.’
아무리 친해도 벗과 연인은 같을 수 없다. 벗은 여럿일 수 있어도, 연인은 여럿이면 도리에 어긋나니까. 말하자면 연애란, 사랑이란, 원하든 원지 않던 상대를 독점하게 된다는 뜻이었다.
독점이라니. 비렴을? 대체 그 누가 그를 독점하겠는가. 아마 그의 스승인 서왕모 조차도 비렴을 독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딘가에 묶여있기엔, 그는 너무나도 큰 날개를 가지고 있기에. 너무나 많은 가지를 가진 나무이기에, 그 가지 가득 향기로운 꽃을 피우는 사람이기에, 결코 이 품안에 전부 담을 수 없는 여자이기에.
“오, 드디어 왔네.”
도망치듯이 자리를 떠난 그는 어느새 약속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자신을 반기는 목소리에 고개를 든 옥정은 허허벌판 위 우뚝 서있는 그림자를 보고 한탄했다.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목검을 쥐고 있는 새하얀 손에 담긴 결의가, 공기를 요동치게 하는 기백이, 제 안의 나약한 모든 것들을 꺾고 무너뜨려서.
“자, 오늘도 열심히 하자.”
“응.”
‘좋은 오후야’라는 시시한 인사도 건네지 못한 옥정은, 조심스럽게 대답하고 검을 고쳐 쥐었다.
❋
“드디어 내일이 시험이구나.”
“그러게,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간 것 같은걸.”
“그래도 너라면 잘 할 거야. 내가 보증 할 수 있어.”
“네가 보증해 주는 거라면 안심인걸, 비렴.”
그렇게 말하며 웃는 옥정의 미소가 퍽 다정하다. 비렴은 뻐근해진 손목을 매만지다가 상대의 눈부신 얼굴에 잠깐 숨을 삼키고, 하늘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이렇게 단 둘이서 수련을 한 지 몇 달이나 흘렀더라. 잘은 모르지만, 거의 1년 가까이 흐른 것 같다. 지금 제 나이들이 세 자릿수이며 앞으로 네 자릿수도 거뜬하게 살아갈 걸 생각하면 1년이란 시간은 짧다 못해 찰나라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요 최근의 몇 개월은 정말 쏜살같이 지나갔지.
‘정말 즐거웠는데.’
선인면허를 취득하게 된다면 이렇게 매일 만나 수행하는 생활도 끝나게 되는 거겠지. 뭐, 핑계거리를 만든다면 다시 못 만날 것도 없는 사이고, 뻔뻔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만 감수한다면 언제든 찾아가는 것도 가능하긴 하지만….
‘옥정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진 않단 말이지.’
그의 대쪽 같은 성미를 생각해보면, 도무지 실없이 찾아오는 손님을 반길 것 같지는 않다. 심지어 그 성미와는 반대로 자상한 면도 있어서, 상대를 반기지 않더라도 솔직하게 말하기 보다는 적당히 받아주고 넘길 것 같아서 미리 조심하고 싶은 게 비렴의 심정이었지.
“그럼, 내일 시험 후 만날까.”
“그래. 건투를 빌게, 옥정.”
“고마워, 너도….”
비렴에게 대꾸하던 옥정이 갑자기 놀란 얼굴로 입을 다문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상대의 행동에 저 자신도 조용해진 비렴은 뒤를 돌아본 후에야, 왜 상대가 그렇게나 놀랐는지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
“흠. 흠. 열심히 하고 있구나, 둘 다.”
마치 땅에서 솟아난 것처럼 갑자기 나타난 곤륜산의 교주는, 제 제자와 서왕모의 으뜸제자를 번갈아 보고 바닥에 끌릴 만큼 길게 길러 내린 수염을 쓸어내렸다.
‘대체 저분이 왜.’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눈으로 자신을 보는 제자 한 쌍이 퍽 귀엽다. 낮게 웃음을 흘리며 분위기를 푼 원시천존은 위엄 있게 뒷짐을 지고 말을 이었다.
“너희들이라면 내일 시험도 문제없겠지. 물론 선인면허를 딴다고 해도 제자를 받아야 진정한 선인이 되는 것이지만, 자격을 갖춘다는 건 중요하니까.”
“과찬이십니다, 원시천존 님.”
“과찬은 무슨. 흠흠.”
꾸벅 인사하는 옥정에게 손을 저은 원시천존은 여전히 놀란 눈으로 아무 말도 앉는 비렴을 보곤, 또 다시 헛기침을 했다.
“옥정, 모두에게 옥허궁으로 오라 전해주겠느냐? 소집 할 일이 생겨서.”
“네? 지금, 말입니까?”
“음. 부탁하마.”
“예….”
힐끔. 뒤돌아 가기 전 비렴을 보며 눈인사한 옥정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다가, 갑자기 바쁘게 뛰어가 버렸다. ‘으음.’ 비렴과 단 둘이 남자마자 무거운 앓는 소리를 낸 원시천존은 여전히 요지부동인 상대를 보다가 겨우 말을 붙여 왔다.
“네 스승께서는 최근 잘 있느냐?”
“네? …아, 예. 최근엔 따님과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저는 대부분 밖에서 수행을 하고 가다 보니 그리 되었습니다.”
“그런가. 서곤륜은 별다른 일 없고?”
“그렇습니다만….”
이런 형식치례의 대화는 영 맞지 않다. 비렴은 당장이라도 탈주하고 싶은 마음과 스승님 이름에 먹칠을 할 수 없다는 신념 사이에서 골머리를 싸매며 갈등하면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켰지만, 원시천존의 다음 질문에 정신이 번쩍 들고 말았다.
“각오는 되어 있는 게냐?”
“…각오요? 시험 말입니까?”
“아니. 너라면 충분히 합격하겠지. 내가 말하는 각오는, 물려받을 준비가 되었냐는 이야기야.”
“물려, 받는다고요? 무엇을….”
‘아아. 이런.’ 비렴의 반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실언을 한 것 같다. 원시천존은 잠깐 당황했지만, 지금 가장 당황스러운 것은 상대일 거라는 생각에 끝까지 대화를 이어가 주었다.
“너도 선인이 되면, 제자를 받고 서곤륜을 지탱하는 한 기둥이 될 것 아니냐. 특히 넌 그의 으뜸제자야. 그가 자리를 비우거나 하면, 네가 그를 대신해서 다른 여선들을….”
“스승님이 자리를 비울 일이 있습니까?”
“아니, 예를 든 것뿐이지 않느냐.”
“그리고 잠깐 자리를 비우는 동안 책임자가 되는 일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게 이렇게 비장하게 각오가 되어 있냐고 물을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그렇게 간이 작아 보입니까?”
감이 좋은 비렴은 상대의 수상한 낌새를 놓치지 않고 물어뜯어왔다. 아무리 지금 제 눈앞의 사람이 곤륜산맥의 최고 존엄이라 해도 상관없다. 버릇이 없다느니 건방지다느니 해도, 올곧게 앞만 바라보며 사는 비렴은 속고 살 성미가 되질 않았으니까.
‘으으으.’ 곤란하다는 듯 대답을 회피하던 원시천존은 갑자기 말을 돌려버렸다.
“옥정은 참 괜찮은 녀석이지?”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하십니까?”
“아니, 너희들 말이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니까.”
“어디가 잘 어울린다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만.”
냉정하게 부정한 비렴은 땀 때문에 젖은 머리를 아무렇게나 묶어 올렸다. 전에 청조에게서도 저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지. 대체 왜 다들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인가. 옥정은 제겐 너무 아까운 남자다. 자신같이 거친 칼이 닿으면 안 되는 비단이고,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 고대의 숲이며, 발을 담그는 것조차도 죄스러워 지는 맑은 호수다. 제게도 염치가 있는데, 어찌 그런 이를.
“옥정이 마음에 들지 않느냐?”
“그럴 리가요. 그렇게 올곧은 사람을 싫어할 이가 과연 있겠습니까?”
“그럼?”
“저는 제 분수를 잘 알고 있거든요. 그것뿐입니다. 그럼 전 이만, 스승님이 기다릴 것 같으니 먼저 가보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대화를 먼저 회피한 것은 상대방이었다. 비렴은 아까 전 제 스승에 대해 나눈 이야기를 곱씹으며 저 멀리서 자신을 기다리던 청조에게 가버렸다.
얼른 돌아가서 스승님을 뵈어야 한다. 원시천존 님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제겐 물을 권리가 있다. 자신은 그의 제자니까. 바보같이 무지한 채로 있을 순 없으니까.
“스승님!”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채 궁으로 돌아온 비렴은 곧바로 서왕모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오늘 용길공주는 외출 한 것일까. 혼자서 두루마기에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던 그는 불안해 보이는 비렴의 얼굴을 보고는 붓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 있느냐, 비렴아?”
“잠깐,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괜찮을까요?”
“물론이지. 이리 오렴.”
제 코앞의 자리를 한 손으로 두드린 서왕모는 잽싸게 다가와 정좌하는 제자를 두 품안에 품어주었다. 부드러운 온기, 희미한 도화(桃花)의 향기, 요동치는 마음을 순식간에 진정시켜주는 스승의 기운에 단숨에 얌전해진 비렴은 슬쩍 눈을 감았다.
“…스승님.”
“그래. 무슨 일이니?”
늘 생각하지만, 그는 가끔 제 스승이 아니라 어머니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생모의 품은 이제 더 이상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그 품도 지금 제가 안겨있는 이 품처럼 따뜻하지 않았을까.
숨도 심장박동도 완전히 가라앉은 비렴은 눈을 뜨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어딘가로 떠나실 생각이신가요?”
“오…, 갑자기 그건 왜?”
“그냥. 그냥 묻는 겁니다.”
“흐음.”
‘원시천존이 쓸데없는 말을 했나 보구나.’ 단번에 바깥일을 파악한 서왕모는 품 안의 등을 토닥였다.
“지금 당장은 아니란다.”
“그러면, 언젠가는 떠나시는 건가요?”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 너도 독립해야 할 것 아니니. 어미란 그런 것이란다. 자식을 사랑하니 떠나야 할 때가 오는 법이란다.”
“저는 못난 제자일 뿐 딸이 아닙니다.”
“아니야. 비렴아. 너는 아직 모르겠지만, 제자란 자식이나 다름없는 존재란다. 너도 누군가의 스승이 된다면, 나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거란다.”
과연 그런 날이 올까. 자신이 선인이 되어, 제자를 들이고 스승이 되는 날이 오긴 할까. 아직도 스스로를 제대로 제어할 수도 없는 자신이, 제 스승처럼 훌륭한 스승이 될 수 있을까.
‘옥정이라면.’
그라면, 스승 노릇도 충분히 잘 해낼 텐데.
너무 눈이 부셔 오히려 희미하게 느껴지는 옥정의 얼굴을 떠올리며, 비렴은 다시 눈을 감았다.
“조금 자두렴. 내일 아침 전까진 깨워줄 테니.”
‘네. 스승님.’ 입모양만으로 답한 그는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
비렴은 꿈을 꾸었다.
수면도 바닥도 보이지 않는 깊은 바다 속. 무언가에 고정된 것처럼 가라앉지도 떠오르지도 않는 몸은 전혀 고통스럽지 않다.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친모의 체내 속 세포가 된 것처럼 편안하고 안락한 수중 어딘가. 호흡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 채 두 눈을 깜빡이던 그는 머리 위의 희미한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이내 팔을 내려버렸다.
온 세상이 푸르다.
푸르고, 어둡고, 차갑지만 온화하고. 위대할 정도로 아늑한 고독이 자신을 가득 감싸 안아서. 굳이 수면 밖의 양지 같은 것은 찾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 안도감을 준다.
나약하기도 하지. 그러니까 제 힘도 제대로 다루질 못하고. 망아지 같은 것. 스승님에게 죄송하지도 않은 건지.
간단히 물속을 선택한 자신을 자책한 비렴은 지겹다는 듯 눈을 감았다. 적어도 꿈속에서 만큼은 바깥의 고민을 끌고 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타고난 기질을 다스리지도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것도, 최근 들어 이상한 스승의 행동도,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었던 원시천존의 잔소리도. 지금 만큼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휘이―.
그때였다. 생각을 비우고 물결에 모든 것을 맡기려던 그는, 멀리서 들려오는 기묘한 소리에 눈을 떴다.
처음 들어보는 높고 긴 소음은, 아무리 들어도 포유류의 울음소리 같다. 하지만, 이 아무것도 없는 바다에 대체 어떤 짐승이 있단 말인가.
아주 어릴 때 곤륜으로 와 바다를 제대로 본 적도 없고 그곳에 무엇이 사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비렴은, 이 모든 것이 제 꿈속에서 일어나는 환청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물살을 가르고 다가오는 그림자는 너무나도 선명해서.
아.
소리 없는 탄식과 함께. 검푸른 수중에 기포들이 피어오른다.
비렴은 낯선 수중생물과 눈이 마주치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높은 소리로 울고 새까만 눈동자를 깜빡이는. 그건 거대한 돌고래였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바다를 빛바래게 만들 정도로 푸르고, 비파나 칠현금마냥 아름답게 우는 그것은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비렴에게 고개를 내밀더니, 불룩 튀어나온 주둥이로 입술을 툭 쳤다.
아아. 아름답기도 하지. 이름도 모르는 눈앞의 생명체를 감히 아름답다 표현한 비렴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무의식적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스스로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이의 이름을, 자신도 모르게.
휘이.
새파란 돌고래는 그 부름에 다정하게 울며 답했다.
비렴은 제게 입맞춰준 돌고래의 얼굴을 쓰다듬고는, 멀어가는 귀와 눈을 닫았다.
❋
원시천존이 ‘너라면 충분히 합격할 것이다’라고 말했던 건 진심이었던 걸까. 비렴은 피로에 절은 얼굴로 옥허궁을 나오자마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청조에게 담담하게 고했다.
“합격 했어.”
“정말인가요, 아가씨?!”
“응. 하아…. 진짜 합격하다니, 이게 무슨 일이지.”
보통은 뛸 듯이 기뻐해도 모자란 판에, 저렇게 한숨을 내쉬다니. 대체 그는 뭐가 문제라 저러는 걸까. 제자를 들이는 게 부담스러운 거라면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그런 문제는 일단 제쳐두고 순수하게 기뻐할 시간을 가져도 좋을 텐데.
제 등에 올라타는 비렴을 측은한 눈으로 보던 청조는 하늘로 날아오르려다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다급한 발소리를 듣고 날개를 접었다. 아아. 이 걸음은 분명.
“비렴.”
뛰는 것이나 다름없는 바쁜 걸음으로 다가온 옥정은 시큰둥한 비렴의 표정에 어깨를 움츠렸다. ‘불합격 했구나.’ 필시 표정만 보고 그리 판단한 것이었겠지만…, 비렴은 그가 더 이상 오해하지 않도록 제대로 상황을 알려주었다.
“나는 합격했어, 그러니 그리 놀라지 않아도 돼.”
“아. 합격 한 거였어?”
“응. 운 좋게도 말이지.”
“운이라니. 그건 다 실력이야.”
그것 참 빈말이라도 듣기 좋은 대답이다. 온화한 상대의 목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은 비렴은 살포시 청조의 등에서 내려와 옥정과 마주보고 섰다.
“너도 합격했지? 원시천존 님께 미리 들었어.”
“그렇구나. 응. 합격했어.”
“축하해. 나랑 대련하느라 고생했는데, 떨어지지 않아서 다행이네.”
“고생…? 아냐, 전혀 그렇지 않아. 오히려 네가 있었기에 더 힘낼 수 있었는걸.”
‘우와.’ 청조는 거의 경악하는 표정으로 감탄했다. 네가 있었기에. 그런 말을 직구로 날리다니, 이 정도면 충분히 설레도 좋을 상황인데, 어떻게 비렴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수 있는 걸까.
상대를 이해 할 수 없어 혼란에 빠진 청조의 상태를 알 리 없는 비렴은, 그의 말에 코 밑을 문지르며 답했다.
“이쪽이야 말로 고마워. 너 아니면 대련할 상대도 없었는데, 득은 내가 더 봤지 뭐.”
“그렇게 생각하지 마. 합격 축하해. 비렴.”
“응. 고마워.”
간결하게 감사의 인사를 한 비렴은 다시 청조의 등에 오르더니, 흘리듯 말을 덧붙였다.
“오늘 꿈에 네가 나왔는데, 그게 길몽이었나 보네. 이렇게 합격하고.”
“…어?”
“아냐. 아무것도.”
‘가자. 청조.’ ‘아니, 하지만 아가씨. 정말 가요?’ ‘물리적으로 명령해야 알아들을 만큼 아둔한 영수였어?’ ‘아뇨, 가죠! 갑시다!’
만담 같은 대화를 주고받은 둘은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린다. 그야말로 도주하는 것 같은 퇴장이었지만, 옥정은 비렴이 흘린 그 말에 발목이 잡혀 멀어져 가는 비렴을 잡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꿈에?’
왜. 어떻게. 무슨 상황에서? 어째서 그의 꿈에, 제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인가. 그리고 그걸 길몽이라고 말해주다니. 도대체 어떤 꿈이었기에.
옥정은 마른세수를 하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자신은 궁금해서 숨이 막힐 지경인데, 이렇게 자세히 말해주지도 않고 가버리다니. 정말이지 얄궂은 사람이지만, 그 또한 비렴답다 느껴져 헛웃음이 나온다.
‘우연일까.’
하지만 옥정이 이토록 당황하는 것은, 상대의 꿈에 자신이 나온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정말로 놀란 것은, 오늘 새벽 그의 꿈에도 비렴이 찾아와 주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비렴이라고 할 순 없나. 하지만, 그건….’
탁 트인 초원. 새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나비들이 날아다니는 평화로운 공간. 하늘과 땅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그 곳에 우뚝 서있었던 것은, 온 가지가 불타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한가득 꽃을 피웠던 홍매화 한 그루였다.
그래. 그건 매화나무였다. 매화나무였지만.
‘비렴.’
자신은 분명. 그 홍매화를 비렴이라고 불렀었다.
그리고 그 부름에 매화나무는…, 온 가지를 뻗어, 자신을 안아주었지.
“…하아.”
제 꿈은 이리 부끄러운 내용이었는데, 비렴의 꿈은 어땠을까. 꿈속의 자신은 어떤 말을 했을까. 그가 생각하는 자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선인이 된 기쁨에 젖어있기도 전에 고뇌에 빠지고 만 옥정은 한참동안 마른세수만 하며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